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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현 복(한국 외대)


                            I


   ꡔ제일철학에 대한 성찰ꡕ(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은 이 제목이 시사하듯이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다. 청년 데카르트가 학문의 방법론을 다룬 ꡔ정신 지도를 위한 제규칙ꡕ(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고, 자연과학적 사상을 담은 ꡔ세계론ꡕ(Le Monde ou Traité de la lumière)을 갈릴레이 재판을 바라보면서 출간을 보류한  후에, 그는 ꡔ방법서설ꡕ(Discours de la méthode)에서 간략하게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정신과 신에 관한 이론인 형이상학 혹은 제일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속에서 다양한 경험과 심도있는 사색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데카르트는 장년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서 형이상학적 체계를 세상에 내 놓았다. 이것이 바로 그의 ꡔ성찰ꡕ이다.


   이 책은 모두 여섯 성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중의 핵심은 제2성찰과 제3성찰일 것이다. 제2성찰은 정신의 존재와 본성을, 제3성찰은 신의 본성과 존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제4성찰에서의 “참과 거짓에 관하여”, 제5성찰에서의 “물체의 본질에 관하여” 그리고 제6성찰에서의 “물체의 존재 및 정신과 신체의 실제적 구별”은 엄밀한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주제들이다.1) 물체에 관한 이론은 자연학의 범주에 귀속될 것이며, 이 자연학은 형이상학의 토대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지속적인 주장이다. 자연학의 연구에 요구되는 상상력과 감관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에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로우며, 이런 의미에서 제1성찰에서 시도되고 있는 ‘회의’는 물질적 세계의 진리성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과정 및 상상력․기억력․감관에 의한 인식을 의심하는 것이외에 다름 아니다.


   극단적으로 ‘악마의 가설’(malin génie)이 동원되는 데카르트적 회의는 기존의 지식체계를 점진적으로 해체함과 동시에 학문의 아르키메데스적 일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파괴적이고 생산적인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회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일단 거짓인 것으로 간주하고,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색한 결과 최초로 획득된 것이 “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코키토명제이다. 내가 모든 것을 회의하는 동안, 회의하는 나는 적어도 존재해야 하며, 더 나아가 회의는 사유의 한 양태(modus)이기 때문에 사유하는 나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사유만이 존재하는 나로 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즉 사유와 나는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2) 나는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즉 정신(mens)이며,3) 정신은 연장이 본성인 물질적 실체와는 상이한 것이어서 별도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가 본성인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의 질서상 최초로 획득되는 진리(제일원리)이며, 그래서 그것은 학문의 확고부동한 토대이다.


   그 유명세 만큼이나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어 온 데카르트의 코키토명제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사유이다. 코키토(cogito: 나는 사유한다)는 코키타레(cogitare: 사유하다)라는 동사의 단수 일인칭 동사형이며, 코키타치오(cogitatio: 사유)는 코키타레의 명사형이다. 그래서 코키토명제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코키타치오라는 개념이 가장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회의속에서 회의하는 나의 존재의 진리성을 확인하고, 회의가 사유의 한 작용일 뿐이라는 전제하에서 “나는 회의한다”(dubito)가 “나는 사유한다”(cogito)로 전환되어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의하면서 존재하는 나, 즉 정신의 본성이 오직 사유라는 것은 정신이 어떤 물질적인 것이라는 유물론적인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며,4) 또한 정신속에는 어떤 불투명한 신비적 잔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5) 이제 정신은 단지 그리고 전적으로 사유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양태로서 개별적 사유작용들의 모태인 사유는 정신이라는 사유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이다.


   정신의 본성을 고찰하는 제2성찰에 나타난 사유는 정신의 본질적 속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수 일인칭 주어를 사용하면서 명상체로 쓰여진 ꡔ성찰ꡕ에서 데카르트는 명석 판명성을 강조한 사람답지 않게 스스로 개념을 명쾌하게 정립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이로 인해 독자들은 상당한 혼란을 받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기서 논의할려는 사유개념이다. 사유가 데카르트 철학의 중심개념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가 이 개념을 애매하게 사용하고 있다면, 이 개념의 다양한 의미를 해명하는 것은 데카르트 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라 하겠다.6)


   본 논문의 과제는 제2성찰에서 사유를 정신의 본성으로 파악하고 난 후, 신에 대해 논의하는 제3성찰의 초입부분에서 언급되는 사유개념을 해명하는 것이다. 제3성찰의 들어가는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제1성찰의 ‘회의’에 대해 그리고 제2성찰의 코키토명제에 대해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1성찰의 회의에 의해 기존의 지식체계가 전면적으로 와해되어 버리고, 제2성찰에서 코키토명제만이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인 것으로 확보된 상태에서, 다음 성찰의 주요 문제는 앞에서 거짓으로 간주된 지식을 명증성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진리와 거짓의 준거를 제4성찰로 미루고, 진리의 보증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즉 ‘악마의 가설’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성실하고 완전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이것이 제3성찰의 과제이며, 이것을 다음의 문구로 정리하고 있다.




지금 성찰의 순서에 요구되는 것은․․․․․․우선 나의 모든 사유들(omnes meas cogitationes)을 몇가지 종류로(in certa genera) 나누어 그 중의 어떤 종류속에 본래 진리나 거짓이 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내 사유들 가운데 어떤 것은 이른바 사물의 상들(tamquam rerum imagines)인 바, 본래(proprie) 이것들에 대해서만 관념(ideae)이라는 용어가 어울리는 것이다. 가령 내가 사람․키마이라․하늘․천사․신을 사유할 경우이다. 그런데 다른 종류들은 이것 이외에 또 다른 형상들을 갖고 있다. 가령 내가 무엇을 원할 때, 두려워할 때,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 나는 항상 어떤 것을 내 사유의 대상으로(ut subiectum meae cogitationis) 포착함과 동시에, 나는 이 대상과의 한갓된 유사성(istius rei similitudinem)이외에 다른 것을 인지하게 된다. 이런 종류들은 의지 혹은 정념(voluntates sive affectus)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판단(iudicia)이라 불리워지는 것이다.7)




제3성찰의 다섯번째 문단에 나타나 있는 이 인용문은 라틴어 원판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려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고충을 주고 있는 문단이다. 8) 그 내용에 대한 이해는 차치하더라도, 이 문단의 첫 구절에 나타난 ‘나의 모든 사유들’을 어떻게 이해․번역할 것인지가 우선 문제로 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유는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제2성찰에서 사용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나의 모든 사유들’은 이것과는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더 나아가 이 인용문에서 데카르트가 ‘어떤 것을 내 사유의 대상으로 포착’한다고 말할 때, 여기에서의 사유는 앞의 두가지와 같지 않음도 분명하다. 따라서 사유개념은 데카르트에 있어 한가지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유개념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해명하고, 더 나아가 ‘관념’․‘의지 혹은 정념’․‘판단’을 포함하고 있는 ‘나의 모든 사유들’의 의미가 데카르트의 다른 텍스트와 어떻게 연관되어 해독되어야 하는 지를 밝히고자 한다.


                                II


   우선 결론적으로 말해서, 데카르트에 있어 사유개념은 세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번째는 제2성찰에서 언급된 정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사유(cogitatio qua natura cogitans; cogitatio qua natura mentis)이다. 두번째는 데카르트의 텍스트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사유작용으로서의 사유(cogitatio qua modi cogitandi; Vorstellungsakt) 혹은 사유현상으로서의 사유(cogitatio qua cogitatum; Vorgestellte)이다. 세번째는 본 논문에서 문제로 삼고 있는 제3성찰에 나타난 사유, 즉 ‘관념’․‘의지 혹은 정념’․‘판단’을 포함하고 있는 ‘사유들’이다.


   이것들 중에서 데카르트가 가장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두번째 의미의 사유, 즉 사유작용으로서의 사유이다. <성찰의 제2반박에 대한 답변의 부록>에서 “사유란 우리속에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모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지․오성․상상․감각 작용은 모두 사유들”9)이라고 말하고 있고, ꡔ철학의 원리ꡕ(Principia philosophiae)에서도 이것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10) 첫번째 의미의 사유가 사유실체의 본성을 구성하는 속성(substantiae preacipua proprietas)인 반면, 두번째 사유작용으로서의 사유는 사유실체의 양태들이기 때문에, 양자는 속성과 양태라는 상이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고 있는 셈이다. 또한 사유실체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사유는 사유실체와는 단지 ‘이성적으로 구별’(distinctio rationis)되기 때문에 이 양자를 분리해서는 서로에 대해 판명하게 인식할 수 없으며, 사유실체의 양태로서의 사유는 사유실체와 단지 ‘양태적으로 구별’(distinctio modalis)되기 때문에 전자는 후자의 인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인식론적 지위를 갖고 있다.


   실체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사유와 그 양태로서의 사유(작용)간에 존재론적․인식론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데카르트는 ꡔ철학의 원리ꡕ 제1부 63장과 64장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는 사유작용으로서의 사유와 본성으로서의 사유간의 관계를 아르노(Arnauld)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




나는 ꡔ철학의 원리ꡕ 제1부 63장과 64장에서 사유개념의 애매성을 제거하고자 했다. 물체의 본성을 구성하는 연장이․․․․․․연장적 양태 혹은 다양한 형태와 엄격히 다른 것 처럼, 내가 인간 정신의 본성으로 간주한 사유(cogitatio) 혹은 사유본성(natura cogitans)은 사유의 개별적인 활동들(hic vel ille actus cogitandi)과 아주 다른 것이다․․․․․․그래서 사유란 사유양태 모두를 포함하는 어떤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이 양태들을 근거지우는 하나의 특수한 본성(naturam particularem)인 것이다.11)




따라서 벡(L.J.Beck)이 주장하듯이, 데카르트에 있어 정신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사유는 그 양태로서의 사유와 엄격히 다를 뿐만 아니라, 전자가 후자의 총합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12)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사유는 오히려 양태로서의 사유활동들을 근거지우는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단순본성’(natura simplicis)인 것이다.


   사유가 정신의 속성인 한, 그것은 양태와는 달리 어떤 불변적인 것이고 사유주체와 분리될 수 없으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사유가 정신의 본성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사유는 오히려 사유양태들의 주체이자, 이것들을 야기하고(exurqunt), 이것들이 전제로하며(praesupponit)․내재하는(insunt)내적원리(internum principium)라는 것이 데카르트의 극단적인 주장이다.13) 이런 관점에서만 제2성찰에서 시도된 (사유양태로서)회의하는 나에서 (본질적 속성으로서)사유하는 나에로의 전환이 가능하게 된다. 회의는 사유의 양태에 불과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사유가 회의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사유, 이것만이 나와 분리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내가 회의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이것에 대해 나는 더 이상 회의할 수 없다-, 내가 사유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회의한다는 것이 사유의 일종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사유하지 않는다면, 내가 회의하고 있는지 혹은 내가 존재하고 있는 지를 나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존재하고 있고, 또 내가 무엇인지를 나는 알고 있으며, 이것을 내가 알고 있는 이유는 내가 회의하기 때문에, 즉 내가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사유하기를 잠시라도 중단한다면, 나는 존재하기를 멈출 것이다. 따라서 나와 분리될 수 없는 유일한 것은, 존재한다고 확실히 알고 기만당함이 없이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사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14)




내가 사유하는 것이고, 사유가 지각양태(modi percipiendi)와 의지양태(modi volendi)로 나누어진다면, 나는 지각하고 의지하는 것이며, 또한 지각이 인식․상상․기억․감각 작용과, 의지가 긍정․부정․의욕․기피․사랑․회의 작용과 다름 아니라면, 사유하는 나는 인식하고 상상하고 기억하고 감각하는 것이며,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욕하고 사랑하고 회의하는 것이다.15)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들 제반 사유작용들의 근거에 사유가 있기 때문에, 아니 이 작용들 각각이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사유활동이기 때문이다.


   사유실체로서의 정신, 그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사유 그리고 그 양태로서의 사유활동이라는 데카르트의 도식은 실체․속성․양태라는 전통적인 입장을 따른 것이다. 회의와 같은 사유활동이 행해지고 있다면, 이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기체(substractum)로서의 실체가 존재해야 하고, 또 이 활동은 하나의 사유작용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실체는 사유실체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6) 사유실체, 즉 정신의 본성을 오직 사유로 규정한 사람은 자신이 처음일 것이라고 데카르트는 자랑스럽게 공언하고 있지만,17) 그럼에도 그는 사유에서 사유실체로의 이행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근세 실체주의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훗설(E.Husserl)은 아쉬워하고 있다.18)




                                III


   사유의 세번째 의미에 관해 고찰해 본다면, 제3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나의 모든 사유들’을 우리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리적 현상들(psychiche Phänomene)로서 파악하고 있다. 이때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언어 사용법이다. 사유가 정신의 본질적 속성을 의미할 때는 항상 단수형으로, 사유양태를 의미할 때는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모든 생리적 현상들을 가리킬 때는 항상 복수형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3성찰에서 관념․의지 혹은 정념․판단을 포함하는 사유들(cogitationes)을 복수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제의 문단은 일차적으로 참과 거짓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존재하는 지를 밝히기 위해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이 문단에 대한 해독은 사유개념의 해명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의 오류론을 동시에 다루게 될 것이다.19)


   데카르트에 따르면, 오류는 ‘사물의 상’ 혹은 ‘본래적 의미에서의 관념’에도, 의지 혹은 정념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산양을 상상하건, 키마이라를 상상하건간에 내가 상상한다는 것 자체는 그 어느 경우나 똑같이 참된 것”20)이기 때문이며, “내가 아무리 나쁜 일을 의도하고, 심지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한다해도, 내가 그런 것을 원한다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21) 그러므로 오류는 오직 판단에 그 원인이 있지 않으면 안되며, 판단에서 발생되는 “가장 흔한 오류는 내 속에 있는 관념이 내 밖에 있는 사물과 유사하다거나 일치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관념들을 오직 내 사유양태로만 간주하여, 이것들을 내 밖에 있는 것과 연관시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할 수는 거의 없겠기 때문이다”.22) 이와같이  오류의 원인은 오직 우리가 내리는 판단에 있다고 간주한 뒤, 데카르트는 관념을 그 출처에 따라 본유관념․외래관념․조작관념으로 세분하여 어떤 관념에 대한 판단에 오류가 많이 발생하는 지를 고찰한다.


   데카르트가 문제의 문단에서 ‘사유들’의 첫번째 종류로 제시한 것은 ‘사물의 상들’이다. 이것들은 우리 정신속에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만이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관념이라고 부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왜 이런 부언을 해야만 했을까? 그가 다른 자리에서 ‘사물의 상’과는 다른 어떤 것을 또한 관념으로 지칭했기 때문에 ‘본래적인 의미에서’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아닌가? 이는 아마도 데카르트가 “우리가 우리속에서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을 관념”23)이라고 종종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유들’은 ‘넓은 의미에서’ 관념이라고 볼 수 있다. ‘사물의 상’ 뿐만 아니라 의지나 정념 및 판단도 마찬가지로 우리속에서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관념은 오직 ‘사물의 상’이다. 그러나 문제의 문단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 관념은 다시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내가 전에 아주 확실하고 명백하다고 인정한 것이 그 후에 의심스러운 것이라고 알게 된 것이 많이 있다. 무엇이 이런 것들이었는가? 그것은 땅, 하늘, 별들, 이밖에 내가 감관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것들에 대해 무엇을 명석하게 지각하고 있었던가? 물론 이것들의 관념들 그 자체 혹은 사유들(ipsas talium rerum ideas sive cogitationes)이 내 정신속에 나타났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념들이 내속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도 부정하지 않는다.24)




그러나 내속에 그 관념이 있는 것들 가운데 내 밖에 정말 현존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를 찿는 데는 또 다른 길이 있다. 즉, 그 관념들이 단순히 어떤 사유양태(ideas istae cogitandi quidam modi)인 한 나는 그것들간에 아무런 차이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모두 나에게서 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중의 어떤 관념은 이것을, 다른 관념은 저것을 표상하고(repraesentat) 있는 한 , 그 관념들은 서로 크게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25)




그러므로 데카르트에 있어 ‘본래적 의미에서의’ 관념은 사유양태로서의 사유작용(idea qua modi cogitandi) 혹은 표상력(idas qua repraesentatio)과 이것에 의해 표상된 것(idea qua cogitatum; idea qua repraesentatum)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유양태가 지각양태와 의지양태로 나누어진다면, 사유작용은 오성의 지각(perceptiones intellectus)작용과 의지작용으로 세분될 터인데, 그렇다면 ‘표상된 것으로서의’ 관념을 표상시키는 사유작용은 이들중에서 어떤 것인가? 데카르트는 이것을 ꡔ성찰ꡕ의 <독자를 위한 서언>에서 인과론적 신증명과 연관해서 이전에 자신에게 제기된 반론에 대해 답변하는 자리에서 설명하고 있다.




․․․반론은, 내가 내속에 나보다 더 완전한 것의 관념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 관념 자체가 나보다 더 완전한 것은 아니며, 더구나 이 관념에 의해 표상되는 것이 현존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여기서 관념이란 말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즉, 그것은 한편으로는 질료적으로 오성의 작용(pro operatione intellectus)이라 볼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는 완전자의 관념이 나보다 더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관념은 객관적으로 오성작용에 의해서 표상된 것(pro re per istam operationem repraesentata)을 의미하는 바, 이 경우에 비록 완전자의 관념이 오성의 외부에 현존하는 것으로 상정될 수는 없을 지라도 그 본질로 인하여 나보다 더 완전한 것일 수 있다.26)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관념은 오성의 지각작용과 이것에 의해 표상되는 사물의 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유들’은 이제 오성의 지각작용과 이것에 의해 표상된 사물의 상․의지작용과 정념․판단을 모두 포함하는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로서의 인간속에서 일어나는 광범위한 현상인 셈이다.


   ‘의지 혹은 정념’(voluntates sive affectus)과 ‘판단’(iudicia)과 관련해서 본다면, 데카르트는 이 두 현상에 공통된 특징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가 의욕하거나 두려워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긍정하고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 대상으로서 어떤 것을 표상함과 동시에, 우리는 이 대상과 유사한 것 이상의 것을 인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상 혹은 ‘본래적 의미에서의’ 관념 뿐만 아니라, 판단의 경우에는 동의나 거부가, 의지의 경우에는 욕구와 기피가 추가된다. 케니(A.Kenny)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 문단이 의미하는 것은, X에 대한 순수 사유, X에 대한 욕구 그리고 X에 대한 공포는 모두 X의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이 관념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두번째와 세번째 것은 이 관념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27)




예컨대, 우리가 만일 사자를 본다면, 우리는 사자에 대한 상(본래적 의미로의 관념)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자를 보고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사자에 대한 상 뿐만 아니라 공포감도 갖는다. 데카르트는 이 공포감을 ‘본래적인 의미로서의’ 관념과 구별해서 (넓은 의미로서의)관념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홉스(T.Hobbes)와의 논쟁에서 설명하고 있다.




홉스는 관념을 물질적 상상력에 의해 산출된 물질적인 사물의 상으로만 국한해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전제하에서 그는 천사나 신에 대한 관념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단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누차 말했듯이, 관념이란 정신이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만일 내가 어떤 것을 욕구하거나 두려워한다면, 나는 이와 동시에 욕구와 공포감을 지각하기 때문에 이 욕구(volitio)와 공포감(timor)도 관념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28)




사자를 보는 것(videre)과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사자를 두려워하는 것(timere)은 분명히 다른 것이며, 또한 어떤 사람이 뛰는 것은 보는 것과 그 사람이 뛰고 있다고 긍정하는 것(affirmare)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29)




그러므로 의지 혹은 정념은 ‘본래적 의미로서의’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이 양자는 모두 어떤 사항에 대한 입장표명이라는 특징을 가지면서 긍정과 부정, 동의와 동의거부라는 양극성에 의해 특징지워지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사유들’을 (관념․의지 혹은 정념․판단이라는)세 종류로 나누는 것을 포기하고, 판단을 의지에 종속시켜서 (관념․의지 혹은 정념이라는)두 종류로 나누게 된다.30)


   제3성찰에 이어 곧 바로 제4성찰에서 데카르트는 판단을 일종의 의지활동(illos actus voluntatis sive illa iudicia)으로,31) ꡔ철학의 원리ꡕ에서는 긍정과 부정을 의지양태로 간주하고 있으며,32) 레기우스(Regius)에 대한 반박에서는 판단활동을 의지의 결정(determinatio voluntatis)으로 파악하고 있다.33) 그래서 이제 데카르트에 있어 오류의 원인은 판단 그 자체에 있기 보다는 오히려 의지에 있는 것으로, 더 정확히 말해서 자유의지의 오용에 있게 된다.




그러면 내가 범하는 오류는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한가지 사실로 부터, 즉 의지가 오성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 미치는 것인데 내가 의지를 오성과 같은 한계안에 머물게 하지 않고, 내가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에 까지 미치게 하는 것에 기인한다. 이런 것에 대해 의지는 비결정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쉽게 참과 선으로 부터 이탈해서 내가 잘못과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34)




우리가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경우, 우리가 이것에 대해 긍정이나 부정을 하지 않는 한 오류를 범하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인식한 것에 대해서만 긍정이나 부정을 하는 경우에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류란 우리가 올바르게 지각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릴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이다.35)




따라서 오류는 관념이나 오성의 지각작용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의지 그 자체에도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 역시 성실하고 완전한 신이 인간 정신에게 부여한 능력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결함이 없다. 오류는 판명하게 인식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 의지가 자의적으로 이런 저런 주장을 할 경우에만 발생하게 된다. 이런 의지의 주장(동의나 거부의 활동)을 데카르트는 판단이라고 부르며, 이런 한에서 데카르트에 있어 판단은 명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의지활동 그 자체일 뿐이다.36) 또한 판단을 의지작용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한에서, 그것을 오성의 지각작용으로 파악하는 레기우스와 데카르트는 서로 대립되고 있다.37)




                               IV




   제3성찰의 ‘사유들’(cogitationes: 이하 사유들(C)로 약칭)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개념이 ꡔ정념론ꡕ(Les passions de l’âme)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유들’(pensées: 이하 사유들(P)로 약칭)과 ꡔ철학의 원리ꡕ 제1부 48장에 나타나고 있는 ‘지각들’(perceptiones)이다.


   우선 ꡔ정념론ꡕ 제1부 17장에서 사유들(P)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되고 있다. 정신의 능동(actions de l’âme) 혹은 의지(volentés)와 정신의 수동(passions de l’âme) 혹은 지각(perceptions)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의지는 다시 두가지로 세분된다. 하나는 우리가 신을 사랑할려고 노력하거나 혹은 비물질적인 것을 지향하는 경우처럼 정신속에 그 목적이 있는 의지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앞으로 걷고자 할 경우에 다리가 앞으로 움직이는 경우처럼 우리 신체속에 그 목적이 있는 의지활동이다.38)


   지각 또한 마찬가지로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정신이 지각의 원인일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물질적인 것이 그 원인일 경우이다. 정신을 원인으로 하는 것은 의지활동에 대한 지각이거나, 상상력에 대한 지각이거나, 이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지각들이다.39) 물질적인 것을 원인으로 하는 것은 신경체계를 통해서 정신속으로 유입되는 지각들이다. 이것들중의 몇몇은 감관을 자극하는 외적 사물들과, 다른 몇몇은 우리 신체 혹은 몇가지 신체기관과, 또 다른 몇몇은 우리 정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외적 사물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지각들은 외감속에 어떤 운동을 야기하는 외적 사물들에 의해 생기며, 신경을 통해 두뇌속에 일어나기 때문에 정신은 이것들을 지각하게 된다. 우리 신체와 관련을 갖고 있는 지각들은 신체속에 현존하는 것으로 지각되는 것으로서 배고픔․갈증․고통등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신에 연관되는 지각들은 그 작용인이 정신속에 있는 것으로 감지되는 것으로서 그 최종원인이 알려지고 있지 않는 기쁨․분노와 같은 감각들이다.40)


   이렇게 되면 사유들(P)는 사유들(C)와 유사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물론 데카르트가 사유들(C)를 언급할 때 정념을 의지와 동일한 차원에서 다루면서(voluntates sive affectus) 그것을 크게 부각시켜 설명하고 있지 않고, 또 사유들(P)을 언급할 때 ‘본유관념’이나 ‘판단’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저 양자가 서로 다른 것을 뜻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3성찰과 ꡔ정념론ꡕ이 갖고 있는 고유한 집필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3성찰에서 사유들(C)를 언급할 때 데카르트의 주요의도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앞서 오류의 원인을 제시하는데 있었던 반면,ꡔ정념론ꡕ에서의 사유들(P)를 설명할 때, 그의 의도는-이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이-인간의 정념 일반을 고찰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41)


   사유들(C) 및 사유들(P)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면서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 ꡔ철학의 원리ꡕ 제1부 47장에 나타나 있는 ‘지각들’이다. 같은 장에서 데카르트는 ‘지각들’을 ‘사유들’이라는 단어와 혼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상당히 유사하다. 다음 장인 48장에서 데카르트는 ‘지각들’을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지각들’은 사물들과 연관되거나, 사물들의 정념들과 연관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지 ‘진리의 씨앗’으로서 정신속에 내재하고 있는 ‘영원한 진리들’(aeternas veritates)이다.


   사물과 연관을 맺고있는 것은 실체․존재․지속․수와 같은 보편적인 개념으로서, 이것들은 모든 사물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 또한 사물의 두가지 범주, 즉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있다. 다시 말해 정신적 실체에 속하는 것과 물질적 실체에 속하는 것이 있는 바, 오성작용과 의지작용이 전자에 속하고, 형태와 운동등이 후자에 속한다. 이것들은 모두 데카르트가 ꡔ정신지도를 위한 제규칙ꡕ에서 ‘단순본성들’로 파악한 것이며, 복합본성들을 구성하는 더 이상 분해될 수 없는 것들이다. ‘단순개념들’ 혹은 ‘단순본성들의 상’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관념의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속에서 나타나 있는 ‘지각들’이라는 말과 어울리게 된다.42)


   이것들 외에 ‘지각들’에 귀속되는 것은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로서 인간내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으로서 정념인 바, 허기․갈증과 같은 욕구가 첫번째이며, 슬픔․기쁨과 같은 정신의 수동을 나타내는 감정이 두번째이며, 마지막으로는 소리․색깔․맛․굳기․향기와 같은 감각들이다.


   끝으로 ‘지각들’에 귀속되는 것은 정신속에서 내재해 있고 ‘공리’라고 불리워지는 ‘영원한 진리들’인 바, “무로 부터는 무가 나온다”, “어떤 것이 일어나고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사유하는 자는 사유하는 동안 존재해야 한다”는 명제등이 그것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런 ‘공통개념들’은 그 자체로 알려지는 자명한 것으로서 선입견에 물들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들은 그에게 있어 인식형이상학적인 전제로 암암리에 활용되고 있다.43)


   그래서 ꡔ철학의 원리ꡕ에 나타난 ‘지각들’은 사유들(C)와 거의 동연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전자에 명시적으로 포함된 ‘영원한 진리들’은 후자에 있는 본유관념들 중의 일부이고, 또 후자에 포함된 ‘판단’은 전자에서 언급된 의지의 활동이라고 해독하면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V




   제3성찰은 데카르트 텍스트들중에서 읽기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리라. 그 이유는 그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안셀무스나 아퀴나스등이 제시한 신증명 방식을 가급적 반복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신증명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취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확실한 것은, 그가 그토록 경계해마지 않았던 스콜라적 용어를 제3성찰에서 꺼림낌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때의 증명이 충분치 않았던지 제5성찰에서 신존재 증명을 다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그 자신에게도 이 제3성찰은 난해한 텍스트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ꡔ성찰ꡕ은 데카르트가 차분히 그리고 아주 단계적으로 형이상학에 대해 성찰을 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논란을 불러 일으킬만한 주제를 논할 때면, 그는 개념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입장 전개에 급급해하고 있다. 그의 불명료한 개념들중에 하나가 바로 ‘사유’이다. 이 사유개념은 때로는 개별적인 사유작용들(실체의 양태)로, 때로는 본질적 속성(실체의 속성)으로, 또 때로는 인간 내부의 사유현상의 총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유의 세번째 의미가 본 논고에서 논의된 것이며, 이때 사유라는 단어는 항상 복수형인 ‘사유들’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텍스트에서는 또 다른 용어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 보았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본 논고에서 문제된 제3성찰의 문단은 다음과 같이 해독될 수 있겠다. “우리가 우리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사유들은 세가지 종류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첫번째 종류는 우리가 보통 어떤 사물을 지각할 때, 이 사물에 대해 갖게 되는 상이다. 이런 사물의 상을 우리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관념이라고 부르는 바, 이 관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번째 의미는 지각양태로서 오성의 작용이고, 두번째 의미는 이 작용에 의해서 표상된 것이다. 사유들의 두번째 종류는 의지 혹은 정념이고, 세번째 종류는 판단이다. 의지 혹은 정념과 판단은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관념을 전제로 하면서 또 다른 것이 추가된 것이다. 의지 혹은 정념에는 사물의 상 뿐만 아니라 의욕이나 감정이, 판단에는 판단활동이 추가적으로 지각된다.  의욕․감정․판단활동이 우리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각된다는 의미에서, 그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관념 혹은 (ꡔ철학의 원리ꡕ에서 사용된 의미로)‘지각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단을 고리로 해서 데카르트는 오류의 원인이 오직 판단활동에, 더 정확히 말해서 자유의지의 오용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 더 나아가 제3성찰의 본래 과제인 인과론적 신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무한하고 완전한 신에 대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관념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정신이 그 기원이 될 수 없고,44) 따라서 그 관념은 그것에 해당되는 것(신 자체)으로 부터 직접 유래해야 하며, 그러므로 그 관념의 원인인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신속에서 직접 지각되는(‘사유들’과 다름 아닌)그래서 확실한 신의 관념(결과)에서 출발해서 신의 현실적 존재(원인)를 증명하는 것이 제3성찰에서 시도된 신존재의 인과론적 증명이다.




[펌]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  선  일


 


 


목차






 


 


1. 존재물음


1) 존재


2) 존재물음의 근본 목표


3) 존재물음의 필요성


4) 존재물음의 형식적 구조


5) 존재물음의 우위


(1)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


(2) 존재물음의 존재자적 우위


6) 존재물음의 방법


2. 세계


1) 세계 일반의 세계성의 이념


(1) 세계와 세계성


(2) 세계와 자연


2) 환경 세계 안에서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


(1) 배려


(2) 도구


3) 용재자(用在者)의 세계 적합성


4) 세계의 세계성


(1) 적소성


(2) 유의의성


5) 공간성


(1) 용재자의 공간성


(2) 현존재의 공간성


(3) 공간명도


3. 세인(世人)


1) 타자


2) 공동 존재


(1)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으로서의 공동 존재


(2) 고려


3) 실존범주로서의 세인


4. 내-존재


1) 개시성


(1) 정상성(情狀性)


(2) 이해


(3) 말


2) 일상적 개시성


(1) 빈 말


(2) 호기심


(3) 애매성


(4) 퇴락


5. 현존재의 존재: 마음씀


1) 불안


2) 마음씀


3) 실재성


4) 진리


(1) 전통적 진리 개념: 일치


(2) 전통적 진리 개념의 존재론적 기초


(3) 진리의 근원적 현상


(4) 진리의 존재양식과 진리를 전제함


6.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 죽음과 양심


1) 죽음


(1) 죽음의 경험 불가능성


(2) 죽음에 이르는 존재


(3) 죽음의 실존론적 존재론적 구조


(4)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


(5)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 선구


2) 양심


(1) 부름


(2) 책임


(3) 결의성


3) 선구적 결의성


7.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 시간성


1) 마음씀의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시간성


2) 본래적 시간성과 비본래적 시간성


(1) 개시성 일반의 시간성


(2) 세계-내-존재의 시간성


(3) 현존재적 공간성의 시간성


3) 통속적 시간


(1) 현존재의 시간성의 일부(日附) 가능성


(2) 공공적 시간과 세계시간


(3) 통속적 시간개념 발생


 


참고문헌



일러두기


 


 


1. 이 책의 표준판본은 Martin Heidegger(1889-1976), Sein und Zeit, (Max Niemeyer, 비개정 제7판, 1953)이다.


 


2. 이 책의 표준 영역본은 Being and Time, (John Macquarrie/ Edward Robinson 공역, Blackwell, 2001)이다.


 


3. 이 책의 우리말 표준 판본은 『존재와 시간』(소광희 역, 경문사, 1998)이다.


 


4. 이 책에서 제시된 읽기자료는 우리말 표준판본에서 따 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어가 한자(漢字)이기에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경우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경우에 따라 그 번역어에 해당하는 한자를 [  ] 안에 보충해 넣었다. 그밖에도 보충할 사항은 [  ]를 이용하였다.


 


5. 이 책은 각주를 모두 본문 안에 넣었다. 또 하이데거의 저작을 인용하는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을 생략했고, 나머지 저자의 경우에는 이름을 명기했다.


 


6. 이 책에서 『존재와 시간』을 인용하는 경우에는 (   ) 안에 표준 판본과 우리말 표준 판본의 쪽수를 병기(倂記)하였다. 순서상 앞의 숫자가 표준 판본의 쪽수이고 뒤의 것이 우리말 표준판본의 쪽수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이성 일변도로 치닫던 서구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뒤흔든 20세기 철학의 거장이다. 1889년 9월 26일 독일 동남부 슈바르츠발트의 한 작은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카톨릭 교회지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종교에 관심을 보여 1909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신학부에 입학한다. 그러나 2년 후 그는 심장에 관련된 질병으로 인해 그토록 열망하던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철학연구에 전념한다.


프라이부르크 대학 시절 하이데거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후설의 『논리연구』였다. 박사학위 논문인 『심리주의의 판단론』, 교수자격 취득논문인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은 물론, 초기의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및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도 기본적으로는 현상학적 시각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이었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당시에도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문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는 있었으나 그의 대한 세평은 후설의 추종자 정도였다.


그러나 1927년 『존재와 시간』의 출판 이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작품의 성과는 실로 대단했다. 그는 즉각 세인의 주목을 받았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20세기 철학자 중 아무도 대적하지 못할 만큼 비상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의 제자인 한나 아렌트(H. Arendt)는 하이데거의 사유의 폭풍을 플라톤(Platon)에 비유할 정도였고, 이미 그의 생시(生時)에도 세계 철학계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주목하게 되었다. 『존재와 시간』은 일거에 하이데거를 20세기 철학의 거장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 작품은 너무도 비범했다. 이 작품은 고전적 인식론에서 논의되던 일련의 낡은 물음들을 자신의 사유 세계 안에서 새롭게 걸러 내었을 뿐 아니라, 신칸트학파로부터 가치철학에 이르는 당대의 철학적 문제를 모두 껍데기로 처리했고, 번개 불처럼 철학의 아성들에게 철퇴를 내리쳐 플라톤으로부터 니체에 이르는 형이상학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더욱이 언어마저 독특하였기에, 이 작품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처음부터 생소하게 여겨졌다. 이미 20년간의 역사를 지닌 채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해야 했던 현상학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을 헌정받은 후설(Husserl)이 놀라움을 넘어선 실망감을 토로할 정도로 하이데거는 이미 후설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젊은 시절의 하이데거는 벌써 자신만의 독특하고 다양한 언어로 새로운 사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면 『존재와 시간』이 몰고 온 폭풍의 비밀은 무엇인가? 폭풍의 비밀은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다. 언뜻 보면 간단한 듯한 이 물음이 우리를 인간 존재의 심연으로 안내한다.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겠노라고 나선다면, 그것은 가히 놀랄 만한 일이다. 아무도 이 물음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물음이 결코 새롭지 않다는 점을 하이데거도 솔직히 인정한다.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의 당혹감을 설파하는 플라톤의 『소피스트 대화록』은 이 물음이 형이상학 자체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우리를 철학적 전통에 얽매려고 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전통에 도전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전통을 철저히 사유하여 전통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형이상학적 전통의 배후로 되돌아가 형이상학을 가능하게 했던 근원적 영역에 대해 물음을 개진한다. 그러고는 그는 칠흑 같은 어두움에 파묻혀 있던 존재의 의미를 우리에게 드러낸다. 존재물음은 궁극적으로는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한 비판적 대결이 된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존재물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으로 수행된다. 인간의 존재이해를 실마리로 하여 인간의 실존론적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존재 일반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존재와 시간』의 근본목표이다. 이런 논의 과정에서 전통적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적 문제인 인간, 세계, 시간, 존재에 대한 물음이 이제껏 아무도 이르지 못한 새로운 토대에 놓일 뿐더러, 종래 윤리학이나 종교의 차원에서 논의되던 죽음과 양심의 문제가 새롭게 실존론적으로 정초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관심은 단순히 인간의 실존론적 구조에 대한 이론적 천착만이 아니었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일상적 세계에로 퇴락한 인간을 끄집어내어 가장 적나라한 본래적 자기 앞에 세워 놓고자 한다. 선구적 결의성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허무한 실존을 떠맡아 본래적 자기로 변양한다. 이로써 인간은 전통 속에 매몰된 세인(世人)으로부터 벗어나 어떤 개념을 가지고 어떻게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각성하게 된다. 아마도 당시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하이데거에게 열광한 이유는 여기에 있으리라.


존재물음은 한 민족의 정신적 운명을 저울질하는 사건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를 과장으로 여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민족이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민족의 역사적 삶이 펼쳐진다면, 존재물음은, 비록 지극히 멀고 또한 지극히 간접적으로나마, 한 민족의 역사적 결단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제기했던 것이며, 이로써 형이상학적 위기에 처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아마도 바로 여기에 하이데거 사유의 위대함이 있지 않을런지.


그런데 기존의 『존재와 시간』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원래 이 작품을 두 부로 계획했었다. 제Ⅰ부는 ‘현존재를 시간성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시간을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서 해석한다’는 주제 아래, 제Ⅰ편 ‘현존재의 예비적 기초분석’, 제Ⅱ편 ‘현존재와 시간성’, 제Ⅲ편 ‘시간과 존재’를 기술할 예정이었다. 또 제Ⅱ부는 ‘존재시간성의 문제를 실마리로 한 존재론 역사의 현상학적 해체의 개요’라는 주제 아래, 제Ⅰ편 ‘존재 시간성의 문제의 전(前) 단계로서의 칸트의 도식론과 시간이론’, 제Ⅱ편 ‘데카르트의 >cogito sum<(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의 존재론적 기초와, >res cogitans<(생각하는 사물)의 문제로의 중세 존재론의 인수’, 제Ⅲ편 ‘고대 존재론의 현상적 토대와 한계를 판별하는 기준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에 관한 논문’을 기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출판한 글은 제Ⅰ부의 제Ⅰ편과 제Ⅱ편에 불과하였다. 마르부르크 대학 철학부의 학장은 하르트만(Hartmann)의 후계자로 하이데거를 추천하기 위해 하이데거에게 미비한 논문이나마 출간하도록 강요하였으나, 하이데거는 제Ⅰ부 제Ⅲ편마저 삭제하고 말았다. 그 까닭은 ‘시간과 존재’를 기술할 만한 적합한 언어를 그 당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Ⅰ부 제Ⅲ편 ‘시간과 존재’는 그 이후 『사유의 사태』(1969)에 수록되어 발표되었고, 제Ⅱ부 제Ⅰ편 ‘칸트의 도식론과 시간이론’은 단행본『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로 발표되었으며, 또한 제Ⅱ편 ‘데카르트의 >cogito sum<’ 및 제Ⅲ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이론’은 『존재와 시간』 제3장 ‘세계의 세계성’ 및 81절에서 각각 이미 상술되었다. 또한 ‘시간성의 문제를 실마리로 해서 존재론의 역사를 해체한다’는 과제는 비단 몇 저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이데거의 많은 저술에서 거론된다.


『존재와 시간』 이후에도 하이데거는 철학사에 획기적인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철학에의 기여』, 『이정표』, 『언어로의 도상』 등이 그의 후기 대표작이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그의 철학적 관건은 우리 시대를 정초하는 존재의 숨겨진 의미를 사유함으로써 현대 과학 기술문명을 대신할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열어 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창에 취임함으로써 한 때 정치적 오점을 남기긴 바도 있다. 그러나 그가 1976년 자신의 고향인 메스키르히에 조용히 잠든 이후에도 계속 발간되고 있는 100여권의 작품은 그의 존재사유가 오늘의 우리에게 끼치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현대 철학의 과제는 하이데거 철학의 재해석이라 할 정도로, 지금도 우리는 하이데거와 더불어 ‘숲길’을 따라 존재의 ‘이정표’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개시성


정상성


(피투성)



이해


(기투)


본래적 개시성


정상성


(불안)


묵언


(결의성)


이해


(선구)


비본래적 개시성


정상성


(두려움)


퇴락


(빈 말)


(피해석성)


(도피)


마음씀


피투적 현사실성


(이미 … 내에 있음)


퇴락


(…에 몰입해 있음)


실존성


(자기를 앞지름)


시간성


기존성


(양심)


현재


장래


(죽음)


본래적 시간성


회복


순간


선구


비본래적 시간성


망각


(상기)


현전화


예기


(기대)


(통속적 시간)


(과거)


(현재)


(미래)


 


1. 존재물음


(독: Seinsfrage, 영: The question of Being)


 


신에게 우리는 너무 늦게 왔고


존재에게는 너무 일찍 왔네.


존재에서 비롯된 시(詩)가 인간이라네.


 


하나의 별을 향해 다가서는 것, 단지 이 것 뿐이네.


 


사유는 마치 하나의 별처럼


일찍이 세상의 하늘에 걸려 있는


하나의 사상일 뿐이라네(『사유의 경험으로부터』, 7쪽).


 


길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나간다. 물론 도중에 장애물이 있으면 우회하기도 하지만, 길은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의 목적지만을 갖는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에도 해당한다. 그의 사유의 길은 비록 그때마다의 필요에 따라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 존재의 진리에 관한 물음, 존재의 장소에 관한 물음으로 전개되지만, 이 세 가지의 물음들은 존재에 이르는 하나의 도상에 있다. 존재야말로 그의 사유의 길이 찾아가는 하나의 별이 된다.


하이데거의 사유를 꿰뚫는 하나의 사상(思想)은 존재에 관한 물음이다. 그의 초기의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은 그의 사유의 사태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밝혀준다. 이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듯, 그의 관심은 존재”와” 시간의 공속적 관계를 통해, 다시 말해 시간을 근거로 하여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려는 것이다. 존재가 하나의 별이라면, 시간은 별을 찾아가는 지평이 된다.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와 더불어 존재”와” 시간의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그런데 아무리 모험이라 해도 적막강산 안에서 감행될 수는 없다. 모험을 위해서는 몇 가지의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선행적 이해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우리가 찾아가는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마저 없다면, 우리는 필경 어둠 속을 헤맬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어슴푸레 나마 가지고 있다.


 


1) 존재


(한: 存在, 독: Sein, 영: Being)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는 온갖 종류의 존재자와 더불어 살고 있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존재와 시간』이란 제목이 붙은 책, 또 그 책의 번역서, 컴퓨터와 독서 보조대, 책상과 의자, 이 모든 것은 물론이고, 저 문 밖에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 나의 아이, 이렇게 사유하는 나 자신, 또한 나 자신을 구성하는 근본적 요소라고 내가 믿고 있는 영혼과 육체, 그리고 이 뿐 아니라 항상 나의 사유 속에서 과연 존재하는가라고 의심받고 있는 신까지도 분명히 존재자이다.


앞서 열거한 존재자들은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존재자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모든 것들을 굳이 존재자라고 부르는가? 즉 우리가 존재자라고 부르는 것의 공통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 까닭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기에, 나는 그것들을 존재자라고 부른다. 즉 존재한다 혹은 존재란 우리가 존재자를 비로소 존재자로서 만날 수 있는 가능 근거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그것이다.”(6, 11) 즉 어떤 하나의 존재자에 대해 ‘그것이 있다’ 혹은 ‘그것은 … 이다’라고 말하기 이전, 즉 하나의 존재자에 대해 ‘있음’과 ‘임’이라는 술어를 덧붙이기 이전, 나와 존재자와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선(先)술어적 조건이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존재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가능하게 하는 생성의 원인이 아님은 물론이다. 생성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창조주 역시 하나의 존재자에 불과하니까.


존재는 존재자와 구별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존재가 존재자와 떨어져 있는 어떤 것으로 사유되어서는 않된다. 존재는 존재자가 비로소 존재자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해의 기반’이다. 그러니까 “존재는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이다.”(6, 12) 실로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는 서로 하나가 아니면서 둘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라고나 할까? 여하튼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로서 존재자를 비로소 존재자로서 만날 수 있는 선술어적 조건이므로, 우리가 어떤 존재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존재자에 대한 해석은 그 내용을 달리한다. 존재이해야말로 우리가 존재자를 비로소 존재자로서 만날 수 있는 가능 근거가 된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의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불투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이해는 선술어적 차원에서 전개된다. 따라서 존재이해는 의식에 의해 개념적으로 명료화되기 이전의 막연한 이해에 해당한다. 더욱이 존재이해는 우리에게 의식적으로 반성되지도 않는다. 분명히 어떤 존재이해를 근거로 우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만나고 있으나, 우리는 존재자에게만 관심을 쏟을 뿐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되돌아보지 않으며, 솔직히 말하자면, 이러한 차원의 존재이해가 전개되고 있다는 사건조차를 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물음 앞에서 당혹해 한다. 그러나 존재이해를 통해 존재자를 비로소 존재자로서 만나 존재자의 한 복판에서 존재자에게 의존한 채 삶을 영위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때, 이러한 당혹감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런지?


 


[읽기자료]


우리는 그러한 것을 >존재<라는 낱말을 통해 명명한다. 그 이름은 우리가 >있다<라고, 혹은 >있어 왔다<라고, 혹은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사념하고 있는 바를 명명한다. 우리에게 다다르게 되는 혹은 우리가 닿게 되는 모든 것은, >그것은 있다<라는 사태가 발언되었건 혹은 발언되지 않았건, 여하튼 >그것은 있다<라는 사태를 철저히 관통한다. 상황이 그러함을 우리는 어디에서건 결코 회피할 수 없다. >있다<라는 것이 제 아무리 공공연하게 또한 은닉된 채 다양하게 변화되어 있을지라도, 그 >있다<라는 사태는 그 다양한 변화 안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숙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존재<라는 낱말이 우리의 귓가에 울리자마자, 우리는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 아무 것도 표상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아무 것도 사유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마도 이러한 속단은 올바른 것이다. 이러한 속단을 미루어 볼 때 으레 사람들은 >존재<에 관한 말에 ?? 잡담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 화를 낼 것이며 아예 >존재<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존재를 심사(深思)하지 않은 채, 존재를 향한 사유의 길을 숙고하지 않은 채,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존재<라는 낱말이 말을 하는지 혹은 하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법정이나 된 듯 우쭐거린다. 거의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해서 ‘사유하지 하지 않음(Gedankenlosigkeit)’이 원칙으로 고양되고 있다는 현실에 부딪히지 않는다.


일찍이 우리의 역사적 현존재의 원천이었던 것이 웃음거리 안에 파묻혀 버린 현실을 주목해 볼 때, 단순한 숙고에 관여해 보라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존재<라는 낱말에서 아무 것도 사유할 수 없다. >존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정보를 주는 것이 사유가의 사태라고 추정하는 우리의 추측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그러한 정보가 사유가들에게조차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된다 할지라도, 존재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언제나 거듭 내보이는 것은 적어도 사유가들의 사태로 남을 수 있을 것이며, 그로써 이처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 그 자체는 인간의 시야 안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이다.(『이정표』, 445-446쪽)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그것이다. 존재자가 어떻게 설명되든 존재자는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그 때마다 이미 이해되고 있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가 아니다.(6, 11)


 


‘존재자 그 자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는 ‘무엇이 도대체 존재자를 존재자로 규정하는가’에 관해 물어진다. 우리는 그 무엇을 존재자의 존재로, 또한 그 무엇에 관한 물음을 존재물음이라 명명한다. 존재물음은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규정해 주는 그 무엇에 관해 탐구한다. 이 규정자는 자신의 규정활동의 방식에 맞게 인식되어 이러 이러한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 즉 개념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존재자의 본질적 규정성을 존재를 통해 개념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규정자 자신이 충분히 파악될 수 있어야 한다. 즉 먼저 존재자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 그 자체가 미리 개념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이 놓여 있다.: 저 물음에서 이미 선이해된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222-223쪽)


 


2) 존재물음의 근본 목표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우리를 당혹에 빠뜨린다. 당혹에서 벗어나는 첩경은 먼저 이 물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서언에서 존재물음의 근본 목표를 제시한다. 이 서언에서 특히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플라톤 『소피스트』편(244a)에서 논의된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에 관한 인용문이다. 『존재와 시간』 1절에서도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이 망각 속에 빠져 버린 세태를 비판한 뒤, 거인족의 싸움을 언급한다.


거인족의 싸움에서 문제가 되는 존재는 우시아(ousia)이다. 우시아는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와는 다른 것이다.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가 인간과 존재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선술어적 조건임에 반해, 우시아는 본래적 존재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은, 참된 존재자를 가시적(可視的) 물체에 한정하려는 거인족(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 원자론자, 유물론자를 비유함)과 참된 존재자를 비가시적인 형상에서 구하려는 올림포스 신들(피타고라스학파, 엘레아 학파를 상징함)간의 싸움이지,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싸움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소피스트』 편의 구절은 존재물음의 길을 열어 놓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한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 앞에서 머뭇거린다. 그러나 『소피스트』편의 구절은 결코 장식물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즉 본래적 존재자)를 둘러싼 거인족과 올림푸스 신들의 싸움을 통해 하이데거는 자신이 거론하는 존재의 의미를 해명할 단서를 마련한다.


우시아란 근본적으로는, 직접적이고도 또한 항상 우리 앞에 현재하는 소유물을 의미한다. 우시아가 “직접적이고도 또한 항상 현재하는 소유물”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우시아를 비로소 우시아로서 만날 수 있는 선술어적 조건으로서의 존재는 “가까이 다가와 있는 가운데 지속함“을 의미하며, 따라서 존재는 “지속적인 지금”을 향해, 즉 시간을 향해 기투된 채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본래적 존재자를 둘러싼 싸움에서는, 거인족과 올림푸스 신들이 의식했건 안 했건, 이미 존재가 시간을 근거로 이해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직접적인 존재이해는 존재를 시간을 향해 근원적이고도 자명하게 기투함 안에 전적으로 보유되어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시간을 향한 존재의 기투는 근원적이고도 자명한 기투이다. 이러한 기투를 통해 그들은 우시아를 비로소 우시아로서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기투는 근원적 기투이다. 또한 솔직히 말해 이러한 기투가 그들의 사유 속에서 진행됨을 그들이 모를 정도였기에, 이러한 기투는 자명한 기투가 된다.


그런데 시간을 향한 존재의 기투는 거인족의 싸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기투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존재이해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내적이고도 은밀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전통적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초시간적 존재자, 시간적 존재자, 무시간적 존재자로 분할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이 『존재와 시간』의 첫 머리에 화두로 등장한 까닭을 알게 되었다. 하이데거가 이러한 화두를 통해 보고자 한 것은 존재와 시간의 공속적 관계였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물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더 근원적으로 “이처럼 존재를 시간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또한 자명하게 이해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241쪽)라고 반문한다. 그는 존재와 시간의 공속적 관계의 근거에 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그 이후의 형이상학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논구된 시간의 본질은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준 바 없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존재”를 “지금”으로부터 규정함으로써 존재”와” 시간이라는 철학의 근본적 사태를 근원적으로 해명할 기회를 외면했다.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근원적 본질을 놓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존재”를 “지금”을 근거로 규정하나, “지금”이란 하이데거가 그리는 근원적 시간으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시간성격에 불과하다. 즉 “지금”이란 ‘[근원적] 시간 안에 그때마다 또한 지속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하나의 시간성격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와” 시간의 공속이라는 철학의 근본적 사태를 놓치고 있음은 당연할 뿐더러,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존재와 시간』이 추구하는 존재물음, 즉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근본 목표도 알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바로 시간의 근원적 본질을 해명함으로써 존재”와” 시간의 공속 관계를 근원적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아니 근원적 시간을 지평으로 하여 존재를 찾아 나서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에서 비롯된 시(詩)”인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니라.


 


[읽기자료]


왜냐 하면 존재한다는 표현을 쓸 때 여러분이 본래 의미하려는 바를 여러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전에는 그것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당혹감에 빠져 있다.(플라톤, 『소피스트』, 244a) 오늘날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의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혹감에만 빠져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 물음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다시 일깨우는 것이 필요하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래 논문의 의도이다. 시간을 모든 존재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으로서 해석하는 것은 이 논문의 당면 목표이다.(1, 1)


 


우시아(ousia) 혹은 파루시아(parousia)로서의 본래적 존재자는 근본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음(Anwesen)”, 즉 직접적이고도 또한 항상 현재하는 소유물, 다시 말해 “재산”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서는 무엇이 중요한가?


이러한 기투가 누설하는 바는 이렇다. 즉 존재는 가까이 다가와 있는 가운데 지속함(Beständigkeit in Anwesenheit)을 의미한다.


이렇게, 즉 보다 정확히 말해, 존재에 대한 자발적 이해 안에는 시간규정들이 모여들지 않는가? 직접적인 존재이해는 존재를 시간을 향해 근원적이고도 자명하게 기투함 안에 전적으로 보유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존재를 둘러싼 모든 싸움은 처음부터 시간의 지평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가?(『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240쪽)


 


우리가 존재자를 분할하면서, 즉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를 고려하여 구별하면서, “자연스레” 존재자를 시간적 존재자, 무시간적 존재자, 초시간적 존재자로서 규정한다라는 사실은 단지 다소간 성공적이었던 혹은 언제 어디서건 한번쯤은 성립했던 습관일 뿐인가?(『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241쪽).


 


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시간분석은 하나의 존재이해에 의해 주도된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이해는 ?? 은밀한 행동방식으로 ?? 존재를 지속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음(beständige Anwesenheit)으로 이해하며, 또한 이로써 시간의 “존재”를 “지금”으로부터, 즉 시간 안에 그때마다 또한 지속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다시 말해 고대적 의미에서는 본래적 그러한 시간성격으로부터 규정한다.(『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241쪽)


 


3) 존재물음의 필요성


20세기 초 독일 철학계를 지배하던 것은 신칸트학파였다. 당시 신칸트학파는 헤겔학파의 몰락과 실증과학의 눈부신 성장으로 인해 자신의 명성을 상실하였던 형이상학에게 ‘칸트로의 복귀’를 통해 다시금 학문적 본질을 회복시켜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볼 때 신칸트학파는 하이데거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의 근본적 사태인 존재물음을 놓치고 있었다. 즉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도, 비록 은닉된 채로나마, 여하튼 은밀히 전개되고 있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새로이 부활한 형이상학 안에서는 망각되고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망각은 비단 신칸트학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형이상학이 걸머진 운명이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형이상학은 철학을 형이상학,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 인식론 등으로 분과화한 뒤 그렇게 분과화된 한 영역으로서의 형이상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은 그러한 분과화와는 무관하게 서구 철학 전체를 철저히 지탱해 왔던, 이제까지 우리가 전수받은 독특한 존재이해의 영역을 가리킨다. 돌아보면, 전통적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는 실로 다양한 존재개념이 등장한다.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있음”과 “임”, 그러니까 존재사실(Daβsein)과 무엇존재(Wassein), 즉 중세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현존(existentia)과 본질(essentia)은 물론이거니와, 진리존재(Wahrsein), 가능존재(Möglichsein), 현실존재(Wirklichsein), 필연존재(Notwendigsein) 등 서로간 차별적인 존재개념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다양한 존재개념들은, 우리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받아들이고 난 이후, 즉 존재자가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인 한에서, 이미 존재하는 것의 존재함을 구성하는 개념일 뿐,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 즉 존재자를 비로소 존재자로서 만날 수 있는 선술어적 조건으로서의 존재와는 구별된다. 그래서 후기 하이데거는 자신이 거론하는 존재와 구별되는 형이상학적 존재개념을 존재자성(Seiendheit)이라고 명명하여 차별화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는 형이상학적 존재개념들이 자라 나올 근본적 원천이 된다. 형이상학적 존재개념들은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의 다양한 파생태이다. 이러한 존재의 파생태를 하이데거는 존재자성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존재자성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다. 형이상학은, 은밀하게 전개되고 있는 존재이해의 사건을 망각한 채, 존재자를 향한 시각과 존재자에 입각한 시각으로부터만 존재를 사유한다. 그러기에 형이상학은 존재자성의 구조적 다양성을 포착하고 그것을 존재범주로 개념화할 뿐, 존재자성이 비롯된 근원적 영역에 대해서는, 즉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물음도 던지지 못한다. 형이상학적 물음은 이 물음에 선행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형이상학의 주도적 물음은 “존재자란 무엇인가?”로 규정된다. 형이상학의 주도적 물음은 존재를 존재자성의 차원에서만 해석한 뒤 존재자의 생성원인을 최고의 존재자로 소급하여 해명함으로써 우리가 존재물음에 이를 최소한의 통로마저 봉쇄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전통의 배후로 되돌아가 형이상학을 가능하게 했던 근원적 영역에 대해 물음을 개진한다. 그의 존재물음은 궁극적으로는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한 비판적 대결이 된다. 하이데거의 탁월한 해석가인 폰 헤르만(F.W. von Hermann)은 이러한 상황을 다음처럼 생생히 묘사한다.


 


하이데거의 극단화된 존재물음이 캐어묻는 존재의 의미는 존재자성과 전승된 존재범주의 울타리 안에서는 탐구될 수 없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은 존재자성과 존재범주들의 배후로 되돌아간 뒤, 그러고는, 존재자의 무엇존재, 존재사실, 진리존재, 가능존재, 현실존재, 필연존재 등 존재자성의 다양한 방식들이, 또한 존재범주들 안에서 개념화된 존재자의 존재구조들이 궁극적으로 규정되었던 그 곳, 즉 가장 극단적인 근원적 차원을 향해 물음을 던진다.(Friedrich-Wilhelm von Herrmann, Subjekt und Dasein, Vittorio Klostermann Frankfurt am Main, 1985. 25쪽)


 


이 인용문에서 언급된 “가장 극단적인 근원적 차원”이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 즉 존재 그 자체, 즉 존재로서의 존재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렇다면 형이상학이 망각해 버린 존재는 어떠한 형세일까? 비록 존재가 형이상학에 의해 명시적으로 주제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간이 존재자와 관계하는 이상, 존재이해의 최소한의 흔적은 남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존재에 대한 선입견이라도 남아 있지 않겠는가? 이제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선입견을 3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존재는 가장 보편적 개념이다. 하이데거도 존재에 대한 이 첫 번째 선입견에 형식적으로는 동의한다. 그러나 보편성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동의의 여부는 전혀 달라진다.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 역시 존재자의 영역을 추상화함으로써 도달하는 유적 보편성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존재자의 유적 보편성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개념의 유비적(類比的) 통일을 높이 평가한다. 존재개념의 유비적 통일은 사태내용적 최고 유개념의 다양성에 머물지 않고, 적어도 각 존재자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 존재의 명목상의 통일은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볼 때, 존재의 유비적 통일이 하이데거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의 보편성을 충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존재의 유비적 통일은 명목적 보편성에 불과했다.


잠시 앞서의 논의로 돌아가자. 하이데거의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그것이다.”(6, 11)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생성하는 궁극적 원인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존재란 존재자를 비로소 존재자로서 “이해하는 기반”(6, 11)이다. 즉 존재는 우리가 존재자를 비로소 존재자로서 받아들이는 선술어적 조건이다. 그러기에 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가 아니면서”(6, 11) 동시에 언제나 “존재자의 존재”(6, 11. 혹은 9, 16)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존재 혹은 범주는 물론, 모든 형이상학적 존재개념들은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선술어적 조건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거론하는 존재는, 형이상학의 다양한 존재개념들을 지배하는 존재의 단일한 규정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존재의 보편성은 성립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적 존재개념 상호간의 형식적이며 명목상의 통일만을 말했을 뿐 이 다양한 형이상학적 존재개념들이 비롯되는 존재의 보편성은 밝혀내지 못한다. 즉 그는 존재의 유비적 통일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존재라는 동사의 상이한 쓰임이 실체를 기반으로 하여 어떻게 서로 관련되는지를 설명할 뿐, 범주들의 다수성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단일한 규정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한바 없다. 더욱이 그 이후의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한 채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여 존재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공허한 개념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존재는 가장 보편적 개념이로되, 가장 불명료한 개념이다.


둘째, 존재에 대한 두 번째 선입견은 존재의 정의불가능성이다.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태도는 앞서와 같이 이중적이다. 존재는 존재자와 구별되는 보편적 개념이다. 존재의 보편성은 존재자의 모든 유적 보편성을 넘어선다. 따라서 존재자를 정의하는 전통적 방식이 존재의 정의에 적용될 수는 없다. 하나의 존재자를 우선은 그것이 속한 최근류(最近類) 안에 위치시켜 놓고 그러한 류 안에 속한 종들 사이에서 그 존재자가 갖는 종차(種差)를 덧붙여 존재자를 정의하려는 방식이 존재의 정의에 적용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확인시켜 주는 것은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라는 점뿐이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 면제될 수 없다. 존재자의 차원에서는 존재가 정의될 수 없으므로, 오히려 존재자를 넘어선 차원에서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은 더욱 더 요구되는 것이다.


셋째, 존재에 대한 세 번째 선입견은 존재의 자명성이다. 그러나 존재가 존재자의 유적 보편성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 하고, 그리하여 존재자 차원에서의 정의가 적용될 수조차 없다면, 어떻게 존재가 자명한 개념일 수 있는가?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의 자명성을 반어적(反語的)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철학은 자명성에 대한 도전이다.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에게 그들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여 진리를 향한 대도(大道)를 열었듯이.


우리는 모든 인식과 언표에서, 존재자에 대한 태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존재라는 낱말을 사용함은 물론이거니와, 또한 존재라는 낱말이 표현된 문장도 그야말로 군말 없이 이해한다. “하늘은 푸른 빛이다.”, 혹은 “나는 기뻐하고 있다”라는 문장을 재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아마도 없으리라. 어느 누구도 이런 문장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호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개념의 자명성을 확인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차원에서의 자명성이 참다운 의미에서의 자명성일까?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이런 문장들을 이해하면서 알고 있는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 혹시 어쩌면 우리는 존재개념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라는 무지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존재의 자명성을 낱말 그대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명성은 하나의 선입견에 불과하다. 오히려 존재자에 대한 우리의 모든 태도와 존재에는 아프리오리하게 하나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다. 그러한 수수께끼란, 우리가 존재자와 관계하는 한 이미 어떤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건만 존재이해 자체가 망각되고 있으며 또한 따라서 존재가 이해되는 ‘거기’ 즉 존재의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채 어둠에 묻혀 있다라는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평균적 존재이해는 자명하기는커녕 오히려 막연하다. 우리의 평균적 존재 이해가능성은 몰이해가능성을 드러낼 뿐 인 것이다. 이로써 존재물음의 필요성은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입문』에서 존재물음의 필요성을 다시 거론한다. 아마도 존재 역사적 지평에서 존재물음의 필요성을 새롭게 각인하려 했던 것이 하이데거의 의도인 듯 하다. 이 논의는 존재물음의 필요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와준다. 단 우리는 이 논의를 보론(補論)으로 돌려 살펴보고자 한다.


 


[읽기자료]


우리 시대에 형이상학을 다시 수긍하게 된 것을 진보라고 간주한다 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을새로 불붙이려는 노력을 안 해도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된 물음은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 물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를 숨가쁘게 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 실제적 탐구의 주제적 물음으로서는 ?? 침묵해 버리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이 이룩한 성과는 여러 가지 첨삭과 덧칠을 거쳐 헤겔의 『논리학』에까지 일관되어 왔다. 그리하여 일찍이는 사유의 최고의 긴장 속에서 비록 단편적이고 초보적일 망정 현상들로부터 쟁취되었던 것이 오랫동안 진부한 것으로 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존재 해석을 위한 그리스적 단초들의 지반 위에서 하나의 독단, 즉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선언할 뿐 아니라 더욱이 이 물음은 등한히 해도 좋다고 시인하는 독단이 형성되었다.(2, 5-6)


 


전통은 전래된 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근원적 원천, 즉 전승적 범주들과 개념들이 부분적으로는 진정한 방식으로 거기에서 나온 그 근원적 원천으로 가는 통로를 막아버린다. 더욱이 전통은 그러한 유래를 일반적으로 잊어버리게 한다. 전통은 원천으로의 그런 귀환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것조차 불필요하게 만든다.(21, 33)


 


1. 존재는 가장 보편적 개념이다 . (…) 제일 먼저 인지되는 것은 존재이며, 존재의 이해는, 사람들이 존재자에 있어서 파악하는 모든 것 속에 그 때마다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존재의 보편성은 유(類)의 보편성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가 유와 종(種)에 따라 개념적으로 분절되는 한, 존재자의 최고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 존재는 類가 아니다. 존재의 보편성은 모든 유적 보편성을 넘어선다. 존재는 중세 존재론의 명칭에 따르면 초월자이다. 사상적[事象的] 최고 유개념의 다양성과 구별되는 이 초월적 보편자의 통일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유비(類比)의 통일로서 인식하였다. 플라톤의 존재론적 문제제기에 전적으로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유비의 통일을 발견함으로써 존재의 문제를 원칙적으로 새로운 지반 위에 세웠다. 그러나 그도 물론 이 범주적 연관들의 어두움을 밝히지는 못하였다.(3, 6-7)


 


2. 존재 개념은 정의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들은 이 개념의 최고의 보편성에서 추론하였다. 만약 정의는 最近類와 種差에 의해 이루어진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옳다. 사실 존재는 존재자로서 파악될 수는 없다. (…) 존재에는 어떤 성질도 덧붙일 수 없다. 존재에 존재자를 귀속시키는 방식으로는 존재는 규정될 수 없다. 존재는 정의를 통해 상위개념으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고, 하위개념에 의해 서술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서 귀결되는 것은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뿐이다.(4, 8)


 


3.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모든 인식과 언표에서, 존재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존재 [있다 ; 이다]가 사용되거니와, 그때 그 표현은 군말 없이 이해되고 있다. 하늘은 푸른 빛이다 ; 나는 기뻐하고 있다 따위는 누구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균적 이해[가능성]는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한 이해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모든 태도와 존재에는 아프리오리하게 하나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그 때마다 이미 존재이해를 가지고 살고 있건만 존재의 의미는 동시에 어둠 속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반복해야 할 원칙적인 필요성을 보여 준다.(4, 8)


 


[보론]


오늘날 존재는 어떤 형세인가? 존재자의 유적 보편성을 넘어서 있으나 그 보편성이 해명되지 않았고, 오히려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그러기에 결국에는 망각되어 버린 존재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닉된 채로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존재는 어떤 형세일까? 아마도 형이상학 시대의 마지막 대변자인 니체야말로 존재 망각 시대의 마지막 증인이 아닐는지.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존재물음의 원칙적 필요성(Notwendigkeit)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존재의 공허함을 니체는 >증발하는 실재성의 최후의 연기<라고 명명한다.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 마침내 존재는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라짐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라짐이 아니다. 인간이 존재자의 한 복판에서 존재자와 관계 맺고 존재자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한, 존재자를 비로소 존재자로서 만나는 근원적 원천으로서의 존재가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존재는 한 민족의 역사적 삶을 좌우해 왔던 “정신적 운명”이다. 한 민족이 어떠한 존재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그 민족의 역사적 삶의 모습은 달라지니까.


존재물음이 서구의 정신적 운명을 저울질하는 사건이라 한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를 과장으로 여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민족이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민족의 역사적 삶이 펼쳐진다면, 존재물음은, 비록 지극히 멀고 또한 지극히 간접적으로나마, 한 민족의 역사적 결단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삶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존재가 아지랑이처럼 공허한 개념으로 치부되어 버린다면, 즉 존재이해가 망각되어 버린다면, 그러한 현실은 하나의 곤경(Not)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새로운 필요성(eine neue Notwendigkeit)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 Notwendigkeit, 즉 필요성이란 “곤경”(Not)에 “대처함”(wendigkeit)이다. 더욱이 이러한 필요성은 이제까지 서구의 역사를 지배해왔던 “가까이 다가와 있는 가운데 지속함”으로서의 존재, 다시 말하면, 서구 역사의 시원을 열고 마침내는 존재자를 눈앞의 것으로 지배하는 현대 과학 기술로 완성된 존재이해를 극복하는 사건이기에 “새로운” 필요성인 것이다.


 


[읽기자료]


그러나 존재는 거의 무(無)와 같은 정도로 혹은 궁극적으로는 완전히 무처럼 찾아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존재<라는 낱말은 결국 공허한 낱말에 불과하다. (…) 그것의 의미는 비현실적인 아지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가 존재와 같은 >최고의 개념<은 >증발하는 실재성의 최후의 연기<(偶像의 薄命 Ⅷ, 78)라고 명명할 때, 그는 결국 지당했다. (…) >사실 이제까지 존재가 오류라고 하는 것 이상으로 더 소박한 설득력을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Ⅷ, 80)


>존재< - 하나의 아지랑이 그리고 하나의 착오? (…)


니체는 진리를 말하는가? 아니면 그 자신은 단지 오랜 착오와 태만의 마지막 희생자일 뿐이며, 이러한 희생자로서 또 다른 새로운 필요성(eine neue Notwendigkeit)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증인인가?(『형이상학 입문』, 39-40쪽)


 


존재는 하나의 단순한 낱말에 불과하고 그것의 의미는 아리랑이 정도인가, 아니면 >존재<라는 낱말로 명명된 것이 서구의 정신적 운명을 간직하고 있는가? (『형이상학 입문』, 45-46쪽)


 


4) 존재물음의 형식적 구조


우리 각자가 어떤 존재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존재자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면, 또한 존재가 우리에게 전수된 형이상학적 존재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감추어진 원천적 근원이라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우리 시대의 운명을 결정짓는 기초적 물음이 된다. 존재물음은 기초적 물음으로서의 당위성을 확보한다. 이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존재물음도 하나의 물음인 이상, 존재물음이 하나의 두드러진 물음으로 제기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물음 일반의 형식적 구조에 대한 해명이 요구된다.


우리는 어떤 사태가 문제될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음을 제기한다. 물음은 일종의 탐구로서, 인간의 하나의 태도이다. 그런데 탐구는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탐구는 문제가 되는 사태로부터 즉 그 탐구 주제로부터 선행적으로 방향을 규정받는다. 우리는 이러한 선이해에 입각해 탐구 대상을 선택하며, 또한 마찬가지로 탐구 대상에 대한 선이해에 입각해 해당 탐구 대상을 철저히 파헤쳐 탐구 주제에 관해 우리가 밝혀내고자 했던 본질을 규명한다.


예를 들어보자. 오늘의 탐구 주제는 인간 복제이다. 아직 인간 복제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복제의 비밀에 대해 어느 정도의 선이해는 갖고 있다. 이러한 선이해에 따라 우리는 인간과 신체구조가 유사한 특정 동물을 탐구 대상으로 선택한다. 그러고는 또한 마찬가지로 그 특정 동물에 대한 선이해에 입각해 그 특정 동물을 각종 실험을 통해 철저히 파헤쳐 인간 복제의 비밀을 밝혀내고자 시도한다.


그러니까 탐구로서의 물음의 형식적 구조는 3마디로 구성된다. 첫째, 탐구로서의 물음에는 탐구 주제가 있다. 탐구 주제가 그 물음에서 ‘물어지는 것’이다. 둘째, 탐구로서의 물음에는 탐구 주제를 해명하기 위해 선택된 탐구 대상이 있다. 탐구 대상이 그 물음에서 ‘물음이 걸리는 것’이다. 셋째, 탐구로서의 물음에는 탐구를 통해 밝혀내고자 하는 탐구 주제의 본질(혹은 비밀)이 있다. 탐구 주제의 본질이 그 물음에서 ‘물어서 밝혀지는 것’이다. 따라서 물음 일반의 형식적 구조는 ‘물어지는 것’, ‘물음이 걸리는 것’, ‘물어서 밝혀지는 것’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물음이라 칭하는 것은 ‘존재자에 관한 물음’이다. 그런데 우리의 관건은 존재물음이다. 존재물음은 기초적 물음이다. 존재물음은 존재자에 고정된 시각을 넘어서, 존재자에 관한 물음을 근거 짓는다. 존재물음은 인간과 존재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선술어적 조건인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다. 그러니까 존재물음도 물음인 이상 물음 일반의 형식적 구조를 공유하되, 그 형식적 구조의 내용은 달라진다.


존재물음도 허공에서 수행되지 않는다. 마치 존재자에 관한 물음이 존재자에 대한 선이해를 전제하듯, 존재물음도 존재에 관한 선이해를 전제한다. 만약 우리가 존재에 관한 선이해를 갖고 있지 않다면,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 명시적으로 제기되지 않을 뿐더러, 하물며 존재의 의미를 개념화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약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어떤 존재이해 속에서 움직인다. 우리가 존재자와 관계 맺는 한, 존재이해는, 은닉된 채로나마, 생생하게 전개된다. 따라서 비록 존재이해가 아직은 의식적으로 반성되지 않았고, 또한 전승된 형이상학의 존재개념들과 뒤섞여 있고, 또한 형이상학의 역사를 통해 망각되어 있기는 하나, 여하튼 우리가 갖고 있는 “평균적이고 막연한 존재이해”는 하나의 “현사실”로서 존재물음을 재촉하는 적극적 현상이 된다.


이러한 현사실을 실마리로, 우리는 존재를 겨냥하여 물음을 던져 존재의 의미를 밝혀내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제 존재물음의 형식적 구조는 명료하게 정식화된다. 존재물음에서 “물어지는 것(Gefragtes)”이 “존재”(6, 11)라면, “물어서 밝혀지는 것(Erfragtes)”은 “존재의 의미”(6, 12)이며, 또한 “물음이 걸리는 것(Befrates)”은 존재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개념화하려고 물음을 시도하는 우리들 인간으로서의 “존재자 자신”(6, 12)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자에 관한 물음과 존재물음의 극명한 차이점을 보게 된다. 존재자에 관한 물음에서 “물음이 걸리는 것(Befrates)”은 존재자이다. 아마 이제까지의 모든 과학은 그것의 탐구 주제를 해명하기 위해 존재자에게 물음을 걸어 왔다. 여기에서는 물음의 주체와 물음의 객체가 이원화된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그럴뿐더러, 인간의 생명의 신비를 풀어내고자 하는 유전공학이나 의학도 마찬가지다. 거기에서도, 즉 설령 인간이 인간에 대해 물음을 걸었을 때조차도, 묻는 자로서의 인간과 물음이 걸리는 자로서의 인간은 분명히 이원화된다. 그러나 존재물음에서는 묻는 자로서의 인간이 바로 묻는 자인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걸고 있다. 여기에서는 묻는 자와 물음이 걸리는 자가 동일하다. 존재물음에서는 물음의 주체와 물음의 객체가 일원화된다. 존재물음에서는 묻는 자로서의 인간이 탁월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우리는 묻는 자로서의 인간을 다른 존재자와 구별하기 위해 특정한 술어를 선택한다. 그 술어가 바로 현존재(Dasein)이다.


Dasein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거기에(Da) 있음’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Da는 단지 공간적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오로지 인간에게만 존재가 개시(開示)되어 있음을 말하는 동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 Da이다. 막연하게나마, 즉 전(前) 존재론적으로나마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존재양상이다. Da는 인간에게만 존재가 현시(現示)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전문적 술어이다. 그러기에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제기할 때 물음이 걸려야 할 존재자는 바로 현존재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묻기에 앞서 우리는 우선 현존재를 물음의 대상으로 확립해야 한다. 현존재를 그것의 존재(구조)에 있어서 물어, 이를 근거로,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려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 된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두고 순환논증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존재물음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순환논증은 연역적 논리에나 해당한다. 그러나 존재물음에는 아무런 연역도 없다. 우리의 전략은 막연한 평균적 존재이해를 지닌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분석하여 현존재에게서 존재이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혀냄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증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전략은 연역이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밝혀내고 증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물음은 철저히 현존재 분석론으로 수행된다. 즉 존재물음은 현존재의 막연한 전(前) 존재론적 이해를 철저히 규명하여 존재의 의미를 읽어 내고자 하는 것이다.


 


[읽기자료]


물음은 ‘ … 에 대한 물음’으로서 물어지는 것을 가지고 있다. ‘ … 에 대한 물음’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 에 [조회해서] 물음을 거는 것이다. 따라서 물음에는 물어지는 것 이외에 물음이 걸리는 것[존재자]이 속해 있다. 연구적 물음, 즉 특수한 이론적 물음에 있어서는 물어지는 것이 규정되고 개념화되어야 한다. 물어지는 것에는 따라서 본래 지향되는 것, 즉 물어서 밝혀지는 것이 있으며, 물음이 여기까지 도달하면 그 목표는 달성되는 것이다.(5, 9-10)


 


이러한 평균적이고 막연한 존재이해는 하나의 현사실이다.(5, 11)


 


수행되어야 할 물음에서 물어지는 것은 존재이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그것이다. 존재자가 어떻게 설명되든 존재자는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그 때마다 이미 이해되고 있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문제의 이해에 있어서 최초의 철학적 진보는 옛날 얘기를 하지 않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진보는 마치 존재가 존재자일 수도 있는 성격을 가진 양, 존재자를 다른 또 하나의 존재자로 소급해서 그 [발생적] 유래에 좇아 규정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므로 물어지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존재자의 발견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독특한 증시방식(證示方式)을 요구한다. 따라서 물어서 밝혀지는 것, 즉 ‘존재의 의미’도 고유한 개념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개념성은 다시 존재자를 의미상으로 규정하는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6, 11-12)


 


존재가 ‘물어지는 것’이고 또 존재가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한, 존재물음에서 물음이 걸리는 것은 존재자 자신이다. 이 존재자는 말하자면 자기의 존재를 겨냥해서 캐물음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존재자가 자기 존재의 성격들을 왜곡되지 않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면, 그 존재자는 자기측에서 미리부터 있는 그대로 접근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야 한다. 존재물음은 물음이 걸려지는 것을 고려해서 존재자에 이르는 올바른 접근방식의 획득 및 그 접근방식의 선행적 확보를 요구한다.(6, 12)


 


존재에 대한 물음이 명시적으로 제기되고 물음 자체가 완전히 투명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면, 이 물음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제까지 밝힌 바에 따라 존재를 겨냥해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올바른] 방식의 구명과 본보기가 되는 존재자를 올바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고, 그 존재자에 이르는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겨냥, 이해, 개념, 파악, 선택, 접근은 물음을 구성하는 태도들이며, 이것들은 그 자체 특정한 존재자, 즉 묻는 자인 우리들 자신이기도 한 바로 그 존재자의 존재양상(存在樣相)들이다. 존재물음의 수행은 따라서 존재자 ?? 묻는 존재자 ?? 를 그 존재에 있어서 통찰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물음을 묻는 것은 존재자 자신의 존재양상으로서, 그 존재자에 있어서 ‘물어지는 것’, 즉 존재에 의해 본질적으로 규정된다. 이 존재자, 즉 무엇보다도 묻는다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를 우리는 현존재(現存在)라고 술어화(術語化)한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도록 제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존재자(현존재)를 그 존재의 점에서 선행적으로 적합하게 구명하는 것이 요구된다.(7, 13)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문제제기 속에는 순환논증이 있을 수 없다. 존재의 물음에 대답하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연역적으로 근거를 대는 일이 아니라, 근거를 증시(證示)하고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8, 14)


 


존재의미의 해석이 과제가 될 때, 현존재는 일차적으로 물음이 걸려져야 할 존재자일 뿐 아니라, 또한 이 물음 속에서 물어지고 있는 그것에 대해 그 때마다 이미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존재물음이란 현존재 자신에 속하는 본질적 존재경향, 즉 전[前] 존재론적 존재이해의 철저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14-15. 23)


 


5) 존재물음의 우위


존재물음은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다. 이러한 존재물음은 고작 가장 일반적인 보편성 따위나 논하는 허공에 뜬 사변적 물음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물음은 “가장 원리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물음”(9, 16)으로서 실증과학 및 전승된 존재론에 대해 존재론적 우위와 존재자적 우위를 갖는다.


‘존재자적(ontisch)’이란 존재자와의 관련을, ‘존재론적(ontologisch)’이란 존재자와의 관련을 가능하게 하는 차원을 의미한다. 그래서 통상적으로는 ontisch를 ‘존재적’으로 번역한다. 이 번역어는 ‘존재론적(ontologisch)’과 쌍을 이뤄 양자의 관계를 선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존재적’이란 번역어는 마치 존재와의 관련을 의미하는 듯한 오해를 사기 쉬우므로, 여기에서는 ‘존재자적’이라 옮기기로 한다. ‘존재자적’과 ‘존재론적’의 의미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한정하면 이렇다.


 


“존재[자]적(ontisch)과 존재론적(ontologisch)의 구별은 소박하게 말하면 사실(事實)과 논리(論理)의 그것이다. 존재자를 묘사, 서술, 취급, 연구하는 것은 ‘존재[자]적’이고, 존재자를 그것에 고유한 존재를 겨냥해서 해명, 해석하는 것은 ‘존재론적’이다. 존재자를 대상으로서 연구하는 과학은 ‘존재[자]적’이고, 그 과학의 가능근거를 탐구하는 철학은 ‘존재론적’이다. 이 점에서 보면 ‘존재론적’은 ‘초월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론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승적 존재론은 존재자론에 머물렀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지적이다.”(표준번역본, 15, 역주 h)


 


(1)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란, 존재물음이 존재자의 본질적 구조를 탐구하는 실증과학은 물론, 실증과학의 토대를 근거 짓는 종래의 전승된 존재론에 대해 존재론적 우위를 지님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증과학, 전승된 존재론(혹은 영역존재론), 그리고 존재물음이 맺고 있는 정초(定礎)의 연관을 보게 된다.


앞에 놓여 있는 것 자체(Positum), 즉 존재자를 다루는 과학은 실증과학이다. 실증과학은 존재자의 특정한 사상영역(事象領域, Sachgebiete)을 탐구대상으로 설정한다. 정확히 말하면, 실증과학의 탐구대상은 존재자의 특정한 사상영역 안에 놓여 있다. 예컨대 자연, 역사, 공간, 생명, 현존재, 언어 등등이 존재자의 특정한 사상영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어떤 사상영역을 대상화하느냐에 따라, 실증과학은 자연과학, 역사학, 기하학, 생물학, 인간학, 언어학 등으로 분류된다. 또한 실증과학이 물음의 방향을 더 세분화함에 따라, 특정한 사상영역은 특정한 구역(Bezirk)들로, 특정한 구역들은 개별적 분야(Feld)들로 나뉘어진다. 예컨대 자연이라는 사상영역은 물리적-물질적 무생물적 자연과 생물적 자연이라는 구역으로 나뉘어지고 또 생물적 자연의 구역도 식물계와 동물계라는 개별적 분야로 나뉘어진다.(『현상학의 근본문제』, 17쪽 참조)


우리는 흔히 실증과학의 진보를 그 과학이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사상영역 안에서 이룩한 성과를 보고 판별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은 실증과학의 진정한 진보를 잘못 이해한 단견(短見)이다. 오히려 수학에서의 형식주의와 직관주의의 싸움, 물리학에서의 고전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의 대립, 생물학에서의 기계론과 생기론의 갈등, 그리고 역사학에서의 문헌사(文獻史)와 문제사(問題史)의 대결에서 그렇듯, 실증과학의 참된 진보는 그 실증과학이 대상화하는 사상영역의 근본 틀에 대한 물음에서 성취된다. 즉 실증과학의 참된 진보는 각 실증과학이 자신의 토대에 대한 >정초위기<를 극복하였을 때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정초위기<의 극복은 이미 실증과학의 손을 떠난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실증과학의 태생적 한계 및 존재론의 역할을 보게 된다.


실증과학은 이미 주어진 존재자의 특정한 사상영역(事象領域)을 해당 과학의 기본개념을 향해 기투함으로써 탐구의 주제로 대상화한다. 그러나 실증과학은 사상영역의 존재구획에 대한, 다시 말하자면, 그 사상영역의 존재의 근본 틀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결여한다. 즉 실증과학은 존재구획에 대한 학문 이전의 경험과 해석을 통해 생겨난 기본개념을 전제할 뿐 그 기본개념의 본질을 한정하지 못한다. 예컨대 근대 자연과학은 운동, 공간, 시간, 물질, 속도 등의 기본개념을 향해 자연을 기투함으로써 자연을 탐구 주제로 대상화하나, 근대 자연과학의 선구자인 갈릴레이조차 운동, 공간, 시간, 물질, 속도 등의 기본개념을 고대철학이나 스콜라철학으로부터 물려받아 이를 통해 자연을 해석했을 뿐, 기본개념 자체의 본질은 묻지 않는다.


실증과학의 기본개념은 해당 과학의 모든 주제적 대상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사상영역(事象領域)을 선행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근본 지평이다. 기본개념은 해당 사상영역의 존재틀에 대한 선행적 존재이해가 분절된 개념으로서 각 실증적 개별과학을 근거 짓는 토대가 된다. 하지만 실증적 개별과학은 기본개념에 대한 진정한 증시와 정초를 결여한다. 그러나 철학, 다시 말해 존재론은 과학의 토대가 되는 기본개념을 진정하게 증시하고 정초하기 위해 과학의 사상영역 자체를 선행적으로 연구한다. 이를 통해 존재론은 개별과학의 사상영역 자체를 선행적으로 근거 짓는 기본개념을 창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존재론은 실증적 개별과학에 선행하면서 이를 정초한다. 존재론의 이러한 위상은 오늘날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철학의 역할과는 사뭇 비교된다. 존재론은 실증적 개별과학을 절뚝거리며 뒤따라가 그것의 성과를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실증적 개별과학이 비로소 실증적 개별과학일 수 있는 토대를 정초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업이 이를 입증한다.


각 실증적 개별과학에는 해당 사상영역에 대한 선행적 존재이해를 분절한 존재론이 전제된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존재론은, 엄밀하게 보자면, 해당 존재자 영역(Region)의 존재이해를 분절한 영역존재론(Regionale ontologie)이 된다. 예컨대, 자연과학에는 자연에 대한 영역존재론이, 생물학에는 생(生)에 대한 영역존재론이, 그리고 역사학에는 역사에 대한 영역존재론이 이미 도사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역존재론은 개별과학을 선행적으로 정초한다. 그러나 영역존재론은 아직 넓은 의미에서의 존재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각 영역존재론은 존재자의 특정한 해당 사상영역의 ‘존재’에 대해, 다시 말해 각 영역의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 말할 뿐, 이렇게 다양하게 말해지는 ‘존재’가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논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역존재론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존재물음의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 존재물음은 실증과학을 정초할 뿐더러 궁극적으로는 영역존재론의 가능조건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물음은 “그 때마다 언제나 이미 어떤 존재이해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학문들의 가능성의 아프리오리한 조건만이 아니라, 존재[자]적 학문들에 선행해서 이 학문들을 기초지워주는 존재론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11, 18)이 된다. 그러니까 존재물음은 “다른 모든 존재론이 거기에서 비로소 발원할 수 있는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13, 21)이 된다. 존재물음은 기초존재론이다. 이로써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가 확증된다. 실증적 개별과학은 영역존재론(넓은 의미의 존재론)에, 그리고 영역존재론은 기초존재론에 근거한다.(『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관한 현상학적 해석』, 32-39쪽 참조)


 


[읽기자료]


학문적[과학적] 연구가 수행하는 사상영역[事象領域]의 부각과 최초의 확정은 소박하고 생경하다. 이 [사상]영역을 그 근본구조에 있어서 확립하는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존재구획[存在區劃]에 대한 학문 이전의 경험과 해석을 통해 수행된다. 그리고 이 존재구획 안에서 사상영역 자체가 한정된다.(9, 16)


 


기본개념들이란 과학의 모든 주제적 대상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사상영역을 선행적으로 이해하게 하고, 또 모든 실증적 연구를 주도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규정들이다. 따라서 이 [기본]개념들이 진정한 증시와 정초를 갖게 되려면, 사상영역 자체를 [그 개념에] 상응해서 선행적으로 철저히 연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상영역이 어느 것이나 존재자 자체의 구역에서 얻어지는 한, 기본개념을 선행적으로 창출하는 그런 연구는 이 존재자를 그 존재의 근본 틀을 향해서 해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연구는 실증과학에 선행해야 하며, 또 선행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업이 그것을 증명한다.(10, 17)


 


학문의 본래의 활동은 많든 적든 기본개념에 대한 근본적이고, 활동 자체를 통찰하는 수정에서 연출된다. 학문의 수준은 그 학문이 그 기본개념의 위기에 어느 만큼 견딜 수 있느냐 하는 데서 규정된다. 학문이 그런 내재적 위기를 만날 때는 물음이 걸리는 사상[事象] 자체와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물음과의 관계가 동요하게 된다. 오늘날 학문의 여러 분과에서 연구를 새로운 기초 위에 옮겨 놓으려는 경향이 도처에서 생겨나고 있다. (9, 16)


 


학문의 정초는 그것이 특정한 존재영역 속으로 앞질러 뛰어 들어가서 그것을 맨 먼저 그 존재 틀에 있어서 개시하고, 획득된 구조를 실증과학으로 하여금 물음을 통찰하는 지침으로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생산적 논리학이다. 그리하여 예컨대 철학적으로 일차적인 것은, 역사학의 개념형성의 이론도, 역사학적 인식의 이론도 아니고, 역사학의 대상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이론도 아니며, 본래적으로 역사적인 존재자를 그 역사성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것이다.(10, 17-18)


 


그런 물음은 ?? 가장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진, 즉 존재론적 제 방향과 제 경향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론은 ?? 그 자신 아직도 하나의 실마리를 필요로 한다. 존재론적 물음은 물론 실증과학의 존재[자]적 물음에 비하면 훨씬 근원적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물음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그 탐구가 존재 일반의 의미를 논구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에는 그 자신 소박하고 불투명한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가능한 존재방식을 연역적으로 구성하지 않는 일종의 계보학(系譜學)이라는 존재론적 과제야말로, ‘존재’라는 말로써 우리는 도대체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예비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11, 18)


 


모든 존재론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풍부하고 견고하게 완결된 범주체계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존재론이 존재의 의미를 미리 충분히 해명하고 이 해명을 자신의 기초적 과제로서 파악하지 않는다면, 근본적으로 맹목적이며 자신의 가장 고유한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다.(11, 18)


 


(2) 존재물음의 존재자적 우위


존재물음은 실증과학 및 종래의 제 존재론에 대해 그것들을 정초한다라는 의미에서 존재론적 우위를 갖는다. 그러나 이에 비해 존재물음의 존재자적 우위에 대한 논의는 다소 우회적이다. 존재물음의 존재자적 우위는 존재물음이 실증과학이나 전승된 존재론에 대해 존재자의 차원에서 우위를 갖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앞서 논의한 바 있던 존재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상기해 보아야 한다.


존재물음에서는 현존재가 두드러진 역할에 봉착한다. 존재물음은 평균적 존재이해를 지닌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구조를 분석하여 존재이해가 어떻게 가능하며 그로써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증시하는 물음이다. 존재물음은 묻는 자와 물음이 걸리는 자가 이원화된 실증과학이나 혹은 전승된 영역존재론과는 달리, 묻는 자로서의 현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인 현존재 자체에게 물음을 걸어 존재의 의미를 구명하는 물음이다. 즉 존재물음에서는 묻는 자인 현존재 자신이 무엇보다 먼저 존재론적으로 충분히 연구되어야 할 존재자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존재물음의 존재자적 우위는 비현존재적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우위가 입증될 때 우회적으로 확인된다. 존재물음의 존재자적 우위는 현존재의 우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는 현존재의 우위를 현존재의 존재자적 우위, 현존재의 존재론적 우위, 그리고 현존재의 존재자적-존재론적 우위라는 세 가지의 관점에서 입증할 것이며, 이로써 존재물음의 존재자적 우위가 확인된다.


 


① 현존재의 존재자적 우위


우리는 앞서, 무엇보다 묻는다는 존재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존재양상을 현존재라고 특징지은 바 있다. 또한 현존재란 존재자 중에서 유일하게 존재가 현시되어 있는 존재자를 이름짓는 전문 술어라고도 규정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현존재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함으로써 현존재의 존재자적 우위를 입증하고자 한다.


존재자는 크게 현존재와 비현존재적 존재자로 구분된다. 또 비현존재적 존재자는 무생물과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 즉 동물과 식물로 구분된다. 그런데 비현존재적 존재자는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지 못한다. 생명이 없는 무생물은 물론이거니와, 생명을 지닌 동물이나 식물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선택하지 못한다. 물론 동물이나 식물이 어느 정도는 자신의 존재를 선택한다는 조짐을 보이기도 하나, 그것은 다만 자기의 보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일 뿐,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고 선택하는 행위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기에 무생물은 물론,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경우에는 이미 그것의 본질이, 즉 무엇-존재(Was -sein)가 결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소나무는 소나무로서, 혹은 돼지는 돼지로서의 본질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우리는 소나무나 돼지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선택하여 새로운 삶을 일구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그러나 인간 현존재의 경우는 다르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다. 예를 들어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을지, 혹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지의 여부를 현존재는 스스로 선택한다. 현존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스스로 선택한다. 그러기에 현존재는 여타의 다른 비현존재적 존재자처럼 이미 그것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현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능을 스스로 펼쳐나간다. 물론 현존재의 존재 가능은 그 현존재가 던져져 있는 상황의 제약은 받는다. 21세기를 살아나가는 현존재가 5세기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 무사로서의 존재 가능성을 구현하진 못한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고 선택하는 자가 현존재다.


물론 현존재가 언제나 자기의 고유한 존재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선 대개 현존재는 자기의 고유한 존재를 외면한 채 일상적 자기로서 살아간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상성 안에서 고뇌하고 부대끼는 것이 현존재의 일상적 모습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현존재에게 항상 문제되는 것은 자신의 존재이다. 설령 일상적 현존재가 본래적 자기를 상실한 채 비본래적 자기로서 살아간다고 해도, 거기에서 문제되는 존재는 자기의 존재이다. 현존재는 각자성(各自性)으로 존재한다. 또한 현존재가 본래적 자기를 상실한 채 비본래적 자기로서 살아가는 것도, 엄밀히 말해서는, 현존재가 본질상 본래적 자기일 수 있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현존재가 문제삼는 존재에 대해 특별한 이름을 부여한다. 그 이름이 바로 실존(Existenz)이다.


여기서의 실존이 전승된 존재론에서 말하는 ‘있음’(existentia)과 구별됨은 물론이다. ‘있음’(existentia)은, 일반 (전승적)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그저 눈앞에 있음 즉 전재성(前在性, Vorhandenheit)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이외의 존재자는 전재(前在)한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존재에게는 언제나 자기의 존재가 문제된다.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자기의 존재 자체를 최대의 문젯거리로 삼는 삶의 태도”를 일컬어 우리는 실존이라 명명한다. 오직 현존재만이 실존한다. 이로써 현존재는, “존재세계의 ‘예외자’”(표준번역본, 64, 역주 b)로서, 여타의 다른 비현존재적 존재자에 대해 존재자적 우위를 차지한다.


 


[읽기자료]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들 사이에서 단순히 출현하기만 하는 그런 존재자가 아니다. 도리어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이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다는 [즉, 스스로 있으면서 이 있음 자체를 문제삼는다] 점에서 존재[자]적으로 탁월하다.(12, 19)


 


현존재가 그것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태도를 취할 수 있고, 또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태도를 취하는 그 존재 자체를 우리는 실존이라고 부른다.(12, 20)


 


이 존재자의 본질은 그가 가능존재라는 데 있다. 이 존재자가 ‘무엇임’(essentia ; 본질)은 일반적으로 그것에 관해 말해질 수 있는 한, 그 존재자의 ‘있음’(existentia)으로부터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곧 다음과 같은 것이 존재론적 과제로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가 이 존재자의 존재를 위해 실존(實存)이라는 명칭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이 명칭은 existentia라는 전승적 술어의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 ; existentia는 존재론적으로는 전재적 존재(前在的 存在)와 같은 것이어서, 현존재의 성격을 지닌 존재자와는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존재양상을 의미한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existentia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를 해석해서 전재성(前在性)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실존’은 존재규정으로서 현존재에게만 지정한다.(42, 63- 64)


 


이 존재자에게 그의 존재에 있어서 문제되는 그 존재는 그 때마다 나의 존재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전재적[前在的] 존재자의 한 유(類)의 사례(事例)나 본보기로서 존재론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다. 전재적 존재자에게는 자신의 존재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며, 자세히 살펴보면 이 존재자[전재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는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인 채로 그냥 있다 . 현존재에 관해 언급할 때는, 이 존재자[현존재]가 지니고 있는 각자성이라는 성격상, 내가 있다, 너가 있다고 인칭 대명사를 가지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42, 64)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이 존재 자체가 문제되는 그런 존재자는, 자기의 존재에 대해 그것이 자기에게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현존재의 존재는 그 때마다 자기의 가능성이지만, 그 가능성을 전재적[前在的] 존재자의 성질처럼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존재는 본질상 그 때마다 자신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존재자는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도, 획득할 수도, 상실할 수도 있으며, 또는 결코 획득하지 못하거나 단지 외견상으로만 획득할 수도 있다. 현존재가 자기를 상실하기만 하고 아직 자기를 획득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은,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상 가능적이고 본래적인 자일 수 있는 한에서, 즉 현존재가 자신을 자기 것으로 하는 자인 한에서 가능하다. 본래성 비본래성이라는 두 가지 존재양상은 ?? 이 표현은 엄밀한 낱말의 뜻에 따라 술어로 선택된 것이다 ?? 현존재가 일반적으로 각자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데 근거한다.(42-43)


 


② 현존재의 존재론적 우위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을 수 있는 까닭은 현존재가 이미 자신의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하기 때문이다. 오직 현존재만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기에 그때마다 자신의 실존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존재이해는 현존재를 특징짓는 하나의 존재규정성이 된다. 또한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이해를, 달리 말해, 실존적(existenziell) 이해라고도 명명한다. 이로써 여타의 다른 비현존재적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존재론적 우위가 입증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현존재의 존재이해가, 다시 말해 실존적 이해가 존재론적으로 개념화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의 실존적 이해는 아직은 막연한 평균적 이해에 불과하다. 달리 말하면, 현존재의 실존적 이해는 전(前) 존재론적 이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단지 소극적인 것에 그치진 않는다. 오히려 현존재의 전 존재론적 존재이해를 개념화함으로써만 제 존재론은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현존재의 전 존재론적 이해 즉 현존재의 평균적 이해는 적극적 현상이 된다.


 


[읽기자료]


현존재의 존재 틀에는, 이 현존재가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이 존재에 [즉, 스스로 있으면서 이 있음에] 대해 존재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이 속해 있다. 이는 다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또 어느 정도의 명료성에 있어서든, 자기를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존재자에 특유한 것은 자신의 존재와 함께, 또 자신의 존재를 통해, 존재가 그 자신에게 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로 현존재의 한 존재 규정성이다. 현존재의 존재[자]적 탁월성은 그가 ‘존재론적으로 있다’는 사실에 있다.(12, 19)


 


‘존재론적으로 있다’는 말은 여기서는 아직 존재론을 형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론이란 낱말을 존재자의 의미에 대한 명시적 이론적 물음에 대한 명칭으로 고수한다면, 앞에서 말한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있다’는 ‘전(前)-존재론적으로 있다’라고 일컬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존재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있음을 뜻한다.(12, 19-20)


 


실존의 문제는 언제나 오직 실존함 자체를 통해서만 처리된다. 이때 실존함 자체에 대한 주도적 이해를 우리는 실존적 이해라고 부른다. 실존의 문제는 현존재의 존재[자]적 관심사이다. 그런 존재[자]적 관심사를 위해서는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이론적 통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2, 20)


 


③ 현존재의 존재자적-존재론적 우위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다. 현존재의 존재이해는 단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또한 현존재가 그 안에 살아가는 세계 및 거기에서 만나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존재이해를 수반한다. 현존재의 실존이해는 현존재 자신 뿐 아니라 세계 및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관계한다.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존재이해를 분절하여 개념화할 때 비로소 종래의 제 존재론, 다시 말해 영역존재론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현존재는 제 존재론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자적 조건이 된다.


또한 이 뿐 아니다. 전승된 제 존재론을 근거 짓는 기초존재론은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다.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은 오로지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인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이해의 - 정확히 말하자면 전(前) 존재론적 이해의 - 가능성을 물어 존재의 의미를 밝혀냄으로써 수행된다. 따라서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의 존재이해(혹은 실존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구조의 해명을 요구한다. 즉 기초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를 해명하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을 통해 수행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기초존재론을 염두에 두고 수행된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제 존재론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자적 조건으로서의 우위를 차지할 뿐더러 제 존재론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우위도 차지한다. 그러니까 현존재의 존재적-존재론적 우위란 제 존재론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자적-존재론적 조건이라는 의미에서의 우의를 말한다.


여기에서 잠깐 ‘실존론적’이란 낱말의 의미를 해명하기로 한다. 앞서 우리는, 자기의 존재를 최대의 문젯거리로 삼는 현존재의 삶의 태도를 ‘실존’이라 규정했다. 실존에 대한 이해가 실존적(existenziell) 이해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이론적 통찰을 실존론적(existenzial) 이해라고 이름짓는다. ‘실존적’과 ‘실존론적’의 관계는 ‘존재자적’과 ‘존재론적’의 관계에 해당한다. 실존론적이란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의 연관인 실존론성(Existenzialität)을 해명하는 차원이다. 그러니까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이란,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를 분석하여 현존재의 실존이해의 가능성을 파악하며 이로써 존재의 의미를 밝혀내려는 시도가 된다.


 


[읽기자료]


현존재에는 본질적으로 ‘어떤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이 속해 있다. 따라서 현존재에 속하는 존재이해는 세계라든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와 세계 내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에 등근원적으로 해당된다. 비현존재적 존재성격을 가진 존재자를 주제로 하는 제 존재론은 따라서 현존재 자신의 존재[자]적 구조에 그 기초와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현존재의 존재[자]적 구조는 전(前) 존재론적 존재이해의 규정성을 자기 속에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모든 존재론이 거기에서 비로소 발원할 수 있는 기초 존재론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탐구되어야 한다.(13, 21)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물음은 실존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해명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구조들의 연관을 우리는 실존[론]성[Existenzialität]이라고 부른다. 실존[론]성의 분석론은 실존적 이해가 아니라 실존론적 이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12, 20)


 


이 실존[론]성을 우리는 실존하는 존재자의 존재 틀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런 존재 틀이라는 이념 속에는 이미 존재라는 이념[존재 일반의 이념]이 놓여 있다. 그리하여 현존재의 분석론의 수행 가능성도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선행적으로 검토하는 데서 좌우된다.(13, 21)


 


존재물음이 명료한 물음이 되기 위해 현존재가 무엇보다 먼저 존재론적으로 충분히 연구되어야 할 존재자로서 밝혀졌다. 이제 지적된 것은 현존재 일반의 존재론적 분석론이 기초 존재론을 형성한다는 사실과, 따라서 현존재는 원칙상 선행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관해 물음이 걸려지는 존재자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존재의미의 해석이 과제가 될 때, 현존재는 일차적으로 물음이 걸려져야 할 존재자일 뿐 아니라, 또한 이 물음 속에서 물어지고 있는 그것에 대해 그 때마다 이미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존재물음이란 현존재 자신에 속하는 본질적 존재경향, 즉 전 존재론적 존재이해의 철저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14-15, 23)


 


이리하여 현존재는 모든 다른 존재자에 대해 중첩된 우위를 갖는다. 첫 번째 우위는 존재[자]적 우위이다 : 이 존재자는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실존을 통해 규정된다. 두 번째 우위는 존재론적 우위이다 : 현존재는 자신의 실존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신 존재론적이다. 그러나 이제 현존재에게는 현존재가 아닌 모든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 실존이해의 구성요소로서 - 등근원적으로 속하게 된다. 따라서 현존재는 모든 존재론의 가능성의 존재적-존재론적 제약이라는 세 번째 우위를 갖는다. 이렇게 해서 현존재는 다른 모든 존재자에 앞서서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으로 물어져야 할 것으로서 입증되었다.(13, 21)


 


6) 존재물음의 방법


존재물음의 방법은 현상학이다. 그런데 현상학의 의미는 다의적이다. 고전적 현상학의 독특한 용어는 판단중지, 현상학적 환원, 자유변경, 본질직관 등인데, 현상학이 다양하게 전개됨에 따라 이러한 용어의 뜻이 그대로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또 그 중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도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누군가가 현상학은 이단자에 의해 번창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 변천이 극심하다. 그러나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이 『철학 및 현상학적 연구 年誌』(1913)의 창간사에서 밝히고 있듯, 다양한 현상학적 운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학파로서의 어떤 체계가 아니라, ‘직관의 근원적 원천과 거기서 나오는 본질통찰에 귀환함으로써만’ 철학의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공통된 확신’이다. 즉 현상학적 태도란 바로 ‘직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에로 돌아가려는 노력이요, 따라서 적어도 이런 노력을 공유한다면 그러한 태도는 모두 현상학적 태도로 불리워도 무방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현상학은 방법 개념이다. 현상학은 철학적 탐구 대상의 사상내용(事象內容)을 규정지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철학적 탐구 대상이 어떻게 있는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노력이 된다. 그러기에 『현상학에로의 나의 길』에서 고백하듯, 하이데거가 후설에게서 배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현상학적 봄”의 태도이다. 하이데거 스스로가 정했다고 알려진 “사상(事象)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현상학적 구호는 현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하이데거에게서 현상학이란 사상(事象) 자체로 육박하여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야 한다는 방법적 이념이 된다. 아마도 이러한 점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는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가 육박해 들어가야 할 사상(事象)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양자는 차별화된다. 바로 여기에 하이데거적 현상학의 독특함이 있다.


현상학(Phänomenologie)은 현상(Phänomen)에 관한 학문(Logos)이다. 현상학(Phänomenologie)은 현상(Phänomen)과 로고스(Logos)의 합성어이다. 그리스어로 소급해보자. 현상은 “스스로를 그 자신에 즉해서 현시하는 것”을 의미하며, 로고스는 이야기 가운데 ‘언급되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는 뜻으로서, 어떤 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보이게 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현상학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드러나는 그대로, 그 자신으로부터 보이게 함”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현상학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직 현상학의 형식적 의미에 불과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현상 개념은 형식적 현상 개념이다. 이제 형식적 현상 개념은 그 형식성을 벗어 던져야 한다. 현상이 무엇으로 규정되느냐에 따라 형식적 현상개념은 통속적 현상 개념과 두드러진 의미의 현상 개념으로 구별된다. 두드러진 의미의 현상 개념이 하이데거가 있는 그대로 밝혀내고자 하는 현상학적 현상 개념이 된다.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현상을 종종 단순히 “타 온타(ta onta, 존재자)”와 동일시하였다. 물론 존재자는 우리가 그것에 접근하는 그때마다의 방식에 따라 자신을 그 자체로부터 상이하게 현시한다. 그러나 하이데거 입장에서 볼 때, 존재자는 통속적 현상이다. 오히려 두드러진 의미에서의 현상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면서도 우선 대개는 자신을 감추고 있는 것이 된다. 즉 두드러진 의미에서의 현상이란, 우선 대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자를 비로소 존재자로서 드러내 주면서도 스스로는 은폐되고 또한 위장되기도 하는 존재가 된다. 존재는 존재자에게 속해 있으면서 그것의 의미와 근거를 이루는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현상학적 현상은 존재, 즉 존재자의 존재이다. 또한 존재자의 존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기에 각종 존재의 변양과 파생태들은 물론, 존재물음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존재의 의미도 현상학적 현상에 포함된다.


그런데 통속적 현상개념도 현상학적으로 중요하다. 존재를 개현하여 존재의 의미로 육박하기 위해서는 범례가 되는 존재자가 요청된다. 두 말할 필요없이 현존재가 바로 그러한 범례적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존재자적-존재론적으로 탁월한 존재자로서, 존재를 이해할 뿐더러 스스로에게 물음을 걸어 존재의 의미를 밝혀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자이다. 그러기에 현상학은 필연적으로 현존재의 현상학이 된다. 현상학은 현존재의 존재구조를 해석해 내어 존재의 의미를 밝혀내야 할 방법적 이념이 되어야 한다. 즉 현존재의 현상학은 실존의 실존론성의 분석론으로서, 현존재의 존재를 해석하는 해석학이다. 우리는 현존재의 현상학에서 “학”이, 즉 로고스(logos)가 이미 hermeneuein[해석하다]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현존재의 현상학은 현존재의 해석학이다. 현존재의 현상학은, 해석학적 현상학으로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이다. 또한 현존재의 현상학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인 한 현존재에게 등근원적으로 속하는 비현존재적 존재자의 존재를 해석함으로써 제 존재론적 탐구의 가능성의 조건을 검토한다는 의미에서도 하나의 해석학이 되며, 더욱이 현존재의 역사성이 역사학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자적 조건인 한, 종래에 우리가 흔히 해석학이라 불렀던 역사학적 정신과학의 방법론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존재론 혹은 철학은 필연적으로 현상학이다. 다시 말해 해석학적 현상학이다. 그러기에 철학은 본질적으로 보자면, 현존재의 해석학에서 출발하는 보편적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건대 후설의 고전적 현상학은 의식의 현상학이다. 절대적 학문성을 추구했던 후설의 현상학은 사물이 자신을 스스로 내보이는 명증성의 영역을 우리의 의식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비록 하이데거가 자신의 현상학적 탐구는 후설의 『논리연구』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지만, 우리는 하이데거와 후설의 차이점을 주목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후설의 철학이 브렌타노의 『경험적 입장의 심리학』(1874)에서 출발하여 심리주의를 비판하며 의식의 현상학을 구축하였다면, 하이데거의 철학적 물음은 브렌타노의 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관하여』(1862)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나의 브렌타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브렌타노였다”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후설과 하이데거가 브렌타노라는 동일한 철학자로부터 출발하면서도 처음부터 서로 다른 철학적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묘하다. 여하튼 하이데거의 철학적 관심은 존재자의 존재가 다양하게 말해질 때 그것을 주도하는 근본적인 의미를 묻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자의 존재가 다양하게 말해질 수 있는 공통의 지평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 즉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 하이데거의 본래적인 철학적 관심사이다. 그러기에 하이데거는 후설이 존재를 대상-존재에만 국한시켜 존재를 더 이상 묻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요컨대 후설은 존재를 주어진 것으로 확보한 이후에, 그것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후설은 전개하지 않는다. 후설에게는 가능적 물음의 그림자조차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대상-존재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자명했기 때문이다.(네 번의 세미나, 116쪽) (강조점은 필자가 찍었음)


 


이 인용문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대상-존재라는 표현이다. 하이데거는 초기 작품인 『존재론. 현사실성의 해석학』(1923)에서도 전승된 존재론의 한계를 대상-존재에서 파악한다. 전승된 존재론은 처음부터 주제를 대상존재에 한정한다. 전승된 존재론은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에서의 대상존재만을 다룰 뿐,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세계를 다루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전승된 존재론은 과학의 족쇄에 갇혀 우리의 삶 속에서 생생히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차원과 풍부한 논리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후설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후설의 후기 사유에서 생활세계의 현상학이 전개되긴 하나 그것 역시 우리의 삶의 문법을 해독하진 못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진 다양한 존재자의 존재가 갖는 존재론적 차이를 추적해 나가면서 과학의 논리로부터 구체적인 삶의 문법을 해방시키고자 노력한다. 예컨대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인간도 고작해야 이성적 동물로 규정된다. 인간도 동물로서 있되 다만 이성이라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동물이라는 관점에서만 다른 동물과 차별화된다는 논리가 전통적 형이상학의 입장이다. 즉 전통적 형이상학은 인간과 인간 아닌 다른 존재자 사이의 존재방식의 차이를 간과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전통적 형이상학의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인간은 자신이 누구이고 타인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고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자가 무엇으로 어떻게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갖고 있고 또 그러한 관심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 즉 인간은 단순히 존재자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거주 장소는 존재이해의 공간이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로 정의하여 다른 존재자와 인간의 존재방식을 차별화한다.


따라서 이제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시각을 통해 새로운 존재론을 정초한다. 그것이 바로 현존재의 현상학 즉 해석학적 현상학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이 갖는 철학사적 의의를 이렇게 정의하고자 한다. 즉, 하이데거는 대상의 존재에만 한정되었던 지성의 눈 비늘을 벗겨내어 우리의 삶 전체를 현상학적 시각에로 끌어들였다라고.


 


[읽기자료]


이 탐구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주도적 물음을 다루기 때문에, 철학 일반의 기본적 물음과 연계되어 있다. 이 물음의 취급방식은 현상학적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부질없이 하나의 관점이나 하나의 방향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자체로 이해되는 한, 현상학은 이 양자 중의 어느 것도 아니며 또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상학이라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방법개념을 의미한다. 현상학이라는 표현은 철학적 탐구대상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무엇[事象內容]이 아니라 이 대상들이 어떻게 있는가를 성격 짓는다.(27, 42)


 


현상학이라는 명칭은 하나의 격률(格率)을 표현한다. 그것은 사상(事象) 자체로!라고 정식화될 수 있다. ?? 이 격률은 허공에 뜬 모든 구성이나 우연적 착상에 대립하고, 외견상으로만 증명된 개념들에 대립하며, 종종 수 세대를 거치면서 자신을 문제로서 과장해온 사이비 물음들에 대립한다.(27-28, 42)


 


현상학이라는 표현은 ‘현상’과 ‘학’이라는 두 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양자는 각기 phainomenon과 logos라는 그리스어로 소급된다.(28, 42)


 


현상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적 표현 phainomenon에까지 소급된다. 이 말은 ‘스스로를 현시한다’는 뜻을 가진 동사 phainesthai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phainomenon은 ‘스스로를 현시하는 것’, 즉 ‘자기 현시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 phainesthai 자체는 ‘대낮에 드러내다’, ‘밝게 하다’를 의미하는 phaino의 중동태적(中動態的) 조어이다. phaino는 phos와 마찬가지로 어간 pha-에 속하는데, phos는 빛, 밝음, 즉 그 속에서 어떤 것이 드러날 수 있고, 그 자체에 있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상이라는 표현의 의미로서는, 스스로를 그 자신에 즉해서 현시하는 것, ‘노현(露現)하는 것’이라는 뜻이 확고하게 지켜져야 한다. phainomena, 즉 현상들은 따라서 ‘[대낮에] 드러나 있는 것’ 혹은 ‘밝혀질 수 있는 것’의 총체이다. 이것을 그리스인들은 종종 단순히 ta onta[존재자]와 동일시하였다.(28, 43)


 


현상개념을 이렇게 파악할 때, 어떤 존재자가 현상으로서 요구되는지 정해지지 않은 채로 있고, 또 자기 현시하는 것이 존재자인지 혹은 존재자의 존재성격인지가 도대체 결정되어 있지 않다면, 고작 형식적 현상개념을 얻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자기 현시’하에, 예컨대 칸트의 의미에서 ‘경험적 직관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존재자’가 이해된다면, 이때 형식적 현상개념은 올바르게 적용된 것이다. 이렇게 사용된 현상개념은 통속적 현상개념의 의미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통속적 현상개념은 현상의 현상학적 개념이 아니다.(31, 47)


 


말로서의 logos는 오히려 deloun, 즉 얘기 가운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밝힌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의 이런 기능을 더욱 날카롭게 apophainesthai로서 설명하였다. logos는 어떤 것, 즉 언급되고 있는 것을 말하는 자(중동태)로 하여금 또는 서로 대화하는 자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phainesthai)이다. 말은 언급되고 있는 것 자체로부터 … apo 보이게 한다 . 말(apophansis)에 있어서는, 그 말이 진정한 말인 한, 말의 내용이 언급되고 있는 사상[事象]으로부터 연원해야 하고, 그리하여 말로 하는 전달은, 전달내용에 있어서 언급되고 있는 사상을 분명히 하고,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apophansis로서의 logos의 구조이다.(32, 49)


 


현상과 logos에 대한 해석에서 밝혀진 것을 구체적으로 상기하면, 이 두 명칭으로 지칭되는 것들 사이의 내적 연관이 분명해진다. 현상학이란 표현을 그리스어로 정식화(定式化)하면, legein ta phainomena[현상들을 말한다]가 된다. 여기서 legein은 apophainesthai[어떤 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보이게 한다]를 뜻한다. 그리하여 ‘현상학’은 apophainesthai ta phainomena, 즉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드러나는 그대로, 그 자신으로부터 보이게 함’을 말한다. 이것이 현상학이란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연구의 형식적 의미이다. 이렇게 해서 표현되는 것은 앞에서 정식화된 격률(格率), 즉 사상[事象] 자체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34, 51)


 


이제 형식적 현상개념이 그 형식성을 벗어던지고 현상학적 현상개념으로 되려면 무엇이 고려되어야 하며, 또 현상학적 현상개념은 통속적 현상개념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현상학이 보이도록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드러진 의미에서 현상이라고 일컬어져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본질상 필연적으로 명시적 제시의 주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그것은, 우선 대개 자기를 곧장 드러내지 않는 것, 즉 우선 대개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숨겨져 있으나 동시에 우선 대개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어떤 것, 그러나 그것의 의미와 근거를 이루는 어떤 것이다.(35, 52)


 


이처럼 현저한 의미에서 숨겨진 채로 있거나 또는 다시 은폐 속에 빠져 있거나, 단지 자신을 위장하여 드러내거나 하는 것은, 그러나 이 존재자나 저 존재자가 아니라, 앞선 고찰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존재자의 존재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망각되어서 존재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로 광범하게 은폐될 수 있다. 따라서 탁월한 의미에서, 자신의 가장 고유한 사상내용에 근거해서 현상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을, 현상학은 대상으로서 주제적으로 거머쥔 것이다.(35, 52-53)


 


현상학은 존재론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 것에 접근하는 양식이자, 그것을 증시하면서 규정하는 양식이다. 존재론은 오직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 현상의 현상학적 개념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존재자의 존재, 존재의 의미, 존재의 변양들과 파생태(派生態)들을 가리킨다.(35, 53)


 


현상학적으로 이해된 현상은 언제나 ‘존재를 구성하는 것’뿐이지만, 존재는 그 때마다 존재자의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를 개현할 의도라면 먼저 존재자 자신을 올바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 존재자도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자기에게 속하는 접근양식 속에서 올바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통속적 현상개념도 현상학적으로 중요하게 된다. 범례적 존재자를 본래적 분석론을 위한 출구로서 현상학적으로 확보한다는 예비과제는, 언제나 이미 이 분석론의 목표에 입각해서 밑그림 그려져 있다.(37, 54-55)


 


사상(事象) 내용에서 말한다면, 현상학은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학 ?? 존재론이다. 존재론의 과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 가운데 기초적 존재론의 필요성이 분명해졌다. 기초적 존재론은 현존재라는 존재론적-존재적으로 탁월한 존재자를 주제로 삼아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라는 핵심문제에 육박한다. 탐구 자체로부터 분명해지겠지만,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적 의미는 해석이다. 현존재의 현상학의 logos?는 hermeneuein[해석하다]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해석을 통해 현존재 자신에 속하는 존재이해에 존재의 본래적 의미와 현존재에 고유한 존재의 근본구조들이 고지된다. 현존재의 현상학은 낱말의 근원적 의의에 있어서 해석학(解釋學)이다. 이에 따르면, 이 낱말은 해석의 작업을 표시한다. 이제 존재의 의미와 현존재 일반의 근본구조들이 벗겨짐으로써, 더 나아가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에 대한 모든 존재론적 연구를 위한 지평이 분명해지는 한에서, 이 해석학은 동시에 모든 존재론적 탐구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검토한다는 의미에서의 해석학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존재가 ?? 실존의 가능성 속에 존재하는 자로서 ?? 모든 존재자에 앞서 존재론적 우위를 갖고 있는 한, 현존재의 해석으로서의 해석학은 제3의 특수한 [의미]-그러나 철학적으로 이해한다면 실존의 실존성의 분석론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때 이 [제3의 의미의] 해석학이 역사학의 가능성의 존재[자]적 조건으로서 현존재의 역사성을 존재론적으로 수행하는 한, 그 해석학에는 단지 파생적으로만 해석학이라 불리어질 수 있는 것, 즉 역사학적 정신과학들의 방법론이 뿌리 박고 있는 것이다.(37-38, 55)


 


존재론과 현상학은 철학에 속하는 다른 전문분야와 나란히 있는 두 개의 상이한 분야가 아니다. 이 두 명칭은 철학 자체를 대상과 취급양식에 따라 특징짓는다. 철학은 현존재의 해석학에서 출발하는 보편적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현존재의 해석학은 실존의 분석론으로서, 모든 철학적 물음의 실마리의 끝을, 물음이 거기서 발단하고 거기로 되돌아가는 그 곳에다 붙잡아 맨다.(56)


 


2. 세계


(한: 世界. 독: Welt, 영: World)


 


현존재는 그때마다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존재는 각자성이다. 또한 현존재는 각자성을 근거로 해서 본래적으로 실존하기도 하고 비본래적으로 실존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현존재의 이러한 실존을 그것의 실존론적 구조에서 해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의미로 육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앞서 말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 해당한다.


그런데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현존재가 이미 어떤 세계 내에서 정 붙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존재자임을 주목해야 한다. 실로 세계를 벗어나서는 현존재의 실존이 불가능하다. 오직 세계 내에서 자기 및 세계 그리고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존재이해를 근거로 실존하는 자가 현존재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내-존재는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 틀이다. 그러기에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세계-내-존재라는 존재 틀을 근거로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를 아프리오리하게 보고 이해하는 가운데 수행되어야 한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세계-내-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론에 다름 아니다.


세계-내-존재는 세계,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있는 존재자, 그리고 내-존재로 구성된다. 세계-내-존재는 이 세 구성계기가 서로 맞물려 비로소 형성된 틀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 틀을 통일적으로 제시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의 올바른 단초는 이 세계-내-존재라는 통일적 현상을 해석하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논의의 편리를 위해 일단 세계-내-존재를 1) 세계, 2)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있는 존재자, 3) 내-존재라는 세 구조계기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 장의 논의 과제는 이 중에서 세계가 된다.


 


1) 세계 일반의 세계성의 이념


(1) 세계와 세계성


세계의 의미는 다양하다. 우선 세계는 존재자적 의미에서 우리 눈앞에 있는 전재적(前在的) 존재자의 총체를 가리킨다. 또한 세계는 존재론적 용어로서는 가령 수학자의 ‘세계’라는 말에서처럼 특정한 대상들의 영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문제삼은 것은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내-존재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세계는, 세계-내-존재의 한 구조계기로서, 현존재의 실존이 이루어지는 ‘그 곳’이된다.


세계는 현존재 자신의 하나의 성격으로서 현존재의 존재양식이다. ‘공공 세계’라든가, 혹은 ‘자기 주변의 친근한 (가정적) 환경세계’가 이러한 세계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내에서 실존하건만, 우선 대개는 세계의 구조를 존재론적으로 깨닫지 못한다. 세계를 세계로서 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구조를 우리는 특히 세계성(Weltlichkeit)이라고 명명한다. 세계가 아직은 전(前)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세계성은 존재론적-실존론적 개념이다.


 


[읽기자료]


세계성은 하나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세계-내-존재를 구성하는 한 계기의 구조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세계-내-존재를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으로서 알고 있다. 따라서 세계성은 그 자체 하나의 실존범주이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세계에 대해 물을 때, 우리는 결코 현존재의 분석론이라는 주제적 분야를 떠나지 않는다. 세계는 존재론적으로는 본질상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규정이 아니라, 현존재 자신의 한 성격이다.(64, 97)


 


세계라는 낱말은 (…)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으나, 거기에서 분명해진 것은 그 낱말의 다의성(多義性)이다. 이 다의성으로 인한 혼란을 제거하는 일은, 다양한 의미로 생각되는 현상들과 그 현상들의 연관을 지적하는 것이 된다.


 


1. 세계는 존재[자]적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이때 세계는 세계 내부에서 전재적[前在的]으로 있을 수 있는 존재자의 총체를 의미한다.


2. 세계는 존재론적 용어로서 기능하여, 1.에서 말한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더욱이 세계는 그 때마다 다양한 존재자를 포괄하는 영역의 명칭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세계는 수학자의 세계라는 말에서처럼 수학의 가능적 대상들의 영역을 의미한다.


3. 세계는 다시 존재[자]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이때의 세계는 세계 내부적으로 만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현존재가 아닌 그런 존재자로서가 아니라, 현사실적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살고 있는 그 곳으로서 해석되고 있다. 이때 세계는 전[前] 존재론적 실존적 의미를 갖는다. 이 경우 다시 여러 가능성이 성립한다 : 세계는 공공적(公共的) ‘우리-세계’라든가 자신의 가장 친근한 (가정적) 환경세계를 가리킨다.


4. 끝으로 세계는 세계성이라는 존재론적-실존론적 개념을 나타낸다. 세계성 자체는, 특수한 세계들의 그때그때의 구조 전체로 변양될 수 있으나, 자기 안에 세계성 일반이라는 아프리오리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라는 표현을 술어상으로 3.에서 확정된 의미로 사용하도록 한다. 세계라는 표현이 때때로 1.에서 말한 의미로 사용될 때는, 그 의의를 표시하기 위해 인용부호[   ]를 붙일 것이다.(64-65, 97-98)


 


(2) 세계와 자연


세계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으로서, 현존재의 세계이다. 현존재 이외의 모든 존재자는 다만 세계 내부에 귀속할 뿐이다. 즉 현존재가 아닌 모든 존재자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다. 이 점에서는 자연도 예외가 아니다. 존재론적-범주적으로 이해하자면, 자연은, 현존재가 세계 안에서 존재자를 우선 대개 도구로서 발견하는 태도를 변양하였을 때 만나게 되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존재의 한 극한이다. 즉 자연은 현존재가 세계를 특정하게 탈세계화하였을 때 발견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틀을 결여한 채 자연을 만난다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탈세계화 자체도 여전히 세계-내-존재의 한 방식이다. 세계를 전제하기에 세계의 탈세계화도 가능하다.


물론 하이데거는 “세계는 현존재가 실존할 때 -또 그러한 경우에만- 존재하며, 자연은 어떠한 현존재가 실존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현상학의 근본문제』, 241쪽)라고도 발언하나, 엄격한 의미에서 존재는 존재를 말하는 현존재가 있을 경우에만 있을 수 있으므로, 현존재 이전에 자연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자적 명제에 불과하다. 존재론적으로는, 세계가 자연에 앞서 있고, 자연은 현존재의 세계-내-존재의 한 특정한 양상 안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종래의 존재론에서는 자연에 의거해서 세계를 이해한다. 자연의 존재는 모든 것을 근거 지우는 ‘실체성’으로 파악된다. 데카르트가 하나의 예가 된다. 그는 수학적 인식에 맞추어 세계의 근본 규정을 자연사물의 연장성(延長性)으로 파악함으로써 세계에 관한 물음을 자연사물성에 관한 물음으로 축소한다. 이처럼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틀을 결여한 채 세계성의 현상을 건너뛴 것이 종래의 존재론의 한계 상황이다.


종래의 존재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세계성에 접근할 수 있는 올바른 현상적 출발점이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 출발점은 현존재의 가장 친근한 존재양식인 일상성이다. 현존재만이 세계를 갖고 있고 또한 현존재가 우선 대개는 일상적으로 존재한다면, 평균적 세계-내-존재의 실존론적 성격으로부터 세계성 일반의 이념에 이르는 길을 취하는 것이 현상학적으로 올바른 전략이다. 그런데 현존재의 가장 비근한 세계는 환경세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가장 비근하게 만나는 환경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단초로 삼아 세계의 세계성에 이르고자 한다.


 


[읽기자료]


그리하여 세계의 변형, 즉 세계적이라는 표현은 술어적으로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의미하는 것이지, 세계 안의 전재적[前在的] 존재자의 존재양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후자의 존재양식을 우리는 세계 귀속적(世界歸屬的) 또는 세계 내부적(世界內部的)이라고 부른다.(65, 98)


 


종래의 존재론을 일별할 때 알 수 있는 것은,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틀을 빠뜨리는 것과 세계성의 현상을 건너뛰는 것은 짝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성의 현상 대신, 사람들은 세계 내부에 전재적[前在的]으로 있으면서도 우선은 전혀 발견되어 있지 않은 존재자의 존재, 즉 자연에 의거해서 세계를 해석하려고 한다. 자연은 ?? 존재론적-범주적으로 이해하자면 ?? 가능한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존재의 한 극한이다. 현존재는 이 자연으로서의 존재자를 자기의 세계-내-존재의 일정한 양상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자연]인식은 세계를 특정하게 탈세계화시킨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어떤 특정한 존재자의 존재구조들의 범주적 총괄로서의 자연을 가지고서는 세계성은 결코 이해될 수 없다. 가령 낭만파의 자연개념이 의미하는 자연 현상도 세계개념에 입각해서, 즉 현존재의 분석론에 입각해서 비로소 존재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65, 98-99).


 


데카르트는 세계의 존재론적 근본규정을 extentio[연장]에서 본다. 연장성은 공간성을 함께 구성할뿐더러 데카르트에 따르면 공간성과 동일하다. 공간성이 어떤 의미에서 세계에 대해 구성적인 한, 데카르트적 세계 존재론의 구명은 동시에 환경세계와 현존재 자신의 공간성을 적극적으로 구명하기 위한 하나의 소극적 발판을 제공한다(89, 131).


 


데카르트는, 세계에 대한 물음을, 우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인 자연 사물성에 대한 물음으로 축소하고 강화하였다. 그는 존재자에 대해 가장 엄밀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자]적 인식은 [즉 존재자의 본질을 연장성으로 보는 인식은] 또한 그 인식 속에서 발견되는 존재자의 일차적 존재에 이르는 가능한 통로이기도 할 것이라는 의견을 굳혀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사물 존재론을 보완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데카르트와 동일한 독단적 기초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해야 마땅하다(100, 146-147).


 


이를 위한 방법적 지시는 이미 주어져 있다. 그것은 세계-내-존재가, 따라서 세계도, 현존재의 가장 친근한 존재양식인 평균적 일상성이라는 지평에서 분석론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적 세계-내-존재를 추적하여, 이것을 현상적 발판으로 해서, 세계라든가 하는 것이 시야 속에 들어와야 한다(66, 99).


 


일상적 현존재의 가장 비근한 세계는 환경세계이다. 우리의 탐구는, 평균적 세계-내-존재의 이 실존론적 성격으로부터 출발해서 세계성 일반의 이념에 이르는 길을 취한다. 환경세계의 세계성(환경 세계성)을 우리는 가장 비근하게 만나는 환경세계 내부의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통과함으로써 탐구한다. 환경세계라는 표현은 둘레라는 말속에 공간성에 대한 어떤 시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세계를 구성하는 주위는 일차적으로 공간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환경세계에 공간성격이 속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으나, 이 공간성격은 오히려 세계성의 구조에 입각해서 비로소 해명되어야 한다(66, 99)


 


2) 환경 세계 안에서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


(1) 배려


(한: 配慮, 독: Besorgen, 영: concern)


 


일상적 현존재는 환경 세계 내에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둘러보는 가운데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처럼 ‘둘러보며 관계맺음’을 우리는 교섭(Umgang)이라 명명한다. 그런데 교섭의 가장 비근한 양식은 배려(Besorgen)이다. 배려란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다루며 사용하는 일상적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리킨다. 배려는 비록 존재자를 인식하는 작용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독자적 ‘인식’은 가지고 있다. 우리의 논의를 앞질러 말한다면, 이러한 ‘인식’이란 도구를 도구로서 사용할 수 있는 고유한 “시”(視, Sicht)를 의미한다. 이처럼 배려를 이끄는 고유한 “시”를 우리는 특히 배시(Umsicht)라고 명명한다.


배시적 배려를 통해 만나는 존재자는 인식의 대상일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세계 안에서 일차적으로 만나는 존재자는 도구이다. 그리스인들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배려적 교섭(praxis)에서 관계 맺는 존재자를 pragmata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pragmata의 존재론적 성격을 밝혀내지 못한 채 그것을 ‘단순한 사물’로 규정해 버렸다. 따라서 우리의 우선적 과제는 도구를 도구이게끔 하는 도구의 성격을 한정짓는 것이다.


 


[읽기자료]


가장 가까이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의 현상학적 제시는, 우리가 세계내의 교섭 그리고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의 교섭이라고 부르는 일상적 세계-내-존재를 실마리로 하여 수행된다. 이 교섭은 이미 배려의 다양한 방식들로 분산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지적되었듯이, 교섭의 가장 비근한 양식은 단지 인지하기만 하는 인식작용이 아니라, 종사하고 사용하는 배려이다. 이 배려는 그 나름의 독자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현상학적 물음은 우선 그런 배려 속에서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에 관련된다.(66-67, 100)


 


그러나 사용하고-조작하는 교섭은 맹목적이 아니고, 제나름의 고유한 주시양식(注視樣式)을 가지고 있다. 이 주시양식이 조작을 유도하고 그 조작에 특수한 확실성을 부여한다. 도구와의 교섭은 하기 위한의 다양한 지시에 종속된다. 그렇게 적응해 가는 것을 이끄는 ‘봄[視]‘은 배시(配視)이다.(69, 104)


 


당면한 분석의 범위 안에서 예비주제로서 단초에 놓여진 존재자는, 환경세계적 배려 속에서 자기를 현시하는 존재자이다. 이때 이 존재자는 이론적 세계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되거나 생산되는 등의 존재자이다.(67, 100-101)


 


그리스인들은 사물을 표현하는 적합한 용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pragmata, 즉 사람들이 배려적 교섭(praxis)에서 관계맺는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 pragmata의 특수한 실용적 성격을 존재론적으로 애매하게 방치하고, 그것을 우선 단순한 사물로서 규정해 버렸다. 우리는 배려 속에서 만나는 존재자를 도구라고 부른다. 교섭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필기도구, 재봉도구, 작업도구, 여행도구, 측량도구 등이다. 이 도구의 존재양식이 뚜렷이 밝혀져야 한다. 그것은 도구로 하여금 도구이게 하는 것, 즉 도구성격을 먼저 한정하고 이것을 실마리로 하여 이루어진다.(68, 102)


 


(2) 도구


(한: 道具, 독: Zeug, 영: Equipment)


 


① 지시


(한: 指示, 독:Verweisung, 영: assignment, reference)


도구는 본질적으로 ‘…을 하기 위한 어떤 것’이다. 도구의 기본적 성격은 지시이다. 엄밀히 말해 하나의 도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는 유용성, 기여성, 사용 가능성, 편리성 등 용도성의 상이한 방식들에 의해 도구 전체성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컴퓨터가 이 방을 구성하는 집기들의 전체적 연관 안에서 의미를 갖듯, 개별적 도구에 앞서 그때마다 이미 도구 전체성이 먼저 발견된다.


 


[읽기자료]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만의 도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의 존재에는 그 때마다 언제나 도구 전체가 속해 있고, 이 도구 전체 속에서 도구는 바로 그 도구로서 있을 수 있다. 도구는 본질적으로  … 을 하기 위한 어떤 것이다. 유용성, 기여성, 사용 가능성, 편리성 등 하기 위한 [용도성]의 상이한 방식들이 도구 전체성을 구성한다. 하기 위한의 구조 속에는 어떤 것에 대한 어떤 것의 지시가 들어 있다. (…) 우선 필요한 것은, 지시의 다양성을 현상적으로 주목하는 것이다. 도구는 그 도구의 성격에 따라 필기도구, 펜, 잉크, 종이, 밑받침, 책상, 램프, 가구, 창, 문, 방 등과 같이, 언제나 다른 도구에의 귀속성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이런 사물들은 우선 그 자체로 개별적으로 나타나고, 그런 뒤에 실재적인 것의 총계로서 이 방을 채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주제적으로 포착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가장 친근하게 만나는 것은 방이고, 더욱이 이 방은 기하학적 공간적 의미에서 네 벽으로 둘러싸인 사이가 아니라, 주거도구로서의 방이다. 이 방에서부터 집기들의 배치가 드러나고, 이 배치 속에서 그때그때의 개별적 도구가 드러난다. 이런 개별적 도구에 앞서 그 때마다 이미 도구 전체성이 발견되어 있다.(68-69, 102-103)


 


② 용재성


(한: 用在性, 독: Zuhandenheit, 영: readiness-to-hand)


 


도구의 존재양식은 용재성(用在性)이다. 용재성은 단순히 사용가능성이나 유용성 따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도구가 도구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사용자가 아무런 불편 없이 도구를 사용할 때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망치라는 사물을 사용할 때 아무런 거리낌없이 망치를 사용하면 할 수록, 우리는 망치를 있는 그대로의 망치로서 만나게 된다. 도구를 도구로서 만남에 있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도구의 ‘편리함’이다. 따라서 용재성이란 존재양식은 편리함을 수반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용재성이 도구의 ‘즉자적(卽者的) 성격’이다. 용재성은 ‘그 자체로’ 있는 존재자의 존재론적-범주적 규정이다.


『예술작품의 근원』에서는 용재성이 “신뢰성”(『예술작품의 근원』, 23)이란 개념으로 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들일을 끝낸 농촌 아낙네는 저녁 늦게 피로감에 휩싸인 채 구두를 벗었다가 아직 동도 트기 전 어둑어둑할 무렵 다시 구두를 주어 신는다. 또 들일을 쉬는 날은 구두 앞을 무심하게 지나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구두를 신었기에 농촌 아낙네는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에 응답하며 자기의 세계를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도구의 본질이 바로 신뢰성이다. 『장자』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발표하기 이전 이미 『장자』를 읽었음은 이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기에 『장자』의 다음 글귀가 예사롭지 않다.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이다.”(『달생(達生)』, 19 : 13)


용재성이 도구의 존재양식이라면, 도구를 용재자(用在者, das Zuhandenes)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런데 용재자를 용재자로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주시양식이 요구된다. 그러한 주시양식이 바로 배시(配視, Umsicht)이다. ‘…하기 위한’이라는 도구의 다양한 지시에 종속해서 적응해 가는 “시”가 배시이다.


 


[읽기자료]


도구의 존재가 진정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은, 그 때마다 도구에 맞추어 재단된 교섭, 예컨대 망치를 가지고 때리는 것이지만, 그런 교섭[망치질]이 이 [망치라는] 존재자를 현출하는 사물로서 주제적으로 포착하는 것도 아니고, 항차 [망치]사용이 [망치의] 도구구조 자체에 관해 아는 것도 아니다. 망치질을 한다는 것은, 망치의 도구성격에 대한 단순한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 적합할 수 없을 만큼 이 도구를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용적 교섭에 있어서, 배려는 그때그때의 도구를 구성하는 ‘하기 위한’의 지시에 종속된다 ; 망치라는 사물이 그저 방관되기만 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다시 말해 그 사용이 활발하면 활발할수록, 그것과의 관계는 더 근원적으로 되고, 망치라는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도구로서 더 적나라하게 만나지게 된다. 망치질 자체가 망치의 특수한 편리함을 발견한다. 도구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도구의 존재양식을 우리는 용재성(用在性)[Zuhandenheit]이라 부른다. 도구에는 이런 즉자 존재(卽自存在)라는 성격이 있고, 따라서 단지 출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구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편리한 것이며 사용 가능한 것이다. 이러저러한 성질을 갖춘 사물의 외관을 그냥 바라보기[觀照]만 한다면, 아무리 날카롭게 바라본다 하더라도 용재자를 발견할 수는 없다. 사물을 그냥 이론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으로는 용재성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용하고-조작하는 교섭은 맹목적이 아니고, 제나름의 고유한 주시양식(注視樣式)을 가지고 있다. 이 주시양식이 조작을 유도하고 그 조작에 특수한 확실성을 부여한다. 도구와의 교섭은 하기 위한의 다양한 지시에 종속된다. 그렇게 적응해 가는 것을 이끄는 ‘봄’은 배시(配視)이다. (69, 103-104)


 


용재자[用在者, das Zuhandene] 도대체 이론적으로 포착되지도 않지만, 또한 당장 배시적으로 배시의 주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 신변적 용재자의 독특함은, 자신의 용재성에서 이를테면 스스로 물러남으로 해서 도리어 본래적 용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69, 104)


 


용재성은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의 존재자의 존재론적-범주적 규정이다.(71, 107)


 


③ 제품


우리가 만나는 일차적 도구는 작업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제품이다. 그런데 용재자(用在者)로서의 제품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제품은 사용목표를 가지고 있다. 구두는 신기 위한 것이고 시계는 시간을 읽기 위한 것이다. 또한 제품은 재료를 지시한다. 이런 지시 관계를 통해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자연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자연도 역시 용재자이다. 예를 들어 구두는 가죽을 지시하며 가죽은 동물을 지시한다. 사육의 유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물은 여하튼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자라났기에 자연의 일종인데, 우리는 그 동물을 제품의 재료로서 만나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환경세계를 통해 만나는 모든 자연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우선 대개 만나는 숲은 조림(造林)이며, 산은 채석장이고, 강은 수력이고, 바람은 ‘돗에 안긴’ 순풍이다.


우리가 환경 세계 안에서 우선 대개 만나는 자연은 물리학적 자연이 아니다. 물리학적 자연과의 만남은 우리가 존재자를 보는 시각의 근본적 변양을 요구한다. 즉 존재자를 단순히 도구로서 보지 않고 세계를 탈세계화하여 존재자를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존재의 한 극한에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물리학적 자연을 발견한다. 하이데거는 세계의 탈세계화를 존재이해의 변양이라고도 한다. 또한 하이데거가 즐겨 사용하는 전재성(前在性)이란 표현은 이러한 물리학적 자연의 존재양식을 가리킨다. 즉 용재적 자연의 존재양식을 도외시해야 자연 그 자체가 순수한 전재성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물리학적 자연도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 그 자체’일 수 없다. 물리학적 자연 속에서도 ‘자연 그 자체’는 은폐된다. 식물학자의 식물은 논두렁에 핀 꽃이 아니며, 지리학자가 탐구하는 하천의 ‘수원(水源)’은 ‘땅에서 솟는 샘’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존재와 시간』에서는 ‘자연 그 자체’와의 만남이 문제로 남는다.


제품에는 이용자에 대한 지시도 숨어 있다. 특히 이러한 지시는 불특정의 통상적인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기성복의 예가 그렇다. 우리의 논의를 앞질러 말하자면, 우리는 제품을 통해 세인(世人)을 만나게 된다. 또한 이 뿐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세인을 통해 그들의 가정적 세계만이 아니라 공공적 세계도 만나게 된다. 또한 우리가 공공적 세계 안에서 만나는 환경적 자연 역시 용재자이다. 예를 들어, 역의 플랫폼은 우천(雨天)을, 가로등은 어두움을, 시계는 ‘태양의 위치’를 고려한다.


 


[읽기자료]


일상적 교섭과 우선 맞물려 있는 것은 작업도구 자체가 아니라 제품, 즉 그때그때 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배려되는 것은 제품이고, 따라서 또한 용재자[用在者]이다. 제품은 지시 전체성을 담지하고 있으며, 이 지시 전체성의 내부에서 도구와 만나는 것이다.(69-70, 104)


 


제작되어야 할 제품, 즉 망치, 대패, 바늘 등이 쓰일 어디에[사용목표]는 그것대로 도구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 제작되어야 할 구두는 신기 위한 것(신는 도구)이며, 완성된 시계는 시간을 읽기 위한 것이다. 배려적 교섭에서 주로 만나는 - 작업 가운데 있는 - 제품에는 본질적으로 사용 가능성이 속해 있지만, 이 사용 가능성에서는 그 때마다 이미 그 제품이 쓰일 ‘어디에’도 함께 만나게 된다. 주문된 제품[예 : 양복]은 제품대로 그것의 사용과, 이 사용에서 발견되는 존재자[예 : 주문자]의 지시연관을 근거로 해서만 존재한다.(70, 104-105)


 


그러나 제작되어야 할 제품은 ‘… 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제작하는 것 자체가 그 때마다 어떤 것을 위해 어떤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제품에는 동시에 재료에 대한 지시도 숨어 있다. 제품은 가죽, 실, 바늘 등에 의존한다. 가죽은 다시 동물의 껍질로 만들어진다. 동물의 껍질은 다른 사람에 의해 사육된 동물로부터 벗겨진다. 동물은 사육되지 않고서도 세계 내부에 나타나지만, 사육될 경우에도 이 존재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따라서 환경세계에서는 그 자신 제작될 필요 없이 언제나 이미 용재적[用在的]으로 있는 존재자도 만날 수 있다. 망치, 부집게, 못 등은 그 자체로 강철, 쇠, 구리, 암석, 목재 등을 지시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들로부터 성립한다. 사용되는 도구 속에서는 이 사용을 통해 자연, 즉 천연산물이라는 빛 속에서 보여진 자연도 함께 발견된다.(70, 105)


 


그러나 이 경우 자연은 단지 전재자[前在者, das Vorhandene]로서만 이해되어서도 안 되지만 자연력으로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숲은 조림(造林)이고, 산은 채석장이며, 강은 수력이고, 바람은 돛에 안긴 순풍이다. 발견된 환경세계와 더불어 만나는 것은 이렇게 발견된 자연이다. 용재적[用在的] 존재양식으로서의 자연의 존재양식을 도외시해야 비로소 자연 그 자체가 전적으로 그 순수한 전재성[前在性]에서 발견되고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을 이같이 [순수한 전재성으로서] 발견할 때에는, 끊임없이 생동하고, 우리를 엄습하고, 아름다운 풍경으로서 우리를 사로잡는 자연은 은폐되고 만다. 식물학자의 식물은 논두렁에 피어 있는 꽃이 아니며, 지리학적으로 확정된 하천의 수원(水源)은 땅에서 솟는 샘이 아니다.(70, 105)


 


제작된 제품은 그 제품이 쓰일 수 있는 ‘어디에’와 ‘무엇으로’[작품의 구성 원료]만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단순한 수공업적 상태에서는 제품 속에 동시에 착용자나 이용자에 대한 지시도 숨어 있다. 제품은 [착용자나 이용자의] 신체에 알맞게 재단되어 있으며, 그 신체는 그 제품이 만들어질 때 그 제품 곁에 함께 존재한다. 한 타스의 상품을 제작할 경우에도 이 구성적 지시는 결코 빠질 수가 없다. 그 지시는 단지 불특정일 뿐이며 임의의 사람, 즉 통상적인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제품과 함께 만나는 것은, 용재적[用在的] 존재자만이 아니라, 현존재라는 존재양식을 지닌 존재자이기도 하다. 제작된 것은 현존재의 배려 속에서 그에게 용재적으로 된다.(70-71, 105-106)


 


그리고 이와 함께 착용자나 이용자가 살고 있는 세계를 만나게 되는데, 이 세계는 동시에 우리의 세계이다. 그 때마다 배려되는 제품은 가령 작업장이라는 가정적(家庭的) 세계에서만 용재적[用在的]이 아니고, 공공적 세계에서도 용재적이다. 이 공공적 세계와 더불어 환경적 자연이 발견되어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하게 된다. 도로, 시가, 교량, 건물 등에 있어서 배려는 일정한 방향에서 자연을 발견한다. 지붕이 있는 역의 플랫폼은 우천(雨天)을 고려하고 있으며, 길가의 가로등은 어두움을 고려하고 있다. 즉, 그것은 날이 밝았다 어두워지는 특수한 변화, 즉 태양의 위치를 고려하고 있다. 시계의 경우에는 우주계의 일정한 별자리가 언제나 고려되고 있다. 시계를 눈여겨보면, 우리는 암암리에 태양의 위치를 이용하고 있으며, 그 태양의 위치에 따라 관청은 시간측정을 천문학적으로 조정한다. 우선 눈에 띄지 않게 용재적으로 있는 시계라는 도구를 사용할 때도, 환경적 자연이 함께 용재적으로 있다.(71, 106)


 


3) 용재자(用在者)의 세계 적합성


용재성(用在性)은 편리함을 수반한다. 도구가 도구로서의 역할을 할 때, 하나의 도구는 전혀 눈에 띄지 않고, 아무런 강요도 하지 않을 뿐더러, 작업에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런 반발도 하지 않는다. 하나의 도구가 도구 전체성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쓰일 곳’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도구가 세계와 맺는 적합성의 관계는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 비현저성, 비강요성, 비반발성 등의 결성적 표현은 도구로서의 용재자가 자기의 즉자적 존재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리는 적극적인 현상적 성격이 된다.


그러나 작업장에서 도구가 훼손되었거나, 혹은 도구가 결여되었거나, 혹은 도구가 작업에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질 때 상황은 달라진다. 용재자는 비(非)의 성격을 상실함으로써, 현저성, 강요성, 반발성의 성격을 갖게 된다. 따라서 용재자는 잠시 전재자(前在者)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용재자가 과학적 관찰대상인 전재자로 변양되는 것은 아니다. 잠시간의 배시(配視)의 혼란은 곧 제거되며, 용재자의 용재성은 다시 회복된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전재성은 고작해야 용재자의 전재성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의 세계성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꼭 필요한 도구가 훼손되어 도구의 지시적 연관이 방해받을 경우를 가정해보자. 도구와 관계 맺던 배시가 일순간 뒤흔들리면서 그 도구가 놓여 있던 작업장으로서의 전체 ‘작업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도구가 도구로서 머물러 있던 도구 연관 전체가 배시 속에서 부단히 처음부터 이미 보여진 전체로서 밝혀져 온다. 이 전체와 함께 이제 비로소 세계가 고지된다. 이로써 그 도구로서의 용재자가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적합성도 비로소 자기를 드러낸다. 또한 꼭 필요한 도구가 결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그 결손된 도구가 본래 무엇을 위해 또 무엇과 함께 세계 안에 용재적으로 있었던가가 밝혀진다. 이 경우에도 다시 환경세계가 자신을 고지한다. 그러한 세계란 현존재가 이미 거기에 있었던 바로 그 세계인데, 이제 현존재는 다시 바로 그 세계로 되돌아간다.


 


[읽기자료]


세계가 자기를 고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용재자가 그 비현저성(非顯著性)에서부터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75, 112)


 


비현저성, 비강요성, 비반발성 등 결여적[부정적] 표현은 신변적 용재자의 존재가 지닌 적극적 현상적 성격을 가리킨다. 이 비는 용재자의 ‘즉자적 자기 유지’의 성격을 가리킨다.(75, 112)


 


세계-내-존재의 일상성에는 배려의 여러 양상들이 속해 있다. 이 배려의 양상들은 세계 내부적인 것의 세계 적합성이 출현하도록 그렇게 배려되는 존재자를 만나게 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용재적[用在的] 존재자가 이용 불가능한 것으로서, 즉 일정한 사용에 알맞지 않은 것으로서 배려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작업도구가 훼손되었거나 재료가 부적합한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그 예이다. 어느 경우에도 도구는 용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사용 불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성질들에 대한 관조적 확인이 아니라 사용적 교섭의 배시(配視)이다. 사용 불가능성이 그렇게 발견될 때, 그 도구는 눈에 띄게 된다. 용재적 도구가 눈에 띄이는 것[顯著性]은 어떤 비용재성[쓸모 없음]에서이다.(73, 108-109)


 


배려적 교섭은, 그 때마다 이미 용재적으로 있는 것의 범위 안에서 사용 불가능한 것과 마주칠 뿐 아니라, 결여되어 있는 것, 즉 다루기 쉽지 않을 뿐더러 도대체 손 가까이에 있지 않은 것도 발견한다. 이렇게 [용재자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것도 비용재자[非用在者]를 목격하는 것이므로, 용재자는 다시 어떤 ‘전재적[前在的] 존재’ 속에서 발견된다. 용재자가 비용재적인 것으로서 주목될 때, 그 용재자는 강요성이라는 양상을 띠게 된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이 더 절실하게 필요해지면 필요해질수록, 그 없는 것이 그 비용재성에서 더 본래적으로 만나지면 만나질수록, 용재자는 더욱더 강요성을 띠게 되고, 그 결과 그것은 용재성의 성격을 상실하는 것처럼 보인다.(73, 109)


 


배려되는 세계와의 교섭에서 비용재자는 사용 불가능하다거나 단적으로 지금 여기 없다는 의미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없지도 않고 이용 불가능하지도 않으나 배려에 가로 거치는 그런 비용재자[非用在者]로서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배려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없고 그럴 겨를도 없는 것으로서, 거기에 있지 않아야 할 것 혹은 ‘처리되지 않은 것’이라는 방식으로 용재자이다. 이런 비용재자는 방해가 되며, 우선 먼저 배려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반발성을 야기한다. 이 반발과 함께 용재자의 전재성[前在性]은 새로운 방식으로, 즉 여전히 앞에 놓여 있으면서 처리되기를 요구하는 그런 존재로서 자신을 고지한다.(73-74, 110)


 


현저성, 강요성 및 반발성이라는 양상들은 용재자[用在者]에게서 전재성[前在性]이라는 성격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때 용재자는 고작 전재자로서만 고찰되거나 관조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고지되는 전재성은 여전히 도구의 용재성 속에 구속되어 있다. 도구는 아직 단순한 사물이 될 만큼 은폐되어 있지 않다. 도구는 내팽개치고 싶다는 의미에서의 도구로 된다; 그러나 이처럼 내팽개치고 싶다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용재자는 끄떡없이 전재성을 지닌 채 여전히 용재자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74, 110)


 


현저성, 강요성 및 반발성에 있어서 용재자는 일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용재성을 상실한다. 그러나 이 용재성 자체는 비주제적일망정 용재자와의 교섭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용재성은 단순히 소멸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용 불가능한 것이 현저해질 때, 말하자면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이때 용재성은 다시 한 번 자기를 드러내는데, 바로 이 경우[즉, 용재성이 이별을 고할 때]에 용재자의 세계 적합성도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74, 110-111)


 


어떤 도구가 사용 불가능하다는 데는, 도구가 ‘쓰일 곳’을 향한 ‘하기 위한’[용도성]의 구성적 지시가 방해받고 있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지시는 그 자체로는 고찰되지 않지만, 지시는 그 지시 하에 배려적 안배가 행해질 때 거기 [그 現場]에 있다. 그러나 지시가 분명해지는 것은, 지시가 방해받을 때, 즉 … 을 위해 사용 불가능하게 될 때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아직 존재론적 구조로서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작업도구의 손상에 봉착하는 배시에 대해 존재[자]적으로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도구의] 그때그때의 ‘쓰일 곳’에 대한 지시가 배시적으로 일깨워짐으로써, 이 ‘쓰일 곳’ 자체 및 이와 함께 작업연관, 즉 배려가 언제나 이미 거기 머물러 있는 그 작업장으로서의 전체 작업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도구연관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보여진 적이 없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배시 속에서 부단히 처음부터 이미 보여진 전체로서 밝혀져 온다. 이 전체와 함께 세계가 고지된다.(74- 75, 111)


 


마찬가지로, 어떤 용재자가 일상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 용재자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은, 배시 속에서 발견된 지시연관이 부서짐을 의미한다. 그때 배시는 공허 속에 빠지고 그제서야 비로소 거기 없는 것이 무엇을 위해 무엇과 함께 용재적으로 있었던가를 안다. 여기에서 다시 환경세계가 자기를 고지한다. 그렇게 밝혀져 오는 것은 그 자체 다른 용재자들 중의 한 용재자가 아니고, 더구나 소위 용재적 도구의 기초가 된다는 전재자는 정녕코 아니다. 그것[환경세계]은 모든 확인과 고찰에 앞서 거기[現]에 존재한다. 그것은 배시가 언제나 존재자에만 향하는 한 배시로서도 접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배시에게는 그 때마다 이미 개시되어 있다.(75, 111-112)


 


그러나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자 발견을 위해] 빛을 발할 수 있다면, 세계는 어쨌든 개시되어 있어야 한다. 세계 내부적 용재자가 배시적 배려에 접근할 수 있을 때는 동시에 그 때마다 이미 세계는 먼저 개시되어 있다. 따라서 세계는, 그 안에서 현존재가 존재자로서 그 때마다 이미 있었던 곳이며, 현존재가 어떤 방식으로든 분명히 거기를 향해 간다하더라도 언제나 거기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런 어떤 것이다.(76, 113)


 


4) 세계의 세계성


(1) 적소성


(한: 適所性, 독: Bewandtnis, 영: Involvement)


 


세계는 용재자가 용재자로서 발견되는 지평이다. 용재자는 세계를 기반으로 해서 비로소 용재자가 된다. 그런데 세계 안에 엄밀하게 하나의 용재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용재자는 이미 어떤 특정한 지시연관 구조에 종속된다. 이러한 지시연관 구조에 따라, 특정한 용재자가 적합하게 쓰일 자리도 결정된다. 망치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망치를 “가지고”(mit) 못을 박는”데”(bei) 쓰고 있다. 망치는 못박는데 쓰일 때 비로소 적합하게 사용된다. 망치의 적합한 쓰임 자리는 망치질이다. 망치는 망치질에서 비로소 망치가 될 수 있다. 만약 망치가 다른 자리에서 쓰인다면 흉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 적합하게 한다’라는 것은 용재자를 용재자로서 있게 하는 존재성격이다. 이러한 존재성격을 우리는 특히 적소성(適所性)이라 명명한다. 적소성은 ‘…을 가지고 …에’라는 관계 구조를 갖는다.


적소성의 존재론적 출처는 용재자들의 지시연관 구조이다. 따라서 적소성도 연관구조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망치가 망치질에서 적소성을 갖는다면, 망치질은 무엇인가를 고정시키는 데서 적소성을 갖고, 또한 그렇게 고정시키는 것은 비바람을 막는 데서 적소성을 갖는다. 적소성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의해 서로간의 연관 구조를 형성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관이 무한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적소성의 연관은, 예를 들면 현존재의 숙박을 위해서라는,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에 의해 완결된다.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은 현존재의 궁극목적이다. 그것은 더 이상의 아무런 목적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소성의 연관은 현존재의 궁극목적에 의해 하나의 전체적인 연관 구조로서 완성된다. 적소성의 전체적인 연관 구조를 우리는 특히 적소 전체성이라 명명한다.


적소 전체성이 개별적 용재자의 적소성에 선행한다. 후자는 전자 안에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작업장의 예를 들어보자. 작업장에 집기들을 배치할 적에 우리는 집기 하나 하나를 먼저 배치한 뒤, 그러고 나서 전체의 조화를 꾀하지 않는다. 먼저 작업장 전체를 둘러보고 집기들의 전체적인 쓰임 자리를 염두에 둔 뒤, 그러고 나서 집기 하나 하나를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이런 것이 ‘적소토록 한다’의 존재자적 의미에 해당한다. 즉 ‘적소토록 한다’의 존재자적 의미는 ‘개별적인 용재자를 그 적합한 쓰임 자리에 있게 한다’는 것이 된다. 물론 이때, ‘있게 한다’라는 표현은, 용재자를 처음으로 존재하도록 만들어낸다라는 뜻이 아니라, 개별적인 용재자를 비로소 용재자로서 개현한다라는 뜻이 된다. 이에 반면, ‘적소토록 한다’의 존재론적 의미는 모든 용재자를 용재자로서 개현하는 것과 관계한다.


현존재는 실존하는 한 그때마다 용재자에 의존한다. 용재자를 그때마다 적재 적소에서 사용함으로써 현존재는 자신의 실존을 꾸려 나간다. 따라서 ‘용재자를 그때그때 이미 적소토록 하였다’는 것은 현존재 자신의 존재양식을 성격짓는 하나의 아프리오리한 완료이다.


 


[읽기자료]


용재자는 세계 내부적으로 만난다. 이 존재자의 존재, 즉 용재성은 따라서 세계 및 세계성과 어떤 존재론적 관련을 맺고 있다. 세계는 모든 용재자 속에 언제나 이미 거기 [개현되어] 있다. 세계는, 비록 주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모든 만나는 것과 함께 이미 선행적으로 발견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는 환경세계적 교섭의 어떤 방식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다. 세계란, 용재자가 거기에 의거해서 용재적으로 되는 그런 것이다.(83, 122)


 


용재자의 도구 틀은 ‘지시’라고 시사되었다. (…) 그렇다면 지시는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용재자의 존재가 지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 는 것은, 용재자가 지시받고 있다는 성격[피지시성]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존재자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자로서도 어떤 것을 향해 지시받고 있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발견되는 것이다. 용재자[예 : 망치]는 자기가 쓰일 수단을 가지고[망치질] 어떤 것[못 박는데] 적소적(適所的)이다. 용재자의 존재성격은 적소성[適所性, 적합한 쓰임자리에 있음]이다. 적소성에는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 적합하게 한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 을 가지고[mit] … 에[bei]라는 관계는 지시라는 술어에 의해 시사되어야 할 것이다.(83-84, 123)


 


적소성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존재이며, 그 적소성을 근거로 해서 그 존재자는 그 때마다 이미 우선 개현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존재자로서 그 때마다 적소성을 가지고 있다. 존재자가 어떤 적소성을 갖는다는 것은 이 존재자의 존재의 존재론적 규정이지, 존재자에 대한 존재[자]적 진술이 아니다. 존재자가 어디에 적소성을 갖는다는 것은, 유용성의 ‘어디에’, 즉 사용 가능성의 ‘무엇에’이다. 유용성의 ‘어디에’는 다시 자신의 적소성을 가질 수 있다 ; 예컨대, 망치질 때문에 우리가 망치라고 부르는 용재자는 망치질에서 적소성을 갖고, 망치질은 고정시키는 데에서 그 적소성을 가지며, 이 고정시키는 것은 비바람을 막는 데서 적소성을 갖는다 ; 후자는 궁극적으로는 현존재의 숙박을 위해, 즉 현존재의 존재의 가능성을 위해 존재한다. 용재자가 어떤 적소성을 갖는가는 그 때마다 적소 전체성에 입각해서 밑그림 그려진다. 예컨대, 작업장 안에 있는 용재자를 그 용재성에 있어서 구성하는 적소 전체성은 개개의 도구보다 앞서 있으며, 모든 집기와 가재도구를 갖추고 있는 저택의 적소 전체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적소 전체성 자체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어디에’, 즉 어떤 적소성도 이제 더 이상 없는 ‘어디에’로 귀착한다. 그것은 세계 내부에서 용재자의 존재양식을 갖는 존재자가 아니라, 그 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규정되고 그의 존재 틀에는 세계성 자체가 속하는 그런 존재자이다. 이 일차적 ‘어디에’는 어떤 적소성이 가능한 경우로서의 거기에가 아니다. 이 일차적 어디에는 궁극목적이다. 그러나 궁극목적은 언제나 현존재의 존재에 관계하며, 현존재는 자기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자기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84, 124)


 


‘적소토록 한다’의 존재[자]적 의미는, ‘어떤 현실적 배려의 범위 안에서, 어떤 용재자로 하여금, 그것이 지금 있는 그대로 또 그것이 그렇게 있는 바와 같이, 이러저러하게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 있게 한다의 존재[자]적 의미를 우리는 원칙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있게 한다]을 가지고, 우리는 세계 내부에 우선적으로 있는 용재자의 선행적 개현의 의미를 해석한다. 선행적으로 있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처음으로 존재하도록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 그 때마다 이미 있는 존재자를 그 용재성에서 발견하여, 그것을 그런 존재를 지닌 존재자로서 만나게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용재자로 하여금] 아프리오리하게 ‘적소토록 한다’는 것은 용재자를 만날 가능성의 조건이며, 그 결과, 현존재는 그렇게 만나는 존재자와의 존재[자]적 교섭에 있어서, 그 존재자로 하여금 그 곳에 존재[자]적 의미에서 적소토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존재론적으로 이해된 ‘적소토록 한다’는, 모든 용재자를 용재자로서 개현하는 것과 관계한다. 용재자가, 거기에서 존재[자]적 의미에서 자신의 적소를 갖든, 혹은 용재자가 거기에서 존재[자]적으로 자신의 적소를 갖지 못하는 그런 존재자이든, 이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기에서 후자의 존재자는 물론 우선 대개는 배려되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발견된 존재자로서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공(加工)하거나 개선하거나 파괴한다.(84-85, 125)


 


적소성을 기반으로 하여 개현하면서 ‘그때그때 이미 적소토록 하였다’는 것은 현존재 자신의 존재양식을 성격짓는 하나의 아프리오리한 완료이다. 존재론적으로 이해된 ‘적소토록 한다’는 것은, 존재자를 그 환경세계 내부의 용재성을 향해서 선행적으로 개현하는 것이다. 적소토록 하는 ‘어디에’를 근거로 해서 적소성의 ‘무엇을 가지고’[도구여하]가 개현된다. 바로 이 ‘무엇을 가지고’[도구]가 용재자로서 배려와 만나는 것이다. 존재자가 일반적으로 배려에서 현시되는 한, 즉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에서 발견되어 있는 한, 그 존재자는 그 때마다 이미 환경세계적 용재자이지, 우선은 단지 전재적[前在的]으로만 있는 세계질료가 결코 아니다.(85, 125-126)


 


(2) 유의의성


(한: 有意義性, 독: Bedeutsamkeit, 영: Significance)


 


개별적 용재자의 적소성은 적소 전체성 안에서 발견된다. 적소 전체성은 현존재의 궁극목적을 정점으로 하여 완결된 적소성의 연관 구조 전체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계 현상을 만나게 된다. 적소 전체성은 자신 안에 세계와의 존재론적 관련을 간직한다.


현존재의 존재에는 존재이해가 속해 있다. 현존재는 본래적이든 또 비본래적이든 여하튼 자기의 존재를 이해한다. 이로써 현존재는, 본래적 존재 가능이든 혹은 비본래적 존재 가능이든, 또한 그런 존재 가능이 명시적이건 비명시적이건, 여하튼 자신을 궁극목적으로 하는 존재 가능을 이해한다. 그러고는 자기의 존재 가능에 입각해 그때마다 어떤 ‘하기 위한’을 향해 자신을 지시한다. 즉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가능을 위해 집을 짓도록 자신을 지시하며, 집을 짓기 위해 판자를 고정시키도록 자신을 지시하며, 판자를 고정하기 위해 망치질을 하도록 자신을 지시하며, 망치질을 하기 위해 망치를 가지고 사용하도록 자신을 지시한다. 여기에서 ‘목적과 수단의 계열’이 성립한다. 이러한 계열은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 말해 실존하기 위해, 자신을 지시해가며 용재자를 적소토록 하는 계열이 된다.


현존재의 존재를 정점으로 하는 ‘목적과 수단의 계열’은 하나의 지평을 형성한다.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를 지시해 가는 가운데, 다시 말하자면 ‘목적과 수단의 계열’이 펼쳐지는 가운데, 하나의 지평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지평이 바로 세계이다. 세계란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가 펼쳐지는 바로 ‘거기’가 된다. 또한 이 ‘거기’가 현존재가 존재자를 용재자로서 만나게 되는, 다시 말해 용재자를 용재자로서 적소토록 하는 ‘기반’이 된다. 따라서 ‘거기’로서의 세계와 앞서 논의한 적소 전체성은 존재론적 관련을 맺게 된다. ‘거기’로서의 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목적과 수단의 계열’을 거슬러 따라 올라가는 것이 적소전체성의 구조 계열인 ‘수단과 목적의 계열’이 된다. 양자의 계열은 방향 상으로는 반대 관계에 해당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목적과 수단의 계열’이 ‘수단과 목적의 계열’을 정초하는 셈이 된다.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가 펼쳐지는 지평으로서의 ‘거기’가 바로 세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와 현존재는 친숙하다. 세계와의 친숙성으로 인해, 현존재는 세계를 세계로서 구성하는 관련들에 관한 이론적 천착에는 별 반 관심이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관련들에 대한 존재론적-실존론적 해석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현존재의 세계 친숙성에 근거한다.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는 일종의 유의의화(有意義化) 작용이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 및 존재 가능을 자기의 세계-내-존재를 고려해서 근원적으로 이해하도록 자기 자신에게 ‘유의의화’한다. ‘유의의화’란 ‘의의 있게 만듦’을 의미한다. 유의의화 작용은 앞서 말한 ‘목적과 수단의 계열’을 의의 있게 만들어 준다. 즉 유의의화 작용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 속에서 그때그때 수단을 의의 있게 만들어 준다. 즉 현존재의 궁극목적은 ‘하기 위한’을, 또 ‘하기 위한’은 ‘거기에’를, ‘거기에’는 ‘어디에’를, ‘어디에’는 ‘무엇을 가지고’를 유의의화 한다. 예를 들면, ‘숙박’이라는 현존재의 궁극목적은 ‘비바람을 피하기 위함’을, ‘비바람을 피하기 위함’은 ‘판자를 고정함’을, ‘판자를 고정함’은 ‘망치질’을, 그리고 ‘망치질’은 ‘망치를 가지고’를 유의의화 한다. 이 유의의화 작용의 관계 전체를 우리는 특히 유의의성이라 명명한다. 그렇다면, 유의의성은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그때마다 이미 그 안에 존재하는 그런 세계의 구조를 형성하는 그것이다. 즉 유의의성은 세계의 구조가 된다. 다시 말해 유의의성은 현존재의 자기 지시가 행해지는 기반(세계)의 구조로서, 세계의 세계성을 형성하는 그것이 된다.


세계의 세계성은 유의의성이다.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에서 비롯된 유의의성은 세계-내-존재의 실존론적 틀이 된다. 이러한 유의의성이 적소 전체성의 가능성의 존재자적 조건임은 이제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유의의성이 적소 전체성을 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또한 유의의성은 현존재의 낱말과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기초가 된다. 낱말과 언어는 현존재의 이해 내용이 분절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이 문제는 앞으로 4장에서 상론됨)


 


[읽기자료]


용재자의 존재로서의 적소성 자체는 그 때마다 어떤 적소 전체성이 미리 발견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발견된다. 따라서 발견된 적소성 안에는, 즉 우리가 만나는 용재자 안에는, 우리가 앞에서 용재자의 세계 적합성이라고 명명한 것이 미리 발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미리 발견되어 있는 적소 전체성은 자신 안에 세계와의 존재론적 관련을 간직하고 있다. 적소토록 한다는 것은 존재자를 적소 전체성을 기반으로 해서 개현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존재자를 개현하는 기반을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개시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85, 126)


 


그런데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우선 개현되는 기반이 선행적으로 개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존재의 존재에는 존재이해가 속해 있다. 이해 내용의 존재는 이해작용 안에 있다. 현존재에게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라는 존재양식이 속해 있다면, 현존재의 존재이해를 본질적으로 존립시키는 것에는 세계-내-존재에 관한 이해작용이 속해 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것의 개현을 초래하는 것을 선행적으로 개시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존재자로서 이미 언제나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85-86, 126)


 


[용재자로 하여금] ‘… 에 … 을 가지고’ 선행적으로 적소토록 하는 것은, 적소성의 ‘어디에’와 적소성의 ‘무엇을 가지고’ 등 적소토록 함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다. 그런 이해와, 더 나아가 그 이해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 가령 적소성이 얻어지는 ‘어디에’로서의 ‘거기에’, 모든 ‘무엇을 위해’가 궁극적으로 귀착하는 ‘궁극목적’ 등 이 모든 것은, 어떤 이해 가능성 속에서 선행적으로 개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현존재가 거기에서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 전[前]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는 바탕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관계 연관을 이해함에 있어, 현존재는 명시적으로 또는 비명시적으로 파악된, 본래적 또는 비본래적 존재 가능, 즉 현존재 자신을 궁극목적으로 하는 존재가능에 입각해서, 어떤 ‘하기 위한’을 향해 자신을 지시하고 있다. 이 ‘하기 위한’이 ‘적소토록 함’의 가능한 ‘어디에’로서 ‘거기에’를 예시(豫示)한다. 이때 ‘적소토록 함’은 물론 구조상 어떤 것을 가지고 적소토록 한다. 현존재는 그 때마다 이미 언제나 [자기의 존재 가능인] 궁극목적에 입각하여 자신을 적소성의 ‘무엇을 가지고’를 향해 지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그 때마다 언제나 이미 존재자를 용재자로서 만나게 한다. 현존재가, 자신을 지시한다는 양상에 있어서, 자기를 선행적으로 이해하는 거기는 존재자를 선행적으로 만나게 하는 기반이다. 존재자를 적소성이라는 존재양식에서 만나게 하는 기반, 즉 자기 지시적 이해가 행해지는 거기가 다름 아닌 세계라는 현상이다. 그리고 현존재의 자기 지시가 행해지는 기반의 구조가 세계의 세계성을 형성하는 그것이다.(86, 126)


 


현존재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그 때마다 이미 이해하고 있는 거기[現], 그 거기와 현존재는 근원적으로 친숙해 있다. 세계와의 이런 친숙성은, 세계를 세계로서 구성하는 관련들에 대한 이론적 천착을 반드시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관련들을 분명히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은 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와의 친숙성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세계 친숙성은 그것대로 현존재의 존재이해를 함께 형성하고 있다. 이 가능성은, 현존재 자신이 자기의 존재와 이 존재의 여러 가능성 또는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 해석을 자기에게 과제로서 제기하고 있는 한 분명하게 파악될 수 있다.(86-87, 127-128)


 


앞으로 더 진전해서 분석되어야 할 이해작용(§ 31 참조)은, 앞서 언급된 관련들을 선행적 개시성 속에 보유하고 있다. 이해작용은 이 관련들 속에 자신을 친숙하게 보유하면서, 이해의 지시작용이 활동하는 거기[터전]로서의 그 개시성을 미리 보유하고 있다. 이해작용은, 이 관련들 자체 안에서, 또 이 관련들 자체로부터, 자기에게 지시하도록 한다. 지시작용이 가진 이런 관련들의 관계성격을 우리는 유의의화 작용(有意義化作用)이라고 파악한다. 이런 관련들과의 친숙성 속에서,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 및 존재 가능을 자기의 세계-내-존재를 고려해서 근원적으로 이해하도록 자기 자신에게 유의의화한다. [현존재의] ‘궁극목적’은 ‘하기 위한’을 유의의화[의의 있게]하고, ‘하기 위한’은 ‘거기에’를, ‘거기에’는 적소토록 하는 ‘어디에’를, 또 이 ‘어디에’는 적소성의 ‘무엇을 가지고’를 유의의화한다. 이 관련들은 근원적인 전체성으로서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관련들이 관련들인 소이는 이 유의의화 작용으로서이니, 이 유의의화 작용 속에서 현존재는 자기의 세계-내-존재를 자기 자신에게 선행적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이 유의의화 작용의 관계 전체를 우리는 유의의성[의의 있음]이라고 부른다. 유의의성은 세계의 구조, 즉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그 때마다 이미 그 안에 존재하는 그런 세계의 구조를 형성하는 그것이다. 현존재는 스스로 유의의성과 친숙하다는 점에서 존재자가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자]적 조건이다. 존재자는 적소성(용재성)이라는 존재양식을 지니고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즉자적으로 자기를 고지할 수 있다. 현존재는, 현존재인 한 그 때마다 이미 이런 존재자, 즉 그가 존재함과 함께 본질적으로 이미 용재자와의 연관이 발견되는 그런 존재자이다 ??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그 때마다 이미 만나는 세계에 자기를 의존하고 있으니, 현존재의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이 [세계에의] 의존성이 속해 있다.(87, 128-129)


 


한편 현존재가 그 때마다 이미 친숙해 있는 그 유의의성 자체는, 자신 안에, 이해하는 현존재가 해석하는 현존재로서 의의라든가 하는 것을 개시할 수 있기 위한 가능성의 존재론적 조건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 의의는 다시 의의대로 낱말과 언어의 가능적 존재를 기초지우고 있다.(87, 129)


 


개시된 유의의성은 현존재의, 즉 그의 세계-내-존재의 실존론적 틀로서 적소 전체성이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자]적 조건이다.(87, 129)


 


현재의 탐구영역의 범위 안에서는, 존재론적 문제성의 여러 구조와 차원에 대해 거듭 강조되었던 차이가 원칙적으로 식별되어야 한다 : 1. 우선적으로 만나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존재(용재성) ; 2. 우선적으로 만나는 존재자를 독자적으로 발견하면서 관통하는 가운데 눈에 띄고 규정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자의 존재(전재성) ; 3. 세계 내부적 존재자 일반이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자]적 조건의 존재, 즉 세계의 세계성. 마지막에 언급된 존재는 세계-내-존재, 즉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이다. 그 앞에 언급된 두 존재 개념은 범주이며, 현존재와는 다른 양식의 존재를 지닌 존재자에 해당된다. 유의의성으로서 세계성을 구성하는 지시연관을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하나의 관계체계라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 세계성의 구성요소로서의 이러한 관계체계는 세계 내부적 용재자의 존재를 증발시키기는 커녕, 도리어 세계의 세계성을 근거로 해서 이러한 존재자는 자기의 실체적 즉자성에 있어서 비로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어쨌든 만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존재자의 영역 안에서, 전재자에 불과한 것까지도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성립한다.(88, 129-130)


 


5) 공간성


(한: 空間性, 독: Räumlichkeit, 영: Spatiality)


 


(1) 용재자의 공간성


용재자의 존재방식은 우리에게 이미 용재자의 공간성을 암시한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용재성은 편리함을 수반한다. 편리함이란 용재자가 우리의 배시적 배려에 용이하게 가까이 놓여 있음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 때의 가까움이란 순수 기하학적 공간 안에서의 가까움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의 편리에 맞는 가까움이다. 예를 들어 구두라는 도구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구두를 가까이 놓는다고 하여 구두를 벼개 옆에 놓지는 않는다. 우리는 구두를 언제나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신발장이나 혹은 현관 앞에 가지런히 정리한다. 용재자가 갖는 가까움이란 이처럼 배시적 배려에서의 가까움이다. 또한 이런 의미의 가까움은 방향성까지를 포함한다. 용재자는 언제든지 접근 가능한 방향과 관련하여 놓여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용재자의 공간성은 가까움과 방향성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로 구성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가까움과 방향성에 의해 용재자의 자리가 결정된다.


용재자의 공간성이란 배시적 배려에 의해 결정된 용재자의 자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용재자의 공간성이란 바로 우리가 앞서 논의한 용재자의 적소성과 관련된다. 적소성이 용재자가 그것의 ‘쓰임 자리에 적합하게 있음’을 의미한다면, 용재자의 공간성이란 용재자의 적소성에서의 그 ‘쓰임 자리’를 의미한다. 또한 개별적 용재자의 적소성에 적소 전체성이 선행하듯, 개별적 용재자의 자리에는 자리 전체성이 선행한다. 이러한 자리 전체성이 우리의 생활 공간에 해당한다. 우리는 특정한 용재자의 자리를 결정할 때 이미 자리 전체성을 예견하며, 이러한 예견에 토대하여 개별적 용재자의 자리를 결정한다. 이러한 자리 전체성을 우리는 특히 방역(方域)이라고도 명명하는데, 방역이란 다름 아니라 적소 전체성과 등근원적 관계에 있는 공간적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공간으로서의 방역은 단지 작업도구가 적재적소에 배치된 작업장이나 혹은 가재도구가 비치된 우리들 안방 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생활공간으로서의 방역은 넓게는 해와 달, 그리고 별이라는 자연의 존재자에로까지 확장된다. 자연의 존재자도 엄밀하게 말하면 용재자에 해당한다. 우리는 앞서의 논의에서 제품의 재료를 통해 자연을 용재자로서 만나며 또한 공공세계를 통해 환경적 자연을 용재자로서 만남을 확인한 바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세계 속에서 일차적으로 만나는 자연은 영속적 용재자로서의 자연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도 우리의 생활공간으로서의 방역을 구성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속적 용재자는 방역의 강조된 ‘지표’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생활의 편리를 위해 동서남북이라는 방위를 결정한 것이며 또한 집을 지을 때에도 남향집을 고집하며 또한 일출과 일몰을 고려하여 교회와 무덤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적 용재자의 공간성인 자리는 우리의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방역의 선행적 용재성도 은폐된다. 이것은 마치 작업장 안에서 도구의 용재성은 눈에 띄지 않고 따라서 작업장의 세계가 은폐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눈에 띄지 않음과 은폐는, 앞서 논의했듯, 세계와의 친숙성에 근거한다. 그러나 세계와의 친숙성이 깨질 때, 즉 사용해야 할 도구에 결손이 발생하여 배려가 결여적 양상을 보일 때, 은폐되었던 세계가 비로소 밝아오듯, 용재자의 공간성에서 역시 용재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 때, 자리 전체성으로서의 방역이 비로소 방역으로서 우리에게 접근해 온다. 여기에서도 배려의 결여적 양상에서 방역은 비로소 방역으로서 밝혀져 온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재자의 공간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용재자의 공간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현존재의 실존이다. 앞서의 논의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는 목적과 수단의 계열에서 수단을 유의의화하는 작용으로 전개되며 이 유의의성이 적소 전체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적소 전체성에서 파생된 용재자의 공간성이 현존재의 실존에 근거함은 물론이다. 현존재는 실존론적으로 이미 공간적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현존재의 공간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읽기자료]


이미 용재자(用在者)를 성격지울 때, 우리는 어느 만큼 용재자의 공간성과 마주쳤는가? 우리는 우선 용재자에 관해 말한 바 있다. 그것은 그 때마다 다른 존재자에 앞서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자를 의미할 뿐 아니라, 동시에 >가까이< 있는 존재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일상적 교섭에서 만나는 용재자는 가까움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도구의 이 가까움은 도구의 존재를 표현하는 용어인 용재성 에서 이미 시사되고 있다. [도구적으로] >손안에< 있는 것은 그 때마다 상이한 가까움을 가지고 있으나, 이 가까움은 거리측정을 통해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가까움은 배시적으로 >헤아리면서< 다루거나 사용하거나 함으로써 조정되는 것이다. 배려의 배시는, 이런 방식으로 가까이 있는 것을 동시에 ‘방향’ 즉 도구를 언제든지 접근 가능하게 하는 그 방향과 관련해서도 확정한다. 도구가 방향을 잡아 가까이 있다 함은, 도구가 전재적[前在的]으로 공간 안의 어딘가에 제 위치를 점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도구로서 설치되고, 보관되고, 배치되고,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구는 제 자리에 있거나 혹은 >주변에 흩어져< 있다. 이것은 임의의 공간 위치에 순전히 전재적으로 출현하는 것과는 원칙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그때그때의 자리는 …을 하기 위한 도구의 자리로서, 환경세계에 용재적으로 있는 도구 연관이 서로서로 방향을 잡은 자리들의 전체에 의거해서 규정된다. 자리 및 자리의 다양성은 사물들이 임의로 전재적으로 있는 [일정치 않은] ‘어디’로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자리는 그 때마다 하나의 도구가 귀속하는 특정한 >저기<이고 >거기<이다. 그때그때의 귀속성은 용재자의 도구성격과 상응한다. 다시 말하면, 용재자가 도구 전체에 적소적(適所的)으로 귀속하는 것과 상응한다. 그러나 도구 전체가 자리잡을 수 있는 귀속성의 근거에는, 그 귀속성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어디로’ 일반이 놓여 있고, 이 ‘어디로’를 향해서 하나의 도구 연관에 자리 전체가 지정된다. 배려적 교섭 속에서 배시적으로 앞질러 주목되는 이 ‘어디로’, 즉 가능한 도구적 귀속의 ‘어디로’를 우리는 방역(方域)이라 부른다.(102-103, 149-150)


 


>방역 안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방향에 놓여 있는 것의 ‘범위 안에서’도 의미한다. 방향이나 원격성(遠隔性)을 통해서-가까움은 이 원격성의 한 양상일 뿐이다-구성되는 자리는, 이미 하나의 방역을 겨냥해서 또 그 방역 내부에서 정위(定位)되어 있다. 배시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도구 전체성의 자리들이 지시되고 예견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방역이라든가 하는 것이 발견되어 있어야 한다. 용재자가 점하는 자리의 다양성이 갖는 이러한 방역적 정위가 환경세계적으로 가까이서 만나는 존재자의 주변성, 즉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형성한다. 가능한 위치들의 3차원적 다양성이 우선 주어지고, 그것이 전재적 사물들로 채워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공간의 이 차원성은 용재자의 공간성에서는 아직 은폐되어 있다. >위<는 >천정에<, >아래<는 >땅 바닥에<, >뒤<는 >문 곁에<, 이처럼 모든 ‘어디’는 일상적 교섭의 과정이나 방식을 통해 발견되고 배시적으로 해석되는 것이지, 관찰적 공간측정에서 확인되고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103, 150-151)


 


방역은 전재적[前在的] 사물들이 모아져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마다 이미 개별적 자리들 안에 용재적[用在的]으로 존재한다. 개별적 자리들 자체는 배려의 배시 속에서 용재자에게 지정되거나 미리 발견된다. 영속적 용재자[해, 별, 달 따위]는 배시적 세계-내-존재가 미리 고려하는 바이며, 그렇기 때문에 제 자리를 가지고 있다. 영속적 용재자의 용재성이 점유하는 ‘어디’는 배려의 고려거리가 되고 나머지 용재자를 겨냥해서 정위되어 있다. 그리하여 빛과 열을 일상적 사용에 공여하는 태양은, 태양이 공여하는 것을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음으로 해서 배시적으로 발견되는 두드러진 자리, 즉 일출, 대낮, 일몰, 한밤중 등을 갖는다. 방식을 바꿔가면서도 한결같이 영속하는 이 용재자의 자리들은, 그 자리들 안에 있는 방역의 강조된 >지표<가 된다. 이 천체(天體)의 방역[동서남북]은 아직 지리학적 의미를 가질 필요가 전혀 없으나, 자리들로 점유될 수 있는 방역들을 특별하게 형성하기 위한 선행적 ‘어디로’를 미리 부여한다. 집에는 햇볕을 받는 측면도 있고, 비바람을 맞는 측면도 있다; 이 측면에 따라 >공간<의 분할이 정위되고, 이 공간 내부에서 다시 그 때마다 도구의 성격에 따라 >집기<가 정위된다. 예컨대, 교회와 무덤은 태양의 일출이나 일몰에 따라 설계되어 있으며, 생(生)과 사(死)의 방역으로부터 현존재 자신은 세계 안에서의 자기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관련하여 규정된다.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이 존재 자체가 문제인 현존재의 배려는, 이 두 방역을 선행적으로 발견하고, 이 두 방역에 의거해서 그 때마다 [자기의 존재에 관련되는] 하나의 결정적 적소[適所]를 갖는다. 두 방역의 선행적 발견은 적소 전체성을 통해 함께 규정되며, 이 적소 전체성을 근거로 해서 용재자가 만나는 것으로서 개현된다.(103-104, 151-152)


 


그때그때의 방역의 선행적 용재성은, 용재자의 존재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눈에 띄지 않는 친숙성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방역의 선행적 용재성은, 용재자를 배시적으로 발견할 때 눈에 띈다는 방식으로만, 더욱이 배려의 결여적 양상에 있어서, 스스로 보여질 뿐이다. 어떤 것을 있어야 할 자기 자리에서 만나지 못할 때, 자리의 방역이 방역으로서 비로소 명시적으로 접근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배시적 세계-내-존재에서 도구 전체의 공간성으로서 발견되어 있는 공간은, 도구 전체의 장소로서 그 때마다 존재자 자체에 속한다. [흔히 말하는] 단순한 [순수] 공간은 아직은 은폐되어 있다. 공간은 자리들 속에 산재(散在)해 있다. 그러나 이 공간성은, 공간적 용재자의 세계적합적인 적소 전체성을 통해서 독자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환경세계 는 미리 주어진 공간내에서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세계에 특수한 세계성이, 배시적으로 지정된 자리들로 이루어진 그때그때의 전체성이라는 적재적 연관을, 그 세계성의 유의의성에 있어서 분절한다. 그때그때의 세계가, 그 세계에 속하는 공간의 공간성을 그 때마다 발견하는 것이다. 용재자를 그 환경세계적 공간내에서 만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한 까닭은, 존재적으로는 단지 현존재 자신이 세계-내-존재라는 점에서  공간적 이기 때문이다.(104, 152)


 


현존재는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와 배려적으로 친숙하게 교섭한다는 의미에서는 세계 >내<에 있다. 따라서 현존재에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성이 귀속된다면, 그것은 오직 이 내-존재를 근거로 해서 가능하다. 그런데 내-존재의 공간성은 거리 제거 방향 엶이라는 두 성격을 보이고 있다.(104-105, 153)


 


(2) 현존재의 공간성


현존재의 공간성이란 현존재의 공간적 구조 내지는 현존재의 공간적 성격을 의미한다. 이것은 앞으로 7장에서 논의하게될 시간성에서와 마찬가지이다. 거기에서 시간성이란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 내지는 시간적 성격을 의미한다. 다만 하이데거가 이러한 공간적 구조 혹은 시간적 구조를 공간성 혹은 시간성이라 명명한 까닭은, 이러한 구조에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자연 과학적 공간 내지 자연 과학적 시간이 파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존재의 공간성이나 시간성을 근원적 공간 혹은 근원적 시간, 또 실존론적 공간 혹은 실존론적 시간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현존재의 공간적 구조는 앞서의 논의에서 이미 암시되었다. 용재자의 공간성을 구성하는 계기가 가까움과 방향성이라면, 역으로 현존재의 공간성은 거리제거와 방향을 열음(방향 엶)이 된다.


 


① 거리제거


(한: 距離除去, 독: Entfernung, 영: Deseverance)


 


거리제거는 현존재의 공간적 구조(혹은 성격)이다. 현존재는 본질상 거리제거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는 세계 안에서의 실존을 위해 용재자를 적재 적소에 배치한다. 따라서 거리제거는 현존재의 실존범주이다. 단 여기서의 거리란 배시적 배려의 차원에서 평정(評定)된 거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거리는 순수한 기하학적 공간에서의 간격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순수한 기하학적 공간 내에서도 현존재는 가까움을 지향하는 본질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실존범주로서의 거리제거로부터 순수한 기하학적 공간 안에서의 간격의 제거도 파생된다. 여하튼 하이데거는 라디오를 예로 든다. 하지만 만약 오늘날 하이데거가 생존하였다면 사이버 스페이스를 예로 제시할 것이다. 이제는 간격을 제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공간을 마음대로 조율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거리제거에서 의미되는 거리의 개념을 좀 더 알아보자. 여기서의 거리란 앞서 말했듯 배시적 차원에서의 거리에 해당한다. 이런 거리 개념은 순수 기하학적 차원에서 보면 다소간 부정확하고 불안정하다. 그러나 이런 거리 개념을 갖고 실존하는 것이 현존재의 일상적 모습이다. 우리는 흔히 ‘거기까지는 담배 한 대거리이다.’라고 말한다. 담배 한 대를 피면 갈 수 있는 거리라는 뜻이다. 이런 말속에 순수 기하학적 거리 개념이 없음은 물론이다. 또 ‘대개 반시간 정도 걸려’라는 말에서 언급된 거리 개념도, 정확히 말하자면, 배시적 배려차원에서 평정(評定)된 거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배려적으로 가까운 거리와 순수 기하학적으로 가까운 거리는 구별된다. 마치 재미없는 영화를 볼 때에는 두 시간이 마냥 지루하게 느껴지고 재미난 영화를 볼 때에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듯, 마지못해 가는 ‘객관적으로’ 매우 짧은 길도 배려적으로는 매우 ‘힘든 길’로 여겨질 수 있고 혹은 반대로 ‘객관적으로’ 매우 먼길도 즐거운 마음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면 배려적으로는 매우 짧은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몇 가지의 예를 더 들어보자. 코 위에 얹혀 있는 안경과 반대 편 벽에 걸린 그림을 비교해 보자. 순수 기하학적 거리 개념을 적용하자면, 눈 위에 얹혀 있는 안경이 후자의 그림보다는 훨씬 객관적으로 짧은 거리 안에 있다. 하지만 우리의 배려가 후자의 그림에 머문다면 눈위의 안경은 보이지도 않게 된다. 배려적으로는 안경보다 그림이 훨씬 가까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위를 걷고 있는 도로와 저 스무 발작 거리를 두고 있는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배려가 그 친구에게 머무는 한, 그 친구가 우리가 그 위에 있는 도로보다 배려적으로는 더 가까운 것이다. 이런 것이 실존론적 거리 개념이다. 실존론적 거리 개념에서는 배려가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가까움과 멂이 결정된다.


세계 안에서 만나는 용재자를 배려하는 가운데 현존재의 실존은 실현된다. 따라서 현존재는 용재자가 자신의 배려로부터 멀리 있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현존재는 용재자가 자신의 배려로부터 멀리 있음을 가로지르기는커녕, 오히려 철저히 실존론적 거리를 제거한다. 즉 현존재는 자신의 실존을 위해 배려에 방해가 되는 모든 거리를 없애고자 한다. 그렇기에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거리제거요, 다시 말하면 이런 의미에서 공간적 존재자가 된다.


 


[읽기자료]


거리 제거란 어떤 것의 [멀음을, 다시 말해], 원격성을 소멸시키는 것, 즉 가까이 함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거리 제거적이니, 현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로서 [자기 이외의] 존재자를 그 때마다 가까이에서 만나게 한다. 거리 제거가 원격성을 발견한다. 원격성은 간격과 마찬가지로,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에 대한 범주적 규정이다. 이에 반해, 거리 제거는 실존범주로서 확보되어야 한다.(105, 153-154)


 


거리 제거는 우선 대개 배시적으로 ‘가까이 함’, 즉 조달하고, 준비하고, 손 가까이 두는 것으로서 ‘가까이에 가져옴’이다. 그러나 존재자를 순수하게 인식하면서 발견하는 특정한 양식들 역시 가까이함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현존재 속에는 가까움을 지향하는 본질적 경향이 있다. 우리가 오늘날 많든 적든 불가피하게 참여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속도의 상승은 원격성의 극복으로 치닫고 있다. 예컨대, 현존재는 오늘날 >라디오<를 가지고, 그 현존재적 의미를 미처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일상적 환경세계를 확대하[고 파괴하]는 방법으로 >세계<의 거리를 제거하고 있다.(105, 154)


 


거리를 제거한다고 해서 반드시 용재자의 멀음을 현존재와 연관해서 명시적으로 평정(評定)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원격성은 결코 간격으로서 파악되지 않는다. 멀음이 평정되려면, 그것은 일상적 현존재가 자기를 유지하고 있는 원격화와 상관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평정은, 계산이라는 면에서 보면 부정확하고 불안정하겠지만, 현존재의 일상성에서는 특유하고 어디까지나 이해 가능한 규정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거기까지는 산책 거리다, 한 달음 거리다, >담배 한 대 거리다<라고 말한다. 이 척도가 표현하는 바는, 그 척도가 >측정<을 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평정된 원격성은 사람들이 거기를 향해 배려하면서 배시적으로 다가가는 존재자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고한 척도에 의존해서 >집까지는 반시간 걸린다<라고 말할 때도, 이 척도는 평정된 척도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반시간은 30분이 아니라 하나의 지속이다. 이 지속은 일반적으로 양적 연장이라는 의미에서의 >길이<를 갖는 것이 아니다. 이 지속은 그 때마다 익숙해진 일상적 배려에 근거해서 해석된다. 원격성은 우선 배시적으로 평정되는 것이고, 그것은 >관청에서< 계산한 척도를 숙지하고 있는 경우에도 그렇다. (…)거리 제거된 것[거리가 좁혀진 것]은 그런 평정 안에 용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특수한 세계 내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 >객관적으로< 긴 길도 >객관적으로< 매우 짧은 길보다 더 짧을 수 있는데, 이 때 >객관적으로< 매우 짧은 길은 아마 >힘든 길< 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한히 길게 여겨지는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겨짐< 속에서 그때그때의 세계가 비로소 본래적으로 용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전재적 사물의 객관적 간격은, 세계 내부적 용재자의 원격성이나 가까움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거리가 정확하게 알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런 지식은 맹목적 지식일 뿐이고, 환경세계를 배시적으로 발견하면서 가까이한다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105-106, 154-156)


 


측정된 간격으로서의 원격성에 일차적으로 또 전적으로 정위하게 되면, 내-존재의 근원적 공간성은 은폐되고 만다.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라 해서, 우리로부터의 간격이 가장 짧은 것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것 은 손과 발과 눈이 미치는 평균적 범위 안에서 떨어져 있는 것 가운데 있다. 현존재는 거리 제거라는 방식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공간적이기 때문에, 교섭은 언제나 어떤 활동범위 안에서 그 때마다 현존재에 의해 거리 제거된 환경세계 내에서 행해지며, 따라서 우리는 거리상으로는 우선 가장 가까운 것 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넘기는 수가 흔히 있다. (…) 예컨대, 거리상으로는 현존재에게 너무 가깝게  코 위에 얹혀 있는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사용 도구는 환경세계적으로는 반대편 벽에 걸린 그림보다 더 먼 것이다. 이 도구는 가까이 있기는커녕, 우선 결코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시각 도구나, 예컨대 전화의 수화기 등 청각 도구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선 용재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컨대 보행 도구인 길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걷고 있을 때 길은 발걸음과 접촉하고 있으며, 외견상으로는 일반적으로 용재자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 가장 실재적인 것처럼 여겨져서, 말하자면 길은 특정한 신체의 부위인 발바닥을 따라 이동한다. 그러나 그 길은, 그렇게 걸어갈 때, 길 위에서  스무 발작 거리를 두고 만나는 친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 환경세계적으로 우선적인 용재자의 가까움과 멂을 결정하는 것은 배시적 배려이다. 이 배시적 배려가 처음부터 머물고 있는 그 곳, 그것이 가장 가까운 것이며, 그것이 거리 제거를 규제하고 있다.(106-107, 156-157)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본질적으로 거리 제거 가운데 자신을 유지하고 있다. 이 거리 제거, 즉 현존재 자신으로부터의 용재자의 멂을 현존재는 결코 가로질러 갈 수 없다. (…) 현존재는 자신의 거리 제거를 결코 가로질러 가지 못하기는커녕, 도리어 거리 제거를 받아들여 왔으며 또 부단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거리 제거요, 다시 말하면 공간적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그가 행하는 거리 제거의 그때그때의 영역내에서 이리저리 맴돌 수는 없고, 단지 거리 제거를 언제나 바꿀 수 있을 뿐이다. 현존재는 배시적 공간발견이라는 방식에서 공간적이며, 그래서 현존재는 그렇게 공간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대해 언제나 원격화하면서[거리 제거하면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108, 158)


 


② 방향 엶


(독: Ausrichtung, 영: Directionality)


 


현존재의 또 하나의 공간적 구조는 방향을 연다는 구조(혹은 성격)이다. 용재자를 배시적 배려의 차원에서 거리를 제거하여 가까이 한다는 것은, 그에 앞서 이미 용재자를 어떤 방역에로 방향을 열어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작업장에 비품 하나를 배치할 때에도 우리는 작업장 전체의 방역을 예견하면서 그 안에서 그 비품이 놓일 방향을 결정하여 열고 있다. 이처럼 방향을 여는 것에도, 거리 제거에서처럼, 배시적 배려가 선행한다.


그런데 방향을 연다는 것의 의미는 이런 정도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령 앞서의 예에서처럼 동서남북의 방위를 정하는 것도 방향을 여는 것이며, 또한 좌우의 방향을 고정시키는 것도 방향을 여는 것이다.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 구조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동서남북이나 혹은 좌우의 구별도 없을 것이다. 또한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구조에 의해 좌우의 방향이 고정되었기에 오른손 장갑과 왼손 장갑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읽기자료]


현존재는 거리 제거하는 내-존재로서 동시에 방향을 연다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가까이함은 그에 앞서 이미 어떤 방역을 향해 방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 방역으로부터 거리 제거당한 것이 가까이 오는 것이고, 그 결과, 거리 제거당한 것은 그 자리와 관련해서 눈에 띄게 된다. 배시적 배려는 뱡향을 열면서 거리 제거한다. 이러한 배려에서, 즉 현존재 자신의 세계-내-존재에서 >기호<의 필요성이 먼저 생긴다; 이 도구[기호]는 명시적이고 손쉬운 방향 지시를 담당하고 있다. 기호는 배시적으로 사용되는 방역, 즉 거기에 귀속하고, 거기로 나아가고, 거기로 가져가고, 거기에서 가져오는 그때그때의 ‘거기로’[방역]를 명시적으로 열어준다. 현존재가 존재 때, 그 현존재는 방향을 열면서 거리 제거하는 자로서, 그 때마다 이미 발견된 자기의 방역을 가지고 있다. 방향 엶은 거리 제거와 마찬가지로 세계-내-존재의 존재양상으로서 배려의 배시에 의해 선행적으로 인도되고 있다.(108, 158-159)


 


이러한 방향 엶으로부터 좌우의 고정된 방향이 생긴다. 현존재는 자신의 거리 제거와 마찬가지로 [좌우의] 방향도 늘 동반하고 있다. 현존재의 >신체성<은 여기에서는 다룰 수 없는 독자적 문제성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 >신체성<에 있어서의 현존재의 공간화는 이 두 방향[좌우]에 따라 현저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용재자나 신체를 위해 사용되는 것, 예컨대 장갑은 양손의 운동과 함께 움직이도록 지어져야 하므로, 오른쪽 왼쪽에 맞게 방향지워져 있어야 한다. 이에 반해, 손에 잡히고 손으로 움직여지는 손 도구[망치]는 [오른쪽 왼쪽] 손에 특수한 손 운동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망치가 손으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왼손 망치니 오른손 망치니 하는 것은 있지 않다.(108-109, 159)


 


거리 제거와 방향 엶은, 내-존재의 구성적 성격으로서, 발견된 세계 내부적 공간 안에 배려적-배시적으로 있어야 하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규정한다.(110, 160-161)


 


(3) 공간명도


(한: 空間明渡, 독: Raum-geben, 영: Giving space)


 


현존재의 공간성과 용재자의 공간성의 관계는 이미 설명되었다. 현존재의 공간성이 용재자의 공간성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는 이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순수 기하학적 공간의 가능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 보고자 한다.


현존재의 배시적인 자기 지시가 목적과 수단의 계열에서 수단을 하나 하나 유의의화함으로써 세계가 성립한다. 세계의 세계성은 유의의성이다. 이 유의의성을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적소 전체성이다. 적소 전체성과 등근원적 관계에 있는 것이 방역이다. 적소토록 한다는 것은 거리를 제거하며 방향을 열어 용재자를 방역에 적소케 함을 의미한다. 이 때 거리를 제거하며 방향을 연다는 것이 현존재의 공간적 구조 즉 공간성이다. 현존재의 공간성에 의해 용재자의 공간성이 가능하게 된다. 즉 현존재의 공간성에 의해 용재자의 공간 귀속성이 성립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일컬어 공간명도(空間明渡)라 명명한다. 공간명도란 곧 공간허용이다. 이처럼 현존재의 공간적 구조에 의해 용재자의 공간성이 가능하게 되므로, 현존재는 그때마다 세계를 배시적으로 배려하면서 용재자의 공간성 안에 다른 용재자를 갈아넣고 혹은 비우기도 하고, 혹은 챙겨 넣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공간이란 개념을 일단 배제하고 공간성이란 개념을 사용한 까닭은 통상 우리가 공간이라 부르는 순수 기하학적 공간이 가깝게는 용재자의 공간성으로부터 또 근원적으로는 현존재의 공간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작업장에서 용재자의 공간성은 은폐되어 있다. 용재자의 공간성이 드러나는 것은 배시가 결여적 양상을 보일 때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이제는 우리의 시선이 배시로부터 해방되어 관조적 태도를 가졌을 때 우리는 순수한 공간을 발견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세계의 탈세계화라고 명명한다. 세계가 탈세계화되었을 때 환경세계적 방역들은 중성화된다. 즉 용재적 도구들의 자리 전체성은 그 도구적 성격을 말끔히 지워 버리고, 다시 말해 그 적소성을 상실하고, 순수한 위치의 다양성으로 변양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순수한 공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순수한 기하학적 공간이 세계 혹은 세계-내-존재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탈세계화는 세계-내-존재를 전제한다. 세계의 탈세계화란 세계의 존재의 한 극단을 가리킨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공간성으로부터 용재자의 공간성이 파생된다면, 또 마찬가지로 용재자의 공간성이 존재이해의 변양을 거쳤을 때 순수 기하학적 공간이 파생된다. 그러니까 근원적으로 보자면, 공간이 주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세계가 공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내-존재가 근원적으로는 공간을 개시한다. 공간은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공간성은 근원적으로 공간의 가능 근거이므로, 근원적 공간이라 불리워도 무방하리라.


 


[읽기자료]


현존재가 거리 제거와 방향 엶의 방식으로 공간적이기 때문에, 환경세계의 용재자는 현존재의 공간성에서 만날 수 있다. 적소 전체성을 개현하는 것은, 등근원적으로 거리 제거하면서-방향을 열어 [존재자로 하여금] 한 방역에 적소케 하는 것, 다시 말하면 용재자의 공간적 귀속성을 개현하는 것이다. 배려하는 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친숙해 있는 유의의성 속에는, 공간도 본질상 함께 개시되어 있다는 것이 들어 있다.(110, 161)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만나게 하는 것은 세계-내-존재에 대해 구성적이지만, 그렇게 만나게 하는 것은 일종의 >공간명도<(空間明渡)이다. 우리가 공간허용이라고도 부르는 이 >공간명도<는, 용재자를 그 공간성을 향해 개현하는 것이다. 이 공간허용은, 적소성이 결정된 가능한 장소 전체성를 발견하면서 미리 주는 것으로서, 그때그때의 [현존재의] 현사실적 정위를 가능케 한다. 현존재가 세계를 배시적으로 배려하면서, 무엇을 갈아넣고, 비우고, >챙겨 넣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존재의 세계-내-존재에-실존범주로서 이해된-공간허용이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선행적으로 발견된 방역도, 일반적으로 그때그때의 공간성도 분명하게 시야 속에 들어와 있지 않다. 이 공간성은, 용재자를 배려함에 있어 [우리의] 배시가 몰두하는 그 용재자가 ‘눈에 띄지 않는’ 경우에, 그 배시에 대해 그 자체로 현전한다. 공간은 세계-내-존재와 함께 우선 이 공간성에서 발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발견되는 공간성을 지반으로 해서 공간 자체가 인식작용에 접근 가능해진다.(111, 162)


 


공간이 주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공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현존재를 구성하는 세계-내-존재가 공간을 개시한 이상, 공간은 오히려 세계  안 에 있다. 공간이 주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주관이 세계를 마치 공간 안에 있는 듯이 관찰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론적으로 충분히 이해된 주관, 즉 현존재가 근원적 의미에서 공간적이다. 그리고 현존재가 전술한 방식으로 공간적이기 때문에, 그 공간은 아프리오리로서 드러난다. 이 명칭[아프리오리]은, 우선은 아직 ‘무세계적 주관’에 공간이 선행적으로 귀속되어 있어서 그 주관이 공간을 자기 밖으로 내던지는 그런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의] 아프리오리티는, 용재자를 그때그때의 환경세계에서 만날 때, (방역으로서의) 공간과의 만남이 선행함을 의미한다.(111, 163)


 


배시적으로 우선 가까이 만나는 것의 공간성은 배시 자신에 대해 주제적으로 되고, 예컨대 집을 짓거나 땅을 잴 때, 계산과 측정의 과제가 될 수 있다. 환경세계의 공간성을 주로 배시적으로 주제화하면, 이와 함께 공간은 그 자신에 있어서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시야 속에 들어오게 된다. 순수한 관조는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공간을 추적해 갈 수 있으나, 그 때는 전에 공간에 접근하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던 배시적 계산[눈짐작]은 포기된다. 공간의 형식적 직관 이 공간적 관계들의 순수한 가능성들을 발견한다. 이 때, 순수한 동질적 공간을 전개하면, 공간형태의 순수한 형태학에서부터 위치해석(位置解析)에 이르고, 마침내 순수한 계량적 공간학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단계 계열이 성립한다.(111-112, 163)


 


배시로부터 해방되어 관조적으로만 공간을 발견하면, 환경세계적 방역들이 중성화되어 순수한 차원으로 된다. 도구가 차지하는 자리들, 즉 배시적으로 정위했던 용재적 도구의 자리 전체성은, 한꺼번에 무너져서 임의의 사물을 위한 위치의 다양성으로 바뀐다. 이와 함께 세계 내부적 용재자의 공간성은 그 적소성의 성격을 상실한다. 세계는 그 특수한 주변성을 상실하고, 환경세계는 자연세계로 된다. 용재적 도구 전체로서의 세계는 공간화되어, 단지 연장된 전재적[前在的] 사물들의 연관으로 변한다. 이 동질적 자연공간은, [우리와] 만나는 존재자의 한 발견양식, 즉 용재자의 세계 적합성을 특수하게 탈세계화한다는 성격을 가진 발견양식을 통해서만 드러난다.(112, 163-164)


 


3. 세인


(한: 世人, 독: das Man, 영: They)


 


이 장의 주제는 세계-내-존재의 두 번째 구조계기와 관련된다. 세계-내-존재로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이 장의 주제가 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일상적 현존재를 주목한다. 일상적 현존재야말로 우리가 세계 안에서 우선 대개 만나는 인간의 모습이니까.


통상적으로 우리는 세계-내-존재로서 있는 그 ‘누구’는 ‘나’라고 답변한다. 현존재는 그때마다 ‘나’의 존재이므로, 이 답변은 그야말로 거침없이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에는 두 가지의 본질적인 문제점이 있다.


첫째, 그 ‘누구’를 ‘나’라고 답변할 때 우리는 은연중에 형이상학적 실체 개념을 전제한다. 전통적 형이상학은 ‘나’를 태도나 체험의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비록 의식의 사물성, 인격의 대상성, 혹은 영혼의 실체를 부인하더라도, 으레 우리는 ‘나’를 항상 자기 동일적인 ‘자기’로서 해석한다. 이러한 의미의 자기가 주관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의 존재를 이해하면 결국 현존재는 전재자(前在者)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현존재는 결코 전재자일 수 없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세계 안에서 부단히 자신의 실존을 추구해 나가는 존재 가능으로서의 존재자이다. 따라서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존재양식인 전재성을 가지고 ‘나’의 존재를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 세계-내-존재로 있는 그 ‘누구’를 ‘나’라고 답변할 때 우리는 ‘나’의 존재와 타자의 존재를 구별한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존재자적 차원에서의 답변에 불과하다. 물론 현존재가 그때마다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는 각자성(各自性)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일 뿐, 일상성을 살아가는 ‘내’가 과연 그 진정한 의미에서 ‘나’로 존재하는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어쩌면 자기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일상적 현존재의 실상이 아닐런지?


 


[읽기자료]


현존재는 그 때마다 나 자신인 존재자이며, 그 존재는 그 때마다 나의 존재이다. 이 규정은 한 존재론적 틀고시하지만 또한 그것뿐이다. 동시에 이 규정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이 존재자는 그 때마다 나이지 타자가 아니라는 - 비록 조잡하기는 하지만 - 존재[자]적 고시이다. ‘누구인가’는 나 자신, >주관<, >자기<에 근거해서 대답된다. 그 ‘누구’는 태도나 체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으로서 자기를 유지하면서 [태도나 체험의] 다양성과 관계 맺고 있는 자이다. 우리는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어떤 완결된 영역내에서, 또 이 영역에 대해, 그 때마다 이미 부단히 있는 전재자[前在者], 즉 탁월한 의미에서 ‘근저에 놓여 있는 것’, Sub-jectum[기체, 실체]으로서 이해한다. 기체는 다양하게 달라지는 속에서도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자기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의식의 사물성이나 인격의 대상성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실체는 거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존재론적으로는 여전히 그 존재가 명시적이든 아니든 전재성[前在性]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 어떤 것을 단초로 삼고 있다. 실체성은 존재자, 즉 거기로부터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대답이 풀려나오는 존재자를 규정하기 위한 실마리이다. 현존재는 무언중에 처음부터 전재자로서 이해되고 있다.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현존재의 존재의 무규정성은 언제나 이런 [전재성이라는] 존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전재성은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존재양식이다.(114-115, 168-169)


 


‘나는 그 때마다 현존재인 그것이다’라는 진술이 존재[자]적으로 자명하다고 해서, 그 진술이, 그렇게  주어진 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길을 오해없이 예비 소묘한다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뿐더러 위에서 말한 진술의 존재[자]적 내실이 과연 일상적 현존재의 현상적 실상을 적합하게 재현(再現)하고 있는지 어떤지 의심스럽다. 일상적 현존재의 그 ‘누구’는 바로 그 때마다 나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115, 169)


 


사람들은 언제나 이 존재자[현존재]에 관해, ‘그것은 자아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존재[자]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존재론적 분석론은, 그런 진술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그 진술을 원칙적으로 유보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자아는, 그때그때의 현상적 존재연관 속에서는 그 반대로서 밝혀질 수도 있는 어떤 것을, 구속력 없이 형식적으로 지시한다는 의미로 이해되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그 때 비-자아는, 본질적으로 자아성을 갖지 않은 존재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아 자신의 특정한 존재양식, 예컨대 ‘자기 상실성’을 가리킨다.(116, 170)


 


1) 타자


(한: 他者, 독: das Andere, 영: Others)


 


타자는 인간의 영원한 숙제이다. 인간은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나의 타자가 된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므로, 무세계적 주관도 있을 수 없지만, 타자 없는 고립된 자아도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현존재에게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 설정이 문제시된다. 그러나 일상적 자기로서 살아가는 현존재와 타자 사이에는 정말 이처럼 건널 수 없는 가교가 놓여 있는가?


우리가 타자와 만나는 일상적 방식은, 앞서 세계의 세계성 분석에서 논의하였듯, 가장 비근하게는 용재자(用在者)를 통해서이다. 제품은 불특정의 타자를 겨냥한다. 기성복도 그렇고, 우리 주변의 언론 매체도 그렇다. 또한 우리는 제품의 재료를 통해서도 타자를 만나게 된다. 재료의 생산자와 공급자도 서로간 타자이다. 하다 못해 들길을 걸을 때에도 그 들길은 누군가의 소유물이다. 그런데 이처럼 용재자를 통해서 만나는 타자가 전재자(前在者)도 아니고 용재자도 아님은 물론이다. 그들도 나와 같은 현존재이다. 그들도 나처럼 현존재하며 세계-내-존재로서 용재자를 배시적으로 배려하며 실존한다. 또한 이러한 불특정의 타자 가운데 나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기성복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도 타자가 된다. 그렇다면 타자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다. 세계 속에서 나도 타자로 존재한다. 타자란 세계 안에서 서로 구별되지 않고 뒤 섞여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이름이 된다. 그렇기에 현존재의 세계가 공동 세계라면, 타자로서의 우리는 공동 현존재(Mitdasein)가 된다.


 


[읽기자료]


세계-내-존재의 해명을 통해 드러난 바에 따르면, 세계 없는 단순한 주관이란 우선 >존재<하지도 않고, 결코 주어져 있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결국 타자 없이 고립된 자아도 우선 주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타자들<이 그 때마다 이미 세계-내-존재에서 함께 현존재한다[공동 현존재]면, 이것을 현상적으로 확인하는 일이, 그렇게 >주어진 것<의 존재론적 구조가 자명해서 어떤 탐구도 필요하지 않다고 간주하는 길로 잘못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제 과제는, 이 공동 현존재의 양식을 가장 비근한 일상성에서 현상적으로 밝히고, 존재론적으로 적합하게 해석하는 일이다.(116, 171)


 


가장 가까운 환경세계, 예컨대 수공업자의 작업세계를 >기술<했을 때, 작업 중에 있는 도구와 함께 제품을 [사용물로서] 규정하고 있는 타자들도 함께 만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용재자[用在者]의 존재양식, 즉 용재자의 적소성[適所性]에는, 그 용재자[제품]가 그의 몸에 맞게 재단되어야 할 가능한 착용자에 대한 본질적 지시가 숨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용되는 재료를 보면, 재료의 생산자와 >공급자<를, >봉사<를 잘하는 자 또는 잘못하는 자로서 만나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교외<에 나가 들밭을 따라 걷게 되면, 그 들밭은 잘 손질된 누구의 밭으로서 드러난다. 이용되고 있는 책은 누군가에게서 산 것, 누구로부터 기증받은 것 등등이다. 강가에 정박해 있는 보트는 자체적으로 있으면서도, 그것을 타고 저어가려는 어떤 지인(知人)을 지시하고 있으며, >낯선 보트<라 하더라도 역시 타인을 지시하고 있다. 이렇게 환경세계의 용재적 도구연관에서 만나는 타자는, 우선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는 사물에 덧붙여서 생각된 것이 아니다. (…) 이 존재자는, 도구나 사물 일반과 구별될 뿐더러, 그 존재양식상 그 자신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현존재로서 세계>내< 에 있으며, 그 세계내에서 동시에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만나는 것이다. 이 존재자는 전재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용재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며, 개현하는 현존재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존재한다??그것은 [현존재와] 함께 [또한] 현 존재한다.(117-118, 172-173)


 


타자와의 만남을 위와 같이 성격지으면, 그것은 결국 다시 그 때마다 자기의 현존재에 정향하게 된다. (…) [그러나] >타자<란 그들로부터 ‘자아’가 부각되는, 나 이외의 나머지 사람 전부라는 뜻이 아니다. 타자들은, 사람들이 대개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지 않고 그들 속에 섞여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 그들과 ‘함께 또한 현 존재한다’[공동 현존재]는 것은, 세계 내부에 >함께<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다는 존재론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다. >함께<는 현존재적인 것이고, >또한<은 배시적으로 배려하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존재가 같음을 의미한다. >함께<와 >또한<은 실존론적으로 이해되어야지 범주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공동의 세계-내-존재를 근거로 해서, 세계는 그 때마다 이미 언제나 내가 타자들과 함께 나누는 그런 세계이다.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 세계이다. 내-존재는 타자와의 공동 존재이다. 타자의 세계 내부적 자체 존재는 공동 현존재이다.(118, 173-174)


 


2) 공동 존재


(한: 公同存在, 독: Mitsein, 영: Being-with)


 


(1)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으로서의 공동 존재


공동 현존재의 가능 근거는 공동 존재이다. 현존재는 본질상 공동 존재이다. 공동 존재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이다. 현존재가 더불어 삶으로써 비로소 공동 존재가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가 이미 공동 존재이기에 더불어 삶도 가능하다. ‘홀로 있음’을 예로 들어보자.


현존재가 홀로 있음도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 보자면 현존재가 이미 공동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 현존재가 공동 존재가 아니라면 타자가 없음을 자각할 리 만무하다. 그러기에 홀로 있음은 공동 존재의 결여적 양상으로서 오히려 현존재가 공동 존재임을 입증한다. 또한 이 홀로 있음은 나의 주변에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서 제거되지도 않는다. 기차 여행을 할 때 내 주변에 다수의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들을 무관심과 낯설음의 양상으로만 대하는 한, 홀로 있음은 제거되지 않는다. 만약 다수의 사람들로 인해 홀로 있음이 제거된다면 공동 존재는 한낱 집합적 의미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 안에서도 내가 홀로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현존재가 공동 존재임을 반증한다.


무인도에 표류했던 로빈슨 크루소우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로빈슨 크루소우의 단독적 삶은 단순히 그가 종교, 수학, 혹은 도구의 사용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요인은 단지 현상적 요인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의 단독적 삶은 그가 이미 공동 존재였기에 가능했다. 그는 자신이 살던 공동 세계를 무인도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공동 존재에 대한 논의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항이 감정이입이다. 감정 이입은 나의 주관과 다른 은폐되어 있는 주관 사이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감정이입도 궁극적으로는 현존재가 이미 공동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감정이입은 공동 존재가 결여된 양상을 보일 때 요청된다.


 


[읽기자료]


타자의 이 공동 현존재가 현존재에게 또 공동 현존재자에게 세계 내부적으로 개시되는 것은,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그 자체로 공동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본질상 공동 존재이다’라는 현상학적 진술은 실존론적-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이 진술은, ‘나는 현사실적으로 홀로 전재적으로 있지 않고 오히려 나와 같은 양식을 가진 타자들도 [많이] 출현한다’는 것을 존재[자]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의 세계-내-존재가 본질상 공동 존재에 의해 구성된다’는 명제가 위에서 말한 것을 의미한다면, 공동 존재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에 입각해서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현존재에 귀속하는 어떤 실존론적 규정성이 아니라, 타자의 출현을 근거로 해서 그때그때 생기는 하나의 성질에 불과할 것이다. 공동 존재는 타자가 현사실적으로 전재[前在]하지 않고 지각되지 않을 때에도 현존재를 실존론적으로 규정한다. 현존재의 단독존재[홀로 있음]도 세계 안에서의 공동 존재이다. 타자가 없다 것도 공동 존재 안에서만 공동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단독존재는 공동 존재의 한 결여적 양상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공동 존재를 증명하는 셈이다.(120, 176)


 


반면, 한 범례적 제2의 인간이나 열 명의 그런 사람들이 내 곁에 나타난다고 해서 현사실적인 단독존재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전재[前在]한다고 해도 현존재는 단독적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공동 존재 및 상호 존재의 현사실성은 다수 주관이 함께 출현한다는 데 근거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속에서 홀로 있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의 존재에 관해, 그들이 단지 전재적으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 있을 때도 그들은 함께 현 존재한다[공동 현존재이다]; 그들의 공동 현존재는 무관심과 낮설음이라는 양상에서 만난다. 결석과 >부재(不在)<는 공동 현존재의 양상이고, 그것이 가능한 것도 현존재가 공동 현존재로서 다른 사람들의 현존재를 자기의 세계 안에서 만나게 하기 때문이다. 공동 존재는 그 때마다 자기의 독자적 현존재의 규정성이다; 공동 현존재는, 타자의 현존재가 공동 존재의 세계를 통해 그 공동 존재에게 개현되는 한, 타자의 현존재의 성격을 규정한다. 자기의 독자적 현존재는, 그가 공동 존재의 본질구조를 갖고 있는 한에서만, 타자를 만나고 있는 자로서 공동 현존재인 것이다.(120-121, 176-177)


 


그다지 달갑지 않게 감정이입이라고 불리어지는 이 현상은, 우선 단독적으로 주어진 나의 주관에서 우선 일반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다른 주관을 향해,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처음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124, 181-182)


 


타자를 대하는 존재는 독자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존재관계일 뿐 아니라, 이 존재관계는 공동 존재로서 이미 현존재의 존재와 함께 있다. 과연 공동 존재를 근거로 해서 생생하게 서로 안다[상호 면식]는 것은, 자기의 현존재가 그때그때 자기 자신을 얼마만큼 이해했느냐 하는 데에 종종 의존한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 그러나 이것은, 현존재가 타자와의 본질적 공동 존재를 얼마만큼 꿰뚫어 보고 위장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고, 그것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그 때마다 이미 타자들과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감정이입이 공동 존재를 비로소 구성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감정이입은 공동 존재를 근거로 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니, 감정이입이 불가피하게 되는 동기는 공동 존재의 결여된 양상이 우세하다는 데 있다.(125, 182-183)


 


(2) 고려


(한: 顧慮, 독: Fürsorge, 영: Solicitude)


 


우리의 논의를 앞질러 말하자면 현존재의 존재는 마음씀(Sorge)이다.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배려(Besorge)는 마음씀이 세계내부적 용재자와 관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공동 존재에서 우리가 만나는 존재자는 용재자가 아니라 공동 현존재자로서의 타자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마음씀이 배려일 수는 없다. 우리는 타자를, 마치 용재자를 대하듯, 조작하고 이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를 돌보아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 현존재의 마음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마음씀을 고려라고 명명한다.


협력이 고려의 긍정적 양상이라면, 반목, 무시, 그냥 지나침, 서로 모르는 체함 따위는 고려의 결여적 양상이라 할만하다. 이 모두가 고려의 가능한 방식들이다. 그런데 적극적 양상에서 볼 때, 고려는 두 가지의 극단적 가능성을 갖는다. 하나는 타자로부터 세상살이 방식을 빼앗아 그를 대신하고 그를 위해 진력함으로써 그를 의존자나 피지배자로 만들어 버리는 고려이며, 다른 하나는 타자가 실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모범을 보임으로써 타자의 본래적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고려이다. 전자의 고려가 과잉 보호를 통해 오히려 타자의 실존을 박탈한다면, 후자의 고려는 타자가 본래적으로 실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려이다. 특히 후자의 고려는, 앞으로 우리가 6장에서 논의할 선구적 결의성과 관련하여 앞질러 논의하자면,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양심을 회복한 본래적 현존재가 타자와 관계 맺는 양상으로서, 현존재 사이의 본래적 상호주관성을 확보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일상적 현존재는 대개는 적극적 고려의 이 두 극단적 가능성 사이에 머물러 있다. 이런 것이 일상성 안에서 맺어지는 상호주관성의 양상이다.


고려는 공동 현존재자들 사이의 관계 맺음의 방식이다. 그런데 마치 배려에 배려를 이끄는 고유한 시(視)가 있듯이, 고려에도 고려를 이끄는 고유한 시(視)가 있다. 배려의 시(視)가 배시(配視, Umsicht)라면, 고려의 시(視)는 ‘돌보아 주는 시’(Rücksicht)와 ‘보살피는 시’(Nachsicht)가 된다. 또한 이런 시(視)의 결여적 혹은 무차별적 양상은 ‘돌보지 않음’(Rücksichtslosigkeit)과 수수방관(Nachsehen)이 된다.


이제 우리는 세계-내-존재로서 실존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해명하는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이렇다. 1) 일상적 현존재는 세계 안에서 만나는 용재자를 배려하면서 거기에 몰두한다. 2) 일상적 현존재는 용재자를 통해 만나는 타자와 공동 현존재한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타자인 것이 아니라 나도 타자로서 존재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모두 타자로서 존재하는 공동 현존재자이다. 3) 공동 현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은 공동 존재이다. 공동 존재 안에서 타자들 사이의 관계 맺음의 방식이 고려이다. 공동 현존재는 고려를 통해 타자들과의 공동 존재에 몰두한다. 따라서 일상적 현존재는 단독화된 자기를 확보하지 못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오히려 자기를 상실한 채 실존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상적 현존재는 ‘누구’일까?


 


[읽기자료]


공동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를 실존론적으로 구성한다면, 이 공동 현존재도 세계 내부적 용재자에 대한 배시적 교섭??그 특성을 우리는 앞에서 배려라고 지적한 바 있다??과 마찬가지로, 마음씀이라는 현상에서부터 해석되어야 하는데, 이 마음씀으로서 규정되는 것은 현존재 일반의 존재이다(제1편 제6장 참조). 공동 존재라는 존재양식이 비록 배려와 마찬가지로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대한 존재라 하더라도, 배려의 존재성격은 공동 존재에 특유한 것은 아니다. 현존재가 공동 존재로서 거기에 대해 태도를 취하는 그 존재자는, 그러나 용재적 도구라는 존재양식을 갖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 현존재이다. 이 존재자는 배려되는 게 아니라 고려되는 것이다.(121, 177)


 


음식과 입성을 >배려<하는 것도 환자를 간호하는 것도 고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표현을, 배려의 용어법과 일치시켜서 실존범주를 나타내는 술어로서 이해한다. 예컨대, [현존재의] 현사실적 사회제도로서의 >고려<는 그 기초를 공동 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 틀에 둔다. 그런 사회제도가 현사실적으로 긴요한 동기는 현존재가, 우선 대개는 고려를 갖지 않은 양상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다. 서로 협력하고, 반목하고,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고, 서로 모른 체하는 것은 다 고려의 가능한 방식들이다. 바로 이 마지막에 언급한 결여와 무관심의 양상은 일상의 평균적 상호 존재의 성격을 규정한다.(121, 178)


 


적극적 양상에서 보아, 고려는 두 개의 극단적 가능성을 갖는다. 고려는 말하자면 타자로부터 >배려<를 빼앗아서 그의 배려를 자기가 대신하고 그를 위해 진력한다. 이런 고려는 배려거리를 타자를 위해 인수한다. 이 때 타자는 자기 자리에서 밀려나고 물러섬으로써 배려되던 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으로서 뒤에 가서 받아들이거나 배려되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될 수 있다. 이런 고려에서는 타자는 의존자나 피지배자가 될 수 있다.설사 그 지배가 말없는 지배이고 피지배자에게는 은폐되어 있다 하더라도. [남을 위해] 진력하고 [남의] >마음씀<을 빼앗는 이 고려는 상호 존재를 광범하게 규정한다. 이런 고려는 대개 용재자[用在者]에 대한 배려와 진배없다.(122, 178)


 


이에 반해, 고려의 [또 하나의] 가능성은 타자를 위해 진력하기보다는 타자가 실존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타자에게 모범을 보이는 데서 성립한다. 이것은 타자를 위해 >마음씀<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마음씀 그 자체를 비로소 본래적으로 [그 타자에게] 돌려 주는 것이다. 이 고려가 본질상 본래적 마음씀??즉, 타자의 실존에 관계하지 타자가 배려하는 어떤 것에 관계하지 않는 고려이며, 이런 고려가 타자를 도와서 그가 배려 속에 있음을 꿰뚫어 보게 하고 이 배려에 대해 자유로워지게 한다.(122, 178-179)


 


일상적 상호 존재는 적극적 고려의 두 극단 - 진력하고 지배하는 고려와 모범을 보이고 해방하는 고려 - 사이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양한 혼합형식을 보이고 있으나, 그 혼합형식을 기술하고 분류하는 것은 이 연구의 한계 밖의 일이다.(122, 179)


 


용재자를 발견하는 방식으로서의 배려에 배시가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이끄는 것은 돌보아주는 것 보살피는 것이다. 이 양자는 고려와 함께 각각에 상응하는 결여적 또는 무차별적 양상을 거쳐 마침내, [한편으로는] 돌보지 않음에, [다른 또 한편으로는] 무관심을 유도하는 수수방관에 이른다.(123, 179)


 


지금 수행한 분석에 따르면,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의 존재 자체가 문제인 현존재의 존재에는 타자와의 공동 존재가 속해 있다. 따라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공동 존재로서 타자들을 위해 >있다<. 이것은 실존론적 본질진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때그때의 현사실적 현존재가 타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들 없이 지낸다 하더라도, 그는 공동 존재의 방식으로 있다. 실존론적 목적성으로서의 공동 존재에서 그 타자들은 그들의 현존재에 있어서 이미 개시되어 있다.(…)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그 속에 그 때마다 이미 있는 위와 같이 구성된 그 세계의 세계성은 환경세계의 용재자를 만나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배시적으로 배려된 것으로서의 그 용재자와 함께 타자들의 공동 현존재도 만나게 하는 것이다. 세계의 세계성의 구조에서 보면, 타자들은 우선 허공에 떠 있는 주관들로서 다른 사물과 나란히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는 게 아니라, 세계 안에서의 그들의 환경세계적 배려적 존재에서, 세계 내부의 용재자[用在者]로부터 자신을 드러낸다.(123, 180)


 


공동 존재에 타자들의 공동 현존재의 개시성이 속한다 함은, 현존재의 존재는 공동 존재이므로 그 현존재의 존재이해 속에는 이미 타자들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해는, 이해 일반과 마찬가지로, 인식에서부터 생긴 지식이 아니라, 인식과 지식을 맨처음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으로 실존론적인 하나의 존재양식이다.(123-124, 180)


 


자기의 현존재는, 타자들의 공동 현존재와 마찬가지로, 우선 대개 환경세계적으로 배려되는 공동 세계에 입각해서 만난다. 배려되는 세계에 몰두할 때, 즉 동시에 타자들과의 공동 존재에 몰두할 때,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러면 존재를 일상적 상호 존재로서 인수한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183)


 


3) 실존범주로서의 세인


일상적 현존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돌아보자. 타자들과의 공동 현존재에서 사람들은 타자와의 차이성에 마음을 쓴다. 차이성은 눈에 띄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더 집요하게 일상적 현존재를 지배한다. 차이성을 고르게 하거나 아니면 차이성을 통해 타자보다 월등한 자기를 과시해 타자를 억누르려는 것이 일상적 현존재의 실존적 양상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실상 일상적 현존재는 차이성에 얽매인 채 타자들에게 예속된다. 나와 남을 구별하기 위해 타자라는 칭호를 사용하건만. 실상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를 상실한 채 타자에게 귀속된다. 그렇기에 세계-내-존재로서 있는 ‘누구’는 단독적인 자기의 삶을 잃어버린 채 중성화된다. 우리는 이 중성적 존재자를 세인(世人)이라 별칭한다. 세인처럼 보고, 듣고, 즐기고, 몸을 도사리고, 격분하는 것이 우리 일상적 현존재의 자화상이다. 세인이 일상성의 존재양식을 지령한다.


세인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알아보자. 첫째는 앞서 말한 차이성이다. 그런데 일상적 현존재가 차이성을 눈여겨보는 까닭은, 일상적 현존재가 이미 실존론적으로 평균성을 배려하기 때문이다. 실로 일상적 현존재는 평균성을 삶의 가치 척도로 삼아 자신의 삶을 조율한다. 평균 성적, 평균 연봉, 평균 수명 등, 우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평균성에 매달린다. 평균성에 따라 웃고 우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다. 그런데 평균성은 결국 평준화(혹은 평탄화)를 낳는다. 모든 것은 평등이라는 이념 아래 평준화되어야 한다. 입시 지옥을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 고교 평준화 정책이다. 대중 문화의 열풍도 평준화에 기인한다. 차이성, 평균성, 평준화(평탄화)가 일상적 현존재의 공공성을 구성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의 본래적 실존을 추구하기는커녕 모든 것을 공공성에 내맡긴다. 공공성이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 해석을 규제한다. 그러기에 세인은 일상적 현존재로부터 자신의 삶에 대한 결단과 책임을 빼앗는다. 세인이 모든 판단과 결단을 미리 주기에 일상적 현존재는 책임을 면제받는다. 책임을 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몇 해전인가 천주교에서 벌인 ‘내 탓이오’ 운동은 세인의 존재면책을 반증한다. 그런데 존재면책 만큼 일상적 현존재를 유혹하는 것은 없다. 세인이 존재면책을 가지고 일상적 현존재에게 영합함으로써, 세인의 집요한 지배는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세인은 비록 무(無)는 아니나,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아닌 자’가 된다.


차이성, 평균성, 평준화(평탄화), 공공성, 존재면책 및 영합이 일상적 현존재를 지배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를 상실한다.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아야 하는 현존재는 그만 세인으로 전락한다. 세인은 일종의 실존범주로서 현존재의 비본래적 혹은 비자립적 실존의 양상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는 세인-자기가 된다. 세인-자기라는 칭호에서 후자의 자기가 본래적 자기이다. 그러나 현존재의 본래적 자기는 세인 속에 분산되고 만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인-자기이다. 실상 우리네 현존재는 우선 세인이고 대개는 세인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삶에 만족할 수 없다. 인간 현존재는 본래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인-자기로부터 은폐와 무명화(無明化)를 극복하여 본래적 자기를 회복해야 한다. 본래적 자기 존재란 바로 세인의 실존적 변양이다.


 


[읽기자료]


타자들과 함께, 타자들을 위해, 타자들과 대립해서 생각한 바를 배려할 때, 사람들은 늘 타자들과의 차이에 대해 마음을 쓰게 된다. 그것은 타자들과의 차이를 단지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자기의 현존재를 - 타자들에게 뒤떨어져 있어서 -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끌어올리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며, 자기의 현존재가 타자들보다 우월해서 그들을 억누르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호 존재는 - 자기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 이런 차이에 대한 마음쓰임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다. 실존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상호 존재는 차이성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존재양식이 일상적 현존재 자신에게 눈에 띄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 존재양식은 더욱더 집요하고 근원적으로 작용한다.(126, 184)


 


그러나 공동 존재에 속하는 이 차이성에서 보면, 현존재는 일상적 상호 존재로서 타자들에게 예속되어 있다. 현존재는 자기로서 있지 못하고, 타자들로부터 존재를 탈취 당하고 있다. 타자들의 의향이 현존재의 일상적 존재 가능성을 좌우한다. 이 때 타자들이란 특정한 타자들이 아니다. 반대로 모든 타자들이 그들을 대표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눈에 띄지 않는 타자들의 지배를 공동 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이미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 자신이 타자들에게 귀속되어, 그 타자들의 힘을 강화하고 있다. 타자들 이란, 자기가 본질적으로 그들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이지만, 그 타자들은 실은 일상적 상호 존재에 있어서 우선 대개  현 존재 하는 사람들이다. 그 ‘누구’란 이 사람 저 사람이 아니고, 사람 자신이나 몇몇 사람도, 모든 사람의 총계도 아니다. 그 누구는 중성적인 것, 세인[세상 사람]이다.(126, 184-185)


 


공공의 교통기관을 이용하고 보도기관(신문)을 활용할 때, 모든 타자들은 그냥 타자들이다. 이 상호 존재는 자기의 현존재를 완전히 타자라는 존재양식 속으로 용해하여, 더욱이 차이지고 두드러지는 타자란 더욱더 소멸되고 만다. 이렇게 눈에 띄지 않고 확인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 세인은 자기의 본래적 독재권을 발휘한다. 우리는 세인이 즐기듯이 즐기고 만족스러워 하며, 세인이 보고 비평하듯이 문학과 예술에 관해 우리도 읽고 보고 비평한다 ; 세인이 몸을 도사리듯이 우리도 군중으로부터 몸을 도사리고, 세인이 격분하듯이 우리도 격분한다. 세인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며, 총계라는 의미에서가 아닌 모든 사람이다. 이 세인이 일상성의 존재양식을 지령하는 것이다.(126-127, 185)


 


세인은 그 자신 고유한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차이성이라고 부른 전술한 공동 존재의 경향은, 상호 존재 그 자체가 평균성을 배려한다는 데 근거한다. 평균성은 세인의 실존론적 성격의 하나이다. 세인은 그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평균성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세인은 현사실적으로는, 당연시되는 것, 사람들이 성과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것, 그런 것들의 평균성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있다. 무엇은 감행할 수 있고 감행해도 무방한가를 미리 윤곽짓고 있는 이 평균성은 돌출하는 모든 예외를 감시한다. 모든 우월성은 잡음 없이 억제된다. 모든 근원적인 것은 하룻밤 사이에 오래 전부터 숙지된 것으로서 범속화되고, 애써 쟁취한 모든 것은 다루기 쉬운 것으로 된다. 모든 비밀은 그 힘을 잃는다. 평균성의 마음씀은 다시 현존재의 한 본질적 경향을 노정한다. 그 경향을 우리는 모든 존재 가능성의 평탄화(平坦化)라고 부른다.(127, 185)


 


차이성, 평균성, 평탄화는 세인의 존재방식으로서, 우리가 공공성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구성한다. 공공성은 우선 세계 해석과 현존재 해석을 규제하고, 모든 것에서 정당성을 장악한다. (…) 공공성은 일체를 흐리게 하고, 그렇게 해서 은폐된 것을 숙지된 것, 누구에게나 접근될 수 있는 것으로서 내세운다.(127, 186)


 


세인은 도처에 현전하지만, 현존재가 결단으로 치달을 때는 언제나 이미 그 자리에서 꽁무니를 빼고 만다. 그러나 세인은 모든 판단과 결단을 미리 주기 때문에, 그때그때의 현존재에게 책임을 면제해 준다. 세인이 언제나 사람들을 증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세인은 말하자면 다반사로 하고 있다. 어떤 것에 대해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세인은 아주 쉽게 모든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다. 세인은 언제나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으나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게 된다. 현존재의 일상성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세인에 의해 야기된다.(127, 186)


 


이와 같이 세인은 그때그때의 현존재로 하여금 그 일상성에서 책임을 면하게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 현존재 속에 안이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숨어 있는 한, 세인은 위의 존재면책을 가지고 현존재에 영합한다. 또 세인은 존재면책을 가지고 부단히 그때그때의 현존재에 영합하기 때문에, 세인은 그 집요한 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한다.(127-128, 186)


 


누구나 타자인지라 홀로 그 자신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상적 현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세인이라고 대답했으나, 이 세인은 아무도 아닌 자이며, 모든 현존재는 서로서로 섞여 있으므로 해서 그 때마다 이미 자기를 그 아무도 아닌 자에게 넘겨주어 버리고 만 것이다.(128, 186)


 


위에서 밝혀진 일상적으로 서로 섞여 있다는 존재성격들, 즉 차이성, 평균성, 평탄화, 공공성, 존재면책 및 영합 속에 현존재의 가장 비근한 자립성이 있다. 이 자립성이란 어떤 것이 끊임없이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공동 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리킨다. 자신의 현존재의 자기도 타자의 자기도, 위에서 말한 여러 양상 속에 있는 한, 미처 발견되지 않거나 상실하고 만다. 세인은 비자립성과 비본래성이라는 방식으로 있다. 이런 존재방식은 현존재의 현사실성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세인이 아무도 아닌 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는 아닌 것과 같다.(128, 187)


 


세인이란 하나의 실존범주이며, 근원적 현상으로서 현존재의 적극적 틀에 속한다. 세인은 또한 스스로 자기를 현존재에 적합하게 구체화시킬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세인의 지배가 갖는 날카로움과 강도는 역사적으로 바뀔 수 있다.(129, 188)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는 세인-자기이므로, 우리는 후자를 본래적 자기, 즉 특별히 파악된 자기와 구별한다. 그때그때의 현존재는 세인-자기로서 세인 속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자신을 새삼스럽게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산은, 우리가 가장 가까이 만나는 세계 속에 배려하면서 몰두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그런 존재양식을 가진 주체의 성격이다. 현존재가 세인-자기로서 자기 자신에 친숙하다면, 이것은 곧, 세인이 세계 및 세계-내-존재의 가장 가까운 해석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다. 세인 자신은 현존재가 일상적인 목적으로 삼는 바이지만, 그 세인 자신이 유의의성의 지시연관을 분절한다. 현존재의 세계는, 세인에게 친숙한 적소 전체성을 지향해서, 그리고 세인의 평균성으로 확정된 한계 안에서, 만나는 존재자를 개현한다. 우선은 현사실적 현존재는 평균적으로 발견된 공동 세계내에 존재한다. 나는 우선 독자적인 자신이라는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세인이라는 방식으로 타자인 것이다. 이 세인으로부터, 그리고 세인으로서, 나는 나 자신에게 우선 주어져 있다. 현존재는 우선 세인이고 또 대개 세인으로 그친다. 현존재가 세계를 독자적으로 발견해서 자기에게 가까이 가져온다면, 현존재가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자신에게 개시한다면, 이러한 세계의 발견과 현존재의 개시는 언제나 은폐와 무명화(無明化)의 제거로서,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자물쇠를 채우는 위장의 분쇄로서 수행된다.(129, 188-189)


 


일상적 상호 존재의 존재가 외견상 순수한 전재성[前在性]에 존재론적으로 가까워지는 듯하면서도 원칙적으로 그것과 다르다면, 본래적 자기의 존재는 결코 전재성으로서 파악되지는 않을 것이다. 본래적 자기 존재란 세인으로부터 분리된 한 주체의 예외 상태가 아니라, 본질적 실존범주로서의 세인의 한 실존적 변양이다.(130, 189)


 


4. 내-존재


(한: 內-存在, 독: In-sein, 영: Being-in)


 


이 장의 주제는 세계-내-존재의 세 번째 구조 계기인 내-존재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존재라는 개념의 형식적 구조만을 보고 이를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내부성과 혼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내부성이란, 컵 ‘안의’ 물이나 혹은 장농 ‘안의’ 옷의 예에서 보듯, 세계 내부적 존재자 상호간의 공간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공간적 관계를 우리는 특히 범주라고 칭하는데, 범주는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존재론적 성격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우리가 이 장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내-존재는 범주로서의 내부성과 엄격히 구별된다.


현존재는 마치 컵 ‘안의’ 물처럼 그렇게 단순히 세계 안에서 세계에 대해 공간적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재는 세계 안에서 실존한다. 세계 안에서 정을 붙인 채 부대껴가며 몰입해 살아가는 것이 현존재의 현사실이다. 내-존재란 바로 이렇게 현존재가 세계 안에 몰입해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존재를 범주로서의 내부성과 구분지어 실존범주라고 호칭한다. 실존범주로서의 내-존재는 세계-내-존재라는 본질적 틀을 가진 현존재의 존재를 나타내는 형식적이고 실존론적 표현이다. 그런데 내-존재의 의미는 독일어 In-sein에 대한 어원 분석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내-존재(In-sein)에서 ‘in(내, 內)’은 innan에서 유래한다. 여기에서 in은 [어디에] ‘산다’, ‘거주한다’, ‘체재한다’를, 또 ‘an’은 ‘익숙하다’, ‘친숙하다’ 혹은 ‘돌본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내-존재(In-sein)에서 ‘내(in)’는 단순한 공간적 관계 따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는, 어원적으로도, 세계 안에 친숙하게 거주함을 의미한다. 또한 In-sein에서 sein의 3인칭형인 bin(있음)은 ‘bei’와 연관되는데, ‘bei’의 어원적 의미는 단순히 ‘공간상에서의 옆’이 아니라 ‘…에 몰입해 있음’, 즉 ‘이러이러하게 친숙한 세계에 몰입해서 머무르고 있음’에 해당한다. 따라서 어원 분석을 통해서도 내-존재가 ‘…에 몰입해 살고 있음’은 입증된 셈이다.


 


[읽기자료]


우선 중요한 것은, 실존범주로서의 내-존재와, 전재자[前在者] 상호간의 범주로서의  내부성 과의 존재론적 차이를 보는 일이다.(56, 84)


 


-존재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표현을 우리는 우선 세계 안의 ‘내-재(內在)’라고 보완하고, 이 ‘내-재’를 … 안에 있음 으로서 이해하기 쉽다. 이 용어로 언급되는 존재자의 존재양식은 컵 안에 있는 물, 장농 안에 있는 옷과 같이, 다른 존재자의 안에 있는 존재자의 존재양식이다. 우리가 안이라는 말로 생각하는 것은, 공간 안에 연장되어 있는 두 존재자가 이 공간 속에서 차지하는 장소와 관련해서 맺고 있는 존재관계이다. 물과 컵, 옷과 장농은 같은 방식으로 공간안의 어떤 장소에 있다. 이같은 존재관계는, 예컨대 교실 안에 있는 의자, 대학 안에 있는 교실, 도시 안에 있는 대학 등등으로 확대되어, 우주 공간 안에 있는 의자에까지 이른다. 이 존재자들은 서로서로 안에 있다고 규정될 수 있으나, 이들은 모두 세계의 내부에서 출현하는 사물들로서 전재적[前在的] 존재라는 동일한 존재양식을 갖는다. 어떤 전재적인 것 안의 전재적 존재, 즉 일정한 장소관계라는 의미에서 동일한 존재양식을 가진 어떤 것과 함께 있는 전재적 존재는, 우리가 범주적이라 부르는 존재론적 성격이오, 현존재적이 아닌 존재양식을 가진 존재자에 속하는 존재론적 성격이다.(53-54, 80-81)


 


이에 반해, -존재는 현존재의 존재 틀을 의미하고 따라서 실존범주이다. 그렇다면 내-존재는 어떤 전재적 존재자  안 에 있는 어떤 물체(인간의 신체)의 전재적 존재라고 생각될 수는 없다. 내-존재는 전재자의 공간적  상호내속(相互內屬) 을 의미하기는커녕,  내 는 근원적으로 위에서 말한 그런 양식의 공간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  in[내] 은 innan-에서 유래하며, [어디에] 산다, 거주한다, 체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 [innan의]  an 은 ‘나는 익숙하다, 친숙하다,’ ‘나는 어떤 것을 돌본다’는 뜻이다 ; 이것은 habito[나는 거주한다]나 diligo[나는 경애한다]라는 의미에서 colo[나는 산다, 돌본다, 경애한다]라는 어의(語義)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내-존재를 가진 존재자를 우리는 그 때마다 나 자신인 존재자라고 불렀다. ['내가 있다'고 할 때의]  bin [있다]이라는 표현은  bei 와 연관을 가지며,  내가 있다 는 것은 다시 ‘나는 거주한다’, ‘나는 … 에 몰입해서, 즉 이러저러하게 친숙한 세계에 몰입해서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있다 의 부정법(不定法)으로서의 존재, 즉 실존범주로서 이해된 존재는 ‘…에 몰입해서 살고 있다’, ‘… 과 친숙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존재는 세계-내-존재라는 본질적 틀을 가진 현존재의 존재를 나타내는 형식적이고 실존론적인 표현이다.(54, 81-82)


 


1) 개시성


(한: 開示性, 독: Erschlossenheit, 영: Disclosedness)


 


내-존재란 현존재가 세계 안에 몰입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현존재가 세계 안에 몰입해 있을 수 있는 근거는 현존재 자신에게 이미 자기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및 세계 안에서 만나는 타자 및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존재가 개시되어(열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존재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레 개시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우리는, 앞서의 논의에서, 인간을 존재론적-실존론적 차원에서 현존재(Dasein)라 이름지었다. 현존재(Dasein)에서 현(Da)의 일상적 의미는 ‘여기’ 혹은 ‘저기’를 가리키는 공간적 개념이다. 혹자는 Dasein을 우리말로는 ‘거기에 있음’으로, 또 영어로는 ‘There being’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그 까닭은 Da의 공간적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의 용법에서 현(Da)은 존재론적-실존론적 의미를 갖는다. 앞서 2장 5절에서 상론하였듯, 용재자(用在者)의 ‘저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성이라면,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성은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를 근거로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가 펼쳐지는, 다시 말해 세계가 세계로서 개시되는 사건이 바로 현존재의 현(Da)이 된다. 그러니까 현(Da)의 존재론적-실존론적 의미는 ‘존재가 개시되어 있음’이 된다. 현(Da)은 본질적으로 개시성(開示性)이다. 즉 현존재는 그의 개시성이다.


존재이해야말로 현존재의 본질적 특성이 된다. 현존재의 존재이해를 통해서만 다른 존재자의 존재도 밝혀진다. 현존재가 없다면 존재도 없다. 그러기에 현존재는 비유해서 말하자면, ‘자연의 빛’이 된다. 현존재는 곧 ‘밝음’(Lichtung)이다. 그 ‘밝음’ 안에서만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빛에 접근하기도 하고 어두움 속에 감추어지기도 한다.


개시성을 논의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하이데거의 독특한 사유구조를 밝혀 두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하나의 사태를 논의할 때 항상 그 사태의 형식적 구조를 문제삼는다. 그러고는 그 형식적 구조에서 어떻게 그 사태의 비본래적 양상과 본래적 양상이 가능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개시성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이 장은 우선 개시성의 형식적 구조를 밝혀낸 뒤, 개시성의 비본래적 일상적 양상을 논의한다. 개시성의 본래적 양상은 앞으로 6장에서 선구적 결의성으로 구체화되어 논의될 것이다.


 


[읽기자료]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에 의해 구성되는 존재자는 그 자신 그 때마다 자기의  현  존재이다. 관용화된 말뜻에 따르면,  현 은  여기 와  저기 를 가리킨다.  여기 있는 나 의  여기 는 언제나 용재적  저기 에 입각해서, 즉 저기를 향해 ‘멀음을 제거하면서-방향을 열면서-배려하면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의 저기에 입각해서 이해된다. 현존재에게 그와 같이 그의  자리 를 규정해 주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성은 그 자체 세계-내-존재에 근거한다. 저기란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것의 규정성이다.  여기 와  저기 는 하나의  현 에서만, 다시 말하면  현 의 존재[현-존재]로서 공간성을 개시한 존재자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 존재자는 그 가장 고유한 존재에 있어서 폐쇄되지 않았다는 성격을 갖고 있다.  현 이라는 표현은 이 본질적 개시성을 의미한다. 이 개시성으로 인해 이 존재자(현존재)는 세계의 현-존재와 하나가 되어 자기 자신으로  현  존재한다.(132, 193-194)


 


인간 안에 있는 lumen naturale[자연의 빛]이라는 존재[자]로 비유적인 말은, 이 존재자는 그의 현 존재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그 존재자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조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존재자가  조명 받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이 세계-내-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 즉 다른 존재자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가 곧 밝음[빛]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존론적으로 그렇게 밝혀진 존재자에게만 전재자[前在者]가 빛 속에서는 접근되고 어둠 속에서는 감추어진다. 현존재는 자기의 현을 애초부터 본유(本有)하는 것이어서, 그것 없이는 현존재는 현사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대체 그런 본질을 가진 존재자가 아니다. 현존재는 그의 개시성이다.(132-133, 194)


 


(1) 정상성(情狀性)


(한: 情狀性, 독: Befindlichkeit, 영: State-of-mind)


 


개시성은 하나의 통일적 현상이로되, 그 구조계기는 정상성, 이해, 그리고 말로 나뉘어진다. 정상성, 이해, 말이 개시성을 구성한다. 이 절에서는 우선 정상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① 기분


(한: 氣分, 독: Stimmung, 영: mood)


 


종래의 철학에서 기분은 탐구 주제가 아니었다. 기분은 지극히 사소하고 일시적인 변덕 정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기분이 존재론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언제나 기분에 젖어 있을 뿐더러, 기분은 우리를 자기의 존재에 직면하게 한다.


예를 들어보자. 특별히 할 일도 없는 한가한 오후였다. 계속되는 사업의 실패로 좌절한 채 이 군(君)은 마냥 우두커니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애꿎게 담배만 연방 피워 대며 그는 일종의 무기분에 젖어 있었다. 이 군은 담담한 심정으로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기도 하였으나 그것뿐이었다. 오히려 몸은 점점 나른 해 지면서 자기의 존재가 짜증스러워 졌다. 순간 이 군은 피던 담배를 비벼 끄며 하늘에다 고함이라도 지를 양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기분이 그를 짜증스러운 자기의 존재에 직면하게 했던 것이다. 기분이 상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 군은 오늘도 아내와 언쟁을 벌였다. 막무가내로 언성을 높이는 아내를 보니, 앞으로 저 여인과 인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자기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졌다. 어느 덧 이 군은 인생의 짐을 훨훨 벗어 던질 양 공원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군의 뒷모습은 마냥 어두웠다.


정상성(情狀性)이란 우리가 기분에 젖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기분은, 비록 우리가 그 이유를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어떤 심경에 있으며 또 어떤 심경에 있게 될 것인가를 드러낸다. 정상성은 “현존재를 근원적으로 드러내는 현(Da), 즉 존재개시의 장이 된다. 기분은 반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기분에 있어서 현존재는 자기와 세계를 원초적 직접적으로 개시한다. (…) 현존재가 기분에 젖어 있다는 것은, 현존재가 그 존재에 있어서 바로 그 [기분에 젖은] 현존재로서 실존한다는 사실을 개시한다.”(소광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의』, 문예출판사, 2003. 93-94쪽)


기분 혹은 정상성은 우리를, 그 동안 반성한 바 없던 자기의 존재 앞에 직면시킨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기분 속에서 “현존재는 있고 또 있어야 한다”라는 적나라한 사실에 부딪히기도 한다. 사랑하던 여인과 애달픈 이별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우리는 두 손을 불끈 쥐고 자기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우리는 다시 일상의 세계로 돌아간다. 우리는 기분을 내색하지 않는다. 특히 다른 사람과 마주하였을 때 우리는 기분 속에 숨쉬고 있는 자기의 존재를 애써 감추려 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기분의 존재론적-실존론적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의 얼굴에 다 쓰여 있어.”라고 말하듯, 기분으로부터의 회피는 기분의 존재론적-실존론적 의미를 반증한다.


 


[읽기자료]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정상성[情狀性]이라는 명칭으로 표시하는 것은 존재[자]적으로는 가장 익숙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 즉 ‘기분’, ‘기분에 젖어 있음’이다. 기분의 심리학이라는 것이 아직은 완전히 미개척 상태에 있지만, 중요한 것은 기분의 심리학에 앞서 이 현상을 기초적 실존범주로서 간주하고 그 구조를 조감하는 일이다.(134, 196)


 


일상적 배려의 방해받지 않은 평정감(平定感)과 억제된 불쾌감,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 및 그 역이행, 언짢은 기분에 빠지는 것 따위는, 설사 이런 현상들이 현존재 안에서는 지극히 사소하고 일시적인 것이라 하여 주목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존재론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기분이 저상되고 바뀔 수 있다는 것은 현존재가 그 때마다 이미 언제나 기분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따끔 지속하고 기복없고 멍청한 무기분(無氣分)은 기분상함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 무기분은 아무것도 아니기는커녕 도리어 그 무기분 속에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짜증스러워 한다. 그런 기분상함에서는 현의 존재는 부담으로서 드러난다. 그 이유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현존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인식의 개시 가능성이, 현존재로 하여금 ‘현’으로서의 자기의 존재에 직면케 하는 기분의 근원적 개시에 비하면, 그 범위가 너무 좁기 때문이다. 또 고양된 기분은 존재의 분명한 부담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있으나, 설사 벗어난다 하더라도, 이 기분 가능성 역시 현존재의 부담 성격을 개시한다. 기분은  사람이 어떤 심경으로 있으며 또 있게 될 것인가 를 나타낸다. 이  사람의 심경 여하 에서 [사람이] 기분에 젖어 있으면 [자기의] 존재를 그 [기분적]  현  속에 가져온다.(134, 196-197)


 


기분에 젖어 있다는 점에서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기분상 다음과 같은 존재자로서 개시되어 있다 ; 그 존재자란, 현존재를 그 존재에 있어서, 즉 실존적으로 있어야 하는 그 존재에 있어서 떠맡는 그런 존재자이다. 개시되었다 함은 그것으로 곧 인식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극히 사소하고 소박한 바로 그 일상성에서 현존재의 존재는 ‘현존재는 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로서 적나라하게 버그러져 나올 수 있다. 단순히 ‘현존재가 있다는 것’은 드러나 있건만, 그것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는 어둠에 싸여 있다. 마찬가지로,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이런저런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사실, 즉 현존재가 기분의 개시작용에 이끌려 가지도 않고 개시된 것 앞에 자기를 노출시키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그런 현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서는 ‘현’의 존재가 기분에 따라 개시된다는 현상적 실상을 반대하는 증명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옹호하는 증거이다. 현존재는 대개 존재[자]적-실존적으로는 기분 속에서 개시되는 존재를 회피하지만, 이것은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는 그런 기분이 내키지 않는 바로 그것에서 현존재는 스스로 ‘현’에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회피하는 바로 거기에서 ‘현’은 개시되어 있다.(134-135, 197)


 


② 피투성과 현사실성


(한: 被投性, 독: Geworfenheit, 영: thrownness)


(한: 現事實性, 독: Faktizität, 영: facticity)


 


인생은 나그네길이다. 아무도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더 이상 은폐될 수 없다. 우리는 기분 속에서 이러한 적나라한 사실에 봉착한다. 아무도 자기의 존재를 선택하여 태어난 이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어떻든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자기의 존재에 던져져 있다. 이것이 바로 피투성이다.


피투성은 현사실성을 시사한다. 현사실성이란 전재자(前在者)의 사실성과 구별되는 현존재의 한 존재성격이다. 현존재의 실존적 사실성이 현사실성이다. 그렇다면 피투성과 관련된 현사실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존재는 비록 자신의 선택은 아니지만 이미 여하튼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존재에 던져져 있다. 그러기에 현존재는 자기를 자기의 존재에 떠맡겨 자기의 존재를 존재하도록 해야한다. 이처럼 자신의 피투성을 고스란히 인수하는 현존재만의 독특한 실존적 사실성이 현사실성이다. 그러나 아마도 일상적 현존재는 이러한 현사실성으로부터 자신을 회피하지 않을런지.


 


[읽기자료]


현존재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는 은폐되어 있으나, 그 자신으로는 그만큼 더 은폐되지 않고 개시되어 있다는 현존재의 존재성격, 즉  현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존재자가 자기의 현에 던져져 있음[피투성 ; 被投性]이라 부른다. 이것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현’이라는 것이다. 피투성이란 표현은 [현존재가] 떠맡겨져 있다는 현사실성을 시사한다. 현존재의 정상성[情狀性]에서 개시되는 그가 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전재성[前在性]에 속하는 사실성을 존재론적-범주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사실이 아니다. 후자는 관조적 확인에서만 접근 가능하다. 정상성에서 개시되는 [전자의] 사실은 오히려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있는 바로 그 존재자의 실존론적 규정성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현사실성은 전재자[前在者]factum brutum[둔중한 사실]의 사실성이 아니라, 설사 우선은 밀어 제쳐져 있다 하더라도 실존 가운데 받아들여진, 현존재의 한 존재성격이다. 현사실성이라는 것은 직관에서는 결코 눈에 띄지 않는다.(135, 197-198)


 


현존재는 자기의 가장 고유한 존재를 어떤 사실적 전재적[前在的] 존재 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현존재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사실의 사실성과 암석류(岩石類)가 사실적으로 출현하는 것과는 존재론상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존재가 제각기 그 때마다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현존재라는 현사실의 사실성을 우리는 현존재의 현사실성이라고 부른다. 이 존재 규정성[즉, 현사실성]의 복잡한 구조는, 이미 밝혀진 현존재의 실존론적 근본 틀[세계-내-존재]의 빛 속에서 비로소 그 자신 문제로서 파악될 수 있다. 현사실성이라는 개념에는 한 세계 내부적 존재자[현존재]가 ‘세계-내-존재’라는 것이 함축되어 있어서, 그 존재자는 자기가 자기의 고유한 세계 내부에서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와 운명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56, 83-84)


 


③ 정상성의 존재론적 본질성격


피투성은 일종의 부담이다. 정상성 안에서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에 직면하게 되며, 현존재는 이러한 자기의 존재에 떠맡겨져 있는 자로서 자기의 존재를 떠맡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피투적 현사실성이다. 그러나 기분은 피투성에 따르면서도 거스르는 방식으로 피투성을 개시한다. 기분 속에서 현존재의 존재는 부담으로 드러나기에, 기분은 대개의 경우에는 현존재의 존재의 부담 성격에 따르지 않는다. 자기 존재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현존재가 고양된 기분으로 전환하는 경우에는 적어도 그러하다. 그러나 설령 고양된 기분으로 전환한다고 해서, 현존재의 자기 존재의 부담 성격이 말끔히 지워져 버릴까? 고양된 기분으로의 전환은 오히려 현존재가 기분 속에서 자기 존재의 부담에 직면하며 그러고는 거기로부터 회피하고자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정상성은 현존재를 그의 피투성에서, 그리고 우선 대개는 회피하면서 거스르는 방식으로 개시한다.” 이것이 정상성이 갖는 첫 번째 존재론적 본질 성격이다.


기분은 우리 밖의 어떤 객관적인 사태에 의해 규정된 채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한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의지에 의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기분은 우리의 ‘밖’이나 ‘안’으로부터 다가오지 않는다. 기분은 객관적인 것도 아니고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분은 우리네의 세상살이로부터 무심코 우리를 덮쳐 온다. 즉 기분은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세계-내-존재 자체로부터 치솟아 오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분 속에서 우리의 실존 전체를 포착하게 되며 이로써 실존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즉 “기분은 그 때마다 이미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개시하고 있어서, …을 향한 자신의 방향설정을 가장 먼저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정상성의 두 번째 존재론적 본질 성격이다.


기분은 세계-내-존재 전체를 그때그때 개시하기에 우리는 기분 속에서 세계의 세계성을 더 철저하게 이해한다. 세계의 개시성은 정상성에 의해 함께 구성된다. 세계가 개시되기에 우리는 그 세계를 지평으로 하여 용재자(用在者)를 용재자로서 만나게 된다. “정상성에는 실존론적으로 세계에 대한 개시적 의존성이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 의거해서 접근해 오는 것을 만날 수 있다. 실지로 우리는 존재론적으로는 원칙상 세계의 일차적 발견을 >단순한 기분<에 맡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넓게 보면 정상성의 세 번째 존재론적 본질 성격이다.


그런데 우리의 실존은 세계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세계는 위협의 가능성을 기반으로 하여 개시된다. 세계 안에서 실존할 수밖에 없는 현존재에게 세계는 어찌 보면 위협의 대상이 된다. 그러기에 배시적 배려가 결여되었을 때 용재자(用在者)는 쓸모 없는 것, 혹은 저항하는 것, 혹은 위협적인 것으로 우리를 덮쳐 올 수 있게 된다. 두려움의 정상성이 이미 전제되었기에 세계 내부적 용재자는 우리에게 위협적인 것으로 마주쳐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자면, 아마도 부당한 공권력에 앞에 초라한 몰골로 앉아 있는 이에게만이 아니라,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에게도 세계는 언제나 위협의 대상일 뿐이다. 거대한 세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나약해 지는 것이 일상적인 우리네의 모습이 아닐런지.


 


[읽기자료]


현존재의 성격을 가진 존재자는, 명시적이든 아니든, 그의 피투성이라는 심정 속에 있다는 방식에서 그의 ‘현’이다. 정상성 안에서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에 직면해 있고, 언제나 이미 자기를 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 있는 자기를 지각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에 젖은 심정으로 있는 자기를 보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떠맡겨져 있는 존재자로서 현존재는 자신을 언제나 이미 발견했어야 한다는 데에도 떠맡겨져 있다 . 이 때의 발견은 직접적인 [자기] 탐구에서가 아니라 [자기로부터] 회피하는 데서 생기는 발견이다. 기분은 피투성을 관조하는 방식으로 개시하지 않고, [피투성에] 따르고 거스르는 방식으로 개시한다. 기분 속에서는 현존재의 부담 성격이 드러나지만, 기분은 대개 이런 현존재의 부담 성격에는 따르지 않는다. 고양된 기분에서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는 적어도 그렇다. 이런 거스름이 거스름인 것은 언제나 정상성의 방식에서이다.(135, 198-199)


 


정상성의 제일의 존재론적 본질성격으로서 우리가 획득하는 것은, 정상성은 현존재를 그의 피투성에서, 그리고 우선 대개는 회피하면서 거스르는 방식으로 개시한다는 것이다.(199)


 


기분은 [그냥] 덮쳐오는 것이다. 기분은 밖이나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서 세계-내-존재 자체로부터 치솟아 오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면을 반성적으로 포착하는 방식에 대해 정상성을 소극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넘어, 기분의 개시성격을 적극적으로 통찰하게 된다. 기분은 그 때마다 이미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개시하고 있어서, … 를 향한 자신의 방향설정을 가장 먼저 가능하게 한다. ‘기분에 젖어 있음’은 우선 심리적인 것과 관계하지 않으니, 그 자신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밖으로 나와서 사물과 인물을 [기분에 따라] 물들이는 내적 상태가 아니다. 여기에 정상성의 두 번째 본질성격이 나타난다. 정상성은 세계, 공동 현존재 및 실존의 등근원적 개시성의 한 실존론적 근본양식이다. 왜냐 하면 이 양식 자체가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이다.(136-137, 200)


 


이상 설명한 정상성의 두 본질규정, 즉 정상성은 피투성을 개시한다는 것과 전체적 세계-내-존재를 그때그때 개시한다는 것 이외에 세 번째 본질규정이 주목되어야 하는바, 이것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세계성을 더 철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앞에서 ‘선행적으로 이미 개시된 세계가 세계 내부적인 것을 만나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선행적이고 내-존재에 속하는 세계의 개시성은 정상성에 의해 함께 구성된다. ‘만나게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배시적 사항이지 단지 감각이나 응시의 사항이 아니다. 배시적으로 배려하면서 만나게 함은 ?? 우리는 지금 정상성 쪽에서 그렇게 한층 날카롭게 볼 수 있다 ?? 마주친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용재자가 쓸모 없고, 저항하고, 위협한다는 성격을 가지고 [우리와] 마주치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가능한 것은, 오직 내-존재 자체가,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것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덮쳐올 수 있도록, 그렇게 실존론적으로 선행적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덮쳐오는 것은 정상성에 근거한다. 그리하여, 예컨대 세계를 위협 가능성을 기반으로 해서 개시하는 것은 정상성이다. 두려워한다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정상성 안에 있는 것만이 환경세계적 용재자를 위협적인 것으로서 발견할 수 있다. 정상성이라는 기분 규정성이 현존재의 세계 개방성을 실존론적으로 구성한다.(137, 200-201)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의 마주침은 기분에 의해 미리 윤곽지워짐으로써 가능하지만, 만일 정상적 세계-내-존재가 이런 마주침에 이미 의존해 있지 않다면, 아무리 강하게 누르고 저항한다 해도 정감 따위는 생기지 않고, 저항도 본질적으로 발견되지 않은 채 끝나고 말 것이다. 정상성에는 실존론적으로는 세계에 대한 개시적 의존성이 있다. 그리고 이 세계에 의거해서 접근해오는 것을 만날 수 있다. 실지로 우리는 존재론적으로는 원칙상 세계의 일차적 발견을 단순한 기분에 맡기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직관은, 설사 전재자의 존재의 가장 내적인 혈관에까지 파고 들어간다 해도 위협적인 것 따위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137-138, 201)


 


④ 정상성의 한 양상: 두려움


(한: 恐怖, 독: Furcht, 영: fear)


 


앞서의 논의는 우리를 자연스레 정상성의 한 양상인 두려움에로 인도한다. 우리의 논의를 앞질러 말하자면 두려움이 비본래적 정상성이라면, 불안은 본래적 정상성이다. 두려움이 우리를 비본래적 자기 안에 견지하고 있다면, 불안은 우리를 감추어졌던 본래적 자기 앞에 직면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주제는 두려움이다. 근본 정상성(根本 情狀性)으로서의 불안은 앞으로 5장 1절에서 논의될 것이다.


두려움의 현상은 세 가지의 구조계기를 갖는다. 두려움의 대상(무엇 앞에서), 두려워함 자체, 그리고 두려움의 이유(무엇 때문에)가 두려움을 통일적으로 구성한다.


두려움의 대상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이다. 전재자, 용재자, 타인으로서의 공동현존재가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두려움의 대상의 본질적 성격은 유해성이다. 가령 레포트 제출이 코앞에 닥쳤다고 하자. 일상적 우리에게 레포트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레포트를 제출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닥쳐올 유해적 상황을 미리 그려보는데, 그럴수록 두려움은 고조된다. 레포트의 제출 기간은 연장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레포트의 작성을 완료할 수도 있건만,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두려움은 점점 증대된다.


두려워함 자신은 우리에게 위협적인 것을 위협적인 것으로서 개현한다. 그러나 두려워함이 위협적인 것을 먼저 확인하고 나서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의 예에서처럼, 두려워함은 위협적인 것이 다가오는 상황을 미리 그려보며 두려워한다. 즉 두려워함은 위협적인 것을 그것의 두려움의 가능성 안에서 미리 발견한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는 두려운 것의 재앙을 일단 확인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곧 일상의 자기로 돌아온다. 이런 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네의 현주소인 것이다.


두려움의 이유는 바로 스스로 두려워하는 현존재 자신이다. 설령 앞서의 예처럼 코앞에 닥친 레포트가 두려움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세계에 몰입해 있는 현존재가 그로 인해 위해(危害)를 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현존재 자신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현존재를 주로 결여적 방식으로 개시한다. 레포트 제출로 두려워하건만 일단 그 위협적인 상황이 확인되면, 다시 태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은 우리를 일상의 자기 안에 견지하는 것이다.


 


[읽기자료]


두려움[공포]이라는 현상은 세 관점에서 고찰된다 ; 우리는 두려움의 ‘무엇 앞에서’[대상], 두려워함, 두려움의 ‘무엇 때문에’를 분석한다. 이 세 관점이 가능하고 또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상성 일반의 구조는 이것들과 함께 출현한다.(140, 204)


 


두려움의 무엇 앞에서, 즉 두려운 것 은 그때그때 용재자, 전재자 또는 공동 현존재라는 존재양식을 가지고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 두려움의 ‘무엇 앞에서’는 위협성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 1. 만나는 것은 유해성(有害性)이라는 적소성(適所性)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적소성 연관의 내부에서 나타난다. 2. 이 유해성은, 그 유해성과 맞닥뜨릴 수 있는 것의 일정한 둘레를 겨냥하고 있다. 유해성은 그렇게 규정된 것으로서, 그 자신 일정한 방역에서 나온다. 3. 이 방역 자체 및 그 방역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그 자체로  마음놓을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유해한 것은, 위협하는 것으로서는 아직 제어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지는 않으나 접근해 오고 있다. 그렇게 접근해 오면서 유해성은 확산되고, 그 점에 위협한다는 성격이 있다. 5. 이 접근은 가까운 범위 안에서의 접근이다. 즉, 극도로 유해할 수 있고 더욱이 부단히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멀리 있으면 두려움의 성격이 감추어진 채로 있다. 그러나 유해한 것은 가까이에서 접근해 오는 것으로서는 위협적이지만, 그것은 [우리와] 마주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마주칠 수도 있지만 결국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다 는 것이 고조된다. 우리는 그것을 두렵다고 말한다. 6.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이 드러난다 : 유해한 것은 가까이에서 접근하는 것으로서 분명히 발생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두려워함이 감소되거나 지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증대된다.(140-141, 204-205)


 


두려워함 자신은 그런 성격을 지닌 위협적인 것을 자기에게 접근해오게 하면서 그 위협적인 것을 개현한다. 먼저 장래의 재앙(malum futurum)이 확인되고, 다음에 두려워지는 따위는 없다. 그러나 또한 두려워함이 접근해 오는 것을 먼저 확인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접근해 오는 것을 그 공포 가능성에 있어서 미리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려움은 두려워하면서 두려운 것을, 짐짓 관망하면서, 자기에게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두려운 것을 보는 것은 배시이다. 그 까닭은 배시는 두려움이라는 정상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141, 205)


 


두려움이 두려워하는 무엇 때문에는, 스스로 두려워하는 존재자 자신, 즉 현존재 때문이다.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그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 존재자만이 두려워할 수 있다. 두려워함은 이 존재자가 위험에 빠져 있을 때, 즉 그 자신에게 방임되어 있을 때, 이 존재자를 개시한다. 비록 명료성은 변할지라도, 두려움은 언제나 현존재를 그의 현의 존재에서 드러낸다. 우리가 집과 뜰 때문에 두려워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두려움의 ‘때문에’에 대해 이제 말한 [현존재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규정에 대한 반증(反證)이 아니다. 왜냐 하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매양 배려하면서 … 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대개 우선은 현존재는 그가 배려하는 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그가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은 … 에 몰입하는 존재가 위협당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현존재를 주로 결여적 방식으로 개시한다. 두려움은 혼란스럽게 하고  당혹스럽게  한다. 두려움은 위험에 빠진 내-존재를 보이도록 하면서 동시에 은폐한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두려움이 사라진 뒤에라야 비로소 정상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141, 206)


 


‘무엇에 직면해서 두려워함’으로서의 ‘무엇 때문에 두려워함’은 항상?? 결여적이든 적극적이든 ??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위협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존재는 위협당한다는 점에서, 등근원적으로 개시한다. 두려움은 정상성의 한 양상이다.(141, 206)


 


(2) 이해


(한: 理解, 독: Verstehen, 영: Understanding)


 


개시성을 구성하는 두 번째의 구조계기가 이해이다. 이해는 정상성과 더불어 개시성을 등근원적으로 구성한다. 이해는 언제나 기분에 젖은 정상적(情狀的) 이해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이해가 설명과 대비되는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이해와 구별됨은 물론이다. 여기서의 이해는 현존재의 실존범주이다. 설명과 대비되는 이해는 실존범주로서의 이해의 실존론적 파생태로 해석되어야 한다.


 


[읽기자료]


정상성[情狀性]은, 그 안에서  현 의 존재가 자기를 유지하고 있는 실존론적 구조들 중의 하나이다. 정상성과 등근원적으로 이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이해(理解)이다. 설사 정상성이 이해를 억제할 뿐이라 하더라도[가령 이해의 객관성을 방해하는 경우], 정상성은 그 때마다 제나름의 이해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해는 언제나 기분에 의해 규정된 이해이다. 우리가 이해를 기초적 실존범주로서 해석한다면, 이와 함께 이 현상은 현존재의 존재의 근본양상으로서 파악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반대로, 여러 인식양식들 중 가능한 하나의 인식양식 가령 설명과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해는, 이 설명과 마찬가지로, 현의 존재 일반을 함께 구성하는 일차적 이해의 실존론적 파생태로서 해석되어야 한다.(142-143, 208)


 


① 존재 가능


‘이해한다’의 일상적 의미는 ‘무엇을 할 수 있음’과 연관된다. 그러나 실존범주로서의 이해에서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 바로 현존재의 존재 가능이다. 실로 현존재의 존재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전재자(前在者)나 용재자(用在者)의 본질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반면, 현존재는 그때마다 자신의 궁극목적을 존재 가능으로 하여 실존한다. 현존재는 가능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가능성은 공허한 논리적 가능성과 구별된다. 논리적 가능성이 ‘아직 현실적이지 않고 또한 결코 필연적이지 않은 가능성’으로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자면 현실성이나 필연성보다 “존재도(Seinsgrad)”(소광희[2003], 99쪽)가 낮다면, 실존범주로서의 가능성은 현존재의 가장 근원적이고도. 최종적이며, 적극적인 존재론적 규정성이다.


그런데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21세기를 사는 현존재가 5세기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무사가 될 수는 없다. 현존재는 어디까지나 피투적 존재자이다. 피투적 존재자로서의 현존재는 이미 일정한 가능성 속에 빠져 있다. 즉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은 피투적 가능성이다. 더욱이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 가능 존재인한, 다시 말해 이해가 정상적(情狀的)이해로서 피투성에 맡겨진 이해인 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부단히 방기할 수도 있고, 또 포착하기는 하나 잘못 포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가능성인 것이다.


 


[읽기자료]


우리는 종종 존재[자]적인 언사로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말을 어떤 일을 맡아 할 수 있다, 못지 않은 힘이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실존범주로서의 이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 실존함으로서의 존재이다. 이해 속에 실존론적으로 놓여 있는 것은, ‘존재-가능’으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양식이다. 현존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음’을 덤으로 더 가지고 있는 전재자[前在者]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가능 존재이다. 현존재는 그 때마다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바 그것이고, 자신의 가능성대로의 그것이다. 현존재의 본질적 가능 존재는 세계에 대한 배려, 타자에 대한 고려라고 [저 앞에서] 성격규정한 그 방식에 관계하며, 그 중에서도 언제나 이미 자기를 궁극목적으로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 가능에 관계한다. 그 때마다 실존론적으로 현존재인 가능 존재는 공허한 논리적 가능성과 구별되며, 마찬가지로 전재자와 함께 이런 일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그 우연성과도 구별된다. 전재성의 양상범주로서의 가능성은 아직 현실적인 것이 아닌 것,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 그 특징은 단지 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것이다. 그런 가능성은 존재론적으로는 현실성 및 필연성보다 낮다. 이에 반해, 실존범주로서의 가능성은 현존재의 가장 근원적이고 최종적, 적극적, 존재론적 규정성이다 ; 이 가능성은, 우선은 실존성 일반과 마찬가지로, 단지 문제로서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무릇 이 가능성을 보기 위한 현상적 지반을 제공하는 것은, 개시적 존재 가능으로서의 이해이다.(143-144, 209-210)


 


실존범주로서의 가능성은 자의의 무관심(libertas indifferentiae) [무관심의 자유]이라는 의미에서 허공에 떠 있는 존재 가능을 뜻하지 않는다. 현존재는 본질상 정상적[情狀的]인 자로서는 그 때마다 이미 일정한 가능성 속에 빠져 있으며, 현존재로 있는 존재 가능으로서는 그 일정한 가능성을 그냥 지나쳐버리게 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가능성들을 부단히 방기하기도 하고, 포착하기도 하고, 잘못 포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 가능 존재이며, 철두철미 피투적 가능성임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자유존재로서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 존재는 현존재 자신에게는 여러 가능한 방식과 정도에 있어서 간파되고 있다.(144, 210)


 


현존재는 자신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존재함을 그 때마다 이해하고 있거나 또는 이해하지 않고 있거나 하는 방식으로 있다. 그런 이해인 현존재는 자기 자신, 즉 자기의 존재 가능이 무엇에 연관되는지[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안다. 이 앎은 내재적 자기 지각에서 비로소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이해인 현의 존재에 속한다. 뿐더러 현존재는 이해하면서 자기의 현이고 오직 그 때문에, 현존재는 갈피를 잃을 수도 있고 자기를 잘못 수도 있다. 그리고 이해가 정상적[情狀的] 이해이고, 정상적 이해로서 실존론적으로는 피투성에 맡겨진 이해인 한, 현존재는 그 때마다 이미 갈피를 잃고 자기를 잘못 안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 가능에 있어서, 자기의 가능성들 속에서 자기를 다시 발견할 가능성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144, 210)


 


② 이해의 실존론적 구조: 기투


(한: 企投, 독: Entwurf, 영: Projection)


 


던져진 자로서의 현존재는 기투라는 존재 양식 속으로도 이미 던져져 있다. 이해의 실존론적 구조가 기투이다. 현존재는 현존재로 존재하는 한, 그때마다 이미 자신을 기투하였고, 기투하면서 존재한다. 즉 현존재는 자신의 궁극목적을 향해 자신을 기투할 뿐 아니라 이로써 목적과 수단의 계열에서 수단을 하나 하나 유의의화하기 위해, 다시 말해 용재자(用在者)를 적소토록 하기 위해, 자신을 세계의 세계성인 유의의성을 향해 기투한다.


이해는 기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해는 피투적 기투이다. 따라서 기투가 새로운 가능성을 창안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기투로서의 이해는 거기에로 자신을 기투하는 그 존재가능성들을 스스로 주제적으로 포착하지도 않는다. 기투는 다만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선취하여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있게 한다. 그런데 현존재는 자신의 일상적 세계에 입각하여 자신을 기투(이해)할 수도 있고 또 자신의 본래적인 궁극목적을 향해 자신을 기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해는 비본래적 이해일 수도 있고 본래적 이해일 수도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해는 기투이되, 현존재가 일상적 세계에 입각해 자신을 기투하면 비본래적 이해이고, 본래적 궁극목적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면 본래적 이해이다.


 


[읽기자료]


이해가, 이해 속에서 개시 가능한 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본질적 차원에 따르면서도, 언제나 제 가능성 속으로 파고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기투라고 부르는 실존론적 구조를 이해 자신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를 현존재의 궁극목적을 향해 근원적으로 기투할 뿐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의 그때그때의 세계의 세계성인 유의의성을 향해서도 근원적으로 기투한다. 이해의 기투 성격은, 세계-내-존재의 현이 존재 가능의 현으로서 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세계-내-존재를 구성한다. 기투란 현사실적 존재 가능의 활동범위의 실존론적 존재 틀이다. 그리고 던져진 자로서 현존재는 기투라는 존재양식 속으로 던져져 있다. 기투는 현존재가 자기의 존재를 정비하기 위해 고안해 낸 어떤 계획에 따라 태도를 취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無關)하다.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현존재로서 그 때마다 이미 자기를 기투하였고, 기투하면서 존재한다.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이미 그리고 언제나 여전히 가능성들에 입각해서 자기를 이해한다. 나아가서 이해의 기투성격이 의미하는 바는, 이해는 이해의 기투근거, 즉 가능성들을 스스로 주제적으로 포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가능성들을 주제적으로 포착하는] 그런 포착은 기투된 것으로부터 다름 아닌 그 가능성의 성격을 탈취하여, 그 기투된 것을 일종의 주어진 사념된 사태로 끌어 내린다. 반면에 기투는 던짐으로써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자기에게 선취(先取)하고 가능성으로서 있게 한다. 이해는, 기투이니 현존재가 자기의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있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이다.(145, 211-212)


 


정상성과 이해는 실존범주로서 세계-내-존재를 근원적으로 개시하는 두 성격이다. 현존재는 자기가 거기에 의거해서 존재하는 가능성들을 기분에 젖은 심정으로 본다. 그런 가능성들을 기투하면서 개시함에 있어, 현존재는 그 때마다 이미 기분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가장 독자적인 존재 가능의 기투도 현 속에 던져져 있는 [피투성] 현사실에 맡겨져 있다. 현의 존재의 실존론적 틀을 피투적 기투라는 의미로 설명한다면, 현존재의 존재는 더욱 수수께끼 같지 않은가? 사실 그렇다. 우리는 먼저 이 존재가 완전히 수수께끼에 싸여 있음을 노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148, 215)


 


기투는 언제나 세계-내-존재의 완전한 개시성에 관계한다 ; 이해는 존재 가능 자체이므로, 이해 속에서 본질적으로 개시될 수 있는 것의 범위에 의해 미리 밑그림 그려진 여러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해는 일차적으로 자기를 세계의 개시성 속에 놓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는 우선 대개 자기의 세계에 입각해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또는 반대로, 이해는 일차적으로 자기를 궁극목적 속에 던진다. 즉 현존재는 현존재 자신으로서 실존한다. 이해는 본래적 이해, 즉 고유한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이해이든가 비본래적 이해이든가이다.(146, 212-213)


 


③ 꿰뚫어 봄


(한: 透視性, 독: Durchsichtigkeit, 영: Transparency)


 


현의 개시성을 구성하는 것은 정상성과 이해이다. 달리 말하자면 피투적 기투가 현의 개시성을 구성한다. 그런데 현존재가 궁극목적으로서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기 위해서는, 현존재는, 마치 배려에는 배시(配視)가 뒤따르고 또한 고려에는 돌봄(顧視)가 뒤따르듯이, 궁극목적으로서의 존재 가능성을 향한 시(視)를 필연적으로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視)가 우리가 여기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꿰뚫어 봄(透視性)이 된다.


우리가 꿰뚫어 봄이란 술어를 선택한 까닭은 이러한 시(視)가 잘 이해된 ‘자기 인식’임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즉 현존재가 자신을 궁극목적을 향해 기투하기 위해서는 현존재는 이미 자신의 전체적인 존재 틀인 세계-내-존재에 입각해서 그것의 본질적인 세 구조 계기를 일관해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에 입각해서 ‘세계에 몰입해 있음’ 및 ‘타자와의 공동 존재’는 물론, 이것들과 등근원적으로 자기를 꿰뚫어 보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세계-내-존재의 세 구조 계기와 관련하여 자기를 등근원적으로 꿰뚫어 볼 때에만,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은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시(視, 봄)의 본래적 의미를 지켜내야 한다. 통상적으로 이 말은 육안에 의한 감각적 지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視, 봄)의 본래적 의미는 그렇지 않을 뿐 더러 또한 순수한 비감성적 인지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시(視, 봄)의 본래적 특성은 ‘그 시(視, 봄)에 접근하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 자체에 즉해서 은폐하지 않고 만나게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통적 형이상학에서의 순수직관의 우위는 상실된다. 존재자를 그 존재자에 즉해서 은폐하지 않고 만날 수 있어야 순수직관도 가능하게 된다. 또한 이 점은 현상학적 본질직관에도 해당한다. 현상학적 본질직관도 궁극적으로는, 본래적 시(視)에 바탕을 둔 실존론적 이해에 근거한다.


 


[읽기자료]


이해는 그 기투성격에 있어서 우리가 현존재의[視]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존론적으로 구성한다. 현의 개시성과 실존론적으로 함께 있는 ‘봄’은, 배려의 둘러 봄[配視], 고려의 돌봄[顧視]이라고 특징지은 바 있는 현존재의 근본방식에 따르면, 이것들과 등근원적으로, 있는 대로의 현존재가 그 때마다 궁극목적으로 삼고 있는 존재 자체를 보는 ‘봄’으로서 현존재로 있다. 일차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실존에 관계되는 이 ‘봄’을 우리는 꿰뚫어 봄[透視性]이라 부른다. 이 술어를 선택한 것은 잘 이해된  자기 인식 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기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라는 한 점을 지각하면서 탐지하고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의 완전한 개시성을, 그 본질적 [세] 틀 계기를 일관해서, 이해하면서 파악하는 것임을 시사하기 위해서이다. 실존하는 존재자가 자기를 보는 것은, 현존재가 자기의 실존의 구성계기인 ‘세계에 몰입해 있음’에 있어서나 ‘타자와의 공동존재’에 있어서, 이것들과 등근원적으로 자기를 꿰뚫어 보게 될 때만이다.(146, 213-214)


 


봄이란 말은 물론 오해로부터 지켜져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현의 개시성을 특징지은 바 있는 ‘밝혀져 있음’[元照明]과 일치한다.  본다 는 육안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뿐더러, 전재자[前在者]를 그 전재성[前在性]에서 순수하게 비감성적으로 인지하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봄의 실존론적 의의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봄의 바로 그 특성, 즉 ‘봄은 그 봄에 접근하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 자체에 즉해서 은폐하지 않고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147, 214)


 


어떻게 모든 ‘봄’이 일차적으로 이해에 근거하는지를 지적하게 되면?? 배려의 둘러 봄[배시]은 오성적 분별[상식]로서의 이해이다 ?? 순수직관의 우위는 상실된다. 직관의 우위는 사고의 면에서는 전통적 존재론의 전재자 우위와 일치한다. 직관과  사고는 다 같이 이해의 먼 파생태이다. 현상학적  본질직관도 실존론적 이해에 근거한다. ‘본다’의 이 양식[본질직관]에 대해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먼저 현상학적 의미에서 현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존재와 존재구조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획득되어 있어야 한다.(147, 214)


 


이해에 있어서의 현의 개시성은, 그 자체로 현존재의 존재 가능의 한 방식이다. 현존재의 존재가 궁극목적을 겨냥해서 기투되어 있다는 것과 유의의성(세계)을 겨냥해서 기투되어 있다는 것은 일치하며, 거기에는 존재 일반의 개시성이 들어 있다. 제 가능성을 겨냥해서 기투할 때는, 이미 존재이해가 선취(先取)되어 있다. 존재는 기투에서 이해되는 것이지, 존재론적으로 개념화되는 게 아니다. 세계-내-존재의 본질적 기투라는 존재양식을 가진 존재자는, 그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독단적으로 단초로 삼았던 것이 이제 존재의 구성에서 제시되는데, 이 존재구성에서 보면 현존재는 이해로서 자기의 현이다.(147, 214-215)


 


④ 해석


(한: 解釋, 독: Auslegung, 영: Interpretation)


 


이해는 무엇에로의 기투로서,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현존재는 그때마다 자신의 궁극목적을 향해 자신을 기투함으로써, 자신에게 열려진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포착한다. 이해는 존재가능으로 실존하는 현존재의 실존범주이다. 이에 비해 해석은 “이해의 완성”이다. 해석은 이해에서 기투된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돋보이게 한다. 해석을 통해 이해는 이미 포착되었던 존재가능성을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획득한다. 따라서 해석에서 이해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석을 통해 이해는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다. 그러니까 해석을 통해 이해가 성립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석은 이해에서 기투된 가능성들을 완수한다.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를 통해 용재자(用在者)는 적소성을 갖는다. 이렇게 해서 펼쳐진 적소 전체성이 현존재의 세계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이미 이해된 현존재의 세계가 이제 해석을 통해 구조적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해석의 단계에서 배시는 이미 이해된 세계의 구조를 폭로한다. 배시는 용재자를 그것의 용도에 맞게 나누어 놓는다. 그로써 용도에 맞게 배시적으로 나누어 놓여진 것 자체는, 이제 어떤 것으로서의 어떤 것이라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즉 용재자는 이제 그것의 적소에 맞게 어떤 것>으로서(als)<로 해석된다.


>으로서<는 이해된 것의 명료성의 구조를 형성하고 해석을 구성한다. 이러한 >으로서<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론적 -해석학적 으로서”(existenzial-hermeneutisches Als)에 해당한다. 해석학적 >으로서<는 앞으로 진술의 명제적 >으로서<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유래가 되기에, “근원적 >으로서<”라고도 불리운다.


해석학적 >으로서<의 구조는 이해에서 기투된 가능성을 돋보이게 드러낸다. 그러나 해석학적 >으로서<의 구조가 아직 구체적으로 언표될 필요는 없다. 이 구조는 오히려 선(先)술어적인 >봄(視)<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앞으로 주제적 진술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원천이 된다. 그러니까 역으로 말하자면,  으로서 는 주제적 진술 속에서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으로서<는 단지 [그 진술 속에서] 처음으로 언표될 뿐이다. 그것도 그나마 해석학적 >으로서<가 언표 가능한 것으로서 [진술에] 앞서 있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해석이 결코 무전제적 파악일 수는 없다. 해석은 해석되어야할 존재자에 대한 선이해 안에서 이루어진다. 해석은 이해의 예(豫)-구조(Vor-Struktur)에 근거한다. 다시 말하면, 해석은 예지(豫持)(앞서 가짐, Vorhabe), 예시(豫視)(앞서 봄, Vorsicht), 예파(豫把)(앞서 잡음, Vorgriff)에 근거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해의 예-구조 전체를 해석학적 상황이라고도 명명한다.


해석하려는 것 자체가 완전히 감추어져 있거나 전혀 이해될 수 없다면 해석은 불가능하다. 용재자를 해석코자 할 경우에도, 우리는 이미 적소 전체성에서 그 용재자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적소 전체성이 주제적 해석에 의해 명시적으로 파악될 필요는 없지만, 하여튼 돋보이지 않게나마 이해될 경우에만 일상적인 배시적 해석은 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해당 존재자를 적소 전체성에서 뚜렷하지 않게나마 미리 이해하는 것이 예지(豫持)이다.


일상적인 배시적 해석은 이미 이해된 적소 전체성 안에서 움직인다. 하지만 이해된 것은 아직 은닉되어 있기에 해석이 이해를 자기의 것으로 획득하려면 이해된 것을 드러내주어야 한다. 이러한 드러냄은 이해된 것이 해석되는 하나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진다. 해석의 밑바탕에는 예지(豫持) 속에 받아들여진 것을 해석하는 관점이 고정되는데, 이런 관점이 예시(豫視)에 해당한다.


예지(豫持)에서 보유되고 예시(豫視)에서 일정한 관점에 따라 조준된 존재자는, 이제 해석에 의해 개념화된다. 그런데 해석은 해석되어야할 존재자의 개념성을, 그 존재자 자체로부터 길어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존재자와 모순된 개념들에게로 억지로 끌어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건 해석은 그때마다 이미 어떤 일정한 개념성에 대해 최종적이든 유보적이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예파(豫把)가 된다.


이처럼 해석은 앞에 주어진 것을 무전제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석은 이해의 예-구조에 근거한다. 이 예-구조를 우리는 예지, 예시, 예파로 나누어 구명하였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해석도 일종의 기투이다. 해석은 이해에서 포착된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함으로써 가능성을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획득한다. 이때 이해에서 포착된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기투함이 해석이 갖는 선이해에 해당하며, 예시, 예시, 예파에 의해 구조 지워진 것이 기투의 기반이 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기투의 기반을 특히 의미(Sinn)라고도 명명한다. 의미란 바로 예지, 예시, 예파의 구조를 가진 기투의 기반이 된다. 기투의 기반으로서의 의미에 의거해서만 어떤 것은 비로소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의미란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갖는 의미일 수 없다. 오히려 의미란 현존재의 실존범주가 된다. 즉 오직 현존재만이 의미를 갖거나 의미를 상실한다.


하이데거는 이해의 예-구조 전체를 해석학적 상황이라고도 명명한다. 그런데 혹자는 이를 두고 하나의 순환논증이라 비판한다. 그러나 해석학적 상황은 결코 비판받을 만한 의미에서의 순환논증이 될 수 없다. 그런 식의 순환논증은 논리학적 영역에나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단지 현존재의 이해와 해석의 실존론적 구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즉 현존재가 이미 이해한 내용을 선이해하면서 그 이해 내용을 명료하게 분절해 나간다는 해석학적 순환은 현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인식의 적극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해석학적 순환은 오히려 현존재의 사유의 강건함을 보장한다.


 


[읽기자료]


현존재는 이해로서 자기의 존재를 가능성들을 향해서 기투한다. 이 가능성들을 향해 이해하고 있는 존재는, 그 가능성들을 개시된 가능성으로서 현존재 속에 반전(反轉)시키기 때문에, 그 자신 하나의 존재 가능이다. 이해의 기투작용은 이해 자체를 완성한다[형성해낸다]는 고유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해의 완성을 우리는 해석이라고 부른다. 해석에 있어서 이해는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하면서 자기 것으로 한다. 해석에 있어서 이해는 다른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된다. 해석의 근거는 실존론적으로는 이해에 있으니, 해석을 통해 이해가 성립하는 게 아니다. 해석은 이해된 것의 인지가 아니고, 이해에서 기투된 가능성들을 완수하는 것이다.(148, 216)


 


용재자[用在者] 곁에서 배려하는 존재는, 그것이 만나는 것과 그 때마다 어떤 적소성[適所性]을 가질 수 있는가를 세계이해에서 개시된 유의의성에 입각해서 이해하게 된다. 배시가 발견하거니와, 그것은 이미 이해된 세계가 해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재자는 분명하게 이해의 ‘봄’ 속에 들어온다. 준비, 정돈, 수리, 개선, 보충 등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수행된다. 즉, 배시적 용재자는 그 ‘하기 위하여’에 따라 나누어 놓여지고, 보이게끔 나누어 놓여진 것에 따라 배려된다. ‘하기 위하여’에 따라 배시적으로 나누어 놓여진 것 자체, 즉 분명하게 이해된 것은 어떤 것으로서의 어떤 것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특정한 용재자는 무엇인가 하는 배시적 물음에 대해, 배시적으로 해석하는 대답은 ‘그것은 … 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 이해에서 개시된 것, 즉 이해된 것은, 그것에 즉해서 그것의  무엇으로서 가 스스로 분명하게 뚜렷해질 수 있을 만큼, 언제나 이미 접근해 있다. 이  으로서 가 이해된 것의 명료성의 구조를 형성하고 해석을 구성한다. 환경세계의 용재자와 배시적으로-해석하면서 만나는 교섭은 그 용재자를 책상, 문, 차, 다리로서  보기는  하지만, 그 교섭은 배시적으로 해석된 것을 반드시 어떤 규정적 언표 속에 나누어 놓을[분별할] 필요는 없다. 용재자를 선술어적으로 직접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를 실마리로 해서 존재자를 해석하면서 접근할 때, 이해된 것은 그 어떤 것에 대한 주제적 진술 이전에 이미 분절되어 있다.  으로서 는 주제적 진술 속에서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진술 속에서] 처음으로 언표되는 것뿐이며, 그나마도 ‘으로서’가 언표 가능한 것으로서 [진술에] 앞서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148-149, 216-217)


 


용재자[用在者]는 언제나 이미 적소 전체성을 근거로 해서 이해된다. 적소 전체성은 주제적 해석을 통해 명시적으로 미리 포착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설사 적소 전체성이 그런 [주제적] 해석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뚜렷하지 않은 이해성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바로 이 [뚜렷하지 않다는] 양상에 있어서, 적소 전체성은 일상적 배시적 해석의 본질적 기초인 것이다. 이런 해석은 언제나 예지(豫持)[Vorhabe]에 근거한다. 예지는, 이미 이해된 적소 전체성을 이해하고 있으면서, 이해내용을 내 것으로 하는 것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해되어 있으나 아직 가리워져 있는 것을 내 것으로 한다 함은 곧 가리움을 벗기는 것이며, 이것은 언제나 한 관점의 주도하에 수행된다. 관점은 이해된 것이 거기에 의거해서 해석되어야 하는 그것[착안점]을 고정시킨 것이다. 즉, 해석은 그때그때 예시(豫視)[Vorsicht]에 근거하고, 예시는 예지에서 받아들여진 것을 특정한 해석 가능성을 겨냥해서  눈여겨 둔다 . 이해된 것은, 예지 속에 보존되고  예시적으로  조준되어서, 해석을 통해 개념화된다. 해석은 해석되어야 할 존재자에 속하는 개념성을 이 존재자 자신으로부터 이끌어낼 수도 있고, 혹은 그 존재양식으로 보아 대립되는 개념 속으로 존재자를 억지로 끌어넣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 해석은 그 때마다 이미 최종적이든 유보적이든 어떤 일정한 개념성에 대해 결정한 것이다 ; 해석은 예파(豫把)[Vorgriff]에 근거한다.(150, 218-219)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해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예지, 예시, 예파를 기저로 삼고 있다. 해석은 앞에 주어진 것을 무전제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150, 219)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현존재의 존재와 함께 발견될 때, 즉 이해되었을 때, 그 존재자는 의미[Sinn]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해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존재자 또는 존재이다. 의미란 어떤 것의 이해 가능성이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그것이다. 이해하면서 개시하는 가운데 분절 가능한 것을 의미라고 부른다. 의미라는 개념은, 이해하는 해석이 분절하는 것에 필연적으로 속해 있는 것의 형식적 받침대[예지, 예시, 예파의 세발 받침대, 즉 골조]를 포괄한다. 의미는 예지, 예시, 예파의 구조를 가진 기투의 기반이며, 이 기반에 의거해서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해와 해석이 현의 존재의 실존론적 틀을 형성하는 한, 의미는 이해에 속하는 개시성의 형식적-실존론적 받침대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의미는 현존재의 실존범주이지, 존재자에 붙어 있거나 존재자의  배후 에 있거나 혹은  중간영역 의 어딘가에 떠 있는 어떤 특성이 아니다.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현존재뿐이다. 그것도 세계-내-존재의 개시성이, 이 개시성에서 발견될 수 있는 존재자를 통해  채워질 수  있는 한에서이다. 그러므로 오직 현존재만이 의미를 갖거나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 이는 현존재 자신의 존재와 이 [현존재의] 존재와 더불어 개시된 존재자가, 이해 속에서는 자기 것으로 될 수 있지만 이해되지 않을 때는 거부된 채로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151, 220)


 


이해는, 현의 개시성으로서, 언제나 세계-내-존재의 전체와 관련된다. 세계를 이해할 때는 항상 실존이 함께 이해되고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서 모든 해석은 앞에서 말한 예-구조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모든 해석은 이해내용에 기여해야 하므로, 해석되어야 할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해석이 매양 이미 이해된 것 안에서 움직이고, 그 이해된 것을 자양(滋養)으로 해서 자라야 한다면, 순환 속을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해석이 학문적 성과를 성숙시키겠는가? 더구나 전제된 이해내용이 통상적 인간인식과 세계인식 속에서 움직이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 규칙에 따르면, 순환은 circulus vitiosus[순환논증]이다.(152, 221-222)


 


그러나 순환 속에서 어떤 vitiosum[오류]을 보거나 그것을 회피할 방도를 기대한다면, 아니 그것을 불가피한 불완전성으로서  느끼는 것 만으로도, 이해를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해와 해석을 어떤 특정한 인식이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인식이상이란 그 자체 이해의 한 변종(變種)에 불과하다. 그것은 전재자[前在者]가 본질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을 포착한다는 [제딴의] 합법적 과제로 빠져든 것이다. 가능한 해석의 근본조건은 도리어, 이 해석을 그 본질적 실행조건의 점에서, 미리 오인하지 않는 데서 충족된다. 결정적인 것은 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식으로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해의 이 순환은, 그 속에서 임의의 인식양식이 활동하고 있는 하나의 원환(圓環)이 아니라, 현존재 자신의 실존론적 -구조의 표현이다. 순환은 vitiosum[오류]으로, 그것이 참아낼 수 있는 오류라 하더라도, 폄하(貶下)되어서는 안 된다. 순환 속에는 가장 근원적 인식의 한 적극적 가능성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물론, 해석이 그때그때 예지, 예시, 예파가 단순한 착상이나 통속개념에 의해 자기 앞에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 삼자(三者)를 마무리함에 있어 사상[事象] 자체에 의거해서 학문적 주제를 확보하는 것이 해석 자신의 최초의, 부단한, 최후의 과제임을 이해했을 때만 진정한 방식으로 포착되는 것이다.(153, 222)


 


이해에 있어서의  순환 은 의미의 구조에 속하고, 순환이라는 현상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틀에, 즉 해석하면서 이해한다는 데에 뿌리 박고 있다. 세계-내-존재로서 자기의 존재 자체에 관여하는 존재자는 하나의 존재론적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순환 이 존재론적으로는 전재성(존립)이라는 존재양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유의하는 한, 이 현상[순환]을 가지고 현존재라든가 하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성격짓는 일은 일반적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153, 223)


 


⑤ 진술


(한: 陳述, 독: Aussage, 영: Assertion)


 


해석에서 파생된 한 양상이 진술이다.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가 해석을 통해 해석학적 >으로서<로 돋보이게 된다면, 진술은 이 해석학적 >으로서<를 명제적 >으로서<로 구체화한다. 그러면 진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가?


진술은 일차적으로 존재자의 제시를 의미한다. 진술은 존재자를 그 자체로부터 보이게끔 한다. 진술은 특히 술어화의 규정을 통해 존재자를 제시한다. 이러한 술어화는 주어와 술어의 단순한 표상적 결합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의 제시에 그 기초를 둔다. 더욱이 진술은 규정된 존재자를 다른 이에게도 함께 보이게끔 한다. 함께 보이게끔 한다는 것은 제시된 존재자를 다른 사람에게 함께 나누어준다는 의미에서 전달이 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진술은 전달하면서 규정하는 제시가 된다.


그런데 진술도 허공에 떠 있는 태도가 아니다. 진술도 언제나 이미 세계-내-존재의 근거 위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도 해석학적 상황이 반복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진술의 예(豫)-구조를 밝혀낸다. 제시, 규정, 전달에는 각각 예지(豫持), 예시(豫視), 예파(豫把)의 예-구조가 대응한다. 이러한 예-구조를 밝혀냄으로써, 하이데거는 진술이 해석에서 파생되었음을 입증한다.


진술은 결코 자발적으로는 존재자를 제시할 수 없다. 진술이 존재자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제시되어야 할 존재자가 이미 이해 안에 개시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조건만으로는 아직 제시에 이르지 못한다. 제시가 가능하려면 진술이 제시하고자 하는 바로 그 개시된 것에 관한 예지(豫持)가 필요하다. 또한 존재자를 규정하기 위해선, 진술되어야 할 것을 향한 방향의 시선도 요구된다. 이러한 일정한 관점에 따라 마침내 존재자의 규정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진술의 예시(豫視)에 해당한다. 예시(豫視)는, 예컨대 망치라는 존재자로부터 그 속에 불명료하게 갇혀 있던 ‘무겁다’라는 술어를 돋보이게 풀어놓는다. 또한 진술이 존재자를 규정하여 타자에게 전달하려면 ‘제시된 것을 의의에 따라 분절하는 것’도 요구된다. 그런데 분절화는 이미 일정한 개념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이 망치는 무겁다.”, 혹은 “무거움은 망치에 속한다.” 등의 진술이 가능하려면 무거움을 망치에 귀속시킬 수 있는 ‘성질’이라는 개념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개념성이 진술의 예파(豫把)에 해당한다.


그러면 진술이 성립하려면 예-구조의 각 요소들에서는 어떤 방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가? 진술은 어느 만큼이나 해석의 파생적 양상이 되는가? 진술에서는 무엇이 변양되는가? 진술은 배시적 해석으로부터 어떤 실존론적-존재론적 변양을 거쳐 출현하는가? 이제 우리는 이런 문제를 해명하고자 한다.


예지(豫持)에서 보유된 존재자는 우선 도구이다. 이런 도구로서의 존재자가 진술의 대상이 되려면 처음부터 ‘예지(豫持) 안에서 일종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이런 전환은 하나의 도구를 그것이 속한 적소 전체성으로부터, 다시 말해, 환경세계성을 구성하는 유의의성으로부터 단절하는 전환이다. 또한 이런 전환을 통해 진술의 예-구조에서의 예시(豫視)는 이제 용재자(用在者)에게서 전재자(前在者)를 겨냥한다. 예시(豫視)는 용재자와 맺던 배려적 관계를 청산하고 전재자를 겨냥하는 관조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조를 통해 용재자는 자연스레 은폐된다. 또한 이러한 관조의 지평에서 예파(豫把)는 전재자를 그것의 존재에서 규정할 수 있는 개념성에 이르는 통로를 열게 된다. 예컨대 예파(豫把)는 ‘성질’ 따위의 개념성에 이르는 통로를 열게 된다. 이로써 마침내 용재자는 이론적 관찰의 대상인 전재자로 변양된다. 실존론적-해석학적 >으로서<의 구조도 전재자를 규정하여 다만 제시할 뿐인 구조로 변양된다. 즉 하나의 도구는 그것이 본래 갖던 도구적 성격을 상실하고 단지 눈앞의 관찰대상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변양을 ‘수평화’(Nivellierung)라고 명명한다.


해석학적 >으로서<가 진술을 통해 변양된 것이 ‘명제적 >으로서<(Apophantisches Als)’이다. 이처럼 변양된 >으로서<를 통해 현존재는 전재자에 관한 진술을 얻게 된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변양된 >으로서<에 해당하는 이름으로 ‘명제적 >으로서<’를 선택한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의 logos apophantikos나 후설의 Apophantik 개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하이데거는 이런 용어 선택을 통해 술어적 진술에 관한 이론적 전통은 단지 세계-내-존재 속에 기초를 둔 현존재의 한 현상을 탐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술의 존재론적 유래는 이해하는 해석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술을 통해 우리는 용재자를 비로소 전재자로서 파악한다. 그러나 진술에서는 어디까지나 해당 용재자 자체만이 도구들의 지시연관으로부터 분리될 뿐, 용재자 전체가 과학적 진술의 대상으로 변양되지는 않는다. 즉 진술은 “이것은 …이다.”라는 형태를 취할 뿐, 과학적 전칭 명제의 형태를 취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진술만으로는 과학적 인식에 이를 수 없다. 과학적 인식은 우리에게 하나의 단계를 더 요구한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단계란 무엇인가? 즉 과학적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은 앞으로 7장 2절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읽기자료]


1. 진술은 일차적으로 제시를 의미한다. 우리가 제시로써 고수하는 것은 ?π?ο?ανσι?[제시, 공람, 언명]로서의 λ?οΥο?의 근원적 의미, 즉 ‘존재자를 그 자신에 입각해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 망치는 너무 무겁다 는 진술에서, [보여지는 존재자를 보는 그] ‘봄’에게 발견되는 것은  의미 가 아니라, 용재성이라는 방식으로 있는 존재자이다.(154, 224)


 


2. 진술은 술어화(述語化)와 같은 뜻이다. 주어에 관해  술어가 진술되고, 주어는 술어를 통해 규정된다. 이런 의미의 진술로 ‘진술되는 것’은, 무릇 술어가 아니라 망치 자신이다. 이와 반대로 진술하는 것, 즉 규정하는 것은 너무 무겁다 에 있다. 진술의 두 번째 의미에서 ‘진술되는 것’ 즉 규정되는 것 자체는 이 명칭의 첫 번째 의미에서의 ‘진술되는 것’[제시]에 비하면 내용상 좁혀진 셈이다. 모든 술어화는 제시로서만 술어화인 것이다. 진술의 두 번째 의미의 기초는 첫 번째 의미에 있다.(154-155, 224)


 


3. 진술은 전달[함께 나눔, 공언], 즉 실토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진술은 첫째 [제시] 및 둘째 [술어화] 의미의 진술과 직접 관계한다. 즉, 진술은 규정한다는 방식으로 제시되는 것을 남들도 ‘함께 보게 함’이다. ‘함께 보게 함’은 피규정성에서 제시되는 존재자를 타자와 함께 나눔[전달]이다. 나뉘어지는  것은, ‘제시되는 것’을 향해 공통적으로 보고 있는 존재이고, 제시되는 것을 향하는 이 존재는 제시되는 것을 만나게 하는 기반인 그 세계 내에서, 즉 세계-내-존재로서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술은 그렇게 실존론적으로 이해된 전달[함께-나눔]이며, 그 진술에 ‘언표성’[언표된다는 성격]이 속한다. 진술되는 것은 전달되는 것으로서 진술자와 타자에 의해 나누어진다[공유된다].(155, 225)


 


진술은 전달하면서 규정하는 제시이다. 남은 문제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진술을 해석의 양식으로서 파악하는가 하는 것이다. 진술이 그런 것이라면, 진술 속에서는 해석의 본질적 구조가 반복되지 않을 수 없다. 진술의 제시는 이해에서 이미 개시되거나 배시적으로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해서 수행된다. 진술은, 그 진술로부터 출발해서 일차적으로 존재자 일반을 개시할 수 있는 허공에 뜬 태도가 아니라, 언제나 이미 세계-내-존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앞에서 세계인식과 관련해서 언급된 것은 진술에 관해서도 타당하다. 진술은 일반적으로 개시된 것에 관한 ‘예지’를 필요로 하거니와, 이 개시된 것을 진술은 규정한다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나아가서 규정하면서 단초를 놓는 데에는 이미 진술되어야 할 것[예 : 망치]을 향해 방향을 연 시선이 놓여 있다. 미리 주어진 존재자[망치]가 무엇을 겨냥해서 조준되는가 하는 그 겨냥 근거[너무 무겁다]는 규정수행에 있어서는 규정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진술은 또 ‘예시’를 필요로 한다. 예시는 말하자면 돋보이게 하고 지시해야 하는 술어['너무 무겁다']를 존재자[망치] 자체 속에 불명료하게 갇혀 있는 상태에서 풀어놓는다. 규정하면서 전달하는 것으로서의 진술에는 그때그때 제시된 것을 의의에 따라 분절하는 것이 속한다. 이 분절화는 다음과 같은 일정한 개념성 안에서 움직인다 : 이 망치는 무겁다, 무거움은 망치에 속한다, 망치는 무겁다는 성질을 갖고 있다. 진술 속에 언제나 함께 놓여 있는 ‘예파’는 대개 눈에 띄지 않는다. 왜냐 하면 언어는 그 때마다 이미 완성된 개념성을 자기 안에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진술은 해석 일반과 마찬가지로 예지, 예시, 예파 속에 필연적으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156-157, 227)


 


그러나 진술은 어느 정도까지 해석의 파생적 양상이 되는가? 진술에 있어서 무엇이 변양되었는가? (…) 어떤 실존론적-존재론적 변양을 거쳐서 진술은 배시적 해석에서 나오는가?(157, 227-228)


 


예지 속에 보유되어 있는 존재자, 예컨대 망치는 우선 도구로서 용재적[用在的]으로 있다. 이 존재자가 진술의  대상 이 되면, 진술의 개시(開始)와 동시에 처음부터 예지 안에서 일종의 전환이 일어난다. 즉, [우리는 용재자[用在者]를 가지고 무엇에 종사하고 무엇을 실행하는 바이지만] 종사하고 실행할 때의 용재적 도구 제시적 진술의 대상이 된다. 예시는 이제 용재자에 있어서 전재자[前在者] 쪽을 겨냥하는 것이다. 이런 관조로 인해 그리고 관조에게는 용재자는 용재자로서는 은폐된다. 이와 같이 용재성[用在性]을 은폐하면서 전재성[前在性]을 발견하는 내부에서는, 만나는 전재자는 ‘이러이러하게 전재적으로 있다’고 규정된다. 이제 비로소 성질 따위에 이르는 통로가 열린다. 진술이 전재자를 그것[예컨대, 성질 등]으로서 규정하는 그것은 전재자 자체로부터 길어내진다. 해석의 ‘으로서-구조’는 하나의 변양을 겪은 것이다. [새로 등장한 이론적 규정을 위한] 으로서 는 이해된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기능에서는, 적소 전체성을 포착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이런 ‘으로서’는 제 지시연관을 분절하는 가능성의 점에서는, 환경세계성을 구성하는 유의의성으로부터는 단절되어 버렸다. 이  으로서 는 전재자만이 갖는 균등한 평면으로 떠밀리고 만다. 그것은 전재자를 규정하면서 ‘단지 보이게 할 뿐’이라는 구조로 전락한다. 이와 같이 배시적 해석의 근원적  으로서 를 전재성을 규정하는  으로서 로 수평화하는 것이 진술의 장기(長技)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진술은 순수한 관조적 제시의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다.(158, 228-229)


 


이리하여 진술의 존재론적 유래는 이해적 해석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배시적으로 이해하는 해석(hermeneia)의 근원적  으로서 를, 진술의 명제적 으로서 와 구별해서, 실존론적-해석학적 으로서 라 부른다.(158, 229)


 


당장 중요한 것은 단지 진술이 해석과 이해에서 파생되었음을 증시(證示)함으로써, logos의  논리학 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 뿌리 박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었다. logos의 해석이 존재론적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곧 고대 존재론을 성장시킨 방법적 기초가 근원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데 대한 통찰도 첨예화한다.(160, 231)


 


(3) 말


(독: Rede, 영: Discourse)


 


말은 정상성 및 이해와 함께 개시성을 등근원적으로 구성한다. 개시성의 세 번째 구조계기가 말이다. 말도 하나의 기초적 실존범주이다. 그런데 말은 정상성 및 이해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시성을 구성한다. 정상성이 피투성에서 현존재의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해가 기투를 통해 현존재의 자기의 존재를 확보한다면, 말은 정상적 이해의 가능성을 분절하는 것이다. 또한 말이 밖으로 언표된 것이 언어이다. 그러기에 언어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는 말이 된다. 이제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상론하고자 한다.


 


[읽기자료]


현의 존재, 즉 세계-내-존재의 개시성을 구성하는 기초적 실존범주는 정상성과 이해이다. 이해는 해석의 가능성, 즉 ‘이해된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가능성을 자기 속에 감추어 가지고 있다. 정상성이 이해와 더불어 등근원적인 한, 정상성은 어떤 이해내용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 정상성에는 [이해가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해석 가능성이 대응한다. 우리는 진술로써 해석의 한 극단적 파생태를 보여준 바 있다. 진술의 제3의 의의를 전달(표명)이라고 밝힘으로써, 우리는 말함과 언명함이라는 개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개념은 아직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나, 그것은 의도적이었다. 이제 비로소 언어를 주제로 삼는 것은, 이 현상[언어]이 현존재의 개시성의 실존론적 틀에 뿌리 박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해서이다. 언어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는 말이다. 말의 현상을 우리는 이제까지 정상성, 이해, 해석, 진술을 해석할 때 이미 끊임없이 사용해 왔으나, 주제적 분석이라는 점에서는 말하자면 건너뛴 셈이다.(160-161, 232)


 


① 말의 기능: 의미 분절


말의 기능을 논의함에 중요한 것은 의의(Bedeutung)와 의미(Sinn)의 구별이다. 우리는 앞서 2장에서 세계의 세계성을 논의할 때 ‘의의’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는 유의의화작용으로 펼쳐지는데, 이 유의의화작용에 의해 용재자(用在者)는 목적과 수단의 계열에 따라 하나 하나 수단으로서의 자신의 의의를 갖게 된다. 따라서 의의란 용재자에게 주어진 ‘현존재의 자기 존재 이해의 내용’으로서 이미 분절될 가능성을 자신 안에 간직한다.


이에 반해 의미란, 앞서 이해의 예-구조를 논의할 때 밝힌 것과 같이, 기투(이해)의 기반이다. 즉 의미란 “어떤 것의 이해 가능성이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그것”이다. 의의가 존재 이해의 내용이라면, 의미는 존재 이해의 가능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해의 기반이다. 따라서 의의와 의미는 서로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의의가 분절 가능성을 갖고 있다면, 의미도 동일하다. 단 의의가 용재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라면, 의미는 오로지 현존재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말에서 분절 가능한 것 자체는 의미가 된다. 말은 이해 가능성의 분절화가 된다. 그러므로 앞서의 논의를 상기해 보자면, 말은 이미 해석과 진술의 근저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존재 이해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완성하기 위해 이해의 가능성으로서의 의미가 이미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를 분절화하는 것이 말인 것이다.


그러나 말이 의미를 분절할 때 결국 분절되는 것은 의의가 된다. 의의와 의미는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내용을 갖는다. 여기에서도 일종의 해석학적 순환구조가 성립한다.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에 의해 용재자에게 의의가 주어졌다면, 또 현존재는 의미를 지평으로 하여 그 의의를 이해한다. 그러니까 말하면서 분절하는 가운데 분절되는 것 자체를 우리는 의의 전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물론 이 의의 전체는 다시 의의로 분해된다. 또한 이 의의로부터 낱말이 생장(生長)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보자면, 의의가 “낱말과 언어의 가능적 존재를 기초지운다.”(87, 129)


 


[읽기자료]


말은 정상성 및 이해와 함께 실존론적으로 등근원적이다. 이해 가능성은 ‘내 것으로 하는’ 해석 이전에 이미 언제나 분절되어 있다. 말은 이 이해 가능성의 분절화이다. 그러므로 말은 이미 해석과 진술의 근저에 놓여 있다. 해석에 있어서, 따라서 더 근원적으로는 이미 말에 있어서, 분절 가능한 것 자체를 우리는 의미라고 했다. 말하면서 분절하는 가운데 분절되는 것 자체를 우리는 의의 전체라 부른다. 이 의의 전체는 여러 의의로 분해될 수 있다. 여러 의의는, 분절 가능한 것이 분절된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의미를 갖게 된다. 즉, 현의 이해 가능성의 분절화가 개시성의 근원적 실존범주이고, 개시성이 그러나 일차적으로 세계-내-존재에 의해 구성된다면, 그 말도 본질상 하나의 특수한 세계적 존재양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내-존재의 정상적 이해 가능성은 스스로를 말로서 발언한다. 이해 가능성의 의의 전체가 낱말이 되어 나타난다. 의의로부터 낱말이 생장(生長)한다. 그러나 낱말이라는 사물이 있다고 해서 의의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161, 232-233)


 


② 말과 언어


하이데거의 언어관은 전통적인 언어관으로부터 철저히 결별한다. 전통적 언어관에서 언어의 존재론적 기초는 인간의 영혼이나 의식의 내부에서 형성된 내면적 표상과 체험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내면적 표상과 체험이 말함의 과정에서 소리로 표현되어 외면적인 것으로 표출된 것이 언어이다.(신상희, 「말과 언어」, 『하이데거의 언어사상』, 철학과 현실사, 1998. 79쪽 참조.) 하지만 하이데거에게서는 언어의 존재론적 기초는 말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은 언어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가 된다. 즉 하이데거는 언어를 실존론적으로 해석한다.


앞서의 논의에서 보았듯, 말은 현존재의 존재 이해 내용, 즉 의의를 분절한다. 그런데 개시성이 일차적으로 세계-내-존재에 의해 구성되는 이상, 말도 본질상 하나의 특수한 세계적 존재 양식을 갖는다. 이 때 세계적 존재 양식이란 공현존재자 사이에서 존립한다. 공현존재자 사이에서 말은 밖으로 언표된다. 밖으로 언표된다는 것은 이른 바 음성화를 포함한다. 이렇게 말이 음성화되어 밖으로 언표된 것이 언어가 된다. 언어는 낱말로 구성된다. 낱말의 전체성이 언어이다. 이러한 언어는 공현존재 사이에서 마치 도구(용재자, 用在者)처럼 사용되기도 하고, 혹은 부서져서 전재적(前在的) 사물처럼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제 언어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가 말인 것은 증명된 셈이다.


 


[읽기자료]


말이 밖으로 언표된 것이 언어이다. 이것이 낱말 전체성이지만, 그 안에서 말은 고유한 세계적 존재를 가지고 있으므로, 낱말 전체성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서 용재자[用在者]처럼 눈에 띄는 것이다. 언어는 부서져서 전재적[前在的] 낱말이라는 사물이 될 수도 있다. 말은 실존론적으로는 언어이다. 왜냐 하면 말이 의의에 좇아서 그의 개시성을 분절하는 그 존재자는, 던져져서  세계 에 의존하는 세계-내-존재라는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61, 233)


 


③ 말의 구조 계기


말이 세계-내-존재의 개시성을 함께 구성하고 있는 한, 말에는 화젯거리 및 이 화젯거리에 대한 이해 내용, 또 그 이해된 내용을 공현존재자 사이에서 함께 나눔, 그리고 그 이해된 내용을 통해 자기를 표명함이 있게 마련이다. 즉 말의 구조 계기는 화젯거리, 말해진 내용 자체, 전달 및 표명으로 구성된다. 이 네 가지는 언어로부터 경험적으로 주어 모은 특성이 아니다. 오히려 이 네 가지는 현존재의 존재 틀에 뿌리 밖은 실존론적 성격이다. 이런 성격이 언어를 존재론적으로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언어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 구조 계기 중 어느 하나에만 정위하였기에 언어에 대한 완전한 정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그만 언어를 그때마다의 단편적인 시각에서 파악하고 말았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말이 현존재의 이해 및 이해 가능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전달의 한 구조 계기로서 말의 또 하나의 실존론적 가능성을 이루고 있는 ‘들음’에 의해 분명해 진다. ‘들음’은 공동 현존재 사이의 실존론적 개방성을 전제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들음’을 음성적 지각과 관련해서만 사고한다. 그러나 ‘들음’에서 결정적인 것은 음성이 아니라 화젯거리에 대한 존재이해의 내용이다. ‘옳게 듣지 않았을 때에는 재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상기해 보라. ‘들음’에서 중요한 것은 화젯거리에 대한 현존재의 존재 이해 내용을 공동 현존재가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러니까 음성의 지각은 ‘들음’에서 이차적 문제이다. 마치 언어의 음성화가 말이 갖는 세계적 성격에 근거하듯이 음향의 지각도 공동 현존재 사이에서 함께 나눔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요청된 도구적 성격에 불과하다. 즉 음성의 지각은 ‘들음’에 근거한다.


더욱이 현존재는 음성을 지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상대방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그의 존재 이해를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앞으로 6장에서 논의 될 양심의 문제이다. 양심은 침묵으로 말하며, 우리는 거기에 묵언으로 답한다. 양심도 말의 한 양상이다. 거기에는 음성이 없다. 양심의 말은 침묵이며, 거기에 대한 우리의 들음은 묵언이다. 침묵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고, 묵언은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침묵이 말의 또 하나의 본질적 가능성이라면, 묵언은 들음의 또 하나의 본질적 가능성이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말을 음성과 관련해서만 사고하는 통속에서 벗어나 말의 본질적 의미를 청종해야 할 것이다.


 


[읽기자료]


말은 현존재의 개시성의 실존론적 틀로서 현존재의 실존을 구성한다. 말하면서 언명하는 데에는 듣는 것 침묵하는 것 가능성으로서 속한다. 이 두 현상에서 실존의 실존[론]성에 대한 말의 구성적 기능이 비로소 완전히 분명해진다. 당장 중요한 것은 말 자체의 구조를 구명하는 일이다.(161, 233)


 


말이란 세계-내-존재의 정상적[情狀的] 이해 가능성을 의의에 좇아서 분절하는 것이다. 말에 속하는 구성적 계기는 말의 화젯거리(말해지는 것), 말해진 내용 자체, 전달 및 표명이다. 이것들은, 단지 경험적으로 언어에서 주어 모은 특성들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 틀에 뿌리 박은 실존론적 성격이며, 이 성격이 언어라든가 하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162-163, 235)


 


 언어의 본질 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이 계기들의 어느 하나에 정위해서 언어를 표현, 상징적 형식, 진술로서의 전달, 체험의 고지(告知) 또는 삶의 형태 등의 이념을 길잡이로 해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들 상이한 여러 규정의 단편들을 절충적으로 주어 모으려고 한다면, 언어에 대한 완전하고 만족할 만한 정의는 얻어질 수 없을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현존재의 분석론에 근거해서, 말의 구조의 존재론적-실존론적 전체를 미리 이끌어내는 것이다.(163, 235)


 


말이 이해 및 이해 가능성과 관련되어 있음은 말 자체에 속하는 하나의 실존론적 가능성, 즉 ‘들음’에 의해 분명해진다. ‘옳게 듣지 않았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들음이 말함을 구성한다. 그리고 언어의 음성화가 말에 근거하듯이, 음향의 지각은 들음에 근거한다.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공동존재로서의 현존재가 타자에 대해 실존론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뿐더러, 듣는 것은 현존재면 누구나 갖고 있는 친구[또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서,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위한 현존재의 일차적이고 본래적인 개방성을 구성한다. 현존재가 듣는 것은 이해하기 때문이다. 타자와 함께 이해하고 있는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는 공동 현존재 및 자기 자신에게 청종(聽從)하고 이 청종성에 있어서 공동 현존재 및 자기 자신에게 귀속된다. (163, 235-236)


 


타자의 말을 분명하게 들을 때에도 우리가 우선 이해하는 것은 말해진 내용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타자와 함께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존재자에 몰입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우선 듣는 것은 음성화를 통해 발음된 것이 아니다. 발음이 불분명하거나 더욱이 외국어의 경우에도, 우선적으로 우리가 듣는 것은 이해되지 않은 낱말이지 다양한 음향자료가 아니다.(164, 236-237)


 


그와 마찬가지로, 대답으로서의 응대도 우선 공동존재 속에서 이미 나누어져 있는 화젯거리에 대해 이해할 때 곧장 나오는 것이다.(164, 237)


 


말의 또 다른 하나의 본질적 가능성, 즉 침묵도 동일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서로 말하는 가운데 침묵하는 자는 끝없이 지껄이는 자보다 더 본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즉 이해내용을 마무리할 수 있다. 어떤 것에 관해 수다를 떤다고 해서 이해내용을 증진시킨다는 보증은 아무 데도 없다. 반대로, 쓰잘 데 없이 지껄이는 것은, 이해된 것을 거짓 명료성 속으로, 즉 상투적 몰이해성 속으로 은폐한다. 침묵은 벙어리가 아니다. (…) 진정하게 말하는 가운데에서만 본래적으로 침묵할 수 있는 것이다.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존재는 말해야 할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 자신을 본래적이고 풍부하게 마음대로 개시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 묵언(默言)은 [事象을] 밝혀내고 빈 말[空談]을 억제한다. 묵언은, 말함의 양상으로서, 현존재의 이해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분절하기 때문에, 그 묵언에서부터 진정한 ‘들을 수 있음’과 투명한 상호존재가 생기는 것이다.(164-165, 237-238)


 


현의 존재, 즉 정상성과 이해를 구성하는 것은 말이고, 한편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현존재는 말하는 내-존재라고 이미 표명된 바 있다. 현존재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일상적 실존을 주로 서로서로 말하는 데로 옮겨 놓았고, 동시에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철학 이전의 현존재 해석이나 철학적 현존재 해석에서 인간의 본질을 zoon logon echon[말을 가진 동물]이라고 규정한 것은 우연한 일일까? 인간에 관한 이 정의를 후세에서는 animal rationale[합리적 동물], 즉 ‘이성적 생물’이라고 해석하였으나, 그 해석은 틀린 것은 아니로되, 현존재에 관한 이 정의가 얻어진 현상적 지반은 은폐되고 말았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자로서 자기를 드러낸다. 이것은 현존재에게는 소리로 발성할 가능성이 고유하게 있다는 뜻이 아니며,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세계와 현존재 자신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있다는 뜻이다.(165, 238)


 


2) 일상적 개시성


우리는 세계-내-존재의 개시성, 즉 현-존재의 현을 구성하는 실존론적 구조를 해명하였다. 이러한 현의 실존론적 구조는 현존재의 실존이 거기에 따라 이루어지는 근본적 형식적 구조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현존재 분석론의 단초인 구체적 현존재의 일상성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현존재가 피투적 세계-내 존재로서 우선은 세인의 공공성 속에 던져져 있다면, 우리에게는 세인의 개시성이 갖는 실존론적 성격을 가시화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러한 작업은 “순수하게 존재론적 의도를 가지고 있을 뿐 일상적 현존재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나 >문화철학적< 야망과는 거리가 멀다”(167, 241)


 


(1) 빈 말


(한: 空談, 독: Gerede. 영: Idle Talk)


 


말은 언어이다. 정확히 말하면, 언어는 말이 언표된 것이다. 언표된 말은, 세계의 이해 및, 이와 등근원적으로, 타자의 공동 현존재와 그때 그때의 자기의 고유한 존재에 대한 이해를 보존한다. 언표된 말은 현존재가 주변세계의 존재자 및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의미 지평이다. 따라서 언표된 말로서의 전달은 듣는 자가 말의 대상(das Beredete, Worüber der Rede)을 향해 개시된 존재에 참여할 것을 겨냥한다.


그러나 이미 일상적 공공성 안에 던져져 있는 세인은 말의 대상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는 존재에 이르지 못한 채, ‘이야기되고 있는 것’(혹은 이야깃거리)(das Geredete)만을 듣게 된다. 이로써 말은 그것이 언급하는 대상(즉 존재자)과의 일차적 관계를 상실한다. 말은 자신의 근거를 상실한 채, 확대되고 모방됨으로써 빈 말(Gerede)이 된다. 빈 말은 근거를 상실한 말의 일상적 양상이다. 빈 말이 일상적 현존재의 평균적 이해를 구성한다. 따라서 일상적 현존재에게는 말이 언급하는 존재자를 근원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하는 방식이 폐쇄된다. 빈 말에 의한 피해석성은 자명성과 자기 확신을 통해 일상적 현존재의 존재이해를 지배한다. 빈 말은 뿌리뽑힌 일상적 현존재가 갖는 이해 내용의 존재양식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자신의 개시성이 정상적(情狀的)으로 이해하는 말에 의해 구성된 존재자 즉 현존재만이 그런 뿌리 뽑힘의 가능성을 갖는다.


 


[읽기자료]


말은 현존재의 본질적 존재 틀에 속하고 현존재의 개시성을 함께 구성하지만, 그 말은 또한 빈 말이 되고, 빈 말로서는 세계-내-존재를 분절된 이해 안에 개방하기는커녕 도리어 폐쇄해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은폐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169, 243-244)


 


현존재 속에는 그 때마다 이미 빈 말에 의한 피해석성이 뿌리 박고 있다. … 공공적 피해석성의 지배는, 기분적으로 규정될 제 가능성까지도, 즉 현존재가 자기를 세계에 몰입시킨다는 근본양식까지도 이미 결정하고 있다. 세인은 정상성의 윤곽을 미리 그리고 있어서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를 규정한다.(169-170, 244)


 


빈 말은 상술한 방식으로 폐쇄하지만, 그 빈 말은 뿌리 뽑힌 현존재의 이해내용의 존재양식이다. … 이것은 존재론적으로는, 빈 말 속에 자기를 유지하고 있는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세계, 공동 현존재 및 내-존재 자체에 대해 일차적이고 근원적이고 진정한 존재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일종의 부동상태(浮動狀態) 속에 자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언제나 세계에 몰입해서, 타자와 더불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관계하고 있다. 그의 개시성이 정상적으로 이해하는 말에 의해 구성되는 그런 존재자, 즉 이런 존재론적 틀 속에서 그의 현이고 세계-내 존재인 그런 존재자만이, 그런 근절[뿌리뽑힘, 근거상실]이라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상실은 현존재의 비존재를 형성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존재의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끈질긴 실재성을 형성한다.(170, 244-245)


 


(2) 호기심


(한: 好奇心, 독: Neugier, 영: Curiosity)


 


예로부터 인식은 >보려는 욕망<에 의거해 파악되었다. “모든 사람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물론이거니와,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는 존재는 순수한 직관적 인지 속에서 제시된다라는 봄(視)의 우위를 입증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욕망에 관한 해석이 말해주듯, 봄(視)은 단지 눈의 지각에만 한정되지 않고 청각, 후각, 미각, 촉감 등 인간의 모든 감각적 경험을 포괄한다. 그래서 감각 경험은 일반적으로 >눈의 욕망<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앞서 이해에 대한 논의에서 밝혔듯, 봄(視)이 인간 현존재와 존재자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일차적 관계일 수 없다. 오히려 봄(視)은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현존재의 개시성, 즉 달리 말하자면, 현존재의 밝음(Lichtung) 안에 정초된다. 봄(視)이란, 배려의 둘러 봄[配視] 혹은 고려의 돌봄[顧視]에서 그렇듯, 봄(視)에 접근해 오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 자체에 즉해 은폐하지 않고 만나게 함을 의미한다. 즉 봄(視)이란 현존재가 이해를 통해 개시된 자신의 본질적 가능성에 따라 그때마다의 존재자를 진정 자기의 것으로 취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에게서 봄(視)의 근본 틀은 호기심이라는 독특한 존재경향에서 드러난다.


호기심을 타우마제인(taumazein, 경이)과 혼동해서는 않된다. 타우마제인이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관찰하는 것이라면, 호기심은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그것의 노선, 수단, 올바른 기회, 적합한 순간을 부여하는 배시가 그것의 본연의 성격을 상실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일상적 현존재가 휴식을 취할 때 세계-내-존재로서의 자신을 벗어나 멀고 낯선 세계를 지향할 때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러기에 호기심의 본질성격은, “가장 가까운 것에는 특수하게 머무르지 않음”, “산란함(혹은 부산함)”, “무정주성(無定住性)”으로 구성된다. 호기심은 자신의 근거를 상실한 일상적 현존재의 개시성을 구성하는 새로운 존재양식이다.


빈 말이 말의 일상적 존재양상이라면, 호기심은 봄(視)의 일상적 존재양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말은 정상성 및 이해와 더불어 현존재의 개시성을 등근원적으로 구성하는 차원이고 이에 반해 봄(視)은 이해에 의해 실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므로, 빈 말이 호기심의 진로를 구성한다. 그러나 여하튼 빈 말과 호기심은 상호 관련을 맺으면서 일상적 현존재에게 거짓된(비본래적인) 인생을 안겨준다.


 


[읽기자료]


[배시로부터] 자유로워진 호기심은 ‘보려고’ 배려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여진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즉 보여진 것에 이르는 존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보기만을 위해서인 것이다. 호기심은 새 것만을 찾는데, 그것은 새 것에서 새로운 새 것으로 뛰어 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보려고 하는 마음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는 것도, 지적으로 진리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세계에 내맡기는 제 가능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호기심은 가장 가까운 것에는 특수하게 머무르지 않는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172, 248)


 


그리하여 또 호기심이 찾는 것은, 관찰하면서 머무르기 위한 여가가 아니라, 새 것이나 만나는 것을 늘 바꿈으로 해서 생기는 초조와 흥분이다. 아무 곳에도 머무르지 않음으로 해서, 호기심은 산란함의 부단한 가능성을 배려한다. 호기심은 존재자를 경탄하면서 관찰하는 것, 즉 thaumazein[경이]과는 무관하다. 호기심에게 중요한 것은 경이를 통해 무이해[무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이 배려하는 것은 하나의 앎, 그러나 단지 알아두기 위한 앎인 것이다.(172, 248)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려된 환경세계에 머무르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란함이, 이 현상의 제3의 본질성격의 기저를 이루는데, 우리는 이것을 무정주성(無定住性)이라 부른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그러나 어디에도 없다. 세계-내-존재의 이런 양상은, 일상적 현존재가 부단히 뿌리 뽑혀 있다는 새로운 존재양식을 드러낸다.(172- 173, 248-249)


 


빈 말은 호기심의 진로도 지배한다. 즉, 빈 말은 사람들이 읽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고, 보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뇌까린다. ‘도처에 있으면서 아무데도 없는’ 호기심은 빈 말에게 맡겨져 있다. 말과 봄의 두 일상적 존재양상[빈 말과 호기심]은 다 같이 뿌리 뽑혀 있다는 경향에 있어서 단지 나란히 전재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의 존재방식은 타방의 존재방식을 잡아끈다. 감추어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호기심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빈 말은 자신에게, 즉 그렇게 존재하는 현존재에게, 거짓으로 진정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생을 보장한다.(173, 249)


 


(3) 애매성


(한: 曖昧性, 독: Zweideutigkeit, 영: Ambiguity)


 


애매성이란 낱말 그대로 진정한 이해가 불분명한 경우를 의미한다. 애매성의 지배를 받는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무책임하게 얼버무리거나 혹은 상황을 회피한 채 도리어 화를 내기도 한다. 애매성은 현존재의 진정한 자기 이해를 가로막을 뿐더러, 그로 인해 일상적 현존재 상호간의 존재도 호의라는 가면을 쓴 반목을 연출한다. 그런데 애매성은 개별적 현존재로부터 비로소 환기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 현존재의 개시성이 빈 말과 호기심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면, 일상적 현존재의 제 가능성을 기투하고 제시하는 양식 속에 이미 애매성이 뿌리 박고 있음은 당연지사다.


애매성은 일상적 현존재의 개시성을 성격짓는 제3의 현상이다. 빈 말, 호기심, 애매성은 서로 작용하며 일상적 현존재의 개시성을 구성한다. 한편으로는 애매성이 빈 말과 호기심의 지배를 더욱 부추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빈 말과 호기심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 상호존재 자체 속에 애매성은 이미 놓여 있다. 빈 말, 호기심, 애매성의 상호 관련이 일상적 현존재의 피해석성을 구성한다. 그러나 빈 말과 호기심은 물론, 애매성도 공공적으로는 은폐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에 대해 지고 있는 책임있는 관계를 몰각한 채 이렇듯 빈 말, 호기심, 애매성에 의해 해석되어 있다는 지적에 대해 언제나 반발한다.


 


[읽기자료]


공공적 피해석성이 가진 애매성은 앞질러 가는 숙덕거림이나 호기심에 예감을 본래의 사건이라고 참칭하고, 실지의 실행과 행위는 추후적인 것 및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낙인을 찍는다. 그러므로 세인으로서의 현존재의 이해는 자기를 기투함에 있어, 진정한 존재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항상 자기를 잘못 보고 있다. 현존재는 현, 즉 ‘상호존재의 공공의 개시성’ 바로 거기에서는 언제나 애매하게 존재한다. 거기란 가장 목청 높은 빈 말과 가장 영리한 호기심이 영업을 진행시키는 곳이며, 일상적으로는 만사가 일어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174, 251)


 


이 애매성은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호기심이 찾는 것을 슬며시 건네주고, 빈 말에게는 마치 빈 말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듯한 가상을 부여한다.(174, 251)


 


세인이라는 존재양식을 가진 상호존재는 서로 떨어져서 무관심하게 나란히 있는 것이 전혀 아니고, 애매하게 긴장하여 서로 살피는 것이고, 남몰래 서로 엿듣는 것이다. 호의라는 가면을 쓰고 반목을 연출하고 있다.(175, 251-252)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애매성은 위장과 왜곡을 명시적으로 의도하는 데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 개별적 현존재로부터 비로소 환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매성은 하나의 세계 속에 던져진 [피투적] 상호존재 자체 속에 이미 놓여 있다. 그러나 공공적으로는 애매성은 곧 은폐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상의 해석이 세인의 피해석성이라는 존재양식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대해 언제나 저항할 것이다. 이 현상들[빈 말, 호기심, 애매성]에 대한 설명을 세인의 찬성을 얻어서 확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175, 252)


 


(4) 퇴락


(한: 頹落, 독: Verfallen, 영: Falling)


 


우리는 흔히 퇴락(das Verfallen)을 >인간본성의 타락< 정도로 해석한다. 그러나 현존재 분석론에서 논의되는 퇴락은 도덕적 타락과 무관하다. 오히려 퇴락은 도덕적 타락을 범했다 혹은 안 범했다라는 진술 이전의 “존재론적 운동개념”(180, 258)이다. 퇴락이란 자신의 >현<, 즉 개시성이 빈말, 호기심, 애매성에 의해 구성되는 일상적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락한 채 우선 대개 배려된 >세계<속에 몰입해 살아감을 의미한다. 퇴락은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 존재론적 구조”(179, 258)이다.


이런 의미에서 퇴락은 현존재의 비본래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락하였다고 해서, 마치 일상적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여 실제로(혹은 본래적으로) 없기나 한 것처럼, 혹은 더 이상 세계-내-존재가 아닌 것처럼, 해석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퇴락은 “세계-내-존재의 한 실존론적 양상“(176, 254)이다. 즉 퇴락, 다시 말해 비본래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락한 채 >세계<와 세인 속에 완전히 함몰된 “두드러진 세계-내-존재”로서, 즉 일상적 현존재의 “적극적 가능성”으로서,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176, 253)이다.


퇴락적 삶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일상적 현존재는 빈 말을 주고받고 호기심 어린 눈을 번들거리며 온갖 것을 애매하게 얼버무려 자위한다. 자신에 대한 책임을 알게 모르게 벗어 던졌을 때, 그때의 홀가분함만큼 무엇이 더 유혹적일까? 그 뿐 아니다. 퇴락적 세계-내-존재는 그러한 유혹감 속에서 만사형통이라는 위안감마저 마련한다. 그런데 이러한 위안은 우리가 통상 말하는 위안이 아니다.


퇴락적 삶의 유혹과 위안은 오히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퇴락을 고조한다. 고조는 소외를 낳는다. 퇴락은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으로부터 현존재를 소외시킨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는 소외를 소외로서 알지 못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소외에 눈멀어 오히려 소외에 사로잡힌다. 일종의 자승자박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동성(動性)<은 전락(轉落)이다. 자신의 근거를 상실한 현존재는 일상적 무지반성과 공허함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는 이렇게 허덕이는 삶의 진실을 모르고 있다. 오히려 일상적 현존재는 퇴락적 삶을 자신의 고양된 본래적 삶의 모습으로 착각한다. 그러니까 퇴락의 >동성(動性)<은 세인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소용돌이가 된다.


퇴락은 세계-내-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이다. 그러나 이 뿐 아니다. 퇴락은 일상적 현존재의 피투성을 규정한다.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존재하는 한, 그는 이미 세인의 비본래성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다. 퇴락적 피투성은 현존재의 현사실성이다.


퇴락은 현존재의 실존의 비본래적 양상이다. 하지만 현존재가 퇴락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자신의 세계-내-존재가 문제되었기 때문이요, 따라서 퇴락에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내-존재-가능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렇기에 소위 본래적 실존도 퇴락적 일상성 위에 떠 있는 부유물이 아니라 퇴락적 일상성의 실존적 변양이다. 그러므로 퇴락이야말로 현존재의 일상성을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구성하는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 존재론적 구조가 된다.


 


[읽기자료]


빈 말, 호기심 및 애매성은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자기의 현, 즉 세계-내-존재의 개시성으로 있는 방식을 성격짓는다. 이 세 성격은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성이므로 [사물적으로] 전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를 함께 구성하고 있다. 이 세 성격과 그것들의 존재적 연관에서 일상성의 존재의 한 근본양식이 드러난다. 그것을 우리는 현존재의 퇴락이라고 부른다.(175, 252)


 


퇴락이라는 명칭은 소극적 평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우선 대개 배려된 세계에 몰입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 ‘… 에 몰두한다’는 것은 대개 세인의 공공성 속으로 상실되어 있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존재는 본래적 자기 존재 가능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락해서, 우선 언제나 이미 세계 속에 퇴락해 있다. 세계 속에 퇴락해 있다 함은 상호존재가 빈 말, 호기심 및 애매성에 이끌리는 한, 그 상호존재 속에 몰두해 있음을 뜻한다.(175, 252-253)


 


우리가 현존재의 비본래성이라고 부른 것은, 이제 퇴락의 해석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규정된다. 그러나 비-본래적이라거나 본래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마치 현존재가 이런 존재양상을 취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상실하기라도 하는 듯이 본래적으로 없다는 뜻이 아니다. ‘비본래성’은 ‘이제 세계-내-존재가 아니다’ 따위를 의미하지 않고, 두드러진 세계-내-존재, 즉 세계와 세인 속에 있는 타자인 공동 현존재에 의해 완전히 함몰되어 있는 그런 세계-내-존재를 형성한다. ‘자기 자신으로 있지 않음’은 본질상 ‘배려하면서 세계 속에 몰두하는’ 존재자의 적극적 가능성으로서 기능한다. 이 [자기 자신으로] 있지 않음은 현존재가 대개 자기를 유지하고 있는,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175-176, 253)


 


현존재 자신이, 빈 말과 ‘공공적 피해석성’ 속에서 자기를 세인 속에 상실하거나 지반상실로 퇴락할 가능성을 자기 자신에 미리 제공한다면, 이는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퇴락에로의 부단한 유혹’을 준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계-내-존재는 그 자체로 유혹적이다.(177, 255)


 


완전하고 진정한 삶을 기르고 이끈다는 세인의 억측이, 만사는 최상의 질서 가운데 있고 따라서 모든 문은 열려 있다는 위안을 현존재 속에 끌어들인다. 퇴락하는 세계-내-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위안적이다.(177, 255)


 


그러나 비본래적 존재 속에 있는 이런 위안은 정지나 무위(無爲)로 유혹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제지를 모르는 영업으로 몰아넣는다. 세계에 퇴락한 존재는 이제 쉬게 되지 않는다. 유혹적인 위안은 퇴락을 고조한다. (…) 이렇게 위안에 빠져서 만사를 이해하면서 자기를 만사와 비교하는 가운데 현존재는 소외에 내몰리게 되거니와, 소외 속에서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이 현존재에게 은폐된다. 퇴락하는 세계-내-존재는 유혹적-위안적이면서 동시에 소외적이다.(177-178, 255-256)


 


이 소외는 현존재에게 그의 본래성과 가능성을 - 설사 이 가능성이 진정한 좌절의 가능성에 불과하더라도 - 폐쇄하지만, 소외는 현존재를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자기의 비본래성, 즉 자기 자신의 가능한 한 존재양식 속으로 몰아 넣는다. 퇴락의 유혹적-위안적 소외는 그 고유한 동성에 있어서 현존재가 스스로 자신 속에 사로잡히는 데까지 이르게 한다.(178, 256)


 


상술한 유혹, 위안, 소외 및 스스로 사로잡힘(자승자박)의 현상들은 퇴락의 특수한 존재양식의 성격이다. 우리는 현존재 자신의 존재 속에서의 현존재의 이러한 동성을 전락(轉落)이라 부른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 속으로, 즉 비본래적 일상성의 무지반성과 공허함 속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 전락은 공공적 피해석성으로 인해 현존재에게는 은폐된 채로 있어서, 도리어 전락이 상승이나 구체적 생활로서 해석되곤 한다.(178, 256-257)


 


이와 같이, 본래성으로부터 부단히 이탈하면서도 언제나 본래성을 참칭하는 것은, 세인 속으로 끌어넣는 것과 하나가 되어 퇴락의 동성을 소용돌이로서 성격짓는다.(178, 257)


 


퇴락은 세계-내-존재를 실존론적으로 규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소용돌이는 동시에 피투성이 가진 던짐의 성격과 동성의 성격을 드러낸다. 이 피투성은 현존재의 정상성 속에서 현존재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다. 피투성은 단순한 기성 사실이 아닐 뿐 아니라, 완결된 [현존재적] 현사실도 아니다. 현존재적 현사실의 현사실성에는,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존재하는 던져져 있다는 것, 그리고 세인의 비본래성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 속해 있다. 피투성 속에서는 [현존재적] 현사실성이 현상적으로 보여지거니와, 그 피투성은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이 존재 자체가 문제되는 현존재에 속한다. 현존재는 현사실적으로 실존한다.(179, 257)


 


하지만 우리가 현존재의 존재를 이제까지 제시한 세계-내-존재라는 틀 속에 붙잡아 둔다면, 퇴락은 이 내-존재의 존재양식으로서 도리어 현존재의 실존성을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 증명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퇴락에서도 문제되는 것은, 비록 비본래성이라는 양상에서일망정, 세계-내-존재-가능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현존재가 퇴락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이해하는-정상적 세계-내-존재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본래적 실존은 퇴락하는 일상성 위에 떠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며, 실존론적으로는 단지 이 일상성의 변양된 파악에 불과하다.(179, 258)


 


퇴락의 현상은 현존재의 어떤  어두운 면  따위, 가령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천진스런 외관을 보충하는 데 이바지할 수도 있는, 존재[자]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성질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퇴락은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 존재론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 구조는 어두운 면을 규정하기는커녕 도리어 현존재의 매일매일을 모두 그 일상성에서 구성한다.(179, 258)


 


그러므로 실존론적-존재론적 해석은 인간본성의 타락에 대해 어떤 존재[자]적 발언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필요한 증명수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문제성이 타락했다 안했다 하는 진술 이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퇴락은 하나의 존재론적 운동 개념이다. 과연 인간이 죄에 빠져 있고 status corruptionis[타락상태]에 있는지, status integritatis[무구의 상태]에서 놀고 있는지, 아니면 status gratiae[은총의 상태]라는 중간단계에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존재적으로는 결정하는 바 없다.(179-180, 258)


 


5. 현존재의 존재: 마음씀


1) 불안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존재에 육박하기 위해 불안이 탐구된다. 퇴락은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로부터의 도피이다. 퇴락에서는 현존재의 본래적 자기의 존재가 폐쇄된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는 현존재에 관한 존재자적-실존적 성격규정이다. 우리는 존재자적-실존적 성격규정과 존재론적-실존론적 해석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존재론적-실존론적 차원에서 보자면, 이러한 폐쇄성은 오히려 개시성의 결여태일 뿐이다. 현존재가 “자기 앞에서 도피할 수 있는” 것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본질적으로 자기에 속하는 개시성 일반을 통해 자기 자신과 직면하는 한에서”(185, 267)다. 그런데 현존재가 본래적 자기에게 다가설 가능성은 자기를 개시하는 정상성(情狀性)이 근원적일 수록 그만큼 더 높아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본적 정상성인 불안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불안의 현상을 불안의 대상, 불안의 이유, 그리고 불안해함 자체로 나누어 해명하고자 한다.


불안은 두려움과 비교된다. 두려움의 대상은 그때마다 일정한 방역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세계내부적 존재자다. 그런 존재자는 유해하긴 하나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안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불안의 대상은 우리가 세계 속에서 만나는 어떤 특정한 존재자가 아니다. 세계내부적 존재자, 즉 용재자(用在者)나 혹은 전재자(前在者)는 불안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무(無)가 된다.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던, 적소 전체성 혹은 유의의성으로서의 세계는 불안 속에서 그 의의를 상실한다. 이렇게 기존의 의의를 상실한 세계 앞에서 우리는 불안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는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므로, 불안의 대상은, 이렇게 그 의의를 상실한 세계 안에 살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 즉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불안의 대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이러한 무가 전적인 무(無)를 의미하진 않는다. “우리가 불안해한다는 것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몽땅 마치 썰물처럼 밀려가고 거기에 텅 빈 허공이 입을 벌리고 있어서 거기에 대해 으스스한 정상성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를 엄습했던 불안은 어느 순간 씻은듯이 사라지기도 한다.”(소광희 [2003], 129-130쪽) 그리고 그 순간 오히려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무의의성을 근거로 하여 세계가 세계로서 단독적으로 솟구쳐 오른다. 즉 “그때 물안개 걷힌 뒤에 산천경계(山川境界)가 아스라이 드러나듯이 그렇게 세계가 드러난다. 즉 불안을 통해 세계가 세계로서 개시된다. 불안을 통해서 세계는 오히려 단독적으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소광희 [2003], 130쪽)


그런데 현존재가 불안해하는 까닭은 현존재가 지닌 어떤 특정한 존재가능성 때문이 아니다. 불안 속에서는 현존재가 >세계< 및 ‘공공적 피해석성’으로부터 자기를 이해할 가능성은 박탈된다. 오히려 불안의 이유는 바싹 압박해 오는 세계 속에 살아가는 자기의 존재가 된다. 불안의 이유는 세계-내-존재이다. 때문에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이제, 퇴락적 삶 속에 벗어나 그 동안 망각해 왔던 자기의 본래적 존재에 비로소 직면한다. 불안은 현존재가 단독화된 자로서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이르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 앞에서, 세계-내-존재 때문에 불안하다. 불안의 대상과 불안의 이유는 동일하다. 좀더 근원적으로 보자면, 불안함 자체는 세계-내-존재의 근본양식이다. 불안으로 인해, 현존재는 세인 속에서 상실되었던 본래적 자기를 만나게 된다.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본래적 자기에게 직면한다. 불안은 현존재가 본래 누구인가를 드러내주는 근본 정상성(根本 情狀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가능성이지, 실존적 현상은 아니다.


근본 정상성으로서의 불안 속에서는 현존재가 살고 있던 기존의 세계가 해체된다. 현존재가 몰입하던 세계는 그 모든 의의를 상실한다. 무화(無化)된 세계 속에 내동댕이쳐진 현존재는 >으스스함<의 젖게 된다. >으스스함<은 타성에 빠져 있던 현존재가 삶의 모든 기준과 토대를 잃었을 때 겪는 >안절부절함<이다. 그래서 일상적 현존재는 대개의 경우 불안으로부터 도피한다. 즉 일상적 현존재는 불안의 기분인 >으스스함<으로부터, 다시 말해 >안절부절함<으로부터 도피한다. 이러한 도피의 결과 일상적 현존재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하며 세인 속에서 편안한 자신감과 자명한 >느긋함<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모습은 본래적 자기로부터 뿌리뽑힌 일상적 현존재의 퇴락적 삶의 모습이다. 퇴락 속에서 불안의 흔적은 지워진다. 불안은 기껏해야 세계내부적 존재자 앞에서의 두려움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두려움은 비본래적 불안이다.


>세계<에로 퇴락하여 공공성에 의거해 자기를 이해하는 일상적 현존재에게 >본래적< 불안은 아주 드물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실존론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현존재가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에서 자기의 본래적 존재를 찾을 수 있음을 입증한다. 불안 속에서 >단독적 자기<로서 우뚝 선 현존재는 자신이 걸어왔던 퇴락적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본래성과 비본래성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직시한다. 즉 현존재는 불안의 기분 속에서 이제 일상적 친숙함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에 서게 된다.


근본 정상성으로서의 불안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은 우리에게 현존재의 구조 전체성의 존재를 해명할 현상적 지반을 마련해준다. 분명히 일상적 현존재는 퇴락적 삶을 살고는 있지만, 불안은 일상적 현존재에게 본래적 자기를 회복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니까 현존재의 구조 전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비본래적 실존과 본래적 실존을 모두 아우르는 근본적인 틀이 요망된다.


 


[읽기자료]


세계 내부에서 용재적[用在的]으로나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불안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세계 내부적으로 발견되는 용재자[用在者]와 전재자[前在者]의 적소성[適所性] 전체는 그 자체로서 중요하지 않다. 그 적소성 전체는 스스로 붕괴된다. 세계는 완전한 무의의성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불안 속에서는 위협적인 것으로서 적소성을 가질 수 있는 이것이나 저것을 만나지 못한다.(186, 269)


 


바싹 압박해 오는 것은 이것저것이 아니고, 모든 전재자[前在者]를 총계로서 모은 것도 아니며, 용재자[用在者] 일반의 가능성, 즉 세계 자체이다. (…) 그러나 세계는 존재론적으로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에 속한다. 따라서 불안의 대상으로서의 무, 즉 세계 자체가 드러난다면, 이는 불안이 스스로 불안해하는 그 불안의 대상은 세계-내-존재 자체임 의미한다.(187, 270)


 


불안의 대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세계 내부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다’는 이 도발성은 현상적으로는 불안의 대상은 세계 자체임을 의미한다.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다’에서 표명되는 이 완전한 무의의성은 세계부재(世界不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그 자체로서 완전히 중요하지 않으므로 이 세계 내부적인 것의 무의의성을 근거로 해서 세계가 그 세계성에 있어서 단독적으로 솟구쳐 오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186-187, 269-270)


 


불안해한다는 것이 근원적 직접적으로 세계를 세계로서 개시한다. (…) 불안이 심정성의 양상으로서 제일 먼저 세계를 세계로서 개시한다.(187, 270)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그 이유는 현존재의 특정한 존재양식과 가능성이 아니다. [불안의] 위협은 그 자신 무규정적이며, 그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이 또는 저 존재 가능을 겨냥해서 위협하면서 밀치고 들어올 수는 없다.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이유는 세계-내-존재 자체이다.(187, 270)


 


불안은, 퇴락하면서 세계 및 ‘공공적 피해석성’에 의거하여 자기를 이해할 가능성을 현존재로부터 박탈한다. 불안은 현존재가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그것, 즉 현존재의 ‘본래적 세계-내-존재-가능’을 향해 현존재를 되던진[逆投한]다. (…) 그러므로 불안해하는 그 이유를 가지고, 불안은 현존재를 가능 존재로서, 더욱이 단독화 속에서 단독화된 자로서,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자로서 개시한다.(187-188, 271)


 


불안이 현존재 속에 분명하게 드러내 놓은 것은, 현존재가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 즉 그는 자기 선택과 자기 포착의 자유를 향해 열려 있다 것이다. 불안은 현존재로 하여금 그의 ‘… 를 향해 열려 있음‘(propensio in … ; 자유존재)에, 즉 언제나 이미 그 자신으로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자기 존재의 본래성에 직면하게 한다.(188, 271)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그 이유는, 그것 앞에서 불안해하는 그것, 즉 세계-내-존재로서 드러난다. 불안의 대상과 불안의 이유의 이 자기 동일성은 그뿐 아니라 불안해하는 것[불안함] 자체에까지 연장된다. 왜냐 하면 불안해하는 것[불안함]은 정상성[情狀性]으로서 세계-내-존재의 한 근본양식이기 때문이다.(188, 271)


 


불안은 현존재를 solus ipse(단독적 자기)로서 단독화하고 개시한다. 그러나 이 실존론적 유아론(唯我論)은 고립된 주관이라는 것을 무세계적(無世界的) 사건의 아무렇지도 않은 한 공허함 속에 옮겨놓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현존재를 극단적 의미에서 막바로 세계로서의 자기 세계에 직면시키고, 이와 함께 현존재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에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불안은, 근본 정상성으로서,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개시한다.(188, 271-272)


 


불안 속에서는 사람은 으스스하다. 이 으스스하다에서 우선 나타나는 것은, 현존재가 불안 속에 있을 때의 특유의 무규정성, 즉 [불안거리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으스스함이란 동시에 [마음이] 안절부절함을 가리킨다. (…) [그러나] 세인은 편안한 자신감과 자명한 느긋함을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 속에 끌어들인다.(188, 272)


 


이제 도피로서의 퇴락이 무엇 앞에서의 도피인지 현상적으로 분명해진다. 그것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 앞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바로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의 도피이다. 배려는 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해서, 세인 속에 망실되어, 편안한 친숙 속에 안주(安住)할 수 있다. 공공성의 느긋함 속으로 퇴락하는 도피는 안절부절, 즉 으스스함 앞에서의 도피이다.(189, 272-273)


 


현존재가 으스스함을 이해하는 일상적 양식은, 퇴락하면서 안절부절을 지워버리는 이탈이다. 그러나 (…) 그 본질적 현존재 틀에는 근본 정상성으로서의 불안이 속해 있다. 편안하고-친숙한 세계-내-존재는 현존재의 으스스함의 한 양상이며, 그 역이 아니다.(189, 273)


 


불안이 언제나 이미 세계-내-존재를 잠재적(latent)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내-존재는 세계에 몰입해서 배려하는 정상적[情狀的] 존재로서 두려워할 수 있다. 두려움은 세계에 퇴락한 비본래적 불안이며, 그 자신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불안이다.(189, 273)


 


그래서 으스스하다는 기분은 현사실적으로는 대개 실존적으로 이해되고 있지 않다. 더구나 퇴락과 공공성이 우세할 경우에는 본래적 불안은 아주 드문 일이다.(190, 273-274)


 


그러나 불안현상이 현사실적으로 드물다 하더라도, 이 현상으로부터 실존론적 분석론을 위해 원칙적 방법적 기능을 떠맡을 자격을 뺏을 수는 없다. 반대로  이 현상이 드물다는 것은, 세인의 공공적 피해석성으로 인해 대개 자기의 본래성을 은폐한 채로 있는 현존재가 근본 정상성[불안]에 있어서 근원적 의미로 개시될 수 있음을 가리키는 한 지표(指標)인 것이다.(190, 274)


 


불안에는 두드러진 개시 가능성이 있다. 불안은 단독화하기 때문이다. 이 단독화는 현존재를 퇴락으로부터 되돌려 와서,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그의 존재의 두 가능성으로서 그에게 분명하게 해준다. 그 때마다 나의 현존재인 그 현존재의 두 근본 가능성은, 불안 속에서 현존재가 우선 대개 매달려 있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통해 왜곡되는 일없이, 그대로의 가능성으로서 드러난다.(190-191, 275)


 


2) 마음씀


현존재의 기초적 존재론적 성격은 “실존성(Existenzialität), 현사실성(Faktizität), 퇴락존재(Verfallensein)”(191, 275)이다. 이 세 실존론적 규정이 근원적으로 서로 맞물려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을 형성한다. 현존재의 존재는 이 세 실존론적 규정의 통일에서 파악된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에서 바로 이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존의 형식적 개념이다. 일상적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되, 우선 대개는 >세계< 속에 퇴락하여 자신의 존재를 세인의 처분에 내맡긴다. 그러나 앞서 불안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에서 보았듯, 현존재는 불안을 통해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 직면한다. 즉 현존재는,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 보았을 때, 본래적 실존적 제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물론 현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본래적 자기 앞에서 도피하여 비본래적으로 있을 수 있고 또한 우선 대개는 그렇게 존재하나,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는, >세인으로서의 자기를 넘어서< 또한 >세인으로서의 자기를 앞질러 있는< 존재자이다. 실존성이란 이런 의미에서 >자기를 앞지름<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 자기를 앞질러 있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현존재에게 존재 가능이 무한히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이미 어떤 세계 안에 피투된 채[던져진 채], 이 피투성을 떠맡고 있다. 가령 오늘날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고구려 시대의 무사가 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피투되어 있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그에게 열려 있는 본래적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현존재는 피투성을 떠맡은 채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도록 자기 자신에게 떠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를 앞질러 있음’[실존성]은 ‘어떤 세계 안에 이미 있음’[현사실성]을 본질적 계기로 포함한다.


또한 현존재는 우선 대개 일상적 현존재이다. 현존재의 현사실적 실존은 이미 퇴락하면서 >세계< 속에 몰두해 있다. 퇴락적 존재도 현존재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을 형성하는 본질적 계기가 된다.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 전체의 형식적 실존론적 전체성은 ‘자기를 앞지름’[실존성], ‘어떤 세계 안에 이미 있음’[현사실성], ‘퇴락하면서 몰입해 있음’[퇴락적 존재]이라는 세 계기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구성된다.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 전체의 형식적 실존론적 전체성이 >현존재의 존재<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명하려고 노력해온 >현존재의 존재<에 우리는 마침내 도달했다. 또한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를 >마음씀(Sorge)<이라고 이름짓는다. 이 이름은 순전히 존재론적-실존론적 명칭이다. 이 이름을 걱정이나 혹은 걱정 없음 따위를 의미하는 존재자적 의미에서 사용해선 않될 것이다. 마음씀은 그야말로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특징짓는 존재론적-실존론적 명칭이다. 우리가 세계의 분석에서 말했던 배려(Besorge)나 혹은 고려(Fürsorge)는 마음씀의 구체적 일상적 양상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현존재의 존재는 실존성, 현사실성, 퇴락적 존재로서 구성된다. 즉 현존재의 존재는 “‘(세계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으로서 세계 안에 이미 있으면서 자기를 앞지름”을 의미한다. 또한 마음씀의 구조 계기를 개시성의 구조에 대응해 보면, 실존성, 현사실성, 퇴락적 존재에는 각각 이해, 정상성, 그리고 말(혹은 퇴락)이 관련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성에 관한 자신의 해석이 선례가 없었던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고대의 창조 설화 하나를 상세히 설명한다.


 


쿠라[마음씀]가 강을 건너자, 거기서 그녀는


조대흙(粘土)을 발견하였다.


골똘히 생각하면서 쿠라는 한 덩어리를 떼내어 빚기 시작했다.


빚어진 것을 옆에 놓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주피터[수확]가 다가왔다.


그녀는 빚어진 덩어리에 정신을 부여해 달라고


주피터에게 간청하였다.


주피터는 쾌히 승낙하였다.


자기가 빚은 형상에 그녀가 자기 이름을 붙이려고 하자,


주피터는 이를 거절하고 자기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름을 가지고 쿠라와 주피터가 다투고 있을 때,


텔루스[대지]도 나서서


그 형상에는 제 몸의 일부가 제공되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이 붙여지길 바랐다.


그들은 사투르누스[시간]를 판관(判官)으로 모셨다.


사투르누스는 아래와 같이 그럴 듯하게 판단하였다 :


“정신을 준 너 주피터는 그가 죽을 때 정신을 취하고,


육체를 준 너 텔루스는 육체를 가져가라.


하지만 쿠라는 이것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살아 있는 동안 너의 것으로 함이 좋다.


그러나 이름으로 인해 싸움이 생겼는지라,


호모 [인간]라 부르는 것이 좋다.


후무스[흙]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197-198, 285)


 


이 우화는 존재와 시간 1부의 모든 내용을 통찰력 있게 재현한다. 즉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기초존재론을 상징적으로 요약해 놓고 있다. 예를 들어, 쿠라[마음씀]의 행동이 주피터나 텔루스[대지]의 행동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데, 이것은 현존재의 존재가 복합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본질적으로 통일적임을 보여준다.


이 우화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주요한 점을 지적해 준다. 첫째, 쿠라가 현존재를 빚어냈다는 것은 현존재가 실존하는 동안 철저히 마음씀에 의해 지배받고 있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마음씀이 현존재의 존재의 토대라는 사실 뿐 아니라 마음씀에 현존재가 복종한다라는 사실 즉 현존재는 이미 마음씀 속에 던져져 있고 마음씀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국 만약 쿠라가 현존재의 창조주라면, 현존재는 마음씀의 피조물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이중적으로 제약된다. 첫째, 현존재는 자기를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되어 있다. 둘째, 현존재는 자기를 창조한 양상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마음씀은 현존재의 독특한 실존 양상을 특징짓는 다양한 한계점들을 통합하는 원천이 된다. 이처럼 이 우화를 환기함으로써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인간의 실존이 자기에 대해, 또한 타자와 다른 존재자들에 대해 마음을 쓰도록 운명지워져 있음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우화의 두 번째 교훈은 지금까지 논의한 바만을 말하지 않고 앞으로 논의될 내용까지를 앞질러 말한다. 이 우화는 앞으로 논의될 내용이 더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더 이상의 논의가 어떤 것인가를 말한다. 쿠라까지도 복종하는 등장인물은 사투르누스이다. 사투르누스는 시간의 신이다. 현존재의 창조주 자신이 사투르누스에게 복종한다면,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성격묘사는 마음씀 정도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씀을 규정짓는 그것 즉 시간을 환기해야 한다. 달리 말해, 이 우화를 환기함으로써 하이데거는, 마음씀을 인간 실존의 통일적인 존재론적 구조로 폭로한 것은 그의 실존론적 분석론의 잠정적인 종착역일 뿐, 이제 독자는 제2부의 논의를 이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라는 자신의 확신을 천명한다. 마음씀을 조건짓는 것으로서의 시간 그 자체는 인간 존재 방식의 기본적 조건이 될 것이다.


 


[읽기자료]


현존재란 스스로 존재하면서 그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 그런 존재자이다. 이 … 를 문제삼는다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향해 자기 기투하는 존재로서의 이해의 존재 틀에서 명료해졌다. 이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존재가 그 때마다 궁극목적으로 삼고 있는 그것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그 때마다 이미 자기를 자기 자신의 어떤 가능성과 결부시켜 왔다. [현존재가]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향해, 따라서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라는 가능성을 향해 개방되어 있음은 불안 속에서 근원적 기본적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향한 존재라 함은, 존재론적으로는 현존재가 자기 존재에 있어서 그 때마다 이미 자기 자신에 앞서 있음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기를 넘어서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자에 대한 태도로서가 아니라, 현존재 자신인 존재가능을 향한 존재로서이다. 본질상 … 를 문제삼는다는 존재구조를 우리는 현존재의 자기를-앞질러-있음으로서 파악한다.(191-192, 276)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향한 존재, 즉 ‘자기를 앞질러 있음’ 가운데에는, 본래적 실존적 제 가능성을 향해 개방되어 있음[자유존재]을 가능하게 하는 실존론적-존재론적 조건이 들어 있다. 존재 가능이란,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현존재가 그 때마다 궁극목적으로 삼고 있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 존재 가능을 향한 존재 자체가 자유에 의해 규정되는 한, 현존재는 자기의 제 가능성에 대해서 비자발적(非自發的)으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즉, 현존재는 비본래적으로 있을 수 있고 또 현실적으로는 우선 대개 그런 방식으로 있다. 이때는 본래적 궁극목적[존재 가능]은 포착되지 않은 채, 현존재 자신의 존재 가능의 기투는 세인의 처분에 맡겨진다. 그리하여 ‘자기를 앞질러 있음’에서의 자기는 그때그때 세인-자기라는 의미의 자기를 가리킨다. 비본래성에서도 현존재는 본질상 자기를 앞지른다. 그것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 앞에서 퇴락하면서 도피하는 것도, 상금 ‘이 존재자가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는다‘는 존재 틀을 보이고 있는 것과 같다.(193, 278)


 


‘자기를 앞질러 있음’을 더 완전하게 표현하면, 어떤 세계 안에 이미 있으면서 자기를 앞지름이다. (…) 저렇게 얽혀 있다 함은 도리어 현존재의 근원적 전체적 틀을 현상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현존재의 전체성은 이제 ‘… 안에 이미 있으면서 자기를 앞지름’으로서 명시적으로 뚜렷해진 셈이다. 달리 말하면, 실존함은 언제나 현사실적 실존함이다. 실존성은 본질적으로 현사실성에 의해 규정된다.(192, 276-277)


 


3) 실재성


(한: 實在性, 독: Realität, 영: Reality)


 


앞서의 논의를 통해 『존재와 시간』 제1편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끝났다. 나머지는 전통적 형이상학이 끊임없이 철학의 영원한 주제로 문제삼아 왔던 실재성과 진리에 관한 물음이다. 하이데거는 이 물음을 실존론적 분석론을 토대로 새롭게 정초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사유가 전통적 형이상학과 어떻게 차이나는 지를 입증한다. 즉 실재성과 진리의 물음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를 통해 새로운 토대 위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사유가 전통적 형이상학과의 대결임을 새삼 확인한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전체의 구도에서 보자면 여기서의 논의는 여론(餘論)에 해당한다. 우선은 실재성의 문제를 실존론적 분석론을 통해 새롭게 논의해 보자.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지배적인 존재 개념은 실재성이다. 실재성이란 사물이 단순히 눈앞에 있음을 의미한다. 실재성은 곧 전재성(前在性)이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 개념에서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갖는 존재의 차이성이 무시된다. 여기에서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도 무차별적으로 실재하는 전재자(前在者)에 불과하다. 인간에 관한 전통적 형이상학의 정의는 이를 잘 입증한다. 인간도 최근류(最近類)에서 보면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다. 다만 인간은 이성이란 탁월한 사유 기능을 지니고 있기에 종적(種的)으로만 다른 동물과 차별(差別)된다. 이렇듯 실로 전통적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를 전재적(前在的) 사물(res)로 획일화한다. 전재적 사물의 존재는 획일적으로 실재성(實在性)이다. 무릇 존재 일반은 실재성이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종래의 존재론을 사물존재론이라고도 명명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사물존재론은 퇴락의 존재양식에서나 가능하다. 퇴락이란 일상적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틀인 세계-내-존재를 망각한 채 존재자들의 >세계<에만 몰입해 있음을 의미한다. 퇴락한 일상적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인 궁극목적을 향해 자기를 기투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펼쳐나가기는 커녕, 존재자들의 >세계<에 몰입하여 거기로부터 자기를 이해한다. 하이데거는 전통적 사물존재론을 바로 이러한 퇴락적 존재 양식 안에 집어넣어 해석한다. 하이데거가 그렇게 해석하는 단적인 증거는 종래의 사물존재론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 외적 세계의 실재성이기 때문이다.


외적 세계란 우리의 의식밖에 있는 존재자들의 >세계<를 의미한다. 종래의 존재론에서는 - 관념론에서든 혹은 실재론에서든 - 외적 세계의 실재성이 논란거리였다. 그래서 칸트는 이를 철학의 스캔들이라 명명한 바도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 외적 세계의 실재성 논쟁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존재론적 오류를 범한다.


첫째, >외적 세계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밖에 있는 사물이나 객관에 그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 있다. 이럴 경우 주관과 >세계<는 분리된다. 주관은 애초부터 무세계적 주관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간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란 우리의 밖에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가 펼쳐지는 지평이다. 우리는 그러한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적소 전체성과 유의의성으로 확인한 바 있다.


현존재와 다른 존재자와의 만남은 세계를 전제한다. 인간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는 원칙적으로 세계 내부적 존재자이다. 또한 우리가 세계 안에서 우선 대개 만나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용재자(用在者)이며, 용재자가 도구적 성격을 탈색하고 과학적 관찰 대상으로 변양되었을 때 비로소 전재자(前在者)가 출현한다. 그러니까 종래의 존재론이 문제삼던 전재성으로서의 실재성은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보자면, 다른 존재 양식 가운데 하나일 뿐더러, 이미 현존재, 세계, 그리고 용재성(用在性)과 일정한 정초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종래의 사물존재론은 처음부터 >세계<를 인간의 의식밖에 위치시켜 놓고 실재성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 시도하였기에 미궁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종래의 사물존재론은 우리의 의식밖에 있는 >외적 세계<의 실재성을 문제삼고 있으나, 이 ‘우리’에 대한, 다시 말해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논의했듯이,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로부터 세계는 비롯되며, 따라서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전체 틀 안에는 이미 현존재의 존재인 마음씀이라는 더 근원적인 존재 틀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종래의 존재론은 인간 현존재를 >세계<와 대립한 무세계적 주관으로 보았기에 현존재의 존재가 갖는 근원적 의미를 외면하고 말았다.


실존론적-존재론적 정초 연관에서 보자면, 실재성은 현존재의 존재인 마음씀으로 소급된다. 마음씀으로서의 현존재로부터 세계가 개시되는 한에서만, 실재적인 것도 이 세계를 근거로 발견될 수 있다. 실재성은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현존재의 존재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에서만 실재적 존재자가 그 자신에 즉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현존재의 실존이 갖는 실존론적-존재론적 의미를 오해한 결과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존재자적 차원의 논의가 아니다.


우리의 논의는 실존론적-존재론적 차원의 논의이다.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유일하게 존재이해를 갖는 현존재라는 존재자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는 >있다<. 역으로 말하면, 현존재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존재도 거론될 수 없다. 현존재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발견되었다거나 혹은 은폐되었다라고도 거론될 수 없다. 현존재가 실존하지 않을 경우 실재적 존재자가 존재하느냐의 물음은 애당초 존재론적 물음이 될 수 없다.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에서만, 세계는 있다. 그리고 세계가 있는 한에서만, 세계 내부적 존재자도 발견될 수 있거나 혹은 은폐될 수 있다. 이로써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논란거리였던 실재성의 문제는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새롭게 정초된 셈이다.


 


[읽기자료]


이해는 퇴락의 존재양식에 따라 우선 대개는 이미  세계 에 대한 이해로 잘못 놓여져 있다. 존재[자]적 경험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이해가 문제되는 경우에도, 존재해석은 그 오리엔테이션을 우선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존재에서 취한다. 그때 가장 가까이 있는 용재자[用在者]의 존재는 건너뛰게 되고, 존재자는 제일 먼저 전재적[前在者] 사물(res)연관으로서 파악되게 된다. [따라서] 존재실재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존재의 근본 규정성은 실체성이 된다. 이렇게 존재이해가 잘못 놓여짐에 따라, 현존재의 존재론적 이해도 이 존재개념[실재성]의 지평으로 옮겨간다. 현존재도 다른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실재적으로 전재[前在]한다. 이리하여 무릇 존재 일반 실재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실재성이라는 개념이 존재론적 문제성에서 특유의 우위를 차지한다. 이 우위가 현존재의 진정한 실존론적 분석론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세계 내부적으로 가장 가까운 용재자의 존재로 향하는 시선까지도 이미 가로막고 있다. 이 우위는 마침내 존재의 문제성 일반을 잘못된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그 이외의 존재양상도 실재성을 고려해서 소극적 결여적으로 규정된다.(201, 289)


 


그러므로 현존재 분석론뿐 아니라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수행도, 실재성이라는 의미의 존재에 편향적으로 정위하는 데서부터 탈출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것이 증명될 필요가 있다 : 실재성은 다른 존재양식 가운데 하나의 존재양식일 뿐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는 현존재, 세계 및 용재성[用在性]과의 일정한 정초연관(定礎聯關) 속에 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실재성의 문제 및 그 문제의 제 조건과 한계에 대한 원칙적 구명이 요구된다.(201, 289-290)


 


실재성에 대한 가능한 존재론적 물음에 앞서 있는 이러한 연구는 전술한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수행되었다. 거기에 따르면, 인식이란 실재적인 것에 접근하는 정초된 한 양상이다. 실재적인 것은 본질상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서만 접근 가능하다. 그런 존재자에 접근하는 모든 통로는 존재론적으로는 현존재의 근본 틀, 즉 세계-내-존재 속에서 정초되어 있다. 세계-내-존재는 마음씀이라는 더 근원적인 존재 틀(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해 있는 존재로서 자기를 앞질러 이미 세계 안에 있음)을 가지고 있다.(202, 291)


 


세계는 현존재의 존재와 함께 본질적으로 개시되어 있다 ; 세계는 그 세계의 개시성과 함께 또한 그 때마다 이미 발견되어 있다. 물론 실재적인 것, 단지 전재자[前在者]라는 의미에서의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아직 은폐된 채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실재적인 것도 이미 개시된 세계를 근거로 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또 그런 근거 위에서만 실재적인 것은 은폐된 채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세계현상 자체를 선행적으로 밝히지 않고, 외적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현사실적으로는 외적 세계의 문제는 언제나 세계 내부적 존재자(사물과 객관)에 정위해 있다. 그리하여 이런 논의들은 존재론적으로는 거의 풀 수 없는 문제성으로 휩쓸려간다.(203, 291)


 


옳든 그르든 외적 세계의 실재성을 믿는 것, 충분하든 불충분하든 실재성을 증명하는 것, 명시적이든 아니든 실재성을 전제하는 것 따위의 시도는, 시도가 서 있는 자신의 지반을 완전히 꿰뚫어 보지도 않고, 우선 무세계적 주관 또는 자신의 세계도 확신하지 못하는 하나의 주관을 전제하고 있으나, 이 주관이야말로 먼저 세계를 근본적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 세계-내-존재는 처음부터 포착한다, 사념한다, 확신한다, 믿는다 등의 작용 위에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자신 언제나 이미 세계-내-존재의 한 기초지어진 양상인 태도에 불과하다.(206, 298-296)


 


외적 세계가 전재[前在]한다는 사실과 그 방식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외적 세계를 우선 인식론적으로 무효 속에 파묻어 놓고, 그런 뒤에 새삼 증명을 통해 일으켜 세우려는 경향을 갖는가 하는 것이 [먼저] 제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현존재의 퇴락에 있고, 또 그 퇴락에 동기지워져서, 일차적 존재이해가 전재성[前在性]으로서의 존재로 [잘못] 옮겨 놓여진 데 있다. 이런 존재론적 정향을 취하는 문제제기가 비판적으로 되면, 그 문제제기는 당장 유일하게 확실한 전재자[前在者]로서 단순히 내적인 것을 찾게 된다. 세계-내-존재라는 근원적 현상이 부서지고 난 뒤에는 잔존하는 나머지, 즉 고립된 주관을 근거로 해서 세계와의 접합이 수행되는 것이다.(206, 296)


 


실재성이라는 명칭이 세계 내부적으로 전재하는 존재자(res)의 존재를 가리킨다면 -그 명칭하에서 이해되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것이 이 [존재자의] 존재양상의 분석에 대해 의미하는 바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세계 내부성’이라는 현상이 밝혀질 때에만 존재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내부성은 세계라는 현상에 근거하고, 세계는 세계대로 세계-내-존재의 본질적 구조계기로서 현존재의 근본 틀에 속한다. 세계-내-존재는 다시 현존재의 존재의 구조 전체성 속에 존재론적으로 묶여 있고, 그 구조 전체성으로서 성격지어진 것이 마음씀이다. 이렇게 해서, 그것의 해명을 통해 실재성의 분석을 비로소 가능하게 할 기초와 지평이 제시된 것이다. 이런 연관 속에서 비로소 ‘즉자’의 성격 또한 존재론적으로 이해된다.(209, 299)


 


실재성은 존재론적 정초 연관의 순서에 있어서, 그리고 가능한 범주적 및 실존론적 증시의 순서에 있어서 마음씀이라는 현상으로 소급 지시된다. 실재성이 존재론적으로 현존재의 존재에 근거한다 함은, 현존재가 실존할 때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실재적인 것이 ‘그 자신에 즉해서 있는 것’으로서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211-212, 303)


 


말할 나위도 없이,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즉 존재이해의 존재[자]적 가능성이 있는 한에서만 존재는  있다. 현존재가 실존하지 않으면, [실재적인 것의] 독립성도 있지 않고, 즉자성도 있지 않다. 그 때에는 그런 것들은 이해될 수도 없고 안 될 수도 없다. 그 때에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 또한 발견될 수도 없거니와 은폐될 수도 없다. 그 때는 존재자가 있다 없다조차 말할 계제가 아니다. 존재이해가 있는 한, 그리고 이와 함께 전재성[前在性]의 이해가 있는 한에서, 그 때에도 존재자는 여전히 있게 될 것이라고 지금 가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212, 303)


 


상술한 바와 같이,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가 존재이해에 의존해 있다는, 즉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성이 마음씀에 의존해 있다는 그 의존성이, 실재성의 이념을 실마리로 해서 거듭거듭 밀고 들어오는 무비판적 현존재 해석으로부터, 금후의 현존재의 분석론을 지켜준다. 존재론적으로 적극적으로 해석된 실존성에 정위해서 비로소, 의식이나 생의 분석을 현실적으로 진행함에 있어서, 비록 무차별적일망정 어쨌든 실재성이 라는 의미를 기초에 놓지 않게 된다는 것이 보증된다.(212, 303)


 


현존재라는 존재양식을 가진 존재자는 실재성이나 실체성으로부터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간의 실체는 실존이다라는 테제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실존성을 마음씀으로서 해석하고 마음씀을 실재성과 경계짓는 것은 실존론적 분석론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그 가능한 제 양상, 그리고 그런 제 변양의 의미에 대한 물음 속에 있는 문제의 난맥상이 더욱 날카롭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뿐이다. 즉, 존재이해가 있을 때만 존재자는 존재자로서 접근 가능하고, 존재자가 현존재라는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을 때만 [현존재라는 존재양식을 지닌] 존재자로서 존재이해가 가능하다.(212, 304)


 


4) 진리


(한: 眞理, 독: Wahrheit, 영: Truth)


 


진리에 관한 논의도 『존재와 시간』 전체의 구도에서 보자면 여론(餘論) 격에 해당한다. 그러나 진리의 본질에 관한 물음은 철학의 근본물음이다. 하이데거는 전통적 형이상학에서의 진리 개념을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정초하여 진리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새로운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따라서 이 논의가 비록 『존재와 시간』 전체의 구도에서 보자면 여론(餘論) 격이라 해도 우리가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은 결코 아니다. 더욱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이후에도 여기서의 논의를 토대로 진리의 물음을 존재사유의 관점에서 전개한다. 하이데거 철학 전체의 구도에서 보자면, 진리의 본질에 관한 물음은 그의 핵심적 과제이다.


 


(1) 전통적 진리 개념: 일치


(한: 一致, 독: Übereinstimmung, 영: Agreement)


 


전통적 형이상학에서의 진리 개념은 ‘일치’이다. 일치란 대체로 판단과 그것의 대상의 일치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진리의 문제는 대체로 명제적 진리의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진리 개념을 ‘지성과 사물의 일치’로 처음 공식화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를 명제적 진리와 사태적 진리로 나눈 바 있고, 칸트도 단순히 판단과 대상과의 일치를 논의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험적 인식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의 일치를 말함으로써 진리의 문제를 초월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바 있다. 하지만 사태 진리를 언급하건 혹은 초월적 진리를 언급하건, 진리 개념은 여전히 ‘일치’로서 규정되었으며, 그러한 일치로서의 진리는 근본적으로 명제적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또한 이 일치라는 진리 개념은 그 때마다 상황에 따라 ‘동화’, 혹은 ‘올바름’, 혹은 ‘합치’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되기도 하였으나, 판단과 대상의 일치라는 근본적인 의미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전통적 진리 개념을 ‘일치’라고 정의해도 무방하다.


 


[읽기자료]


다음의 세 테제가 진리의 본질에 관한 전통적 견해와 진리의 최초의 정의에 대한 견해를 성격짓고 있다. 1. 진리의 장소는 진술(판단)이다. 2. 진리의 본질은 판단과 그 대상의 일치에 있다. 3. 논리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그 근원적 장소인 판단에다 지정하기도 하고 또 진리의 정의를 일치로서 유포시키기도 하였다.(214, 306)


 


꼭 들어맞음이 갖는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우리 앞에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진리에 관해 그 동안 우리에게 전승되어온 다음과 같은 본질 규정이다. 즉, ‘진리는 사태와 지성의 동화(同化)이다.(veritas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이것은 다음을 의미할 수 있다. ‘진리는 인식을 향한 사태의 동화(Angleichung)이다.’ 그러나 이렇게도 읽혀질 수 있다. ‘진리는 사태를 향한 인식의 동화이다.’ 물론 사람들은 앞서 인용된 본질규정을 대개는 단지 ‘진리는 사태를 향한 지성의 동화이다’(veritas est adaequatio intellectus ad rem)라는 정식으로만 제시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개념파악된 진리 즉 명제진리(Satzwahrheit)는 단지 ‘지성을 향한 사태의 동화’(adaequatio rei ad intellectum)를 즉 사태진리(Sachwahrheit)를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다. 진리(veritas)의 이 두 본질개념들은 항상 ‘…을 올바르게 향함’(Sichrichten nach …)을 의미하며 그로써 진리를 올바름(Richtigkeit)으로서 사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쪽이 다른 쪽의 단순한 전도(轉到)는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경우 지성(intellectus)과 사태(res)는 상이한 것으로 사유된다. 이 점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통상적 진리개념에게 익숙한 정식을 그것의 가장 가까운 (중세적) 원천으로 소급해야 한다. 지성을 향한 사태의 동화(adaequatio rei ad intellectum)라는 의미의 진리(veritas)는, 중세 이후 인간본질의 주관성을 근거로 비로소 가능했던 칸트의 초월적 사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고로] 칸트의 초월적 사상은 >대상들은 우리의 인식을 올바르게 향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통상적 진리는 오히려 기독교의 신학적 신앙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앙에 따르면, 항상 피조물(ens creatum)인 사태는 신의 지성(intellectus divinus) 안에서 즉 신의 정신 안에서 ‘앞서 사유된 이념’에 상응하고 따라서 이념에-꼭 들어맞고(이념을-올바로 향하고)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참<인 한에서만, 본래의 무엇으로 또한 그것의 존재여부에 맞게 존재한다.


인간의 지성(intellectus humanus)도 피조물(ens creatum)이다. 인간의 지성은 신에 의해 인간에게 부여된 능력으로서, 신의 이념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지성이 이념에-꼭 들어맞는 유일한 경우는, 지성이 자신의 명제들 안에서 ‘사유된 내용’을 사태에게로 동화시키며 또한 사태 자체도 [이미] 이념에 알맞게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 경우일 뿐이다. 인간적 인식의 진리의 가능성은, 모든 존재자가 >창조된 것<인 한, 사태와 명제가 동일한 방식으로 이념에 꼭 들어맞고 따라서 신적인 창조계획의 통일성에 입각해 차례로 [신을 향해] 올바로 정돈되어 있음에 근거한다. (신의) 지성을 향한 (창조된) 사태의 동화로서의 진리(veritas als adaequatio rei [creandae] ad intellectum [divinum])가 (창조된) 사태를 향한 (인간의) 지성의 동화로서의 진리(veritas als adaequatio intellectus [humani] ad rem [creatam])를 보증한다. 진리는 본질적으로 언제나 상응(convenientia)을, 즉 피조물인 존재자 상호간과 창조주의 합동(Übereinkommen)을, 다시 말해 창조질서의 규정에 따른 >꼭 들어맞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만일 창조사상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이며 무규정적인 차원에서 세계질서로서 표상될 수 있다. 신학적으로 사유된 창조의 질서를 대신해, 세계이성이 모든 대상들을 계획하는 가능성이 들어선다. 세계이성은 자신에게 스스로 법칙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신의 진행과정이 직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이 점을 >논리적<이라 간주한다).


명제진리의 본질이 진술의 올바름 안에 존립함을 사람들은 기정 사실로서 간주한다. 올바름이 어떻게 성립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려 보아도 말짱 헛수고로 끝나는 경우에조차, 사람들은 올바름을 이미 진리의 본질로서 전제한다. 마찬가지로 사태진리도 항상 눈앞의 사물과 그것의 >이성적< 본질개념의 일치를 의미한다. 마치 진리의 본질에 관한 이러한 규정은, 지성(intellectus)의 담지자이자 이행자(履行者)인 인간에 관한 상응하는 해석을 그때마다 [이미] 포함하고 있는 저 모든 존재자의 존재의 본질에 관한 해석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진리는 지성과 사태의 동화라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저 정식은 누구에게든 즉각 통찰될 수 있는 공통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진리개념의 자명성이 지배하는 가운데 - 그러나 이러한 자명성의 본질근거가 무엇인지는 거의 고려된 바 없다 - 사람들은 ‘진리는 그것의 반대를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 및 ‘비진리가 있다’라는 사실을 [앞서와] 똑같이 자명한 것으로서 수용한다. 명제의 비진리(올바르지 못함)는 진술과 사태의 불합치다. 사태의 비진리(진정하지 못함)는 존재자와 그것의 본질의 불일치를 의미한다. 어떤 경우라도 비진리는 ‘꼭 들어맞지 않음’으로 개념화된다. ‘꼭 들어맞지 않음’은 진리의 본질로부터 밖으로 벗어난 것이다. 때문에 진리의 이러한 반대로서의 비진리는, 만약 진리의 순수한 본질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면, 도외시될 수 있다.(『이정표』, 180-182)


 


(2) 전통적 진리 개념의 존재론적 기초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비켄나를 거쳐 아퀴나스에 이르러 정식화된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는 통상적 진리 규정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물론 철학자들에 따라 다소간 내용상의 차이가 있긴 하나, 이런 정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관한 물음을 이제는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물음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진리는 논리학의 문제로 전락한다. 그러나 과연 일치라는 진리 개념이 그토록 확고한 것인가? 그렇다면 일치란 도대체 무엇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도대체 무엇과 무엇이 일치하는가? 과연 지성과 사물이 일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일치는 비유적 표현일 것이다. 지성과 사물 사이에는 아무런 동종성(同種性)도 없다. 지성이 정신적 관념적 존재라면, 사물은 물질적 존재이다. 따라서 일치를 낱말 그대로 받아들여 지성과 사물이 참으로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우스광스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치라는 개념을 달리 사유해 보아야 한다. 과연 어떤 관점에서 지성과 사물은 일치하는 것인가?


누군가가 벽에 등을 대고,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 삐뚤어졌다.”는 참된 진술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진술은 참된 진술이다. 그러나 이 진술의 진리값의 근거는, 진술과 그림, 다시 말해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에서의 ‘낱말 그대로의 일치’는 아니다. 오히려 진리값의 근거는 이 진술이 벽에 걸린 그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 있다. 즉 일치는 “…와 같이, 그렇게”라는 관계 형식을 가지고 있다.


참된 진술은 그 진술이 관계하는 존재자를 자기 동일성에서 제시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문제가 되는 존재자의 자기 동일성이 진술 안에서 보여진다. 이것이 일치의 참된 의미이다. 진술의 진리는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면서 있음’에 근거한다. 따라서 우리는 명제적 차원의 진리와 이 명제적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현상을 구별해야 한다. 명제적 진리는 ‘문제가 되는 존재자가 있는 그대로 발견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명제적 차원의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되는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발견하면서 있음’이다. 따라서 전자가 이차적 의미의 진리라면, 후자는 일차적 의미의 진리가 된다. 그런데 이처럼 발견하고 있음은 우리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를 근거로 세계 안에서 존재자를 발견하면서 실존한다. 그렇다면 진리의 근원적 현상은 더욱 근원적으로 소급되어야 한다. 우리의 이제까지의 논의는 진리의 근원적 현상에 도달하기 위한 기초가 된 셈이다.


 


[읽기자료]


합치를 우리는 여러 가지 의미로 언급한다. 우리는 예컨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5마르크짜리 주화 두 개를 보고는 ‘그것들이 서로 합치한다’라고 말한다. 그 둘은 그것들의 모양이 하나라는 점에서 합동이다. 때문에 그것들은 이 하나의 모양을 공유하며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똑같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예컨대 눈앞의 5마르크짜리 주화들 중 하나에 관해 ‘이 주화는 둥글다’라고 진술할 때에도, 합치에 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는 진술이 사물과 합치한다. 이제 연관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진술과 하나의 사물의 사이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각 연관항인 사물과 진술의 모양이 명백히 상이하다면, 사물과 진술은 어떤 점에서 합동이 되어야 하는가?


주화의 성분은 금속이다. [하지만] 진술은 여하튼 물질적이지 않다. 주화는 둥글다. [하지만] 진술은 공간적인 것의 양식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 주화를 가지고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주화에 대한 진술은 결코 지불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이 둘이 똑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명명된 진술은 [즉 '이 주화는 둥글다'라는 진술은] 참된 진술로서, 주화와 합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의 꼭 들어맞음은 진리의 통념에 따른다면 동화(同化)이어야 한다. 전혀 똑같지 않은 것 즉 진술이 어떻게 주화에 동화될 수 있는가? [이렇게 동화되기 위해서라면] 진술은 물론 주화로 변모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야말로 완전히 자신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일이 진술에게서 성공될 리 만무하다. 이런 일이 성공적으로 일어난다면, 바로 그 순간, [진술은 진술이 아니므로] 이제 더 이상 진술로서의 진술이 사물에 합치할 수도 없을 것이다. [주화로의] 동화에서도 진술은 오히려 진술로서 남아 있어야 하며, 이 뿐 아니라 더욱이 이제 비로소 자신의 본래적인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 어떤 사물과도 전혀 상이한 진술의 본질은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어떻게 진술은 실로 자신의 본질을 고집하면서도 [자신과] 다른 것인 사물에 동화될 수 있는가?(『이정표』, 182-183)


 


도대체 일치라는 용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것과 어떤 것과의 일치는 어떤 것과 어떤 것과의 관계라는 형식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일치와 마찬가지로  진리 도 하나의 관계이다. 그러나 관계라고 해서 모두 일치는 아니다. 기호는 [그 기호에 의해] 가리켜지는 것을 지시한다. 지시는 하나의 관계이지만 기호와 [그것에 의해] 가리켜지는 것과의 일치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일치가 진리의 정의 속에서 확정된 convenientia[합치]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6이라는 수는 1610과 일치한다. 두 수는 일치한다. 두 수는 ‘얼마나 많은가’라는 점에서 같다. 같음은 일치의 한 방식이다. 이 일치에는 구조상 어떤  점에서 라는 것이 속한다. adaequatio[일치] 속에서 관계맺고 있는 것이 그 점에서 일치하는 그 점이란 무엇인가? 진리관계를 밝힐 때는 관계항들의 독자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어떤 점에서 intellectus[지성]와 res[사물]는 일치하는가? 지성과 사물은 양자의 존재양식과 본질내용으로 보아, 양자가 그 점에서 일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도대체 제공하고 있는가? 양자[intellectus와 res] 사이에는 동종성(同種性)이 없으므로 양자가 같을 수 없다고 한다면, 닮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그러나 인식은 사상[事象]을 그것이 있는 바와 같이, 그렇게  주어 야 한다. 일치는 … 와 같이, 그렇게 라는 관계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이 관계는 intellectus와 res 사이의 관계로서 가능한가?(215-216, 308)


 


누군가가 벽에 등을 대고,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 삐뚤어졌다 는 참된 진술을 했다고 하자. 이 진술은 진술자가 돌아서서 벽에 삐뚤어지게 걸린 그림을 지각하면 스스로 증시된다. 이 증시 속에서 증시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진술을 [참되다고] 확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진술행위는 존재하는 사물 자체를 향한 존재이다. 그런데 지각을 통해 증시되는 것은 무엇인가? 진술 속에서 사념되었던 것은 그 자체로 있는 존재자라는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확증되어야 하는 것은, 진술되는 것[피진술체]을 향한 진술적 존재는 존재자를 제시한다는 것, 진술적 존재는 자신이 지향하는 존재자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증시되는 것은 진술이 ‘발견하면서 있다’는 것이다. (…) 증시되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존재자 자체가 ‘발견되어 있다’는 것, 스스로 어떻게 발견되어 있는가를 보이는 존재자 자신뿐이다. 그것이 발견되어 있다는 것은 진술되는 것, 즉 존재자 자신이 동일한 것으로서 자기를 제시한다는 데서 확증된다. 확증이란 존재자가 자기 동일성에 있어서 자기를 제시하는 것 의미한다. 확증은 존재자의 자기 제시를 근거로 해서 수행된다. 그것은 오직 진술하면서 자기를 확증하는 인식작용이 그 존재론적 의미상, 실재적 존재자 자체를 향해 발견하면서 있다는 것으로만 가능하다.(217-218, 310-311)


 


진술이이다 함은 진술이 존재자를 그 자체에 즉해서 발견한다는 뜻이다. 진술은 존재자를 그 피발견성에 있어서 진술하고, 제시하고, 보이게 한다(apophansis). 진술의 참임(진리) 발견하면서 있음으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진리는 한 존재자(주관)가 다른 존재자(객관)에 동화한다는 의미에서의 인식작용과 대상 사이의 일치라는 구조를 갖는 것이 결코 아니다.(218-219, 311-312)


 


‘발견하면서 있음’[발견적 존재]으로서의 ‘참임’[진리 존재]은 다시 존재론적으로는 세계-내-존재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이 현상 [세계-내- 존재] 속에서 우리는 현존재의 근본 틀을 인식했거니와, 이 현상이 곧 진리의 근원적 현상의 기초이다. 이제 이 근원적 현상이 더욱 철저하게 추구되어야 한다.(219, 312)


 


발견한다는 것은 세계-내-존재의 한 존재방식이다. [용재자에 대한] 배시적 배려나 [전재자를]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관조하는 배려도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발견한다. 후자가 피발견자로 된다. 이것은 이차적 의미에서의 참 이다. 일차적 참, 즉 발견하면서 있는 것은 현존재이다. 이차적 의미에서의 진리는 ‘발견하면서 있음’(발견)이 아니라, ‘발견되어 있음’(피발견성)이다.(220, 314)


 


(3) 진리의 근원적 현상


존재자를 발견하고 있음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다. 현존재는 발견하는 존재이다. 현존재의 발견함은 세계-내-존재에 근거한다. 세계는 현존재가 존재자를 발견할 수 있는 선행적 지평이다. 따라서 존재자의 피발견성은 물론이거니와 현존재의 발견함도 세계의 개시성에 근거한다. 그런데 세계의 개시성이란 바로 현존재의 개시성이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자기의 개시성으로 있다. 앞서 논의하였듯, 현존재는 정상성(情狀性)에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투(이해)를 통해 자기의 존재를 확보함으로써 자기 지시적 이해를 통해 세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가장 근원적 현상은 현존재의 개시성과 함께 비로소 달성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진리 가운데< 있다. 현존재는 진리-내-존재이다.


그런데 진리의 문제에서도 우리는 하이데거의 독특한 사유 구조를 만나게 된다. 항상 그는 어떤 사태의 형식적 구조를 밝혀 놓고 이 형식적 구조로부터 어떻게 비본래적 양상과 본래적 양상이 가능하게 되는지를 논의한다. 여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현존재가 >진리 가운데< 있다”라는 진술은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진리의 근원적 현상이라는 형식적 구조만을 말하고 있다. 이 진술은 존재론적 차원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문제는 현존재가 어떤 양상의 개시성으로 있는가의 여부이다. 즉 현존재가 본래적 개시성이라면 현존재는 가장 근원적 진리 안에 있는 것이요, 현존재가 비본래적 개시성이라면 현존재는 비진리 안에 있는 것이다.


현존재의 본래적 개시성은 앞으로 6장 2절에서 논의된다. 우리의 논의를 앞질러 말하자면, 본래적 개시성은 선구적 결의성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자기를 앞질러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 선구적 결의성이다. 따라서 선구적 결의성은 본질적으로 기투와 관련된다. 하이데거는 선구적 결의성을 통해 현존재의 실존성이 확보됨을 감안하여, 선구적 결의성을 특히 실존의 진리라고도 명명한다. 이에 반해 비본래적 개시성은 우리가 앞서 4장 2절에서 논의한 바 있는 일상적 개시성이다. 일상적 개시성에서 피투성은 퇴락이 된다. 일상적 현존재는 이미 퇴락 속에 피투되어 있다. 따라서 일상적 현존재는,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진리-내-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비진리 안에 있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의 비진리는 철저히 실존론적 의미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실존론적 비진리는 명제적 차원에서의 ‘거짓’과는 무관하다.


일상적 현존재는 비진리 안에 있다. 그로써 존재자는 은폐되거나 혹은 설령 발견된다라고 해도 위장되고 만다. 일상적 현존재는 존재자를 가상으로 만나게 된다. 따라서 진리는 탈취를 요구한다. 존재자를 은폐와 은닉, 그리고 위장으로부터 탈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이 진리의 본질을 결여적 표현을 사용하여 a-letheia(알-레테이아, 비-은폐성)라 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참고로 letheia는 ‘감추어져 있음’을 의미하며, a는 결성적 표현으로서 비(非)를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완전한 실존론적-존재론적 진리 개념에 도달한다. 1. 진리는 가장 근원적 의미로는 현존재의 개시성이다. 현존재는 진리 안에 있다. 2. 현존재가 본래적 개시성일 때, 현존재는 가장 근원적 진리에 도달한다. 3. 현존재가 비본래적 개시성일 때, 현존재는 비진리 안에 있게 된다. 4. 그러므로 “현존재는 진리 안에 있다.”라는 명제의 완전한 실존론적-존재론적 의미는, 등근원적으로, “현존재는 비진리 안에 있다.”를 함축한다. 즉 현존재는 진리와 비진리 가운데 등근원적으로 있다.


 


[읽기자료]


‘발견하면서 있다’는 ‘진리 존재’는 현존재의 한 존재방식이다. 이 발견 자체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보다 더 근원적 의미에서 참 이라고 일컬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발견한다는 것 자체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가 비로소 진리의 가장 근원적 현상을 제시한다.(220, 313-314)


 


그러나 세계의 세계성과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대해 앞에서 행한 분석이 제시한 바에 따르면,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피발견성은 세계의 개시성에 근거한다. 개시성은 현존재의 근본양식이고, 이 근본양식에 따라 현존재는 자기의 현 존재이다. 개시성은 정상성[情狀性], 이해 및 말로 구성되고, 등근원적으로 세계, 내-존재 및 자기에 관계한다.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으로서-자기를 앞질러-이미 어떤 세계 안에 있음’이라는 마음씀 속에는 현존재의 개시성이 들어 있다. 피발견성은 이 개시성과 함께, 그리고 이 개시성을 통해 있다. 따라서 진리의 가장 근원적 현상은 현존재의 개시성 함께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앞에서 ‘현’의 실존론적 구성에 관해 또 ‘현’의 일상적 존재에 관해 제시되었던 것은 바로 진리의 가장 근원적 현상이다. 현존재가 본질상 자기의 개시성으로 있고, 개시된 현존재로서 개시하고 발견하는 한, 그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참 이다. 현존재는 진리 가운데 있다. 이 진술은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진술이 의미하는 것은 현존재가 존재[자]적으로 언제나, 또는 적어도 언젠가는, 일체의 진리 가운데 안내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실존론적 틀에는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존재의 개시성이 속해 있다는 것이다.(220-221, 314)


 


현존재의 존재 틀에는 그 현존재의 개시성의 구성요소로서 피투성이 속해 있다. 이 피투성에서 노정(露呈)되는 것은 현존재가 그 때마다 이미 나의 현존재로서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나의 현존재는 일정한 세계 내에서 일정한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일정한 범위에 몰입해 있다는 것이다. 개시성은 본질상 현사실적 개시성이다.(221, 315)


 


현존재의 존재 틀에는 기투가 속해 있다. 그것은 자기의 존재 가능을 향해 ‘개시하면서 있다’는 것이다. 현존재는 이해하는 자로서 세계와 타자의 입장에서 자기를 이해할 수도 있고, 자기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에 입각해서 자기 이해할 수도 있다. 후자의 가능성이 의미하는 것은 현존재가 자기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에 있어서, 그리고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으로서, 자기를 자기 자신에게 개시한다는 것이다. 이 본래적 개시성이 본래성이라는 양상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 진리의 현상을 제시한다. 현존재가 그 속에서 존재가능으로서 있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더욱이 가장 본래적인 개시성은 실존의 진리이다.(221, 315)


 


현존재의 존재 틀에는 퇴락이 속해 있다. 우선 대개 현존재는 자기의 세계에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 제 존재 가능성을 향한 기투로서의 이해가 그 곳[ 세계 ]으로 옮겨진 것이다. 세인 속에 몰두한다 함은 ‘공공적 피해석성’이 지배함을 의미한다. 발견된 것[세계 내부적 존재자]과 개시된 것[현존재]은 빈 말, 호기심 및 애매성에 의해 위장되고 은폐된다는 양상 속에 있다. 존재자를 향한 존재는 소멸되지는 않았지만 뿌리 뽑히고만 것이다. 존재자는 완전히 은폐되지 않고 발견되어 있기는 하나 동시에 위장되어 있다 : 존재자는 자기를 드러낸다 ?? 그러나 가상이라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이전에 발견되었던 것은 다시 위장과 은폐 속으로 도로 가라앉는다. 현존재는 본질상 퇴락하기 때문에 그 존재 틀에서 보면 비진리 가운데 있다. 여기서 이 명칭[비진리]은 퇴락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명칭을 실존론적-분석적으로 사용할 때는, 존재[자]적으로 소극적인 모든 평가는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존재의 현사실성에는 폐쇄성과 은폐성이 속해 있다. 현존재는 진리 가운데 있다는 명제의 완전한 실존론적-존재론적 의미는, 등근원적으로, 현존재는 비진리 가운데 있다를 함축한다. 그러나 현존재가 개시되어 있는 한에서만, 현존재는 또한 은폐되어 있다 ; 그리고 현존재와 더불어 그 때마다 이미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발견되어 있는 한, 그 존재자는 세계 내부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으로서 은폐(은닉)되거나 위장되는 것이다.(221-222, 315-316)


 


진리(피발견성)는 언제나 먼저 존재자로부터 쟁취되어야 한다. 존재자는 은닉성으로부터 탈취된다. 그때그때의 현사실적 피발견성은, 말하자면 언제나 하나의 탈취이다. 그리스인들이 진리의 본질에 대해 결여적 표현(a-letheia)[알-레테이아]으로 말하는 것은 우연한 일일까? 그렇게 현존재가 자기를 언표하는 가운데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한 근원적 존재이해가 고지(告知)되어 있지 않는가? 비록 그 존재이해라는 것이 ‘비진리-내-존재’는 세계-내-존재의 한 본질적 규정을 이룬다는 것에 대한 전 존재론적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222, 316-317)


 


세계-내-존재가 진리와 비진리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에 대한 실존론적-존재론적 조건은 우리가 피투적 기투라고 성격지은 바 있는 현존재의 존재 틀에 있다. 이 존재 틀은 마음씀의 구조의 한 구성요소이다.(223, 317)


 


진리의 현상에 대한 실존론적-존재론적 해석은 다음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 1. 진리는 가장 근원적 의미로는 현존재의 개시성이며, 이 개시성에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피발견성이 속한다. 2. 현존재는 진리와 비진리 가운데 등근원적으로 있다.(223, 317)


 


가장 근원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진리는 현존재의 근본 틀에 속한다. 이 명칭[진리]은 한 실존범주를 가리킨다. 이것으로써 진리의 존재양식에 대한 물음과 진리는 있다는 전제의 필연성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할 대답의 밑그림은 이미 그려진 셈이다.(226, 321)


 


(4) 진리의 존재양식과 진리를 전제함


현존재가 개시성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한, 현존재는 본질상 진리 안에 있다. 비록 일상적 현존재가 비진리 안에 있을지언정, 그것도 본질적으로는 현존재가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진리는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또 그 동안에만 주어져 있다. 달리 말하자면, 존재자는 현존재가 있는 그 때에만 발견되고 그 동안만 개시된다. 만약 현존재가 있지 않았다면, 뉴톤의 법칙이라든가 모순율 따위의 진리도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영원한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한 진리도 영원히 현존재가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의 영원성에 대한 증명이 미결로 남아 있는 한, 영원한 진리에 대한 주장은 공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현존재의 양식을 갖는다. 진리는 현존재의 존재와 상관적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진리가 마치 인간 주관의 자의에 맡겨져 있는 양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진리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이라는 점 뿐이다.


때문에 진리는 현존재를 현존재로서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진리를 전제한 채 현존재를 이해해야 한다. 전제란 어떤 것을 다른 어떤 존재자의 존재 근거로서 이해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진리를 전제한다는 것은, 진리를 현존재의 궁극목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현존재는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인 마음씀은 이미 본래적 자기에게 도달할 구조계기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실존성의 계기인 ‘자기를 앞지름’이다. 현존재는 비진리 안에 빠져 있는 일상적 자기를 앞질러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에 이르러야 한다. 현존재는 본질 구조상 이미 진리와 함께 있기에, 진리를 전제해야 한다. 진리가 있는 한에서만 (본래적) 존재는 있는 것이요, 또 진리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동안에만 있는 것이다.


 


[읽기자료]


현존재는 개시성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므로 본질상 진리 가운데 있다. 개시성은 현존재의 본질적 존재양식이다. 진리는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또 그 동안에만  [주어져] 있다. 존재자는 도대체 현존재가 있는 그 때에만 발견되고 그 동안만 개시된다. 뉴턴의 법칙, 모순율 따위의 모든 진리는 현존재가 있는 한에서만 일반적으로 참이다. 현존재가 도대체 있지 않았던 이전과, 현존재가 도대체 있지 않게 될 이후에는, 진리는 없었고, 없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 때에는 진리는 개시성, 발견 및 피발견성으로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뉴턴 법칙들이 발견되기 전에는 그것들은  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은 거짓이었다거나, 더욱이 어떤 피발견성도 존재[자]적으로 불가능하게 되면 그것들은 거짓이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226-227, 321-322)


 


영원한 진리가 있다는 것은 영원히 현존재가 있었고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것이 성공적으로 증명되었을 때 비로소 충분히 입증될 것이다. 이 증명이 미결로 남아 있는 한, 그 명제는 공상적 주장에 불과하다. 철학자들이 흔히 믿었다는 것으로 그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227, 322)


 


모든 진리는 본질적 현존재적 존재양식에 따라, 현존재의 존재와 상관적이다. 이 상관성은 ‘모든 진리는 주관적 이다’와 같은 뜻인가? 주관적 이라는 것이 주관의 자의에 맡겨짐 이라고 해석된다면, 확실히 그렇지는 않다. 왜냐 하면 발견한다는 것은 그 가장 고유한 의미에 따르면, 진술을 주관적 자의로부터 떼어내서 발견하는 현존재를 존재자 자체 앞에 직면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직 발견으로서의 진리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에, 진리는 현존재의 자의로부터 떼어내질 수 있다. 진리의 보편 타당성 도 현존재가 존재자를 그 자체에 즉해서 발견하고 개현할 수 있다는 데에 전적으로 뿌리박고 있다.(227, 322)


 


실존론적으로 파악된 진리의 존재양식으로부터 이제 ‘진리를 전제한다’는 의미도 이해된다. 왜 우리는 진리가 [주어져] 있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전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가 [주어져]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진리를 전제한다, 왜냐 하면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으로 있으면서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를 우리 밖이나 우리를 넘어서 있는 어떤 것으로서 전제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다른 가치들을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전제하는 자로서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일반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진리가 비로소 전제라든가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227-228, 323)


 


전제한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어떤 것을 다른 어떤 존재자의 존재의 근거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존재자를 그 존재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개시성, 즉 ‘현존재가 발견적 존재’임을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진리를 전제한다는 것은, 진리를 현존재가 궁극 목적으로 하는 어떤 것으로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현존재는 - 그것은 마음씀으로서의 존재 틀 안에 있다 - 그 때마다 이미 자기를 앞질러 있다. 현존재란 자기의 존재에 있어서 가장 독자적인 존재 가능을 문제삼는 그런 존재자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와 존재 가능에는 본질적으로 개시성과 발견이 속해 있다. 현존재에게 문제되는 것은 그의 세계-내-존재-가능이고, 그 속에서 [현존재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배시적으로 발견하면서 배려한다. 마음씀으로서의 현존재의 존재 틀 속에, 즉 ‘자기를 앞질러 있음’ 속에 가장 근원적 전제함이 놓여 있다. 현존재의 존재에는 이 ‘자기를 전제함’이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를 개시성에 의해 규정된 자로서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존재의 존재 속에 놓여 있는 이 전제함은 현존재 이외에 주어져 있는 비현존재적 존재자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오직 현존재 자신에 대한 태도이다. 전제된 진리 또는 진리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어야 할 그  [주어져] 있음 은, 현존재 자신의 존재양식 또는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진리의 전제를  짓(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진리가 우리의 존재와 함께 이미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228, 323-324)


 


진리가 있는 한에서만, 존재 - 존재자가 아니다 - 는  [주어져] 있다. 그리고 진리는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또 그 동안에만 있다. 존재와 진리는 등근원적으로  있다.(230, 326)


 


6.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 죽음과 양심


현존재의 구조 전체는 세계-내-존재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가 마음씀(Sorge)이다. 마음씀은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으로서 자기를 앞질러 이미 (세계) 내에 있음(Sich- vorweg-schon-sein-in (der Welt) als Sein bei (innerweltlich) begegnendem Seienden)”이다. 하이데거는 마음씀을 “현존재 틀의 구조 전체의 전체성”이라고도 명명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을 단초로 삼고 있다. 일상성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은 해석의 단초에서부터 현존재의 전체성을 시야에서 놓쳐 버린 셈이다. 더욱이 일상적 현존재는 비본래적 현존재이다. 물론 불안에 대한 분석은 일상적인 비본래적 현존재가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여하튼 본래적 현존재가 실존론적 분석의 대상은 아니었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해석하여 왔던 현존재는 비본래적 현존재이며, 그것도 전체적이지 않은 현존재였다. 따라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현존재를 그것의 전체성과 본래성에서 확보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이 근원성에 대한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현존재의 존재를 미리 그 가능한 본래성과 전체성에서 실존론적으로 밝혀 놓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죽음(Tod)과 양심(Gewissen)을 만나게 된다. 종래의 존재론에서 죽음과 양심은 주요한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대체로 죽음과 양심은 종교상의 문젯거리거나 혹은 고작해야 윤리학 정도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죽음과 양심은 현존재의 근원성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함에 있어 주도적 문젯거리로 부각된다.


현존재의 근원성은 죽음과 양심에 의해 확보된다. 죽음과 양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 우리는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을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현존재가 죽음을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죽음을 향해 극단적으로 기투하였을 때이고, 또한 양심은 현존재가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자신의 본래적 피투성을 회복하였을 때 가능하다라는 점이다. 즉 개시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죽음은 기투(혹은 이해)에, 양심은 피투성(혹은 정상성)에 관련되고, 또한 마음씀의 차원에서 보자면, 죽음은 실존성에, 양심은 현사실성에 관련된다. 따라서 죽음과 양심을 실존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이 결국은 마음씀의 양상임을 입증하게 된다.


그러면 죽음과 양심의 실존론적 분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가? 우선은 죽음의 문제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1) 죽음


(독: Tod, 영: Death)


 


(1) 죽음의 경험 불가능성


죽음은 세계-내-존재의 종말이다. 종말로서의 죽음이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성을 한계짓고 규정한다. 그러나 현존재의 전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현존재가 지금 당장 죽을 수는 없다. 죽은 이후 현존재는 현존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죽음을 존재자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기초로 현존재의 전체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존재가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자기의 전체 존재를 확보할 다른 방안은 없는 것인가? 혹자는 타자의 죽음을 대리주제(代理主題)로 선택할 것을 제안한다. 타자란 공동 현존재이다. 타자가 생을 마감하였을 때 우리는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더욱이 우리와 가까운 타자는 비록 죽었을 망정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고인(故人)은 장례, 매장, 묘제의 방식에서 ‘배려’의 대상이 될 뿐더러, 유족은 경건하게 고인을 고려하는 가운데 애도와 회상에 잠긴 채 고인과 공동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인의 죽음을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타자의 죽음의 현장에 입회할 뿐 그의 죽음을 경험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각자 자기의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에 관한 한 대리주제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에 이른 타자의 현존재를 현존재 전체성의 분석을 위한 대리주제로 선택했던 대안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타자의 죽음에 대한 분석이 반드시 부정적 결과만을 나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현존재의 죽음이 갖는 두 가지의 주요한 의미를 포착한다. 1) 물론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 대신 죽을 수는 있으나, 타자로부터 그의 죽음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현존재의 죽음은 각자의 것이다. 2) 현존재의 죽음은 생물의 종말과 구별된다. 앞서 논의하였듯, 현존재는 죽은 이후에도 배려의 대상이 되고 또한 유족과 공동 존재한다. 현존재의 죽음은 단지 생리학적-생물학적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물의 종말을 “끝장”이라 술어화함으로써 현존재의 죽음과 차별화한다.


 


[읽기자료]


[버려진] 사망자와는 달리 유족들로부터 빼앗겨간 고인(故人)은 장례, 매장, 묘제의 방식으로 배려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까닭은 역시 고인이 그 존재양식상, 단지 환경세계적으로만 배려할 수 있는 용재적[用在的] 도구 이상이기 때문이다. 애도와 회상에 잠겨 그의 곁에 머물러 있을 때, 유족들은 ‘경건한 고려’의 양상에 있어서 그와 함께 있다[공동존재]. 그러므로 사자(死者)에 대한 존재관계는 용재자[用在者] 에 몰입해서 배려하는 존재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238, 341)


 


사자와 유족이 함께 있음[공동존재]에도 불구하고, 망자 자신 이상 현실적으로 ‘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동존재는 언제나 동일한 세계내의 상호존재를 의미한다. 고인은 우리의 세계를 버리고, 그것을 뒤에 남긴 것이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이 세계에 입각해서 아직 고인과 함께 있을 수 있다.(238, 341)


 


고인이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현상적으로 적합하게 이해되면 될수록 그만큼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자와 함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고인 자신이 본래적으로 ‘종말에 이르렀음’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과연 상실로서 드러나지만, 그 상실은 남아 있는 자들이 경험하는 상실 이상이다. 그러나 상실을 감내(堪耐)함에 있어서도 죽어가는 자가 감내하는 존재상실 자체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고작 언제나 거기[죽음의 현장]에 입회할 뿐이다.(238-239, 341-342)


 


현장에 입회해서 타자가 죽어가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용인된다 하더라도, 타자의 사망으로 생각되는 존재방식, 즉 [사자 자신의] ‘종말에 이름’은 결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죽어가는 자의 사망, 즉 그의 존재의 한 존재 가능성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이지, 고인이 유족과 함께 현존하고 사후에도 현존하는 방식이 아니다. 현존재의 종말과 전체성을 분석하기 위해 타자에 즉해서 경험되는 죽음을 [대리] 주제로 삼으라는 지시는 그 지시가 줄 수 있으리라고 예상한 것을 존재[자]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주지 못한다.(239, 342)


 


현존재가 종말에 이르고 그에게 그 자체로서 전체를 주는 그런 존재 가능성의 대리가 문제될 때는, 위에서 말한 대리 가능성은 완전히 좌절되고 만다. 아무도 타자로부터 그의 사망을 제거해줄 수는 없다. 물론 누군가가 타인을 대신해서 죽음에 나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특정한 사상[事象] 하에서 타자를 위한 자기 희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대리 사망은, 그 대리 사망을 통해, 타자로부터 그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제거해 주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사망은 어느 현존재든 그 때마다 스스로 인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죽음은, 그것이 있는 한, 본질적으로 그 때마다 나의 죽음이다. 과연 죽음은, 그 때마다 자기의 독자적 현존재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문제되는, 그런 독특한 존재 가능성을 의미한다. 사망[현상]에서 드러나는 것은, 죽음은 각자성과 실존에 의해 존재론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사망은 결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현상이고, 그것도 좀더 자세하게 한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240, 343)


 


나아가서, ‘더 이상 세계-내-존재가 아님’, 즉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님’에로의 현존재의 이행을 성격지울 때 드러난 것은, 사망이라는 의미에서 ‘현존재 세상을 떠나는 것’은 ‘단지 생물적인 것이 세상을 떠나는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적인 것의 종말을 우리는 술어상 ‘끝장’이라 한다. 이 차이는 생명의 종말과 현존재의 종말을 구별함으로써만 분명해질 수 있다. 물론 사망은 생리학적-생물학적으로도 이해된다. 그러나 운명(殞命)이라는 의학적 개념은 ‘끝장’이라는 개념과 일치하지는 않는다.(240-241)


 


(2) 죽음에 이르는 존재


이제 우리는 현존재의 죽음이 갖는 이러한 의미를 단서로 하여 현존재의 죽음을 해명하고자 한다. 이 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직 아님’ 혹은 미제(未濟, Ausstand)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현존재의 죽음이 갖는 ‘아직 아님’, 혹은 미제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현존재의 전체성을 확보할 새로운 길을 마련하고자 한다.


현존재의 존재는 마음씀이다. 또한 마음씀의 일차적 계기는 ‘자기를 앞지름’(sich vorweg, 기투)이다. 언제나 그때마다 궁극목적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는 것이 현존재의 실존구조이다. 그런데 현존재가 ‘존재하는 동안’ 자기를 앞지를 수 있기 위해서는 여분의 자기의 삶이 남아 있어야 한다. 앞지를 것으로 남아 있는 여생(餘生)있기에, 현존재는 ‘아직 아님’이다. 이러한 의미의 ‘아직 아님’을 우리는 ‘미제’(未濟, Ausstand)라고도 명명한다.


실로 삶에 대한 절망이나 ‘만사에 대한 각오’도 어떤 것이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기에 가능하다. 현존재의 근본 틀의 본질에는 부단히 미완결성이 있다. 더욱이 현존재에게 미제로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게 된다면, 그것으로 이미 그 현존재는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님’이 되고 만다. 따라서 언뜻 보면 미제 안에 실존할 수밖에 없는 현존재에게서 존재론적 전체성을 읽어낸다는 것은 가망 없는 기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현존재의 ‘아직 아님’을 미제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 것인가는 여부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미제는 대개 용재자(用在者)와 전재자(前在者)에게 해당되는 개념이다.


첫째, 우리가 아직 받지 못한 빚의 잔금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빚의 잔금을 미제(혹은 미제분)라고 명명한다. 이런 의미의 미제는 잔금을 회수하였을 때 정산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빚’이라는 존재자의 존재양식이 변양되지는 않는다. 빚은 미제로 남아 있건 혹은 정산되었건 여전히 용재자이다. 하지만 현존재의 경우는 다르다. 현존재의 ‘아직 아님’이 채워졌을 때 현존재는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용재자의 차원에서의 미제라는 개념이 현존재의 ‘아직 아님’에게 적용될 수 없다.


둘째, 초승달과 만월(滿月)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초승달의 관점에서 보자면 만월은 미제로서 있다. 그러나 달을 가리던 그림자가 사라짐에 따라 초승달이 만월이 된다라고 해서, 전재자(前在者)로서의 달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지각적 파악작용과 관련된 것일 뿐, 전재자로서의 존재양식이 변양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재의 경우는 다르다. 현존재의 ‘아직 아님’이 충족된다는 것은 존재와 비존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재자의 차원에서의 미제라는 개념이 현존재의 ‘아직 아님’에게 적용될 수 없다.


셋째, 아직 익지 않은 과일처럼, 생성하는 존재자를 생각해 보자. 미숙한 과일은 성숙을 향해 나간다. 익어가는 과일은 익어가면서 미숙으로 있다. ‘아직 아님’이 과일의 독자적 존재에 이미 수용되어 있다. 이점에서는 현존재도 마찬가지이다. 현존재도 존재하는 동안은 그때마다 자신의 ‘아직 아님’으로 있다. 그런데 과일은 성숙과 함께 자기를 완성한다. 과일에게 미제의 충족은 완성을 의미한다. 과일의 ‘종말’은 완성이다. 그러나 현존재의 ‘종말’은 죽음이다. 더욱이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성숙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죽음에 이르기 전 성숙에 도달하는 이도 있으나, 대개의 현존재는 미완성으로 끝나버린다.


현존재의 ‘아직 아님’을 미제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미제는, 청산되지 않은 빚, 혹은 그림자가 가리어져 있는 초승달, 혹은 아직 익지 않은 과일의 경우에서 보듯, ‘충족되어야 할 전체’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현존재에게는 이런 의미의 ‘전체’란 없다. 오히려 현존재는 그 때마다 언제나 자신의 ‘아직 아님’으로 있을 뿐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현존재에게 종말은 서서히 다가오는 어떤 ‘전체’가 아니라, 현존재는 매 순간마다 이미 종말로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종말에 이르는 존재’(Sein zum Ende)이다. 즉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읽기자료]


마음씀의 일차적 계기, 즉 자기를 앞지름 [기투]은 ‘현존재는 그 때마다 자기 자신을 궁극 목적으로 해서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가 존재하는 동안, 그는 종말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존재 가능에 대해 태도를 취한다. 현존재가 자기 앞에 아무 것도 가진 바 없고, 또 자기의 결산을 끝마쳤을 때에[라]도 그가 아직 실존한다면, 그의 존재는 여전히 자기를 앞지름에 의해 규정된다. 예컨대, 절망이라는 것도 현존재를 그의 제 가능성으로부터 절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 가능성을 향한 존재의 특유한 한 양상일 뿐이다. 이에 못지 않게, 미혹없이 만사에 대해 각오하고 있다는 것도 자기 안에 자기를 앞지름을 감추고 있다. 마음씀의 이 구조계기가 분명히 말하는 바는, 현존재에게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으로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떤 것이 여전히 미제(未濟)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근본 틀의 본질에는 부단한 미완결성이 있다. 비전체성이라 함은 존재 가능에 붙어 있는 이 미제를 의미한다.(236, 337-338)


 


하지만 현존재에게 미제로 남아 있는 것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도록 그렇게 현존재가 실존하게 되면, 그것으로 이미 그 현존재는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님’이 되고 만다. 존재의 미제를 제거한다는 것은 곧 현존재의 존재소멸을 의미한다. 현존재가 존재자로서 있는 동안, 현존재는 자기의 전체를 결코 달성하지 못한다. 만일 그 전체를 획득한다면, 그 획득은 세계-내-존재의 단적인 상실이 된다. 그 때에는 현존재는 결코 더 이상 존재자로서 경험할 수 없게 된다.(236, 338)


 


현존재를 존재하는 전체로서 존재[자]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그 결과 그 전체 존재에 있어서 존재론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인식능력의 불완전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장애(障碍)는 이 존재자의 존재 쪽에 있다. 경험에 의한 현존재 포착이 참망(僭望)하는 것처럼, 그렇게 애초부터 있을 없는 것 [즉, 미제가 전혀 없는 전체 존재]은 원칙상 경험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현존재에게서 존재론적 존재 전체성을 읽어낸다는 것은 가망 없는 기도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236, 338)


 


죽음과 함께 그 종말을 고하는 ‘부단한 비전체성’은 현존재에게서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그 현존재에게는 ‘아직 아님’이 속해 있다는 현상적 실상을 미제라고 해석해도 무방한가? 어떤 존재자와 관련해서 우리는 미제를 말하는가? 미제라는 표현은 어떤 존재자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여로서의 미제는 일종의 귀속성에 근거한다. 미제는, 예컨대 아직 받지 못하고 있는 빚 정산의 잔금이다. 미제분은 아직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빚의 반환, 즉 미제의 제거는 잔금이 차츰 회수되는 입금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아직 아님’이 말하자면 채워져서 마침내 빚의 총액이 함께 모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제는 함께 귀속되어야 할 것이 ‘아직 모아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회수되어야 할 부분이 용재적[用在的]으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수되어야 할 부분은, 이미 입금되어 용재적으로 있는 것과 같은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어서, 잔금이 입금되었다고 해서 그 존재양식이 변양되는 것은 아니다. 상존하는 ‘함께 있지 않음’은 [잔여] 부분을 [회수해서] 쌓아 모음으로써 상각(償却)된다. 어떤 것을 아직도 미제분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자는 용재자[用在者]라는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 ‘함께 모아짐’ 또는 거기에 기초한 ‘함께 모아져 있지 않음’을 우리는 총액이라고 성격짓는다.(242, 346-347)


 


그러나 ‘함께 모아짐’의 그런 양상에 속하는 ‘함께 모아져 있지 않음’, 즉 미제로서의 결여는, 가능한 죽음으로서 현존재에 속하는 ‘아직 아님’을 결코 존재론적으로 규정하지 못한다. 이 존재자[현존재]는 도대체 세계 내부적 ‘용재자’[用在者]의 존재양식을 갖고 있지 않다. 현존재가 자기 생애를 마칠 때까지 자기의 경력을 쌓아가는 것으로서 ‘존재자를 함께 모으는 것’은, 어떻게든 또 어디에서든, 그 본성상 이미 용재적[用在的]으로 있는 존재자를 계속해서 잇대가는 것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현존재는 자기의 ‘아직 아님’이 채워질 때 비로소 ‘함께 모아져’ 있는 것이 아니니, 바로 그 때는 그는 더 이상 현존재가 아니다. 현존재는 자신의 ‘아직 아님’이 자신에게 속해 있는 바로 그대로 그 때마다 이미 언제나 실존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있으면서, 그리고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질 필요가 없으면서, ‘아직 아님’을 갖고 있는 존재자는 없는가?(243, 347)


 


예컨대, 사람들은 ‘만월(滿月)이 되기까지 달에는 마지막 4분의 1이 아직 채워지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아직 아님’은 달을 가리고 있는 그림자가 사라짐에 따라 감소된다. 그 때에도 달은 언제나 이미 전체로서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다. 만월일 때에도 달은 전체적으로 파악될 수 없지만, 그것은 차치하더라도, 그 ‘아직 아님’은 달에 속하는 부분들이 아직 함께 모아져 있지 않다는 뜻이 결코 아니고, 전적으로 지각적 파악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재에 속하는 ‘아직 아님’은 일시적으로든 가끔으로든 자기의 경험으로나 남의 경험으로 미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대체 그것은 아직 실제적으로 있지 않다. 우리의 문제는 현존재적 ‘아직 아님’의 파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가능한 존재 또는 비존재 관련된다. 현존재는, 그 자신으로서, 아직 그가 아닌 것으로 되어야 한다. 즉, 존재해야 한다. 그리하여 현존재적 ‘아직 아님’의 존재를 [달의 예처럼] 비교해서 규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존재양식이 ‘생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자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243, 347-348)


 


예를 들면, 익지 않은 과일은 그 성숙을 향해간다. 이때, 과일이 익어 감에 따라 ‘아직 그것이 아닌 것’[성숙의 상태]이 ‘아직 전재[前在]하지 않는 것’으로서 잇달아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과일 자신이 성숙해 가는 것이며, 그런 자기 성숙을 통해 과일의 존재는 과일로서 성격지어진다. 과일이라는 존재자가 자기 스스로 익어가지 않는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과일의 미숙(未熟)은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미숙의 ‘아직 아님’은 과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에 붙어서 또는 과일과 함께 전재적[前在的]으로 있을 수 있는 어떤 외부의 타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미숙의 ‘아직 아님’은 특수한 존재양식으로 있는 과일 자신을 가리킨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총계는 용재자[用在者]이므로, 비용재적[非用在的]이고 [아직] 없는 나머지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총계는 나머지에 대해 아무럴 수도 없고 아무렇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익어가는 과일은 과일 자신의 타자로서의 미숙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기는커녕, 익어가면서 미숙으로 있다. ‘아직 아님’은 과일의 독자적 존재에 이미 수용되어 있다. 그것도 임의의 규정으로서가 아니라 [본질적] 구성요소로서 수용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존재도 존재하는 동안은 그 때마다 이미 자신의 ‘아직 아님’으로 있다.(243-244, 348)


 


현존재에 있어서 비전체성을 형성하는 것, 즉 부단히 ‘자기를 앞지름’은 ‘총계적으로 함께 모아지는 것’의 미제도 아니고, 더구나 ‘아직 접근 가능하게 되어 있지 않음’도 아니며, 그 때마다 현존재가 존재하는 그 존재자로서 [장차]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직 아님’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과일의 미숙과 비교해 보면, 더러는 일치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구별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구별에 주목하면, 종말과 끝남에 관한 이제까지의 얘기가 무규정적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244, 348-349)


 


설사 성숙한다는 과일의 특수한 존재가 ‘아직 아님’(미숙)의 존재양식으로서는 형식상 현존재와 일치한다 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현존재와 과일이 다 같이 상금 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는 그 때마다 이미 자신의 ‘아직 아님’으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종말로서의 성숙과 종말로서의 죽음이 존재론적 종말 구조의 점에서도 합치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과일은 성숙과 함께 자기를 완성한다. 그러나 현존재가 도달하는 죽음도 과연 그런 의미에서의 완성인가? 현존재는 아닌게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생애를 마친다. 현존재도 역시 그것으로 필연적으로 자신의 특수한 가능성을 다하는 것인가? 도리어 가능성이 현존재로부터 곧바로 박탈되는 것이 아닌가? 미완성의 현존재도 끝난다. 그런가 하면,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과 함께 비로소 성숙에 도달할 필요 없이 종말에 이르기 전에 이미 성숙을 통과하는 일도 있다. 현존재는 대개는 미완성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무너져서 초췌하게 끝나고 만다.(244, 349)


 


끝난다는 것이 반드시 자기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욱 절실한 물음은, 어떤 의미에서 도대체 죽음은 현존재의 종말로서 파악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244, 349)


 


오히려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부단히 이미 자신의 ‘아직 아님’으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존재는 이미 언제나 자신의 종말로 있기 하다. 죽음이란 말이 의미하는 끝남은, 결코 현존재의 ‘끝막음’이 아니라, 이 존재자가 종말에 이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그 현존재가 인수한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 <.(245, 350)


 


‘아직 아님’을 밝히는 데서 출발하여 끝남의 성격구명을 거쳐 현존재의 전체성을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고자 했던 우리의 시도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시도가 단지 소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그 때마다 현존재가 존재하는 ‘아직 아님’을 미제로서 해석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이다. 현존재는 종말을 향해 실존하면서 있지만, 그 종말을 ‘끝막음’으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245-246, 351)


 


(3) 죽음의 실존론적 존재론적 구조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는 마음씀이다. 마음씀은 실존성, 피투적 현사실성, 퇴락의 3계기로 구성된다. 따라서 죽음이 두드러진 의미에서 현존재의 존재에 속한다면, 죽음의 의미도 3계기에 근거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죽음의 실존론적 존재론적 구조의 밑그림을 얻게 될 것이다.


첫째, 죽음은 그 가능성이 최소한으로 줄어든 최후의 미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현존재의 존재유무를 가늠하는 가장 두드러진 의미에서의 다급함이다. 즉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런데 현존재가 죽음을 이처럼 두드러진 다급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현존재가, 성숙을 기다리는 과일과는 달리, 언제나 이미 자기를 앞질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를 앞지름’이라는 마음씀의 구조계기(즉 실존성)를 근거로 해서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현상적으로 더욱 명료해지는 것이며, 또한 역으로 말하자면, 마음씀의 이 구조계기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서 가장 근원적으로 구체화된다.


둘째, 죽음은 마음씀의 두 번째 구조계기인 피투적 현사실성과도 관련된다. 현존재가 자기를 앞질러 죽음을 문제삼을 수 있는 까닭은 현존재가 이미 죽음의 가능성 가운데로 던져져(피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에로의 피투성이 현존재에게 가장 근원적이고 절실하게 노정되는 것은 불안이란 근본 정상성(情狀性)에서이다. 불안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기에 불안거리는 물론, 불안의 이유도 단적으로 현존재의 세계-내-존재 가능이다.


셋째, 마음씀의 세 번째 구조계기는 퇴락이다. 일상적 현존재는 우선 대개는 자신이 배려하는 >세계<에 몰입한다. 그러기에 일상적 현존재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가져오는 ‘으스스함’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피는 일상적 현존재가 ‘죽음에 이르는 가장 독자적 존재’를 은폐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따라서 마음씀의 세 구조 계기인 실존성, 피투적 현사실성, 퇴락이 죽음의 존재론적 실존론적 구조를 형성한다. 죽음은, 그 존재론적 가능성에서 보자면, 마음씀에 근거한다.


 


[읽기자료]


미제, 종말 및 전체성에 관한 고찰이 초래한 결과로 분명해진 것은, 죽음의 현상을 ‘종말에 이르는 존재’로서의 현존재의 근본 틀로부터 해석해야 한다는 필연성이었다. 그렇게 해서만 ‘종말에 이르는 존재’에 의해 구성되는 전체 존재라는 것이 어느 만큼 현존재 자신에 있어서 가능한가 하는 것이 그 존재구조에 따라 명료해질 수 있다. 현존재의 근본 틀은 마음씀이라고 밝혀졌다. 이 말[마음씀]의 존재론적 의의를 정의로 표현하면,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있음으로써 자기를-앞질러-이미-(세계) 내에-있음’이다. 이것으로 현존재의 존재의 기초적 성격들이 표현되었다. 즉, ‘자기를 앞지름’에서는 실존이, ‘이미 … 에 있음’에서는 현사실성이, ‘… 에 몰입해 있음’에서는 퇴락이 표현되어 있다. 죽음이 두드러진 의미에서 현존재의 존재에 속한다면, 죽음(또는 종말에 이르는 존재)은 이들 성격을 근거로 해서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249-250, 356)


 


죽음은 그 때마다 현존재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존재 가능성이다. 현존재 자신은 죽음과 함께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 자기에게 다급하게 다가선다. 이 가능성에 있어서 현존재에게는 자신의 세계-내-존재가 단적으로 중대하게 문제된다. 현존재의 죽음은 ‘더 이상 현존재일 수 없다’는 가능성이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이런 가능성으로서 자신에게 다급하게 다가설 때, 현존재는 완전히 자신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해 지시받고 있다. 그렇게 자신에게 다급하게 다가설 때, 그에게는 다른 현존재에 대한 모든 교섭이 단절된다.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이 가능성은 동시에 가장 극단적 가능성이다. 현존재는 존재 가능으로서 죽음의 가능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 죽음은 현존재의 ‘절대적 불가능성’이라는 가능성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으로서 드러난다. 그런 가능성으로서 죽음은 하나의 두드러진 다급함이다. 다급함의 실존론적 가능성의 근거는,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개시되어 있다는 데, 더욱이 ‘자기를 앞지른다’는 방식으로 개시되어 있다는 데 있다. 마음씀의 이 구조계기['자기를 앞지름']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서 가장 근원적으로 구체화된다. ‘종말에 이르는 존재’가 현상적으로 더욱 명료해지는 것은 현존재자가 위와 같이 성격지워진 두드러진 가능성을 향한 존재일 때이다.(250-251, 357-358)


 


그러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은 현존재가 자기 존재의 경과 중에 추후적으로 또 수시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현존재가 실존할 때, 현존재는 이미 이 가능성 가운데 던져져 있는 것이다. 현존재가 자기의 죽음에 맡겨져 있고 따라서 죽음이 세계-내-존재에 속한다는 것, 그것에 대해 현존재는 우선 대개 명시적으로 더구나 이론적으로 알지 못한다. 죽음 속에 던져져 있다는 것이 현존재에게 더 근원적이고 더 절실하게 노정되는 것은, 불안의 정상성[情狀性]에서이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 가능에 직면한 불안이다. 불안거리[불안의 대상]는 세계-내-존재 자체이다. 불안의 이유는 단적으로 현존재의 존재 가능이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종명(終命)에 대한 두려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인의 자의적이고 우연한 나약한 기분이 아니라 현존재의 근본 정상성이며, 현존재가 자기의 종말을 향해 던져진 존재로서 실존한다는 데 대한 개시성이다. 이로써 사망의 실존론적 개념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 가능을 향해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죽음은 [전재자의] 순수한 소멸과도, 또 [생물의] 단순한 끝장과도, 끝으로 [생물로서의 인간의] 종명의 체험과도 엄격하게 구별된다.(251, 358)


 


‘종말에 이르는 존재’란 이따끔 떠오르는 어떤 소회(所懷)에 의해 또 그런 소회로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현존재의 피투성에 속하는 것이고, 이 피투성은 (기분의) 정상성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드러난다. (…) 현사실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우선 대개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을 구실로 해서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보편적으로 현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존재가 우선 대개 직면한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여 죽음에 이르는 가장 독자적 존재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일 뿐이다.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 그는 현사실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우선 대개는 퇴락의 방식으로 죽는다. 왜냐 하면 현사실적 실존은, 일반적으로 또 무차별적으로 피투적 세계-내-존재-가능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배려되는 세계 속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 에 몰입하여 퇴락하는 존재’에서 고지되는 것은 ‘으스스함’으로부터의 도피, 다시 말하면 이 경우 ‘죽음에 이르는 가장 독자적 존재’로부터의 도피이다. 실존, 현사실성, 퇴락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의 성격규정이고, 따라서 죽음의 실존론적 개념을 구성한다. 사망은 그 존재론적 가능성의 점에서는 마음씀에 근거한다.(251-252, 358-359)


 


(4)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이것이 ‘죽음의 실존론적 개념’이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인 세인은 죽음으로부터 도피한다. 이러한 도피를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는 세인은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명을 통해 우리는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개념’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에 대한 해명의 단서는 세인의 빈 말(Gerede)이다. 세인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말을 입에 물고 다닌다. 또 ‘나도 언젠가는 죽지만 당장은 아니다’라고 자위한다. 죽음은 남들이 겪는 사망사건 정도로 해석된다. 즉 세인은 죽음의 확실성을 애매하게 인정하기에, ‘나의 죽음’은 먼 뒷날로 천연된다. 평균수명을 들먹이는 우리의 모습이 그것이다. 매 순간 가능한 죽음의 확실성이 은폐될 뿐더러, 언제 어느 때라도 다급하게 찾아오는 죽음의 무규정성마저 왜곡되어 ‘언제가는 죽을 것’이라는 변질된 무규정성이 등장한다. 솔직히 말하면, 죽음의 이러한 무규정성으로부터 마저 도피하는 것이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이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죽음이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일 뿐더러 확실하고 무규정적인 가능성이라는 실상이 감추어지진 않는다. 오히려 세인의 빈 말은 우리에게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존재론적 개념’을 보여준다. “현존재의 종말로서의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확실하고, 그 자체로서 무규정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읽기자료]


죽음에 이르는 일상적 평균적 존재는 앞에서 얻어진 일상성의 구조에 정위해서 밝혀진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 있어서 현존재는 하나의 두드러진 존재 가능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일상성의 자기는 세인이고, 세인은 공공적 피해석성에 있어서 구성되며, 이것은 빈 말 속에서 언표된다. 따라서 빈 말은 일상적 현존재가 죽음에 이르는 자기의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 해석하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해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그 때마다 이해이다. 이 이해는 또한 언제나 정상적[情狀的] 이해, 즉 기분에 젖은 이해이다. 그러므로 물어져야 하는 것은, 세인의 빈 말 속에 놓여 있는 정상적 이해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를 어떻게 개시하는가하는 것이다. 세인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면서 대응하는가? 어떤 정상성[情狀性]이 또 어떤 방식으로, [현존재가] 죽음에 맡겨져 있음을 세인에게 개시하는가?(252, 360)


 


유혹, 안주 및 소외는 퇴락이라는 존재양식의 특성이다. 죽음에 이르는 일상적 존재는 퇴락하는 존재로서 죽음으로부터의 부단한 도피이다. 종말에 이르는 존재는, 이렇게 종말의 해석을 바꾸면서, 비본래적으로 이해하면서, 죽음을 은폐하면서, 종말로부터 회피하는 양상을 갖는다. 그 때마다 나의 것인 독자적 현존재가 현사실적으로 언제나 이미 죽으면서 있다는, 즉 현존재가 스스로 종말에 이르는 존재 속에 있다는 이 현사실을 현존재는 죽음이란 일상적으로 남들에게서나 발생하는 사망사건이라고 변조함으로써 자신에게는 은폐한다. 그리하여 그 사망사건은 어쨌든 그 자신은 물론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보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의 퇴락적 도피로써 현존재의 일상성이 입증하는 것은, 세인이 비록 명시적으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그 때마다 이미 그 자신도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평균적 일상성에 있어서도 현존재가 부단히 문제삼는 것은,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며,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 가능이다. 자기 실존의 가장 극단적 가능성[죽음]에 대항해서 번거롭지 않은 무관심이라는 배려의 양상만을 취할 경우에도 그렇다.(254-255, 363)


 


죽음에 이르는 일상적 존재의 해명은 ‘사람은 언젠가는 죽지만 당장은 아직 아니다’라는 세인의 빈 말에 의거했다. 이제까지 해석된 것은, 사람은 죽는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언젠가는, 그러나 당장은 아직 아님에서 일상성은 죽음의 확실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시인하고 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속에, 앞에서 성격지은 바 있는 ‘두드러진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 현존재 속에 들어와 있는 죽음에 상응하는 그런 확실존재[확실성]를 간수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일상성은 이렇게 죽음의 확실성을 애매하게 시인하는 데 머물러 있다. 그것은 사망을 더욱 은폐하면서 죽음의 확실성을 완화하여, 죽음 속으로의 피투성을 경감시키기 위해서이다.(255-256, 364)


 


죽음은 언젠가 뒷날로 천연된다. 그것도 소위 일반적 추측 [가령 평균수명 등]을 불러들여서. 이렇게 해서 세인은, 죽음은 모든 순간에 가능하다는 죽음의 확실성의 특성을 은폐한다. 죽음의 확실성과 죽음의 ‘언제의 무규정성‘은 결합되어 있다. 죽음에 이르는 일상적 존재는 죽음의 무규정성에 규정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무규정성을 회피한다. 그러나 그렇게 규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 종명[終命]이 찾아오는가를 산정(算定)한다는 뜻이 아니다. 현존재는 도리어 그런 규정성으로부터 도피한다.(258, 368)


 


무규정성의 은폐는 그러나 확실성도 은폐한다. 그리하여 죽음의 가장 독자적 가능성의 성격, 즉 확실하기는 하나 무규정적이라는 성격, 다시 말하면 어느 순간에도 가능하다는 성격이 은폐되는 것이다.(258, 368)


 


죽음과 그 죽음이 현존재 속으로 들어오는 방식에 대해 세인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을 완벽하게 해석한 결과 우리는 확실성과 무규정성이라는 성격에까지 도달했다.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존재론적 개념은 이제 다음과 같은 규정으로 획정(劃定)된다 : 현존재의 종말로서의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확실하고, 그 자체로서 무규정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죽음은 현존재의 종말로서, 자기의 종말에 이르는 이 존재자의 존재 속에 있다.(258-259, 368)


 


죽음에 직면해서 일상적으로 퇴락하면서 회피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이다. 비본래성은 그 근저에 가능한 본래성을 가지고 있다. 비본래성은 하나의 존재양식을 특징짓고 있지만, 그 존재양식은 그 속으로 현존재가 자기를 옮겨놓을 수 있고 또 대개는 늘 옮겨놓고 있으나 필연적으로 또 끊임없이 자기를 옮겨놓아야 하는 그런 존재양식은 아니다.(259, 369-370)


 


(5)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 선구


(한: 先驅, 독: Vorlaufen, 영: Anticipation)


 


죽음에 직면해서 회피하는 것이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이다.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가 일상적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특징짓는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가 일상적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필연적으로 규정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적 현존재는 실존적 변양을 통해 본래적 현존재로서 실존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일상적 현존재의 실존적 변양이 가능한 까닭은, 비본래성이 이미 그 근저에 본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의 근저에는 이미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가 은폐되고 왜곡된 채 도사리고 있다. 다만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즉 그 ‘으스스함’ 앞에서, 일상적 현존재는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현존재가 죽음의 실현을 배려하면서 추구한다는 것은 아니다. 죽음 이후에 현존재는 이미 현존재가 아니거늘, 죽음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존재’는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를 의미한다. 즉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현존재가, 마음속으로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극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기투함으로써,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을 비로소 자기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 견디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본래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에로의 ‘선구’이다.


죽음에로의 선구란, 가장 독자적이고 가장 극단적 존재 가능을 이해할 가능성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일상적 현존재는, 죽음에로의 선구를 통해, 세인-자기로부터 벗어날 뿐더러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 존재를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 앞에 직면할 단서를 마련한다. 따라서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에로의 선구가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죽음에로의 선구는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개시하는가?


1)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 가능성이다. 가장 독자적 가능성이기에 현존재는 선구적으로 세인과 절연(絶緣)할 수 있다. 2) 가장 독자적 가능성은 몰교섭적이다. 몰교섭적 가능성에로 선구함으로써 현존재는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를 자신의 편에서 스스로 인수하게 된다. 3)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가능성은,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선구는,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와는 달리, 뛰어 넘을 수 없는 죽음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열어 놓는다. 이로써 선구는 그 가능성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을 함께 개시함으로써 현존재의 전체성을 실존적으로 선취할 가능성을 확보한다. 4)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은 확실한 가능성이다. 현존재가 죽음의 확실한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개시하는 방식은 오직, 현존재가 이 가능성을 향해 선구하면서, 이 가능성을 자기의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 자기 자신에게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확실성을 고수하기 위해선 현존재의 한 특정한 태도가 요구될 뿐더러, 현존재의 실존의 완전한 본래성이 요구된다. 5)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며, 뛰어넘을 수 없고, 확실한 가능성은 확실성의 점에서는 무규정적이다. 무규정적이지만 확실한 죽음에로 선구함에 있어, 현존재는 자기의 ‘현’ 자체에서 발원하는 부단한 위협에 대해 자기를 열어놓는다. 이처럼 현존재 자신에 대한 부단하고 단적인 위협을 개방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정상성(情狀性)이 불안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선구는 현존재를 단적으로 단독화할 뿐더러, 현존재에게 그 자신의 존재 가능의 전체성을 확신시킨다.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는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에로의 선구이다. 죽음에로 선구함으로써 현존재는 세인의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죽음을 향해 자유로워진다. 이로써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가능성이 확보된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존재론적-실존론적 가능성에 불과하다.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존재론적 가능성에 상응하는 존재자적 가능성이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입증되어야 한다. 즉 현존재는 본래적인 실존적 가능성의 증거를 자기의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부터 제시해야 한다. 그러한 증거가 바로 우리가 다음에서 논의할 양심이다.


 


[읽기자료]


현존재는 개시성에 의해, 즉 정상적[情狀的] 이해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는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가능성 앞에서 회피할 수도 없고, 이렇게 도피하면서 그 가능성을 은폐할 수도 없으며, 세인의 상식에 맞추어 해석을 바꿀 수도 없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의 실존론적 기투는, 그런 [본래적] 존재의 계기들, 즉 ‘본래적 존재’를 상술한 가능성에 대해 도피하지 않고 은폐하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죽음의 이해’로서 구성하는 계기들을 밝혀내야 한다.(260, 371)


 


우선 중요한 것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를 어떤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 더욱이 현존재 자신의 두드러진 한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로서 특징짓는 일이다. 어떤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 즉 어떤 가능한 것에 이르는 존재란, 그것의 실현의 배려이므로, 그 가능한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261, 371)


 


문제가 되고 있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는 분명히 죽음의 실현을 배려하면서 ‘추구한다’는 성격을 가질 수는 없다. 첫째, 죽음은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가능한 용재자[用在者]나 전재자[前在者]가 아니라 현존재의 한 존재 가능성이다. 둘째, 그러나 이 ‘가능한 것의 실현’을 배려한다는 것은 ‘종명[終命]의 초래’를 의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현존재는 ‘실존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존재’를 위한 지반을 스스로 제거하는 꼴이 될 것이다.(261, 372)


 


반대로,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 있어서는 그 존재가 앞에서 성격 지은 바 있는 [가장 독자적, 몰교섭적 … ] 가능성을 바로 그것으로서 이해하면서 개시해야 한다면, 그 가능성은 약화되지 않고 가능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가능성으로서 형성되어야 하고, 가능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끝까지 가능성으로서 견뎌내야 한다.(261, 372-373)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서의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는, 죽음이 이 존재에 있어서 또 이 존재에게 가능성으로서 노정되도록, 그렇게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해야 한다. 가능성에 이르는 그런 존재를 우리는 술어상 가능성 속으로 선구한다고 표현한다.(262, 373)


 


죽음에 이르는 존재는, 그의 존재양식이 선구 자체인 그 존재자의 존재 가능에로의 선구[앞지름]이다. 이 존재 가능을 선구적으로 노정할 때, 현존재는 자기의 가장 극단적 가능성의 점에서 자신을 자기에게 개시한다. 그러나 가장 독자적인 존재 가능을 향해서 자기를 기투한다[던진다]는 것은, 그렇게 노정된 존재자의 존재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즉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구란, 가장 독자적이고 가장 극단적인 존재 가능을 이해할 가능성으로서, 다시 말하면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으로서 입증된다.(262-263, 374)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는,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 즉 거기에서 현존재의 존재가 단적으로 문제되는 그 존재 가능을 현존재에게 개시한다.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서 현존재에게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두드러진 가능성에 있어서는 세인과 절연(絶緣)할 수 있다는 것, 즉 선구적으로 그 때마다 이미 세인과 절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할 수 있음의 이해가 비로소, ‘세인-자기’가 일상성 속에 현사실적으로 상실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263, 375)


 


가장 독자적 가능성은 몰교섭적인 것이다. (…) 죽음은 자기의 현존재에 무차별적으로 속해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현존재가 단독적 현존재이기를 요구한다. 선구 속에서 이해된 죽음의 몰교섭성은, 현존재를 현존재 자신으로 단독화한다.(263, 375)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가능성은,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에 이르는 존재가 현존재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실존의 가장 극단적 가능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것이 현존재에게 절박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구는, 죽음에 이르는 비본래적 존재처럼 이 ‘뛰어넘을 수 없음’을 회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향해 자기를 열어 놓는다. (…)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을 향한 선구는, 그 가능성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함께 개시하기 때문에, 그 선구 속에는, 전체적 현존재를 실존적으로 선취(先取)할 가능성, 다시 말하면 전체적 존재 가능으로서 실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264, 376-377)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고,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은 확실한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의 존재를 확신하는 방식은, 그 가능성에 상응하는 진리(개시성)로부터 규정된다. 그러나 현존재가 죽음의 확실한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개시하는 방식은 오직, 현존재가 이 가능성을 향해 선구하면서, 이 가능성을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264, 377)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이며, 뛰어넘을 수 없고, 확실한 가능성은 확실성의 점에서는 무규정적이다. (…) 무규정적이지만 확실한 죽음에로 선구함에 있어, 현존재는, 자기의 ‘현’ 자체에서 발원(發源)하는 부단한 위협에 대해 자기를 열어놓고 있다. 종말에 이르는 존재는 이 위협 가운데에서 자기를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 위협을 막아낼 수는 없고, 도리어 [죽음의] 확실성의 무규정성을 형성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부단한 위협의 진정한 개시는 실존론적으로는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이해는 정상적[情狀的]이다. 기분은, 현존재를 그가 지금 여기 있다는 피투성 앞에 직면시킨다. 그러나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이고 단독화된 존재로부터 솟아오르는, 현존재 자신에 대한 부단하고 단적인 위협을 개방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정상성[情狀性]은 불안이다. 현존재가 불안 가운데 정상적으로 있는 것은, 자기 실존의 가능적 불가능성이라는 무(無)에 직면해 있을 때이다. 불안은 그렇게 규정된 존재자의 존재 가능 때문에 불안해하고, 또 그렇게 해서 가장 극단적 가능성[죽음]을 개시한다. 선구는 현존재를 단적으로 단독화하고, [현존재] 자신의 이 단독화 속에서, 현존재에게 그 자신의 존재 가능의 전체성을 확신시킨다. 그러므로 자신의 근거로부터 나오는 현존재의 이 자기 이해에는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이 속해 있는 것이다.(265-266, 378-379)


 


실존론적으로 기투된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선구는, 현존재에게 [그가] ‘세인-자기’ 속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현존재를 [세인-자기로부터 끌어내어] 배려적 고려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그 자신으로 있을 가능성 앞에 직면시킨다. 그 [현존재] 자신이란, 세인의 환상으로부터 해방된 정열적이고, 현사실적이고,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죽음을 향한 자유 가운데 있는 자신이다.(266, 379)


 


실존론적으로 기투하면서 선구를 한정함으로써, 실존적이고 본래적인 죽음에 이르는 존재의 존재론적 가능성이 분명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이와 함께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가능성이 떠오른다 ??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적 가능성으로서 일 뿐이다. 물론 선구의 실존론적 기투는 이전에 획득한 현존재의 구조에 의존하고 있어서, 현존재로 하여금 말하자면 그 자신 자기를 이 가능성을 향해 기투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현존재에게 어떤 내용 있는 실존 이상(理想)을 내걸고 외부로부터 들이민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실존론적으로 가능한 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는, 실존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의 무리한 공상적 강요에 불과하다.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존재론적 가능성은, [설사 이론적으로는 제시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상응하는 존재[자]적 존재 가능이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입증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존재는 그 때마다 현사실적으로 그런 ‘죽음에 이르는 존재’ 속에 자기를 내던지고 있는가? 현존재는 또한 선구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본래적 존재 가능을, 오직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의 근거로부터 요구하고 있는가?(266, 379-380)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것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 현존재는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자기의 실존의 가능한 본래성에 관한 증거를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부터 제시하고 있는가, 더욱이 그때 현존재는 이 본래성을 실존적으로 가능한 것으로서 표명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할 만큼 그렇게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가?(267, 380)


 


2) 양심


(한: 良心, 독: Gewissen, 영: Conscience)


 


죽음에로의 선구는 현존재를 죽음을 향해 자유롭게 함으로써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가능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존재론적-실존론적 가능성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죽음에로의 선구는 현존재의 전체 존재 가능의 가능성만을 확보했을 뿐 거기에 대응하는 현존재의 본래적인 실존적 가능성을 현존재 자체로부터 증거한 바 없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양심이다. 죽음에로의 선구가 현존재의 전체성을 보증한다면, 양심은 현존재의 본래성을 증거한다. 죽음에로의 선구가 확보한 현존재의 전체 존재 가능 안에서 양심이 현존재의 본래성을 증거할 때 현존재의 근원성이 입증된다. 현존재의 근원성은 현존재의 전체성과 본래성으로 구성된다.


 


(1) 부름


(독: Ruf, 영: Calling)


 


양심은 현존재에게 ‘어떤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즉 양심은 개시한다. 이 점에서 양심은 개시성의 양상이다. 특히 양심은 침묵의 부름이다. 부름으로서의 양심은 개시성을 구성하는 3계기 중 ‘말’에 해당한다. 부름으로서의 양심은 말의 한 양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의 구조 계기에 따라 양심의 부름을 해명하고자 한다.


양심의 부름에서 부름을 받는 것은 현존재 자신이다. 배려하면서 타자와 함께 있는 일상적 현존재가, 즉 ‘세인-자기’가 양심의 부름에 마주친다. 그렇다면 세인-자기는 어디를 향해서 부름을 받는가? 세인-자기는 바로 독자적 자기를 향해 부름 받는다. 세인-자기 중 그 ‘자기’만이 부름을 받고 이로써 세인은 스스로 붕괴된다. 그러면 양심의 부름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가? 엄격히 말해 양심의 부름은 아무런 내용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양심의 부름은 세인-자기를 그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해 불러 세운다. 따라서 양심의 부름은 침묵의 양상으로만 말한다. 또한 양심의 부름은 불러 세워진 현존재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세인-자기가 침묵하지 않고 양심의 부름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때 부름의 본래적 개시경향은 왜곡된다.


그렇다면 양심의 부름에서 부르는 자는 누구인가? 양심은 자기의 내면의 목소리이다. 양심의 부름에서는 부르는 자도, 부름을 받는 자도 모두 현존재이다. 즉 현존재가 양심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존재론적으로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부름을 받는 자로서의 현존재와 부르는 자로서의 현존재는 분명히 다르게 >현< 존재하지 않는가?


양심의 부름은 세인-자기인 우리에 의해 계획된 것이 아니다. 양심의 부름은 분명히 (세인-자기인) 나의 내면으로부터 울려 나오지만 또한 (세인-자기인) 나를 초월한다. 그러기에 일단은 >그것<이 나를 부른다고 전제하자. ‘부름은 분명히 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인가? 만약 >그것<을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로 규정한다면, 양심의 부름은 더 이상 양심의 부름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근본 정상성(根本 情狀性)인 불안에 대한 해명에로 돌아간다.


일상적 현존재가 몰입해 있던 세계는 불안 속에서 무의의화 된다. 세계의 무(無) 앞에 세워진 현존재는 ‘으스스함’에 직면한다. 그런데 자신의 으스스함의 근저에 정상적(情狀的)으로 있는 현존재야말로 양심의 부름에서 ‘부르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세계의 무 앞에서 으스스함에 젖어 있는 현존재야말로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대한 불안 속에서 스스로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양심의 부름에서 ‘부르는 자’는 자신의 세계-내-존재 가능 때문에 스스로 불안해하여 으스스함에 젖어 있는 현존재 자신이요, ‘부름을 받는 자’는 이 으스스함으로부터 도피하여 세계에 몰입한 일상적 현존재이다. 따라서 양심의 부름에서 ‘부르는 자’와 ‘부름을 받는 자’는 모두 동일하게 현존재 자신이나, 그 양자에서 >현< 존재의 의미는 달라진다.


불안이 세계-내-존재 가능에 대한 불안인 이상, 양심의 부름에서 ‘부르는 자’ 역시 세계-내-존재이다. 양심의 부름에서 ‘부르는 자’가 세계-내-존재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그에게 문제가 되는 세계는, 세인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 속에 열려진 세계가 된다. 따라서 양심의 부름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가능성은 현존재의 존재인 마음씀이다. 피투성 속에서 자기의 존재 가능 때문에 스스로 불안해하는 현존재가 ‘부르는 자’라면,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해 불러 세워지고 있는 세인-자기로서의 현존재가 ‘부름을 받는 자’가 된다. 따라서 이제 양심을 마음씀의 부름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부름’에는 ‘들음’이 상응한다. 양심의 부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양심 체험이 체득되기 위해서는 부름에 진정하게 상응하는 들음이 요구된다. 부름이 개시성의 구조에서 ‘말’에 해당한다면, 들음은 ‘이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부름에 대한 본래적 이해가 된다. 그런데 앞서 밝혔듯이 양심의 부름은 아무런 내용도 말하지 않는다. 즉 양심의 부름은 우리에게 아무런 사실적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양심의 부름은 분명히 세인-자기에게 ‘어떤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그 어떤 것이란 자기의 독자적 존재 가능이다. 그렇다면 양심의 부름이 알아차리게 하는 자기의 독자적 가능이 무엇인가를 해명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양심체험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읽기자료]


양심은 어떤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즉 양심은 개시한다. 이 형식상의 성격으로부터, 이 현상[양심]을 현존재의 개시성 속으로 회수하라는 지시가 나온다. 그 때마다 우리들 자신인 이 존재자의 근본 틀을 구성하는 것은 정상성[情狀性], 이해, 퇴락 및 말이다. 양심을 더 파고 들어가서 분석하게 되면, 양심은 곧 부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부름은 의 한 양상이다.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를 그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 불러낸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불러내는 것은 현존재를 그가 독자적으로 책임 있다는 데로 불러일으킨다는 방식을 취한다.(269, 384)


 


양심의 부름에는 가능한 ‘들음’이 대응한다. [양심의] 불러냄을 이해하는 것은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로서 드러난다. 이 현상[양심을 가지려는 의지] 속에는, 추구되어온 것, 즉 ‘자기 존재의 선택을 실존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 놓여 있다. 이것을 우리는 그 실존론적 구조에 좇아서 결의성(決意性)이라고 부른다.(270, 384)


 


‘부름’을 우리는 말의 한 양상이라고 파악한다. 양심을 부름이라고 성격짓는 것은, 가령 칸트가 양심을 법정으로 표상한 것과 같은 단순한 비유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것은, 말에는, 따라서 부름에도, 소리내서 발음하는 것이 본질적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발언과 소리내 부르는 것은 모두 이미 말을 전제하고 있다. [양심의] 일상적 해석이 양심의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때 생각이 미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발음이 아니라, [양심의] 소리가 ‘알아차리게 함’으로써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름의 개시경향에는 충격의 계기, 즉 [세인에의 자기 상실적 경청을] 중단시켜 흔들어 일으키는 계기가 있다. 부름은 먼데서 먼데로 미친다. [본래적 자기로] 되돌아오고자 하는 자라야 부름과 마주치는 것이다.(271, 386)


 


양심의 부름에서 말씨가 되는 것, 즉 부름을 받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현존재 자신이다. 이 대답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마찬가지로 무규정적이기도 하다. 부름이 그렇게 막연한 목표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부름은 기껏해야 현존재가 자기에게 주의를 돌리게 되는 하나의 유인(誘引)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에게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은, 현존재가 자기 세계의 개시성과 함께 자기 자신에게 개시되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기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심은, 이렇게 일상적-평균적으로 배려하면서 자기를 언제나 이미 이해하고 있는 현존재와 마주친다. 배려하면서 타자와 함께 있는 세인-자기가 [양심의] 부름과 마주치는 것이다.(272, 388)


 


그러면 어디를 향해서 세인-자기는 부름을 받는가? 독자적 자기를 향해서. (…) 현존재라 하더라도, 타자와 자기 자신에게 세간[세속]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현존재는 이 불러냄에서 무시된다. 자신을 향한 부름은, 이런 세간적 견해에 대해 조금도 아는 바 없다. 세인-자기의 그 자기만이 부름받고 [그 부름을] 듣게 되기 때문에, 세인은 스스로 붕괴된다. 부름이 현존재의 공공적 피해석성과 세인을 무시하는 것은, 부름이 그런 것들과는 함께 마주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로 이 무시함 속에서 부름은 공공적 명망에 집착하는 세인을 무의의성 속으로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이 부름 속에서 [세간적] 피난처와 숨을 곳을 빼앗기고, 부름에 의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273, 388)


 


세인-자기는 자기를 향해 부름받는다. (…) 세인-자기 속에 있는 자기를 불러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면 속에 몰아 넣어서 바깥 세계로부터 자기를 폐쇄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부름은 오직 자기만을 불러내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뛰어넘고 일소해 버린다. 그럼에도 그 자기란 세계-내-존재라는 방식으로 있는 자기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273, 388-389)


 


그러나 이런 말들[양심의 부름]이 말한 내용을 우리는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양심은 ‘부름받은 자’에게 무엇을 불러다 주는가? 엄격하게 말하면 ?? 아무 것도 없다. 부름은 아무 것도 진술하지 않으며, 세계의 사건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어떤 얘깃거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부름은 부름받은 자기 안에서 자기 대화를 시작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부름받은 자기에게 아무 것도 불러다 주지 않고, 도리어 그 자기가 자신을 향해, 즉 그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해 불러 세워지는 것이다. 부름의 경향에 따르면, 그 부름은, 부름받은 자기를 토의에 붙이지 않고, 가장 독자적 자기-존재 가능을 향해 ‘불러 세우는 것’으로서, 현존재를 그의 가장 독자적 가능성 속으로 (앞을 향해) 불러내는 것이다.(273, 389)


 


부름은 아무런 음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부름은 결코 낱말이 되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명료하거나 무규정적이지 않다. 양심은 한결같이 그리고 오직 침묵의 양상으로만 말한다. 그리하여 양심은 인지성(認知性)의 점에서는 잃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뿐더러, 도리어 부름받고 불러 세워진 현존재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 침묵하도록 강요한다. (273, 389)


 


설사 부름이 개개의 현존재에 있어서 그의 이해 가능성에 따라 상이하게 해석된다 하더라도, 부름이 개시하는 것은 일의적(一義的)으로 분명하다. (…) 양심에 있어서 착오는, 부름이 자기를 잘못 보았기 (잘못 부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름이 어떻게 들리느냐 하는 양식[듣는 양식]에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 즉, [그 착오는] 부름이, 본래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세인-자기에 의해 토의적 자기 대화 속에 이끌려 들어가서, 부름의 [본래적] 개시경향에 있어서 뒤집혀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274, 389-390)


 


우리는 양심을 ‘부름’이라고 특징지었으나, 그 부름은 세인-자기를 그 자기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다. 이 불러냄으로서의 부름은, 자기를 그 자기 존재 가능을 향해 불러세우는 것이며, 따라서 현존재를 그의 가능성을 향해 호출하는 것이다.(274, 390)


 


그러나 누가 부르는가 하는 물음을 상금 분명하게 제기할 필요성이 도대체 있는가? 이 물음은, 부름 속에서 부름받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현존재에게는 일의적으로 대답되는 물음이 아니지 않는가? 현존재는 양심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부른다. 부르는 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부름을 현사실적으로 들을 때 다소간 깨닫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존재는 ‘부르는 자이면서 동시에 부름받는 자이다’라는 대답은 존재론적으로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다. 도대체 부름받는 자로서의 현존재는, 부르는 자로서의 현존재와는 다르게 현 존재하는가? 가령 가장 독자적 자기 존재 가능이 부르는 자로서 역할하고 있는가?(275, 391-392)


 


부름은 물론 우리 자신에 의해 계획되지도 않고, 준비되지도 않으며, 의도적으로 수행되지도 않는다. 기대와 의지에 반해 그것이 부른다. 다른 한편, 부름은 의심의 여지없이 ‘나와 함께 이 세계에 있는 타자’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부름은 나의 안으로부터 오지만 나를 초월한다.(275, 392)


 


‘부름은 분명히 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르는 것이다’라고 해서, 이것이 ‘부르는 자를 현존재가 아닌 어떤 존재자 속에서 찾는다’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현존재는 그 때마다 언제나 현사실적으로 실존한다. 현존재는 허공에 떠 있는 자기 기투가 아니라, 피투성에 의해 현존재라는 존재자의 현사실로서 규정되기 때문에, 현존재는 그 때마다 이미 실존에 맡겨져 있었고, 또 부단히 맡겨져 있다. 그러나 현존재의 현사실성은 전재자[前在者]의 사실성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실존하는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만남에 있어, 자기 자신을 세계 내부적 전재자로서 대하지 않는다. 피투성이라는 것도, 접근할 수 없고 자기의 실존에 대해 중요하지 않은 성격으로서 현존재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던져진 자로서의 현존재는 실존 속에 던져져 있다. 현존재는 [피투적으로] 있고, [기투적으로] 있을 수 있는 바와 같이, [현사실적으로] 있어야 하는 존재자로서 실존한다.(276, 393)


 


현존재가 현사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즉, 존재 이유]의 점에서는 은폐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 자체는 현존재에게 개시되어 있다. 이 존재자의 피투성은 현의 개시성에 속해 있어서, 그때그때의 정상성[情狀性] 속에서 부단히 드러나 있다. 이 정상성은, 다소 분명하게 그리고 본래적으로, 현존재를 그는 [피투적으로] 존재하고, 존재하는 대로의 그 존재자로서, 존재 가능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앞에 직면시킨다. 그러나 대개 기분은 이 피투성을 폐쇄하고 있다. 현존재는 피투성에 직면해서, 거기로부터 세인-자기의 거짓된 자유의 안이함 속으로 도피한다. 이 도피를 우리는, 단독화된 세계-내-존재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으스스함’에 직면해서 거기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라고 특징지은 바 있다. 으스스함은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 속에서 본래적으로 드러나고, 피투적 현존재의 가장 기본적 개시성으로서 현존재의 세계-내-존재를 세계의 무(無) 앞에 세운다. 이 세계의 무 앞에서, 현존재는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대한 불안 속에서 스스로 불안해한다. 자신의 으스스함의 근저에 정상적[情狀的]으로 있는 현존재가 양심의 부름을 부르는 자라고 한다면 어떤가?(276, 394)


 


부르는 자는, 그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서는, 세간적으로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다. 부르는 자는, 그의 으스스함 속에 있는 현존재요, 안절부절하는 근원적 피투적 세계-내-존재이며, 세계의 무[無] 속에서의 적나라한 사실이다. 부르는 자는 일상적 세인-자기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 생소한 소리와 같은 어떤 것이다. 배려되는 잡다한 세계 속에 자기를 상실하고 있는 세인에게, 으스스함 속에서 자기에게로 단독화되어 무 속으로 던져진 자기보다 더 생소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부르건만도, 배려하면서 신기한 것을 쫓는 귀에게는, 계속해서 얘깃거리가 되고 공공적으로 말씨가 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는 것이 없다.(276-277, 394)


 


으스스함은, 일상적으로는 은폐되어 있을지라도 세계-내-존재의 근본양식이다. 현존재 자신이 양심으로서 이 존재의 근저로부터 부르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부른다는 것은, 현존재의 한 두드러진 말이다. 불안의 정조(情調)를 띤 부름이, 최초로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해 자기 자신을 기투하도록 한다. 실존론적으로 이해된 양심의 부름이 처음으로 고지하는 것은, 전에는 그냥 주장되기만 했던 것, 즉 ‘으스스함이 현존재를 추적해서 그의 자기 망각적 상실성을 위협한다’는 것이다.(277, 395)


 


‘현존재는 부르는 자이면서 동시에 부름받는 자이다’라는 명제는 이제는 그 형식상의 공허함과 자명성을 버리게 되었다. 양심은 마음씀의 부름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 ‘부르는 자’는, 피투성(… 내에 이미 있음) 속에서 자기의 존재 가능 때문에 스스로 불안해하고 있는 현존재이다. ‘부름받는 자’는,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자기를 앞지름 … )을 향해 불러일으켜진 바로 그 현존재이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불러냄을 통해 ‘세인 속으로의 퇴락’(배려되는 세계에 몰입해서 이미 있음)으로부터 불러일으켜지는 것이다. 양심의 부름, 즉 양심 자체는 그 존재론적 가능성을 ‘현존재는 그의 존재의 근거에 있어서 마음씀이다’라는 데 가지고 있다.(277-278, 395)


 


그러나 ‘부르는 것에 진정으로 상응해서 듣는 것‘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지가 충분히 명료하게 한정될 때 비로소, 양심이 증언한 것은 완전한 규정성에 이르게 된다. 부름에 따라가는 [聽從하는] 본래적 이해는, 양심현상에 잇닿아 있기만 하는 부가물(附加物)이 아니다. 즉, 생기기도 하고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과정이 아니다. 불러냄을 이해함으로써 그리고 그것과 함께 일체가 되어서, 비로소 완전한 양심체험은 체득되는 것이다.(279, 397-398)


 


(2) 책임


(한: 責任, 독: Schuld, 영: Guilt)


 


양심의 부름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양심의 부름은 아무런 사실적 정보도 말하지 않는다. 양심의 부름은 단지 현존재를 그의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해 앞으로 나가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은 세계의 무 앞에 직면한 으스스함에서 개시된다. 그렇다면 불안 속에서 으스스함에 젖어 있는 현존재로부터, 다시 말하자면 으스스함으로부터 양심의 부름이 비롯되며 또한 양심의 부름은 세인-자기를 그 으스스함 속으로 도로 불러들인다. 즉 양심의 부름에서는 그 부름의 ‘어디에서’와 ‘어디에로’가 일치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관건은 현존재의 독자적 존재 가능이다. 현존재의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부터 양심의 부름이 비롯되며 또한 양심의 부름은 세인-자기를 현존재의 독자적 존재 가능에로 도로 불러들인다. 따라서 양심의 부름이 무엇을 알아차리게 하는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또한 완전한 양심 체험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현존재의 독자적 존재 가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양심의 부름을 타자와의 공동 존재 내에서 문제삼는다. 응당 남에게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았다거나 혹은 어떤 불미스런 사건을 유발한 ‘원인’을 문제삼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선 이 두 사건은 내용 상 다소 간의 차이가 있다. 앞의 사건은 법률적 처벌의 대상이 되나, 뒤의 사건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경우에든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양심을 거론한다. 양심은 책임의 소재와 관련된다. 좀더 부연하면, 두 사건의 당사자는, 법률적 처벌의 유무를 떠나 여하튼 타자에게 어떤 결핍을 초래함으로써, 죄를 짓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책임을 다 하지 않은 것이고, 그러기에 여기에서 양심이 문제되는 것이다.


양심에 관한 통상적 해석에 따르면, 양심은 책임과 관련된다. 또한 책임의 근저에서는 남에게 끼친 어떤 결핍이 문제된다. 그러나 양심에 관한 이러한 통상적 해석이 과연 우리가 여기에서 현존재의 본래성을 증거하기 위해 논의하는 양심의 문제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까닭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가 여기에서 논의하는 양심에서는 타자에 대한 책임이 관건이 아니다. 우선은 나의 존재에 대한 나의 책임이 관건이다. 즉 우리에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은 나의 실존이다. 둘째, 양심에 관한 통상적 해석에서 양심에 따른 책임의 근거는 남에게 끼친 결핍이다. 결핍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지금 눈앞에 없다라는 전재성(前在性)의 문제이다. 하지만 실존에는 본질상 결핍이란 있을 수 없다. 현존재의 실존에서는 본래적 혹은 비본래적 실존의 양상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즉 현존재의 실존 성격은 전재성과 전혀 다른 것이다.


양심에 관한 통상적 해석은 우리가 여기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양심의 문제에 적용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 해석은 우리에게 양심을 해명할 중요한 단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책임이 갖는 비(非, 아님)의 성격이다. 책임은 비(非)를 수반한다. 그렇다면 남에 대한 책임이든, 혹은 나의 실존에 대한 책임이든, 여하튼 양심의 논의에서는 비(非)가 문제되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비(非)의 성격은 다르겠지만.


현존재의 존재는 마음씀이다. 마음씀의 구조 계기는 현사실성(피투성), 실존(기투), 퇴락이다. 그런데 양심은 피투성과 기투가 지닌 비(非)의 성격을 개시한다. 여기서의 비(非)란 앞서 논의한 통속적 양심에서 문제된 결핍으로서의 비(非)도 아니고, 또한 명제적 차원에서의 비(非)도 아니다. 양심은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결코 지배하지 못한다라는 의미에서 비(非)를 말해준다. 즉 여기에서의 비(非)란 ‘어찌 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양심은 이 ‘어찌 하지 못함’ 속에서 현존재의 근원적 책임을 발견한다.


세인-자기로서의 일상적 현존재는 이 세계에 적나라하게 던져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망각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피투적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녕 우연히 어떤 세계 속에 던져져 있다. 현존재는, 실존하는 한, 자기의 피투성의 배후로 돌아가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세계의 무(無) 앞에 직면한 현존재는 으스스함에 젖어 자신의 적나라한 피투된 모습을 보게 된다.


현존재는 자기가 그 속에 던져져 있는 피투적 제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기투한다. 현존재는 비록 기투함으로써 실존하지만, 기투가 포착하는 존재 가능성은 현존재가 결코 좌우하지 못하는 피투적 가능성이다. 피투성의 실존론적 의미 속에는 이미 비(非)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기투는 피투적 기투이다. 현존재는 기투를 통해 실존하므로 스스로 자신의 존재근거이지만, 결코 이 근거를 지배하지 못한다. 따라서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근거라 함은, 일반의 상식과는 다르게 오히려, 현존재가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를 근본적으로는 결코 좌우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점은 기투에도 해당한다. 현존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실존적 제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기투는 자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하나의 선택을 강요한다. 현존재는 자신에게 주어진 제 가능성 중 하나만을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단념한다는 의미에서만 자유롭다. 따라서 기투도 본질적으로 비(非)적이다. 또한 일상적 현존재는 피투적 기투의 비성(非性)을 망각한 채 세계에로 퇴락하나, 비(非)본래적 현존재의 비성은 오히려 피투적 기투의 비성을 증거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피투성에 직면해 그 으스스함으로부터 도피하기에 세계에로 퇴락한 채 비본래적으로 실존한다. 따라서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피투적 기투의 비성이 비본래적 현존재의 비성의 가능근거가 된다.


현존재의 마음씀의 세 구조계기 마다 제각기 비성이 침투되어 있다. 마음씀 그 자체의 본질은 비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존론적 비성에서 현존재의 근원적 책임을 발견한다. 도덕적 선악을 따지기 이전에 현존재는 이미 자신의 존재 근거에 있어 책임을 지닌다. 그것은 철저히 비성에 의해 침투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이다. 이 세계에 우연히 홀로 던져져 어찌 할 수 없는 자신의 피투성을 떠맡은 채 실존해 나가야 할 책임을 현존재는 안고 있다. 현존재의 존재의 실존론적 비성은 현존재의 근원적 책임을 증거한다.


따라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존재의 독자적 존재 가능이다. 불안 속에서 으스스함에 젖은 현존재는 세계에로 퇴락한 세인-자기를 그 으스스함 속으로 도로 불러들여 독자적 존재 가능을 일깨워준다. 으스스함으로부터 비롯된 양심의 소리가 세인-자기에게 그의 책임 존재를 일깨워 그를 그 으스스함에로 도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즉 적나라한 피투성에서 비롯된 양심의 부름은 세인-자기를 그 적나라한 피투성에로 도로 불러들인다. 다시 말하자면, 양심은 세인-자기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현존재를 자신의 적나라한 피투성에로 도로 불러 들여 자신의 독자적 존재 가능에 대한 책임을 일깨운다.


현존재의 존재가 비성에 의해 침투되어 있는 한,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책임 존재이다. 양심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선택 사항은 양심의 부름에 청종하는 현존재의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라고 명명한다. 실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야말로 모든 법률적 윤리적 책임 존재의 가장 근원적 실존적 전제가 된다. 그러나 법률적 윤리적으로 책임있는 행동이 타자와의 공동 존재 내에서 수행되는 한, 이미 그러한 행위는 몰양심적이다. 그 까닭은 현존재가 법률적 윤리적 범죄를 피할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는 양심에서는 독자적 존재 가능만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즉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본질적인 몰양심성을 인수하며 그런 조건 하에서만 도덕적으로 선하게 존재할 실존적 가능성이 성립한다.


 


[읽기자료]


현존재 자신이 ‘부름받고 있음’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몰교섭적이면 몰교섭적일수록, 또 사람들이 말하는 것, 즉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통용되는 것이 부름의 의미를 전도(顚倒)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부름을 실존적으로 들으면서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더 본래적으로 된다. 그러면 부름이해의 이런 본래성 속에는 본질적으로 무엇이 놓여 있는가? 설사 반드시 현사실적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때그때 부름 속에서 본질적으로 알아차리도록 주어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280, 399)


 


이 물음에 대해 우리는 이미 다음과 같은 테제로써 시사한 바 있다 : 부름은 말씨가 됨직한 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부름은 발생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부름은 현존재로 하여금 그의 존재 가능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도록] 지시하는데, 그것은 으스스함으로부터 나오는 부름으로서 그렇게 한다. 부르는 자는 과연 무규정적이다. 그러나 [무규정적인] 그가 ‘어디에서’ 부르는가 하는 그 출처(出處)는 ‘부름’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어디에서’[출처] - 즉, 피투적인 단독화의 으스스함 - 는 부름 속에서 함께 불린다. 즉, 함께 개시된다. … 을 향해 [앞으로] 불러낼 때, 그 부름의 ‘어디에서’는 도로 불러들이는 ‘어디에로’이다. 부름은 어떠한 이상적 보편적 존재 가능도 알아차리게 하지 않는다 ; 부름은 그때그때의 현존재를 그때그때 단독화된 현존재로서 개시한다. 부름의 개시성격은, 우리가 그것을 ‘[앞으로] 불러내면서 불러들임’으로서 이해할 때 비로소 완전히 규정된다. 그렇게 파악된 부름에 정위해서 비로소 부름은 무엇을 알아차리게 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280, 399- 400)


 


그러나 [양심의] 부름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통상 모든 양심경험 속에서 듣거나 겉 듣거나 하는 것, 즉 부름은 현존재를 책임 있다고 선고하기도 하고, 양심이 경고하는 경우처럼 책임 있게 될 것이라고 시사하기도 하며, 또는 떳떳한 양심이므로 어떤 책임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을 솔직하게 지적함으로써 훨씬 쉽고 확실하게 대답되지 않을까? 이렇게 일치해서 경험되고 있는 책임 있음이라는 것이, 양심의 제 경험과 양심의 제 해석에서 그렇게까지 전혀 다르게 규정되지만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설사 이 책임 있다의 의미가 일의적으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책임 있음’의 실존론적 개념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책임 있다고 선고하는 경우, 책임의 이념을 현존재의 존재의 해석에서 길어 오지 않는다면 달리 어디에서 길어 올 것인가? 결국 다음과 같은 물음이 새삼 제기된다 : 누가 우리는 책임 있다고 말하며, 책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280-281, 400)


 


일상적 분별[상식]은 책임 있음을 우선 빚을 지고 있다, 누구에게 무엇을 빌리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타자가 청구권을 갖고 있는 것을 그에게 돌려줄 의무를 진다. 빚을 지고 있다는 의미의 책임 있음은 조달한다, 지참한다 등 배려의 분야에서 타자와 함께 있는 한 방식이다. 그런 배려의 양상에는 또 탈취, 표절, 억류, 점유, 강탈 등, 다시 말하면 타자의 소유권 청구를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도 있다. 이런 종류의 책임 있음은 배려 가능한 것에 관련된다.(281-282, 401)


 


다음으로 ‘책임 있음’은,  … 에 책임 있다, 즉 어떤 것의 원인이다, 장본인이다, 또는 어떤 것에 대한 유인이다라는, 더 광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 어떤 것에 대해 책임 있다는 의미에서는, 사람들은 타자에게 어떤 것을 빚지거나 채무 있게 되지 않고도 책임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사람들은 그 자신 어떤 것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서도 타자에게서 어떤 것을 빌릴 수 있다. 한 타자는 다른 타자에게서 나를 대신해서 돈을 빌릴 수 있다.(282, 401)


 


‘책임 있음’의 두 통속적 의의, 즉  [누구]에게 빚이 있다와  [무엇]에 대해 책임진다는 서로 제휴해서 죄를 짓는다고 하는 하나의 태도를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빚을 진’ 데 대해 책임을 짐으로써 법을 위반하여 처벌받는 태도이다. 사람들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요구는 반드시 소유권과 관계될 필요는 없으나, 공공의 상호성 일반을 규제할 수는 있다. 법 위반에 있어서 그렇게 규정된 죄지음은 동시에 타인에게 죄를 짓는다는 성격을 가질 수 있다. 후자는 법 위반 자체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타자의 실존이 위협받거나 오도되거나 파멸되는 데 내가 책임이 있다는 데서 생긴다. 타인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공공의 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의미의 ‘책임 있음’의 형식적 개념은 ‘타자의 현존재 속에 어떤 결핍(缺乏)을 야기하는 원인[근거존재]‘이라고 규정된다. 그리하여 이 원인[근거존재] 자체는 ‘무엇을 야기하는 데 대해’ 결핍적이라고 규정된다. 이 결핍성이란, 타자와 함께 실존하는 공동존재에게서 발생하는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282, 402)


 


책임의 이념은, 청산적 배려의 권역 이상으로 높여져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어김으로 해서 누군가가 책임을 지게 되는 당위나 법률에 대한 관련으로부터도 풀려나야 한다. 왜냐 하면 이 경우에도 책임은 필연적으로 여전히 결핍으로서, 즉 있어야 하고 있을 수 있는 어떤 것의 결여로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여는 그러나 ‘전재[前在]하지 않음’이다. 결핍, 즉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전재하지 않음’은 전재자[前在者]의 한 존재규정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실존에는 본질상 결핍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그 까닭은, 실존이 완전무결해서가 아니라, 그 존재성격이 전재성[前在性]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283, 403)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 있다 [갚지 못했다]는 이념 속에는 (非)의 성격이 들어 있다. 책임 있다가 실존을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면, 이와 함께, ‘비’가 가지고 있는-성격을 실존론적으로 해명해야 한다는 존재론적 문제가 생긴다. 나아가서 책임 있다의 이념에는,  … 에 대해 책임진다는 의미의 책임개념 속에 무차별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즉 ‘… 에 대한 근거이다’[유인이다]라는 것이 속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임 있다의 형식적 실존론적 이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 ‘책임 있다’는 어떤 ‘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에 대한 ‘근거이다’ ?? 즉, 어떤 ‘비성(非性)의 근거존재이다.’ (…) ‘책임 있음’은 죄를 지은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죄를 짓는 일이 근원적인 ‘책임 있음’을 근거로 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그런 근원적인 책임 있음이 현존재의 존재 속에서 제시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실존론적으로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283-284, 403-404)


 


현존재의 존재는 마음씀이다. 마음씀은 현사실성(피투성), 실존(기투) 및 퇴락을 내함하고 있다. 현존재는 피투적인 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기를 자신의 현 속에 스스로 초래한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한, 현존재는 존재 가능으로서 규정되어 있다. 이 존재 가능은 현존재 자신에 속하지만, 현존재 자신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준 것은 아니다. 실존하는 한, 현존재는 결코 자기의 피투성의 배후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때마다 새삼 그의 자기 존재로부터 해제해서 ‘현’ 속으로 끌어들이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투성은 사실적으로 돌발했다가 다시 현존재로부터 떨어져 나간, 현존재와 함께 생긴 사건으로서 현존재의 뒤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며, - 그가 존재하는 동안은 - 현존재는 부단히 마음씀으로서의 그의 [피투적] 사실로 있다. 이런 존재자로서, 즉 자기에게 맡겨져서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자로서, 현존재는 실존할 수 있고, 실존하면서 자기의 존재 가능의 근거로 있다. 비록 현존재가 [자기의] 근거를 스스로 놓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현존재는 [자기가 자기의 존재 가능의 근거라고 하는] 자신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으며, 이것을 그에게 짐[부담]으로서 드러내는 것은 기분이다.(284, 404-405)


 


그러면 어떤 양상에서 현존재는 피투적 근거로 있는가? 그것은 오직 현존재가, 자기가 그 속으로 던져져 있는 [피투적] 제 가능성을 향해서 자기를 기투한다는 양상에서이다. [현존재는] ‘자기’로서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놓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 자기는 [스스로 놓은 것일지라도 그] 근거를 결코 지배하지는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기는 실존하면서 근거임[근거존재]을 인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가 자기의 피투적 근거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마음씀이 문제삼는 존재 가능이다.(284, 405)


 


따라서 [현존재가 자신의] 근거존재라 함은,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를 근본적으로는 결코 좌우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 ‘‘[못함]는 피투성의 실존론적 의미에 속한다. 근거로 있으면서 현존재 자신은 자기 자신의 한 비성으로 있다. [현존재 자신의] 비성은 결코 [그의] 비전재적[非前在的] 존재, 비존립을 의미하지 않고, 현존재의 이 존재, 즉 그의 피투성을 구성하는 ‘비’를 말한다. 이 ‘비’의 비 성격은 실존론적으로는 ‘현존재는 자기 존재이면서 그 자기로서 [동시에] 피투적 존재자이다’라고 규정된다. 현존재는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거로부터 자기 자신에게 방면되어, 이 근거로서 존재한다. 현존재는 자기 존재의 근거가 독자적 기투로부터 비로소 생기는 한에서는 그 자신 자기 존재의 근거가 아니지만, 자기 존재로서는 근거의 존재이다.(284-285, 285)


 


‘현존재는 실존하면서 자기의 근거이다’라 함은, 현존재는 제 가능성에 입각해서 자기를 이해하고, 그와 같이 자기를 이해하면서 피투적 존재자로 있음을 일컫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음의 사실이 들어 있다 : 현존재는 그 때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하나의 가능성 가운데 존재 가능적으로 서 있고 [따라서] 끊임없이 다른 가능성이 아니며, 이 다른 가능성을 실존적 기투에서 단념해 버리고 있다. 기투는 그 때마다 피투적 기투로서 근거존재의 비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기투로서도 그 자신 본질적으로 비적이다. 이 규정 또한 효과가 없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존재[자]적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투작용의 존재구조의 한 실존론적 구성요소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비성은, 현존재가 자기의 실존적 제 가능성을 향해 개방적으로 있다[자유존재]는 데 속한다. 그러나 자유란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데만, 다시 말해 다른 가능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참아내는 데 있다.(285, 406)


 


피투성의 구조 속에도, 기투의 구조 속에도, 본질적으로 비성이 놓여 있다. 현존재는 그 때마다 언제나 이미 현사실적으로는 퇴락으로서 있거니와, 비성은 퇴락 가운데 있는 이본래적 현존재의 비성의 가능근거이다. 마음씀 자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철저하게 비성에 의해 침투되어 있다. 마음씀 ?? 현존재의 존재 ?? 은 따라서 피투적 기투로서, 비성이라는 (비적) 근거존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책임이 비성의 근거존재라고 하는 형식적 실존론적 규정이 옳게 성립한다면, 현존재는 그 자체로서 책임 있다 의미이다.(285, 406-407)


 


실존론적 비성이란, 기치로 내건 이상이 현존재에 있어서 달성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결여’나 ‘결핍’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존재가 기투할 수 있고 또 대개는 달성한 모든 것 이전에, 이 존재자의 존재가 기투로서 이미 비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비성은, 때때로 현존재에게 출현해서 그에게 어두운 성질로서 붙어 있는 것, 그리하여 현존재가 충분히 진보하면 저절로 제거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285, 407)


 


그 존재가 마음씀인 존재자는, 현사실적 책임을 자신에게 지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존재의 근거에 있어서 이미 책임 있다. 그리고 이 책임 있음이, 현존재가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면서 책임 있게 될 수 있는데 대한 존재론적 조건을 가장 먼저 제공한다. 이 본질적 책임 있음은, 등근원적으로 도덕적 선과 악에 대한, 즉 도덕성 일반과 현사실적으로 가능한 그것의 제 형태에 대한, 가능성의 실존론적 조건이다. 근원적 책임 있음은 도덕성에 의해서는 규정될 수 없으니, 왜냐 하면 후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미 전자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286, 408)


 


근원적 책임 있음이 우선 대개 개시되지 않은 채로 있고, 현존재의 퇴락적 존재에 의해서 폐쇄된 채 보존된다는 것, 그것은 도리어 상술한 비성 드러낼 뿐이다. 책임 있음은, 이것에 대한 모든 지식보다 훨씬 근원적이다. 그리고 현존재는, 자기 존재의 근거에 있어서 책임 있고, 피투적으로 퇴락하는 자로서는 자기를 자기 자신에게 폐쇄하기 때문에, [양심의] 부름이 이 책임 있음을 근본적으로 알아차리게 할 때, 양심이 가능하다. (286, 408)


 


부름이란 마음씀의 부름이다. 책임 있음은 우리가 마음씀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구성한다. 으스스함 속에서 현존재는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과 [만나] 함께 서 있다. 으스스함은 이 존재자를 자기의 감추어지지 않은 비성 앞에 직면시키거니와, 이 비성은 이 존재자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이라는 가능성에 속한다. 현존재는 자기 존재를 - 마음씀으로서 - 문제삼는 한, 그는 현실적-퇴락적 세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으스스함으로부터 자기의 존재 가능을 향해 불러낸다. 불러냄은 앞으로 불러내면서 도로 불러들인다. 앞으로[불러냄이]라 함은, 현존재가 피투적 존재자를 실존하면서 스스로 인수하는 가능성 속으로 [불러내는 것]이며, 도로[불러]들임이란, 피투성 속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현존재가 피투성을 실존 속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비적 근거로서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양심이 ‘앞으로 불러내면서 도로 불러들이’는 것은 현존재에게 다음의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즉, 현존재는 - 자기의 비적 기투의 비적 근거로서, 자기 존재의 가능성 속에 서 있으면서 - 자기를 세인 속의 자기 상실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되돌려와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책임 있다는 것이다.(286-287, 408 -409)


 


이 존재자[현존재]는, 과실이나 불이행을 통해 새삼 어떤 책임을 자기에게 지울 필요가 없다. 현존재는 그냥 - 책임 있는 자로서 현존재이니 - 본래적으로 책임 있는 존재이다.(287, 409-410)


 


그렇다면 불러냄을 [자기의 내면의 소리로서] 올바로 듣는 것은,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 즉 가장 독자적 본래적으로 ‘책임 있게 될 수 있음’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는 것과 같다. [현존재가] 이 가능성을 향해 [부름을] 이해하면서 ‘자기를 앞으로 불러내게 함’은, 부름에 대해 현존재가 자유로워짐, 즉 ‘부름받을 수 있음’에 대한 준비를,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존재는 부름을 이해하면서 자기의 가장 독자적 실존 가능성에 청종(聽從)한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287, 410)


 


이렇게 선택함으로써, 현존재는 자기의 가장 독자적 책임 있음을 자신에게 가능하게 하지만, 후자는 세인-자기에게는 폐쇄된 채로 있다. 세인이 분별해서 아는 것은 고작 손쉬운 규칙과 공공적 규범의 관점에서 본 만족과 불만족뿐이다. 거기에 위반되는 것을 세인은 감정서에 기입하고 보상을 구한다. 세인은 가장 독자적 책임존재로부터는 몰래 달아났다가 과오를 논란할 때는 그만큼 더 목청을 돋운다. 그러나 자신의 가장 독자적 책임 있음을 향해 불러냄에 있어, 불러내지는 것도 세인-자기이다. [양심의] 부름을 이해하는 것은 [본래적 자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 양심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니, 양심은 그 자체로서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되는 것은, ‘양심을 갖는 것‘, 즉 가장 독자적 책임 있음을 향해 열려 있음이다. 불러냄을 이해한다는 것은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를 의미한다.(288, 410)


 


그것은 떳떳한 양심을 가지려고 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부름의 자발적 함양도 아니며, 단지 ‘불러내는 것’에 대한 준비인 것이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현사실적 범죄의 색출이나, 본질상 책임 있다는 의미의 책임으로부터 해방되려는 경향과도 거리가 멀다.(288, 410)


 


도리어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현사실적으로 책임 있게 될 가능성에 대한 가장 근원적 실존적 전제이다. 현존재는, 가장 독자적인 자기로 하여금 자기가 선택한 존재 가능에 입각해서, [양심의] 부름을 이해하면서, 자기 안에서 행위하도록 한다. 이렇게 해서만 현존재는 [법률적 윤리적으로] 책임지는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행위는 현사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몰양심적이다. 그 까닭은, 현존재가 현사실적·도덕적 범죄를 피할 수 없다고 해서만이 아니라, 현존재가 자기의 비적 기투의 비적 근거 위에서, 그 때마다 이미 타자와의 공동존재 속에서, 타자에 대해 책임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본질적인 ‘몰양심성’을 인수하게 되고, 이 몰양심성의 내부에서만 선하게 존재할 실존적 가능성이 성립한다.(288, 410-411)


 


설사 [양심의] 부름이 정보로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비판적일 뿐 아니라 적극적이다. 즉, 부름은 현존재의 가장 근원적 존재 가능을 ‘책임 있음’으로서 개시한다. 따라서 양심은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는 하나의 증언으로서 밝혀진다. 양심은, 이 증언 속에서 현존재 자신을 그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 앞으로 불러낸다.(288, 411)


 


(3) 결의성


(한: 決意性, 독: Entschlossenheit, 영: Resoluteness)


 


개시성의 구조 계기에서 보자면 양심의 부름은 말의 한 양상이다. 이에 반해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양심의 부름에 대응하는 이해의 한 양상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적 이해가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한 기투를 의미하는 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실존적 이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분히 도식적이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가 물론 근본적으로는 실존적 이해이나, 개시성의 3구조 계기는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이를 좀더 상세하게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양심은 불안을 전제한다. 세계의 무 앞에서 으스스함에 직면할 때 독자적 존재 가능을 회복하라는 양심의 부름은 비롯된다. 그렇다면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불안에 대한 준비가 된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 역시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根本 情狀性) 속에서 가능하다. 또한 양심의 부름은 침묵으로만 말하고 있다. 침묵은 오직 묵언(默言) 속에서만 적합하게 이해된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세인의 빈 말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 따라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 속에 놓여 있는 개시성은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 가장 독자적 책임 존재를 향한 자기 기투로서의 실존적 이해, 그리고 묵언으로서의 말에 의해 구성된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 속에 놓여 있는 개시성은 “가장 독자적 책임 존재를 향해 말없이 불안에 대비하는 자기 기투”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개시성은 현존재의 본래적이고 두드러진 개시성을 증거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개시성을 특히 결의성이라고 명명한다.


결의성은 개시성의 한 두드러진 양상이다. 결의성은 자신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회복한 현존재의 본래적 자기 존재를 개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결의성을 본래적 개시성이라고도 명명한다. 또한 결의성이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확보된 현존재의 전체 존재 가능 안에서 현존재의 본래성을 증거하는 한, 우리는 결의성을 근원적 개시성이라고도 명명한다. 또한 앞서의 논의처럼 진리를 기초적 실존범주로 파악하여 근원적 진리를 개시성으로 해석하는 한, 결의성은 근원적 진리의 두드러진 양상인 ‘실존의 진리’라고도 불리운다.


실존적으로는 결의성은 ‘본래적 자기 존재’를 개시한다. 이로써 결의성은 >세계<의 피발견성과 타자의 공동 현존재의 개시성을 등근원적으로 변양시킨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세계<가 내용상 다른 세계로 되거나 혹은 타자의 무리가 하루 새에 교체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계<와 타자가 이제는 양자의 가장 독자적 자기 존재 가능에 입각해 새로 규정되는 것이다.


또한 본래적 자아라고 하여 세계로부터 유리된 허공에 뜬 자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출세간(出世間)이 곧 입세간(入世間)이다. 도를 깨쳤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세간을 떠나서 별천지에 사는 것은 아니다.”(소광희[2003], 185) 다만 본래적 현존재는 타자가 자신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타자에 대한 본래적 현존재의 고려는, 타자로부터 마음씀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타자를 그의 독자적 존재 가능에로 해방시켜 주는 고려가 된다. 이로써 현존재 사이에서는 본래적 상호성이 성립한다. 비본래적 현존재 사이에서는 본래적 상호성이 불가능하다. 오직 결의성을 통해 본래적 자기성을 회복한 현존재 사이에서만 본래적 상호성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일상적 현존재가 결의성에 의한 실존적 변양을 통해 본래적 자기 존재 가능을 회복했다고 해도, 그 본래성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세인의 비결의성이 앞서 결의한 실존을 번의시키지는 못하지만, 현존재가 현사실성과 퇴락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한, 결의한 현존재도 다시 비결의성 속으로 돌아오고 만다. 따라서 결의성은 공허한 실존의 이상을 앞에 내걸지 않는다. 오히려 결의성은 일정한 상황 속에서 본래적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


 


[읽기자료]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의 ‘자기 이해’로서, 현존재의 개시성의 한 방식이다. 개시성을 구성하는 것은 이해 이외에 정상성[情狀性]과 말이다. 실존적 이해란, 세계-내-존재-가능의 그때그때의 가장 독자적이고 현사실적인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는 것을 말한다.(295, 420-421)


 


그런 이해에는 어떤 기분이 상응하는가? [양심의] 부름의 이해는, 각자의 현존재를, 그를 단독화시키는 으스스함 속에서 개시한다. 이해 속에서 함께 드러난 으스스함은, 이해에 속하는 불안이라는 정상성[情狀性]을 통해 적나라하게 개시된다. 양심의 불안이라는 현사실은, 현존재가 [양심의] 부름을 이해함에 있어, 자기 자신의 으스스함 앞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현상적으로 확인한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불안에 대한 준비가 된다.(295-296, 421)


 


개시성의 제3의 본질계기는 이다. 현존재의 근원적 말인 [양심의] 부름에 대응하는 것은 말대꾸가 아니다 . (…) [양심의] 부름은, ‘자기’[현존재]를 부단한 책임 존재 앞에 세우고, 그렇게 해서 세인의 상식의 떠들썩한 빈 말로부터 되돌려 온다. 따라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에 속하는 분절적 말의 양상은 묵언(默言)이다. (…) 현존재는 [양심의] 부름을 받고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이런 부름은 하나의 침묵이다. 양심의 말은 결코 음성화(音聲化)되지 않는다. 양심은 침묵으로만 부른다. (…) 그러므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이 침묵의 말을 오로지 묵언 속에서만 적합하게 이해한다. ‘침묵의 말’은 세인의 상식적 빈 말에 재갈을 물린다.(296, 421-422)


 


따라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 속에 놓여 있는 현존재의 개시성은, 불안의 정상성 「情狀性」, 가장 독자적 책임 존재를 향한 자기 기투로서의 이해 및 묵언으로서의 말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양심에 의해 현존재 속에서 증거된 본래적이고 두드러진 개시성 - 가장 독자적 책임 존재를 향해 말없이 불안에 대비하는 자기 기투 - 우리는 결의성이라 부른다.(296-297, 422)


 


결의성은 현존재의 개시성의 한 두드러진 양상이다. 개시성은 앞에서 근원적 진리로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었다. 이 근원적 진리는, 일차적으로 판단의 성질이 아닐 뿐더러, 일반적으로 일정한 태도의 성질도 아니고, 세계-내-존재 자체의 한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진리는 기초적 실존범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현존재는 진리 가운데 있다는 명제를 존재론적으로 천명할 때, 우리는 이 존재자의 근원적 개시성을 실존의 진리라고 지적하였고, 후자를 획정(劃定)하기 위해서는, 현존재의 본래성을 분석하도록 시사하였다.(297, 422)


 


이제 결의성과 더불어, 본래적이기 때문에 가장 근원적인 현존재의 진리가 획득되었다. ‘현’의 개시성은, 전체적 세계-내-존재, 즉 세계, 내-존재 및 자기를 등근원적으로 개시한다. 이 자기란 나는 있다고 하는 이 존재자[현존재]이다. 세계의 개시성과 더불어 그 때마다 이미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발견되어 있다. 용재자[用在者]와 전재자[前在者]의 피발견성(被發見性)은 세계의 개시성에 근거한다. (…) 현존재는, 자기의 현 속에 던져져서, 현사실적으로 그 때마다 일정한 - 자기의 - 세계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자기 세계에의 의존]과 하나가 되어, 비근한 현사실적 기투들은, ‘세인 속으로의 배려적 자기 상실‘에 의해 이끌려 간다. 이 자기 상실은, 그때그때의 독자적 현존재에 의해 불러내질 수 있고, 이 불러냄은 결의성의 방식에 있어서 이해될 수 있다. 그때 이 본래적 개시성[결의성]은, 그 개시성 속에 기초를 둔 세계의 피발견성과, 타자의 공동 현존재의 개시성을 등근원적으로 변양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용재적[用在的] 세계가 내용상 다른 세계로 되는 것도 아니고, 타자들의 무리가 [하루 아침에] 교체되는 것도 아니지만, 용재자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존재와, 고려하면서 만나는 타자와의 공동존재가, 이제 이 양자의 가장 독자적 자기 존재 가능에 입각해서 [새로] 규정되는 것이다.(297-298, 423)


 


결의성은, 본래적 자기 존재라고 해서 현존재를 세계로부터 유리시키지도 않고, 허공에 뜬 자아로 고립시키지도 않는다. 결의성이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 본래적 개시성으로서의 결의성은 세계-내-존재를 떠나서는 달리 본래적으로 있을 수도 없다. 결의성은 [현존재의] 자기를 용재자에 몰입해서 배려하는 그때그때의 그 존재 속으로 끌고 들어오고, 또 그 자기를 고려하면서 만나는 타자와의 공동존재 속으로 밀어 넣는다.(298. 423-424)


 


결의한 현존재는, 스스로 선택한 존재 가능의 궁극 목적에 입각해서, 세계를 향해 자기를 열어 놓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결의성으로 인해 현존재는 비로소, 함께 있는 타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 존재하게 할 수 있고, 모범을 보이면서 해방시켜 주는 고려 속에서 그들의 존재 가능을 함께 개시할 수 있다. 결의한 현존재는 타자의 양심이 되기도 한다. 본래적 상호성은, 결의성의 본래적 자기 존재로부터 비로소 나오는 것이지, 사람들이 도모하는 일이나 세인의 애매하고 질투로 가득찬 협정과 수다스런 친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298, 424)


 


그러나 마음씀으로서는 현존재는 현사실성과 퇴락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자기의 현 속에 개시되어 있는 현존재는 진리와 비진리 속에 등근원적으로 자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본래적으로는 바로 ‘본래적 진리’로서의 결의성에 해당된다. 결의성은 비진리를 본래적으로 자기 것으로 하고 있다. 현존재는 그 때마다 이미 그리고 아마도 곧 이어서 다시 비결의성 속에 있게 될 터이다. 이 명칭[비결의성]은, [현존재가] 세인의 지배적 피해석성에 맡겨져 있다고 해석되는 그 현상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재는 세인-자기로서는 공공성의 상식적 애매성에 이끌려서 살아가게 된다. 공공성 속에서는 아무도 스스로 결의한 바 없건만 언제나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결의성이란 세인 속의 자기 상실로부터 ‘자기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세인의 비결의성은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지만, 결의한 실존을 번의시키는 것만은 하지 못한다. 비결의성은 실존론적으로 이해된 결의성의 반대개념이지만, 여러 억압을 짊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어떤 존재[자]적-심리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결의도 역시 세인과 그 세계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도, 결의가 개시하는 것에 함께 속해 있다. 다만 결의성으로 인해 현존재가 본래적 개안(開眼)을 얻는 한에서 그렇다. 결의성에 있어서도, 현존재에게는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이 [중대한] 문제이지만, 이 존재 가능은 피투적 존재 가능으로서 일정한 현사실적 가능성들을 향해서만 자기를 기투할 수 있을 뿐이다. 결의는 실제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현사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비로소 발견한다. 더욱이 그때 결의는, 현사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마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서 세인 속에서 가능한 것처럼 파악한다. 그 때마다 가능한 결의한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성은 이제까지 간과해온 실존론적 현상, 즉 우리가 상황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구성적 계기를 포괄한다.(298-299, 425-426)


 


결의성은 ‘현의 존재’로 하여금 그의 상황 속에서 실존하도록 한다. 결의성은 그러나 양심 속에서 증거된 본래적 존재 가능, 즉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의 실존론적 구조를 획정한다.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 속에서 우리가 인식한 것은, ‘[양심의] 부름을 적합하게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아주 분명해지는 것은, 양심의 부름이 존재 가능을 향해 불러일으킬 때, 그 양심의 부름은 공허한 실존의 이상을 앞에 내걸지 않고, 상황 속으로 불러낸다는 것이다. 올바로 이해된 양심의 부름이 가진 이런 실존론적 적극성은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것, 즉 ‘부름의 경향을 이미 발생한 범죄나 기도된 범죄에 제한하는 것[통속적 해석]이, 양심의 개시성격을 얼마나 잘못 알고 있으며, 그 소리의 구체적 이해를 우리에게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전해 주고 있는가’를 통찰하게 한다. [양심의] 불러냄에 대한 이해가 곧 결의성이라고 하는 실존론적 해석은, 양심을 현존재의 근거 속에 있는 존재양식으로서 드러낸다. 이 존재양식에 있어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증거하면서 - 자기의 현사실적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300, 427)


 


결의성을 ‘가장 독자적 책임 있음을 향해 불안을 준비하는, 묵언의 자기 기투’로서 밝혀냄으로써, [우리의] 탐구는 이제까지 탐구해온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의 존재론적 의미를 획정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301, 428)


 


3) 선구적 결의성


(한: 先驅的 決意性, 독: Vorlaufende Entschlossenheit,


 영: Anticipatory Resoluteness)


 


우리가 이 장에서 논의한 것은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이다. 이 현상은 죽음과 양심의 방향에서 해명되었다. 죽음에로의 선구가 현존재의 전체 존재 가능을 확보하였다면, 양심의 결의성은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 가능을 증거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선구와 결의성을 어떻게 결합하느냐의 여부이다.


이 두 현상의 외적 결합은 스스로 금지되어 있다. 선구가 죽음을 향한 극단적 기투인 한에서 이해에 뿌리 박고 있다면, 결의성은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려는 의지인 한에서 피투성에 뿌리 박고 있다. 그러나 선구와 결의성의 관계에 관한 이러한 해석은 양자의 외적 결합에만 국한되어 있다. 오히려 관건이 되는 것은 양자 사이의 내적 결합이다.


결의성은 단지 임의적이고 신변적인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의성이 비로소 본래적 결의성일 수 있는 전제 조건은 죽음에로의 선구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펼쳐지는 자기의 독자적 존재 가능을 인수하여 현존재의 본래성을 증거하는 것이 결의성이다. 결의성은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인 선구를 자기의 고유한 본래성의 가능한 실존적 양상으로, 이미 자기 안에 감추고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선구와 결의성을 함께 결합하여 선구적 결의성이라고 명명해도 무방하다.


결의성은 선구적 결의성으로서만 비로소 본래적이고 전체적으로 본연의 결의성일 수 있다. 결의성은 선구적 결의성으로서만 비로소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한 근원적 존재가 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결의성이 제외된다면, 선구는 그야말로 죽음을 향한 존재론적 기투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존적으로 증거된 결의성 속에는, 그 결의성이 본래적 결의성인 한, 이미 선구에 의해 한계지워진 양상이 감추어져 있다. 결의성은 선구라는 실존적 존재 가능의 양상을 비로소 양상화한 것이다. 즉 선구와 결의성 사이의 ‘연관’은 전자에 의한 후자의 가능한 양상화이다. 이로써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이 현상적으로 증시된다.


 


[읽기자료]


실존론적으로 기투된 것은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이었다. 이 현상의 해명은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를 선구로서 드러냈다. 현존재의 실존적 증언에서는, 그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 가능은 결의성으로서 제시되고 동시에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었다. 이 두 현상[선구와 결의성]은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301-302, 429)


 


두 현상의 외적 결합은 스스로 금지되어 있다. 방법적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길로서 아직 남아 있는 것은, 그 실존적 가능성에서 입증된 결의성의 현상에서 출발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다 : 결의성은, 그 가장 독자적 실존적 존재경향 자체에 있어서, 선구적 결의성을 그 가장 독자적 본래적 가능성으로서 제시하는가? 결의성이란, 그 고유한 의미상, 그 때마다 단지 임의적이고 신변적인 가능성들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는 게 아니라, 가장 극단적 가능성[죽음]을 향해, 즉 현존재의 모든 현사실적 가능성 앞에 펼쳐져 있고 현존재가 현사실적으로 포착한 제각기의 존재 가능 속으로 많든 적든 위장하지 않고 들어서는 그 극단적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기투하는 것이라고 할 때 비로소, 결의성은 그 본래성을 갖게 된다고 하면 어떤가? 현존재의 본래적 진리로서의 결의성은, 죽음에로의 선구에 있어서 비로소 자신에 속하는 본래적 확실성[확신]에 도달한다고 하면 어떤가? 죽음에로의 선구에 있어서 비로소 결의의 모든 현사실적 선구성이 본래적으로 이해된다고 하면, 즉 실존적으로 되돌려진다고 하면 어떤가? (302, 430)


 


결의성의 고유한 의미 가운데에는 이 책임 있음을 향해 자기를 기투한다는 것이 있다.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이 책임 존재로서 있다. 따라서 결의성 속에서 이 책임을 실존적으로 인수하는 일이 본래적으로 수행되는 것은, 결의성이 현존재를 개시함에 있어, 그 결의성이 책임 존재를 부단한 존재로서 이해할 만큼 그렇게 자신을 통찰하게 되었을 때 만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현존재가 존재 가능을 자기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자기에게 개시한다고 하는 것으로만 가능해진다. 하지만 현존재가 ‘종말에 와 있다‘는 것은, 실존론적으로는 ‘종말에 이르는 존재’를 의미한다. 결의성이 본래적 결의성일 수 있는 것은 죽음을 향해 이해하는 존재로서, 즉 죽음에로의 선구로서이다. 결의성은, 자기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서의 선구와 연관을 갖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결의성은,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를 자기의 고유한 본래성의 가능한 실존적 양상으로서, 자기 안에 감추고 있다. 이 연관을 현상적으로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305, 434)


 


결의성이란, 가장 독자적 책임 존재를 향해 자기를 불러내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책임 있음은, 우리가 일차적으로 존재 가능이라고 규정한 현존재 자신의 존재에 속한다. (…) 따라서 책임 존재는,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기 때문에, ‘책임 존재 가능’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결의성은 이 존재 가능을 향해 자기를 기투한다, 즉 이 존재 가능 속에서 자기를 이해한다. 이 이해는 따라서 현존재의 근원적 가능성 가운데 보존되어 있다. 그 이해가 이 가능성 가운데 본래적으로 보존되는 것은, 결의성이 근원적으로 스스로 있기를 지향하는 그것[책임 있음]일 때이다. 그러나 자기의 존재 가능을 향한 현존재의 근원적 존재를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 즉 앞에서 성격지은 바와 같이, 현존재의 두드러진 가능성을 향한 존재라고 밝혀 놓았다. 선구는 이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개시한다. 그러므로 결의성은, 선구적 결의성으로서 비로소 현존재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을 향한 근원적 존재가 된다. 결의성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서 스스로 자격을 갖출 때 비로소, 그 결의성은 ‘책임 존재 가능’[책임 있을 수 있음]의 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305-306, 434-435)


 


현존재는, 그가 자기의 비성의 비적 근거로 있다는 것을, 결의를 통해 자기의 실존 속에서 본래적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죽음을, 앞에서 성격지은 바와 같이, 실존론적으로 실존 가능성이라는 가능성으로서, 즉 현존재의 단적인 비성으로서 파악한다. 죽음은 현존재의 종말에서 그와 잇닿아 있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마음씀으로서 자기의 죽음의 피투적 (즉, 비적) 근거인 것이다. 현존재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철두철미 지배하는 비성은,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에 있어서 현존재 자신에게 드러난다. 선구가, 현존재의 전체적 존재의 근거에 입각해서 비로소 책임 있음을 개현한다. 마음씀은, 죽음과 책임을 등근원적으로 자기 속에 감추고 있다. 선구적 결의성이 비로소 책임 존재 가능을 본래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즉 근원적으로 이해한다.(306, 435)


 


결의성은, 선구적 결의성으로서만 본래적이고 전체적으로 본연의 결의성일 수 있는 것이다.(309, 439)


 


그러나 이를 역으로 말하면, 결의성과 선구 사이의 연관의 해석을 통해 비로소 선구 자체의 완전한 실존론적 이해가 달성된 셈이다. 지금까지는 선구는 단지 존재론적 기투로서만 간주될 수 있었다. 이제 밝혀진 것은, 선구란 날조되어서 현존재에게 강요된 가능성이 아니라 현존재에게서 증거된 실존적 존재 가능의 양상이고, 현존재가 자기를 결의한 자로서 본래적으로 이해한다면, 현존재는 그런 양상을 자기에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선구는 허공에 뜬 태도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존적으로 증거된 결의성 속에 감추어져 있고, 따라서 그것과 함께 증거된 결의성의 본래성의 가능성으로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래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실존적으로 자기를 통찰하게 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이다.(309, 439)


 


결의성이 본래적 결의성으로서, 선구에 의해 한계지워진 양상을 지향하고, 반면에 선구는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을 구성한다면, 실존적으로 증거된 결의성 속에서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도 함께 증거된 것이다.(309, 439)


 


선구와 결의성 사이의 연관은 전자에 의한 후자의 가능한 양상화라는 의미로 해명되었고, 이렇게 해서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이 현상적으로 증시되었다.(309, 439-440)


 


선구적 결의성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해 낸 도피로가 아니라, 양심의 부름에 청종하는 이해이다. 이 이해가, 현존재의 실존을 지배해서 모든 덧없는 자기 은폐를 근본적으로 일소할 가능성을 죽음에게 열어주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서 규정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 역시 기세적(棄世的) 은둔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망상(妄想)없이 행위하는 결의성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선구적 결의성 또한 실존과 그 가능성 위로 날아가는 이상주의적 요구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현존재의 현사실적 근본 가능성을 냉정하게 이해하는 데서 연원하는 것이다. 단독화된 존재 가능 앞에 직면시키는 숙연한 불안에는, 이 가능성에 대비한 기쁨이 수반한다. 이 기쁨 속에서 현존재는, 분망한 호기심이 일차적으로 세간사로부터 조달해 주는 향락의 우연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이들 근본기분[불안과 기쁨]의 분석은, 기초 존재론적 목표가 그어준 당면한 해석의 한계를 넘어선다.(310, 440)


 


7.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 시간성


(한: 時間性, 독: Zeitlichkeit, 영: Temporality)


 


현존재의 존재는 마음씀이다. 마음씀은 실존성, 피투적 현사실성, 퇴락의 3계기로 구성된다. 실존성은 ‘자기를 앞지름’이고, 피투적 현사실성은 ‘이미 (어떤 세계) 내에 있음’이며, 퇴락은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이다. 이 분절된 3 구조계기가 서로 맞물려 하나의 전체성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마음씀은,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으로서 자기를 앞질러 이미 (어떤 세계) 내에 있음’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마음씀의 분절된 구조 전체의 전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아직 해명된 바 없다. 우리는 ‘하나의 사태의 전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을 ‘의미’라고 명명한다. ‘의미’란 하나의 사태의 전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가리킨다.


이 장에서 우리의 물음은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 된다. 현존재의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은 실존성, 피투적 현사실성, 퇴락이라는 3 구조계기로 구성된 마음씀의 구조 전체성을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근거를 묻는 물음이다.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의미가 허공에 떠 있는 어떤 별개물이거나 혹은 현존재 자신의 외부의 것이 될 수 없다. 현존재의 존재의미는 바로 자기를 이해하는 현존재 자신이 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존재의 존재의미는 바로 현존재 자신의 ‘시간적 구조’이다.


우리는 현존재 자신의 시간적 구조를 특히 ‘시간성’이라고 명명한다. 시간성이란 표현은 우리가 통속적으로 알고 있는 시간과 차별화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좀더 부연하면, “시간과 시간성은 다르다. 시간성이라는 말은 시간이 아니라, 어떤 것이 가지고 있는 ‘시간적 성격’ 또는 ‘시간적 구조’를 가리킨다. 전자의 좋은 예는 후설의 ‘의식의 흐름’이고, 후자는 예는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존재인 마음씀이다. 하이데거의 시간성 개념에는 ‘흐름’의 성격은 없고, 마음씀의 구조가 시간적이라는 것이다.”(소광희[2003], 195) 또한 앞으로의 논의를 앞질러 말하자면, 시간성은 통속적 시간을 가능하게 한다라는 차원에서 ‘근원적 시간’이라고도 명명된다.


 


[읽기자료]


마음씀의 의미와 함께 존재론적으로 탐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 의미 현상은, ‘이해와 해석’의 분석과 관련해서 우리의 탐구와 만난 바 있다. 거기에 따르면 의미란, 어떤 것 자체는 분명하게 주제적으로 시야 속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안에 그 어떤 것의 이해 가능성이 담지되어 있는 그것’이다. 의미는 일차적 기투의 [기투가 그것을 겨냥해서 행해지는] 기반이고, 거기에 입각해서 어떤 것이 있는 그대로의 그것으로서, 그 가능성에 있어서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기투작용은 가능성, 즉 가능하게 하는 것을 개시한다.(323-324, 458-459)


 


마음씀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물어지는 것은, 마음씀의 분절된 구조 전체의 전체성을, 그 전개된 분절의 통일에 있어서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324, 459)


 


이 [현존재의] 존재, 즉 마음씀의 의미는 마음씀을 그 구성에 있어서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존재 가능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형성한다. 현존재의 존재의미는 허공에 떠 있는 어떤 별개물이나 현존재 자신의 외부가 아니라,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 현존재 자신이다. 현존재의 존재를, 그리고 이와 함께 현존재의 현사실적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325, 460)


 


1) 마음씀의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시간성


시간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 물음을 해명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은 선구적 결의성을 주목한다. 그 까닭은 자기 자신의 가장 독자적인 존재 가능성을 향해 다가서는 선구적 결의성에서야 말로 우리는 현존재의 존재의 시간적 구조를 가장 근원적으로 경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선구적 결의성이란 가장 독자적이고 두드러진 존재 가능을 향한 존재이다. 그런 것이 가능한 까닭은 오직, 현존재가 자기의 가장 독자적 가능성인 죽음에로 앞질러 나아가(즉 선구하여) 자기에게 도래(到來)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를 자기에게 도래하게 하는 것이 장래(將來)의 근원적 현상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장래란 우리가 흔히 통속적으로 말하는 미래(未來)와 구별된다. 미래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언제가는 곧 있게 될 <지금>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의 미래는, 우리의 논의를 앞질러 말하자면, 근원적 시간인 장래에서 파생된 시간에 불과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우리가 말하는 장래란 현존재가 그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 자기에게 도래(到來)할 그 ‘옴’(來)을 가리킨다. 선구는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에서 일반적으로 장래라는 시간적 구조를 이미 가지고 있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현존재는 언제나 피투적 존재이다. 선구적 결의성을 통해 현존재는 자신의 근원적인 책임 존재를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비성(非性)의 피투적 근거로 있음을 자각시킨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이해는 현존재가 홀로 우연히 이 세계에 던져져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존재 가능성에로 자신을 기투하여 자신의 실존을 꾸려 나가는 근거존재임을 자각시킨다. 피투성을 자각하면서 피투성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려는 실존적 태도에 의해 현존재는 각자가 ‘그때마다 이미 있었던 대로의’ 본래적 존재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피투성의 인수가 가능한 까닭은, 현존재의 존재가, 사물적 존재자의 존재처럼 과거로 흘러가 사라져 버리지 않고, ‘그 때마다 이미 있었던 대로’ 있을 수 있음으로서만 가능하다.


현존재가 ‘그때마다 이미 있어왔음’도 현존재의 존재의 시간적 구조에 해당한다. 우리는 그러한 시간성을 기존(Gewesen)이라 명명한다. 기존이 ‘이미 지나가 버린 <지금>’을 의미하는 통속적 시간에서의 과거와 구별됨은 물론이다. 우리의 논의를 앞질러 말하자면, 과거는 기존으로부터 파생된 시간이요, 기존은 과거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시간이다. 또한 기존은 장래와 밀접히 관련된다. 죽음으로 선구하였기에 가장 독자적 기존으로의 복귀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존성은 장래로부터 발원한다.


죽음에로의 선구를 통해 기존적 자기로 복귀한 현존재 역시 현사실적으로 환경세계 속에서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만나면서 실존한다. 다만 선구적 결의성은 ‘현’(Da)’의 그때 그때의 상황을 새롭게 개시한다. 선구적 결의성은 현존재로 하여금 새롭게 개시된 삶의 가능적 터전에서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왜곡하지 않은 채로 만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이 가능한 까닭은, 이미 현존재가 현전화(現前化, Gegenwärtigen)라는 시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전화는 후설의 시간이해에서 나타난 지각의 현전화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굳이 이름 붙인다면, 통속적 시간에서 말하는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실존론적 시간현상이다.


이로써 우리는 선구적 결의성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적 구조를 해명하였다. 선구적 결의성의 시간적 구조는 ‘기존하면서-현전화하는 장래’이다. 이러한 시간의 통일적 현상을 우리는 ‘시간성’이라 명명한다. 그런데 선구적 결의성이 본래적 마음씀의 양상이라면, 결의성에 주목해서 획득된 현상 자체는, 마음씀을 마음씀으로서 가능하게 하는 시간성의 한 양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과제는 마음씀의 분절된 구조를 염두에 두고 이 구조적 다양성의 전체성의 통일을 노현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마음씀의 첫 번째 구조계기는 실존성이다. 실존성은 ‘자기를 앞지름’(sich-vorweg)이다. 이 표현 안에는 ‘앞’이라는 시간적 구조가 있다. 그런데 이 ‘앞’이라는 시간적 구조는 통속적 미래의 시간에서처럼 ‘지금은 아직 아니지만 - 다음에는’이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마음씀은 ‘시간 안에서’ 발생하고 경과하는 ‘시간 내부적 전재자(前在者)’가 되고 만다. 오히려 ‘자기를 앞지름’에서의 ‘앞’은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인 장래를 시사한다. 현존재가 자기를 앞질러 자기의 존재 가능을 문제삼을 수 있는 존재론적 실존론적 근거는,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인 장래이다. 장래란,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 기투하면서 자기 자신에게로 도래하는 현존재의 실존론적인 시간적 구조이다. 따라서 마음씀의 일차적 구조계기인 실존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장래가 된다. 즉 실존성의 일차적 의미는 장래이다.


마음씀의 두 번째 구조계기는 피투적 현사실성이다. 피투적 현사실성은 ‘이미 (어떤 세계) 내에 있음’(schon-sein-in [einer Welt])이다. 이 표현 안에도 ‘이미’라는 시간적 구조가 있다. 이 ‘이미’라는 시간적 구조도, 앞의 경우에서처럼, ‘지금은 이미 아니지만 - 전에는’이라는 통속적 과거 시간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마음씀은 ‘시간 안에서’ 발생하고 경과하는 ‘시간 내부적 전재자(前在者)’가 되고 만다. 오히려 ‘이미 (어떤 세계) 내에 있음’에서의 ‘이미’는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인 기존성(Gewesenheit)을 시사한다. 현존재는 ‘시간과 함께’ 생성소멸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재는 정상성(情狀性) 속에서 부단히 기존으로 있는 존재자로서의 자기 자신과 마주친다. 특히 불안이라는 근본 정상성(根本 情狀性)은 기존의 본래적 자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기존의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느냐는 선택의 문제이다. 여하튼 현존재가 자신의 기존성(있어 왔음)을 뒤로 흘려 버리지 않고 기존성으로 있는 한에서만, 마음씀의 두 번째 구조계기인 피투적 현사실성은 가능하다. 피투적 현사실성의 일차적 실존론적 의미는 기존성(Gewesenheit)이다.


마음 씀의 세 번째 구조계기는 퇴락이다. 퇴락은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이다. 여기에는 앞서와는 달리 시간적 구조에 대한 아무런 시사도 없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퇴락이 시간성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실존하는 이상, 즉 본래적으로 실존하건 비본래적으로 실존하건, 여하튼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만나고 있다. 이러한 만남을 존재론적 실존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현전화(現前化, Gegenwärtigen)이다. 현전화는, 앞서 논의했듯, 통속적 의미에서의 현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를 ‘마주한다’라는 의미에서 현존재의 존재의 시간적 구조이다. 존재자에로의 몰입도 여하튼 존재자와의 만남을 전제하므로, 퇴락도 일차적으로는 현전화에 근거한다. 또한 앞서 논의했듯, 선구적으로 결의한 현존재는 퇴락으로부터 자기를 되돌려와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본래적으로 현전화하는데, 현전화의 이러한 본래적 양상을 우리는 특히 ‘순간’(瞬間, Augenblick)이라고도 명명한다.(참고: 하이데거는 현전화를 현재라고도 명명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현재가 단순히 통속적 의미에서의 현재를 가리키는지, 혹은 현전화를 의미하는지를 구별해야 한다)


마음씀의 분절된 각 구조계기는 시간성에 근거한다. 실존성, 피투적 현사실성, 퇴락에는 각각 장래, 기존성, 현전화가 대응하며, 이로써 시간성은 마음씀의 분절된 계기들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여 마음씀 구조의 전체성을 근원적으로 구성한다. 마음씀 구조의 근원적 통일은 시간성 속에 있다. 그런데 혹자는 시간성도 장래, 기존성, 현전화라는 분절된 계기를 가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문은 시간성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 우리는 시간성의 본질적 특성인 시숙(時熟, Zeitigung)과 ‘탈-자’(脫-自, Außer-sich)를 해명하고자 한다.


시간성은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애당초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시간성은 스스로 시숙한다. 즉 시간성은 스스로 때에 맞게 무르익는다. 따라서 장래, 기존성, 현전화는 시간성의 분절된 3계기가 아니라, 스스로 무르익음의, 즉 시숙의 세 방식이다. 우리는 앞서 시간성을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라고 규정하였거니와, 시숙이란 결국, 스스로 때에 맞게 무르익는 우리의 인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낱말이다. 그러니까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통일적 현상이다. 마치 우리의 인생에서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가 따로 존재하지 않듯이.


 


“시숙을 말함에 있어 하이데거는 시간성이 존재자로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시간이 존재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사유 습관은 존재의 변이를 통해서 비로소 시간을 지각하기 때문에 존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순수한 시간을 생각할 수가 없다. 인생이란 마치 물위에 떠내려가는 시간에 실려서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시인들의 인생에 대한 비탄도 대개는 그렇게 흘러가는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시간은 마치 흘러가는 물처럼 이미 있고, 인생은 그 위에 실려 가는 생명체로 간주된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라 비유컨대 마치 참외가 때와 함께 스스로 익어가듯이 인생도 그렇게 익어가는 것, 나이 먹어가는 것이다. 먹어갈 나이나 세월이 미리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이데거는 시간성의 자기 시숙(sich zeitigen)이라고 한다.”(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2001. 591-592쪽)


 


시간성의 또 하나의 본질적 특성은 ‘탈-자’이다. 탈자(ekstatikon)란 자기를 벗어남을 의미한다. 장래는 ‘…을 향해(zu …)’, 기존성은 ‘…에로(auf …)’, 현전화는 ‘…에 몰입해(bei …)라는 탈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장래, 기존성, 현전화를 탈자태(脫自態)라고 명명한다.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탈-자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시간성은 세 탈자태들이 서로 통일되는 가운데 시숙한다. 즉 시간성의 본질은 세 탈자태의 통일에 있어서의 시숙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통속적으로 알고 있는 순수한 ‘지금-연속’으로서의 시간은 시간성의 탈자적 성격이 수평화됨으로써 성립한 시간이다. 이러한 수평화는 시간성의 비본래적 시숙에 근거한다.(통속적 시간의 근원에 대해서는 앞으로 3절에서 상세한 논의가 이루어지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통속적 시간은 시간성에서 파생된 시간이다. 과거는 기존성으로부터, 현재는 현전화로부터, 미래는 장래로부터 파생된다. 따라서 시간성을 근원적 시간이라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한 가지만 더 부연하자. 장래, 기존성, 현재라는 세 탈자태는 서로 탈자적으로 통일되는 가운데 지평을 구성한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논의하는 실존론적 시간성은 탈자적-지평적으로 시숙하는 근원적 시간이다.


시간성의 또 하나의 본질적 특징은 세 탈자태 중 장래가 우위를 점한다는 것이다. 앞서 선구적 결의성의 시간성에서 논의했듯, 본래적 시간성은 본래적 장래로부터 시숙한다. 근원적 본래적 시간성의 일차적 현상은 장래이다. 또한 마음씀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므로 마음씀의 의미인 시간성도 유한하다. 물론 통속적 시간 해석에 따르면 시간은 순수한 지금의 연속으로서 무한하나, 우리가 여기에서 논의하는 시간성은 어디까지나 현존재의 실존론적 시간성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성에서의 장래의 우위가 갖는 철학사적 의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종래의 시간론에서는 현재를 실재성의 근거로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미래와 과거는 실재성이 없는 것, 단지 기억과 예견을 통해서만 있게 되는 것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그 현재의 넓이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현존재의 존재 의미로 규정하기 때문에 현존재의 존재성격, 즉 현존재는 가능존재로서 전향적으로 자기를 기투하는 존재자라는 데서 그의 시간성이 장래 우위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될 수 있다. 이것은 시간을 무한한 등질적 흐름이나 지금 연속으로 보지 않고, 삶 자체의 입장에서 현존재의 존재인 마음씀의 근거로서 파악하는데서 연유한 결과이다.”(소광희[2003], 206쪽)


 


시간성에 대한 이제까지의 논의를 총괄하면 다음과 같다.


1) 시간은 근원적으로는 시간성의 시숙이다.


2) 시간성의 시숙으로서의 시간이 마음씀의 분절된 구조의 전체성을 가능하게 한다.


3) 시간성은 본질상 탈자적이다.


4)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장래로부터 시숙한다.


5) 근원적 시간은 유한하다.


 


[읽기자료]


실존을 근원적 실존론적으로 기투할 때 기투되는 것은 선구적 결의성으로서 드러났다. 현존재의 이 본래적 전체 존재를, 그의 분절된 구조 전체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완전한 구조내용을 끝내 거명하지 않고 형식적 실존론적으로 파악한다면, 선구적 결의성이란 가장 독자적이고 두드러진 존재 가능을 향한 존재이다.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일반적으로 현존재가 자기의 가장 독자적 가능성[죽음]에 있어서 자기에게로 도래(到來)할 수 있고, 이렇게 ‘자기를 자기에게로 도래케 함’에 있어,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견뎌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실존하기 때문이다. 이 두드러진 가능성을 견뎌내면서, 그 가능성 속에서 자기를 자기에게 도래케 하는 것이 장래(將來)의 근원적 현상이다. 현존재의 존재에 본래적 또는 비본래적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속한다면, 이 존재는, 지금 시사되었으나 좀더 자세하게 규정되어야 할 의미에서, 장래적 존재로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장래(將來)란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언제가는 곧 있게 될 지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그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 자기에게 도래(到來)할 그 ‘옴’(來)을 가리킨다. 선구는, 현존재로 하여금 본래적으로 장래적이게끔 하지만, 선구 자체가 가능한 것은 오직, 현존재가 존재하는 자로서 일반적으로 이미 언제나 자기에게 도래하는 한에서만, 즉 현존재가 그 존재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장래적인 한에서 만이다.(325, 460-461)


 


선구적 결의성은 현존재를 본질적으로 책임 존재라는 점에서 이해한다. 이 이해는 [현존재가] 책임 존재임을 실존하면서 인수하는 것, 즉 비성(非性)의 피투적 근거로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피투성의 인수란, 현존재가 그 때마다 이미 있었던 대로 본래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피투성의 인수는, 장래적 현존재가 가장 독자적으로 그 때마다 이미 있었던 대로, 즉 자기의 기존(旣存)으로 있을 수 있음으로써만 가능하다. 현존재가 일반적으로 ‘나는 기존으로 있다’로서 존재하는 한에서만, 현존재는 [기존적 자기로] 돌아오는[復己하는]만큼, 그렇게 장래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적으로 장래적인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기존으로 있다.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독자적인 가능성[죽음] 속으로 선구하는 것은, 가장 독자적인 기존으로 이해하면서 돌아오는 [復歸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장래적인 한에서만 본래적으로 기존으로 있을 수 있다. 기존성은 어떤 방식으로는 장래에서 발원한다.(325-326, 461)


 


선구적 결의성은 ‘현’의 그때그때의 상황을 개시하고, 그래서 실존은 행위하면서 현실적 환경세계적 용재자[用在者]를 배시하면서 배려한다. 상황 속의 용재자에 몰입해서 결의하고 있음, 즉 환경세계적으로 임재(臨在, 臨現在前)하는 것을 행위하면서 만나게 하는 것은, 이 존재자를 현전화(現前化)하는데서만 가능하다. ‘현전화한다’는 의미에서의 현재(現在)로서만 결의성은 본디의 결의성일 수 있다. 본디의 결의성이란, 그것이 행위하면서 포착하는 것을 왜곡하지 않고 만나게 하는 것이다.(326, 461-462)


 


장래적으로 [장래를 향해 기존의] 자기로 복귀[復歸, 즉 復己]하면서, 결의성은 [존재자를] 현전화하면서 자기를 상황 속에 들여온다. 기존성은 장래에서 발원하고, 더욱이 기존적 (더 적합하게는, 기존하는) 장래가, 현재를 자기[장래]로부터 풀어놓는다. 이렇게 ‘기존하면서-현전화하는 장래’라는 통일적 현상을 우리는 시간성이라고 부른다. 현존재가 시간성으로서 규정되어 있는 한에서만, 현존재는 위에서 특징지은 바 있는 선구적 결의성이라는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을 자기 자신에게 가능하게 한다. 시간성은 본래적 마음씀의 의미로서 노정된다.(326, 462)


 


결의성이 본래적 마음씀의 양상이고, 마음씀 자체는 그러나 시간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면, 결의성에 주목해서 획득된 현상 자체는, 일반적으로 마음씀을 마음씀으로서 가능하게 하는 시간성의 한 양상을 보여 주는 데 불과하다. 마음씀으로서의 현존재의 존재 전체성은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해-있음으로서 자기를-앞질러-이미 (어떤 세계) 내에-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세 부분으로] 분절되는 구조를 처음 확정할 때 이미 시사되었던 것은, 존재론적 물음은, 이 분절을 염두에 두고 더욱더 소급적으로 추적해서, 마침내 구조적 다양성의 전체성의 통일을 노현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음씀 구조의 근원적 통일은 시간성 속에 있다.(327, 463)


 


‘자기를 앞질러’는 장래에 근거한다. ‘이미 … 내에 있음’은 자체 안에 기존성을 표명하고 있다. ‘ … 에 몰입해-있음’은 현전화에서 가능해진다. 상술한 바에 따르면, 여기에서 앞질러의 앞과 이미를 통속적 시간이해에 입각해서 포착하는 것은 스스로 금지되어 있다. 앞은, 지금은 아직 아니지만 ?? 다음에는의 의미에서 앞으로는이 아니다 ; 마찬가지로, 이미도 지금은 이미 아니지만 ?? 전에는이 아니다. 앞과 이미라는 표현들이 이런 [바로 앞에서 '아니다'라고 지적된] 시간상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면 ?? 가질 수도 있겠지만 ?? 마음씀의 시간성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 시간성은 이전에 있고 동시에 이후에 있으며, 아직 아님과 이미 아님에 동시에 있는 어떤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씀은 시간 안에서 발생하고 경과하는 존재자로서 파악될 것이다. 즉, 현존재의 성격을 가진 존재자의 존재는 하나의 전재자 [前在者]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위에서 말한 표현들의 시간상의 의의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앞과 앞질러는 장래를 시사하고 있으며, 그런 것으로서 이 장래는 일반적으로 현존재가 자기의 존재 가능을 문제삼는 그런 자로서 있을 수 있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장래에 근거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를 겨냥하는 자기 기투는, 실존성의 한 본질성격이다. 실존성의 일차적 의미는 장래이다.(327, 464)


 


마찬가지로 이미는, 존재하는 한 그 때마다 이미 피투자(被投者)인 그런 존재자의 실존론적 시간적 존재의미를 가리킨다. 오로지 마음씀이 기존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현존재는 그가 그것으로 있는 피투적 존재자로서 실존할 수 있다. 현존재가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동안, 현존재는 결코 과거로 지나간[過-去] 것이 아니라, 나는 기존으로 있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이미 기존으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는 동안만 기존으로 있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전재[前在]하지 않는’ 존재자를 ‘지나가 [사라져]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실존하는 현존재는 시간과 함께 생성 소멸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지나가 버리는 전재적[前在的] 사실로서 확정될 수 없는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피투적 현사실로서만 자기를 본다. [현존재가 자기를 본다는] 이 정상성[情狀性] 속에서 현존재는, 아직도 있으면서 이미 있었던 존재자로서, 즉 부단히 기존으로 있는 존재자로서, 자기 자신과 마주친다. 현실성의 일차적 실존론적 의미는 기존성에 있다. 마음씀 구조의 정식화는, 앞과 이미라는 표현으로써 [각기] 실존성과 현사실성의 시간적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328, 464)


 


이에 반해, 마음씀의 세 번째 구성계기, 즉 ‘… 에 몰입해 퇴락하면서 있음’에는 그런 시사가 없다. 이것은 퇴락은 역시 시간성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배려되는 용재자[用在者]와 전재자[前在者]에로의 퇴락일차적으로 근거하는 현전화가, 근원적 시간성의 양상에서는 장래와 기존성 속에 들어박혀 있다는 것을 시사할 것이다. 현존재는 결의함으로써 마침내 퇴락으로부터 자기를 되돌려오는 것이며, 그만큼 더 본래적으로 개시된 상황을 향한 순간(瞬間) 속에서 현 존재한다.(328, 464)


 


시간성은 실존, 현실성 및 퇴락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마음씀 구조의 전체성을 근원적으로 구성한다. 마음씀의 계기들은 [분절된] 단편들을 이어 쌓아서 접합되는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시간성 자체도 장래, 기존성 및 현재를 시간과 함께 합성해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성은 도대체 존재자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성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때 익는[時熟]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시간성은 마음씀의 의미  ’이다’, 시간성은 이러이러하게 규정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존재와 있다 일반의 이념을 밝힘으로써 비로소 [시간성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성은 시숙시킨다, 그것도 시간성 자신의 가능한 방식을 시숙시키는 것이다. 이 [시간성의] 방식들이, 현존재의 존재양상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의 근본 가능성을 가능하게 한다.(328, 465)


 


장래, 기존성, 현재는 자기를 향해,  … 에로 돌아와,   을 만나게 함의 현상적 성격들을 가리킨다. ‘… 을 향해’, ‘… 에로’, ‘… 에 몰입해’라는 현상들은 시간성을 단적으로 ekstatikon[脫自 ; 자기 밖으로 자기를 벗어남]으로서 드러낸다.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탈-자(脫自) 그 자체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래, 기존성, 현재라고 성격지운 현상들을 시간성의 탈자태(脫自態)라고 부른다. 시간성은 애초부터 자기를 처음으로 탈출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시간성의 본질이 제 탈자태의 통일에 있어서 ‘시숙(時熟)’이다. 통속적 이해에서 통용되는 시간의 특성은, 특히 시작도 끝도 없는 순수한 ‘지금-연속’으로서의 시간 속에서는, 근원적 시간성의 탈자적 성격이 수평화되어 버린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그러나 이 수평화 자체의 기초는, 그 실존론적 의미에서 보면, 특정한 가능적 시숙에 있다. 즉, 이 시숙에 따라 시간성이 비본래적 시간성으로서, 위에서 말한 시간을 시숙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상식에서 통용되는 시간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고 본래적 시간성에서 파생된 것임이 입증된다면, a potiori fit denominatio[명칭은 더 우세한 것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명제에 따라, 지금 밝혀진 시간성근원적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328-329, 465-466)


 


탈자태를 열거할 때, 우리는 언제나 ‘장래’를 제일 먼저 거명하였다. 그것은 설사 시간성이 세 탈자태를 이어 쌓고 연속시킴으로 해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때마다 탈자태들의 등근원성에 있어서 시숙한다 하더라도,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에 있어서는 장래가 우위를 점한다는 것을 시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세 탈자태의 등근원성 내부에서는 시숙의 양상들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는 시숙이 서로 다른 탈자태로부터 일차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은 본래적 장래로부터 시숙하고, 그렇게 해서, [이 근원적 본래적 시간성이] 장래적으로 기존하면서 비로소 현재를 일깨운다.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의 일차적 현상은 장래이다. 장래의 우위는 비본래적 시간성 자신의 변양된 시숙에 상응해서 변화하겠지만, 파생적 시간에 있어서도 여전히 [우위로] 나타날 것이다.(329, 466)


 


마음씀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우리는 선구적 결의성을 ‘현존재의 절대적 불가능성’이라고 성격지워진 가능성[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라고 규정한 바 있다. 자기의 종말을 향한 그런 존재에 있어서, 현존재는 죽음 속에 던져져 있을 수 있는 그런 존재자로서, 본래적 전체적으로 실존한다. 현존재는, 거기에 이르면 자기가 중단되어 버리는 그런 어떤 종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한적으로 실존한다. 선구적 결의성의 의미를 형성하는 그 시간성이 일차적으로 시숙시키는 본래적 장래는, 유한한 실존과 함께 그 자신 유한한 것으로서 드러난다.(329-330, 466)


 


근원적 시간성에 대한 이상의 분석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테제로 요약한다 : 시간은 근원적으로는 시간성의 시숙이며, 이 시간성의 시숙으로서 시간은 마음씀 구조의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 시간성은 본질상 탈자적이다.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장래로부터 시숙한다. 근원적 시간은 유한하다.(331, 468)


 


2) 본래적 시간성과 비본래적 시간성


이 절의 논의를 하기에 앞서 다시 한번 하이데거의 사유 구조를 언급한다. 하이데거는 항상 어떤 사태의 형식적 구조를 문제 삼는다. 그러고는 그 형식적 구조로부터 그 사태의 본래적 양상과 비본래적 양상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지를 밝혀낸다. 시간성의 논의도 예외가 아니다. 단 여기에서는 논의의 순서가 바뀌었다. 여기에서는 먼저 선구적 결의성을 통해 본래적 시간성을 논의한 뒤, 거기에서 시간성의 형식적 구조를 끄집어내었고, 이제 다시 이 시간성의 형식적 구조로부터 비본래적 시간성의 가능성을 밝혀 내고자 한다. 비록 논의의 순서에서는 변화가 있지만, 여기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독특한 사유 구조를 엿보게 된다.


이 절의 주제는 비본래적 시간성이다. 비록 이 절의 제목이 ‘본래적 시간성과 비본래적 시간성’이지만, 하이데거의 주요 목적은 비본래적 시간성을 밝혀 내는 것이다. 본래적 시간성은 비본래적 시간성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본래적 시간성은 일상적 개시성이 갖는 시간적 구조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일상적 개시성을 구성하는 정상성의 비본래적 양상 및 이해의 비본래적 양상, 그리고 퇴락이 갖는 시간적 구조가 논의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 곳에서는 앞서의 논의와는 다르게 ‘말’도 일상적 개시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조계기로서 인정한다. 아마도 퇴락적 이해도 결국은 ‘말’에 의해 분절되므로 ‘말’을 일상적 개시성을 구성하는 제4의 구조계기로 간주한 듯하다.


그런데 이 절의 과제는 일상적 개시성의 시간적 구조를 밝혀 내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아직 세계-내-존재의 시간성과 현존재적 공간성의 시간성이 과제로서 남아 있다. 세계-내-존재의 시간성에서는 특히 배시적 배려의 시간성이 다루어 질 것이며 현존재적 공간성의 시간성에서는 현존재적 공간성이 시간성으로부터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 지를 논의할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시간성도 기본적으로는 비본래적 시간성이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사항을 더 지적하고자 한다. 일상적 개시성의 각 구조계기를 형식적인 시간구조에 대비해 본다면, 정상성은 기존성에, 이해는 장래에, 그리고 퇴락은 현전화에 관련된다. 그러나 시간성은 탈자적으로 시숙하므로, 비록 정상성이 기존성이란 시간적 구조를 갖고, 이해가 장래라는 시간적 구조를 갖고, 또 퇴락이 현전화라는 시간적 구조를 갖는다고 할 지라도, 각각의 경우에는 반드시 장래, 기존성, 현전화라는 세 탈자태들의 시숙이 함께 논의된다. 우리는 이점을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읽기자료]


앞에서 우리는 결의성의 시간적 의미에 대해 성격지운 바 있거니와, 그 결의성은 현존재의 본래적 개시성을 나타낸다. 개시성은 어떤 존재자를, 실존하면서 자기의 현 자체로 있을 수 있는 그런 존재자로 구성한다. 마음씀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시간적 의미와 관련해서는, 가까스로 개요적 특징을 보였을 뿐이다. 마음씀의 구체적 시간적 구성을 제시한다는 것은, 그 구조계기들, 즉 이해, 정상성[情狀性], 퇴락 및 말을 제각기 시간적으로 해석한다는 뜻이다. 이해는 모두 저마다의 기분을 가지고 있고, 모든 정상성은 이해적이다. 정상적 이해는 퇴락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퇴락적으로 기분에 의해 규정되는 이해는, 그 이해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말’에서 분절된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현상들의 그때그때의 시간적 구성은 매양 하나의 시간성으로 소급된다. 시간성은 이 하나의 시간성으로서 이해, 정상성, 퇴락 및 말의 가능한 구조적 통일을 보증한다.(335, 475)


 


(1) 개시성 일반의 시간성


① 이해의 시간성


이해의 시간적 구조는 장래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선구적 결의성의 시간성을 논의할 때에도 장래를 언급한 바 있다. 엄밀히 말해 이 두 장래는 구별된다. 전자의 장래가 시간의 형식적 구조에 해당한다면, 후자의 장래는 그러한 형식적 구조로서의 장래의 본래적 양상이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여기에서는 둘을 구별한다. 이제 선구적 결의성의 시간성으로서의 장래는 ‘본래적 장래’로 언급된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또한 그는 이 본래적 장래를 ‘선구’라고도 술어화한다. 본래적 장래는 곧 선구이다. 그가 선구라는 용어를 선택한 까닭은, 비본래적 시간성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장래가 다른 시간적 계기에 비해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선구적 결의성을 통해 현존재는 자기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도달한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는 선구적으로 결의하기는커녕, 우선 대개는 그가 배려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이해한다. 따라서 비본래적 이해에서 장래의 시숙은 변양된다. 이해의 본래적 장래가 선구라면, 이해의 비본래적 장래는 예기(豫期)가 된다. 일상적 현존재는 배려되는 것이 초래하거나 거절하는 결과에만 골몰하므로, 거기에 입각해 그만 자기를 예기(豫期)할 뿐이다. 또한 현존재는 예기하기 때문에, 오직 그러한 이유로, … 을 기대할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다. 기대는 예기에 기초를 둔 장래의 한 양상이 된다.


이해의 비본래적 장래는 예기이다. 그런데 시간성은 탈자적으로 시숙하므로 이해의 비본래적 장래는 기존성과 현재에 의해 등근원적으로 규정된다. 기존성과 현재가 비본래적 이해를 함께 구성한다. 우선 두 탈자태 중 현재를 논의해 보자.


여기에서도 하이데거는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바 있다. 앞서 하이데거는 선구적 결의성의 시간성을 논의하면서 현전화를 언급한 바 있다. 이 때의 현전화는 본래적 현재를 의미한다. 그러고나서 다시 하이데거는 시간의 형식적 구조를 논의하면서도 현전화를 언급한다. 더욱이 거기에서는 현전화와 현재를 번갈아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언어의 혼란을 극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제안한다. 시간의 형식적 구조에서는 현재라는 용어를 사용하자. 그리고 시간성의 양상에서는 각각 본래적 현재와 비본래적 현재라는 용어를 사용하자. 아마도 이러한 제안에 하이데거도 동의할 것이며, 또 그는 이후의 논의에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본래적 현재와 비본래적 현재는 각각 구체적으로 어떻게 규정되는가?


선구적 결의성을 가능하게 하는 현재의 시간적 구조는 본래적 현재이다. 하이데거는 앞서의 논의에서는 본래적 현재도 단순히 현전화라고 명명하였으나 이제는 스스로 언어의 혼란을 피하기 의하여 본래적 현재라고 명명한다. 또한 본래적 현재를 더 구체적으로는 ‘순간’이라 이름짓는다. 이것은 앞서 본래적 장래를 선구라고 이름 지은 것과 마찬가지 방식이다. 순간이란 선구적 결의성을 통해 본래적 자기를 회복한 현존재가 이제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그야말로 그 고유한 의미 안에서 만나는 그 ‘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순간은 본래적 장래로부터 시숙한다.


그런데 일상적 현존재는 그때그때 자신이 배려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성공할 것인가의 여부에만 골몰한다. 일상적 현존재에게 본래적 현재로서의 순간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비본래적 장래, 즉 예기에 상응하는 것은 배려하는 것에 몰입하는 독자적 존재가 된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배려하는 것에 몰입하는 독자적 존재’를 현전화라고 명명한다. 그러니까 이런 현전화는 ‘비본래적, 몰순간적-비결의적 현전화’를 가리킨다.


비본래적 이해는 현전화적 예기로서 시숙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비본래적 이해의 시간성을 완전히 해명한 것이 아니다. 탈자적 시숙에서는 거기에 대응하는 기존성이 속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앞서 선구적 결의성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적 구조 중 하나를 ‘기존’이라 명명한 바 있다. 기존은 시간의 형식적 구조인 기존성의 본래적 양상에 해당한다. 그러나 기존 혹은 기존성이라는 용어는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하이데거는 본래적 기존성 즉 기존을 ‘회복’이라 구체적으로 명명한다. 회복이란 선구적으로 결의한 현존재가 ‘가장 독자적 자기에게 되돌아옴’을 의미한다.


이에 반면 비본래적 이해는 배려되는 것을 현전화하면서 거기로부터 길어낸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기투한다. 이러한 기투는 자신의 가장 독자적 피투적 존재 가능 앞에서의 자기 망각을 전제한다. 비본래적 이해의 기존성은 망각이 된다. 본래적 기존성이 회복이라면, 비본래적 기존성은 망각이다. 또한 기다림이 예기에 근거하듯, 상기(想起)는 망각에 근거한다. 망각이 상기의 전제 조건임은 당연하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해의 본래적 시간성은 “회복하는 순간적 장래”이다. 2) 이해의 비본래적 시간성은 “망각하면서 현전화하는 예기”이다. 이 세 탈자태의 통일이 본래적 존재 가능을 폐쇄한다. 따라서 이 세 탈자태의 통일은 비결의성의 가능성의 실존론적 조건이 된다. 3) 비본래적 이해는 배려되는 것을 현전화함으로써 그 이해가 규정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비본래적 이해에서 장래의 우위가 흔들리진 않는다. 이해의 시숙은 역시 일차적으로는 장래에서 일어난다.


 


[읽기자료]


결의성은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실존함’이라고 밝혀졌다. 우선 대개는 현존재는 물론 결의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때마다 단독화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는 그는 은폐되어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시간은 늘 본래적 장래로부터 시숙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늘 … 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시간성이 때로는 장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장래의 시숙은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336, 476- 477)


 


본래적 장래를 술어상으로 표시하기 위해, 우리는 선구(先驅)라는 표현을 고수한다. 이 표현은, 현존재는, 본래적으로 실존하면서, 자기를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으로서 자기에게 도래케 한다는 것, 즉 장래는 먼저 현재로부터 획득되는 게 아니라 비본래적 장래로부터 획득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장래를 표시하는 형식상 무차별적 술어[내일, 미래 등]는 마음의 첫 번째 구조계기인 자기를 앞질러라는 용어 속에 있다. 현존재는 현실적으로는 늘 자기를 앞지른다. 그러나 실존적 가능성으로 보면, ‘늘’ 선구하면서 있는 것은 ‘아니다.’(336-337, 477)


 


비본래적 장래는 [본래적 장래와]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가? 본래적 장래가 결의성에서 노정되는 것과 상응해서, 이 [비본래적 장래의] 탈자적 양상(脫自的 樣相)은, 일상적으로 배려하는 비본래적 이해로부터 그 실존론적-시간적 의미로 존재론적으로 소급할 때에만 노정될 수 있다. 마음씀으로서는 현존재는 본질상 자기를 앞지른다. 우선 대개 배려하는 세계-내-존재는 그가 배려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이해한다. 비본래적 이해는 일상적으로 종사하는 업무상 배려되는 것, 실행해야 할 것, 긴급한 것, 불가피한 것 등을 향해 자기를 기투한다. 그러나 배려되는 것은, 그것이 있는 그대로 배려하는 존재 가능을 위해 있는 것이다. 현존재는 배려되는 것에 몰입해 배려하고 있으면서, 이 배려하는 존재 가능을 자기에게 도래하도록 한다. 현존재는 일차적으로는 자기의 가장 독자적이고 몰교섭적인 존재 가능에서 자기에게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배려되는 것이 초래하거나 거절하는 결과에 입각해서 배려하면서 자기를 예기(豫期)하는 것이다. 즉, 배려되는 것에 입각해서, 현존재는 자기에게 도래하는 것이다. 비본래적 장래는 예기한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종사하는 것에 입각해서 세인-자기로서 배려하면서 하는 자기 이해는, 자기의 가능성의 근거를 장래의 이 탈자적 양상에 두고 있다. 그리고 현실적 현존재는 그와 같이 배려되는 것에 입각해서 자기의 존재 가능을 예기한다. 오직 그 때문에, 현존재는 … 을 기대할 수 있고 기다릴 수 있다. 예기는 거기로부터 어떤 것이 기대될 수 있는 지평과 범위를 이미 그 때마다 개시하고 있어야 한다. 기대는 예기에 기초를 둔 장래의 한 양상이고, 장래는 본래적으로 선구로서 시숙한다. 그러므로 ‘선구’에서 보면 죽음을 배려적으로 기대하는 것보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더 근원적이다.(337, 477-478)


 


‘이해한다’는 ‘실존한다’이므로, 어떻게 기투된 존재 가능에 있어서이든 일차적으로 장래적이다. 그러나 이해가 만일 시간적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기존성과 현재에 의해 등근원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면, 그 이해는 시숙하지 않는다. 맨 뒤에 거명한 탈자태[현재]가 비본래적 이해를 함께 구성하는 양식은 소박하게는 이미 분명해졌다. 즉, 일상적 배려도 존재 가능에 입각해서 자기를 이해한다. 단 그 존재 가능은 그때그때 배려되는 것이 결과적으로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를 고려해서 일상적 배려에 영합한다. 비본래적 장래, 즉 예기에 상응하는 것은 배려되는 것에 몰입하는 독자적 존재이다. 이 현-재[現前化 ; 對-向]의 탈자적 양상이 노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 탈자태를 본래적 시간성의 양상에서 비교하기 위해 끌어들일 때이다. (…) 본래적 시간성 가운데 유지되어 있는 현재, 따라서 본래적 현재를 우리는 순간이라 부른다. (…) 본래적 현-재[대-향]로서의 순간은 용재자(用在者]나 전재자[前在者]로서 >시간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을 비로소 만나게 한다.”(337-338, 478)


 


본래적 현재로서의 순간과 구별해서, 비본래적 현재를 우리는 현전화(現前化)라 부른다. 형식적으로 이해하면, 모든 현재는 현전화적이지만 반드시 다 순간적은 아니다. ‘현전화’라는 표현을 보충명제 없이 사용할 때는, 언제나 ‘비본래적, 몰순간적-비결의적 현전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다. 현전화는 배려되는 세계에의 퇴락을 시간적으로 해석해야 비로소 명료해질 것이다. 퇴락은 현전화 속에 그 실존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본래적 이해가 ‘배려될 수 있는 것’에 입각해서 존재 가능을 기투하는 한, 그 이해는 현전화로부터 시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순간은 거꾸로 본래적 장래로부터 시숙한다.(338, 479)


 


비본래적 이해는 현전화적 예기로서 시숙하지만, 후자의 탈자적 통일에는 거기에 대응하는 기존성이 속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선구적 결의성은 ‘본래적 자기에게로 도래함’이거니와, 그것은 동시에 자신을 단독화 속에 던진 가장 독자적 ‘자기에게 되돌아옴’이다. 이런 탈자로 인해 현존재는, 자기가 이미 그것으로 있는 그 존재자를 결의해서 인수할 수 있게 된다. 선구함에 있어서 현존재는 자기를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 속으로 앞지르게 하면서 [그 자기를] 다시 되돌려 온다. 이 본래적으로 ‘기존으로 있음‘[기-존재]을 우리는 회복[되돌려옴]이라 부른다. 반면, 비본래적 자기 기투는, 배려되는 것을 현전화하면서 그 배려되는 것으로부터 길어낸 가능성을 향한 자기 기투이다. 그러나 이 비본래적 자기 기투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독자적 피투적 존재 가능에 있어서 자기를 망각했다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이 망각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상기(想起)의 결여가 아니라, 기존성의 한 독자적이고 적극적인 탈자적 양상이다. 망각이라는 탈자태(탈출)는, 가장 독자적 기존에 직면해서 자기 자신을 폐쇄하여 [거기로부터] 도주한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이 ‘… 에 직면해서 [거기로부터] 도주하는 것’은 ‘직면해 있는 그것’[가장 독자적 기존]을 폐쇄하고 이와 함께 자기 자신도 폐쇄한다. 비본래적 기존성으로서의 망각성은 이리하여 피투적 독자적 존재와 관계한다 ; 망각성은 내가 우선 대개 기존으로 있는 존재양식의 시간적 의미이다. 그리고 오직 이 망각에 근거해서 배려하면서 예기하는 현전화는 보유[保有 ; 기억]할 수 있고, 더욱이 환경세계적으로 만나는 비현존재적 존재자를 보유할 수 있다. 이 보유에는 비보유가 대응한다. 비보유는 파생적 의미에서 망각이다.(338-339, 479-480)


 


기다림이 예기에 근거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과 같이, 상기(想起)는 망각을 근거로 해서 가능하며, 그 역은 아니다 ; 왜냐 하면 망각성의 양상에서 기존성이 일차적으로 지평을 개시해야, 배려되는 것의 외면성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상실한 현존재가 그 지평 속으로 자기를 상기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망각하면서-현전화하는-예기는 독자적 탈자적 통일이고, 비본래적 이해는 그 시간성의 점에서는 이 탈자적 통일에 따라 시숙한다. 이 [세] 탈자태의 통일은 본래적 존재 가능을 폐쇄하고, 따라서 그것은 비결의성의 가능성의 실존론적 조건이다. 비본래적이고 배려적인 이해가 배려되는 것을 현전화하고, 여기에 입각해서 그 이해가 규정된다 하더라도, 이해의 시숙은 역시 일차적으로는 장래에서 일어난다.(339, 480)


 


② 정상성의 시간성


이해는 언제나 정상적(情狀的) 이해이다. 이해가 일차적으로 장래에 근거한다면, 정상성은 일차적으로 기존성에서 시숙한다. 따라서 정상성에서는 기존성이 다른 두 등근원적 탈자태에 변양을 가한다. 우리는 정상성의 시간성을 두려움의 시간성과 불안의 시간성으로 나누어 논의하고자 한다.


두려움은 비본래적 정상성이다. 두려움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있다. 두려움의 대상이 나에게 엄습해 올 것이라는 공포의 가능성을 미리 그려보는 것이 두려움이다. 따라서 언뜻 보면 두려움의 시간성은 근본적으로 예기에서 성립하는 듯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 에 직면해서 두려워하는 까닭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존재 가능 때문이다. 또한 두려움에 떠는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의 현사실적 존재 가능에 직면하여 거기로부터 당혹해서 일탈하고 만다. 따라서 두려움의 실존론적-시간적 의미가 일차적으로 예기에 의해 구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두려움 속에서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의 현사실적 존재 가능을 망각하였기에 공포의 가능성을 예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의 실존론적-시간적 의미는 자기 망각에 의해 구성된다. 자기 망각이 두려움의 시간성을 본질적으로 구성한다.


망각에는 당혹스런 현전화가 대응한다. 자기를 위해 두려워하는 배려는 자기를 망각하기에 일정한 가능성을 붙잡지 못하게 된다. 마치 불난 집 주민이 때때로 아주 하찮은 것,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꺼내오듯, 두려움 속에서의 자기 망각은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는 당혹스런 현전화를 불러온다. 이로써 당혹스런 망각은 예기까지도 변양한다. 예기는 억압된 예기 또는 당혹스런 예기가 된다. 이런 예기가 순수한 기다림이 아님은 물론이다.


두려움을 실존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특수한 탈자적 통일은 일차적으로 망각에서 시숙한다. 망각은 기존성의 양상으로서, 현재와 장래를 그것들의 시숙 속에서 변양한다. 두려움의 시간성은 “예기하면서-현전화하는-망각”이다.


불안은 근본 정상성이다. 불안 속에서 기존의 세계는 무의의성으로 가라앉는다. 세계는 무화(無化)된다. 그러나 현존재는 그 으스스함 속에서 적나라한 자기의 본래적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이렇듯 불안은 현존재를 회복 가능한 본래적 피투성으로 도로 이끌어간다. 불안은 본래적 존재 가능의 가능성을 개현한다. 따라서 불안을 구성하는 기존성의 특수한 양상은 ‘현존재를 회복 가능성 앞으로 이끌어 감’이 된다. 이렇듯 불안은 근원적으로 기존성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기존성으로부터 비로소 장래와 현재가 시숙한다. 즉 불안의 장래와 현재는, ‘회복 가능성으로 도로 이끌어간다’는 의미에서, 근원적 기존 존재로부터 시숙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보듯, 정상성의 두 양상인 두려움과 불안은 일차적으로는 기존성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마음씀의 전체에 있어서 양자는 그때그때 각기 독자적으로 시숙한다. 두려움이 망각으로부터 시숙한다면, 불안은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회복으로부터 시숙하다. 따라서 두려움과 불안은 시숙의 근원을 달리 하는 것이다. 또한 불안이 결의성의 장래로부터 연원한다면, 두려움은 자기 상실적 현재에서 연원한다. 그러기에 두려움은 이 현재를 겁먹고 두려워하는 나머지 그만큼 더욱더 현재 속으로 퇴락하는 것이다.


 


[읽기자료]


이해는 결코 허공에 뜬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정상적[情狀的]인 것이다. ‘현’은 그때그때 기분에 의해 등근원적으로 개시되기도 하고 폐쇄되기도 한다. 기분에 젖어 있음[情調性]으로 해서 현존재는 자기의 피투성 앞에 직면하지만, 그 피투성은 곧바로 피투성으로서 인식되지 않고 사람이 어떤 기분으로 있는가 하는 데서 훨씬 더 근원적으로 개시되어 있다. 던져져 있다[피투적 존재] 함은 실존론적으로는 ‘이러 저러한 정상적 상황으로 있다’는 뜻이다. 정상성[情狀性]은 그러므로 피투성에 근거한다. 기분은 내가 그 때마다 일차적으로 피투적 존재자로 있는 모양새를 나타낸다.(339-340, 481)


 


기분은 자기의 현존재로 몰입하거나 이반(離反)하는 방식으로 개시한다. [기분이 현존재를] 그의 피투성이라는 사실 앞에 직면시키는 것이 ?? 본래적으로 노정하면서이든 비본래적으로 은폐하면서이든 ?? 실존론적으로 가능한 것은 오직, 현존재의 존재가 그 의미상 부단히 기존(旣存)으로 있을 때 만이다. 사람들 자신이 그것인 피투적 존재자 앞에 [현존재를] 직면시키는 것이 비로소 기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이라는 탈자태가 비로소 [현존재가] ‘정상적[情狀的]으로 있다’는 방식에 있어서 ‘자기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해는 일차적으로 장래에 근거하지만, 이와 반대로 정상성[情狀性]은 일차적으로 기존성에서 시숙한다. 기분이 시숙한다는 것은, 기분의 특수한 탈자태가 어떤 장래와 현재에 속해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물론 기존성이 이 두 등근원적 탈자태에 변양을 가(加)한다는 그런 투로 속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340, 481)


 


우리는 두려움의 시간성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분석을 시작한다. 두려움은 비본래적 정상성[情狀性]으로서 성격지워졌다. 두려움을 가능하게 하는 실존론적 의미는 어떤 점에서 기존성인가? [기존성이라는] 이 탈자태의 어떤 양상이 두려움의 특수한 시간성을 특징짓는가? 두려움이란, 어떤 위협적인 것에 직면해서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위협적인 것은 현존재의 현사실적 존재 가능에게 유해하고, 배려되는 용재자[用在者]와 전재자[前在者]의 권내(圈內)에서 이미 기술한 바 있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 두려움의 기분성격은, 두려움의 예기가 위협적인 것을 현사실적으로 배려하는 존재 가능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데 있다. 위협적인 것은 ‘나’라는 존재자를 향해 돌아와야만 예기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현존재가 위협당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자면 ‘… 를 향해 돌아온다’는 그 방향이 미리 일반적으로 탈자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두려워하면서 예기하는 것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 에 직면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그 때마다 ‘… [자기의 존재 가능]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거기에 두려움의 기분성격과 정감(情感)성격이 있다. 두려움의 실존론적-시간적 의미는 자기 망각, 즉 자기의 현사실적 존재 가능에 직면하여 거기로부터 당혹해서 일탈하는 자기 망각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고, 그런 당혹한 일탈로서 위협당하는 세계-내-존재는 용재자[用在者]를 배려한다. (…) 자기를 위해 두려워하는 배려는 자기를 망각하고 그래서 일정한 가능성을 붙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극히 신변적인 가능성을 찾아 헤맨다. 모든 가능한 가능성, 즉 불가능한 가능성까지 들고 일어난다. 두려워하고 있는 자는 어떤 가능성에도 머무르지 못한다. 환경세계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어찌할 바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중에 만난다. 두려움 속에서의 자기 망각에는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는 당혹스런 현전화가 속한다. 예컨대, 불난 집 주민이 때때로 아주 하찮은 것,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꺼내는 것은 주지의 일이다. 허공에 떠 있는 가능성들의 혼란을 자기 망각적으로 현전화하면 당혹하게 되는데, 그런 것으로서의 당혹은 두려움의 기분성격을 이루고 있다. 당혹이 가진 망각성은 예기까지도 변양하여, 예기를 억압된 예기 또는 당혹스런 예기로서 성격짓거니와, 그런 예기는 순수한 기다림과는 구별된다.(341-342, 482-484)


 


[자기의 존재 가능 때문에] 자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실존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특수한 탈자적 통일은 일차적으로 위와 같이 성격지워진 망각에서 시숙한다. 그런 망각은 기존성의 양상으로서, 거기에 속하는 현재와 장래를 그것들의 시숙 속에서 변양한다. 두려움의 시간성은 예기하면서-현전화하는-망각이다.(342, 484)


 


두려움의 시간성과 불안의 시간성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리는 불안의 현상을 근본 정상성[情狀性]이라고 부른 바 있다. 불안으로 인해 현존재는 그가 가장 독자적으로 던져져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고, 일상적으로 친숙하던 세계-내-존재의 생소함이 드러난다. (…) 불안의 대상은 환경세계적 존재자와는 이제 아무런 적소성[適所성]도 갖지 않는다. 내가 실존하는 이 세계는 무의의성으로 가라앉고, 그렇게 해서 개시된 세계는 존재자를 단지 무적소성이라는 성격에 있어서 개현할 수 있을 뿐이다. (…) 그 [무적] 세계에 부딪히면, 이해는 불안에 의해 세계-내-존재 자체로 이끌려 오고, 이렇게 해서 불안의 대상[즉,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은 동시에 불안의 ‘때문에’[세계-내-존재로서의 존재 가능]이다. ‘… 에 직면해서 자기를 위해 불안해하는 것’은 기다림의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예기의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불안의 대상은 이미 현 존재하며, 현존재 자신이다. 그렇다면 불안은 ‘장래’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가? 그렇다, 그러나 예기라는 비본래적 장래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342-343, 485-486)


 


불안 속에서 개시된 세계의 무의의성은 배려 가능한 것의 비성(非性), 즉 일차적으로 배려되는 것에 기초를 둔 실존의 존재 가능을 향한 자기 기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노정한다. 그러나 이 불가능성의 노정은 실은 어떤 본래적 존재 가능이라는 가능성이 밝혀져 오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노정작용은 어떤 시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불안은 생소함 속에 던져진 자로서의 적나라한 현존재 때문에 불안해한다. [현존재는 불안으로 인해 생소함 속에 던져져서 발가벗은 현존재로 된다는 것 때문에 불안해한다.] 불안은 [현존재를] 가장 독자적이고 개별화된 피투성이라는 순수한 사실로 도로 이끌어간다. 이렇게 ‘도로 이끌어가는 것’은 회피적 망각[비본래적 기존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또한 상기의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불안 속에는 이미 실존을 결의 속으로 회복하면서 인수하는 것도 없다. 이에 반해, 불안은 [현존재를] 회복 가능한 것으로서의 피투성으로 도로 이끌어간다. 이렇게 불안은 본래적 존재 가능의 가능성을 함께 노정하는바, 이 본래적 존재 가능은 [그 존재 가능을] 장래적인 것으로서 회복함에 있어 [동시에] 피투적 ‘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회복 가능성 앞으로 [현존재를] 이끌어가는 것이 불안이라는 정상성[情狀性]을 구성하는 기존성의 특수한 탈자적 양상이다.(343, 486)


 


두려움을 구성하는 망각은 현존재를 당혹시켜서 그로 하여금 포착되지 않은 세간적 가능성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한다. 이 안절부절하는 현전화와는 반대로, 불안의 현재는 가장 독자적 피투성으로 자기를 도로 이끌어가는 가운데 안주(安住)해 있다. 불안은, 그 실존론적 의미상, 배려 가능한 것에 자기를 잃어버릴 수가 없다. 만일 배려 가능한 것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이 불안과 비슷한 정상성[情狀性]에서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두려움이다. 일상적 지성[상식]은 두려움과 불안을 혼동한다. 설사 불안의 현재가 안주해 있는 현재라 하더라도, 그 현재는 결단에서 시숙하는 ‘순간’의 성격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안은 [현존재를] 어떤 가능한 결의의 기분 속으로 이끌어갈 뿐이다. 불안의 현재는 그 자신이 순간이고, 그 현재만이 순간일 수 있어서, 그 불안의 현재는 순간을 도약시키려고 억제하고 있다[도약하게 하는 발판이다].(344, 486-487)


 


불안 특유의 시간성은, 불안이 근원적으로 기존성에 근거하고 이 기존성으로부터 비로소 장래와 현재가 시숙한다는 것이다. 이 불안 특유의 시간성에 주목하면, 불안이라는 기분을 두드러지게 특징짓는 위력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 입증된다.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완전히 자기의 적나라한 생소함으로 되돌아가고, 그 생소함에 의해 [마음을] 탈취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탈취당함으로 해서 현존재는 세간적 가능성들로부터 회수될 뿐 아니라, 동시에 현존재에게는 본래적 존재 가능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344, 487)


 


불안은 죽음을 향해 던져진 존재로서의 세계-내-존재로부터 일어난다. 이렇게 불안이 현존재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시간적으로 이해하면, 불안의 장래와 현재는, ‘회복 가능성으로 도로 이끌어간다’는 의미에서, 근원적 기존 존재로부터 시숙한다는 것이다. 본래적으로는 그러나 불안은 결의한 현존재에 있어서만 솟아오를 수 있다. 결의한 자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불안이 그를 방해하거나 당혹시키지 않는 바로 그 기분일 수 있다는 것을 이내 이해하고 있다. 불안은 [현존재를] 무적[無的 ; 공허한] 가능성들로부터 해방하여 본래적 가능성을 향해 자유로워지도록 한다.(344, 487-488)


 


정상성의 두 양상인 두려움과 불안이 일차적으로는 기존성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마음씀의 전체에 있어서 양자는 그때그때 각기 독자적으로 시숙한다는 점에서는 그 근원을 달리한다. 불안은 결의성의 장래에서 연원하고, 두려움은 자기 상실적 현재에서 연원하거니와, 두려움은 이 현재를 겁먹고 두려워하는 나머지 그만큼 더욱더 현재 속으로 퇴락한다.(344-345, 488)


 


③ 퇴락의 시간성


근본적으로 이해의 시간적 구조가 장래라면, 정상성의 시간적 구조는 기존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다룰 마음씀의 제3의 구조계기인 퇴락은 그 실존론적 의미를 현재에 둔다.


우리는 앞서 퇴락을 예비적으로 분석할 때 빈 말, 호기심, 그리고 애매성을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호기심만이 고찰의 대상이 된다. 그 까닭은, 호기심에서 퇴락의 특수한 시간성이 가장 용이하게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시간적 구조는 현존재와 존재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지평을 구성한다. 현재가 제공하는 탈자적 지평 안에 존재자는 생생하게 임재(臨在)한다. 이 현재의 비본래적 양상이 현전화이다. 우리는 앞서 비본래적 이해의 현전화와 두려움의 현전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 현전화의 구체적 모습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 호기심의 현전화는 비본래적 이해의 현전화나 혹은 두려움의 현전화에 비해 예사롭지 않다.


호기심은 봄(視)의 일상적 존재양상이다. 호기심의 눈은 번들거린다. 호기심은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여기 저기를 쏘다닌다. 그러고는 가장 가까운 것에는 특수하게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한 번 보기를 얻자마자 벌써 다음 것으로 눈을 옮긴다. ‘아직 보지 못한 것’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호기심의 현전화이다. 호기심의 현전화는 극단적으로 비본래적인 현전화가 된다. 이로써 호기심의 특징인 무정착(無定着)이 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것은 맥풀어진 현전화이다. 맥풀어진 현전화는 부단히 예기로부터 뛰처 달아난다. 호기심의 현전화는 가능성을 예기하지 않고, 오히려 가능성을 실제적인 것으로서 자기의 갈망 속에서 열망하기만 한다. 호기심의 현전화는 오직 현재를 위해 현전화한다. 그러기에 예기는 말하자면 예기 자체를 포기한다. 또한 호기심은 언제나 ‘그 다음의 것’에 머물고 ‘이전의 것’은 금방 망각하기에, 호기심이 극성을 부릴수록 망각은 증대한다.


호기심의 시간성은 “극단적 비본래적 현전화에서 예기하고 망각하면서 있음”이다. 현재가 달아나듯이 발원하는 것이 호기심의 시숙양상이다. 그런데 호기심의 이러한 시숙양상은 유한한 시간성의 본질에 근거한다.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그런데 일상적 현존재는, 이 죽음의 피투성에 직면하면, 우선 대개는 거기로부터 도피한다. 그러니까 역으로 말하자면, 현재가 달아나듯이 발원하는 근원, 즉 퇴락이 자기 상실로 되는 근원은, 죽음에 이르는 피투적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 자체가 된다.


 


[읽기자료]


이해와 정상성[情狀性]의 시간적 해석은, 그 때마다 그 현상들[이해와 정상성]에 대해 일차적인 탈자태와 만났을 뿐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전체적 시간성과도 만났다. 일차적으로는 장래가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기존성이 기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씀의 제3의 구성적 구조계기인 퇴락은 그 실존론적 의미를 현재에 둔다. 퇴락의 예비적 분석은 빈 말, 호기심 및 애매성의 해석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퇴락의 시간적 분석도 동일한 과정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탐구는 호기심의 고찰에만 한정한다. 그 까닭은, 거기에서 퇴락의 특수한 시간성이 가장 용이하게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빈 말과 애매성의 분석을 위해서는 ‘말’과 해의(解義; 해석)의 시간적 구성이 먼저 해명되어 있어야 한다. (346, 489-490)


 


호기심은 현존재의 한 두드러진 존재경향이고, 이 경향에 따르면 현존재는 ‘볼 수 있음’을 배려한다. 본다는, ‘봄’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육안(肉眼)에 의한 인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넓은 의미의 ‘인지’는 그 ‘보임새’[外見, 外樣]라는 점에서, 용재자[用在者]와 전재자[前在者]를 그 자체에 즉해서 몸으로 만나게 한다. 그렇게 만나게 하는 것은 현재에 근거한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탈자적 지평을 제공하거니와, 그 지평 안에서 존재자는 생생하게 임재적(臨在的)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호기심이 전재자[前在者]를 현전화하는 것은, 전재자 곁에 머물면서 그 전재자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보기만을 위해서, 그리고 한 번 봐두기만을 위해서 보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 속에 갇혀 있는 현전화로서의 호기심은, 그 현전화에 상응하는 장래 및 기존성과 하나의 탈자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향해 돌진하기는 하지만, 그 현전화는 예기로부터는 탈출하려고 한다. 호기심은 시종일관 비본래적으로 장래적이지만, 그것은 다시 가능성을 예기하지 않고, 가능성을 실제적인 것으로서 자기의 갈망 속에서 열망하기만 한다. 호기심을 구성하는 것은 맥풀어진 현전화이다. 그 현전화는 현전화할 뿐, 부단히 예기로부터, 즉 그 안에서 현전화가 맥풀린 채로 유지되고 있는 그 예기로부터 뛰쳐 달아나려고 한다. 이 현재[즉, 비본래적 현전화]는 [예기로부터] ‘뛰쳐 달아난다’는 강조된 의미에서 발원한다. 이렇게 [예기로부터 뛰쳐 달아난다는 의미로] 발원하는 호기심의 현전화는 그러나 사상(事象)에 몰두하기는커녕, 한 번 보기를 얻자마자 벌써 다음 것으로 눈을 옮긴다. 포착된 특정한 가능성의 기대로부터 부단히 [달아나듯이] 발원하는 [비본래적] 현전화는 호기심의 특징인 무정착(無定着)을 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현전화가 예기로부터 [달아나듯이] 발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전화가 말하자면 존재[자]적으로 이해해서 예기로부터 분리되고, 예기를 예기 자신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다. [달아나듯이] 발원하는 것은 예기의 한 탈자적 변양인데, 그것도 예기가 [달아나는] 현전화에 뒤따라 달아난다는 그런 변양이다. 예기는 말하자면 예기 자체를 포기한다. 예기는 더 이상 배려의 비본래적 가능성들을 배려되는 것에서부터 자기에게 도래케 하지 않는다. 만일 도래케 한다면, 그것은 맥풀어진 현전화를 위한 가능성들일 뿐이다. 예기가 [달아나듯이] 발원하는 현전화에 의해 [그 현전화에] 뒤따라 달아나는 예기로 탈자적으로 변양하는 것, 그것은 심기혼란의 가능성의 실존론적-시간적 조건이다.(346-347, 490-491)


 


뒤따라 달아나는 예기로 인해 현전화는 더욱더 현전화 자신에 내맡겨진다. 현전화는 현재를 위해 현전화한다. 현전화를 현전화 속에 가두어 두기 때문에, 심기혼란된 무정착은 무체류성(無滯留性)으로 된다. 현재의 이런 양상은 순간의 극단적 반대현상이다. 전자[현재의 무체류성]에서는 현-존재는 도처에 있으면서 아무 곳에도 없다. 후자[순간]는 실존을 상황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본래적 현을 개시한다.(347, 491)


 


현재가 비본래적일수록, 즉 현전화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수록[현전화가 독립적으로 될수록], 현전화는 일정한 존재 가능에 직면해서 거기로부터 은폐하면서 도주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장래는 피투적 존재자로 더욱더 되돌아오지 못한다. 현재가 [달아나듯이] 발원한다는 데서는 동시에 망각이 증대한다. 호기심이 언제나 이미 ‘바로 다음의 것’에 머물고 ‘이전 것’을 망각했다는 사실은, 호기심에서 비로소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호기심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이다.(347, 491-492)


 


유혹, 평온, 자기 소외, 자승자박 등 앞에서 제시된 퇴락의 성격들은 시간적 의미에서 보면, [달아나듯이] 발원하는 현전화가, 그 탈자적 경향에 따라, 현전화 자신으로부터 시숙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자승자박이라는 이 규정은 한 탈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전화에 있어서 실존이 탈출한다는 것은 물론 현존재가 자신의 자아나 자기로부터 분리된다는 뜻이 아니다. [호기심 등] 극단적 현전화에 있어서도 현존재는 시간적임을 면치 못한다. 즉, 그는 예기하고 망각하면서 있다. (…)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이 넘겨다볼 수 없을 만큼 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달아나듯이] 발원하는 현재의 퇴락적 시숙양식이다.(347- 348, 492)


 


현재가 [달아나듯이] 발원한다는 시숙양상은 유한한 시간성의 본질에 근거한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 속에 던져져 있는 현존재는, 다소간 분명하게 노정되어 있는 이 피투성에 직면해서, 우선 대개는 거기로부터 도피한다. 현재는 그 본래적 장래와 기존성으로부터 발원하므로, 그렇게 해서 [비본래적] 현재를 우회(迂回)해서 비로소 현존재를 본래적 실존으로 돌아오게 한다. 현재가 [달아나듯이] 발원하는 근원, 즉 퇴락이 자기 상실로 되는 근원은, 죽음에 이르는 피투적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시간성 자체이다.(348, 492-493)


 


④ 말의 시간성


개시성에서 말의 역할은 분절이다. 말은 이해, 정상성 및 퇴락에 의해 구성되는 ‘현’의 완전한 개시성을 분절된다. 따라서 말은 일차적으로는 특정한 탈자태에서 시숙하지 않는다. 그러나 ‘… 에 대해’, ‘… 에 관해’, ‘… 을 향해’ 말하는 것이 모두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에 근거하는 이상, 말도 시간적이다. 특히 말은 현사실적으로는 대개 언어에서 자기를 언표하고 또 우선은 환경세계에 대해 배려적-담론적으로 말을 거는 방식으로 언표하므로, 말에서는 현전화가 우선적 구성기능을 갖는다.


 


[읽기자료]


이해, 정상성[情狀性] 및 퇴락에 의해 구성되는 ‘현’의 완전한 개시성은 말에 의해 분절된다. 그러므로 말은 일차적으로 특정한 탈자태에서 시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말은 현실적으로는 대개 언어에서 자기를 언표하고 또 우선은 환경세계에 대해 배려적-담론적으로 말을 거는 방식으로 언표하기 때문에, 현전화우선적(優先的) 구성기능을 갖는 것은 물론이다.(349, 493-494)


 


‘… 에 대해’, ‘… 에 관해’, ‘… 을 향해’ 말하는 것이 모두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에 근거하는 이상, 말은 그 자신에 있어서 시간적이다. (…) 일차적으로 또 현저하게 이론적 진술이라는 의미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말은 그 때마다 존재자에 관한 논급이기 때문에, 말의 시간적 구성의 분석과 언어형상(言語形象)의 시간적 성격의 해명은, 존재와 진리의 원칙적 연관의 문제가 시간성의 문제성으로부터 전개될 때 비로소 착수될 수 있다. 그 때에는 표면적인 명제론과 판단론이 계사(繫辭)로 불구화(不俱化)된 있다의 존재론적 의미도 규정될 수 있게 된다. 말의 시간성, 즉 현존재 일반의 시간성에 입각해서 비로소 의의(意義)의 성립이 구명되고, 개념형성의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이해 가능하게 될 수 있다.(349, 494)


 


(2) 세계-내-존재의 시간성


앞서 우리는 개시성 일반의 시간성을 논의하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러한 시간적 구조를 가진 현존재가 일상적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구체적 모습을 그 시간적 구조에 맞춰 해석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절의 일차적 주제는 배시적 배려의 시간성에 대한 해명이 된다. 어찌 보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해명을 통해 자신의 시간성 분석이 정당했음을 입증하는 듯 하다.


 


① 배시적 배려의 시간성


배시적 배려의 실존론적 구조는 적소케 함이다. 도구의 가장 간단한 취급에도 적소케 함이 작용한다. 적소케 함이란 도구에게 그것의 용도성에 맞게 쓰임 자리를 지정해 주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못박는 ‘데’ 망치를 ‘가지고’ 사용할 때, 망치는 적소성을 갖게 된다.


적소성은 ‘…을 가지고 …에’라는 관계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관계 구조에서 ‘…을 가지고’와 ‘…에’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적소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배려가 이미 도구의 용도성(’…을 위해’)에 대한 선행적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용도성에 대한 선행적 이해가 가능한 까닭은 배려가 이미 비본래적 장래인 ‘예기’라는 시간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배려는 용도성을 예기하면서 동시에 망치질에 사용될 도구인 망치에게로 돌아와 그것을 보유해야 한다. 이렇게 ‘돌아와 보유함’이 비본래적 기존성인 ‘보유’에 근거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망치질의 현전화는 예기와 보유의 탈자적 통일 안에서 가능하게 된다.


배시적 배려의 시간성은 “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이다. 그런데 적소케 함을 구성하는 시간성에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특수한 ‘망각’이다. 도구세계에서 무아지경으로 일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다.


 


[읽기자료]


배려의 시간성을 분석하기 위한 시선방향을 우리는 어떻게 획득하는가? 세계에 몰입해서 배려하면서 있음을 우리는 환경세계 내에서의 교섭 내지 환경세계와의 교섭이라고 불렀다. ‘… 에 몰입해 있음’의 범례적 현상으로서 우리가 선택한 것은 용재자[用在者]를 사용한다, 조작한다, 제작한다 등과 그것들의 결여적 내지 무관심적 양상들[쉰다, 등한히 한다]이니, 요컨대 일상적 필요에 속하는 것에 몰입해 있음이다.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도 그런 배려 속에서 유지된다. 배려가 본래적 실존에 대해 무관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352, 497)


 


배려적 교섭이 일반적으로 용재자[用在者]를 배시적으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교섭이 ‘어떤 것[도구]을 가지고 어디에 [쓸모 있게] 있다’는 적소성[適所性]과 같은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을 때이다. 배려행위가 행하는 바, ‘… 에 몰입해 배시적으로 발견하면서 있음’은 적소케 함이니, 다시 말하면 적소성을 이해하면서 기투하는 것이다. 적소케 함이 배려의 실존론적 구조를 이루고, 배려는 그러나 ‘… 에 몰입해 있음’으로서 마음씀의 본질적 틀에 속한다면, 그리고 마음씀 쪽은 시간성에 근거한다면, 적소케 함의 가능성의 실존론적 조건은 시간성의 시숙의 한 양상에서 찾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353, 499)


 


도구의 가장 간단한 취급에도 적소케 함이 작용한다. 적소케 함의 ‘어디에’는 ‘무엇을 위해’[용도성]라는 성격을 갖는다 ; 그것을 고려해서 도구는 사용될 수 있고, 사용되는 것이다. 적소성의 ‘무엇을 위해’, 즉 ‘어디에’를 이해하는 것은 예기[비본래적 장래]라는 시간적 구조를 갖는다. ‘무엇을 위해’를 예기하면, 배려는 동시에 ‘거기에’[못 박는데] 적소성을 갖는 어떤 것[망치]으로 돌아올 수 있다[비본래적 기존]. 적소성의 ‘어디에’를 예기하는 것은 적소성의 ‘무엇을 가지고’를 보유하는 것과 일치해서, 예기의 탈자적 통일에 있어서 도구를 특수하게 조작하면서 ‘현전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353, 499)


 


조작적 교섭은 단지 적소케 함의 ‘어디에’와만 관계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무엇을 가지고’와[만] 관계하지도 않는다. 적소케 함은 도리어 ‘예기적 보유’라는 통일에서 구성되므로, 거기에서 연원하는 ‘현전화’는, 배려가 자기의 도구세계 속에 몰두한다는 성격을 가능하게 한다. 본래적으로 전심진력하여 ‘자기 일에 골몰하는 것’은, 제품에만 임하는 것도 아니고, 제작도구에 임하는 것도 아니며, 양자에 다 같이 임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적소케 함은, 배려가 그 속에서 배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 관계['어디에',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의 통일을 이미 수립하고 있는 것이다.(353-354, 499-500)


 


적소케 함을 구성하는 시간성에 본질적인 것은 특수한 망각이다. 도구세계에서 무아지경으로 실지로 일에 착수하고 조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를 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354, 500)


 


적소케 함은, 그것이 도구연관에서 무엇을 교섭적으로 만나게 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예기하면서-보유하는-현전화’라는 탈자적 통일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355, 501)


 


 


② 배시적 배려로부터 과학적 인식으로의 변양 및 그 변양의 시간적 의미


일상적 세계 안에서 우리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우선 대개는 용재자(用在者)로 만난다. 그리고 용재자가 도구적 성격을 탈색하였을 때 비로소 과학적 인식의 대상인 전재자(前在者)가 가능하게 된다. 이 절의 과제는 배시적 배려로부터 과학적 인식으로의 변양을 추적해 나가는 가운데 그 변양의 시간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다.


배려에도 일정한 시(視)가 작용한다. 그것이 바로 배시이다. 배시는 배려가 도구들의 지시연관에 적응하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나 배시가 도구와의 교섭을 이끄는 궁극적인 시(視)는 아니다. 배시(Umsicht)를 이끄는 시(視)는 전망(Übersicht)이다. 배시가 전체를 둘러(Um)보는 시(sicht)라면, 전망은 그에 앞서 전체를 내다(Über)보는 시(sicht)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전망의 본질은 “적소전체성에 대한 일차적 이해”이며, 그러한 이해 안에서 현존재의 배려는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전망 역시 하나의 시(視)이므로 전망을 이끄는 >빛<이 있어야 한다. 그 >빛<이란 바로 적소 전체성을 완결짓는 현존재의 궁극목적이다. 전망도 그 >빛<을 현존재의 존재 가능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현존재의 배려는 고유한 시(視)에 따라 이루어진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고유한 시(視)를 배려가 지닌 “그 나름의 독자적 >인식<”(67, 100)이라고도 명명한다. 분명히 배려는 현존재의 궁극목적과 수단의 관련 속에서 특정한 >인식< 계기를 통해 실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계기는 아직 일반적 의미의 인식과는 구별된다.


일반적 의미의 인식은 진리를 추구한다. 인식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자기 반성을 필수 요소로 한다. 그러나 배시(혹은 전망)는 그 빛을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에서 부여받으나, 그 존재가능성 자체를 반성하지는 않는다. 배시의 목적은 오직 현존재의 궁극목적에 정위된 채 용재자를 현전화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용재자를 배시적으로-해석하면서 가까이 하는 것’을 특히 고찰이라 명명한다. 고찰의 도식은 >…이면[원인, 동기], …이다.<가 된다. 고찰은 그때마다의 필요성에 따라 용재자를 가까이 가져와 현재화하는 것에 국한된다.


따라서 고찰은, 달리 말하면, 배시적 현전화이다. 배시적 현전화는 도구 연관의 ‘보유’에 근거한다. 현존재는 이 도구 연관을 배려하면서 어떤 가능성을 ‘예기’한다. 그리고 예기하면서 보유하는 가운데 이미 밝혀진 것을 더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 고찰적 현전화 또는 현재화가 된다. 따라서 고찰적 현전화는 과학적 인식에 이를 수 없다. 물론 고찰적 현전화도 어떤 일정한 의미에서는 존재자를 드러내나, 이러한 드러냄은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도구로서 사용하는 현존재의 기술적 태도 안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즉 현존재의 배려적 교섭에서 세계내부적 존재자는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에 따라 그 빛의 조명 아래 용재자로서 드러날 뿐이다.


현존재의 배려적 교섭은 존재자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태도가 아니다. 현존재의 배려적 교섭은 존재자를 용재자로서 드러내어 사용할 뿐이다. 이에 반해 과학적 인식의 태도는 존재자를 그 자체에 즉해 드러내는 인식적 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배려적 교섭으로부터 과학적 인식으로 이행하기 위해 현존재는 우선 용재자로부터 도구적 성격을 벗겨내어 그것을 과학적 이론의 관찰 대상인 전재자로서 확보해야 한다. 용재자를 전재자로서 변양했을 때에만 현존재는 전재자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용재자로부터 전재자로의 변양은 어떻게 가능한가? 앞서 우리는 이 문제를 이미 논의한 바 있다. 이해로부터 진술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그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진술을 통해 용재자를 전재자로서 확보한 바 있다.


그러나 이해로부터 진술에 이르는 과정도 우리가 과학적 인식에 도달하는 1단계에 불과하다. 물론 진술에서도 용재자가 전재자로 변양된다. 그러나 진술에서는 어디까지나 해당 용재자 자체만이 도구들의 지시연관으로부터 분리될 뿐, 해당 용재자 전체가 과학적 진술의 대상으로 변양되지는 않는다. 즉 진술은 “이것은 …이다.”라는 형태를 취할 뿐, 과학적 전칭 명제의 형태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존재는 진술만으로는 과학적 인식에 이를 수 없다. 과학적 인식은 우리에게 하나의 단계를 더 요구한다.


과학적 진술에서는 하나의 도구가 소속되어 있던 ‘자리’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과학적 진술에서는 예컨대 특정한 망치가 적소 전체성 안에서 차지하던 특정한 자리가 소멸할 뿐 아니라, 이런 흔적 지워내기는 모든 도구에로 확대된다. 이제 모든 도구는 적소 전체성 안에서의 자기의 ‘자리’(적소)를 떠나 무차별적인 공간-시간-위치로 환원된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물리적 자연을 만나게 된다. 즉 환경세계의 존재자로부터 그 환경세계의 한계가 모조리 철폐되는 그 곳에서, 즉 환경세계의 한계가 철폐되는 한 극한에서, 인간 현존재와 물리적 자연의 만남은 가능하게 된다.


환경세계의 한계가 철폐됨으로써, 다시 말해 세계가 탈 세계화함으로써 모든 용재자는 도구적 성격을 탈색하고 과학적 관찰 대상으로 변양된다. 이제 과학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순수하게 밝혀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길을 모색한다. 그러한 모색을 일컬어 하이데거는 주제화라고 명명한다.


주제화는 대상화(객관화)를 포함한다. 더욱이 과학적 인식의 연구 분야가 확정됨에 따라 그 분야에 접근하기 위한 특정한 방법적 지침도 주어진다. 또한 그러한 연구 분야에 알맞은 개념적 구조와 언어도 예시된다. 이처럼 존재자가 과학적 인식의 주제가 되는 모든 과정이 주제화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주제화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제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과학자의 눈앞에서 꼼짝달싹 못하는 과학적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어떤 용도에 실천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연의 비밀을 제공한다라는 순수한 목적에서 봉사하기 위해 실험 도구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과학적 주제화가 갖는 시간적 구조(시간성)를 찾아낸다. 그것은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고찰의 시간적 구조와 선명히 대비된다.


고찰의 현재는 배시적 현전화이다. 그러나 과학적 주제화의 현재는 ‘두드러진 현전화’이다. 이제 용재자는 전재자로 변양되어 그야말로 꼼짝없이 관찰과 실험의 분석 대상이 되고 만다. 또한 고찰은 현존재의 어떤 존재 가능을 예기한다. 그러나 과학적 주제화에서는 전재자의 피발견성만이 예기된다. 여기에서는 오로지 자연에 대한 설명과 예측만이 문제된다. 또한 고찰의 기존성은 도구의 보유인 반면, 과학적 주제화의 경우에는 거기에 해당하는 계기가 없다. 이것은 아마 자연에는 역사가 없기 때문이니라.


 


[읽기자료]


배시는 용재적 도구연관의 적소성 관련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배시 자신은 다시, 그때 그때의 도구세계 및 거기에 속하는 공공적 환경세계의 도구 전체에 대해 많든 적든 명시적으로 전망(展望)하는 데 따라 이끌리고 있다. 이 전망이란 고작 전재자들을 추후적으로 긁어모으는 것이 아니다. 전망의 본질은 적소 전체성에 대한 일차적 이해이다. 이렇게 이해된 적소 전체성 내부에서 현사실적 배려는 그때그때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배려를 밝혀주는 전망은 그  빛 을 현존재의 존재 가능에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현존재의 존재 가능을 궁극 목적으로 해서 마음씀으로서의 배려가 실존한다. 배려의  전망적  배시는, 그때그때 [도구를] 사용하고 조작하는 현존재에게, ‘보여진 것’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용재자를 더 가까이 가져온다. 배려되는 것을 이렇게 특수하게, 즉 배시적으로-해석하면서 가까이 하는 것을, 우리는 고찰이라 부른다. 고찰 특유의 도식은 … 이면[원인, 동기], … 이다[결과, 귀결] , 즉, 예컨대 이것저것이 제작되어 사용되고 방지되어야 한다면, 이런저런 수단, 방도, 정세,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배시적 고찰은 배려되는 환경세계 내에서의 현존재의 그때 그때의 현사실적 처지를 밝혀준다. 따라서 배시적 고찰은 어떤 존재자의 전재적 존재나 그 성질들을  확인 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찰 속에서 배시적으로 가까워진 것 자체가 손에 잡힐 만큼 용재적으로 있지 않더라도, 또 가장 가까운 시계(視界) 안에 임재(臨在)해 있지 않더라도, 고찰은 수행될 수 있다. 배시적 고찰 속에서 환경세계를 가까이 가져오는 것은 현전화한다는 실존론적 의미를 갖는다. 왜냐 하면 현재는 현전화의 한 양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359, 506-507)


 


배시적 현전화는 그러나 여러 겹으로 정초된 현상이다. 그것은 우선 [첫째], 그 때마다 시간성의 완전한 탈자적 통일에 속한다. 그것은 도구연관의 보유에 근거하는데, 현존재는 이 도구 연관을 배려하면서 어떤 가능성을 예기한다. 예기하면서 보유하는 가운데 이미 밝혀진 것을 더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 고찰적 현전화 또는 현재화이다. 그러나 [둘째], 그 고찰이  … 이면 … 이다 의 도식 속에서 움직일 수 있으려면, 배려는 이미 적소성 연관을  전망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이면 으로 언급되는 것[사상]은 이미 이러이러한 것으로서 이해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도구의 이해가 술어화(述語化)로 표현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라는 도식은 이미 선술어적 구조 속에서 밑그림 그려져 있다. ‘으로서-구조’는 존재론적으로는 이해의 시간성에 근거한다. [셋째], 현존재가 어떤 가능성, 즉 여기서는 어떤 ‘… 을 위해’[용도성 ; 못박기]를 예기해서 ‘그러기 위해’[특정한 용도성 ; 망치질]로 돌아오기만 하면, 즉 한 용재자를 보유하기만 하면, 거꾸로 이 예기적 보유에 속하는 현전화는, 이 보유되어 있는 것[용재자]에서 출발하여, 이것이 ‘… 을 위해’[용도성]를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가까이 가져올 수 있다. 가까이 가는 고찰은, 현전화의 도식에서, 가까워져야 할 것[용재자]에 자기를 적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용재자의 적소성 성격은 고찰을 통해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까워질 뿐이고, 그리하여 고찰은 어디에 [못 박는 데] 어떤 것[망치]을 가지고 적소하는 것을, 바로 그것으로서 배시적으로 보이도록 할 뿐이다.(359-360, 507-508)


 


이제까지 획득한 고찰의 제 단계에 상응해서, 이론적 태도의 해석에는 한층 더 제한이 가해진다. [즉] 우리는 세계-내-존재 일반의 시간적 구성에 육박하려는 주도적 의도 하에, ‘용재자에 대한 배시적 배려’가 세계 내부적으로 눈에 띄는 ‘전재자의 연구’로 전환하는 것만을 탐구한다.(357, 504)


 


배시적으로 작업도구를 사용할 때, 우리는 ‘이 망치는 너무 무겁다’거나 ‘너무 가볍다’고 말한다. ‘망치가 무겁다’는 명제도 배려적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망치가 가볍지 않다’, 즉 ‘망치를 쥐는 데 힘이 든다’ 또는 ‘조작하기가 힘들다’를 의미한다. 이 명제는 또 ‘우리가 이미 배시적으로 망치로서 알고 있는 목전의 존재자는 중량, 즉 무게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받침대에 압력을 가하고 있어서, 받침대를 제거하면 낙하한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되는 말은, 어떤 도구 전체와 그 적소성 관련들을 예기하면서 보유하는 지평에서 얘기되는 것은 이미 아니다. 위에서 한 말은 어떤 질량적 존재자 자체에 고유한 [즉, 그 존재자에 성질로서 속해 있는] 것을 주목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때 보여진 것은 작업도구로서의 망치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 하에 있는 물체로서의 망치에 고유한 것이다. 너무 무겁다거나 너무 가볍다는 배시적 말은 이제 [망치를 전재적 물체로 보는 데서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지금 만나는 존재자는, 그것과 관계해서 그 존재자가 너무 무겁다거나 너무 가볍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즉, 적소성]을 아무 것도 그 자신 제공하고 있지 않다.(360-361, 508-509)


 


이렇게 변양된 말에서 말의 대상, 즉 무거운 망치가 다르게 나타나는 까닭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조작을 단념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우리가 이 존재자의 도구성격에서 단지 눈을 떼는 데['度外'視] 있는 것도 아니며, 도리어 만나고 있는 용재자[用在者]를 우리가 전재자[前在者]로서 새롭게 눈을 붙이는 데['着'目, '注'視] 있는 것이다.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의 배려적 교섭을 이끌고 있는 존재이해가 전환된 것이다. 그러나 용재자를 배시적으로 고찰하는 대신, 그것을 전재자로서 포착함으로 인해, 이미 학문적 태도가 구성되는 것인가? 뿐더러 용재자도 학문적 탐구와 규정의 주제가 될 수 있으니, 예컨대 환경세계를 연구할 때 역사[학]적 전기(傳記)와 연관해서 ‘환경’을 연구하는 경우가 그렇다. 일상적으로 용재적인 도구연관, 그 역사적 발생, 이용, 현존재에 있어서의 그 현사실적 역할 등은 경제학의 대상이다. 용재자는 학문의 객관이 될 수 있기 위해 그 도구성격을 상실할 필요가 없다. 존재이해의 변양이 사물에 대한 이론적 태도의 발생에 대해 반드시 구성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확실히 그렇다. 만일 [여기서 말하는] ‘변양’이 [존재]이해 속에서 이해된 목전의 ‘존재자의 존재양식의 변화’를 의미한다면.(361509-510)


 


이론적 태도가 배시에서 발생하는 것을 최초로 특징짓기 위해, 우리는 ‘하나의 방식’을 세계 내부적 존재자인 물리적 자연의 이론적 파악의 기초에 놓았는데, 그 방식에서 보면, 존재이해의 변양은 ‘전환’과 같은 것이다. 망치가 무겁다는 물리학적 진술에서는, 만나는 존재자의 도구성격이 간과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과 함께 모든 용재적[用在的] 도구에 속하는 것, 즉 그것의 ‘자리’도 간과되고 있다. ‘자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이것은 전재자[前在者] 일반이 자기 장소를 잃는다는 것이 아니다. 자리는 하나의 ‘시공상(時空上)의 위치’, 다른 점과 비교해서 아무 특징도 없는 세계의 점으로 된다. 그리하여 환경세계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용재적 도구의 자리의 다양성은 순수한 위치의 다양성으로 변양될 뿐 아니라, 환경세계의 존재자는 모조리 한계를 철폐하게 된다. [이제] 일체의 전재자가 주제로 되는 것이다.(361-362, 510)


 


바로 지금의 경우, 존재이해의 변양에는 환경세계의 한계 철폐가 속한다. 이제 전재성[前在性]이라는 의미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주도적으로 되거니와, 이를 실마리로 하면, 한계 철폐는 동시에 전재자[前在者]의 영역의 한계 획정이 된다. 이 주도적 존재이해에서 연구되어야 할 존재자의 존재가 더 적합하게 이해되면 될수록, 그리고 이와 함께, 존재자 전체가 학문의 가능한 사상영역[事象領域]으로서 그 근본규정에서 더 적합하게 분절되면 될수록, 방법적 물음의 그때그때의 전망은 더욱더 확실해진다.(362, 510)


 


학문의 역사적 발전 내지 그 존재론적 발생에 대한 고전적 예는 수학적 물리학의 성립이다. 수학적 물리학의 형성에 대해 결정적인 것은, 사실 관찰을 종래보다 더 존중한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의 제 경과를 규정하는 데 수학을 응용한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자연 자체를 수학적으로 기투한다는 데 있다. 이 기투가 항구적 전재자[前在者](물질)를 선행적으로 발견하여, 양적으로 규정 가능한 그 구성계기들(운동, 힘, 장소, 시간)에 대한 주도적 조망에 지평을 열어 준다. 이렇게 기투된 자연의 빛 속에서 비로소 사실이라는 것이 발견될 수 있고, 이 기투에 입각해서 규제적으로 규정된 실험을 위한 단초가 놓여질 수 있다. 사실과학의 정초가 가능했던 것은 오직, ‘단순한 사실이란 원칙적으로 없다’는 것을 연구자들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수학적 기투에 있어서도 일차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수학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기투가 어떤 아프리오리를 개시한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수학적 자연과학이 과학의 전범적(典範的) 성격을 갖는 것도 그 특수한 정밀성이나 만인에 대한 구속성에 있는 게 아니라, 이 과학에서는 주제적 존재자가, 존재자 일반이 유일하게 [항구적 전재자로서 양적으로 규정 가능한 구성계기에서] 발견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렇게 발견된다는 점에, 즉 존재자의 존재 틀을 선행적으로 기투한다는 점에 있다. 주도적 존재이해의 근본개념의 확립과 더불어, 방법의 실마리, 개념성의 구조, 거기에 귀속되는 진리와 확실성의 가능성, 근거제시와 증명의 양식, 구속성의 양상 및 전달양식 등이 결정된다. 이 계기들의 전체가 과학의 완전한 실존론적 개념을 구성하는 것이다.(362-363, 510-511)


 


그 때마다 이미 어떻게든 만나는 존재자를 과학적으로 기투하면 그 존재자의 존재양식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고, 더욱이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순수하게 발견하기 위한 가능한 길이 밝혀지는 것이다. 이 [과학적] 기투행위의 전체, 즉 존재이해의 분절, 존재이해에 의해 인도되는 사상영역[事象領域]의 획정 및 당해 존재자에 적합한 개념성의 밑그림 등 기투행위를 일괄해서 우리는 주제화라 부른다. 주제화가 노리는 것은,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가 자기를 순수한 발견에 대향(對向)해서 기투하도록, 즉 ‘객관이 될 수 있도록, 그 존재자를 개현(開現)하는 것이다. 주제화는 객관화한다. 주제화는 존재자를 비로소 정립하는 게 아니라, 존재자가 객관적으로 물어질 수 있고 규정될 수 있도록 그 존재자를 개현하는 것이다. 세계 내부적 전재자[前在者] 곁에서 객관화되는 존재는 두드러진 현전화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두드러진 현전화’가 특히 배시의 현재와 구별되는 것은, 당해 과학의 발견작용이 유일하게 전재자의 피발견성만을 예기한다는 점에 있다.(363, 511-512)


 


③ 세계의 시간성


현존재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개시되어 있어야 한다. 세계는 현존재와 존재자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선행적 기반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초월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세계가 현존재를 넘어서 있는 어떤 실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의 ‘현’에는, 이미 세계의 개시성도 함께 들어 있다. 현존재는 세계로서 있다. 세계란 다름 아니라,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가 펼쳐지는 ‘그곳’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 의미가 시간성이라면, 세계의 존재론적 틀, 즉 유의의성의 통일도 시간성에 근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계의 시간성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실존론적-시간적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시간성의 3구조계기가 갖는 탈자적 성격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장래, 기존성, 현재는 각각 탈자태이다. 탈자(?κστατικ?ν)란 자기를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탈자태가 단순히 ‘…로’ 탈출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탈자태의 탈출에는 ‘어디로’라는 그 행방이 규정되어 있다. 즉 장래는 ‘…을 향해(zu …)’, 기존성은 ‘…에로(auf …)’, 현전화는 ‘…에 몰입해(bei …)’라는 탈출의 방향을 갖는다. 이 각각의 ‘어디로’가 지평적 도식이 된다.


그런데 탈자적 지평은 세 탈자태 각각에서 모두 다르다. 장래의 지평적 도식은 현존재의 ‘자기를 위해서’라는 궁극목적성이고, 기존성의 지평적 도식은 ‘피투적 현존재가 내맡겨지는 거기’가 되며, 또 현재의 지평적 도식은, 현존재가 세계에 몰입하여 그때마다 존재자를 현전화하므로, ‘위하여’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이 3지평적 도식이 서로 시숙하는 가운데 시간의 지평이 구성된다. 세계란 이렇게 펼쳐진 탈자적 지평이며, 그러니까 세계의 존재론적 틀은 시간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세계는 용재(用在)하지도, 전재(前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세계는 시간성 속에서 시숙한다. 따라서 현존재가 시숙하는 한, 세계도 있다. 현존재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어떤 세계도 >현<-존할 수 없다. 세계의 시간성이란 바로 현존재의 시간성이다.


 


[읽기자료]


현존재가 어떤 도구연관과 교섭하기 위해서는, 현존재는 비주제적일망정 적소성이라든가 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현존재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개시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현존재가 본질상 세계-내-존재로서 실존한다면, 현존재의 현사실적 실존과 함께 개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재의 존재[마음씀]가 완전히 시간성에 근거한다면, 시간성은 세계-내-존재를, 이와 함께 현존재의 초월을 가능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거니와, 초월은 초월대로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해서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배려하는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364, 512-513)


 


현존재의 존재를 우리는 마음씀이라고 규정하였다. 마음씀의 존재론적 의미는 시간성이다. 시간성이 ‘현’의 개시성을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제시된 바 있다. ‘현’의 개시성에서는 세계도 함께 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의의성의 통일, 즉 세계의 존재론적 틀도 마찬가지로 시간성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의 가능성의 실존론적-시간적 조건은, 탈자적 통일로서의 시간성이 지평이라든가 하는 것을 갖는다는 데 있다. [세] 탈자태는 단순히 ‘… 로의 탈출’이 아니다. 그렇기보다는 탈자태에는 탈출의 ‘어디로’[行方]가 속한다. 탈자태의 이 ‘어디로’를 우리는 지평적 도식이라 부른다. 탈자적 지평은 세 탈자태에 있어서 제각기 다르다. 본래적이든 비본래적이든, 거기에서 현존재가 장래적으로 자기를 향해 도래하는 그 도식은 ‘자기를 위해’라는 궁극 목적성[das Umwillen seiner]이다. 현존재가 던져진 자로서, 정상성[情狀性]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개시되는 그 도식을 우리는 피투성이 마주치[당면하]는 그것 [das Wovor der Geworfenheit] 또는 내맡겨지는 ‘거기’[Woran der Überlassenheit]로서 파악한다. 이것은 기존성의 지평적 구조의 특징을 이룬다. 현존재는, 던져진 자로서 자기 자신에 맡겨진 채, 자기 자신을 궁극목적으로 해서 실존하면서, ‘… 에 몰입해 있음’으로서 동시에 현전화하고 있다. 현재의 지평적 도식은 위하여[das Um-zu]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364-365, 514)


 


장래, 기존성 및 현재의 세 지평적 도식의 통일은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에 근거한다. 전체적 시간성의 지평은,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존재자가 그것에 의거해서 본질적으로 개시되어 있는 그 기반을 규정한다. 현사실적 현-존재와 함께 그 때마다, 장래의 지평에서는 매양 존재 가능이 기투되어 있고, 기존성의 지평에서는 이미 있음이 개시되어 있으며, 현재의 지평에서는 배려거리가 발견되어 있다. 세 탈자태가 가지고 있는 세 도식의 지평적 통일은, 이와 같이 [존재 가능을 위한] ‘궁극 목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 수단관계’와의 근원적 연관을 가능하게 한다. 요컨대,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의 지평적 틀을 근거로 해서, 그때그때 자기의 ‘현’으로 있는 존재자에게는 개시된 세계라든가 하는 것이 속해 있는 것이다.(365, 514-515)


 


시간성의 시숙의 통일에 있어서, 현재가 장래와 기존성에서 연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래 및 기존성의 두 지평과 등근원적으로 현재의 지평이 시숙한다. 현존재가 시숙하는 한, 세계도 있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가 시간성이라는 점에서 시숙하거니와, 그렇게 시숙하면서 현존재는 시간성의 탈자적-지평적 틀을 근거로 해서, 본질적으로 세계 내에 있다. 세계는 전재[前在]하지도 용재[用在]하지도 않고, 시간성 속에서 시숙한다. 세계는 세 탈자태의 ‘탈-자’와 함께 현-존한다. 현존재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어떤 세계도 현 -존하지 않는다.(365, 515)


 


(3) 현존재적 공간성의 시간성


우리는 앞서 현존재의 공간성을 논의한 바 있다. 현존재의 공간성이란 현존재의 공간적 구조를 의미한다. 우리는 그러한 현존재의 공간적 구조를 ‘거리제거’와 ‘방향을 열음’이라는 두 가지의 구조 계기로서 파악한바 있다.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 의미가 시간성에 근거한다면, 현존재의 공간성 역시 시간성에 근거해야 한다. 즉 현존재의 공간적 구조를 정초하는 것은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가 된다.


현존재의 공간적 구조는 ‘방향을 열음’과 ‘거리-제거’이다. 현존재는 이런 공간적 구조계기를 통해 용재자에게 공간을 허용한다. 먼저 ‘방향을 열음’이란 용재자를 어떤 방역에로 방향을 열어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작업장에 비품 하나를 배치할 때에도 우리는 작업장 전체의 방역을 예견하면서 그 안에서 그 비품이 놓일 방향을 결정하여 열고 있다. 그러므로 ‘방향을 열음’은, 시간적 구조에서 보자면, 용재자가 귀속할 가능한 방역을 ‘보유하면서 예기’함에 근거한다.


또한 ‘방향을 열음’은 필연적으로 거리제거를 수반한다. 앞서도 밝혔듯, 거리제거란 용재자를 배시적 배려에 편리하게 ‘가까이 함’을 의미한다. ‘가까이 함’은 시간적 구조로 보자면, 현전화에 근거한다. 따라서 현존재의 공간성도 ‘보유’, ‘예기’, ‘현전화’(현재)라는 시간성의 의해 구성된다. 오직 탈자적-지평적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만 현존재는 공간을 용재자에게 허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가까이함’ 속에서 고지되는 것은 마음씀의 본질적 구조의 하나인 퇴락이다. 현존재의 공간성의 시간성은 본질적으로 퇴락의 시간성이다. 그러기에 ‘가까이함’에 있어서는, 예기적 망각이 현재의 뒤를 따라 발원한다.


 


[읽기자료]


실존론적 해석의 진행과정에서 보인 현존재의 공간적-시간적 규정성이라는 말이, ‘이 존재자는 공간 안에 그리고 시간 안에도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상론할 필요가 없다. 시간성은 마음씀의 존재의미이다. 현존재의 틀과 그의 존재방식들은 존재론적으로는 오직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 가능할 뿐이며, 이 존재자가 시간 안에서 현출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현존재의 특수한 공간성도 시간성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367, 517)


 


실존론적-분석적으로 물어져야 할 것은 현존재적 공간성의 가능성의 시간적 조건들이지만, 그 공간성은 그것대로 세계 내부적 공간 발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현존재가 공간적인가 하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현존재는, ‘현사실적으로 퇴락하면서 실존한다’는 의미에서 마음씀으로서만, 공간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를 소극적으로 말하면, ‘현존재는 결코, 당장이라도 결코, 공간 안에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현존재는 실재적 사물이나 도구처럼 공간의 한 부분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현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자체에 대한 현존재의 한계도 공간의 한 공간적 규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 문자 그대로 ?? 공간을 점유[수용]한다. 그는 결코 육체가 채우고 있는 공간의 한 부분 속에서 전재적으로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실존하면서 그 때마다 이미 어떤 활동공간을 자기에게 허용하고 있다.(367-368, 518)


 


현존재가 자기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것은 ‘방향 엶’과 ‘거리-제거’에 의해 구성된다. 그런 것이 실존론적으로 현존재의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가능한가? (…) 현존재의 공간허용에는 ‘자기에게 방향을 열면서’ 방역(方域)이라든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속한다. 방역이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당장 의미하는 것은, 환경세계적으로 자리잡게 될 용재적[用在的] 도구의 가능한 귀속성(歸屬性), 즉 ‘어디로’[歸屬할 곳]이다. (…) [도구의] 귀속성은 적소성과 본질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귀속성은 현사실적으로는 언제나 배려되는 도구의 적소성 연관에 입각해서 결정된다. 적소성의 제 관련은 개시된 세계의 지평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 세계지평으로 인해 비로소 방역에 따른 귀속성의 ‘어디로’라는 특수한 지평도 가능하다. 자기에게 방향을 열면서 방역을 발견하는 일은, 가능한 ‘여기로’와 ‘저기로’를 탈자적으로 ‘보유하면서 예기하는’ 데 근거한다. [현존재가] 자기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것은, 방향을 열어서 방역을 예기하는 것이고, 이것과 등근원적으로 용재자[用在者]와 전재자[前在者]를 가까이하는 것(거리-제거)이다. (…) 가까이하는 것, 이와 마찬가지로, 거리를 제거당한 세계 내부적 용재자의 내부에서 거리를 짐작하고 측정하는 것은, 현전화에 근거한다. 현전화는 시간성의 통일에 속하고, 이 시간성 안에서 방향 엶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368-369, 519)


 


가까이함으로 해서 일에 몰두하여 조작하고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가까이함’ 속에서 고지되는 것은 마음씀의 본질적 구조의 하나인 퇴락이다. 퇴락의 실존론적-시간적 구성의 특징은, 퇴락에 있어서는, 이와 함께 또한 현전적으로 정초된 ‘가까이함’에 있어서는, 예기적 망각이 현재의 뒤를 따라 발원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그것이 점하고 있는 저기로부터 [이쪽으로] 가까이하면서 현전화하면, 그 현전화작용은 ‘저기’를 망각하고 자기 자신 속에 소실(消失)되고 만다. ['저기'는 온데간데 없고 현전화작용의 현행(現行)만 남는다.] 그러므로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관찰이 그런 현전화에서 시작하면, 우선 한 사물이 여기에 전재적[前在的]으로만 그것도 어떤 공간 일반 속에 무규정적으로 있는 것 같은 가상이 생기게 된다.(369, 520)


 


오직 탈자적-지평적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 현존재는 공간 속으로 틈입(闖入)할 수 있다. 세계는 공간 속에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공간은 세계의 내부에서만 발견된다.(369, 520)


 


3) 통속적 시간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한 것은 현존재의 시간성, 즉 현존재의 시간적 구조였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와는 다른 의미로 이해되는 시간도 있다. 예컨대 우리는 흔히 “시간이 있다.”, “시간이 없다.” 혹은 “시간이 걸린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간을 계산하기도 하고, 또한 이런 시간에 준거해서 생활을 꾸려가기도 한다. 이런 의미의 시간은, 굳이 말하자면, 우리가 배려하는 시간이 된다. 다시 말해 이런 시간은 우리에 의해 “배려된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간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또한 이런 시간은 현존재의 시간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1) 현존재의 시간성의 일부(日附) 가능성


(한: 日附可能性, 독: Datierbarkeit, 영: Datability)


 


우리의 세계는 일상적 세계이다. 일상적 세계 안에서의 배시적 배려는 ‘예기하면서-보유하고-현전화한다’는 비본래적 시간성에 근거한다. 일상적 세계 안에서 배시적으로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그 때>에는 그것이 발생해야 할텐데, <지금>은  <저 때>에 실패해서 놓친 일이 만회되어야지.’라고 말하곤 한다. 아마도 이 말에서 언급된 <그 때>, <지금>, 혹은 <저 때>야말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시간적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시간 개념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단지 이러한 시간 개념 속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할 뿐, 이러한 시간 개념이 우리의 실존 구조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는 ‘…하게 될 그때’이고, <저 때>는 ‘…했던 저 때’이며, <지금>은 ‘…하는 지금’이다. 우리는 <그 때>를 예기하고, <저 때>를 보유하며, <지금>을 현전화한다. 따라서 배시적 배려의 비본래적 시간성이 우리의 일상적 시간 개념을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즉 <그 때>는 예기에 의해, <저 때>는 보유에 의해, <지금>은 현전화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앞서의 일상적 시간 개념에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 이러한 일상적 시간 개념에서는 <지금>이 중심이 된다. 시간성과 연관지어 말하자면, 일상적 시간 개념에서는 현전화가 중심이 된다. 즉 <그 때>는 ‘지금이 아직 아님’이며, <저 때>는 ‘지금은 이미 아님’이다. 이러한 시간 개념에서는 <지금>이 ‘아직 없음’과 ‘이미 없음’의 준거로서 기능한다. 즉 우리는 <지금>을 준거로 일종의 날짜를 매기고 있는 것(日附化)이다.


일부화의 준거는 <지금>이다. 그런데 <지금>은 앞서 밝혔듯, 현전화에 의거한다. <…하는 지금> 속에는 현재의 탈자적 성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지금>, <그 때>, <저 때>라는 일부가능성은 현존재의 탈자적 시간성의 반영물이다. 다시 말해 일부가능성은 그것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를 현존재의 시간성에 두고 있다. 이 점을 현존재의 시간성 쪽에서 보자면, 현전화를 중심으로 예기의 지평이 ‘이후’로, 또한 보유의 지평이 ‘이전’으로 변양됨으로써, 일부화는 가능하게 된다. 즉 일부화는 탈자적 시간성의 지평이 변양된 것이다. 따라서 일부화된 시간도 일종의 지평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지평을 ‘…하는 오늘’로, 또 <그 때>의 지평을 ‘…할 이후’로, 또 <저 때>의 지평을 ‘…한 이전’으로 신장폭(Spannweite)을 늘여서 일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식사 중’, 혹은 ‘지금은 휴식 중’이라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일부화의 의미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부화란 이와 같이 ‘…할 그 때’를 ‘그 때’로, ‘…한 저 때’를 ‘저 때’로, 그리고 ‘…하는 지금’을 ‘지금’이라고 환경세계적 사건이나 용재자에 대한 배려적 해석에 의거해서 그 ‘때’(날자)를 매기는 것이다. 즉 어떤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배려적 해석을 추상하고 그 ‘때’만으로 시간을 지칭하는 것이 일부화이다. 그러므로 일부 가능성의 근거는 근원적으로 배려적 시간성에 있는 것이다. 가령 ‘지금’은 ‘지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때’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시간이라고 한다.”(소광희[2003], 249-250)


 


[읽기자료]


그[현존재]는 타자들과 공존하면서, 평균적 피해석성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 피해석성은 말로 분절되고, 언어로 언표된다. 세계-내-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기를 표명해 오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에 몰입하는 존재로서는 배려되는 것 자체에 말을 걸고 논의하면서 부단히 자기를 표명하고 있다. 배시적으로 분별하는 배려는 시간성에, 그것도 ‘예기하면서-보유하고-현전화한다’는 양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 배려는 계산하고, 계획하고, 예비하고, 미리 배려하고, 예방하는 것으로서, 음성으로 들을 수 있든 없든, 언제나 이미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그 때 에는 그것이 발생해야 할텐데, 그 전 에 저 일은 끝장을 보고, 지금 은  저 때 에 실패해서 놓친 일이 만회되어야지.’(406, 570)


 


배려는, 그 때에서는 예기적으로, 저 때에서는 보유적으로, 그리고 지금에서는 현전화적으로 자기를 표명한다. 그때 속에는 대개 지금은 아직 아님이 암암리에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때는 ‘예기하면서 보유하는 현전화’ 또는 ‘예기하면서 망각하는 현전화’ 속에서 언표되고 있다. 저 때 속에는 지금은 이미 아님이 숨어 있다. ‘저 때’를 가지고는 ‘보유’가 ‘예기적 현전화’로서 자기를 표명한다. 그때와 저 때는 다 함께 지금과 관련해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현전화’가 독특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사실 ‘현전화’는 언제나 ‘예기’와 ‘보유’의 통일 속에서 시숙하니, 설사 뒤의 양자[예기와 보유]가 ‘비예기적 망각’으로 변양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변양된 양상에서는 시간성은 ‘현재’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그 현재가 현전화하면서 주로 지금, 지금하고 말하는 것이다. 배려가 가장 가까운 것으로서 예기하는 것은, 이제 곧 속에서 언급되고, 당장 입수된 것이나 잃어버린 것은 방금 속에서 언급된다. 저 때 속에서 자기를 표명하는 ‘보유’의 지평은 이전이고, 그때에 대한 지평은 이후이며, 지금에 대한 지평은 오늘이다.(407, 570-571)


 


그러나 그때는 모두 그 자체로는  … 할 그때이고, 저 때는 모두 … 한 저 때이며, 모든 지금은  … 하는 지금이다. 지금, 저 때 및 그 때라는 자명해 보이는 이 관계구조를 우리는 일부 가능성(日付可能性 : 날짜매길 수 있음)이라 부른다. 이때 일부화(日付化)가 현실적으로 역수(曆數 ; 캘린더)상의 날짜를 고려해서 수행되는가 어떤가 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완전히 도외시되어야 한다. 그런 [캘린더상의] 날짜들 없이도 지금, 그때, 저 때는 많든 적든 특정하게 일부화되어 있다. 일부화의 규정성이 없다고 해서, 일부 가능성의 구조가 결여되어 있다거나 우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407, 571)


 


본질적으로 그런 일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일부 가능성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보다 더 부질없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을까? (…) 왜 현존재는 배려되는 것에 말을 걸 때, 대개는 음성을 내지 않더라도, … 하는 지금,  … 할 그때,  … 한 저 때를 함께 언표하는가? … 에 대해 해석하면서 말할 때, [현존재는] 자기를 함께 언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용재자[用在者]에 몰입해서 배시적으로 이해하는 존재, 즉 용재자를 발견적으로 만나게 하는 이 존재를 함께 언표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자기를 함께 해석하면서 말을 걸고 논의하는 것이 현전화에 근거하고, 또 이 현전화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407-408, 572)


 


‘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는 자기를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금 가능한 것은, ‘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가 - 그 자신에 즉해서 탈자적으로 개방되어 있어서 - 그 자신에게 그 때마다 이미 개시되어 있고, 이해하면서 말하는 해석에 있어서 분절 가능한 오직 그 때문이다. 시간성은 현의 밝혀져 있음[元照明]을 탈자적-지평적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시간성은 근원적으로 ‘현’에서 이미 언제나 해석 가능하며, 따라서 숙지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를 해석하는 현전화를, 즉 지금 속에서 말 걸려져 해석되는 것을, 우리는 시간이라 부른다.(408, 573)


 


지금을 말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이미, 반드시 덧붙여 말하지는 않더라도, 이것 이것을 하는   를 이해한다. 도대체 왜 그런가? ‘지금은’이라는 것이 존재자의 현전화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 하는 지금 속에는 현재의 탈자적 성격이 있다. 지금, 그때, 저 때라는 일부 가능성은 시간성의 탈자적 틀의 반영(反映)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표되는 시간 자체에 본질적이다. 지금, 그때, 저 때라는 일부 가능성의 구조는, 이것들이 시간성이라는 줄기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그 자신 시간이다라는 데 대한 증거이다. 지금, 그때, 저 때라고 해석하면서 언표하는 것은 가장 근원적 시간고시(時間告示)이다.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은 일부 가능성을 가지고는 비주제적으로 이해되고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식별됨이 없는 이해이다. 이 시간성의 탈자적 통일에 있어서, 그때그때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세계-내-존재로서 이미 개시되어 있고, 이것과 함께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발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석된 시간도 ‘현’의 개시성 속에서 만나는 존재자에 입각해서 그 때마다 이미 ‘일부화’를 갖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때’ ; ‘지금 책을 갖고 있지 않는 때’ 등등.(408, 573-574)


 


탈자적 시간성에서 나오는 동일한 근원을 근거로 해서, 지금, 그때, 저 때에 속하는 지평들도  … 하는 오늘,  … 할 이후,  … 한 이전이라는 일부 가능성의 성격을 갖는다.(408-409, 574)


 


예기가 그때 속에서 자기를 이해하면서 자기를 해석하고, 이때 현전화로서 [예기가] 예기하는 것을 그 현전화하는 지금에 입각해서 이해한다면, 그때를 고시하는 데는 이미 그리고 지금은 아직 아님이 함축되어 있다. 이 현전화적 예기가 그 때까지를 이해한다. 이 해석은 이 그 때까지를 ?? 즉, [그 때까지는] 시간이 있다 ?? 그 사이로서 분절하거니와, 이 사이도 마찬가지로 일부 가능성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일부 가능성 관계는  … 하는 그 동안으로 표현된다. 배려는 거듭하는 그때를 고시함으로써, 그 동안 자체를 다시 예기하면서 분절할 수 있다. 그 때까지는 몇 개의 그 때부터 ?? 그 때까지에 의해 분할되지만, 후자는 그러나 맨 처음의 그때의 예기적 기투 속에 처음부터 포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의 예기적-현전화적 이해와 함께 존속(存續)이 분절된다. 이 지속은 다시 시간성의 자기 해석에서 드러나는 시간이지만, 이 시간은 배려 속에서는 그때그때 잠깐 동안 [잠시]으로서 비주제적으로 이해된다. 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가 [잠깐 '동안'으로] 늘여진 그 동안을 펼쳐 놓는 것은, 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가 그때 역사적 시간성의 탈자적 신장(伸張)으로서, 비록 그 자체로서 인식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고시되는 시간이 갖는 [일부 가능성 이외의] 다른 또 하나의 독자성이 나타난다. 즉, 그 동안만이 늘여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때, 저 때는 모두 일부 가능성의 구조와 함께 그 때마다 변화하는 ‘늘임 폭[伸張幅]‘을 지닌 ‘늘여짐[伸張性]‘을 가지고 있다 : 지금은, 휴식중, 식사중, 저녁 때의, 여름날의 ‘지금’이고 ; 그 때는, 아침식사를 할, 산에 올라 갈 등등의 ‘그때’ 이다.(409, 574-575)


 


(2) 공공적 시간과 세계시간


(한: 公共的 時間, 독: Die öffentliche Zeit, 영: Public time)


 


우리의 일상을 구속하는 시간은 공공적 시간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건 공공적 시간에 얽매여 있다. 우리가 타인은 물론, 용재자나 전재자를 만나는 것도, 현사실적으로는 공공적 시간의 틀에 준거해서이다.


그런데 시간의 공공화는 추후적으로 또 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태양의 자식인 이상 공공적 시간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우리의 삶은 태양의 운행 리듬에 맞추어 영위된다. 예컨대 일출(日出)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시간’을 지정하고 일몰(日沒)은 ‘하루의 일과를 접을 시간’을 지정한다. 이런 현상은 어느 시대건, 어느 민족이건 동일하다. 우리가 <같은 하늘 아래> 있는 상호 존재인 한, 공공적 시간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공공적 시간은, 앞서 논의한 배려적 시간의 일부화가 보다 진척된 형태이다. 배려적 시간의 일부화가 ‘…할 그 때’, ‘…하는 지금’, ‘…했던 저 때’로 구성되어 있다면, 공공적 시간의 구조는 ‘지금은 …하는 시간’(혹은 지금은 …할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공공적 시간에서는, 배려적 시간의 일부화에 비해, <지금>의 우위가 더욱 강조될 뿐더러, 본질적으로는 현존재의 목적과 관련된 적합성이 문제시된다. 그로써 공공적 시간은 세계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지금은 …할 시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시간이 무엇을 하기에 적합한가의 여부이다. 따라서 공공적 시간은 본질적으로 용도성(’…하기 위한’)의 연관 구조를 갖게 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세계의 세계성인 유의의성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공공적 시간도 근본적으로는 현존재의 시간성의 시숙에 의해 가능하게 된 시간이다. 또한 현존재의 자기 지시적 이해에 의해 펼쳐진 지평이 세계라면, 공공적 시간은 그러한 세계의 시간적 변양태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성의 시숙 속에서 공공화된 이 시간을 세계시간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우리는 공공적 시간 안에서 상호존재한다. 그러니까 공공적 시간은 상호존재의 준거의 틀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예컨대 등교시간, 출근시간, 하교시간 등이 정확히 규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 시간 측정이다. 시간 측정은 공공적 시간의 공공성을 구성하는 기초가 된다. 또한 시간 측정은 필연적으로 시간측정기를 요청한다. 시간 측정기가 없다면, 시간은 측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계발한 기계가 바로 시계이다.


시계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시계는 처음에는 천체의 운행에 따른 원시적인 시간 측정 방법 등과 같은 자연적 기계로서 출현했다. 여기에 이미 ‘배려되는 시간의 두드러진 공공화’가 있었다. 그런데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퇴락한 존재자이다. 때문에 현존재는 시간에 더 손쉽게 접근하기 위해 해시계, 물시계, 모래시계 등으로부터 회중시계, 손목시계, 그리고 오늘날은 디지털 시계에 이르기까지 인공적 시계의 개발을 서둘러 왔다. 따라서 세계시간의 공공화는 시간계산의 개량 및 시계사용의 세련화와 일치해서 더욱 더 강화되고 고정화되었을 뿐더러, 마침내는 세계시간의 일부(日附)가능성 및 유의의한 세계 성격을 망각한 채 시간을 단순히 시계사용의 지평에서 평균화된 양식으로 헤아려져 드러나는 <순수한 지금의 연속체>로 표상하기에 이르렀다. 실로 이러한 망각이란 세계시간과 시간 계산 및 시계가 근원적으로는 현존재의 탈자적-지평적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음에 대한 망각이요, 또한 이러한 망각으로 인해, 배시적으로 배려되던 세계시간은 단순히 시계사용에서 ‘이념적으로 표상되는 시간’으로 변양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바로 통속적 시간개념이 유래하는 직접적 원천이 있는 것이다.(신상희, 『시간과 존재의 빛』, 한길사, 2000. 119-120쪽 참조.)


 


[읽기자료]


시간의 공공화는 추후적으로 또 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가 탈자적-시간적 현존재로서 그 때마다 이미 개시되어 있고, 또 실존에는 이해적 해석이라는 것이 속해 있기 때문에, 배려 속에서 이미 시간은 공공화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기 때문에, 시간은 어떻게든 누구에게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411, 578)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던져진 자로서 퇴락적으로 실존하기에 자기의 시간을 시간계산의 방식으로 배려하면서 해석한다. 이로써 시간 계산 속에서 시간의 본래적 공공화는 시숙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현존재의 피투성이, 공공적으로 시간이 주어져 있다는 데 대한 근거이다.(411-412, 578)


 


공공적 시간은 그 안에서 세계 내부적 용재자[用在者]와 전재자[前在者]가 만나는 바로 그 시간으로서 입증된다. 이것은 이 비현존재적 존재자를 시간 내부적 존재자라고 명명할 것을 요구한다. 시간 내부성의 해석은 공공적 시간의 본질을 더욱더 근원적으로 통찰하게 하고, 동시에 그 시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도 가능하게 한다.(412-579)


 


현존재에게는 자기의 세계의 현실적 개시성과 함께 자연이 발견되어 있다. 현존재는 자기의 피투성에 있어서 낮과 밤의 교체에 맡겨져 있다. 낮은 그 밝음을 가지고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밤은 그것을 탈취한다. (412, 579)


 


존재는, 배시적으로 배려하면서 ‘볼 수 있음’을 예기하고 자기의 매일매일의 일에 입각해서 자기를 이해하기 때문에, >날이 밝으면, 그 때에는<이라 하면서, 자기에게 자기의 시간을 부여한다. 배려되는 >그 때<는, 밝아오는 것과 가장 가까운 환경세계적 적소성 연관 속에 있는 것, 즉 ‘해가 떠오르는 것’에 근거해서 일부화된다. 해가 떠오를 ‘그때’는 ‘… 할 시간이다.’ 그리하여 현존재는, 자기에게 받아들여야 할 시간을 일부화한다. (…) 배려는 빛과 열을 보내주는 태양의 >용재적[用在的] 존재<를 이용한다. 태양은 배려 속에서 해석되는 시간을 일부화한다. 이 일부화로부터 >가장 자연스런< 시간척도인 ‘하루’가 생긴다. (…) 즉, 하루를 분할할 수 있게 한다. 분할은 다시 시간을 일부화하는 것, 즉 ‘운행하는 태양’을 고려해서 수행된다. 일출(日出)과 마찬가지로 일몰(日沒)과 정오는 이 천체가 점하는 두드러진 >자리들<이다.(412-413, 579-580)


 


빛과 열을 보내주는 천체[태양]와, 하늘에서 점하는 그 천체의 두드러진 >자리들<에 근거해서 수행되는 이 일부화는, >같은 하늘 아래< 있는 상호존재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나<, 어느 때고, 같은 방식으로, 어느 한계 안에서는, 우선 일치해서 행해질 수 있는 시간고시이다. 일부화하는 것[예 ; 태양, 달, 별과 그것들의 위치]은 환경세계 안에서 언제나 접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때그때 배려되는 도구세계의 범위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도리어 도구세계 속에서는 이미 언제나 환경세계적 자연이나 공공의 환경세계가 함께 발견되어 있는 것이다. 공공의 일부화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시간을 자기에게 고시한다. 동시에 각자는 공공의 일부화에 의존해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공공의 일부화는 공적(公的)으로 이용할 수 있는 척도를 필요로 한다. 이 일부화는 시간측정이라는 의미에서 시간을 계산한다. 시간측정은 따라서 시간측정기, 즉 시계를 필요로 한다. 요지(要旨)는 다음과 같다 : 던져지고 세계에 떠맡겨져서, 자기에게 시간을 주는 [비본래적] 현존재의 시간성과 함께, 이미 시계라고 하는 것, 즉 규칙적으로 반복하면서 예기적 현전화 속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되는 하나의 용재자[用在者]가 발견되어 있는 것이다. 던져져서 용재자[시계]에 몰입하는 존재[일상적 현존재]는 시간성에 근거해 있다. 시간성은 시계의 근거이다. 시간성은, 시계의 현사실적 필요성의 가능조건으로서 동시에 시계가 발견될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 ; 왜냐 하면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피발견성과 함께 만나는 태양의 운행을 ‘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만이, 자기를 해석하는 현전화로서, 공공의 환경세계적 용재자에 입각한 일부화를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요구하기 때문이다.(413, 580-581)


 


>자연의 시계<는 시간성에 근거하는 현존재의 현사실적 피투성과 함께 그 때마다 이미 발견되거니와, 이 자연의 시계가 비로소 쓰기에 알맞는 시계의 제작과 사용을 촉진하고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 사실, >인공적 시계<는 자연의 시계에서 일차적으로 발견된 시간을 인공적으로 통용(通用)시키는 것이므로, >인공적< 시계는 >자연의 시계를 표준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413-414, 581)


 


배려적 예기 속에서 해석되는 >그때<를 일부화하면, 그 일부화 속에는 ‘날이 밝을 그 때는 하루일을 할 시간이다’가 숨어 있다. 배려 속에서 해석되는 시간은, 그 때마다 이미 ‘… 하는 시간’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때그때 >이러이러한 지금<은 그것으로서 [… 하는 지금으로서] 그 때마다 적합하거나 부적합하다. >지금<은  따라서 해석되는 시간의 양상은 모두  >… 하는 지금<일 뿐 아니라, 본질상 일부화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적합성과 부적합성의 구조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해석되는 시간은 애당초부터 >… 하는 시간< 또는 > … 에 적합하지 않는 때<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배려의 ‘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는 시간을 ‘하기 위해’[용도성]와의 관계에서 이해하지만, ‘하기 위해’는 그것대로 마지막에는 현존재의 존재 가능의 궁극 목적에 달라붙어 있다. 공공화된 시간은 이 ‘하기 위해’의 관계로써, 우리가 저 앞에서 유의의성이라고 배운 바 있는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유의의성은 세계의 세계성을 구성한다. 공공화된 시간은 ‘ … 하는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세계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성의 시숙 속에서 공공화되는 시간을 세계시간이라 부른다. 그것이 그렇게 일컬어지는 소이(所以)는, 그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으랴마는, 그 시간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서 전재적[前在者]으로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이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해석된 의미에서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414, 581-582)


 


피투적-퇴락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에 속하는 ‘자연적 시계의 개시성’ 속에는 동시에 현사실적 현존재에 의해 그 때마다 이미 수행되는 ‘배려되는 시간의 두드러진 공공화‘가 있다. 이 공공화는 시간계산의 개량 및 시계사용의 세련화와 일치해서 더욱더 강화되고 고정화된다.(415, 582)


 


공공의 시간계산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시계는 자연의 시계를 표준으로 해서 조정되어야 하지만, 그때그때의 [자연의] 시간이 은폐되어 읽을 수 없는 경우에도, 시계라는 도구의 사용은 현존재의 시간성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존재의 시간성은 ‘현’의 개시성과 함께 배려되는 시간의 일부화[日附化]를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자연발견의 진보에 발맞추어 자연적 시계에 대한 이해도 발달하는 것이어서, 낮이라든가 그때그때의 분명한 천체관측에서 상대적으로 독립된 시간측정의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지시도 주어지는 것이다.(415, 583)


 


시간측정은 시간을 현저하게 공공화하므로, 그 결과 이 길 위에서, 우리가 흔히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비로소 주지되는 것이다. 배려에 있어서는 각각의 사물에 제각기의 시간이 할당된다. 각각의 사물이 시간을 갖고 또 모든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까닭은, 오직 그 사물이 일반적으로 시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그 내부에서 만나는 그 시간을 우리는 세계시간이라고 알고 있다. 세계시간은, 그것이 귀속하는 시간성의 탈자적-존재론적 틀을 근거로 해서, 세계와 동일한 초월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개시성과 함께 세계시간이 공공화되므로, 그 결과,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해서 시간적으로 배려하는 모든 존재는, 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시간 안에서 만나는 존재자로서 배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419, 587)


 


만일 ‘객관적’이라는 것이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의 ‘즉자적-전재적[前在的]-존재’를 의미한다면, 그 안에서 전재자[前在者]가 운동하고 정지하고 하는 ‘시간’은 객관적이 아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주관적’이라는 것이 한 주관내의 전재[前在]존재나 사건이라고 이해된다면, 시간은 주관적이 아니다. 세계시간은 모든 가능한 객관보다도 더 객관적이니, 그 까닭은 세계시간이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세계의 개시성과 함께, 그 때마다 이미 탈자적-지평적으로 객관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시간은, 칸트의 견해와는 반대로, 심리적인 것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것에 있어서도 직접적으로 눈에 띄는 것이지, 심리적인 것을 거치는 우로(迂路)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당장은 시간은 바로 하늘에서 나타난다. 하늘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시간에 순응하면서 시간을 발견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하늘과 동일시되기도 하는 것이다.(419, 588)


 


그러나 세계시간은 또 모든 가능한 주관보다도 더 주관적이니, 왜냐 하면 세계시간은,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자기’의 존재가 곧 마음씀이라는 충분히 이해된 의미에서, 이 존재를 비로소 함께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주관 안에도 객관 안에도, 아니 안에도 밖에도 전재적[前在的]으로 있지 않고 모든 주관성과 객관성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한다. 그 까닭은, 시간은 이 더 이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419, 588)


 


(3) 통속적 시간개념 발생


(한: 通俗的, 독: vulgär, 영: ordinary)


 


통속적 시간이란 우리가 시계 속에서 만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에로 등속도로 흐르는 <지금>의 무한한 연속이다. 이런 시간을 정초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런 시간은 우리가 시계 속에서 시계 바늘을 따라 세어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렇게 우리가 시계 바늘에 따라 시간을 세어 보는 것조차 실존론적으로는 시간성에 근거함을 밝히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해석이다. 시계 속에서 <지금>은 금방 달아난다. 또 아직 오지 않은 <지금>은 금방 다가온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은 이미 아님>의 지평을 보유하면서 <지금은 아직 아님>의 지평을 예기하면서, <지금> 바늘의 위치를 현전화하면서 세어가는 것이다. 시간을 세는 것조차 “예기하면서 보유하는 현전화”에 근거한다.


시계 속의 시간은 <지금-시간>이다. 이런 시간에는 우리가 앞서 논의한 배려적 시간의 일부(日附)가능성, 신장성(伸長性), 세계시간의 유의의성 따위가 말끔히 지워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현존재의 근원적인 탈자적-지평적 시간의 최소한의 흔적마저 수평화되어 은폐된 시간이 <지금-시간>이다. 그러기에 <지금-시간>은 지평이 없다. 단순히 전재자(前在者)로서의 <지금>이 자기 동일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우리가 시계 속의 시간을 <지금-시간>이라 명명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시간>의 실존론적-존재론적 유래는 어디에 있는가? 달리 말하자면 세계시간의 수평화와 시간성의 은폐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우리는 그 단서를 <지금-시간>이 갖는 무한성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지금-시간>은 무한하다. 아무리 <지금-연속>을 ‘끝까지 생각’해 보아도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우리 현존재는 무한한 시간을 살고 있는가? 오히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 우리네 현존재의 인생살이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지금-연속>의 무한성 속에는 현존재의 퇴락적인 자기 상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존재는 선구적 결의성으로 특징지어진 자기의 본래적 실존에 직면하여 우선 대개는 거기로부터 도피한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는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 ‘…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도 종말을 향한 탈자적 장래의 한 양상이다. 더욱이 세인은, 자신에게만은 죽음이 유예되어 있기에, 근원적인 탈자적-지평적 시간성의 은폐를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시간성은 아무리 은폐되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은폐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존재는 유한하니까.


<지금>은 연속적으로 사라진다. 끝없이 무한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지금-시간>이다. 그러나 세인이 아무리 ‘시간은 사라진다’라고 항변해도 거기에는 이미 ‘시간은 붙잡아 매여지지 않는다’는 그의 안타까움이 서려 있으며, 또한 이런 안타까움은 ‘시간을 붙잡아 매려는’ 그의 애절함을 근거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시간을 붙잡아 매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로 이끌려가는 순간들을 벌써 망각하고, 순간들을 다음 다음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비본래적으로 예기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본래적 실존의 ‘현전화하면서 망각하는 예기’의 비본래적 시간성이 ‘시간이 사라진다’는 통속적 경험의 가능조건이 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자기를 앞지른다’는 점에서 장래적이다. 때문에 현존재는 <지금연속>을 ‘미끄러지면서-사라지는 것’으로서 예기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현존재는 자기의 죽음에 대한 ‘덧없는’ 앎에 의거해서 덧없는 시간을 아는 것이다. 덧없는 인생을 붙잡으려하니, 덧없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세인이 ‘시간이 사라진다’라고 감개무량하게 말할 때, 우리는 도리어 거기에 감추어진 현존재의 시간성의 유한한 장래성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탈자적-지평적 시간성과 일부(日附) 가능한 유의의한 세계시간, 그리고 통속적 시간은 서로 합치하지 않는다. 우선 현재의 시간성에서 보자. 탈자적-지평적 시간성은 일차적으로 장래로부터 시숙한다. 그러나 통속적 시간이해는 시간의 근본현상을 <지금> 속에서 본다. 이 절단된 <지금>을 우리는 ‘현재’라고 부른다. 이러한 <지금>으로부터는 본래적 현재인 ‘순간’을 해명할 수 없다. 장래의 시간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탈자적으로 이해된 장래, 일부화될 수 있는 유의의한 <그 때>, 그리고 ‘아직 아님’으로서의 단순한 <지금>, 즉 ‘미래’라는 통속적 개념은 서로 합치하지 않는다. 기존성의 시간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탈자적 기존성, 일부화될 수 있는 유의의한 <저 때>, 그리고 ‘이미 아님’으로서의 단순한 <지금>, 즉 ‘과거’라는 통속적 개념은 서로 합치하지 않는다.


 


[읽기자료]


일상의 배시적 배려에게는 시간이라든가 하는 것은 우선 어떻게 드러나는가? 배려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교섭에서 시간이 명시적으로 접근될 수 있는 것은 어떤 교섭에서인가? 현존재가 자기를 고려하면서 시간을 계산하는 한, 시간이 세계의 개시성과 함께 공공화되고, 세계의 개시성에 속하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피발견성과 함께 언제나 이미 배려되고 있다면, 사람들이 명시적으로 자기를 시간에 순응시키는 태도는 시계사용에 있다. 시계사용의 실존론적-시간적 의미는 움직이는 시계바늘을 현전화하는 데 있다. 바늘의 위치를 현전화하면서 따라가는 것은 세는 것이다. 이 현전화는 예기적 보유의 탈자적 통일에서 시숙한다. 현전화하면서 저 때를 보유한다 함은, ‘지금’을 말하면서, ‘이전’의 지평, 즉 ‘지금은 이미 아님’의 지평을 향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현전화하면서 그 때를 예기한다 함은, ‘지금’을 말하면서, ‘이후’의 지평, 즉 ‘지금은 아직 아님’의 지평을 향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현전화 속에서 자기를 시현(示現)하고 있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면 배시하고, 자기에게 시간을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시계사용의 지평에서 노현하는 시간의 정의는 어떻게 되는가? 시간이란, 움직이는 바늘을 현전화하고 세면서 따라가는 가운데 시현되는 세어진 것이다. 따라서 현전화는, 이전과 이후에 따라 지평적으로 열려 있는 보유와 예기와의 탈자적 통일에서 시숙한다. 이것은 그러나 시간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정의, 즉 ‘시간이란 곧 이전과 이후의 지평에서 만나는 운동에 있어서 세어진 것’이라는 정의의 실존론적-존재론적 해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420-421, 589-590)


 


시간의 개념에 대한 후세의 논의는 모두 원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후세의 논의들은, 시간이 어떻게 배시적 배려에서 드러나는가 하는 형태로 시간을 주제화하고 있다. 시간은 세어진 것, 즉 움직이는 바늘(또는 그림자)의 현전화에서 ‘언표된 것’, 주제적이 아니더라도 ‘사념된 것’이다. 움직여지는 것을 그 움직임에서 현전화할 때 지금 여기, 지금 여기 등등으로 말하게 된다. 그렇게 세어진 것은 지금들이다. 이 지금들이 제 각기의 지금에서 방금 이미 [지금이] 아니다 … 또 [금새] 아직 지금은 아니다로 나타난다. 이런 방식으로 시계사용에서 보여지는 세계시간을 우리는 지금-시간이라 부른다.(421, 591)


 


자기에게 시간을 주는 배려가 더 자연스럽게 시간을 고려하면 할수록, 그 배려는 더욱더 언표된 [세어진] 시간 자체에 몰입해서 머무르지 않고, 그때그때 각기 제 시간을 가지고 있는 배려되는 도구에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 배려가 시간을 규정하고 고시하는 일이 더 자연스러울수록, 즉 주제적으로 시간 자체에 향하는 일이 적을수록, 배려되는 것에 몰입해서 ‘현전화하면서-퇴락하는 존재’는,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지금’, ‘그때’, ‘저 때’를 즉석에서 말하는 일이 더욱 빈번해진다. 이렇게 해서 통속적 시간이해에게는 시간은 부단히 전재[前在]하면서 동시에 지나가고 다가오는 지금의 연속으로서 드러난다. 시간은 하나의 계기(繼起)로서, 지금의 흐름으로서, 시간의 경과로서 이해된다. 배려된 세계시간의 이런 해석 속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422, 591)


 


이에 대한 대답은, 세계시간의 완전한 본질구조로 돌아가서, 이것과 통속적 시간이해가 알고 있는 것과를 비교할 때 얻어진다. 배려되는 시간의 첫 번째 본질계기로서는 일부 가능성이 천명되었다. 일부 가능성은 시간성의 탈자적 틀에 근거한다. 지금은 본질상  … 하는 지금이다. 비록 ‘지금’이 바로 그것으로서 파악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배려 가운데서 이해된 일부 가능한 지금은, 그 때마다 적합한 지금이거나 적합하지 않은 지금이다. 지금의 구조에는 유의의성이 속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배려되는 시간을 세계시간이라고 부른 것이다. 시간을 지금의 연속으로 보는 통속적 해석에는 일부 가능성도 유의의성도 결여되어 있다. 시간을 순수한 계기(繼起)라고 성격지우면 이 두 구조는 나타나지 않는다. 통속적 시간해석은 두 구조를 은폐한다. 지금의 일부 가능성과 유의의성은 시간성에 근거하거니와, 그 시간성의 탈자적-지평적 틀은 이 은폐를 통해 수평화된다. 여러 지금들은 말하자면 [두 구조와의] 제 관계를 단절하고, 그렇게 단절된 지금들로서 병렬적(竝列的)으로만 늘어서서 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422, 591-592)


 


배려하는 시간측정에서 세어진 것은 ‘지금’이다. 이 ‘지금’은 용재자[用在者]와 전재자[前在者]를 배려하는 데서 [그것들과] 함께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시간배려가 이렇게 함께 이해된 시간 자체로 돌아가서 이 시간 자체를 [반성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그 시간배려는 어쨌든 거기 있는 지금들을, 배려 자체를 부단히 이끌고 있는 바로 그 존재이해의 지평에서 보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들은 어떤 방식으로는 공전재적(共前在的)이다 : 다시 말하면, 존재자를 만나고 그리고 [그것과 함께] 지금만나는 것이다. 지금들이 사물처럼 전재적[前在的]으로 있다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들은 존재론적으로는 역시 전재성[前在性]이라는 이념의 지평 속에서 보여진다. 지금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지금들은 과거를 형성한다. 지금들은 다가오고, 다가오는 지금들은 미래를 획정한다. 세계시간을 지금-시간이라고 보는 통속적 해석은, 세계, 유의의성, 일부 가능성이라는 것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지평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이 [세] 구조들은 필연적으로 은폐되어 있어서, 통속적 시간해석이 제 딴의 시간성격화를 개념적으로 형성하는 그 양식을 통해 이 은폐를 강화하는 만큼, 은폐는 더욱더 무심(无甚)해진다.(422-423, 592-593)


 


지금연속은 어쨌든 전재자[前在者]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왜냐 하면 지금연속은 자신을 시간 속에 밀어넣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각기의 지금 속에 지금이 있고, 제각기의 지금 속에서 지금은 또한 이미 사라진다고 말한다. 제 각기의 지금에서 그때그때 다른 지금이 다가오면서 사라진다 하더라도, 제각기의 지금에서 지금은 지금이고, 더구나 부단히 자기 동일동적(自己同一的)인 것으로서 현존하고 있는 지금이다. ‘지금’은 이렇게 ‘변이(變移)하는 것’으로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부단한 현존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일찍이 플라톤은 생성-소멸하는 지금연속으로서의 시간에 시선방향을 두고, 시간을 ‘영원의 모상(模像)’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423, 593)


 


통속적 시간해석의 주 테제는 시간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이 테제는, 이런 해석 속에는 세계시간의 수평화와 시간성 일반의 은폐가 놓여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간은 우선 중단없는 지금의 연속으로서 주어진다. 제작기의 지금은 금새 ‘[지금] 곧’이거나 ‘[지금] 방금’이다. 시간의 성격화가 일차적으로 또 전적으로 이 연속에 매달리게 되면, 그 연속 자체 속에서는 원칙적으로 ‘처음’도 ‘끝’도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최후의 ‘지금’은 어느 것이나 지금으로서는 그 때마다 언제나 이미 ‘방금 이제는 아님’이며, 따라서 ‘이제는 지금이 아님’, 즉 과거의 의미에서의 시간이다 ; 최초의 ‘지금’은 어느 것이나 그 때마다 ‘곧 아직 아님’이며, 따라서 ‘아직 지금이 아님’, 즉 미래의 의미에서의 시간이다. 따라서 시간은 두 방면을 향해 무한하다. 시간에 관한 이런 테제는 전재적[前在的]인 ‘지금-경과’라는 허공에 뜬 자체상(自體相)에 정위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지만, 이때 지금의 완전한 현상은, 일부 가능성, 세계성, 늘여져 있음, 현존재적 장소성의 점에서 은폐되어, 식별하지 못할 단편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전재적[前在的] 존재와 비전재적[非前在的] 존재를 향한 시선방향에서 지금연속을 끝까지 생각해도, ‘끝’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렇게 시간을 끝까지 생각한다고 해도 매양 결국 시간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무한히 있다고 결론짓게 된다.(424, 594)


 


그러나 세계시간의 수평화와 시간성의 은폐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비적으로 마음씀이라고 해석한 바 있는 현존재의 존재 자체에 근거한다. 현존재는 우선 대개 피투적으로 퇴락하면서 배려되는 것에 [몰두하여]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기 상실 속에서 고지되는 것은, 현존재가 선구적 결의성으로서 특징지워진 자기의 본래적 실존에 직면해서, 그 본래적 실존을 은폐하면서 도피한다는 것이다. 배려적 도피 속에는 직면한 죽음으로부터의 도피가, 다시 말하면 세계-내-존재의 종말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 놓여 있다. ‘… 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은, 그 자체로, 종말을 향한 탈자적 장래적 존재의 한 양상이다. 퇴락적 일상적 현존재의 비본래적 시간성은, 유한성으로부터 그렇게 눈을 돌리는 것으로서, 본래적 장래성을, 또 이와 함께 시간성 일반을 오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더러, 통속적 현존재 이해가 ‘세인’에 의해 이끌려지는 바에야, 공공적 시간은 무한하다는 자기 망각적 표상이 가장 먼저 굳어버릴 수도 있다. 세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 죽음이란 그 때마다 ‘나의’ 죽음이고 본래적으로는 선구적 결의성에서만 실존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세인은 능히 죽을 가 없는 것이다. 세인은 결코 죽지도 않고 또 종말에 이르는 존재를 잘못 이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면한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에 하나의 독특한 해석을 부여하고 있다. 즉, 종말까지는 아직도 여전히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표명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은 ‘잃어버릴 수 있다’[아직 유예가 있다]는 의미이다 : 지금은 우선 이렇게, 다음에는 저렇게 또 저렇게만, 그리고 다음에는 … . 여기에서는 무릇 시간의 유한성이란 이해되지도 않고, 오히려 반대로, 배려는 여전히 ‘도래해서 계속 진행하는 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낚아채려고 한다. 시간은, 공공적으로는, 각자가 입수하고 또 입수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수평화된 지금연속은 일상적 상호성 속에 있는 개개의 현존재의 시간성에서 유래하건만, 수평화된 지금연속은 이 유래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있다. (…) 사람들이 아는 것은 오직 이런 공공적 시간, 즉 수평화되어 모든 사람의 것이면서 아무의 것도 아닌 시간뿐이다.(424-425, 594-596)


 


다시 말하면, 세계시간을 시숙시키는 시간성은 아무리 은폐되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은폐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사라진다’는 말은 ‘시간은 붙잡아 매여지지 않는다’는 경험을 표현한다. 이  경험 은 다시 ‘시간을 붙잡아 매려고 한다’를 근거로 해서만 가능하다. 시간을 붙잡아 매려고 하는 데서는, [과거로] 이끌려가는 순간들을 벌써 망각하고,  순간들 을 [다음 다음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비본래적으로 예기한다. 그리하여, 비본래적 실존의 ‘현전화하면서 망각하는 예기’가 ‘시간이 사라진다’는 통속적 경험의 가능조건인 것이다. 현존재는 ‘자기를 앞지른다’는 점에서 장래적이기 때문에, 현존재는 지금연속을 ‘미끄러지면서-사라지는 것’으로서 예기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현존재는 자기의 죽음에 대한  덧없는  앎에 의거해서 덧없는 시간을 아는 것이다.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감개무량하게] 강조해서 말하는 데서는, 현존재의 시간성의 유한한 장래성이 공공적으로 반영된다. 그리고 ‘시간이 사라진다’는 말에서조차 죽음은 은폐된 채로 있을 수 있으므로, 시간은 ‘사라짐’  자체 로서 나타나는 것이다.(425, 596-597)


 


탈자적-지평적 시간성은 일차적으로 장래에서부터 시숙한다. 반대로 통속적 시간이해는 시간의 근본현상을 지금 속에서 본다. 이 지금은 사실 그 완전한 구조에 있어서는 절단된 단순한 지금이고, 사람들이 현재라고 부르는 지금이다. 이 점에서 추측되는 것은, 이 지금으로부터 본래적 시간성에 속하는 순간이라는 탈자적-지평적 현상을 해명하거나 항차 도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무망(無望)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상응하여, 탈자적으로 이해된 장래, 일부화될 수 있는 유의의한 그때,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으나 가까스로 도래하고 있는 단순한 지금이라는 의미의 미래라는 통속적 개념, 이 삼자는 합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탈자적 기존성, 일부화될 수 있는 유의의한 저 때, 지나간 단순한 지금이라는 의미의 과거라는 개념, 이 삼자도 합치하지 않는다. 지금은 ‘아직 지금이 아님’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는 시간성의 시숙의 근원적 탈자적 통일 속에서 장래로부터 발원하는 것이다.(426-427, 598)


 


통속적 시간경험은 우선 대개 세계시간 밖에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경험은 동시에 언제나 세계시간과 영혼 또는 정신과의 두드러진 관계를 맺어주고 있다. 그것은 철학적 물음의 명시적이고 일차적인 정위가 주관과는 상관없을 때에도 그랬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개의 특징적 증거를 제시하면 족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마음 이외에, 모든 마음 속에 있는 이성 이외에, 세는 것을 본성으로 갖는 것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 마음이 없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inde mihi visum est, nihil esse aliud tempus quam dis- tentionem ; sed cuius rei nescio ; et mirum si non ipsius animi [이런 이유로 나에게는 시간은 연장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의 연장인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의 연장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상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현존재를 시간성으로서 해석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통속적 시간개념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헤겔은 이미 통속적으로 이해된 시간과 정신과의 관련을 밝히려고 분명히 시도하였고, 이에 반해 칸트의 경우 시간은 과연 주관적이긴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와 결합되지 않은 채 그것과 나란히 있다.(427-428, 598-599)


 


 


참고문헌


Martin Heidegger의 저서


1. Sein und Zeit, Max Niemeyer, 1953. [표준 판본]


Sein und Zeit, Vittorio Klostermann, 1977. [GA 2]


Being and Time, John Macquarrie & Edward Robinson(trans.), Blackwell, 2001. [표준 영역본]


『존재와 시간』, 소광희 역, 경문사, 1998. [표준 번역본]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 1998.


2. Holzwege, Vittorio Klostermann, 1977. [GA 6]


3. Wegmarken, Vittorio Klostermann, 1976. [GA 9]


4. 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 Vittorio Klostermann, 1975. [GA 24]


5. Phänomenologische Interpretation vo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Vittorio Klostermann, 1977. [GA 25]


6. Kant und das Ploblem der Metaphysik, Fünfte, vermehrte Auflage, Vittorio Klostermann, 1977.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이선일 역, 한길사, 2001.


7.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Vittorio Klostermann, 1983. [GA 40]


 


이차문헌


1.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2001.


2. 소광희,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 문예출판사, 2003.


3. 신상희, 『시간과 존재의 빛』, 한길사, 2000.


4. 신상희, 「말과 언어」, 『하이데거 언어사상』, 철학과 현실사, 1998.


5. 이기상,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문예출판사, 1991.


6. 이기상, 『존재와 현상』, 문예출판사, 1992.


7. 이기상 편저,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 서광사, 1993.


8. 이기상/구연상, 『<존재와 시간> 용어해설』, 까치, 1998.


9. 이수정/박찬국, 『하이데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10. Friedrich-Wilhelm von Herrmann, Subjekt und Dasein, Vittorio Klostermann Frankfurt am Main, 198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상희 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찾아서』, 한길사, 1997.


11. Walter Biemel, Heidegger, Reinbeck bei Hamburg, 1973.


______________, 신상희 역, 『하이데거』, 한길사, 1997.



[펌] 존재론적 차이 속으로

  존재론적 차이 속으로

                                                                 구연상(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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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 유래”를 밝히는 데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존재론적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론적 차이”란 말은 “생물학적 차이” 또는 “의미론적 차이” 등의 말과 비슷하다. 이 말들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 말들 속에 “차이”라는 낱말이 공통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한 해명 또는 설명은 그 ‘어떤 것’을, 그것에 속하는 공통성 내지 보편성으로부터 이끌어내거나 또는 그것들에게로 이끌어들이는 방식으로도 주어질 수 있다. 이 글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존재론적 차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차이의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분석(分析)한다는 것은 단순히 작게 쪼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칸트적 의미에서, “어떤 것을 그것의 본질 내지 근원에로 되돌려 주는 것”을 말한다. ‘차이의 의미를 분석한다는 것’은, “차이”라는 말이 “뜻할 수 있는 바들”을, 그것들이 서로 가름될 수 있는 ‘갈래들’에 따라 갈래갈래 ‘나눠 놓는다는 것’을 이른다. 그러나 “차이”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 유래를 가리켜 보일 수 있을 만큼만 수행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존재론의 의미”도 나름대로 한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존재론이 “존재에 대한 학문”을 뜻하는 한, 그것은, 서양의 학문적 전통에 따라 보자면, “형이상-학”1)을 일컫는 말이 된다. 존재론의 의미에 대한 논구는 서양 형이상학의 ‘골격’ 내지 ‘뼈대’를 풀어내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풀어냄’은, “존재론적 차이”가 “존재론의 시발 근거”로서 이해될 수 있는 한, 서양 존재론 즉 서양 ‘형이상-학’의 본질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래’ 속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뜻한다. 자연의 너머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메타-피직’이 자연과 그것의 너머 사이의 구별 즉 존재자와 존재의 구별에 터하는 한, ‘형이상-학’의 본질의 밝혀짐은 동시에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 유래’의 해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으로서의 우리가 서양 형이상학의 문제를 다루는 데는 크게 조심해야 할 바가 있다. 그것은 언어 문제 즉 말의 문제, 특히 번역어의 문제이다. 옮김말의 의무는 옮겨진 말의 본디 뜻을 그대로 넘겨 주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의 ‘어머니-말(모국어)’을 우리들의 ‘어머니-말’로써 뜻새김하여 이름붙이고자 하는 한, 그러한 의무는 다름 아닌 바로 각기의 ‘어머니-말’ 그 자체에 의해 가로막혀지고 만다. 서로 다른 두 ‘나랏말’ 사이에 놓인 이러한 ‘가로-막대’를 완전히 치워 버리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같은 어머니말을 쓰는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의 말나누기(대화)에서도 일어난다. 이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래서 그 말의 뜻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들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가 “차이”라는 낱말로 옮기고 있는 독일말 “디페렌츠(Differenz)”의 말뜻에 좀더 귀를 기울임으로써 이 독일말에 대한 보다 적합한 뜻매김을 시도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존재론적 차이”가 어떠한 “차이”인지를 밝히기 위해 선행적으로 플라톤과 헤겔의 존재론을 간략히 분석할 것이다. 앞서의 뜻매김과 이러한 분석에 의해 우리는, 서양에서의 “존재론적 차이”가 “근거”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근거”는 독일말 “그룬트(Grund)”에 대한 일반적 번역어이다.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옮김말의 뜻하는 바를 되새겨 볼 것이며,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이름짓기를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낱말 자체와 씨름을 벌임으로써 우리는 그 낱말들이 지시하는 문제 영역 전체를 그려 볼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이제 “존재론적 차이”가 뜻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이데거가 이러한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 유래를 독일말 “아우스트락(der Austrag)”으로 제시한 것에 대한 풀이를 하고자 한다. 이때도 우리는 우선 이 독일말에 대한 일반적 번역어로서의 “내어나름”의 문제점을 살펴 본 뒤 그에 대한 새로운 옮김말을 내놓을 것이다. 이러한 ‘낱말 옮김’과 ‘뜻 옮김’을 통해 우리는 ‘아우스트락’이 어떤 의미에서 ‘디페렌츠’의 ‘본질 유래’일 수 있는지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 차이(差異, die Differenz)의 뜻매김






“차이”라는 말은 “차(差)가 나서 다르다”를 뜻한다. “차”란 “값”을 의미한다. “차이”는 “값의 다름” 또는 “다른 값”이다. ‘값’은 특정의 ‘단위(單位) 기준’에 따라 재어진 ‘크기’이다. ‘크기’란 특정한 단위의 재어진 ‘만큼’ 또는 정도이다. 같은 단위로 재어질 수 있는 것들은 서로 간의 의미 있는 ‘비교-값’을 가질 수 있지만, 서로 다른 단위로 재어진 것들 사이의 비교는, 그 단위들에 대한 매개가 없는 한, 우스운 것이 되고 만다. 단위들은, 그것들 또한 나름의 ‘고유 값’을 갖기 때문에, 그것들이 제3의 단위에 의해 매개 또는 환원될 수 있는 한, 서로 비교될 수 있다. “단위”란 잼을 위한 “기본 값” 또는 “기준 값”, 달리 말하자면, 셈을 위한 “기초 값”, 즉 우리가 어떤 것들을 하나하나 세어 갈 때 그 하나하나에게 매겨진 값, 말하자면, “하나-값”을 말한다. 어떤 것들이 차이 즉 ‘다른 값’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들이 동일한 또는 매개 가능한 ‘하나-값’에 의해 재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 권의 책값과 한 대의 자동차값이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 즉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 둘에게 매겨진 값이 동일한 척도로 재어진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마도 그것들의 값을 돈으로 계산할 것이다.


‘차이’ 즉 ‘값의 다름’은 값이 매겨질 수 있는 것들 또는 그 매겨진 값에 의해 재어질 수 있는 것들 사이에서 성립한다. 100원 짜리 동전과 1000원 짜리 지폐는 값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1000원을 100원 짜리 동전 10 개와 같은 값으로 친다. 그래서 우리는 1000원의 값이 매겨진 물건을 1000원 짜리 지폐 한 장으로 살 수도 있고, 100원 짜리 동전 10 개로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것, 즉 특정의 ‘하나-값’으로 재어나갈 수 없는 것은 결코 어떠한 값도 가질 수 없다. 그러한 것에는 값이 매겨질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값이 얼마인지를 잴 수 없다. 그 까닭은, 우리에게 그러한 것을 잴 수 있는 ‘하나-값’ 즉 기준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다른 것과의 ‘차이’도 말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것도, 우리가 그것을 잴 수 있는 어떤 기준 내지 척도를 마련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나름의 고유한 값을 가질 수 있고, 그 척도가 다른 척도들과 비교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도 ‘차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비록 스승님들에게서 받은 은혜의 많고 적음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 해도, 그 많고 적음의 ‘크기(양)’를 잴 수는 없다. 우리가 스승의 은혜를 잴 수 있는 방식은 고작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다”라고 노래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이 노래는 사실은 ‘잼’에 대한 포기 선언이다. 은혜는 어떠한 것으로도 ‘잴 수 없는 것’, 따라서 ‘값이 매겨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와 같은 것은 결코 다른 것과의 ‘비교-값’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은혜와 관련해서는 ‘값의 다름’으로서의 ‘차이’를 말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은혜와 같은 것에도 억지로 값을 매겨 넣을 수 있다.2) 이때의 하나값 즉 단위는 정밀할 수도 있고, 주먹구구로 정해진 것일 수도 있다. 값의 단위가 주어지려면, 그 단위의 기준이 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이 설정되기만 하면, 우리는 어떤 것을 그 기준에 근거해 ‘얼마의 값을 갖는 것’으로서 잴 수 있다. 돈과 관련해 말하자면, 우리는 흔히,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을 “비싼 것”이라 말하고, 값이 얼마 나가지 않는 것을 “싼 것”이라 말한다. 값을 가질 수 있는 것들은 그 값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리매김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은혜와 같이 값을 매길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든 값이 매겨지기 시작하면, 은혜가 값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데 있다. 은혜에 값이 매겨질 수 있다면, 우리는 각각의 은혜에 대해 그 값을 계산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차이”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잘 말해 준다. “차이”는 셀 수 있는 것들 내지 값이 매겨질 수 있는 것들과 관련해서만 의미 있게 말해질 수 있다.


그런데 “존재론적 차이”는 “존재와 존재자의 사이에 놓인 차이”를 말한다. 그렇다면 존재(‘있음’)와 존재자(‘있는 것’) 또한 나름의 ‘고유 값’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있음’의 값은 얼마인가? 예컨대 우리는 공기의 있음의 값을 셈할 수 있는가? 아니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이러한 ‘셈할 수 있음’을 어느 정도의 값이면 남에게 팔려고 하겠는가? 또는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목숨의 붙어 있음의 값을 얼마나 부를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공기의 값을 계산할 수 있고, 심지어 심장이나 목숨의 값까지 계산한다. 물론 계산하려면 계산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말에 “파리 목숨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다.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듯한 파리 목숨과 인간 목숨을 비교하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의 목숨이 한없이 하잘것없이 되어 버린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옛날 신분제 사회에서는 인간에게도 태어나면서부터 핏줄에 따라 그 값이 매겨져 있었고, 오늘날의 능력 사회에서 인간은 노동력이나 재산, 권력이나 지식 등에 의해 그 값이 매겨져 있다. 땅과 하늘 그리고 바다와 물 등에도 값이 매겨진 지 오래다. 사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에 그 값이 매겨져 있다.3)


그러나 우리가 비록 ‘있는 모든 것’에게 그 값을 매길 수 있다 손치더라도, 그 모든 것의 ‘있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예컨대 우리가 비록 공기의 값을 경제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계산을 통해 우리가 공기의 ‘있음’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공기는 비록 어떻게든 재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공기의 ‘있음’은 결코 재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록 공기 입자의 크기를 잴 수도 있고, 공기를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코 공기의 ‘있음’의 크기를 잴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공기의 ‘있음’과 같은 것을 잴 수 있는 단위가 없다. 아니 어쩌면 공기의 ‘있음’은 그 자체가 바로 유일한 단위인 셈이다. 공기의 ‘있음’은, 우리가 공기 밀도를 잴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재어질 수 없다. 그 ‘있음’은 유일무이한 것 즉 오직 하나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기의 ‘있음’을 셀 수 없다. 공기의 ‘있음’에는 수(數)가 없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있는 모든 것’의 ‘있음’을 세거나 재거나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있음’에다 그 어떠한 값도 매길 수 없다. ‘있음’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공기의 ‘있음’은 종(種, eidos)도 아니고 유(類, genos)도 아니다. 공기는 차가울 수도, 더울 수도, 더러울 수도, 깨끗한 수도 있다. 공기의 ‘차가움’에는 정도가 있다. 우리는 온도계로써 공기의 차가움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 ‘차가움’과 ‘더움’ 등은 공기의 종(種), 즉 온도와 관련하여 보여진 공기의 ‘모습’ 내지 ‘꼴’이다. 그러나 공기의 ‘있음’은, 모든 종과 유로써도 결코 계산되거나 셈해질 수 없는 것이다. ‘있음’은 모든 종과 유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있음’과 관련해서는 결코 “차이”를 말할 수 없다. ‘있음’이 “차이”로써 말해질 수 없다면,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의 차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있는 것’에 대해서는 “차이”란 말을 쓸 수 있다 손치더라도, 그 말은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분명 “존재론적 차이”란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말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차이”라는 낱말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바로 그 “차이”라는 낱말에 의해, 저 “존재론적 차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사태 속으로 다가갈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차이”라는 낱말은, ‘값이 매겨질 수 없는 것’으로서의 ‘있음’을 ‘값이 나가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차이”라는 낱말을 통해서는 결코 ‘있음’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존재론적 차이”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아니 아무 문제없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인 양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차이”라는 낱말 자체가 말하는 소리뿐만 아니라 ‘있음’이 뜻하는 바도 전혀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존재론적 차이”라는 말을 그저 “온톨로기쉐 디페렌츠(die ontologische Differenz)”에 대한 일종의 “지시 기호” 내지 “발음 기호” 또는 “편리를 위한 대용품” 정도로 취급한다.


만일 ‘있음’과 관련해서 “차이”라는 낱말이 부적합하다면, 우리는 그것 대신 “다름”이라는 낱말을 선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값의 다름”으로서의 “차이”라는 낱말이 “다름”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선택은 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다름”을 “같음”의 반대말로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음”은? 우리는 “같음”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해 방식을 사용한다. 우리는 “다름”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지 않으며, “같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름”의 문제에 직면해서는 “같음”으로 도피해 버림으로써 “다름”을 “같지 않음”으로 해소시켜 버리고, “같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르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만족은, 이때의 “다름과 같음”이 ‘있는 것’의 “유(類)”로서 여겨지는 한, ‘있음(존재)’과 관련해서는 자기 기만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있음’은 ‘있는 것’의 유(類)로서의 ‘다름과 같음’이라는 관점에서 견주어지거나 재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다름과 같음”은 ‘있음(존재)의 방식’과 관련해서는 의미 있게 말해질 수 있다.4) 만일 우리가 “있음(존재)과 있는 것(존재자)의 다름”을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 사이의 다름에 합당한 말로써 그 둘의 다름을 명명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선 독일말 “디페렌츠(Differenz)”의 의미를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의 유래는 그리스말 “디아페레인(diapherein)”에 있다. 이 그리스말은 타동사적으로(transitiv) “저쪽으로 나르다(Hinuebertragen)”, “끝까지 나르다(Zu-Ende-bringen und Austragen)”, “따로 떼어놓다(Auseinandertragen und Zerstreuen)” 등을 뜻하며, 자동사적으로(intransitiv) “구별되다(Sichunterscheiden von…)”를 의미한다. 이 말의 추상명사 “디아포라(diaphora)”는 “서로 나뉘어져 있음(das Auseinandersein)” 또는 “구별(der Unterschied)”로 새겨질 수 있다.5)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구별된 것”과 관련하여 그것들이 어떻게든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6) 물론 이때의 동일성은 수(數), 종, 유 그리고 유비(類比, Analogie)에 따른 “동일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디페렌츠”라는 말 속에는 어떤 것들 사이의 본질적(kata physin) “상응함” 내지 “함께 속할 수 있음” 또는 “동일성”이 어떻게든 함께 말해지고 있어야 한다. 즉 어떠한 방식으로도 함께 속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어떠한 “디페렌츠”도 말해질 수 없다.


“디페렌츠”는 “숨겨진 동일성으로부터 따로 나뉘어져 있음”을 말한다. 물론 “디페렌츠”라는 낱말 자체는 저 나눠진 것들의 동일성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낱말은 그저 “따로 나눈다”는 것만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낱말 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채 숨겨진 나머지를 함께 들을 수 있다. “디페렌츠”는 “한데 놓인 것들을 따로 갈라놓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있음’을 ‘있는 것’으로부터 갈라내 그것의 ‘너머’에 자리매김할 수도 있고, ‘있음’을 ‘있는 것’으로부터 갈라놓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있음’을 다시금 ‘있는 것’ ‘속’에 자리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있음과 있는 것’을 서로 갈라놓을 수 있다는 것은, ‘메타-피직’이라는 말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그 둘의 관계맺음의 방식을 어떻게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규정함이 생각함(사유)의 능력이라면, 생각할 줄 아는 자는, 그가 생각하는 한, ‘있음’과 ‘있는 것’을 갈라놓게 된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즉 우리가 있음과 있는 것을 서로 다른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그 둘이 어떻게든 갈라놓일 수 있기 때문이고, 그 둘이 갈라놓일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생각함을 통해 그 둘을 어떻게든 갈라놓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의 디페렌츠”의 독특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보기를 들고자 한다. 이러한 영역에서 보기를 든다는 것은 — 보기란 보여질 수 있는 것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에, 즉 보여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보기를 들 수 없기 때문에 — 매우 위험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존재론적 차이”의 문제 지평을 열어보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삶 속에서 느끼는 ‘있음의 뜻하는 바(의미)’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 보기는 “우리는 어머니의 있음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물음이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있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있음’은 구별된다. 무엇을 통해? 감각을 통해? 그렇다면 어머니의 ‘있음’은 감관을 통해 감지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분명 살아계신 어머니를 우리 자신의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손으로 어머니의 ‘있음’을 만질 수 있는가? 어머니는 밥을 잡수실 수 있지만, 어머니의 ‘있음’은 입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누군가 어머니의 ‘있음’을 생각할 때 어머니의 ‘입’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떠오른 입이 어머니의 ‘있음’은 아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떠올려 볼 수도, 그림으로 그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머니의 ‘있음’을 무슨 수로 떠올려 볼 것이며, 또 어머니의 ‘있음’이 떠올라졌다 해도, 도대체 우리는 그분의 ‘있음’을 어떻게 그려야 한단 말인가? 더 나아가 어머니의 ‘살아 계심’이 우리들에게 감사함으로 다가올 때, 아니 우리가 그 감사함을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에야 알게 되었을 때, 도대체 우리는 이러한 가슴 뭉클한 감사함으로 와닿는 어머니의 ‘있음’을 어떻게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우리는, 우리가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듯 그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저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라는 방식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선물을 사드리거나, 아픈 다리를 주물러 드리거나, 제사를 올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분명 어머니와 어머니의 있음은 다르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있음이 어머니로부터 따로 무관하게 떨어져 놓인 것도 아니다. 그 둘은 다르지만 언제나 함께 놓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그 둘의 구별에 주목하지 못함으로써, 흔히 어머니의 있음의 ‘뜻하는 바’를 잊고 살 수도 있다. 누군가 자신의 어머니의 있음을 완전히 잊고 있다면, 그의 어머니가 비록 고향에 살아 계실지라도, 그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과 같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잊어버림에 의해 없어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의 어머니의 ‘있음’은 잊혀지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있음’은, 그 ‘있음’을 돌이켜 생각하고, 그 뜻을 되새겨 생각하는 이에게만 주어진다.


우리는 이제 “디페렌츠”를 이러한 동일성과의 숨겨진 연관도 고려에 넣으면서 그리고 낱말 그 자체의 뜻도 살리기 위해 “갈라-놓음”(타동) 또는 “갈라-놓임”(자동)이라 옮기고자 한다. “갈라-놓음”은 “완전히 외따로 되게끔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들 사이에 들어 그 불화를 잠재울 정도의 거리로 서로를 떼어놓는 것을 말한다. 물론 “갈라-놓음”은 “이간질” 즉 “두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다”는 뜻도 갖는다. “갈라-놓음”은 두 개 이상의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부터 갈라내어, 그것들 각각을 그것들이 놓여야 할 본디의 자리에 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여기서의 사태의 고유성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용어적으로는 “갈라-놓기”를 선택할 것이다.7)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론적 차이”란 말을 “존재론적 갈라-놓기”라 바꿔 새길 수 있겠다.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존재(있음)와 존재자(있는 것)를 서로 다른 것으로서 갈라놓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둘은, 위에서 짧게나마 말했던 것처럼, 결코 완전히 따로따로 떨어져 놓이는 것이 아니다. 있음과 있는 것 사이에는 반드시 가름이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둘은 어떻게든 함께 속해야만 한다. 즉 있음은 있음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있음은 언제나 있는 것의 있음이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있음의 있는 것이다.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 또한 ‘있는 것’과 ‘있음’을 서로의 연관 하에서 다루어 왔고, “디아포라” 내지 “디페렌츠”는 바로 이러한 연관을 틀지워 놓은 낱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낱말들이 가리켜 보이는 사태 연관에 바탕하여 가능케 된 “메타-피직”은, “메타”라는 낱말이 지시하는 영역이 바로 ‘있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있음의 로고스” 즉 “존재-론”이 되었다. 있음과 있는 것은, 존재론의 역사가 진행되어 오는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갈라놓여 왔다. 서양 철학사는 그 둘의 갈라놓여진 됨됨이에 대한 해석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이 그 역사를 뒤쫓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갈라-놓기”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어 나왔는지를 밝히는 데 있으므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플라톤과 헤겔의 존재론에서 즉 서양의 위대한 두 형이상학에게서 있음과 있는 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갈라놓여지는지를 간략히 살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2. 존재론(存在論, ontologie)의 뜻매김






우리는 “존재론적 차이”의 문제, 특히 이 차이의 본질 유래를 밝히는 문제를 풀고자 하고 있다. 앞서 우리는 “차이”라는 낱말에 대한 포괄적 뜻매김을 시도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존재론”이라는 낱말에 관한 암묵적 정의들을 사용해 왔다. “존재론”은, 낱말 그대로 보자면, “존재”에 대한 “논”이다. 그러나 “존재론”이라는 낱말 역시, “차이”라는 낱말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온톨로기(Ontologie)”라는 독일말의 번역어 즉 옮김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온톨로기”는 “온(on)”에 대한 “로고스(logos)”라고 할 수 있다. “온”은 보통 “존재”라고 번역되고, “로고스”는, 학문의 분류법과 관련해서는 “-론”이라 번역되고 있다. 그런데 “온”은, 보다 정확히 옮기자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아에이 온(aei on)”은 “언제나 있는 것”으로서 옮겨질 수 있다. 반면 존재 즉 있음을 뜻하는 그리스말은 “우시아(ousia)”이다. 그렇다면 “온톨로기”는 “존재-론”이 아니라 “있는 것에 관한 론”인 셈이다. 물론 “온”이라는 낱말은 문맥에 따라 “있는 것”을 지시할 수도 있고, 또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온톨로기”는 “있는 것과 있음 모두에 관한 론”이라 할 수 있겠다. 8)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이 ‘서양의 온톨로기’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말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둘의 연관이 어떻게 파악되는지, 다시 말해 그 둘이 어떻게 ‘갈라놓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플라톤의 존재론을, 다음에 헤겔의 존재론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살펴봄을 통해 “존재론적 차이”의 “본질 유래”에 대한 해명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존재론






플라톤의 ꡔ국가ꡕ 222 쪽에는9) 형상의 사물 안에 “들어 있음(en-einai)” 내지 “나타나 있음(par-ousia)”이 말해지고 있다. 이러한 “나타나 있음”은, 마치 유한한 모음과 자음이 그것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낱말들 속에 “옮겨가며 나타나는 것(peripheromena)”과도 같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서는 사물들의 형상에로의 “관여 또는 함께 속함(methexis)”도 말해지고 있다. 플라톤에게서 사물 즉 ‘프라그마(pragma)’는 ‘많은 것(ta polla)’으로서 해석되고 있고, 반면 이데아는 ‘저마다의 있는 것 그 자체(auto hekaston to on)’를 뜻한다. 하나의 ‘프라그마’ 예컨대 하나의 단지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많은 것’은 ‘저마다’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다. 만일 단지가 둥근 모습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둥근 모습 그 자체’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물론 이 ‘둥근 모습 그 자체’가 구체적 단지 속으로 들어와 있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어떤 ‘이지러짐’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러한 감수는, 그 사물 속에 다른 ‘이데아’들도 함께 들어와 있기 때문, 즉 함께 나타나 있기 때문, 다시 말해, 하나의 사물 속에 서로 다른 수많은 이데아들이 함께 들어옴으로써 그 이데아들 사이에 어떤 ‘자리-다툼’이 일어나기 때문, 그 다툼이 해소되는 과정에서 서로서로 조금씩 자신의 본디 모습을 양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의 이데아에는 오직 ‘단지 그 자체’만이 속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단지의 이데아 속에서도 어떤 ‘자리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따라서 단지의 이데아는 어떤 변형 내지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지의 이데아라 불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단지의 이데아는 단번에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디알렉티케” 즉 ‘철학적 숙고’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이데아를 사물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사물들과 분리해서도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사물들 속에 들어 있는 이데아’와 그 사물들이 없어져 버린 뒤에도 결코 변화하지 않고 있는 ‘언제나 그 자체로서 있는 이데아’로 구분하고 있다.


플라톤에게서 하나의 사물이 그러한 사물 예컨대 단지일 수 있는 것은 그 사물을 그것이게 해주는 바의 것 즉 그 사물의 이데아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의 이데아가 그러한 이데아 예컨대 단지의 이데아일 수 있는 것은 그 이데아를 나누어 갖고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10) 사물은 ‘변화 속에 놓인 것’, 즉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것’, 다시 말해 ‘생겨나 사라져 버리는 것’, ‘시간 속에 그 있음의 처음과 끝을 갖고 있는 것’이지만, 이데아는 ‘변화 밖에 놓인 것’, 말하자면 ‘그 자체로서 변화하지 않은 채 있는 것’, 다시 말해 ‘생겨날 수도 사라져 버릴 수도 없는 것’, 즉 ‘시간 속에 그 있음의 처음과 끝을 갖지 않은 채 언제나 있어 온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 즉 ‘지혜-사랑하미’11)의 목적은 ‘저마다의 있는 것 그 자체’를 “보는(idein)” 데 있다. ‘이데아’는 ‘지혜-사랑하미’가 ‘본 것’ 또는 ‘지혜-사랑하미’에게 ‘보여진 것’의 뜻이다.


이데아는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자 ‘사물을 사물로서 있게 해 주는 것’ 즉 ‘사물에게 그것의 있음을 주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있는 것’으로서의 이데아는, 그것이 또한 ‘언제나 있는 것’ 즉 ‘없음으로부터 있음으로 넘어와 생겨날 수도 그리고 다시 있음으로부터 없음 속으로 넘어가 사라질 수도 없는 것’으로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있음을 스스로 마련해 갖는 것이다. 반면 사물들은 변화하는 것들로서 자신들의 있음의 근거를 자신 속에 갖고 있지 못하다. 예컨대 단지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없이는 ‘단지로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나름의 쓸모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쓸모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플라톤은 지혜의 기초가 이러한 ‘이데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지혜-사랑하미’는 마땅히 ‘이데아’를 향한 긴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여정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잘 알고 있다. 플라톤에게 ‘온’은 ‘바뀌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언제나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고, ‘사물들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임과 동시에 그러한 들어옴을 통해 사물들에게 그것의 ‘있음’을 ‘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온’에 대한 ‘로고스’로서의 ‘존재-론’ 또는 ‘지혜-사랑하기’는 ‘언제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하게 있는 것’ ‘사이’의 연관을 밝힘으로써 우리의 삶의 방향을 ‘이데아’에로 향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제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론적 갈라-놓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 있다. 플라톤의 ‘존재-론’ 즉 ‘온에 대한 말하기’는 ‘온’ 즉 ‘있는 것’을 ‘프라그마(사물)’로서도 그리고 ‘이데아’로서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자면, 하나의 사물은, 그것의 ‘이데아(언제나 있는 것)’가 그 사물 속에 ‘나타나 있을(파루시아)’ 때에만 그것(사물)일 수 있다. 한 사물의 이데아는 그 사물의 있음의 근거이자 그 사물의 본질이다. 이데아는 자신에 의해 근거지워진 사물 속에 함께 나타나는 근거이다. 반면 사물은 이데아에 의해 근거지워진 것으로서 자신을 근거짓는 것에 ‘속해 있다(메텍시스)’. 만일 사물의 이러한 메텍시스(관여)가 없다면, 이데아는 이 세계 속에 결코 나타날 수 없다. 이데아의 이 세계 속으로의 ‘나타나 있음’은 사물의 이데아로의 ‘속해 있음’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플라톤의 존재론은 ‘온’을 이렇게 ‘나타나 있음(파루시아)’과 ‘속해 있음(메텍시스)’의 연관 관계로써 규정하고 말한다. 플라톤의 존재론은 ‘있는 것’을, ‘변화할 수 있는 것’과 ‘불변적으로 언제나 있는 것’으로 ‘갈라-놓을’ 뿐 아니라, 그렇게 갈라져 있는 것들 사이의 연관을, ‘나타나 있음’과 ‘속해 있음’으로 ‘갈라-놓는다’.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의 갈라-놓기’가 플라톤에서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일어난 사건이 어떠한 낱말들 속에 새겨졌는지를 살펴보았다. 플라톤에게서 이러한 ‘갈라-놓기’는 철학 즉 ‘지혜-사랑하기’에서, 다시 말해 ‘생각하기(사유)’ 속에서 수행된다. ‘갈라-놓기’로서의 ‘생각하기’는, 그에게는, ‘동굴(사물들)의 세계’로부터 ‘이데아의 세계’를 향해 먼 길을 떠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데아를 본 뒤에는 자신이 떠났던 곳 즉 동굴 속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길을 가야하는 까닭은 길이 그렇게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 길을 가는 가운데 갈라놓인 것들의 갈래를, 그것들의 숨겨진 동일성 때문에, 함께 엮게 된다. 즉 있는 것에게 그 있음을 주는 것즉 있는 것의 근거로서의 이데아 또한, 그것이 비록 ‘언제나 있는 것’으로서 규정되긴 하지만, 어쨌든 ‘있는 것’으로서 규정되며, 이데아에 의해 근거지워진 것으로서의 있는 것은 이데아를 ‘상기시키는’ 근거, 이런 의미에서 ‘이데아가 우리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근거’로 파악될 수 있다. 이렇게 플라톤은 ‘있는 것’과, 그것에게 그 있음을 주는 근거로서의 이데아의 사이를 획일적으로 ‘갈라-놓고’ 있지 않다. 그는 갈라놓으면서 이어놓고, 이어주면서 갈라준다.


그러나 프라그마와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갈라-놓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있는 것과 있음 사이의 갈라-놓기’라고 볼 수 없다. 프라그마 즉 사물과 그것의 있음이 갈라놓일 수 있듯이, 이데아 즉 사물을 통해 ‘보여진 것’과 그것의 있음 또한 갈라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물의 있음을 다양한 이데아들로써 규정하고는 있지만, 사물의 있음 자체에는 크게 주목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에 그는 이데아의 있음을, 사물의 있음에 적용시켰던 규정 즉 ‘나타나 있음’으로써 이해한다. 물론 그는 이데아의 있음에 대해서 “영원한 지속성” 내지 “불변성” 등의 성격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플라톤이 이데아의 있음과 사물의 있음을 “시간적 특성”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는 것만을 말해 줄 뿐이다. ‘있음’은 플라톤에게서 ‘지속적으로 나타나 있음’으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있음 개념’이 사물에 적용될 때, 저 ‘지속성’은 유한성 내지 변화성의 제약을 받는다. 사물의 ‘나타나 있음’은 ‘시간적이고, 유한하며, 시작과 끝을 갖지만, 그러나 일정 기간 동안 지속된다.’ 반면 이데아의 ‘나타나 있음’은 ‘언제나 있음’ 즉 ‘시간을 초월하며, 무한하고, 시작과 끝을 갖지 않으며, 영원히 지속된다.’ 플라톤은 ‘있음의 지속성’ 즉 있음의 “언제나-성격”이 많거나 강할수록 참되다고 보았다. 보다 참된 것일수록 ‘있음’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갖는다.12) 이데아가 ‘가장 참되고, 있음을 가장 많이 그리고 영원히 갖는 것’이라는 결론은, 그것이 ‘있음의 문제’와 관련되는 한, ‘존재론적 갈라-놓기’의 중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데아가 비록 영원히 ‘있는 것’일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의 ‘있음’까지 영원하다고 말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데아의 있음의 영원성은 우리 유한한 인간에게는 결코 증명될 수 없다. 위에서 든 보기를 통해 말해보자면, 어머니가 비록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머니의 ‘있음’은,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언제나 주어지는 것’도 또 ‘영원히 주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는 소위 ‘이성적 추론’을 통해 어떤 것의 있음의 영원성을 증명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증명 또한 궁극적으로는, 저 ‘이성’의 완전성 내지 영원성이 앞서 확보되지 않는 한, 그저 가정적 주장에 그칠 뿐이다.


사물과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갈라-놓기’의 빝바탕에는 분명 ‘있는 것과 있음’에 대한 ‘갈라-놓기’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주제적으로 수행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사물과 이데아를 명시적으로 분리시킬 수도, 그 둘을 다시금 연결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결국 사물을 부정적인 것 내지 초월되어야 할 것으로 격하시키고 말았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이데아에로 향해 갈 때에만 참되고 올바른 삶일 수 있게 되었다.






헤겔의 존재론






이렇게 변화의 세계로부터 불변의 세계로 초월하기 위해서는 그 ‘초월의 근거’ 즉 저 ‘불변의 세계’가 앞서 열어 밝혀져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누메나(생각함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의 세계’의 ‘앞서 열어 밝혀져 있음’은 그 세계가 열어 밝혀질 수 있는, 그리고 그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을 전제한다. 만일 인간에게 이러한 사유 능력이 없다면, 초월은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근세 철학은 인간에게 이러한 사유 능력이 있는지, 만일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있는지를 묻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근세 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음’이란 인간의 사유에 의해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한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있음’이란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물론 이러한 단정은 철저한, 다시 말해 극단에까지 치닫는 회의의 결과로써 내려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극단적 회의를 통한 단정, 다시 말해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완성에 도달한 헤겔의 사유를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구성틀」13)을 통해 간략히 파악해 보기로 한다. 이때에도 우리의 관심은 헤겔의 “존재론적인 갈라-놓기”에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헤겔은 ‘있는 것의 있음(das Sein des Seienden)’을 “사변적-역사적으로(spekulativ-geschichtlich)” 생각한다.14) ‘있음’은 헤겔에서 “생각함의 사태(die Sache des Denkens)”이다.15) 그런데 헤겔에서 이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우선 ‘규정되지 않은, 매개되지 않은 것’,16)  또는 “규정되지 않은 무매개성(매개되지 않음, unbestimmte Unmittelbarkeit)”을 뜻한다. 이러한 ‘있음’은 ‘사변적으로 생각하기’를 통해 매개되고 규정되어야 한다. 헤겔에서 ‘있음’은 이러한 ‘규정하는 매개함’에서부터, 즉 앞선 ‘규정되지 않음과 매개되지 않음’을 끝까지 지양하는 ‘절대적 개념’에서부터, 다시 말해 ‘절대 이념’의 지평에서부터 이해된다. 만일 ‘있음’이 역사적으로 전개되어 왔다면, 그것에 대한 ‘생각하기’ 역시 그러한 ‘있음의 역사’에 따라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있음의 진리 즉 있음의 ‘참-됨됨이(Wahrheit)’는 있음의 역사가 역사적으로 완전히 전개되어 있는 곳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있음의 역사적 전개는, 이 전개가 있음의 자기 전개에 다름 아니므로, 있음 그 자체가 그 자신의 다양한 단계들 내지 형태들을 거쳐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있음의 역사’는 ‘철학(지혜-사랑하기)의 역사’ 즉 ‘생각하기(사유함)의 역사’에 상응한다. 있음의 역사는, 그것이 ‘생각하기의 역사’로서 전개될 수 있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있음의 각 단계들을 역사적으로 지양해 가는 것을 우리는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기(변증법적 사유)’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생각하기를 통해, 있음은 그것의 완전한 진리 즉 그것의 본질, 다시 말해, “절대적 반성”에 도달한다. 헤겔은 이러한 “본질의 진리”를 “개념(Begriff)”이라 부른다. 개념은 ‘있음’에 대한 ‘무-한한 앎’, 즉, 있음이 생각함(사유)에 상응하는 한, ‘생각함에 대한 절대적 생각하기’인 셈이다.17)


헤겔의 존재론은 있음의 자기 전개의 과정에 대한 말하기이다. 따라서 그의 존재론의 얼개(구조)는 곧바로 그에게 이해된 ‘있음’의 얼개인 셈이다. 헤겔에서 있음은 역사적이다. 즉 처음과 끝 또는 시작과 결과를 갖는다. 그렇다면 헤겔의 존재론의 얼개 또한 역사적이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헤겔이 ꡔ논리학의 학문ꡕ에서 던졌던 문제인 “학문은 무엇으로써 시작하는가?”를 묻는다.18) 이때 중요한 것은 시작(Anfang)과 결과(Resultat)가 모두 ‘사변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 말은, 시작은 결과로부터의 시작이고, 결과는 시작의 결과임을 뜻한다. 시작은, 그것이 ‘매개된 결과’로써 이루어지므로, “매개되지 않은 어떤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은, 그것이 ‘매개된 결과’에 대한 부정성 즉 ‘밖으로-벗어남(외-화, 엔트-오이서룽)’을 통해 만들어지므로, 즉 그것이 이제 비로소 변증법적으로 매개되어야 하므로, “매개된 어떤 것”도 아니다. 이 말은, 학문이 ‘절대적 앎’으로서 이해되어 있는 한, 학문의 시작은 있음의 자기 전개가 완성된 단계, 즉 있음의 변증법적 운동이 끝마쳐진 상태, 다시 말해, ‘절대적 이념’으로부터 결과된다는 것, 말하자면, 그 변증법적 운동의 맴돌이를 의미한다. 이 말은, 학문의 얼개가 있음의 얼개에 상응하는 한, 있음은 그 충만 상태로부터, 그 자신의 가장 바깥까지 벗어난 — (가장 극단적 외화) — 가장 빈(공허한) 상태로 움직이고, 그것은 다시, 앞서의 움직임에 대한 반대 움직임으로서, 이 가장 빈 상태로부터 그 자신을 완성하는 충만 상태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헤겔에서 이러한 ‘있음의 움직임(운동)’은, ‘있음이 그 자신 속에서 맴도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있음의 움직임(운동)의 처음과 끝의 어디에서도 항상 ‘있음’을 만날 수 있다.19)


있음이 자체 안에서 ‘맴돌이-움직임’을 펼친다는 것은, 있음에 대한 ‘생각하기’가 ‘있음’을, 그것의 가장 빈 상태로부터 그것의 가장 가득한 상태로 그리고 다시 거꾸로의 방향으로 생각해 간다는 것에 상응한다. 만일 있음이 그것의 가장 빈 상태에서 생각된다면, 그것은 그것의 보편성 즉 ‘모든 것에 두루 통함’에서 생각되는 것이고, 만일 그것이 그것의 가장 충만한 상태에서 생각된다면, 그것은 그것의 ‘가장 높음’ 즉 ‘총체성의 단일성’에서 생각되는 것이다.20) ‘있음’이 두루 통하게 되는 저 ‘모든 것’은 다름 아닌 ‘있는 것 전체’이다. ‘모든 있는 것’은 있음의 이러한 ‘두루 통함’을 통해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있음’은 ‘있는 것’의 근거이다. ‘모든 있는 것’에 두루 통하는 것으로서의 ‘있음’은, 이렇게 모든 것에 통할 수 있기 위해, ‘모든 것에 똑같이 타당한 것’, 따라서 그 자체로는 어떠한 규정도 갖지 않은 것,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빈(공허한) 것’이다. 반면 있음이 완전히 전개된, 즉 있음이 가장 가득찬 상태, 즉 있음이 가장 높이 완성된 상태는, 이러한 가장 높은 단계의 ‘있음’이 그 아래 단계의 ‘있음-들’을 자체 속에 지양해 갖는 한, ‘모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높이 있는 것 즉 신에게서만 가능하다. 신은 헤겔에서 모든 있는 것과 모든 있음의 근거이다. 따라서 신은 근거의 근거 즉 근원 근거이다.21) 그렇다면 헤겔의 존재론에서 ‘있음’은 ‘모든 있는 것’의 근거이고, ‘가장 높이 있는 것’으로서의 신은 ‘모든 있음’의 근거이다.


헤겔에게서 학문이 있는 것의 근거로서의 ‘있음’과 더불어 시작되어야 하는 한, 그 학문은 ‘있음에 대한 학문’ 즉 ‘존재-론’이 되는 셈이고, 학문이 다시금, 시작의 변증법적 성격에 따라, 신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신에 대한 학문’ 즉 ‘신-론’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학문은 ‘존재-론’임과 동시에 ‘신-론’인 셈이다. 여기서 말해지는, 헤겔의 의미에서의 학문은 ‘메타-피직(형이상-학)’의 딴이름이다. ‘형이상-학’은 ‘있음에 대한 로고스’로서의 ‘존재-론’과 ‘신에 대한 로고스’로서의 ‘신-론’에 의해 함께 규정되어 있다. 헤겔의 ‘형이상-학’은 “존재-신-론”이다.22)


그런데 헤겔에게서 존재 즉 있음은 모든 있는 것의 근거로서 이해되고, 신은 있음의 근거로서 이해된다. 헤겔에서 ‘존재’와 ‘신’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그 둘이 모두 근거라는 점에서 그리고 근거가 전통적으로 로고스라 불린다는 점에서, “로고스에 대한 학문” 또는 “로긱(논리학, Logik)의 학문”이라 불린다. 헤겔의 생각함의 사태 즉 문제거리는 ‘있는 것의 있음’이다. 그의 형이상학이 “존재론” 대신 “논리학”이란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의 형이상학의 주제가 ‘있는 것의 있음’임이 분명한 한, 이 ‘있음’이 그에게 이미 ‘로고스’로서 앞서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헤겔에서 있음은 언제나 로고스 즉 근거(Grund)로서 각인되어 있다.23) 헤겔은 자신의 생각을 로고스로서의 ‘있음’에로 집중한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거듭해서 사용되고 있는 “근거”라는 낱말에 대한 새로운 뜻매김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선은 이 글에서의 말놀이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말놀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이, 그 말이 가리키는 곳으로 보다 쉽게 날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근거”는 독일말 “그룬트(Grund)”에 대한 번역어이다. “근거(根據)”라는 낱말은, 낱말대로 풀자면, “뿌리와 자취”를 뜻한다. 우리는 “근거”라는 낱말을 보통 “어떤 것이 뿌리내리며 살아나가는 터전”이나 “어떤 주장의 이유” 등의 의미로 사용한다. “생활의 근거를 잃다”와 “근거가 빈약하다” 등이 그 보기이다. 물론 오늘날 “근거”는 “사실의 근거”, “논리의 근거”, “판단의 근거”, “설명의 근거” 등과 같이 다양한 문맥 속에서 쓰인다. 그러나 과연 “근거”라는 낱말이 쓰여지는 곳에서 “근거”라는 낱말 자체가 말해지고 있는 곳은 얼마나 될까? “근거”라는 낱말은 아마도 대개는 “라치오(ratio)”나 “리즌(reason)” 또는 “로고스(logos)” 등의 기호로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낱말이 기호로서 사용되는 곳에서 ‘철학’ 즉 ‘지혜-사랑하기’는 살아 숨쉴 수 없다. ‘지혜-사랑하기’는 낱말이 제 뜻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곳에서만 싹틀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룬트”라는 낱말의 의미를 풀어감으로써 “근거”라는 낱말이 그것에 대한 번역어로서 어느 정도까지 적합한지를 드러내려 할 것이고, 그에 대한 새로운 옮김말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그룬트”는 강이나 건물의 “바닥”을 뜻한다. 바닥은 어떤 것의 밑에 놓여, 그것이 넘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것이다. 예컨대 만일 강에 그 바닥이 없다면 강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강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룬트”는 또한 “밑그림” 즉 “배경”의 뜻도 같는다. 이때 그것은 “힌터-그룬트(Hintergrund)”로서 이해된다. “그룬트”는 어떤 것을 “떠받쳐 주는 것” — 이러한 의미에서 “그룬트”는 “기체(基體, 밑바탕에 놓인 것)”란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 이자 어떤 것을 바로 그것이게 해 주는 “보이지 않는 원인” 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에서 그리스말 “아르케(arche)”를 “그룬트(Grund)”로서 새기고 있는데, 이 “아르케”는 네 “아이티아(aitia)”를 함께 모으는 “내적 연관”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룬트”에는 어떤 것의 출발점 내지 첫머리(始原, Anfang)를 이룬다는 의미는 물론 “물질적인 것(히포케이메논)”, “형상(토 티 엔 에이나이, to ti en einai)”, “운동인(아르케 테스 메타볼레스, arche tes metaboles)” 그리고 “목적인(우 헤네카, ou heneka)” 등의 의미도 함께 속해야 한다.


“그룬트”는 그리스말 “히포케이메논(hypokeimenon)”과 “로고스(logos)” 그리고 라틴말 “라치오(ratio)” 등에 대한 옮김말이다. “그룬트”라는 낱말이 이처럼 다양한 유래를 갖기 때문에 그 말의 뜻하는 바 또한 그토록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말 “근거”는 독일말 “그룬트”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일 수 있는가? 예컨대 단지의 “근거”란 무엇을 뜻하는가? 단지의 “뿌리”를 말하는가? 아니면 단지의 “자취”를 말하는가? 아니면 단지의 “이유”를 말하는가? 만일 우리가 “단지의 그룬트”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단지의 ‘모습(형상)’, ‘흙(재료, 질료)’, ‘도공(제작인)’, ‘쓸모(목적인)’, ‘밑바닥(밑에 놓인 것)’ 등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말 “근거”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아무것도 없다. 대신 우리말 “바탕”은 그러한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바탕”은 “밭”에 “앙”이 맺어진 말이다. 이 말은, 예컨대 “바탕-색이 곱다”에서 보이듯이, 어떤 것이 두드러지게 내보여지고 있을 때의 그 “밑-그림” 내지 “배경”을 뜻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의 있음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어떤 “원소(質)”를 의미하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어떤 물체의 “바닥”을 뜻할 수도, 어떤 물체의 “모습” 또는 “겉-모습” 또는 사람의 “품성”, 더 나아가 어떤 것이 그 본디의 본성을 얻게 되는 자리로서의 “마당”을 뜻하기도 한다. “바탕”은 또한 “모탕”의 의미로서 어떤 것을 이러저러하게 다룰 수 있는 “받침”의 의미까지 가질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은 “마음”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바탕”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질료적 의미와 형상적 의미 그리고 본성 내지 목적의 의미는 물론 어떤 것의 있음의 총체적 “자리”로서의 “가능케 함”의 의미까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독일말 “그룬트”를 “바탕”이라 새김하면서, 헤겔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 “존재론적 갈라-놓기” 즉 “있음과 있는 것의 갈라-놓기”의 문제를 논의해 가도록 하겠다.


헤겔의 형이상학은 ‘존재-신-논리학’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있음)’와 신이 어떻게 ‘로고스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논리학의 사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있음(존재)’은, 그것이 모든 있는 것의 ‘바탕(그룬트)’으로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만 그리고 그것이 생각함(사유)의 사태(문제거리, Sache)이기 때문에만, 논리학의 주제일 수 있다. 헤겔에서 “논리학”이란 이름은, “어디에서나,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전체에서’ ‘있음에서부터’ ‘바탕-밝히면서 바탕-위에-세우는 생각하기’24)를 위한 이름이다.25)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의 바탕을 캔다는 것은 모든 있는 것에게 두루 통할 수 있는 바탕이 아직 묻혀진 채 즉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을 말한다. 헤겔은, 이러한 ‘바탕-캐기’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에 두루 통하는 ‘하나’의 바탕을 밝혀 낸다. 그것은 ‘있음’이다. 바탕으로서의 ‘있음’은 모든 있는 것에게 한결같이 똑같은 것일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하나이다. 즉 ‘있음’은 ‘하나인 모든 것(헨 판타)’이다.26) ‘있음’은 쪼개질 수 없는 것, 하나인 것, 아니 하나뿐인 것이면서 또한 ‘모든 있는 것’에게 두루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 두루 통함의 성격에서 이해되는 ‘있음’은, 앞서 이미 말한 바처럼, 빈 ‘껍데기-있음’과도 같다. 모든 있는 것 속에서의 ‘있음의 하나된 됨됨이’ 즉 ‘있음의 하나-됨됨이(단일성, Einheit)’는, 말하자면, ‘텅 빔’이다. 이러한 ‘있음의 텅 빔’이 바로 헤겔에서 학문의 시작 즉 첫머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학문 — 즉 형이상학 — 이 이러한 ‘있음의 가장 텅 빔’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우선 학문에게는 도달해야 할 끝 즉 결과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시작이 결과의 부정 즉 결과로부터의 반향 내지 되울림이라면, 학문의 시작으로서의 ‘있음의 가장 텅 빔’은 ‘있음의 가장 가득함’의 부정 즉 ‘있음의 가장 가득함’으로부터의 반향인 셈이다. 반면 결과는 시작의 결과 즉 또다른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학문은 또한 ‘있음의 가장 가득함’으로써도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있음의 가장 가득함’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있음의 방식’의 다양성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하 해답을 얻어갈 수 있다.


‘물질적 있음’, ‘심리적 있음’, ‘이념적 있음’ 그리고 ‘정신적 있음’ 등은 서로 다르다. 이들 각각의 ‘있음’은 모두 있음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 각각은, 어떤 의미에서는, 있음의 ‘조각들’인 셈이다. 이러한 각각의 있음에 바탕을 둔, 즉 각각의 있음에 의해 규정된 ‘있는 것’, 예컨대 ‘물질적 있음’에 바탕한 것으로서의 ‘물질적으로 있는 것’은 자신의 ‘있음’을 ‘물질적 있음’으로서만 갖을 뿐, 다른 ‘있음’, 말하자면, ‘심리적 있음’이나 ‘이념적 있음’ 등은 갖지 못한다. 만일 어떤 ‘있는 것’이 위에서 죽 말해진 ‘있음들’을 모두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앞서 각각의 있음에 의해서만 규정되어 ‘있는 것’보다는 ‘더 많은 있음’을 갖는 셈이다. 만일 ‘어떤 있는 것’이 가능한 모든 ‘있음’을 자체 안에 다 갖고 있다면, ‘있음 그 자체’는 그러한 ‘있는 것’ 속에서 ‘가장 가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있는 것’ 속에서 ‘있음’의 ‘모든 됨됨이(총체성, Allheit)’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27) 이러한 ‘있는 것’ 속에서 있음은 그 변증법적 운동(움직임)을 끝마친다. 여기서의 ‘끝마침’은 ‘끝까지 다 이룸 즉 완성(Vollendung)’의 의미이다. 헤겔은 그러한 ‘있는 것’을 신(神, Gott)이라 부른다. 만일 학문이 ‘있음의 이러한 모든 됨됨이’를 갖고 있는 어떤 것 즉 신과 더불어 시작된다면, 그것은 ‘신에 관한 학문’ 즉 ‘신학’이 된다.28)


따라서 헤겔에서 학문 즉 형이상학은, 그것이 ‘있음’과 더불어 시작되는 한, ‘있음-논리학’ 즉 ‘존재-학(론)’이고, 그것이 ‘신’과 더불어 시작되는 한, ‘신-논리학’ 즉 ‘신-학(론)’이다. 즉 헤겔의 형이상학은 “존재(있음)-신-논리학”이다. 그런데 논리학의 주제는, 서양의 전통에 따르자면, 생각 내지 ‘생각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논리학”이 어떻게 “형이상학”이라 불릴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어떤 근거에서 ‘있음과 신’에 대한 학문까지를 포괄할 수 있게 되는가? 그것은, 만일 있음과 신이 모두 ‘로고스’일 수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논리학”은 “로고스에 대한 학문”이다. 우리가 “로고스”를 또한 “바탕”으로서 옮길 수 있는 한, “논리학”은 “바탕에 대한 학문”이다. ‘있음’은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의 바탕이고, ‘있음의 가장 가득함’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의 신은 ‘모든 있음’의 바탕이라 할 수 있다. 논리학의 주제가 ‘생각하기’라고 한다면, 이때의 ‘생각하기’는 한편으로는 ‘바탕-캐는(밝히는)-생각하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탕-위에-세우는-생각하기’인 셈이다. 헤겔이 자신의 학문 즉 형이상학을 “논리학”이라 부른 까닭은, 그의 형이상학이 ‘생각하기’를 주제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생각하기의 사태 즉 문제거리가 ‘있음’이기 때문이며, 그것도 이때의 ‘있음’이 서양의 형이상학의 시원으로부터 로고스로서 즉 ‘바탕짓는 바탕’29)으로서 드러났기 때문이고, 이러한 바탕으로서의 ‘있음’이 ‘바탕-위에-세우기’로서의 ‘생각하기’를 요청하기 때문이다.30) 그리고 ‘있음에 대한 생각하기’는, 있음의 이러한 요구에 따라, ‘바탕-위에-세우기’가 되며, 이제 ‘바탕-위에-세우기’로서의 ‘생각하기’는 결국 ‘모든 있음’의 “첫번째 바탕”으로서의 ‘신’에 도달함으로써 저 요구를 완수한다.31)


헤겔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어떻게 수행되는가? 그것은 이미 그의 형이상학이 “존재학(론)”이자 동시에 “신학(론)”이라는, 다시 말해, 그의 형이상학의 얼개가 “존재(있음)-신-논리학”에 의해 짜여져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헤겔의 형이상학은 ‘있는 것과 있음’을 로고스의 관점에서 즉 바탕의 관점에서 갈라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갈라-놓기’는, 로고스로서 이해된 ‘있음’의 요구에 의해, 헤겔로 하여금 ‘있음’의 바탕 즉 바탕의 바탕을 찾게끔 만들었다. 이제 있음은 그것의 바탕의 관점에서 ‘가장 높이 있는 것’으로서의 신과 갈라놓인다. 이때의 ‘갈라놓임’은 ‘바탕지음’의 관련을 말한다. 즉 ‘있음’은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을 바탕지음으로써 ‘있는 것’과 갈라놓이고, ‘있는 것’은 ‘있음의 빔과 가득함’을 바탕지음으로써 ‘있음’과 갈라놓인다. 헤겔은 이렇게 ‘있는 것과 있음’을 갈라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둘을, 그것들 사이의 ‘바탕지음’의 관점에서 매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존재론적 갈라-놓기’와 ‘날라-내기(Austrag)’






우리는 플라톤과 헤겔의 “존재론”에서 ‘있는 것과 있음’이 어떠한 방식으로 ‘갈라-놓이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있는 것’과 있음은 때로는 엄격히 갈라놓이다가도, 그 둘의 위치가 어느 순간  뒤바뀌기도 한다. 그것은 플라톤과 헤겔이 ‘있음과 있는 것’의 ‘사이’의 ‘가름’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있는 것’이 아무리 많은 ‘있음의 방식들’과 아무리 오랜 ‘시간적 지속성’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손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있음’이 아니다. 반면 있음이 아무리 ‘모든 있는 것’의 바탕으로서 이해된다 해도, 있음은 결코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엄격히 말하자면, ‘있음’과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들 각각에게 적합한 낱말들로써 말해야 한다. 예컨대 “겨울은 슬픈 영혼을 가진 자들의 안식처이다”와 같은 말은, 이 말이 비록 글로는 겨울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겨울에 대한 말이 결코 아니다. 그 말은 안식의 의미를 표현할 길이 없어 겨울에 빗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사정에 처해 있다. 만일 우리가 “있음의 뜻하는 바”를 뜻매김하려 한다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있는 것’에 빗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우리가 ‘있는 것’에 빗대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음’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은 오직 “있음”이라는 낱말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있음’을 보여 줄 수도, 만지게 해 줄 수도, 맛보게 해 줄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있음’을 만나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관해 말한다. 이렇게 우리들의 삶의 어디에서나 그리고 언제나 만나지는 ‘있음’은 그때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뜻한다. 즉 우리에게 가리킴을 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머니의 살아계심의 가리킴에 따라 즉 그 뜻한는 바에 따라 효도를 하거나 잊어 버리거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있음이, 서양의 형이상학의 전통에서처럼, 로고스(바탕)로서 드러났다면, 즉 있음이 로고스에 빗대어 가리키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또 이때 ‘있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있음이 자신을 로고스로서 나타내 온 서양의 역사 속에서 ‘존재론적 갈라-놓기’는 어떻게 수행되었고, 그것의 유래는 어디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앞서 플라톤과 헤겔의 “존재론적 갈라-놓기”를 간략히 분석할 때 이미 어느 정도는 대답된 셈이다. 우리는 이제 ‘영롱이의 있음’이라는 보기를 통해 이러한 문제 전체를 새롭게, 그러나 이미 하이데거에 의해 철저히 수행된 방식으로 던져나갈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있음의 바탕’을 가져야만 한다. 만일 그것이 자신의 있음의 바탕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있음의 바탕 없이 있는 것’이라는 모순을 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있는 것’은 반드시 그 ‘있음의 바탕’을 가져야만 한다. 만일 모든 것이 그 자신의 ‘바탕’을 가져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동일한 근거에 바탕하여, ‘있음’ 또한 그 자신의 바탕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탕”이리는 낱말이 ‘있는 것’과 ‘있음’ 모두와 관련하여 쓰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 낱말이 그때마다 어떠한 뜻을 갖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예컨대 저기 풀을 뜯고 있는 복제 송아지로서의 영롱이가 있다면, 그것의 바탕은, 위에서 방금 말해진 도식에 따라 말해 보자면, ‘있음’인 셈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영롱이의 ‘있음’이 영롱이를 만들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롱이가 유전공학적 기술에 바탕해 복제된 송아지라면, 영롱이의 바탕은 저 기술이 아닌가? 그런데 “영롱이”는, 한국에서 복제에 성공한 송아지에게 붙여진 이름이며, “영롱이”의 있음을 위해서는 영롱이를 복제할 수 있는 기술, 수많은 실험 기기들, 연구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름으로 불릴 ‘영롱이 자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영롱이의 탄생 과정에 얽힌 모든 것들을 통틀어 ‘영롱이의 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롱이 자체의 유전자 구조’와 뼈와 살과 피 등도, 더 나아가 영롱이가 먹는 사료와 물, 영롱이가 딛고 선 그 땅과 마시는 공기, 지구와 그 중력, 그리고 우주 전체 등도 영롱이의 바탕으로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있는 것들’은, ‘있는 것’으로서의 영롱이의 바탕들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결코 ‘있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있음’이 영롱이의 바탕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영롱이는 있다. ‘영롱이’의 있음을 위해서는 수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영롱이는 이 모든 것들과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관계-맺고-있음’의 수많은 다양성을 잊은 채 영롱이를 오직 “복제되어 있음”으로서만 못박으려 한다. 그런데 만일 영롱이가 없다면, 즉 복제되어 있는 송아지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송아지의 복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만일 영롱이에게 ‘복제되어 있음’이라는 것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앞서 열거된 저 모든 바탕들이 어떻게 영롱이의 바탕일 수 있겠는가? ‘있는 것들’로서의 바탕들은, 그것들이 영롱이의 바탕일 수 있기 위해, 영롱이의 있음을 전제해야만 하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영롱이의 있음은 바탕들의 바탕이라고 말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영롱이의 있음에는 ‘복제되어 있음’만이 속하는가? 아니면 수많은 다른 ‘있음들’도 함께 속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리고 이 있음들이 ‘서로 다른 것들’이라면,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그것들을 모두 한결같이 “있음”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다른 ‘있음들’은, 말하자면, ‘있음들’의 유(類)로서 간주될 수 있을 어떤 ‘보편 있음’의 ‘종(種)들’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있음’은, 그것이 비록 다양한 ‘있음들’로 나눠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단일한 것’은 아닌가?32) 만일 ‘있음’이 단일하다면, 우리는 그 단일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런데 있음과, 그것이 갖는 다양한 성격들 내지 방식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영롱이가 유전공학의 눈부신 성과물로서 있을 때와 아이들의 귀여운 친구로서 있을 때는 그 ‘있음의 됨됨이와 방식’에 큰 차이가 난다. 예컨대 영롱이의 있음은, 학문적 대상으로서는, “눈앞에 있음”의 방식을 갖겠지만, 놀이의 친구로서는, “손안에 있음”의 방식을 가질 것이다. 그 각각의 ‘있음의 방식’은 또한 각각의 ‘있음의 됨됨이’ 즉 “눈앞-됨됨이”와 “손안-됨됨이”에 상응한다.33) 우리는 영롱이로부터 그 있음의 다양한 됨됨이들과 방식들을 캐낼 수도 있고, 반대로 덧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있음의 됨됨이들과 방식들’을 영롱이에게 속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해도,34) 그렇다고 그로써 영롱이의 ‘있음 자체’가 여럿으로 나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롱이의 있음은 하나뿐이다. 영롱이의 ‘있음 자체’는 동일한 것이다. 영롱이의 이러한 하나뿐인, 동일한 그리고 단일한 ‘있음 그 자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즉 다양한 뜻으로 그리고 다양한 됨됨이에서 즉 다양한 규정성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있음의 다양한 됨됨이들과 방식들을 그것들에 걸맞는 범주들로써 각기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있음 그 자체’는, “규정”이 “주어와 술어의 결합”으로서 이해되는 한, 결코 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있음에게 결합시킬 술어 즉 ‘유-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있음을 경험할 수 있고, 있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있음 경험하기’와 ‘있음 말하기’는 ‘있는 것’에 대한 것으로 전락되기 쉽다.


만일 영롱이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들에게 나타났다면, 그것의 있음은 우리들에게 어떻게든 이미 앞서 열어 밝혀져 있어야만 한다. 반대로 영롱이의 있음이 발견되거나 그것에 대해 말해질 수 있으려면, ‘있는 것’으로서의 영롱이가 우리들에게 어떻게든 개방되어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있는 것’으로서의 영롱이와 그 단일함에서의 ‘있음’과, 그 있음의 다양한 ‘됨됨이와 방식’을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곧 “존재론적 갈라-놓기”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갈라놓기의 수행에 따라, 있는 것과 있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갈라놓이게 된다.


있음과 ‘있는 것’의 ‘갈라-놓임’이 뜻하는 바는 우선, 있음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은 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있음과 ‘있는 것’은 분명 서로 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둘은 분명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 둘은 어떻게든 ‘함께 속해야’ 한다. ‘있음’ 없이는 ‘있는 것’도 가능하지 않고, ‘있는 것’ 없이는 ‘있음’도 공허하다. ‘있는 것’과 있음의 ‘사이’에는 ‘갈라-놓임’과 ‘함께-속함’이 일어난다. 이러한 ‘일어남’의 영역 즉 ‘사이 그 자체’의 영역은 — 여기서는 다룰 수 없지만 — ‘있음과 생각함의 동일성’의 ‘근원’으로서의 ‘에어-아이크니스(Er-eignis)’를 일컫는다.35) 만일 ‘있음’과 ‘있는 것’이 이 ‘사이의 영역’ 속에서 “각기 저마다의 방식으로 ‘갈라-놓임’에서부터 나타난다면,”36) 있음이 ‘있는 것’으로부터 갈라놓이는 방식과 ‘있는 것’이 있음으로부터 갈라놓이는 방식은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만일 이때 있음과 ‘있는 것’이 또한 서로의 멂을 멀리하는 방식으로 즉 서로 가까워지는 방식으로도 나타나야만 한다면,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있음과 ‘있는 것’이 ‘서로 갈라놓인 것’으로서 나타남과 동시에 ‘서로 함께 속하는 가까운 것’으로서 나타난다면, 우리는 도대체 이때의 ‘갈라-놓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있는 것’과 있음의 가까움과 멂을 “있음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있는 것의 있음을 일컫고……있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있음의 있는 것을 일컫는다”고 말한다.37)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의 소유격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하이데거의 이 말이 뜻하는 바를 풀이해 봄으로써 “존재론적 갈라-놓기”의 “본질 유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있음은 있는 것의 있음이다”에서의 ‘있음’은, ‘있음’이 ‘있는 것’ 없이는 불가능한 한, 그 자신(있음)으로서 있어 오기 위해, ‘있는 것’에게로 끌리는,38) 즉 ‘있는 것’에게로 관여해 가는, 다시 말해, ‘있는 것’에게로 넘어가는 ‘있음’을 말한다. 물론 있음은, 그것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가기 위해, 넘어가기에 앞서 먼저 ‘있는 것’으로부터 떠나 있어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있는 것’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이미 ‘있음’이 앞서 도달해 있다.39) 있음은, 그것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에만, ‘있는 것’으로부터 캐내질 수도 있고, 또 ‘있는 것’으로부터 빠져 나갈 수도 있다. 있음은, 우리가 이리저리 눈을 돌릴 때,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와 ‘있는 것들’보다 더 먼저 단일하게 밝혀져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있는 것들’의 있음은, 우리들이 그것들에게로 눈길을 돌리기도 전에 우리들에게 앞서 열려져 있다. 아니 있음은, ‘있는 것’이 그 자리에 없을 때에도 발견된다.40) 있음은, 우리가 그리로 향하는 모든 곳에서 순간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그리로 향하기에 앞서서 우리에게 트여 있다. 우리의 그리로 향함은, 이런 의미에서, 있음에 의한 끌림의 결과이다. 물론 있음은 그것의 ‘빠져 나감’을 통해서도 우리를 끌 수 있다. 이렇게 어떻게든 우리들의 눈길이 닿을 수 있는 ‘모든 있는 것 그 자체’에는 이미 그리고 앞서 저 ‘단일한 있음’이 넘어와 있다.


반면 ‘있는 것’은 ‘있음’의 이러한 넘어옴을 통해 우리들에게 비로소 나타난다. 물론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에게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했을 수 있고, 또 그것은, 그것이 우리들에게서 잊혀진 뒤에도 여전히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있는 것’은, ‘있음’이 그것(있는 것) 자체에게로 넘어오지 않는 한, 그래서 그것(있는 것)이 ‘있음’ 속에 간직되어 머물지 못하는 한, 우리들에게는 결코 ‘있는 것’으로서 나타날 수 없다.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은, 있음의 넘어옴을 통해, “그것(있는 것) 자체로부터 비은폐된 것”으로서 다가온 것이다.41) “비은폐된다”는 것은 “은폐로부터의 드러남”을 말한다. ‘있는 것’이 비은폐된다는 것은 그것이 ‘있음’의 비은폐성 속에 도달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있는 것’이, 있음의 비은폐성 속으로 다다른다는 것은 ‘있는 것’이 있음의 비은폐성 속에 간직된다는 것, 즉 “비은폐성의 열린 영역” 속으로 “들어와 그 속에 머무른다는 것”42)을 말한다.


‘있음’의, ‘있는 것’에게로의 넘어옴은 ‘있는 것’의 창조 또는 제작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있는 것’의, ‘있음’의 비은폐성 속으로의 다다름은 또한 있음의 창작 내지 산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넘어옴’과 ‘다다름’은 각기의 “비은폐성(진리)”의 양식을 말한다. 있음의 넘어옴은 있음이 자기 자신을 탈은폐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숨겨진 상태로부터 빼내는 것, 말하자면, 숨겨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때 있음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있음은 자신을 숨긴 채 그 숨김을 벗어버린다. 있음은 심연의 어둠으로부터 솟아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있음은 저 어둠 속에 여전히 자신을 숨긴다. 있음은 그 곳에 간직되어 인간의 어떠한 공격으로부터도 거리를 취하고 있다. 반면 ‘있는 것’의 다다름은 있는 것이, 그때마다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는 즉 탈은폐하는 있음 속으로 안전하게 피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으로부터의 안전을 말하는가? 저 있음마저도 빨아들이는 무의 심연으로부터. ‘있는 것’은, 그것이 ‘있는 것’으로서 계속해서 가능하려면,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는 없음의 손아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쳐야만 한다. 있음의 비은폐성의 열린 영역은 바로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이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피난처인 셈이다.


우리는 “있는 것의 있음”과 “있음의 있는 것”을, 하이데거를 따라. “있음의, ‘있는 것’에게로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있음의 비은폐성 속으로의 다다름”으로서 풀이하였다. 이러한 풀이를 통해 우리는 “있는 것과 있음”의 “서로-갈라-놓이면서 동시에 서로-함께-속하는 됨됨이”를 보았다. 그렇다면 “갈라-놓임”과 “함께-속함”의 “단일성” 즉 “사이”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그곳이 바로 “존재론적 갈라-놓기”가 비롯되어 나온 “본질 유래”는 아닌가? 그런데 저 “사이”는, 그것이 “가름과 함께함”을 동시에 가능케 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능케 해야 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됨됨이를 가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넘어옴과 다다름’이 서로 뒤엉켜 서로의 방식으로 관계하는 전체 영역의 얼개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43) 우리는 이 얼개의 ‘짜임-새’를 어떻게 밝혀 낼 수 있는가? 그것은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있음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온다는 것은 ‘있음’이 “자신을 ‘있는 것’ 속으로 탈은폐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탈은폐(Entbergen)”를, “어떤 것을 그것의 숨김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함” 또는 “숨김의 덮개를 벗음” 즉 “숨김으로부터의 나타남 내지 솟아오름”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있음’의 탈은폐는 결코 ‘있음의 은폐’의 완전한 제거를 뜻하지 않는다. 그렇기커녕 있음의 탈은폐는 오히려 저 은폐의 손아귀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은폐로부터의 끊임없는 탈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은폐”는 “숨김”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숨음’은, ‘자기가 자신을 숨기는 것’으로서, ‘피함’ 즉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머무름’을 뜻한다. 그렇다면 “탈-은폐”는 “숨김-벗기기”로서 이해될 수 있다. “벗다”는, “벗-”의 낱말뜻에 따르자면, “불타 오르게 하다” 즉 “불빛을 내다”이다. 이러한 뜻매김에서의 “숨김-벗기기”는 “숨김을 불태우다”, “숨김을 태워 빛을 내다”로서 뜻새겨질 수 있다. “숨김[의]-벗김”은, ‘숨김’이 — 이때 이것은 벗김 즉 불태움의 연료인 셈이다 — 지속되는 한에서만, 즉 ‘숨김’이, 땅 속의 나무뿌리처럼, 속속들이 우거지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숨[김]-벗김”을 “탈-은폐”에 대한 갈말로 쓰고자 한다. 있음의 넘어옴은 있음의 ‘자기-숨-벗김’을 뜻한다. 그렇다면 있음의 넘어옴은 동시에 있음의 숨음이다. 즉 있음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올 수 있으려면, 그것은 자신의 검질긴 ‘숨음에로의 경향’을 뿌리쳐야만 한다.


반면 ‘있는 것’의 다다름은 ‘있는 것’이 자신을, ‘있음의 숨겨지지 않음’ 속으로 숨긴다는 것을 말한다. ‘있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넘어온 있음’ 속으로 숨어든다. ‘있는 것’은, 그것이 ‘있는 것’으로서 지속할 수 있으려면, ‘있음’의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있는 것’이 ‘있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다. 모든 있는 것은 저마다 나름의 ‘있음의 때’를 갖는다. ‘있는 것’은 그 때가 지나면, ‘있음’의 손에서 ‘없음’에게로 넘겨진다. ‘있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저마다에게 주어진 ‘있음의 때의 동안’만을 머무를 수 있다. ‘있는 것’은 “저마다의 때를 머무르는 것”이다.44) 다다름으로서의 숨김은 ‘없음의 지배’로부터 도피하여 ‘머무름의 때를 이어감’이다.


있음의 ‘숨-벗기면서 넘어옴’과 ‘있는 것’의 ‘숨기면서 다다름’은 이러한 ‘숨-벗김’과 ‘숨김’이 일어날 때에만 가능하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일어남’을 독일낱말 “아우스-트락(Austrag)”으로써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 낱말이 가리키는 곳이 바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이 낱말에 대한 우리말 옮김말 “내어-나름”의 의미를 되새김해 본 뒤 그것에 대한 새로운 새김말을 제시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 글의 목적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아우스-트락”에 대한, 가장 널리 쓰이는 번역어는 “내어-나름”이다. 그것은, ‘있음’과 ‘있는 것’을 서로로부터 서로에게로 내어서 나른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내다”는 아마도 “밖으로 나가게 하다”의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어-나름”은 “밖으로 나름”이 된다. “내어-나름”이라는 낱말이 지시하는 방향성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숨-벗기는 넘어옴과 자신을 숨기는 다다름의 내어-나름”이라는 말은 넘어옴과 다다름을 서로의 “안쪽”으로부터 서로의 “바깥으로” 나른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런데 ‘넘어옴’이 언제나 ‘있는 것에게로의 넘어옴’이고, ‘다다름’은 언제나 ‘있음에게로의 다다름’이라면, 즉 넘어옴과 다다름이 ‘동일한 것’의 영역에 함께 속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저 “안쪽”과 “바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내어-나름”을 이러한 의미로 쓰고자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번역어는 우리들의 이해와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또 “내어-나름”은, 그것이 비록 넘어옴과 다다름의 연관의 관계를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 관계의 지속성 내지 관통성 즉 역사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 같다. 즉 “밖으로 나름”으로서의 “내어-나름”은 서양 형이상학의 “처음(시원)부터 그 끝(완성)까지 나름”이라는, ‘있음의 보내져 옴(존재 역운)’의 역사성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무엇보다도 “밖으로-나름”으로서의 “내어-나름”은, ‘있음의 탈-은폐하는 넘어옴’에서 일어나는 은폐 즉 숨김의 사건을 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있는 것의 자기를 숨기는 다다름’에서 일어나는 숨김의 사건 또한 놓치기 쉽다.


‘있음과 있는 것’의 ‘사이-나뉨’ 즉 ‘갈라-놓임’은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어느 때는 나타났다가, 어느 때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첫머리부터 그 끝마침까지(vom Anfang bis zur Vollendung)를 두루 꿰뚫고 있는 것, 아니 형이상학 자체 즉 ‘자연-너머-학(메타-피직)’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자연-학’과, 그것을 넘어서는 ‘자연-너머-학’이 가능하려면, 그 두 학문의 대상이 서로 달라야 할 것이다. 아니 두 대상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 두 대상 사이에 어떤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은 “자연에 대한 학문”에서 그리고 다른 대상은 “자연-너머에 대한 학문”에서 탐구될 수 있었다. 두 학문 사이의 연관 관계를 말해 주는 말이 바로 “너머”이다. ‘자연-학’과 ‘자연-너머-학’의 ‘사이’는 ‘이쪽’과 ‘이쪽-너머’로 갈라놓인다. 서양의 ‘자연-너머-학(형이상-학)’은 바로 이러한 ‘갈림’ 내지 ‘갈라-놓임’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갈라-놓임”의 “본질 유래”로서 명명된 “아우스-트락”을, “내어-나름”을 뒤집어 새긴 말 즉 “날라-냄”으로서 옮기고자 한다. 이러한 낱말의 자리바꿈을 통해 우리는 사태를 보다 정확히 보이게 해 줄 수 있다. 우선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조동사로서의 “-내다”이다. 이것은 “밖으로 가져가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가져가다”를 뜻한다. 따라서 “날라-냄”은, 그 나름의 방향이 정해져 있는 한, 그 방향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나름”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우리는 “날라-냄”의 뜻하는 바를 밝히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 것이다.


‘있음’이 자신을 ‘있는 것’에게로 숨-벗기면서(탈은폐하면서) 넘어올 때, ‘있는 것’은 자신을 ‘있음’의 ‘숨겨지지 않음’ 속으로 숨기면서 다다른다. 서양의 ‘자연-너머-학(메타-피직)’의 역사 속에서 ‘있음’은, 하이데거를 따르자면, “피지스, 로고스, 헨, 이데아, 에네르게이아…주체성…힘에의 의지…” 등으로서 넘어왔다.45) 이 낱말들은 모두 ‘있음의 낱말’이다. 예컨대 만일 ‘있음’이 로고스 즉 바탕으로서 넘어왔다면, ‘있는 것’은, 그것이 ‘있는 것’으로 자신을 내보일 수 있기 위해, 그 바탕 속으로 자신을 숨겨며 다다라야만, 즉 그 바탕에 걸맞는 모습을 갖춰야만 할 것이고, ‘있는 것’이 이렇게 자신을 바탕으로서의 ‘있음’ 속으로만 숨기며 나타나게 되면, ‘있는 것’은 다시금 그 자신의 측면에서 ‘있음’에게 자신(있는 것)의 바탕으로서만 나타나도록 요구하게 된다. 바탕으로서 넘어온 있음은 ‘바탕지워져 있는 것’만을 ‘있는 것’으로서 허용하고, 이러한 ‘있는 것’은 그것의 측면에서 다시금 ‘바탕지우는 있음’만을 ‘있음’으로서 받아들인다.46)  이렇게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은 “서로 교대의 방식으로 서로 안에 반영되어 나타난다.”47) ‘있음과 있는 것’의 ‘갈라-놓기’는 넘어옴과 다다름의 ‘서로 반영됨’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영됨은 넘어옴과 다다름이 서로를 중심으로 맴을 도는 것과 같다.


그런데 위에서 뽑아온 ‘있음의 낱말들’은, 그것들이 그 당시의 시대에서 일어난 있음의 넘어옴을 규정함으로써, 동시에 ‘있는 것’의 다다름 또한 앞서 한계지우고 있다. 즉 저 있음의 낱말들은 자체 속에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각각의 낱말들은, 그것들에 상응하는 각 시대 속에서,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의 갈라-놓임의 방식을 건립하는 것들이다. 저 낱말들은 넘어옴과 다다름의 역사, 다시 말해, 있음의 역사를 말해 준다. ‘있음’의 역사가 가능하려면, 있음의 넘어옴이 시대마다 달라야 하고, 그러한 다름에 대한 시대마다의 다른 ‘새김-낱말들’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낱말들의 역사적 순서가 ‘있음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낱말들을 통해 각기 다르게 새김된 ‘있음’이 사실은 ‘동일한 있음’이어야 한다. ‘있음’이 비록 시대마다 다르게 넘어오고 또 다르게 새김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있음의 동일성 속에는 다양성 내지 차이성 즉 ‘갈라-놓임’이 속해야 한다. ‘동일한 있음 그 자체’는 ‘자신’을 시대마다 다르게 숨-벗기며(탈은폐하며) ‘있는 것’에게로 넘어오고, ‘있는 것’은 그러한 넘어옴에 상응하여 다다른다. 이러한 넘어옴과 다다름은 ‘자연-너머-학(메타-피직)’의 전 역사 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는, 위에서 말해진, 넘어옴과 다다름의 역사적 맴돌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넘어옴과 다다름의 ‘날라-냄’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날라-냄’을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론적 갈라-놓기”의 본질 유래라고 말할 수 있다.48)


넘어옴에서도 ‘있음과 있는 것’의 “갈라-놓임과 함께-속함”의 사건이 일어나고, 다다름에서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난다. 즉 넘어옴과 다다름은 결코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건으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날라내진다. 누구에 의해? 사태 자체에 의해, 그리고 이 사태 자체가 언제나 ‘생각함(사유)’의 사태인 한, ‘생각함’에 의해. 생각함은 넘어옴과 다다름을 그 처음으로부터 끝마침까지 날라내는 것이다.






끝맺기






‘날라-내기’는 있음이 ‘있는 것’에게로 넘어올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자, ‘있는 것’을 있음 속으로 다다르게 해 주는 것이다. ‘날라-내기’는 넘어옴과 다가옴을, 각기의 방향성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날라-줌’이다. 이때 넘어옴과 다가옴은 마치 번갈아 맴돌듯이 관계맺으므로 ‘날라-내기’는 넘어옴과 다가옴의 ‘갈마-날라-냄’이라 할 수 있다. 있음은 ‘있는 것’에게로의 넘어옴을 통해 소실되거나 줄어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있음의 심연’을 다 길어내지도, 아니 그 속을 다 들여다 볼 수도 없기 때문에도 알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양의 ‘자연-너머-학(메타-피직)’에서처럼,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을 날라-내는 한, 있음의 역사적 넘어옴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넘어옴과 다다름’의 역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예감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다다름’을 날라내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에는 어디에서나 오직 ‘있는 것’만이 그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넘어온 ‘있음’은 어떠한 방식으로 또 어떠한 낱말로써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오늘날의 ‘있음’은, ‘있는 것’만이 외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세계 한가운데서 침묵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 있음의 부름은 ‘있는 것’의 외침이 잦아들 때에만 들리지 않겠는가? ‘있음’이 떠나버리고 침묵하는 그곳에서 ‘있는 것’은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아마도 오늘날 급부상하고 있는 가상의 현실만이, 그것도 인간의 욕망의 극대화를 위해 마음대로 꾸며진 모사품들만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서 있음의 넘어옴과 ‘있는 것’의 ‘날라-내기’는 어떠한 사정에 처해 있는가? 이 문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생각하미(생각하는 사람)의 문제거리가 아닐 수 없다.



[펌] 하이데거 존재물음

 

하이데거의 존재물음  ★ ★ ★ ★ ★


[존재와 시간]의 철학적 물음으로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


하이데거는 포스트모더니즘, 언어철학, 과학이론, 신학, 문학, 심리학, 현상학, 과학이론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로서 사상적 길목이다. 그의 존지물음이란 존재의 의미에대한 물음이다.  그는 왜 존재의미에 대해서 묻는 것을 시대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을까. 모든 역사적 시대는 특정한 존재이해를 즉, 존재의 의미에대한 특정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존재자는 존재한다.’는 신의 피조물로써 존재한다이다. 이러한 존재이해는 그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등 삶 전체를 궁극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한 시대를 극복하고자 할 경우 그 시대를 지배하는 존재이해와 대결은 필수적이다. 그가 보기에 현대를 규정하는 존재이해는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시대,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주체로 여기지만 사실 인간 개개인 역시 사회적인 기능연관 체계에 의해서 닦달당하는 에너지의 결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구체적인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인간을 계산 가능한 노동력으로 이용하면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지배를 확보해가는 맹목적이고 추상적인 기능연관 체계이다. 니힐리즘의 도래인것이다. 글에게는 현시대 허무주의 극복을 위해 정치 사회적인 변혁이전에 인간들의 존재이해가 바뀌어야만 새로운 존재이해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존엄성을 다시 의식함으로써 시대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존의 존재이해를 극단적으로 밀고온 전통형이상학과 대결은 피할 수 없다.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론적 고찰의 대상으로서 눈 앞에 존재한다를 의미하며 이는 하나의 특정한 시간적 의미, 지속적으로 현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존재는 지속적으로 현전하기에 인간이 항상 이론적으로 고찰의 대상이 됨에 따라 오늘날 과학과 함께 존재이해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온 것이 에너지의 결합체로 보는 현대의 과학 기술적 존재이해라고 그는 보고있다. 그는 기존의 철학이 자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존재 즉 그 존재가 인간이 언제라도 이론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지속적으로 현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인간은 존재를 망각하고 있음에도 존재는 인간에게 항상 가까이 있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인간에게서 특정된 어떤 것에서 얻어질 수 없으며 존재자 전체에서 찾아져야 한다. 존재물음은 인간이 이미 불명료하게나마 존재이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촉발하며 존재의 본래적 근원적 의미에대한 물음을 인간 현존재 분석을 실마리로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현존재 분석을 인간의 삶 자체, 생활세계로부터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의 목표는 사실적 삶에대한 해석학이다.(인간의 존재이해가 생활세계에서 해석될 수 있는지 시도)


현존재의 실존성


인간은 사물과 달리 자신의 존재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우선 인간은 비 본래적 방식으로 삶을 살며 잡담과 호기심은 말초적 의미에만 부여할 뿐 인간의 삶에 깊이와 전체성이 결여되어 전체적인 깊이 파악이 되지 않는다. 이 경우 사태와 나는 깊이있는 관계를 맺지못하고 나의 관심은 더욱 자극적인 다른 사태로 옮아가며 의미없는 삶을 살게된다.


(탕자 비유: 맹숭한 일상적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아우-방황/삶의 의미를 찾아나섬-신기하게도 인간은 자극적이고 무의미한 삶 속에서 역설적으로 존재의미를 깨닫게된다. 탕자의 비유는 의미를 찾고자 갈구하지 않는 형보다 체험을 통한 의미를 찾은 동생이 오히려 삶의 모범이다-이 때문에 아버지는 기쁜나머지 그에게 값진 것들을 제공한다)


잡담과 호기심은 타자와 사태에대한 진정한 이해나 관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심층에서 자신의 삶이 깊이와 전체성을 갖게되기를 갈구한다. 이는 인간은 이미 깊이와 동일성을 갖춘 삶의 방식에 대해 불명료하게나마 무의식적으로라도 존재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호기심, 잡담, 애매성으로 관철된 현재적 삶에 공허감, 권태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자신에게 찾아온 이 권태, 공허가 자신의 비 본래적인 삶에 기원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이 것과 대결을 회피하며 흥밋거리를 찾아 공허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삶에 회의를 품고 본래적 존재방식을 희구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가능성을 자신의 본질로 갖는 존재이다.


(토마스의 본질(essence)과 실존에 있어서 본질 역시 삶 속에서 실현 되어야만 하는 과제)


이것은 인간에게 단순히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실현해야하는 과제로 부과되어 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토마스적 본질과 본성) 문제삼는 것에 주목하면서 이것을 실존(esistentia)이라 한다. 그가 실존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은 세계 낸 존재로서 항상 다른 인간,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본래적 존재방식이라는 자신과의 관계뿐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진정한 관계 방식을 의미한다. (생활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


(하이데거를 본류로하는 이하 모든 조류는 존재를 언어로 파악한다. 이 언어마저도 분석철학에서 명제비판으로 이어지나, 후기에서는 다양한 언어게임을 인정하면서 나름의 다양성의 영역이 조율되기에 이른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라는 말은 인간은 본시 비 본래적 삶을 비판하고 본래적 삶을 추구하는 존재자라는 의미이다. 이유는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에게 자신과 존재자 전체의 고유한 존재가 이미 개시되어있다. 이것을 현존재(dasein)이라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은 현존재에 자신과 세계의 존재가 열려있다는(aletheia)사실에 기인한다.


세계내 존재로서의 현존재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되 하나의 특정한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다. 존재는 이미 세계안에 존재한다.(여기서 후기 비트켄과 공유점, 특정 지역의 생활세계에서 드러나는 언어게임이 세계를 드러냄) 그는 세계의 구조를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도구적 세계를 실마리로 하여 분석한다. 일상적 삶에서 존재자는 현존재의 목적 실현에 있어서(토마스의 목적, 수단)우선 도구로 드러난다. 존재자가 도구로 드러날 경우, 그 존재자의 용도성은 지시연관으로 이어지며, 세계는 총체적 지시연관으로서 파악되며 이 지시연관의 끝에는 현존재의 관심이 있다. 예를들어 장도리의 존재성은 못을 박기위한 도구성(용도성)에 있다. 그러나 이 존재자가 현존재의 목적 실현에 따라 당장 사용되지 않는다면, 즉 지시 연관을 갖지 않는다면 그의 존재는 무이며 단순한 물성에만 머문다. 현존재의 목적에 따라 다른 존재자와 지시 연관을 갖는다면 그 존재자는 현존재의 목적 연관의 전체 속에서 비로소 그 장도리의 존재는 의미를 가진다. 현존재 역시 생활세계 속에서, 지시 연관 속에서 존재의미를 가지는데………………………….어떻게 자신의 존재의미가 지시 연관과 연결되는지…


(구체적 생활 세계속의 총체적 지시 연관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현존재는 이후 체계이론과 연관된다.. 사회적 체계에서 인간 규정)


모든 도구적 존재자는 이런 목적 연관의 전체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가지며 이런 목적 연관의 체계 내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어떤 존재자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런 목적 연관의 전체가 인간이 어떤 특정 존재자를 사용하기 이전에도 이미 개시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목적 연관의 전체가 바로 세계이다.


이런 전체성으로써 세계는 존재자가 드러내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세계 내에 드러나는 존재자보다 앞서서(apriori)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세계는 존재자의 개시를 위해서 apriori하게 개시되어 있다. 따라서 세계는 존재자가 드러나기 위한 지평이다.


존재자에 대한 관계가 가능하기위해서 현존재는 이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현존재가 우선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고 그 다음에 존재자에 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시간적 선후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즉 세계는 존재자와 같이 현존재가 마주하는 대상이 아닌 것이며 세계에 대한 이해란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구체적인 관계 안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목적 연관의 전체로서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현존재의 관심을 지시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현존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능성. 자신의 진정한 자기외의 것이 아니다.


사물은 현존재의 관심에 의거해서만 존재의미를 가지나 현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문제 삼기 때문이다.


세계는 현존재의 구체적인 실존 수행 없이 대상과 같이 개념파악 또는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자기 실현을 위해서 그리고 현존재의 자기 실현을 통해서 하나의 목적 연관의 전체를 건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존 수행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와 현존재의 共屬관계세계 내 존재라는 말로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본래적으로 실존하느냐, 비 본래적으로 실존하느냐에 따라 세계도 비, 본래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전통철학, 데카르트는 인간과 세계가 각각 고립된 채로 존재하며 이 양자사이의매개가 철학적 문제로 제기되었다면 여기에서는 현존재와 세계가 공속관계에서 파악됨으로써 인간과 세계를 상호 분리된 실체로보는 전통적인 파악 방식이 극복되는 것이다.


세계의 본래적 개현과 죽음/ 궁극적으로 진정한 세계는?


현존재의 본래적 세계라는 진정한 자기 발견과 세계의 근원적인 개시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인가? 그는 현존재를 세계 내 존재로 부르고 여타 존재자들을 내세계적 존재자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본래적 가능성은 세계의 목적 연관의 전체 내에서는 개시될 수 없다. 현존재의 궁극 목적으로서 진정한 실존 가능성을 세계 안에서 발견할 수 없다면 어디에서 개시되는가? 그것은 비 본래적 세계 내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그리고 내면으로 귀환을 가능케하는 것으로서 죽음으로의 선구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다.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죽음은 타자에의해 대신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유일한 나의 죽음이다. 죽음의 경험은 각자의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묘사를 통해 타자에게 전달할 수 없다. 죽음의 경험을 통해 외부의 낯선 규정들은 나에게 의미를 상실하며 비 본래적인 존재 방식에서 나를 규정해 왔던 모든 가능성들의 허망함을 드러내고 그것들을 로 떨어뜨린다. 이를 통해 나에게 절대적으로 고유한 것이 비로소 드러난다. 죽음의 경험은 현존재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 직면하는 것이다. 죽음은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서 현존재를 단적으로 정초하는 근거이며 현존재 최고의 심급이다.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죽음에 앞서 달려감을 통해 현존재의 궁극 목적으로서의 진정한 자기, 진정한 세계가 개시되는 것이다.


(앞에서는 세계와 현존재가 공속관계로서 전통철학의 분리를 극복했다면, 죽음을 통해서는 진정한 세계의 통일성을 구현, 발견하게됨)


죽음을 향한 선구를 통한 현존재의 가장 개체적 실존적 결단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지평으로서의 세계가 열린다. 여기는 자신의 세계 도피와 침잠이 아니라 진정한 세계의 건립을 의미한다.(예수처럼) 현존재가 이렇게 진정한 방식으로 존재할 경우 존재자 전체는 현존재에게 전혀 다르게 개시되며 현존재는 세계 내 존재로서 내세계적인 존재자 전체에대해서 전과는 전혀다른 태도를 취하게된다.


죽음과 세계 내 존재의 퇴락, 불안


그러나 대부분 세계는 현존재에게는 결단없이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현존재는 자신이 세계를 건립하는 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죽음에 적극적으로 선구함으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자신으로부터 기투하지 않고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인 죽음으로부터 도피한다. 이 경우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의 재앙으로 나타난다. 비 본래적 자기는 단지 사물의 의미를 가지므로 여기서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의 의미를 가지며,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젊잖아’라고 안심한다. 그러나 이런 생물학적 죽음은 인간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단지 일시적 슬픔만 있을 뿐…, 과학은 그마저도 죽음을 통제하려고 한다.


죽음이란 본래적 자기가 될 수 있는 근원적 가능성이며, 결과적으로 집착과 예속에서 자신의 해방을 의미한다.


본래적이고 심원한 의미의 가능성인 죽음이 대부분 은폐되지만 그것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 내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항상 죽음에 내던져있는 존재다. 죽음은 우리에게 불안이라는 현존재의 근본 기분을 통해 자신을 고지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술먹다가도 문득, 길가다가도 특정 기분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기분 중 우리의 실존과 그 안에서 사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기분을 그는 근본 기분이라 한다.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의 엄습은 일상 세계를 전혀 낯설게 한다. 기존의 친숙했던 것들은 의미를 상실한다. 여기에서 죽음과 대면하게 된다. 죽음의 경험이란 인간이 항상 이미 죽음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그런 사실을 한낮 객관적인 사실로 단순히 머리로써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 방식이 전적으로 뒤바뀌는 것을 의미한다.(탕자의 체험, 나의 체험)


현존재가 어떤 사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존 전체의 기투를 포함하는 것이다. 실존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이해는 피상에만 머무르는 이해이며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어떤 예술 작품의 이해는 머리로서 이해가 아니라 실존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해석학/딜타이의 역사적 존재를 이어받는 실존적 차원에서) 근본 기분이란 우리의 실존 전체를 규정하는 사건인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이해란 이런 의미에서 구분지어진 이해이다.


인간이 죽음에 던져졌다는 사실의 이해는 즉 불안이란 근본기분 안에서 가능하게되며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죽음의 이해만이 이해하기 전의 존재보다 근본적인 도약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는 불안이 대두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가능성들에 집착함으로서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역시 불안은 제거될 수 없는데 이것이 일상적인 가능성들에 대한 공포로 변형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공포의 대상은 인간에게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객체로서 나타나는데 죽음마저도 어떤 비밀에 찬 사건이 아니라 생물학적 의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공포는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이 세계는 인간의 과학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는 비본래적인 실존 양식에서 불안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을 통해 고지되는 죽음은 대상화가능한 것이 아니면서도 우리를 자신앞에 직면케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존재자가 아닌 無이다.


객관화가 불가능한 비밀로서 무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여 인간의 지배와 향유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태도에서(동일성 사고)는, 인간의 대상화 기도로부터 항상 벗어나 있으면서도 인간에게 언젠가는 대상화되어야 할 이념으로 나타난다. 대상화될 수 없는 것을 대상화하여 언젠가는 지배대상으로 삼으려는 태도는 언제나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된다.


이에반해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안에서는 죽음 내지 무는 우리의 대상화를 통해 지배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실존 방식을 바꾸면서 세계를 달리 드러내는 근원으로서 드러난다. 우리는 그것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그것의 힘에 우리를 내맡겨야만 하는 것이다.




현존재의 단독자화와 세계의 개현 그리고 현존재의 존재의미로서의 시간성


불안을 인수하면서 본래적 자기의 세계에 직면하는데 이때 현존재는 단독자(주객구조가 사라닌 통일성)가 된다. 이런 단독자화는 자신으로 도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독자화는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 자기를 발견하는 사건일 뿐이다. 이런 자기 즉 본래성이란 타인과 구별된 고립된 나가 아니라, 너에대한 나의 관계와 우리에대한 나의 관계, 너희에대한 우리의 관계가 근거하는 현-존재(Da-sein)이다. 대문자


이런 관계들은 오직 현-존재로부터만 수행될 수 있다. 새롭게 드러나는 이런 가능성들은 그 어느것에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죽음, 즉 무로부터 길러지는 것이므로 창조적인 가능성들이다. 죽음에로의 길은 일상적인 나와 비본래적 세계의 죽음으로부터 나와 세계의 근원적 개시를 향한 길이다. 현존재가 죽음으로부터 선구하면서 근본 가능성들을 개현할 때만, 세계는 보다 순수하고 근원적으로 개현될 것이다. 단독자화는 현존재의 궁극목표와 아울러 전체적인 세계가 열리기위한 근거이다.


죽음에로의 선구는 이제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시간성의 지평에서 드러내는 데 있어서 결정적 단서역할을 한다(「존재와 시간」,329,426) 죽음에로의 선구하는 결단은(과정은)현존재가 자신의 장래의 가능성(미래),즉 진정한 자기로 선구하면서 자신이 이미 던져져있는 자신의 처지와 가능성들을(과거)인수하고 새로운 빛 아래에서 현존재는 현재를, 즉 현존재들(타인)과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사물)이 자신들의 본질에 있어서 개시되는 상황을 연다. 그리고 현존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이해하고 존재자를 만나는 지평인 이 현재는 유한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현재는 죽음으로의 선구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수학적인 한 점이 아니고 현존재의 유한성을 통해서 절박성을 갖게되는 그때그때마다의 결단의 시간이다.(나뿐아니라 사물이 다시 개시된다는 것은 물화이론과)


그러나 죽음이 우리를 현존재의 유한성에 직면케하여 궁지에 몰아넘으로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있고 개인이 죽어도 생은 계속된다는 소위 기독교적 무한한 시간으로 도피한다. 이는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즉 현존재의 퇴락의 소산이다. 이 경우 현존재의 존재, 즉 그의 시간성은 무한한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죽음의 선구가능성과 본래적 자기의 개현이 불가능한)


현존재의 존재의미가 시간성이라 함은 우선 대부분의경우는 은폐되어있고 망각되어있는 현존재의 본래적인 삶이 시간적인 구조를 갖는다는 것, 즉 매순간 순간을 근원적 무 내지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하여 자신이 이미 처해있는 과거를 인수하면서 현재를 창조적으로 형성하는 삶이라는 것을 의미한다.(순간 순간, 죽을 때마다 그때마다 이미 처해있는 비 본래적 자기를 새롭게 열어가기에, 시간성은 그만큼 현존재의 유한성의 구조에 기인한다.)


존재물음과 시간 그리고 전통 형이상학의 파괴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이렇게 존재 전체 내지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의 궁극적 근거를 현존재의 시간성, 즉 궁극적 심연으로서의 죽음에 관계할 수 있는 현존재의 고유한 본질에서 찾았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현존재 분석론에서는 따라서 인간이라는 특정한 존재자의 존재와 그것의 소여방식이 문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전체인 세계가 구성되는 곳인 존재자의 존재양식이 문제되고 있다. 현존재의 본래적인 시간성으로부터 전체로서의 존재인 세계가 기투된다. 따라서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의 망각은 존재일반을 가능케하는 근원적 시간성의 망각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존재의미를 묻는다고 할 경우,  존재가 눈앞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근저에 이미 놓여있는 어떤 존재의 상주함, 지속적인 현재라는 전통형이상학의 존재관을 비판하는 것이며 희랍의 존재규정들이 시간의 성격을 은폐된 형태로 갖고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근원적인 시간이 모든 존재이해와 존재해석의 지평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에대한 물음은 시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다. 종래의 존재론에서 존재에 대해 물을 경우 그것은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존재의 시간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서 근원적인 세계를 개시하지 않고 눈 앞에 존재하는 내 세계적인 존재자들에 매몰되어있는 현존재의 퇴락에 원인이 있었다. 다시말해 전통형이상학은 퇴락한 존재 방식에 빠져 있음으로써 인간의 존재구조에 대한 물음을 진정하게 제기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존재물음도 제기할 수 없었다.


이에대해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시간성으로부터 전통적인 존재론의 존재경험의 배후에 망각된 채로 존재하는 저 시간을 사유하려고 한다.


전통형이상학이 지속적인 현재라는 의미로 생각한 현재는 「존재와 시간」의 분석에 따르면 장래와 과거라는 계기들을 통해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더 이상 현재라는 시간 양상에만 지향하지 않고 시간의 삼차원, 특히 죽음으로의 선구로서의 ‘장래’에 지향하는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려고 한다.


<따라서 전통형이상학의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라는 지속적인 현전과 이론적 고찰의 대상에서 ‘존재가 존재 또는 현전하고 있다‘는 사태의 의미를 인간의 모든 이론적 실천적 장악시도로부터 벗어나 있는 죽음, 다시말해 비밀에 찬 무로부터 이해하고 있다.> ★★★★★


즉 존재자가 “존재하고 있다 내지 현전하고 있다”는 사태는 존재자가 죽음, 내지 근원적인 은닉으로부터 개현된다는 것으로서, 다시말해 ‘비은닉되어 있다’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존재자가 ‘눈 앞에 존재한다’는 전통형이상학적 존재 의미에의해서 그동안 은폐되어 왔던 근원적인 존재의 의미는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는 비밀에 찬로서의 근원적인 은닉으로부터 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존재론의 과제는 이런 근원적인 존재이해로부터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를, 즉 신, 인간, 자연, 역사, 동물, 대지 등의 본질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들을 눈 앞에 존재하는 것으로 대상화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밀에 찬 무로서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인간이 본래적인 실존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보하게 되는 근원적 시간성의 사건을 객관적인 고찰을 토하여 고정하려 할 경우 자신의 본래적의미가 은폐된다. 왜냐하면 현존재의 본래적인 시숙에서 열리는 근원적인 세계에서만 존재자 전체의 존재가 그것의 본질에 있어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으나


현존재의 존재의 은폐와 아울러 이러한 근원적인 세계도 은폐되기 때문이다.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망각이 결국 현존재의 시간성의 망각에서 비롯된다면 이는 결국은 형이상학의 존재망각은 죽음에 대한 망각, 즉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 전체의 근원적이니 존재를 드러내면서 자신은 은닉하는 저 비밀에 찬 무에 대한 망각으로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현존재의 시간성은 이러한 죽음과의 관계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후기사상


후기사상에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형태를 띠게 디며 현존재 역시 그의 철저한 역사성에 있어서 파악된다. 전기 사상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직면하려는 현존재의 결단이란 측면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졌던 반면에, 후기 사상에서는 현존재의 결단과 통제를 벗어난 현존재가 이미 내던져져 있는 역사과정 자체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자신과 존재자 전체의 고유한 존재를 이해하게 되는 사건에서 전기사상에서는 죽음으로 선구하려는 현존재의 결단이 가장 결정적인 계기로 간주되었던 반면에, 후기는 오히려 서구 2000년 역사 안에서 가기 시대마다 자신을 달리 드러내는 존재자 전체의 존재와 이러한 존재가 자신을 현존재에게 드러내는 장으로써의 근본기분이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현존재의 근본기분이란 후기사상에서는 단순히 현존재의 내적인 정조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그때그때마다 자신을 고지하는 통로라는 의미를 갖는다. 근본기분을 의미하는 독일어 Grund-stimmung은 존재의 소리를 의미하는 Seins-stimme로부터 파악된다. 이렇게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근본 기분을 통해서 인간을 엄습하면서 역사적으로 각 시대마다 다르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후기에서 문제가 되는데 이것을 존재사적 사유라 한다.


(존재가 죽음에 근거한 무를 통해서만 자신을 개시한다는 고찰은 개별자 입장에서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이기에, 그 개별자 전체로서의 존재를 총체적으로 조감하기위해서는 개인적으로는 그 개인의 역사전체를 통해서 현현한 총체를 아울러 봐야 완연한 파악이 가능하며 하이데거의 후기에서는 인류역사 전체를 아울러 드러난 존재의 현현에 주목한다. 존재자 전체에대한 하나의 이론을 비판하고자할 때는 존재자 전체로서 즉 역사적 현현까지 볼수 있어야)


개별과학이 존재자의 특정한 영역에 관계하는 반면 철학은 전통적으로 존재자 전체를 문제삼는다. 소위 실증주의라 불리는 사조역시 감각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 감각 가능한 것에대한 언표만을 주장하는 입장조차 존재자 전체에 대한 발언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시간, 공간상에 나타날 수 잇는 존재자만이, 다시말해 감각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존재자만이 인식가능하며 따라서 생각할 수 있으나 감각적으로 경험될 수 없는 존재자의 전체란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규제적 이념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며 존재자 전체에 대해서 인식할 수는 없다는 칸트의 입장도 존재자 전체에 대한 하나의 입론임에 틀림없다.


전체란 우리 눈앞에 세워 둘 수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위의 입론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철학자들의 입론역시 경험(테오리아)에 입각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은 과학적으로 탐구 가능한 감각적 경험은 아니나, 그럼에도 한갓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존재자 전체에 대한 경험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존재자 전체에 대한 경험은 하나하나의 존재자에 대해서 일일이 경험한다는 불가능한 차원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 전체가 각 시대마다 각각 달리 열리는 방식을 경험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하이데거에 따르면 철학이란 각 시대마다 각각 다르게 열리는 존재자 전체의 존재내지 본질을 개념적으로 명확히 해석함으로써 각 시대에 뚜렷한 형태를 부여하고 그 시대를 정초하는 것이다. 이런 존재자 전체의 존재는 현존재를 엄습하는 그때그때마다의 근본기분에 의해서 개시된다. 어떤 시대의 철학이든 철학은 그 시대를 관통하는 근분기분(시대적 배경과 정서…)과 그러한 근본 기분에서 비롯되는 존재이해 또는 존재 경험에 입각해 왔다. 따라서 각 시대에 고유한 근본기분과 존재이해가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정초하는 철학의 성격을 규정하게 된다.


고대철학은(아낙시만더~아리스토텔레스) 순연한 자연의 모습으로서의 퓌지스 체험 곧 빛을 발하면서 자신을 자신의고유한 본질에 있어서 인간에게 열어 보이는 존재자 전체의 조화와 경이라는 근본기분(하이데거)의 체험을 입각하였다. 고대철학이란 경이의 기분 안에서 찬란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자 전체, 즉 퓌지스의 해석이다. 따라서 고대의 존재 해석을(이해) 현대적 근본기분에 입각한 과학의 기준으로 해석, 원시적 비하는 금물이며 그럴 때 고대철학이 갖는 위대성은 간과하는 것이다. 고대가 경이의 기분, 즉 모든 존재자가 경이롭게 존재하는 경험에 입각해 있다면 근대란 그 경이의 상실에서 즉 존재자 전체와의 근원적 유대상실에서 비롯된다. 고대는 경이의 기분에서는 존재자는 그 자체로 자신의 진리를 드러냈고 인간의 인식이란 이런 진리가 발현하게 하는 것 이외의 것이 아니었던 반면, 근대에서는 존재자 전체는 일단은 무 규정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면서 인식은 인간이 자신의 지적인 노력을 통하여 비로소 규정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진리의 장소는 존재자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이 된다. 근대의 근본 경험이란 회의와 의심의 기분에서 열리는 무 규정적이면서도 인간의 노력에 따라 규정 가능한 것으로서의 존재자 전체에 대한 경험이다. 의심이란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어떠한 참된 지반에 서있지 않다는 기분, 그리고 이런 확고한 기반은 인간의 인식 노력에 의해서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는 기분이다.


이러한 기분에서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힘뿐이다. 인간은 이성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어 나가고 이를 통해 자신의 활동 지반을 넓혀나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근대를 규정한다. 근대란 이성의 도야가 주창되는 시대 즉 계몽의 시대이며 이성을 통해 인류의 확실한 안전과 예견 가능한 세계와 충족만이 주효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실은 인간은 도구화됨으로써 인간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도구화됨으로써 계산 가능한 양화 가능한 노동력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근대에서의 주체는 실상, 개별자도 단체로서의 개인도 아닌 인간을 포함한 존재자 전체를 자신의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물화의 체계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자본주의든 이를 비판하는 사회주의든 이 양자가 근재적인 존재개념에 근거하고 있는 한 마찬가지이다. 기술시대란 이렇게 존재자 전체가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시대로서 니힐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위해서는 새로운 존재개념이 열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것은 임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형이상학의 대두 이래 망각된 퓌지스 경험이 근본 기분에 의해 새로 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근본 기분이 하이데거가 경악 내지 불안이라고 부르는 기분이다. 이는 각 존재자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존재자에게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앞에서의 경악의 기분이다. 이런 사실을 이론적으로 확인해보니 오는 경악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은 근본기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경악이란 기분은 우리를 엄습하면서 우리를 시대의 진상 앞에 직면케 하는 것이다. 이런 경악은 존재에 대한 예감이다. 경악이라는 근본 기분을 통하여 존재자에게서 떠나가 버린 존재가 은닉하는 형태로 자신을 고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은닉한 형태로 자신을 고지하는 존재에 현존재가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기분이 바로 경외라는 기분이다.


경악이란 기분이 경외란 기분으로 변전됨으로써 우리는 물화체계의 맹목적인 자기 확장 운동으로부터 결정적인 거리를 취하게되며, 존재자 전체는 그리스인이 보았던 퓌지스로서 자신을 다시 드러낸다.


하이데거 사상의 사상적 과제는 전 후기를 막론하고 서구의 전통형이상학과 근대의 과학기술에 의해 망각된 근원적 존재이해의 정립을 통해서 현대의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것에 있다. 이는 곧 시대와 역사와의 대결이다. 이런 그의 사유도정은 현대의 니히리즘에 대한 후기의 존재사적 고찰에서 하나의 목적지에 이른다. 하이데거는 니힐리즘의 극복이란 우리가 이미 편입되어있는  역사의 필연성으로부터만 오직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근본 기분인 경악 또는 불안  그리고 나아가 존재에 대한 경외라는 근본기분에서 도피하지 않고 투철하게 견디면서(세상에서 도피해버리는 퇴락으로부터) 그 안에서 현재 자신을 고지하고 있는 존재에 응할 때, 니힐리즘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펌] 현대철학

 

칼 맑스


맑스의 초기사상은 양자를 결합한 변증법적 유물론


영향: 헤겔 변증법


      포이허 바흐: 유물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지성도 아니요 인간은 인간이 먹는 바  그것이다. 감가고할동의 실천성이 있음을 통찰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적 활동을 잔지 감각적 욕구 즉 수동적으로 보고 있다 맑스가 이를 보완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창한다. 니체부터 생철학  보면 유물론적이면서 또한 인간의 본질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 요건에 따라 구성되어진다는 구조주의적 입장으로 가고있다. 생철학은 인식론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퓌지스자연주의의 흐름을 가진다.


물론 이 강의에서 고찰하고 잇는 사상들은 철학사적 맥락에서 구조주의적 경향을 살펴보는 것, 그러나 구조주의는 사상사적 계보가 아니라 인류학, 민속학 등 에서 연유하였다.


포이어바흐는 헤겔 좌파로서 인간에 대한 유물론적 시각(자연, 감성, 육체성)의 아이디어를 맑스에게 영향끼쳤다. 니체로부터 유물론적 흐름은 결국 사회 현실 속에 하나로 살고 있는 내 몸의 발견이다. 결국 인간의 본질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속에 존재하는 즉 노동하면서 존재하는 인간, 구조에 의해 영향받는 인간의 발견인 것이다. 사회 구조속에 존재하는 나는 그렇다면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에 대한 관심과 변혁의 길로 나가는 것이다. 이런 인간이라면 한편으로 다양한 문화, 개별 인간의 다양성도 이론적 근거가 된다.


헤겔 변증법과 맑스 변증법의 차이


헤겔 변증법: 핵심은 역사적 변혁을 보는 시각이 자체적 ‘운동(변화)’임을 주목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의 변혁의 주체는 절대정신이다.(모순: 즉 소외는 정신에서)


맑스 변증법: 인간의 본질은 생산활동의 변화 즉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인간은 발전해왔다. 현시대의 인간의 소외극복 역시 노동자의 생산이 주체가 된다.


 노동 소외가 완전 극복되는 공산사회 역시 생산활동을 공동으로 바꿈으로써 이 계기를 통해 소외없는 발전 가져올 것으로 확신하였다.




<맑스는 생산활동의 변화과정을 통해 발전된 것 주목한다.>


* 생산자(노동)- 초기 원시적 생존을 위한 노동


* 생산 수단 등장(도구)- 인간의 노동과정 속에서 생산수단의 발견과 발전 막대기-삽-기계




* 생산력의 발전- 과거엔 인간의 생존, 충족위해 제한적 생산을 하였지만(수공업, 수제품)     오늘날 생산력 발전으로 인간의 충족을 위한 가치를 넘어서 이윤을 위한 대량생산 체제로    넘어갔다.


* 생산관계의 변화- 과거: 이윤보다 생존이 중요 관심사였기에(사용가치를 위해) 공동으로 힘을 모음으로써 생산관계는 뚜렷한 구분이 없었.


현대:공업화후생산력의놀라운발전과더불어생산관계는명확하게  나누임 즉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뚜렷한 gab 즉 계급 발생(교환가 치로) 교환가치로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생산의 결과상품들이인간을지배하면서인간은 소외.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노동을 파는 입장  으로, 자본가는(부르주아지) 관리 통제하는 입장으로 변화


                      (* 이 과정에 자본의 노동 탈피 노력과 그 과정은 주목해야할 부분)


역사발전의 기저를 들여다보면 인간의 생산적 활동의 변화에 따라 인류사가 변화 진보해 왔음을 주시한 것이다.(중세-장원제, 수공업길드, 기술 발전-시민계급 등장, 교육확대와 계몽/ 혁명현대 산업혁명 통해- 자본과 노동 분화)


맑스 변증법적 유물론의 시각: 그는 생산가치의 모순성이 자본주의 자체 가지는 모순으로 보고 있기에(헤겔 변증법처럼) 자본가와 생산자간의 모순이 즉 대립이 극대화되면(反) 지금껏 역사가 그래왔듯이 변증법적으로 자연스레 사회주의로(合) 가게되기 때문에 계급대립은 당연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헤게처럼: 여기에서 진리는 전체성이 진리다)결국 공산주의화 되어 소외는 완전히 극복될 것이다. 사적유물론 시각




후기사상: 史的 유물론 * * * * *


materialism은 인간은 본래적 고유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데카르트, 헤겔 위시한 관념론: Ich 즉 자아, 정신의 우월성 강조) 사회적 환경, 조건들에 의해 인간의 본질이 결정될 수 있다는 장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초기 맑스의 유물론적 강조점은 역사에 대한 강조점-가만히 보면 역사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역사가 변해 왔음을 통찰하였다.


과거 생산수단의 소유와 구분은 문제되지 않다가 발전과 혁명 통해 오늘날 소유가 문제되고 있다. 물질적 가치를 생산하기위해서 인간들 사이에 형성되는 자연스런 생산관계가 이제는 집단간의 관계들로 양분 되버린 상황이다. 소수의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점유하고 다수의 노동자는 노동력을 매매한다. 이런 계급의 발생은 계약관계로 이어지고 이 계약을 통해 굳어진 관계는 내용상 얻어지는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독식하게 되는 모순을 갖는다.


생산양식: 생산력-생산관계


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주의까지는 노동이 완전히 극복된 단계가 아니다. 공산주의부터 소외가 극복되어 인간의 진정한 역가가 시작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과정이 인간의 인위적 노력, 변혁에의한 것인가. 역사의 자연스러운 변화인가 논란


소외(Alienazione)개념이- 루카치에게서는 물화 개념으로


생산은 사용가치에(질)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후 교환가치로(양) 넘어가면서 상품에 지배되면서 소외 발생


사적 유물론으로 넘어가면서 그는 물적 토대(하부구조)에 의해 상부구조가 조건지원진다고 보았다.


상부구조: 가치, 의식, 사상, 이념, 정신(사상이 발전됨에 따라 계몽되어 노예- 봉건-..발전)


하부구조: 정신보다(헤겔)물질적 토대인 (사상에대해 육체성,노동.  경제적으로는 하부적 제반조건들)즉 경제적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생각도 계몽되었다고 봄


맑스는 물적 토대가 상부조건(본질, 자아..)을 좌우, 조건지운다고 보고있다.


여기서 상부, 하부구조간 긴장의 기울기에따라


1. 물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완전히 결정한다.-전통 맑시즘, 소련 맑시즘


2.                “        조건지우긴 하지만 정신, 의식, 사상도 작용한다는 온건한 방향- 서구 맑시즘등으로 세분화


즉 이론적 변혁(상부)이냐, 실천적 변혁(하부)냐?


나의 역사, 태생환경, 사회적 조건이 ‘자아’의 본질을 형성하는데 결정되다하더라도 이 변화에 나의 능동적 의식도 얼마간 작용하는가?


자연적 진화처럼 역사적 발전으로인가? 혁명, 인위적(계급투쟁)통해 넘어가는가?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 헝가리 부다페스트 생, 유대계 부모


후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성공했는데 선진 유럽에서는 세계 혁명의 객관적, 경제적 조건이 성립되었음에도 혁명이 지연되고 후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위기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에서 찾는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역사를 미리 예정된 물질의 운동법칙에따라 진행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 혁명적 주체 무시한, 그 비판하고 카우츠키류의 정통 맑시즘: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분리된 과학이론으로 파악하는 양 사조 비판하여 루카치는 베른슈타인류는 기회주의에 카우츠키류는 실증주의에 빠져있어 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사상적으로도 20세기 초 20년간 독일 철학계는 신칸트주의가(현실고 이상, 존재와 당위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장악, 헤겔은 죽은 개 취급


루카치는 맑스주의의 정통성 확립에 고심한다. 그는 변증법적 방법의 본질을 총체성(자본주의와 대립 구분지어 보는 것이 아닌)의 관점을 취한다.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의 핵심은 “전체성이 진리다” 역사발전은 경제적 동인에 두는 것도 아닌 총체성의 관점을 취하여 더 나아가 총체성이라는 범주의 지배야말로 혁명적 원리의 담지자라고 주장한다. 곧 유물론적 변증법은 혁명적 변증법으로써 그 혁명성은 총체성의 범주에서 확보된다.


총체성은 수많은 계기들의 매개를 통해 성립하며 부분들이나 개별 사실들을 아우르며 나아가는 과정이요, 경향이다. 그는 고정된 사물을, ‘과정’안에서 경험적 사실을, 역사발젖의 ‘경향’안에서 존재를, ‘생성’안에서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체성은 주체와 객체의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통일적인 역사발전 과정이다. 사회 역사적 현실은 인간 실천의 산물이므로 여기에는 이미 주체 또는 사유가 개입되어있다는 의미에서 주체와 객체는 통일되어 있다.-서구 맑시즘의 특징 이다. 즉 주체와 객체를 통일적인 과정의 계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변증법적 총체성에는 주체가 능동적 계기로 객체는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의 변혁 활동의 대상이자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루카치의 생각은 자연 변증법, 모사론은 혁명적 실천의 요구를 무디게하는 것이다. 역사과정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방법론적 고찰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객관주의, 주관주의. 숙명론의 이원론을 거부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이데올로기적 위기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구조에 뿌리박고 있는 사물화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물화 이론: 맑스의 물신 숭배론; 운시적 패티시즘(사물의 초자연적 힘 숭배)처럼 자본주의 에서는 상품, 화폐가 물신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자, 이윤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착취 산물인데 사실 그런 착취 지배구조가 은폐되고 상품이나 화폐가 스스로 운동해서 증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맑스에 의하면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상품의 교환을 통해서만 맺게되며 상품이 마치 어떤 인격적 힘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맑스는 물신숭배는 공산사회에서만 철폐가능한 것으로 본다.


사물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주체적 활동과 인간의 활동의 산물이 인간에게 대립되어 객체화되어 오히려 주체를 지배하는 현상, 이 현상을 맑스가 ‘소외’로 지적한 바 있다. 사물화는 인간 주체의 능력인 노동력이 상품으로 거래되는가 하면 그 상품이 인간 지배 즉 인간 주체와 객체(산물인 상품)가 분리, 대립되고 주객전도 현상이 발생한다고 본다.


베버의 합리화 이론:  맑스는 근재 자본주의 사회를 계급관계에 초점을 맞춰 분석했지만 베버는 서양 근대화 과정을 생활의 합리화 과정으로 해석한다. 합리화란 어떤 힘의 작용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계산에 의해 지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감정, 전통, 주먹구구(탈피전략이 테일러주의)가 사라지고 명확하고 체계적이며 계산 가능한 규칙, 절차가 들어서는 과정, 분석, 수량, 정보화, 분업, 체계성이 증가한다. 이를 베버는 ‘형식적 합리성’이라 한다.


장인대신 기계화된 테크놀로지 출현, 관료 출현, 전통, 관록, 감정대신 베버는 합리화과정의 제도적 출현을 관료제로 봄, 베버 합리화 이론의 문제의식은- 노동으로부터 탈피, 유연화


베버의 합리화 관료화 과정이 인간의 가치, 자유상실을 낳는 심각한 요인으로 봄 또하나의 문제는 합리화 과정에서 생겨나는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체계들이 개인의 자율성, 창조성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체계가 거꿀로 인간 자신을 기계화하고 비 인간화 하는 것이다. 베버는 근대질서, 관료제를 쇠우리에 비유하여 도태당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거기에 순응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지속된다면 인간은 분노, 정열도 없는 형식적 비인격성이 지배하리라고 보고 있다.(앞으로사람체계화, 코드로 인식하게되면 그야말로)


(학생도 대학도 모두가 경쟁력만이, 자본의 노동력 포섭은 광범위)


맑스는 사회주의가 물신숭배를 종식시킬거라 생각했지만 베버는 두 이유로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인정치 않았다. 사실 소련 공산주의는 지나친 관료화로 기울어 베버 예언이 증명됬다.


합리화는 질적 통일성이 해체되고 양화, 분해되어 인간이 사물처럼 계산과 조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루카치는 사물화가 근본적으로 ‘노동과정의 합리화’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노동과정이 분업화, 노동자가 기계의 한 부품으로 전락 예로서 테일러주의




루카치는 맑스의 사물화, 베버의 합리화를 종합하여 동전의 양면으로 본다.


사물화는 1.주, 객이 분리되어 전도되고 2. 주,객의 유기적 통일성이 파괴, 파편화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은 계산과 조작의 대상이된다. 노동자들은 사물화 때문에 노동과정 전체에 대해서 인식할 수 없을뿐더러 통제는 고사하고 저항할 수조차 없게되버린다. 따라서 사람들은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능동적으로 변혁하지 못한채 다만 정관의 태도를 보일 뿐이다.(자본의 지능적인 노동통제과정은 테일러-컨베어-포드-포스트 포드진화하나 실상 노동자들은 자신의 주체성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채 무력하게 되며 다만 적응할 뿐이다


자본의 노동과정의 합리화에 주체는 현실을 총체성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능동성 상실을 맞게되는 것이다. 베버 루카치는 이를 통찰한 것이다.


맑스는 경제현상에 국한하여 ‘사물화’개념으로 설명했지만 루카치는 베버의 형식적 합리성 개념(교육,사법,행정‘’‘)을 이용하여 전 영역을 사물화 현상으로 포괄할 수 있었다.


극복은 아마 당이었던가?‘’‘’‘’‘’‘’‘




아도르노-음악에 천재성


사상의 핵심원리: 동일성의 원리


「계몽의 변증법」-지배의 총체적 확산과정으로서의 인류사. 저서는 파시즘의 등장이 우연이 아닌 ‘역사의 구조적 문제’가 갖는 궁극적 표현이라는 확신이다. 즉 파시즘은 ‘역사에 있어 경제, 사회, 정치, 경제, 심리, 문화적 발전 과정의 필연적 결과“라는 확신에 근거하여 이 과정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자기보존: 이책 전체 이론적 구조이다. 자기 보존이야말로 모든 생명체의 진정한 법칙이기때문이다.


자연지배의 출발: 초기 인간은 거대한 자연에 속절없이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신화적 불안의 증폭으로 이제는 인간은 자연에 굴복하든지, 위협적인 자연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하면서 자연지배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사회적 지배의 출현(사회구조, 타인지배): 인간은 본시 사회적 존재이므로 자연지배는 사회구조안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자연지배의 경향성은 역사발전, 과학, 생산력 발전으로 인해 과거 자기보존을 위해 부족했던 재화의 생산과, 획득을 위한 노동과, 노동의 산물인 재화를 권력(강제)로 통제하지 않으면 자연 지배의 의의는 사라지므로 여기에서 사회적 지배가 이루어진다.


 


계몽의 변증법이 주된 테마는 자연으로부터의 맹목적 해방이라는 문명사 최초 과제와 더불어 또 하나의 해방 즉 사회적 해방은 이미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에 있다.


내적 자연지배의 필연성(외적 자연지배의 필연성): 외적 자연에 대한 지배와 사회적 지배로 인해 인간의 내적 자연을 사회구조의 틀에 순응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 댓가로서 이제(내적 자연의 부정의 댓가로) 자기의 정체성은 사회조직의 틀과 합리성에 의해 규정, 구성된다.


내적 자연이란 내용적으로 인간에게 삶과 행복, 열정, 욕구이라는 구체적 목적의 근원이었다. 자기 보존을 위한 지배가 이제 삥돌아 내적 자연의 체계적 지배와 순응은 이제 주체의 자기보존을 위한 확보가아니라 자연과의 일체성 상실,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감성의 억압, 정신적 역동성의 추방을 의미한다. 사실은 내적 자연이야말로 모든 실천적 목표 설정과 욕구 표현의 마지막 근거로서 인간의 모든 역사적 실천의 최종적 텔로스이며 이 요소들의 상정없이는 인간은 인간 자신의 주체로서의 존재의미의 여부조자 불가능한 것들이다.




지배와 동일성의 원리: 동일성 사고, 교환 원리, 문화 사업


계몽 변증법 중심 테제는 현대문명의 근본적 위기의 원인을 인류의 개인적 자기보존, 집단적 자기 보존을 위해 시작된 외적, 내적 자연지배와 이에 동반되는 사회적 지배의 총체화에 있다. 이를 관통하는 것이 동일성의 원리: 자연과 사회 가운데 자신과는 다른 모든 것을 동일한 하나의 형식으로 강제해가는 지배원리의 정신적 형식이다. 동일성 사고는 대상을 개념적 도식과 동일화시킴으로써 그것을 인식했다고 믿는 사고의 유형이며 타자를 자신에게로 환원하여 그 대상이 갖는 차이동일성에 굴복시키는 작업이다.




동일성 사고의 사회적 모델로서의 교환원리와 사회적 지배


동일성 사고는 비록 직접적 현상은 아닌데도 사회적 매개의 원리로서의 교환의 전 형식을 이룬다. 이 원리는 상품의 교환을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이로서 동일성 사고는 철저히 유물론 적으로 시장과 화폐경제의 전개로부터 도출된다. 모든 것은 상품의 동일성 아래 포섭되며 보편성이라는 한 범주 아래로 포섭된다. 동일성 사고는 시민사회에서는 교환 원리로서 질적으로 상이한 노동들이 단 하나의 노동 요소 즉 생산에 투입된 노동시간으로 환원 양화된다. 이렇게 서로다른 산물들이 추상적 교환가치로 환원되면서 즉 그것의 생산에 평균적으로 투입된 사회적 노동시간으로 환원되어서야 비로소 상호 교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개별적 대상이 가지는 차이는 무시되며 평균화된다. 특수 대상들에 대립하는 보편성으로서의 등가성(대등한 가치)에 굴복 시키는 동일성이다. 인간의 노동을 평균적 노동 시간이라는 추상적 보편개념으로 환원시키는 교환원리는 동일성 사고와는 친족 관계이다.


교환이란 동일성 사고의 사회적 모델이다.




동일성 사고의 또 다른 표현으로써 문화산업과 내적 자연의 지배


문환산업은 외적 자연, 사회적 지배의 종점으로써 이를 수행하기위한 내적 자연의 보편적, 은폐, 기만 관계로서의 지배의 총체화이다. 주체의 지배의지가 외적 자연을 도구적 이성의 동일성 사고 도식에 굴복시키듯이 문화산업의 형태로서 자연지배는 주체의 내적 자연 역시도 동일적인 것에 굴복시킨다. 문화산업의 목적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 구성원을 남김없이 자신 가운데로 포섭해들이기 위해 자신이 제시하고 잇는 도식적 규범들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내면에 정착시키는 것을 궁극 목적으로 한다.(자본의 노동 포섭은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그 포섭의 최종적이며 가장 은폐적이고 기만적이며 확실한 ‘대중문화’에서 비로소 인간을 전 영역에서 동일한 규범, 가치기준아래 포섭한다.)


이 은폐성 때문에 일반 구성원들은 자신이 포섭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문화산업은 자신이 산출하는 정형에로의 동일화를 강제해가면서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며 개개의 주체를 극단적 주체 상실로 몰아간다. 이제 다원적 역동성은 사라지고 동일화만이 가능하며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구조까지 조작된다. =의식의 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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