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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lunarmix/60040562057
2007/08/01 13:32
http://blog.naver.com/lunarmix/60040562057
한의학은 수수께끼이다. 한의학의 전공자인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한의학 관계의 전문 종사자나 일반 독자들은 모두 나의 발언에 충격을 받고 다음과 같은 의구심을 품을것이다. 아직도 한의학은 과학이 될 수 있는 하등의 확실한 근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에 대해여 내가 일차적으로 변명할수 있는것은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과학이 수수께끼적인 요소를 내포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다. 인체 자체가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인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수수께끼라고 한다면 아예 그 외연을 넓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속편할 것이다.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이 수수께끼이다. 그렇다면, 생물학, 생리학, 생화학, 생태학이 모두 수수께끼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것은 과언(지나친 말)이다.
생물학이 비록 뉴톤의 고전물리학과 같은 필연성을 확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해도 생물학 전체를 수수께끼라고 간주해버리는 것은 어폐가 있다. 생물학은 출발부터 파스퇴르의 실험의 사례들이 말해주듯 경험과학으로 출발한 것이며, 그 기본적인 전체들, 세포의 존재라든가, 세포의 핵구조라든가 세포막의 다양한 투과기전 같은것은 어디까지나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것이며 모든 세포현상에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원리와도 같은 것이다. 이런것을 수수께끼라고 말할수는 없다..
이때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복잡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감관에 의하여 확인될수 있다는 매우 단순한 의미인 것이다. 다시말해서 세포는 현미경을 통해 누구든지 확인할수 있으며 세포분열의 과정도 현미경으로 활동사진 찍듯이 찍어낼수가 있다.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라도, 그 세밀한 이미지까지 확인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일회적 사건이 아닌 "보편적 원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정보체계가 그 보편적 실체성이 확보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이 경험과학의 진실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의학의 경우, 한의학이라는 학문을 성립시키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해당되는 체ㅖ들이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지 않다."라는 불행한 사태가 개재되어있다. 만약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지 않다"면 결론은 매우 명료해진다. 한의학은 경헙과학(empirical science)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경험과학이 될수 없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가설적 과학(hypothetical science)이 될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그 정보가 순수한 "가설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사실 한의학은 공상소설과 하나도 다를바가 없어진다. 그런데 공상소설과도 같은 한의학이 버젓이 하나의 보편과학으로서 인정받고 있을뿐 아니라 모든 보편과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학 커리큘럼으로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수께끼라 말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사실 성실한 한의학도라고 한다면 모두 내가 던지는 이러한 질문에 정직한 답변을 해야 한다. 이 질문에 답변을 할수 없다면 한의학도는 과학자로서의 위치를 박탈당할수 밖에 없다. 이 한의학의 수수께끼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락(meridian system)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의학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언어들이 이 경락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조차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락은 전혀 우리 인간의 경험적 검증의 대상이 아니다. 그 실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묻겠다. 왜 족궐음간경은 족궐음간경이며, 왜 족태양방광경은 족태양방광경인가? 궐음과 간경은 무슨 관계가 있으며, 태양과 방광경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왜 족궐음간경은 하필 그 자리(길)로만 지나가야 하는가? 대돈(大敦)혈 자리가 과연 족구러음 간경의 기시(起始)일까? 그것은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과연 그것은 기문(期門)혈에서 종료되는가? 그리고 또다시 그것은 수태음폐경의 기시혈인 중부(中府)혈로 유주하는가? 그것은 또 어떻게 아는가? 간경과 간은 무슨 관계인가? 간경에는 간이라는 장기의 어떤 기운이 흐르고, 방광경에는 방광이라는 기관의 성질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간의 기운은 무엇이고, 방광의 기운은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 장기와 얼마나 관련이 있느냐? 등등 이런 질문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반드시 던져져야만 하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왜냐? 이런 질문은 던져봐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대답될수 없는 성격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한의학도들은 한의과대학 6년을 다니는 동안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면 학업에 지장이 생기고 학교를 졸업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냥 한의학개론서나 침구학 교본에 써있는 대로 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의문의 대상이 아니라, 책에 쓰여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전제”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는 가를 묻는 사람에게, 그냥 하나님은 계시다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역설하는 목사님 말씀과 똑같은 것이다. 한의학의 정보는 이런 의미에서는 종교적인 정보와 대차가 없다. 사실 대부분의 한의학도들은 “한의학종교”를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의사”가 되는 가장 현명한 첩경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다. 한의학의 역사도 한의학종교를 극복해보려는 인간의 합리적정신의 발로라는 의미에서, 서양의 종교와 과학의 역동적 관계의 흐름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한의학의 고경(古經)으로서 우리가 흔히 제시하는 것이 ‘상한론’과 ‘내경’인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 고경을 한대(漢代)에 성립한 의서로서 맹신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의경들은 대부분 11세기 중엽 송나라의 인종(仁宗)의 칙명으로 설립된 교정의서국의 “교정”작업을 거친 판본들이다. 그런데 그 “교정”의 성격이 매우 극심하게 창조적이고 극심하게 왜곡적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원본의 모습은 찾아볼길이 없다. 그러나 하여튼 한 대로부터 어떠한 한의학의 원리적 언어들을 체계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만은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 두 의경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내경’의 내(內)는 본시 외과학에 대비되는 내과학(internal medicine)의 “내”를 의미하는 말은 아니었다. 외(外)라는 말은 외과라는 의미가 아니라, “까발겨졌다”는 의미이고, 내(內)라는 말은 “숨겨져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내경”이라는 말은 의학에 관한 비밀스러운(esoteric)정보를 담은 성스러운 경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내”라는 의미에는 점차 내과학적 함의가 들어가게 되었다. 인체에 관한 비밀스러운 근본원리는 아무래도 외과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내과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면, ‘상한론’이라는 책은 ‘내경’과는 아주 다른 성격의 의서이다. "상한“이라는 졸병(갑작스러운 병), 즉 급성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의 집대성적 성격을 띄는 책인 것이다. 급성 전염병은 병의 증상이 급격하게 진해오디며 죽음과 삶의 기로로 인간을 몰아간다. 급성 전염병은 대체적으로 고열을 수반한다. 그런데 신체의 고열은 오한이라는 현상을 수반한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열병을 한사(寒邪)에 몸이 상(傷)하였다고 하여 상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상한은 증상이 명백하며, 이 증상과 관련하여 인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기 때문에, 어떤 한가로운 의사의 형이상학적 담론이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열사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침을 놓는다는 것도 백발백중 부작용만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상한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증상에 따라 그때그때 현명하게 약재를 달여 먹이는 것이다. ”증상에 따라 약재를 쓴다“는 것에도 원리가 있어야 하지만, 이 원리는 매우 경험적이며 대증적일수밖에 없다. 열사(熱邪)는 한(寒)한 약재를 쓰는 것이 상식일 것 같지만 인체는 그렇게 간단히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고 옛 선인들은 파악하였다. 열사가 표(表)에 머물러 있을 때는 차가운 약을 써서 그 열사를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보다는 오히려 더운 약, 즉 신온(辛溫)한 약을 써서 발한을 시킴으로써 그 열사(한사라 해도 마찬가지)를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열사가 리(裏)로 깊숙이 들어왔을 때는 오히려 하제(下劑)를 써서 똥으로 열사를 뽑아내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한 증상 한 증상에 대하여 어떤 약을 쓸것인가 하는 고민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이 바로 ‘상한론’이다. 이 ‘상한론’은 한마디로 증상에 따른 약방의 가감의 원리를 서술한 의경인 것이다 .이 가감의 원리가 방제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통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다고 말하면, 한의사들에게는 매우 기분나쁘게 들리겠지만, “아하! 한약방을 하고 계시군요.”하고 고쳐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들은 예로부터 한약방에 가서 증상을 말하고 그 증상에 따라 약제를 가감하여 처방을 얻곤 했던 그 전통의 인상을 자연스럽게 되풀이 하고 있을뿐이다. 이러한 모든 방제의 원리가 비단 전염병뿐 아니라 모든 질병에 적용되었는데, 그 원조는 모두 예외없이 상한론으로 귀속되는 것이다.
약설(略說)하자면, ‘내경’은 연역적인 성격이 강하고 ‘상한론’은 귀납적인 성격이 강하다. 경험과학으로 말하자면 ‘상한론’의 체계는 확실한 실체적 근거가 있지만, ‘내경’의 세계는 추상적이며 원리적이며 형이상학이라서 어떤 경험적 근거를 논하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가 말하는 경락이라는 기흐름의 체계는 ‘상한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내경’에 속하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영추(靈樞)에 명시되어 dLT는 것이다 .그러나 ‘내경’ ‘영추’의 경락체계도 그 이전의 의서인 7세기 후반의 ‘태소(太素)’라는 의경의 체계나 최근에 발굴된 BC 2세기의 마왕뛔이 의서의 조형(祖形)적 체계와 크게 출입이 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말하는 경락의 그림이 언제 이 모습으로 정확하게 그려졌는지도 실상 아무도 모른다. 다체적으로 송대 이후의 사건일 것이다.
혹자는 ‘상한론’중에도 증치(證治) 부분에 경락과 관련된 언급이 있으므로 ‘상한론’과 경락이 관련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과하다고 지적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상한론의 판본학에 관하여 기초소양이 없는 사람들의 억견일 뿐이다. ‘상한론’의 고판본을 살펴보면 교정의서국의 교정작업이 얼마나 교활한 것이었나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경락과 관련된 부분은 모두 후대의 첨가일 뿐이다. ‘상한론’은 본시 경락과는 아무 관계없는 순수한 증치의 경험과학일 뿐이며, 침술과는 관련없는 방제학의 조형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의가들은 ‘상한론’에 대하여 본질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 후대에 발전한 방제학을 응용했을 뿐이다. 세종대왕도 ‘향약집성방’‘을 펴내어 당재(중국약재)와 구별되는 우리나라 사람들 체질에 보다 적합한 우리나라의 토산품약재들의 정확한 성격규명에 열의를 표했지만 그 원리가 되는 ’상한론‘에 관한 심도있는 연구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기존의 의서를 총망라하여 의학혁신을 도모한 조선중기의 태의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도 기본적으로는 상한론의 체계가 아닌 내경의 발전적 집대성이다. 동의보감의 모두(冒頭)에 있는, 정(精), 기(氣), 신(神)을 운운하는 내경편 자체가 내경의 추상적 언어를 근간으로 한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한사의 퇴치보다는 온보(溫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풍토 때문일수도 있고, 사회계층의 괴리감에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편하게 사는 양반들의 사치일수도 있고, 영양실조에 걸린 서민들의 갈망일수도 있다. 지금도 “한의학”하면 전염병퇴치를 생각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고 오로지 “보약지어먹는 학문”으로만 생각한다. 내가 한의사라고 말하면, “보약 좀 지어달라”고 말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차적 반응이다. 이것은 그들의 무지에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의 기나긴 역사적 체험의 축적의 한 단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최초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경락이란 무엇인가? 경락이란 과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경험적 근거는 무엇인가? 의학이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경험과학일수밖에 없는 이상,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는 아무도 답을 할 수가 없다. ‘상한론’을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본시 경락과 관계가 없고, ‘내경’을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경험적 근거를 찾을 길이 없고, 오로지 형이상학적 미궁으로만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미궁에서 본질적으로 헤쳐나오려는 노력이 우리 조선땅에서도 이루어졌다. 구한말의 천재적 의가 동무 이제마에 의한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를 “사상의학의 창시자”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면서도 어폐가 있다. “사상의학”이란 오직 20세기 후반의 연구가들이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는 동의수세보원이라는 책을 썼고, 그 속에서 오직 ‘사단론’을 말했을 뿐이다. 물론 ‘사단론’속에 ‘사상(四象)’이라는 말은 나온다.
그런데 이제마를 마냥 독창적인 사람으로만 이야기 하는 것은 좀 어폐가 있다. 물론 그는 독창적인 사람이며, 자기 나름대로의 확고한 체계를 세워 일가를 이룬 대의(大醫)요 성의(聖醫)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독창성은 결코 빙공이래(憑空而來)한 것이 아니요, 의학사의 줄기 속에서 이루어낸 독창성인 것이다. 동의수세보원 속의 의원론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의 사상의학의 체계가 얼마나 상한론의 깊은 연구에 근거한 것인지를 알아차릴수 있다. 그는 상한의 방제의 원리를 사상이라는 체질의 원리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제마가 사상의 체질원리를 ‘상한론’의 연구로부터 출발시킨 이상, 그것은 “경락의 문제”를 철저히 배제시킨 체계라는 것이다. 즉 동무 이제마는 상한론의 체계가 경락이라는 형이상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투철하게 깨달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구태여 침술을 배제한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체계 속에는 전혀 침술을 도입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방제의 체질적 근거에 관한 것이다. 사상의학은 침구학이 아니요 방제학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마는 순수한 경합과학에 의거하여 한의학을 이론과학으로 도약시킬수 있는 어떤 발판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체질이라는 인체의 장(場)의 발견을 톨하여 경락을 새롭게 조명할수 있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제 남은 작업은 체질과 경락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과제상황이었던 것이다.
동호 권도원의 체질의학(Constitutional Medicine)이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의 발전적 형태라고 보는 견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권도원의 생평(生平)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며, 또 권도원의 체질의학의 근본적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의 인상적 발언일 뿐이다. 권도원의 체질의학은 근원적으로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관련이 없다. 권도원은 본래 의사가 아니었던 사람이며, 어려서부터 자신의 몸의 현상에 관한 의구심으로부터 체질에 대한 독자적 생각을 굳혔으며, 성장하면서 독학으로 침술을 체득했다. 과거에는 검정의제도가 있었는데, 검정고시를 통하여 한의사자격을 획득하였다. 그가 이제마의 사상의학체계를 알게 된 것은 이미 그가 그의 체질의학적인 침술을 창안한 후의 사건이다. 그리고 자신이 터득한 체계가 이제마의 사상과 절묘한 역사적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도 나중에 깨달은 것이다. 권도원의 출발점은 침술이며 방제학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이제마의 방제학과는 근원적으로 인체를 바라보는 체계가 다르다. 이제마는 약리학적 원리에 따라 인체를 바라보는 것이지만, 권도원은 경략의 원리를 원초적으로 전제해놓고 인체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권도원은 경락에 관한 연역적 전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경험방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그가 말하는 “경험방”은 약리에 의한 방제의 가감이 아니라, 오수혈이라는 경혈의 체질에 따른 배치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근원적으로 이제마의 사상의학과 권도원의 체질의학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인체를 획일적인 보편구조로서만 바라보지 않고 몇 개의 다원화된 장을 설정하여 규정한다는 공통적인 성격이 있다. 체질(Constitution)이란 바로 인체를 선천적인 구조로서 분류하는 원리에 관한 것이며, 이 체질이라는 의미맥락에서 이제마의 사상의확과 권도원의 체질의학은 놀라운 연속성을 보지하는 것이다.
이제마는 사상(四象)을 말하는데 있어서도, 구태여 관련시키자면 음양이나 오행의 원리가 관련될 수도 있지만, 그는 일체 그러한 음양오행의 원리를 배제시켰다. 그의 약리적 발상은 상한방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음양오행이라는 언어를 빌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권도원은 철저하게 음양오행의 원리로서 그의 모든 의학체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권도원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체질과 경험적으로 결부시키는 과정에서 음양론이나 상생, 상극의 오행론의 상식적 대전제들을 변형시켰다. 이런 점이 전통의학과 권도원의 체질의학을 단절시키는 그의 독창적인 창안이다. 권도원 역시 독창적 발상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마는 죽은 사람이라서 마음놓고 위대하다고 말하고 권도원은 살아있는 사람이라서 정당한 평가를 유보하는 것은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단지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은, 권도원은 자신의 창안을 세밀하고 정직하게 밝히는 데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표현력의 한계일수도 있고 협애한 인생관의 한계일수도 있다. 서양의 과학은 과학적 발견이나 발명의 성과를 인류 모두가 공유할수 있는 합리적 언어로써 공표한다는데 그 위대성이 있다. 그러한 보편적 언어 속에서 검증되는 과정을 통하여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성장하여 온 것이다.
사실 권도원이라는 사람의 체질의학체계가 우리사회에서 권위를 인정받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권도원 본인을 제외하고는 김용옥이라는 이름 석자를 올리는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신체적 고질로 인한 고통의 심연속에서 권도원을 만났고(1966년 가을), 그에게 18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침을 맞는 과정속에서 권도원을 발견하였고 권도원의 침술체계의 과학적 의의를 발견하였다. 내가 권도원의 침술체계를 발견한 것은 내가 생물학을 공부하던 시기였고, 그것은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기 이전의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이 내가 동양철학 방면에서 일가를 이루다 보니까 그 관련 속에서 동양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확히 밝히지만, 나의 동양철학수업과 동양의학의 관계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도된 것이다. 동양의학에 관한 눈을 먼저 뜨고, 그 의학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탐색의 일환으로 동양철학에 입문하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인생경로를 바르게 설명하는 방식이다.
훗날 내가 반독재투쟁의 와중에서 양심선언(1986. 4. 8)을 발표, 철학교수를 사직하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때, 다시 한의과대학에 학부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도 그럴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이 이미 철학을 공부하기 이전부터 나의 생애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철학도가 되기 이전부터 이미 자각적인 의학도였다. 나는 젊은 날의 궁금증들을 풀어내지 dskg고서는 견딜수 없는 어떠한 가려움 속에 항상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주석원군이 나의 궁금증의 일면을 상술해 놓은 이 책의 서문을 쓰면서 더 이상의 언어를 나열하는 것은 경제적이 아니다. 단지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한의과대학이 높은 커트라인을 과시하고 있고, 우수한 인재들이 쏠리고 있는 이 현상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붐을 크게 일으킨 소스가 도올 김용옥이라는 이름 석자의 인생역정과 무관치 않다는 측면에서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1980년대 한국의 지성계에 동양학의 붐을 일으켰고, 1990년 한의과대학에 극적으로 입학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한의학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현재 한의과대학에서 한의학을 교수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소감은, 참으로 너무도 우수한 인력이 너무도 빈곤한 학문의 도상에서 인생의 바른 꿈을 펼치고 있지 못하다는 비감이 앞서는 것이다.
나는 권도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의과대학에 입학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권도원으로부터 얻은 경락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나는 한의과대학을 갈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가각 한의사면허제도를 확립해놓은 이상 나의 의술을 시험할수 있는 당당한 자격을 얻어야만 했다. 나는 국가라는 제도와 타협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내가 한의학에 관한 아무런 뚜렷한 비젼을 국민들과 공유할수 없다는 사실에 매우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직도 나의 합리적 사유체계 속에서 매우 근원적인 많은 문제들이 미해결의 정황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인체라는 수수께끼, 그리고 한의학이라는 수수께끼를 나는 어느정도 감을 잡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확연히 풀지 못했다. “임중이도원(任重而道遠)이라는 푸념을 되풀이 할수밖에 없다.
주석원군은 나의 삶의 역정의 고뇌를 같이 한 인물이다. 주석원도 나의 뒤를 따라 한의과대학에 들어갔고 나의 지도를 받으며 한의과대학을 다녔다. 그가 졸업한 후에는 나는 나의 클리닉의 원장직을 그에게 맡기면서 나의 의술을 전해주었고 그에 따른 많은 원리적 사고를 가르쳤다.
경락의 문제는 아직도 신(God)에 관한 문제처럼 그 존재에 관한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그 존재를 증명하려 하고있고, 또 그 실존성을 믿으면서 살고 있다. 우리 몸에 있는 경락도 이와 유사한 아이러니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이런 비유를 한번 들어보자! 바람은 분명 기의 실존으로서 실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그 자체를 사진으로 찍으려 하면 찍기가 어렵다 그러나 바람을 찍는 좋은 방법은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의 모습으로써 바람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모에 기의 흐름이 있다면 그 기의 흐름이 일정한 노선을 그리고 있다 해도, 그 노선 자체를 철길처럼 찍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지 그 기의 흐름을 기능적으로 규정할수밖에 없다. 여기 권도원이 시도한 것은 이 기능적 규정을 법칙화 할 수 있는 나무돠 같은 거점으로서 오수혈이라고 하는 1경당 5개의 요혈(要穴)을 잡아낸 것이다. 함수가 많으면 법칙화가 어렵다. 그의 작전은 매우 현명한 것이다.
구체적인 문제들은 각설하고, 여기 이 책이 설명하고 있는 침술의 체계는 경락의 실존성을 기능적으로 입증할수 있는 최초의 법칙화된 체계라는 이 한마디만을 나는 남겨두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설명방식으로 우리의 최초의 질문이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과연 무엇이 설명되었으며, 과연 무엇이 설명되지 않았는가? 이런 문제에 관하여 독자들 스스로의 성찰을 요망할 뿐이다.
단지 주석원군이 내가 구차스럽게 설명해야 할 많은 이야기들을 소화된 자기의 언어로써 명료하게 설명해준것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끼며, 이러한 주석원군의 시도가 앞으로 많은 한의학도들의 계발을 유도하고 보다 차원높은 합리적 연구를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한의학은 결코 오늘의 모습으로 만족해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한의학도는 진리에 대한 탐색을 멈추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한의학이라는 종교를 과감히 분쇄시키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2007년 6월
駱聞齋에서
도올 김용옥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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