주자학적 사유양식과 그 해체
(원저자 강조 생략, 붉은 색은 모두 인용자 강조)
1.
주자학은 저우 리엔시(周濂溪)에 의해 개척되고 츠엉쯔 형제[츠엉 밍따오(程明道)․츠엉 이츠우안(程伊川)]에 의해 발전된 송학의 흐름을 이어 받아 이를 집대성한 것이다.1) 한(漢)․탕(唐)의 유학에 비해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특색은 첫째, 경서의 언어학적 연구로 시종일관 했던 훈고학(訓詁學)을 배척하고 이른바 도통(道統)의 이음을 주장하고, 종래의 오경(五經)[『易』․『書』․『詩』『禮樂』․『春秋』]중심주의에서 대해서 사서(四書)[『論語』․『孟子』․『大學』․『中庸』]에 의해 콩쯔(孔子)․멍쯔(孟子)․쩡쯔(曾子)․쯔쓰(子思)의 근본정신을 파악하는 의리(義理)의 학문이라는 점, 둘째 종래 유교의 사상적 약점이었던 이론성의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형이상학을 수립한 점에 있다. 그런데 이런 두 모멘트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바로 거기서 작게는 일상생활의 수양방법에서 크게는 세계실체론에 이르는 방대한 사상체계가 완성되었다. 그것은 실로 본래적으로 실용적인 성격을 가진 유교라는 사상이 가질 수 있었던 일찍이 그런 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 앞으로도 없을(양명학이라 하더라도 체계의 광범위함에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거대한 이론체계였다. 거기에는 하나가 무너지면 금세 모든 구성이 무너져버릴 정도의 치밀한 정합성<整序性>이 있었다. 이런 정합성 자체가 주자학적 사유방법의 특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는 점은 점차 밝혀지게 될 것이다. 토쿠가와 시대의 주자학자들이 코가쿠하(古學派)는 물론이고 양명학파에 비해서도 이론적 창조성이 가장 뒤떨어졌던 이유는 반드시 그들의 무능함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한편으로는 주자학이 갖는 이런 폐쇄성(Geschlossenheit, the closed character)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방대한 주자학 체계의 사상적 구조를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여기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지은이가 할 일도 아니며 또 이 글의 직접적인 과제도 아니다. 다만 주자학적 사유방식이 유교사상의 내부에서 어떻게 붕괴해가는가를 알기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주자학체계의 간략한 스케치를 그 형이상학(우주론), 인성론, 실천윤리라는 순서대로 서술하기로 한다.2)
주자학의 형이상학의 기초가 된 것은 저우 리엔시의 「太極圖說」(Diagram of the Supreme Ultimate)이다. 그것은 『易』(the Book of Changes)의 「繫辭傳」 上에 “역에 태극(太極, the Supreme Ultimate)이 있어, 그것이 양의(兩儀, two forms)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 four emblems)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 eight trigrams)를 낳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는 구절에 기초를 두고, 오행설과 연결시켜 우주만물의 생성을 설명한 것이다. 그 취지를 요약하면, “자연과 인간의 궁극적인 근원인 태극으로부터 음(陰, yin)․양(陽, yang)의 두 기<二氣>가 생겨나고, 그 변화와 조합에 의해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오행이 차례대로 발생하고, 네 계절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또 음양의 두 기는 남성<男, male>과 여성<女, female>으로 서로 교감하여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데, 그 가운데 사람이 가장 훌륭한 기(氣)를 받았기 때문에 그 신령스러움이 만물 가운데 가장 뛰어나며 그 중에서도 성인은 하늘과 땅 그리고 스스로 그러함<自然>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合一> 있다. 때문에 인간들의 도덕은 연마하여 이런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데에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주의 법칙<理法>과 인간도덕이 하나의 원리로 꿰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天人合一>는 사상이며, 많건적건 간에 중국사상을 관통하고 있으며, 특히 송학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이런 사고방식은 「太極圖說」에 가장 압축적인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쯔(朱子)는 여기서 우주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 되어 있는 태극을, 추엉쯔(程子)의 견해를 받아들여 “태극은 곧 천지만물의 리”(太極是天地萬物之理, the Supreme Ultimate is the principle of all Heaven and Earth)(『朱子語類』 卷1)라고 규정함으로써, 「太極圖說」이 여전히 지니고 있던 발출론(發出論, Emanationslehre)적인 색채(the emanatory tendencies)를 희석시키고 일종의 합리주의 철학을 만들어냈다.3) 태극이란 음양오행의 기(氣, Ether)로 하여금 기이게 해주는 소이(所以)[=리(理, Principle)]이며, 따라서 천지만물을 넘어서있는<超越> 궁극적인 근원이다. “아직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도 반드시 리가 있었다. 리가 있음으로 해서 곧 천지가 있고, 만약 리가 없으면 천지도 없다.”(위와 같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리는 기와 함께 개개의 사물에 내재(內在)하여 만물의 성(性)이 된다. 이처럼 주자학의 리는 개개의 만물에 내재하면서도 만물을 넘어서있는 일원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있다. 때문에 주쯔의 철학은 혹 리일원론(理一元論, monistic)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 dualistic)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는 다원론(pluralistic)이라 하는 등 구구하게 해석되어 왔다. “합해서 이를 말한다면 만물의 근원은 바로 태극이다. 나누어서 이를 말한다면 하나하나의 사물 모두 각각 태극을 갖추고 있다”(「太極圖說解」)는 식으로, 주자학에는 원래 그런 양자택일(Entweder-oder, either-or)적인 범주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리는 “리와 기는 (결코) 두 개의 사물”<二物>이라든가 “그렇지만 두 개의 사물이 각각 하나의 사물<一物>임을 해치지 않는다”는 식으로(『朱子文集』 卷4) 기와 함께 “사물”<物>로 불리고 있어서 실체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동시에 단순히 기의 “그러한 까닭”<所以然>의 근거가 되어 있다. 이점에서도 주자학을 너무나 근대적으로, 예를 들면 이노우에 테쯔지로오(井上哲次郞, 1855~1944)처럼 독일 이상주의 철학과 대비<類比>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으며, 오히려 초월성과 내재성, 실체성과 원리성이 즉자적으로(an sich) 무매개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쯔 철학의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천지만물은 모두 “형이상”(形而上)의 리(metaphysical Principle)와 “형이하”(形二下)의 기(physical Ether)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 리는 사물의 본성을 결정하고 기는 사물의 형태를 결정한다고 생각된다. 만물은 리<一理>를 근원으로 한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평등하지만(만물의 본성은 같다…「太極圖說解」), 기의 작용에 의해서 차별있는 모습이 생겨난다. 그래서 인간도 다른 자연물도 마찬가지로 리가 관통하면서도, 인간이 가장 뛰어난 기를 품수받았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靈長)이 된다. 그런데 이런 평등과 차별의 관계는 인간 일반 대(對) 자연적인 사물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간에도 존재한다. 이처럼 주자학의 우주론은 그대로 인성론(人性論)으로 이어진다.
태극=리는 사람에 깃들어 성(性)이 된다. 이것이 “본연의 성”<本然之性, Original Nature or innate character>으로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이를 갖추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현명하고 어리석음<聖賢暗愚>의 차별이 생기는 것은 기의 작용에 근거한 것이다. 기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기질의 성”<氣質之性>이 된다. 기질의 성에는 밝고 맑음과 어둡고 탁함<淸明混濁>의 차이가 있다. 성인은 그 품수받은 기질이 완전히 밝고 투명해서 본연의 성이 조금의 남김도 없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많건적건 간에 어둡고 탁한 기질의 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온갖 욕망<慾望>이 다 생겨난다. 이런 욕망이 본연의 성을 뒤덮어 그것을 가리는데서 인간의 악(惡)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성의 선은 악보다 근원적이다. 확실히 리에 근거한 본연의 성─절대선(絶對善, absolute good)─은 기에 근거한 기질의 성─상대적인 선악(relative good and evil)─보다도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이라도 기질의 성의 어둡고 탁함을 씻어내면 본연의 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4) 그러므로 다음 문제는 어떻게 기질을 개선할 것인가 하는 것이며, 바로 여기서부터 주자학의 실천윤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주자학이 실천윤리(實踐倫理)에 있어서 특히 중시하는 경전은 『中庸』(the Doctrine of the Mean)과 『大學』(the Great Learning)이다. 주쯔는 『中庸』의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학문에 의거한다”<君子導德性而道問學, a gentle man, chun tzu, prizes virtuous nature and pursues the path of inquiry and learning>는 말에 따라 ‘1)덕성을 높일 것 2)학문에 의거할 것’ 두가지로써 인간의 욕망<人欲>을 제거하고 하늘의 이치<天理>로 돌아가는 수양법의 대강(大綱)으로 삼았다. 1)은 좁은 의미의 수양이며 2)는 지적인 탐구이다. 1)을 주관적인 방법 2)를 객관적인 방법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주과적인 방법으로 주장된 것이 이른바 “존심”(存心)이며, “마음을 지키고 공경함을 잃지 않는다”<存心持敬>든가 “고요함을 지키며 공경에 머문다”<守靜居敬>든가 하는 말들은 주자학의 가장 특징적인 실천적 표어가 되어 있다. “존심이란 마음이 어떤 사물에 집착함을 떨쳐버리는 것이다”(preserving the heart does not mean that a person's heart is preserved by any particular thing)(『朱子語類』)라고 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주관적인 내성(內省)이며, 이에 의거하여 나의 마음<內心>인 본연의 성이 직관적으로 통찰하여 “하늘의 이치가 언제나 밝아서 자연히 인간의 욕망이 소멸되는”(위와 같음) 경지에 이르게 된다. 두 번째의 이른바 객관적인 방법으로 내세워진 것이 『大學』에서 말하는 “사물에 나아가 그 앎을 다한다”<格物致知, the extension of knowledge through the investigation of things>는 것이다. 원래 『大學』은 『中庸』과 더불어 『禮記』(Book of Rites)속의 한 편으로 묻혀져 있던 것을 주쯔가 끄집어내어 “처음 배우는 사람이 덕에 들어서는 문”<初學入德之門>이라 하여 유학 입문서의 제일로 꼽았으며, 그 주해(註解)작업에 삶을 다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을 정도로 중시했던 경전인데, 특히 사물에 나아가 그 앎을 다한다<格物致知>는 부분은 주쯔가 전(傳)을 새로이 보완한 조목으로 유명하다. 우리들은 앞에서 주자학의 “리”가 만물(萬物)의 근원<統禮>으로서 초월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동시에 개개의 만물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 리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본연의) 성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사물에 나아가 하나하나 그 리를 궁구하는 것은 동시에 그만큼 내 마음인 본연의 성을 밝게 하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리를 궁구하는 것<窮理>에 “힘쓰기를 오래해서 하루 아침에 넓고 훤하게 관통하게 되면, 모든 사물의 안과 밖, 정밀함과 거침이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모든 체와 큰 쓰임이 밝지 않음이 없다”(至於用力之久, 而一但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는 데에 이르게 된다(「大學補傳」). 이것이 사물에 나아가 그 앎을 다한다는 것이다. “고요함을 지키며 공경에 머문다”<守靜居敬>는 것이 오로지 주체의 자기반성에 의해 성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임에 대해서 “앎을 다하고 사물에 이른다”<致知格物>는 것은 객체를 매개로 하여 개념적으로 (마지막에는 어느날 아침 갑자기 “넓고 훤하게”라는 식으로 뛰어오르지만(ㄲㄲ-인용자)) 주체의 리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존심(存心, preserving the heart)과 궁리(窮理, investigating the Principle), 주관적인 방법과 객관적인 방법에 의해 안으로는 인간의 욕망을 모두 없애 본연의 성으로 돌아가고 밖으로는 세계의 법칙<法則>과 하나가 된다면<合一> 그 사람은 성인이 된다. 이것이 도덕적 정진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개인의 이런 도덕적 정진이 또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전제조건이다. “사물에 이른 후에야 앎이 지극해지고, 앎이 지극해진 후에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진 후에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야 그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후에야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하게 된 후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야 천하가 태평해진다. 천자로부터 일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몸을 닦음<修身>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 끝이 다스려지는 일은 없다”(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는 『大學』 첫머리의 말은 주쯔 철학 전체 체계의 귀결점이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위에서 그저 윤곽 정도로 개괄적으로 살펴본 주자철학의 체계적 구성으로부터 어떠한 특성을 읽어낼 수 있을까.5) 이 점에서 먼저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주쯔 철학의 근본개념을 이루고 있는 “리”의 성격이다. 그것은 사물에 내재하면서 그 움직임과 머뭄, 변하고 합해짐<動靜變合>의 “원리”를 이룬다는 의미에서는 자연법칙이지만, 본연의 성으로서 인간에 내재하는 것으로 될 때는 오히려 인간 행위가 바로 따라야 할 규범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자학의 리는 사물의 이치<物理>[자연의 법칙/옮긴이]임과 동시에 인간의 도리(道理)[인간의 도덕점 규범/옮긴이]이며, 스스로 그러함<自然>임과 동시에 마땅히 그러해야 함<當然>이다. 여기서 자연법칙은 도덕규범과 이어져 있다. 이런 연속성에 대해서는 항(項)을 바꾸어 보다 자세하게 말하겠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 연속이 대등한 연속이 아니라 종속적인 그것이라는 점이다. 사물의 이치는 인간의 도리에, 자연법칙은 도덕규범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으며, 그 대등함이 인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일반적인 철학체계의 순서에 따라서 주자학의 인성론이나 실천도덕론을 형이상학의 기초위에 서술해왔는데, 아무리해도 그런 형이상학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제 1철학”의 영예를 부여할 수가 없다. 오히려 주자학에 있어서 우주론 내지 존재론은 인성론의 “반사”(反射)적인 지위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다. 저우 리엔시의 「太極圖說」은 발출론(發出論, Emanationslehre)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존재론으로부터 인성론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비해서, 주쯔는 「太極圖說」의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고, 움직이는 것이 극에 이르면 고요하게 된다. 고요해서 음을 낳고, 고요한 것이 극에 이르게 되면 다시 움직이게 된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이 서로 그 근원이 되어, 음․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서게 된다”(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는 최초의 우주론 항목에 대한 주해(注解)에서 “태극의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 것 이것은 하늘의 명이 흐르는 것이다. 이른바 ‘한번은 음하고 한번은 양하는 것 이것은 길<道>’이라 한 것을 가리킨다. 성(誠)은 성인의 근본, 사물의 시작과 끝으로서 명<命>의 길<道>이다. 그 움직이는 것은 성이 통하는 것이다. 이것을 잇는 것은 선(善)하여, 만물의 바탕이 되어 시작하는 바의 것이다. 그 고요함은 성으로 되돌아가는 것<復>이다. 이것을 이루는 것은 성(性), 만물이 각각 그 성(性)과 명(命)을 바로 하는 것이다”(太極之有動靜, 是天命之流行也。 所謂一陰一兩之謂道。 誠者, 聖人之本, 物之終始, 而命之道也。 其動也, 誠之通也, 繼之者善, 萬物之所資以始也; 其靜也, 誠之復也, 成之者性, 萬物各正其性命也)라고 하여 일찍이 “성”(誠)이란 계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성(誠)이란 진실되고 망령됨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늘의 이치의 본래 그러함이다”(誠者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中庸章句」)라고 한 이상, 태극[리]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誠)이라는 본래 윤리적인 범주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만이 도덕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 역시 도덕에 종속되게 된다. 일반적으로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는 다양한 역사적 발전을 이성적인 규준(規準)으로 초월적으로 판단하게 되곤 해서 이따금 역사적 개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주자학적 “합리주의”(rationalism)에 있어서는 그 규준인 “리”가 도덕성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 역사관은 주쯔의 『通鑑綱目』(Outline and digest of the general mirror)에 전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매우 특징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거기서는 역사는 무엇보다도 교훈(a moral lesson)이며 거울(mirror)이어서 “이름과 직분을 바로 하기”<正名分, maintaining proper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of different statuses>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규준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적 현실의 독자적인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역사관이 소라이가쿠(徂徠學)에 의해서 그리고 나아가 노리나가가쿠(宣長學)에 의해서 어떻게 근본적인 비판을 받게 되는가 하는 것은 뒤에서 다루게 될 과제이다. 여기서는 다만 자연, 역사, 문화 모든 것들이 도덕적 지상명령 아래에 놓여져 있다는 점, 이것이 바로 주자학의 “합리주의” 내지 “주지주의”(主知主義, intellectualism)의 기본적인 성격이라는 점만 지적해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도학(道學)적 제약을 염두에 둘 때,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어째서 소라이가쿠 내지 노리나가가쿠에 있어서 비합리주의(非合理主義)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얼핏 보면 사상적인 역전(逆轉)처럼 보이는 “합리주의”로부터 “비합리주의”(nonrationalism)에로의 진전이 실은 근대적 합리주의의 성립을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기반이었던 까닭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도덕성의 우위에서 불구하고 인간의 도리(道理)는 동시에 사물의 이치<物理>라는 점에 의해서, 바꾸어 말한다면 윤리가 자연과 이어져 있음으로 해서 주자학의 인성론은 당위적=이상주의적 구성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는 자연주의적인 낙관주의(a naturalistic optimism)가 지배하게 된다. 본연의 성은 성인에게도 보통사람에게도 똑같이 갖추어져 있으나 어둡고 탁한 기품(氣稟)이 그것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악이 생긴다. 그리고 가리고 있는 것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착한 본성<善性>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유방식은 덕행(德行)의 목표를 초월적인 이념으로 하지 않고서 이를 인간성에 완전히 내재시키는 한 틀림없는 일종의 낙관주의(Optimism)이다. “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도 그것을 나타낸 것이며, “굳게 믿고 힘써 행하면 천하의 이치<理>가 지극히 어렵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를 수 있다”(「玉山講義」)는 확신도 거기서부터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낙관주의는 동시에 준엄한 엄격주의(rigorism)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다만 여기서는 실현되어야 할 규범이 자연[本然]으로 되어 있으며, 거꾸로 보통 인간의 감성적 경험이나 정감은 필연적으로 선악이 서로 섞여 있는 기질의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하늘의 이치”<天理>는 구체적·실천적으로는 모든 자연적 기초를 잃어버리고 절대적 당위로서 “인간의 욕망”<人欲>에 대립하는 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주의적인 낙관주의와 극기(克己)적인 엄격주의가 한편으로는 추상적인 이론구성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귀결로서 주자학 인성론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이는 얼마 후에 전개되는 주자학적 사유방식의 분해과정에서 두 개의 방향으로 분열해가게 된다. 하나는 유교의 규범주의를 자연주의적 제약으로부터 순화(純化)시키는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거꾸로 “인간의 욕망”의 자연성을 용인하려는 방향이다. 그 구체적인 양상 역시 뒤에서 살펴보게 되는데, 거기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인성론에 있어서 낙관주의적 구성은 이처럼 규범이 자연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연속적 사유라는 것 역시 주쯔 철학이 갖는 하나의 중요한 특색이다. 우리가 우주론에서 본 “리”의 초월즉내재(超越卽內在), 실체즉원리(實體卽原理)의 관계[Principle, li, unites transcendence and immanence, substance and principle] 역시 이런 연속적 사유의 표현이다. 하늘의 이치<天理>는 인간의 본성<人性>과, 기(氣)는 인간의 욕망<人欲>과, 법칙은 규범과, 사물은<物>은 인간과, 사람은 성인과, 앎<知>[格物窮理]은 덕(德)과, 덕[修身齊家]은 정치[治國平天下]와 모두 직선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연쇄가 앞에서 말한 도덕성의 우위[리=성(誠)] 하에 일사불란한 배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6) 그런 의미에서 낙관주의는 인성론만이 아니라 주자학 전체의 이른바 체계적인 특성에 다름 아니다. 이런 낙관주의가 유지되기 어렵게 되면,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연속은 끊어지게 된다. 거기에 보다 근대적인, 헤겔이 말하는 “분열된 의식”(divided consciousness)이 다가서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자학 체계를 장식하는 성격으로서 정적(靜的)=관조적(觀照的)인 경향(the tendency towards quiescence and meditation)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저우쯔(周子)의 「太極圖說」에서 움직임<動>은 양(陽)에 고요함<靜>은 음(陰)에 속하는 것이라 하면서, 그런 동정(動靜)을 넘어선 절대적인 존재로서 세워진 태극에는 역시 절대정(絶對靜)의 색채가 농후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써 이를 정하고, 그리고 고요함<靜>[욕심이 없기 때문에 고요함]을 주로 하여 사람의 극<人極>을 세운다”고 한 것이다. 송학(宋學)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정적(靜的)인 성격은 주자학에서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太極圖說」에 대한 주쯔의 해설<朱子解>을 보더라도 “이것은 성인의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을 온전히 하여, 언제나 이를 고요함에 근본을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此言聖人全動靜之德, 而常本之於靜也)라고 했으며, 또 “고요함이라는 것은 성(性)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서 성(性)의 참된 것<眞>이다. 진실로 이 마음이 조용하고 욕심이 없어서 고요하지 않다면, 무엇을 가지고 사물의 변화에 응하며 천하의 움직임을 하나로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성인은… 그 움직임에 있어서 반드시 고요함을 중시한다”(然靜者誠之復, 而誠之眞也。 苟非此心寂然無欲而靜, 則又何以酬酌事物之變, 而一天下之動哉! 故聖人, 而其動也必主乎靜)고 하여 고요함의 가치를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자학의 인성론 구조로부터 당연히 도출되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본연의 성은 조용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寂然不動>이라 하며 모든 마음의 움직임은 이미 기(氣)의 제약을 받은 정(情)이라 보기 때문에, 인(인)·의(의)·예(예)·지(지)는 선험적인(a priori) 것으로서 성(性)에 속하지만 이미 발한<已發>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단서<四端>에 이르게 되면 이미 성(性) 그 자체가 아니라 “정”(情)에 속하게 하며, 따라서 인(仁)은 사랑<愛> 자체와 구별되는 “사랑의 이치(理)”라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연의 성의 철저한 정적(靜的)인 성격을 염두에 두어야만 비로소 주자학의 실천도덕에 있어서 “고요함을 지키며 공경함을 갖춘다”<守靜持敬> “공경함에 머물며 고요하게 지낸다”<居敬靜坐>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이와 더불어 거론되는 “사물에 이르러 그 이치를 궁구한다”<格物窮理>는 것에 아무리 실천적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뒤에서 보듯이 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와 같은 실천도덕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여전히 관조적인 색채가 남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에 대한 고요함의 우위, 행동성(行動性)에 대한 관조성(觀照腥)의 우위7)도 궁극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연속적인 사유방식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주자학 체계에 있어서의 낙관주의의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방대한 주자학 체계를 증류(蒸溜)시켜서 도학적 합리주의, 엄격주의(rigorism)를 내포한 자연주의, 연속적 사유, 정적(靜的)=관조적 경향이라는 특성들을 찾아내고, 그런 특성들을 하나로 꿰뚫고 있는 성격으로 낙관주의를 집어냈다. 그런데 이런 특성이야말로 주자학이 근세 초기 사상계에서 거두었던 독점적인 지위를 무엇보다도 잘 설명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주자학의 성격으로 집어낸 것과 같은 낙관주의는 안정된 사회에 부응하는 정신 자세(Geisteshaltung, a mental attitude)이며, 또 거꾸로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질풍(疾風)과 노도(怒濤)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는 센고쿠(戰國) 시대의 상황─온갖 무질서와 혼란, 그러나 동시에 모든 생활분야에 있어서 활동과 발전이 함께 하는─을 완전히 바꾸어 점차 고정화된 질서와 사람들이 마음 위에 성립한 근세봉건사회에 있어서 그런 정적(靜的)인 낙관주의는 보편적인 정신적 자세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토쿠가와(德川) 바쿠한세이(幕藩制) 사회가 “지속의 왕국”(주자학 질서가 19세기까지 지속된 중국을 가리킴-인용자)이 아닌 한, 거기서의 국민생활이 영원토록 정지된=고정적인 것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낙관주의의 보편성도 얼마 후에는 한계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점점 주자학적인 연속적 사유 위에 안주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늘의 이치<天理>는 과연 “본연의” 성인가? 인간의 욕망은 애초부터 모두 없앨 수 있는가, 또 모두 없애야 할 것인가? 리는 모든 사물을 규정할 정도로 그처럼 강력한 것인가? 이치를 탐구하는 것<窮理>이 순수하게 도덕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과연 누구나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修身齊家>이 그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治國平天下>의 기초가 될 수 있을까? ……하나의 의혹은 다른 의혹을 낳는다. 이리하여 그렇게도 정합성을 자랑하던 주자학의 고리는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게 된다.
[후략]
: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역, 「주자학적 사유양식과 그 해체」, 『일본정치사상사연구』(통나무,1995), 123-137쪽.
(7번 외 각주 생략)
7) 물론 주자학이 실천도덕 그 자체를 경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일은 유교철학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자학은 양명학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주장<知行合一設>에 대해서 종종 아는 것이 먼저이고 행하는 것은 나중이라는 주장<知先行後說>으로 불리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언제나 서로를 필요로 한다. 마치 눈은 다리가 없으면 갈수가 없고, 다리는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선후를 논한다면 아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나 가볍고 무거움을 논한다면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知行常相須, 如目無足不行, 足無目不見。 論先後, 知爲先‘ 論輕重, 行爲重。)(『朱子語類』 卷9)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아는 것이 먼저이고 행하는 것이 나중<知善行後>이라는 것은 단순히 논리적인 순서일 뿐이며 가치로 따진다면 오히려 행위가 중시되고 있다. 여기서의 문제는 실천도덕의 내용에 있는 것이다.
(원저자 강조 생략, 붉은 색은 모두 인용자 강조)
1.
주자학은 저우 리엔시(周濂溪)에 의해 개척되고 츠엉쯔 형제[츠엉 밍따오(程明道)․츠엉 이츠우안(程伊川)]에 의해 발전된 송학의 흐름을 이어 받아 이를 집대성한 것이다.1) 한(漢)․탕(唐)의 유학에 비해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특색은 첫째, 경서의 언어학적 연구로 시종일관 했던 훈고학(訓詁學)을 배척하고 이른바 도통(道統)의 이음을 주장하고, 종래의 오경(五經)[『易』․『書』․『詩』『禮樂』․『春秋』]중심주의에서 대해서 사서(四書)[『論語』․『孟子』․『大學』․『中庸』]에 의해 콩쯔(孔子)․멍쯔(孟子)․쩡쯔(曾子)․쯔쓰(子思)의 근본정신을 파악하는 의리(義理)의 학문이라는 점, 둘째 종래 유교의 사상적 약점이었던 이론성의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형이상학을 수립한 점에 있다. 그런데 이런 두 모멘트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바로 거기서 작게는 일상생활의 수양방법에서 크게는 세계실체론에 이르는 방대한 사상체계가 완성되었다. 그것은 실로 본래적으로 실용적인 성격을 가진 유교라는 사상이 가질 수 있었던 일찍이 그런 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 앞으로도 없을(양명학이라 하더라도 체계의 광범위함에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거대한 이론체계였다. 거기에는 하나가 무너지면 금세 모든 구성이 무너져버릴 정도의 치밀한 정합성<整序性>이 있었다. 이런 정합성 자체가 주자학적 사유방법의 특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는 점은 점차 밝혀지게 될 것이다. 토쿠가와 시대의 주자학자들이 코가쿠하(古學派)는 물론이고 양명학파에 비해서도 이론적 창조성이 가장 뒤떨어졌던 이유는 반드시 그들의 무능함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한편으로는 주자학이 갖는 이런 폐쇄성(Geschlossenheit, the closed character)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방대한 주자학 체계의 사상적 구조를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여기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지은이가 할 일도 아니며 또 이 글의 직접적인 과제도 아니다. 다만 주자학적 사유방식이 유교사상의 내부에서 어떻게 붕괴해가는가를 알기 위해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주자학체계의 간략한 스케치를 그 형이상학(우주론), 인성론, 실천윤리라는 순서대로 서술하기로 한다.2)
주자학의 형이상학의 기초가 된 것은 저우 리엔시의 「太極圖說」(Diagram of the Supreme Ultimate)이다. 그것은 『易』(the Book of Changes)의 「繫辭傳」 上에 “역에 태극(太極, the Supreme Ultimate)이 있어, 그것이 양의(兩儀, two forms)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 four emblems)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 eight trigrams)를 낳는다”(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는 구절에 기초를 두고, 오행설과 연결시켜 우주만물의 생성을 설명한 것이다. 그 취지를 요약하면, “자연과 인간의 궁극적인 근원인 태극으로부터 음(陰, yin)․양(陽, yang)의 두 기<二氣>가 생겨나고, 그 변화와 조합에 의해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오행이 차례대로 발생하고, 네 계절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또 음양의 두 기는 남성<男, male>과 여성<女, female>으로 서로 교감하여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데, 그 가운데 사람이 가장 훌륭한 기(氣)를 받았기 때문에 그 신령스러움이 만물 가운데 가장 뛰어나며 그 중에서도 성인은 하늘과 땅 그리고 스스로 그러함<自然>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合一> 있다. 때문에 인간들의 도덕은 연마하여 이런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데에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주의 법칙<理法>과 인간도덕이 하나의 원리로 꿰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天人合一>는 사상이며, 많건적건 간에 중국사상을 관통하고 있으며, 특히 송학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이런 사고방식은 「太極圖說」에 가장 압축적인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쯔(朱子)는 여기서 우주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 되어 있는 태극을, 추엉쯔(程子)의 견해를 받아들여 “태극은 곧 천지만물의 리”(太極是天地萬物之理, the Supreme Ultimate is the principle of all Heaven and Earth)(『朱子語類』 卷1)라고 규정함으로써, 「太極圖說」이 여전히 지니고 있던 발출론(發出論, Emanationslehre)적인 색채(the emanatory tendencies)를 희석시키고 일종의 합리주의 철학을 만들어냈다.3) 태극이란 음양오행의 기(氣, Ether)로 하여금 기이게 해주는 소이(所以)[=리(理, Principle)]이며, 따라서 천지만물을 넘어서있는<超越> 궁극적인 근원이다. “아직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도 반드시 리가 있었다. 리가 있음으로 해서 곧 천지가 있고, 만약 리가 없으면 천지도 없다.”(위와 같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리는 기와 함께 개개의 사물에 내재(內在)하여 만물의 성(性)이 된다. 이처럼 주자학의 리는 개개의 만물에 내재하면서도 만물을 넘어서있는 일원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있다. 때문에 주쯔의 철학은 혹 리일원론(理一元論, monistic)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 dualistic)이라 불리기도 하고, 또는 다원론(pluralistic)이라 하는 등 구구하게 해석되어 왔다. “합해서 이를 말한다면 만물의 근원은 바로 태극이다. 나누어서 이를 말한다면 하나하나의 사물 모두 각각 태극을 갖추고 있다”(「太極圖說解」)는 식으로, 주자학에는 원래 그런 양자택일(Entweder-oder, either-or)적인 범주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리는 “리와 기는 (결코) 두 개의 사물”<二物>이라든가 “그렇지만 두 개의 사물이 각각 하나의 사물<一物>임을 해치지 않는다”는 식으로(『朱子文集』 卷4) 기와 함께 “사물”<物>로 불리고 있어서 실체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동시에 단순히 기의 “그러한 까닭”<所以然>의 근거가 되어 있다. 이점에서도 주자학을 너무나 근대적으로, 예를 들면 이노우에 테쯔지로오(井上哲次郞, 1855~1944)처럼 독일 이상주의 철학과 대비<類比>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으며, 오히려 초월성과 내재성, 실체성과 원리성이 즉자적으로(an sich) 무매개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쯔 철학의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천지만물은 모두 “형이상”(形而上)의 리(metaphysical Principle)와 “형이하”(形二下)의 기(physical Ether)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 리는 사물의 본성을 결정하고 기는 사물의 형태를 결정한다고 생각된다. 만물은 리<一理>를 근원으로 한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평등하지만(만물의 본성은 같다…「太極圖說解」), 기의 작용에 의해서 차별있는 모습이 생겨난다. 그래서 인간도 다른 자연물도 마찬가지로 리가 관통하면서도, 인간이 가장 뛰어난 기를 품수받았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靈長)이 된다. 그런데 이런 평등과 차별의 관계는 인간 일반 대(對) 자연적인 사물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간에도 존재한다. 이처럼 주자학의 우주론은 그대로 인성론(人性論)으로 이어진다.
태극=리는 사람에 깃들어 성(性)이 된다. 이것이 “본연의 성”<本然之性, Original Nature or innate character>으로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이를 갖추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현명하고 어리석음<聖賢暗愚>의 차별이 생기는 것은 기의 작용에 근거한 것이다. 기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기질의 성”<氣質之性>이 된다. 기질의 성에는 밝고 맑음과 어둡고 탁함<淸明混濁>의 차이가 있다. 성인은 그 품수받은 기질이 완전히 밝고 투명해서 본연의 성이 조금의 남김도 없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많건적건 간에 어둡고 탁한 기질의 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온갖 욕망<慾望>이 다 생겨난다. 이런 욕망이 본연의 성을 뒤덮어 그것을 가리는데서 인간의 악(惡)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성의 선은 악보다 근원적이다. 확실히 리에 근거한 본연의 성─절대선(絶對善, absolute good)─은 기에 근거한 기질의 성─상대적인 선악(relative good and evil)─보다도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이라도 기질의 성의 어둡고 탁함을 씻어내면 본연의 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4) 그러므로 다음 문제는 어떻게 기질을 개선할 것인가 하는 것이며, 바로 여기서부터 주자학의 실천윤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주자학이 실천윤리(實踐倫理)에 있어서 특히 중시하는 경전은 『中庸』(the Doctrine of the Mean)과 『大學』(the Great Learning)이다. 주쯔는 『中庸』의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학문에 의거한다”<君子導德性而道問學, a gentle man, chun tzu, prizes virtuous nature and pursues the path of inquiry and learning>는 말에 따라 ‘1)덕성을 높일 것 2)학문에 의거할 것’ 두가지로써 인간의 욕망<人欲>을 제거하고 하늘의 이치<天理>로 돌아가는 수양법의 대강(大綱)으로 삼았다. 1)은 좁은 의미의 수양이며 2)는 지적인 탐구이다. 1)을 주관적인 방법 2)를 객관적인 방법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주과적인 방법으로 주장된 것이 이른바 “존심”(存心)이며, “마음을 지키고 공경함을 잃지 않는다”<存心持敬>든가 “고요함을 지키며 공경에 머문다”<守靜居敬>든가 하는 말들은 주자학의 가장 특징적인 실천적 표어가 되어 있다. “존심이란 마음이 어떤 사물에 집착함을 떨쳐버리는 것이다”(preserving the heart does not mean that a person's heart is preserved by any particular thing)(『朱子語類』)라고 하는 것처럼 순수하게 주관적인 내성(內省)이며, 이에 의거하여 나의 마음<內心>인 본연의 성이 직관적으로 통찰하여 “하늘의 이치가 언제나 밝아서 자연히 인간의 욕망이 소멸되는”(위와 같음) 경지에 이르게 된다. 두 번째의 이른바 객관적인 방법으로 내세워진 것이 『大學』에서 말하는 “사물에 나아가 그 앎을 다한다”<格物致知, the extension of knowledge through the investigation of things>는 것이다. 원래 『大學』은 『中庸』과 더불어 『禮記』(Book of Rites)속의 한 편으로 묻혀져 있던 것을 주쯔가 끄집어내어 “처음 배우는 사람이 덕에 들어서는 문”<初學入德之門>이라 하여 유학 입문서의 제일로 꼽았으며, 그 주해(註解)작업에 삶을 다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을 정도로 중시했던 경전인데, 특히 사물에 나아가 그 앎을 다한다<格物致知>는 부분은 주쯔가 전(傳)을 새로이 보완한 조목으로 유명하다. 우리들은 앞에서 주자학의 “리”가 만물(萬物)의 근원<統禮>으로서 초월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동시에 개개의 만물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 리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본연의) 성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사물에 나아가 하나하나 그 리를 궁구하는 것은 동시에 그만큼 내 마음인 본연의 성을 밝게 하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리를 궁구하는 것<窮理>에 “힘쓰기를 오래해서 하루 아침에 넓고 훤하게 관통하게 되면, 모든 사물의 안과 밖, 정밀함과 거침이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모든 체와 큰 쓰임이 밝지 않음이 없다”(至於用力之久, 而一但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는 데에 이르게 된다(「大學補傳」). 이것이 사물에 나아가 그 앎을 다한다는 것이다. “고요함을 지키며 공경에 머문다”<守靜居敬>는 것이 오로지 주체의 자기반성에 의해 성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임에 대해서 “앎을 다하고 사물에 이른다”<致知格物>는 것은 객체를 매개로 하여 개념적으로 (마지막에는 어느날 아침 갑자기 “넓고 훤하게”라는 식으로 뛰어오르지만(ㄲㄲ-인용자)) 주체의 리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존심(存心, preserving the heart)과 궁리(窮理, investigating the Principle), 주관적인 방법과 객관적인 방법에 의해 안으로는 인간의 욕망을 모두 없애 본연의 성으로 돌아가고 밖으로는 세계의 법칙<法則>과 하나가 된다면<合一> 그 사람은 성인이 된다. 이것이 도덕적 정진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개인의 이런 도덕적 정진이 또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전제조건이다. “사물에 이른 후에야 앎이 지극해지고, 앎이 지극해진 후에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진 후에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야 그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후에야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하게 된 후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야 천하가 태평해진다. 천자로부터 일반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몸을 닦음<修身>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 끝이 다스려지는 일은 없다”(物格而後知至, 知至而後意誠, 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 身修而後家齊, 家齊而後國治, 國治而後天下平。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는 『大學』 첫머리의 말은 주쯔 철학 전체 체계의 귀결점이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위에서 그저 윤곽 정도로 개괄적으로 살펴본 주자철학의 체계적 구성으로부터 어떠한 특성을 읽어낼 수 있을까.5) 이 점에서 먼저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주쯔 철학의 근본개념을 이루고 있는 “리”의 성격이다. 그것은 사물에 내재하면서 그 움직임과 머뭄, 변하고 합해짐<動靜變合>의 “원리”를 이룬다는 의미에서는 자연법칙이지만, 본연의 성으로서 인간에 내재하는 것으로 될 때는 오히려 인간 행위가 바로 따라야 할 규범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자학의 리는 사물의 이치<物理>[자연의 법칙/옮긴이]임과 동시에 인간의 도리(道理)[인간의 도덕점 규범/옮긴이]이며, 스스로 그러함<自然>임과 동시에 마땅히 그러해야 함<當然>이다. 여기서 자연법칙은 도덕규범과 이어져 있다. 이런 연속성에 대해서는 항(項)을 바꾸어 보다 자세하게 말하겠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 연속이 대등한 연속이 아니라 종속적인 그것이라는 점이다. 사물의 이치는 인간의 도리에, 자연법칙은 도덕규범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으며, 그 대등함이 인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일반적인 철학체계의 순서에 따라서 주자학의 인성론이나 실천도덕론을 형이상학의 기초위에 서술해왔는데, 아무리해도 그런 형이상학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제 1철학”의 영예를 부여할 수가 없다. 오히려 주자학에 있어서 우주론 내지 존재론은 인성론의 “반사”(反射)적인 지위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다. 저우 리엔시의 「太極圖說」은 발출론(發出論, Emanationslehre)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존재론으로부터 인성론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비해서, 주쯔는 「太極圖說」의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고, 움직이는 것이 극에 이르면 고요하게 된다. 고요해서 음을 낳고, 고요한 것이 극에 이르게 되면 다시 움직이게 된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이 서로 그 근원이 되어, 음․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서게 된다”(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는 최초의 우주론 항목에 대한 주해(注解)에서 “태극의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 것 이것은 하늘의 명이 흐르는 것이다. 이른바 ‘한번은 음하고 한번은 양하는 것 이것은 길<道>’이라 한 것을 가리킨다. 성(誠)은 성인의 근본, 사물의 시작과 끝으로서 명<命>의 길<道>이다. 그 움직이는 것은 성이 통하는 것이다. 이것을 잇는 것은 선(善)하여, 만물의 바탕이 되어 시작하는 바의 것이다. 그 고요함은 성으로 되돌아가는 것<復>이다. 이것을 이루는 것은 성(性), 만물이 각각 그 성(性)과 명(命)을 바로 하는 것이다”(太極之有動靜, 是天命之流行也。 所謂一陰一兩之謂道。 誠者, 聖人之本, 物之終始, 而命之道也。 其動也, 誠之通也, 繼之者善, 萬物之所資以始也; 其靜也, 誠之復也, 成之者性, 萬物各正其性命也)라고 하여 일찍이 “성”(誠)이란 계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성(誠)이란 진실되고 망령됨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늘의 이치의 본래 그러함이다”(誠者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中庸章句」)라고 한 이상, 태극[리]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誠)이라는 본래 윤리적인 범주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만이 도덕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 역시 도덕에 종속되게 된다. 일반적으로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는 다양한 역사적 발전을 이성적인 규준(規準)으로 초월적으로 판단하게 되곤 해서 이따금 역사적 개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주자학적 “합리주의”(rationalism)에 있어서는 그 규준인 “리”가 도덕성을 그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 역사관은 주쯔의 『通鑑綱目』(Outline and digest of the general mirror)에 전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매우 특징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거기서는 역사는 무엇보다도 교훈(a moral lesson)이며 거울(mirror)이어서 “이름과 직분을 바로 하기”<正名分, maintaining proper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of different statuses>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규준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적 현실의 독자적인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역사관이 소라이가쿠(徂徠學)에 의해서 그리고 나아가 노리나가가쿠(宣長學)에 의해서 어떻게 근본적인 비판을 받게 되는가 하는 것은 뒤에서 다루게 될 과제이다. 여기서는 다만 자연, 역사, 문화 모든 것들이 도덕적 지상명령 아래에 놓여져 있다는 점, 이것이 바로 주자학의 “합리주의” 내지 “주지주의”(主知主義, intellectualism)의 기본적인 성격이라는 점만 지적해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도학(道學)적 제약을 염두에 둘 때,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어째서 소라이가쿠 내지 노리나가가쿠에 있어서 비합리주의(非合理主義)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얼핏 보면 사상적인 역전(逆轉)처럼 보이는 “합리주의”로부터 “비합리주의”(nonrationalism)에로의 진전이 실은 근대적 합리주의의 성립을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기반이었던 까닭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도덕성의 우위에서 불구하고 인간의 도리(道理)는 동시에 사물의 이치<物理>라는 점에 의해서, 바꾸어 말한다면 윤리가 자연과 이어져 있음으로 해서 주자학의 인성론은 당위적=이상주의적 구성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는 자연주의적인 낙관주의(a naturalistic optimism)가 지배하게 된다. 본연의 성은 성인에게도 보통사람에게도 똑같이 갖추어져 있으나 어둡고 탁한 기품(氣稟)이 그것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악이 생긴다. 그리고 가리고 있는 것을 제거하기만 한다면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착한 본성<善性>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유방식은 덕행(德行)의 목표를 초월적인 이념으로 하지 않고서 이를 인간성에 완전히 내재시키는 한 틀림없는 일종의 낙관주의(Optimism)이다. “사람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도 그것을 나타낸 것이며, “굳게 믿고 힘써 행하면 천하의 이치<理>가 지극히 어렵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를 수 있다”(「玉山講義」)는 확신도 거기서부터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낙관주의는 동시에 준엄한 엄격주의(rigorism)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다만 여기서는 실현되어야 할 규범이 자연[本然]으로 되어 있으며, 거꾸로 보통 인간의 감성적 경험이나 정감은 필연적으로 선악이 서로 섞여 있는 기질의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하늘의 이치”<天理>는 구체적·실천적으로는 모든 자연적 기초를 잃어버리고 절대적 당위로서 “인간의 욕망”<人欲>에 대립하는 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주의적인 낙관주의와 극기(克己)적인 엄격주의가 한편으로는 추상적인 이론구성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귀결로서 주자학 인성론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이는 얼마 후에 전개되는 주자학적 사유방식의 분해과정에서 두 개의 방향으로 분열해가게 된다. 하나는 유교의 규범주의를 자연주의적 제약으로부터 순화(純化)시키는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거꾸로 “인간의 욕망”의 자연성을 용인하려는 방향이다. 그 구체적인 양상 역시 뒤에서 살펴보게 되는데, 거기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인성론에 있어서 낙관주의적 구성은 이처럼 규범이 자연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연속적 사유라는 것 역시 주쯔 철학이 갖는 하나의 중요한 특색이다. 우리가 우주론에서 본 “리”의 초월즉내재(超越卽內在), 실체즉원리(實體卽原理)의 관계[Principle, li, unites transcendence and immanence, substance and principle] 역시 이런 연속적 사유의 표현이다. 하늘의 이치<天理>는 인간의 본성<人性>과, 기(氣)는 인간의 욕망<人欲>과, 법칙은 규범과, 사물은<物>은 인간과, 사람은 성인과, 앎<知>[格物窮理]은 덕(德)과, 덕[修身齊家]은 정치[治國平天下]와 모두 직선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연쇄가 앞에서 말한 도덕성의 우위[리=성(誠)] 하에 일사불란한 배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6) 그런 의미에서 낙관주의는 인성론만이 아니라 주자학 전체의 이른바 체계적인 특성에 다름 아니다. 이런 낙관주의가 유지되기 어렵게 되면,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연속은 끊어지게 된다. 거기에 보다 근대적인, 헤겔이 말하는 “분열된 의식”(divided consciousness)이 다가서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자학 체계를 장식하는 성격으로서 정적(靜的)=관조적(觀照的)인 경향(the tendency towards quiescence and meditation)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저우쯔(周子)의 「太極圖說」에서 움직임<動>은 양(陽)에 고요함<靜>은 음(陰)에 속하는 것이라 하면서, 그런 동정(動靜)을 넘어선 절대적인 존재로서 세워진 태극에는 역시 절대정(絶對靜)의 색채가 농후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써 이를 정하고, 그리고 고요함<靜>[욕심이 없기 때문에 고요함]을 주로 하여 사람의 극<人極>을 세운다”고 한 것이다. 송학(宋學)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정적(靜的)인 성격은 주자학에서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太極圖說」에 대한 주쯔의 해설<朱子解>을 보더라도 “이것은 성인의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을 온전히 하여, 언제나 이를 고요함에 근본을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此言聖人全動靜之德, 而常本之於靜也)라고 했으며, 또 “고요함이라는 것은 성(性)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서 성(性)의 참된 것<眞>이다. 진실로 이 마음이 조용하고 욕심이 없어서 고요하지 않다면, 무엇을 가지고 사물의 변화에 응하며 천하의 움직임을 하나로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성인은… 그 움직임에 있어서 반드시 고요함을 중시한다”(然靜者誠之復, 而誠之眞也。 苟非此心寂然無欲而靜, 則又何以酬酌事物之變, 而一天下之動哉! 故聖人, 而其動也必主乎靜)고 하여 고요함의 가치를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자학의 인성론 구조로부터 당연히 도출되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본연의 성은 조용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寂然不動>이라 하며 모든 마음의 움직임은 이미 기(氣)의 제약을 받은 정(情)이라 보기 때문에, 인(인)·의(의)·예(예)·지(지)는 선험적인(a priori) 것으로서 성(性)에 속하지만 이미 발한<已發>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단서<四端>에 이르게 되면 이미 성(性) 그 자체가 아니라 “정”(情)에 속하게 하며, 따라서 인(仁)은 사랑<愛> 자체와 구별되는 “사랑의 이치(理)”라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연의 성의 철저한 정적(靜的)인 성격을 염두에 두어야만 비로소 주자학의 실천도덕에 있어서 “고요함을 지키며 공경함을 갖춘다”<守靜持敬> “공경함에 머물며 고요하게 지낸다”<居敬靜坐>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이와 더불어 거론되는 “사물에 이르러 그 이치를 궁구한다”<格物窮理>는 것에 아무리 실천적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뒤에서 보듯이 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와 같은 실천도덕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여전히 관조적인 색채가 남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에 대한 고요함의 우위, 행동성(行動性)에 대한 관조성(觀照腥)의 우위7)도 궁극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연속적인 사유방식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주자학 체계에 있어서의 낙관주의의 한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방대한 주자학 체계를 증류(蒸溜)시켜서 도학적 합리주의, 엄격주의(rigorism)를 내포한 자연주의, 연속적 사유, 정적(靜的)=관조적 경향이라는 특성들을 찾아내고, 그런 특성들을 하나로 꿰뚫고 있는 성격으로 낙관주의를 집어냈다. 그런데 이런 특성이야말로 주자학이 근세 초기 사상계에서 거두었던 독점적인 지위를 무엇보다도 잘 설명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주자학의 성격으로 집어낸 것과 같은 낙관주의는 안정된 사회에 부응하는 정신 자세(Geisteshaltung, a mental attitude)이며, 또 거꾸로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질풍(疾風)과 노도(怒濤)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는 센고쿠(戰國) 시대의 상황─온갖 무질서와 혼란, 그러나 동시에 모든 생활분야에 있어서 활동과 발전이 함께 하는─을 완전히 바꾸어 점차 고정화된 질서와 사람들이 마음 위에 성립한 근세봉건사회에 있어서 그런 정적(靜的)인 낙관주의는 보편적인 정신적 자세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토쿠가와(德川) 바쿠한세이(幕藩制) 사회가 “지속의 왕국”(주자학 질서가 19세기까지 지속된 중국을 가리킴-인용자)이 아닌 한, 거기서의 국민생활이 영원토록 정지된=고정적인 것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낙관주의의 보편성도 얼마 후에는 한계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점점 주자학적인 연속적 사유 위에 안주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늘의 이치<天理>는 과연 “본연의” 성인가? 인간의 욕망은 애초부터 모두 없앨 수 있는가, 또 모두 없애야 할 것인가? 리는 모든 사물을 규정할 정도로 그처럼 강력한 것인가? 이치를 탐구하는 것<窮理>이 순수하게 도덕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과연 누구나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것<修身齊家>이 그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治國平天下>의 기초가 될 수 있을까? ……하나의 의혹은 다른 의혹을 낳는다. 이리하여 그렇게도 정합성을 자랑하던 주자학의 고리는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게 된다.
[후략]
: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역, 「주자학적 사유양식과 그 해체」, 『일본정치사상사연구』(통나무,1995), 123-137쪽.
(7번 외 각주 생략)
7) 물론 주자학이 실천도덕 그 자체를 경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일은 유교철학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자학은 양명학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주장<知行合一設>에 대해서 종종 아는 것이 먼저이고 행하는 것은 나중이라는 주장<知先行後說>으로 불리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언제나 서로를 필요로 한다. 마치 눈은 다리가 없으면 갈수가 없고, 다리는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선후를 논한다면 아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나 가볍고 무거움을 논한다면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知行常相須, 如目無足不行, 足無目不見。 論先後, 知爲先‘ 論輕重, 行爲重。)(『朱子語類』 卷9)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아는 것이 먼저이고 행하는 것이 나중<知善行後>이라는 것은 단순히 논리적인 순서일 뿐이며 가치로 따진다면 오히려 행위가 중시되고 있다. 여기서의 문제는 실천도덕의 내용에 있는 것이다.
후에는 이런 내용이 이어진다.
소라이(徂徠)는 이렇게 말했다 : "세상은 말<言>을 싣고서 변해가며, 말은 길<道>을 싣고서 변해간다. 길이 밝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송나라 유학자들<宋儒>과 같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문장으로써 옜날의 문장을 보고, 오늘날의 말로써 옛날의 말을 본다. 때문에 그들은 그 마음을 쓰는 것이 아주 독실하다 하더라도 끝내 옛날의 길을 얻을 수 없다." [...] 그들은 모두 느닷없이 "길"<道>을 세우려고 한다. 따라서 길<道>이 각자의 주관에 따라서 다양하게 되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길<道>의 깊은 곳에 있는 "코토바"(辭, 말, words)와 말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 "코토"(事, 일, facts)이다. 당위(當爲, Sollen)를 말하기 이전에 먼저 존재(存在, Sein)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 그가 역사에서 무엇보다 추구했던 것은 "사실"(facts)이었다. 따라서 "주쯔(朱子) 류의 이치<理窟>"를 "옛날과 지금의 일들<事跡> 위로 넘나들거나"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다만 그럴듯하게 들리는 데만 마음을 쓰는 것"과 같은 비실증적인 태도는 엄준하게 거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같은 책, 190,219쪽.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렇게 주자학적 사유양식에 반(反)하는 소라이가쿠(徂徠學)의 "Sein", "규범 이전의 실증"을 통해 일본의 근대적 사고양식(mode)의 기원을 이끌어내고 있다. 지은이가 정리해놓은 주자학에 관련한 내용을 읽고 있으면, 우리나라에서 왜들 그리도 사실관계에 대한 논의는 취약하면서 도의적인 얘기는 주워섬기길 좋아하는지가 어렴풋하게 더듬어진다. 어떤 정책이고 사안이든, 그 속에서 그들 나름의 "理"만 확인한다면 이내 안심해버리는 어떤 버릇 같은 것, 나는? 또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