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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진위논쟁의 주요 내용들



환단고기등장의 역사적배경















규원사화 연구성과와 과제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1. 들어가는 말 
2. 연구 성과와 쟁점 
 1) 규원사화출현과 연구의 출발(1968년 이전)
 2) 연구의 본격화와 위서설의 등장(1970·80년대)
 3) 진위논쟁의 격화와 연구의 심화(1990년대)
 4) 시민사회의 활동·남북동연구와 연구의 다양화(2000년대-현재)
3. 향후 연구과제
4.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한국사에서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문제를 가장치열하게 고민한 시기는 근대이다.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우선 자신들의 존재성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들은 한민족의 존재근원을 단군에서 발견하고 대종교로 귀의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나철·김교헌·신채호·박은식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단군민족주의 기치 아래 독립전쟁과 사상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당면 과제는 바로 유가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한국근대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여말선초의 선가계통의 사서가 유가의 사서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이성계는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목자득국론(木字得國論)에서 찾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 나라 건설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그 결과 선사(仙史)와 선교(仙敎)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단군세력은 지하로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난 이후 당시 지식인들 중에 피폐한 현실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이 성리학 지배질서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북애(北涯子)였다. 그는 한민족의 출발점이 환인·환웅·단군 삼신이라고 확신하면서 선교(仙敎)에서 민족 구원의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성리학이 지배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백성을 살리기 위한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해 몸부림 친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는 양란 이후 조선의 몰락 이유를 다음과 같이 피토하면서 읊었다. 

 내가 말하거니와 조선은 국사(國史)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걱정이다. 춘추(春秋)를 지으니 명분이 바르고 강목(綱目)을 이루어 정윤(正閏)이 나뉘었는데 춘추와 강목은 중국 선비의 힘을 입어 되었다.
 우리나라는 옛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는 여러 번 병화를 입어 흩어지고 없어졌다. 그러다가 후세에 소견이 좁고 생각이 얕은 자들이 중국 책에 빠져서 주(周) 나라를 높이는 사대주의만이 옳은 것이라고 하고, 먼저 근본을 세울 줄 모르고 내 나라를 빛낼 줄 몰았다. 이는 등나무나 칡넝쿨이 곧게 뻗어갈 줄은 모르고 얽어매기만 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천하다 하지 않으랴.

 이처럼 북애는 조선의 몰락 원인을 국사와 경서의 부재와 망실에서 찾았다. 국사와 경서를 되찾으면 조선은 희망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성리학으로 인해 망해가는 나라와 백성의 구제방안을 보성(保性)에서 찾았다. 보성이란 “‘본래의 나’를 찾아지킨다.”는 의미이다. 결국 조선은 본래의 나를 찾는 데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북애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북애의 혜안은 오늘 날에 더 심각하게 요청된다. 
 글쓴이는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되살릴 길을 규원사화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글도 이런 글쓴이의 생각에서 시도된 것이다. 지금까지 규원사화에 대한 글은 40여 편이 발표되었다. 위서설을 주장하는 부류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규원사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규원사화에서 우리의 본래모습을 찾으려는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그동안 규원사화 연구는 역사·정치학·철학 쪽에 주로 이루어져왔다. 글쓴이는 이 글의 목적을 그동안 발표된 글들이 시대에 따라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밝히는 데 두었다. 이를 위해 연구 성과·논점을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규원사화 연구를 활성화한다는 의미에서 연구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이 규원사화의 본질을 밝히고 ‘규원사화학’으로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연구 성과와 쟁점 
 1) 규원사화출현과 연구의 출발(1968년 이전)
 『규원사화』는 북애가 숙종 1년 1675년 완성한 이후 비장되어 오다가 대일항쟁기 1925년 김용기의『단전요의(檀典要義)』·1928년 김광(金洸)의『대동사강(大東史綱)』·1934년 이창환(李昌煥)의『조선역사(朝鮮歷史)』·1937년정진홍(鄭鎭洪)의『단군교부흥경략(檀君敎復興經略)』·1939년 서계수(徐繼洙)의『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등에서 인용 활용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민족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단전요의』나『단군교부흥경략』은 근대 단군계열의 집필이라는 점에서 규원사화의의 맥을 잇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김광(金洸)의『대동사강』·이창환의『조선역사』·서계수의『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는 선가의 사관보다 유가의 춘추사관에 따라 강목체의 대의명분·정통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이들은 한치윤의『해동역사』나 이종휘의 『동사(東史)』등의 사서와 같은 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서는 규원사화와 달리 춘추사관을 완전히 극복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김광 등이 규원사화를 인용한 것은 이들이 규원사화를 대체로 진서(眞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규원사화가 근대 역사학에 끼친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제라는 시대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한민족 상고사와 사상사의 본격적인 연구는 불가능하였다. 다만 이 책의 중요성을 인식한 양주동의 소장본을 손진태가 필사하여 해방 후 고려대학교도서관·서울대학교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에 1부씩 기증했다. 이외에 권상로 소장본이 동국대에, 방종현 소장본이 서울대에, 이선근 소장본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고, 특히 북한인민대학습당에도 소장되어 있다. 
 무엇보다 규원사화의 판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이 김수일(金壽一)에게서 1946년 5월 25일 이전 어느 시점에 현금 100원에 구입하여 5월 25일 등록(도서열람번호: 貴 629(古2105-1))한 ‘김수일 소장본(金壽一 所藏本)’이다. 이를 다시 1972년 당대 최고의 권위자 이가원·손보기·임창순 등으로 이루어진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결과 숙종 1년(乙卯, 1675년)에 만들어진 ‘진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김수일 소장본은 김성구의 지적대로 제질 등을 보면 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된다. 그리고 임채우는 이것이 북애의 친필본이 아닌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기에서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고서의 진위여부는 무엇보다 지질(紙質) 등의 서지학적 측면에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원사화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김수일 소장본이 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된 이상 전혀 의미가 없다. 이 점에서 위서설 주장자들은 학문의 기본소양에서 벗어난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이것도 아니면 어떤 ‘불순한’ 목적에서 규원사화 등 단군관련 사서를 폄하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규원사화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이는 신학균(申學均)이다. 그는 1968년에 대동문화사(大東文化社)에서『규원사화』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 번역서의 의미는 무엇보다 규원사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학균은 규원사화의 가치에 대해 「「揆園史話」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김수일 소장본을 북애의 친필본으로 주장하면서, 북애의 위대성을 “이 일사를 위하여 한 平生을 바쳤으니 偉大한 愛國者라 아니 할 수 없다.”라고 평가하였다. 특히 그는 규원사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서 규원사화에 인용된 사서로 『삼성밀어(三聖密語)』·『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조대기(朝代記)』·『사문록(四聞錄)』·『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5종을 비롯하여 총 39종을 들고 있다. 이처럼 그는 처음으로 규원사화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1960년대의 규원사화 인식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신학균이 규원사화의 번역을 결정한 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冊을 번역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一年前 몇몇 先輩들과 檀君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本書 번역에 대한 말이 나와 上古史 硏究와 在整理라는 意義를 생각하여 이를 着手하기로 하였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본격적인 ‘상고사 연구와 재정리’라는 당시 역사학의 당면과제인 식민사학 해결 기반조성이라는 의미에서 번역에 착수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이병도 등을 중심으로 한 한민족 상고사 인식의 체계에 대한 본질적인 해체를 고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신학균의 규원사화 번역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단순히 개인적인 관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규원사화 번역에 정명악(鄭命岳)·최동(崔東)·윤치도(尹致道) 등 일련의 단군연구자들의 조언과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윤치도도 “그 동안 동학 신학균(申學均)씨에 의한 규원사화의 번역출판을 보았고, 정두옥(鄭斗玉)·문정창(文丁昌) 등 제씨의 상고사연구에 관한 출저(出著) 등 우리 상고사연구에 많은 노력의 경주가 있었을 뿐더러 우리나라 사학계의 괄목할만한 각성이 엿보임은 참으로 이민족의 장래를 촉망할만한 일이며.”라고 기술하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규원사화 번역은 이러한 1960년대 상고사 연구 경향 속에서 기왕의 상고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식민사학 극복 방안을 모색하던 일련의 학자들의 결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의 활동은 1970년대로 이어졌다. 이처럼 신학균을 비롯한 민족사학자들이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이처럼 규원사화는 항일전쟁기 1925년『단전요의』등에 인용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항일전쟁기에 양주동 등이 비장하던 규원사화는 국권회복 이후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김수일 소장본과 신학균의 번역본은 이후 규원사화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1968년 신학균의 번역본이 나온 배경에는 식민사학 극복이라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이다. 

 2) 연구의 본격화와 위서설의 등장(1970·80년대)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규원사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번역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신학균은 1973년 명지대학교 문고본으로 규원사화를 간행하였다. 특히 명지대학교 설립자 유상근은 이 책의 간행이유를 서구문화의 범람 속에서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확인하는데 두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움직임은 규원사화가 한국의 지식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75년 10월 28일에 “한국사의 시폭(時幅)과 강역을 바로잡고 한국사의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뿌리 뽑겠다.”는 취지 아래 이루어진 ‘국사찾기협의회’의 결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식민사학에 대한 전면전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이 시기까지만 해도 단군을 부정하는 식민사학 이외에 대체적으로 규원사화를 진서로 받아들이고 있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1970년 중반 민족사학의 본격적인 등장과 더불어 규원사화 연구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이를 반영하여 한영우는 1975년 「17세기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북애의 규원사화에 대하여-」에서 규원사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규원사화가 진서라고 확신한 그는 여기에서 그 대체적인 내용을 소개하면서 북애의 문화·역사 의식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그는 ‘광범위한 민속자료의 이용’, ‘언어적 해석방법의 도입’, ‘문헌고증학적 방법의 채용’라고 하는 점에서 규원사화를 역사서로 인정하였다. 아울러 그는 강목체와 정통론에 치우친 유가사학이 조선을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도 시대가 내려갈수록 동이문화의 재인식과 자부로 전환되는 동기를 규원사화에서 주목하면서 규원사화의 출현과 근대 민족주의사관을 근본적으로 도가사학의 영향이라고 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한영우는 신채호가『단기고사(檀奇古史)』「중간서(重刊序)」를 썼다는 점, 박은식·최남선의 동이(東夷) 중심 서술 등을 들어 도가사학이 근대민족주의사학에 미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그는 규원사화를 도가사학의 대표적인 사서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학계의 연구성과는 아세아문화사가 규원사화를 비롯한 선가 사서류를 발행한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규원사화 평가는 정진홍(鄭鎭弘)에게도 이어져 종교학으로 그 연구 범위가 확장되었다. 아울러 한영우의 연구성과는 1977년 7월 16일 한국고전연구회에서 ‘안호상이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니다’를, 윤치도가 ‘규원사화’를 강의하는 등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사를 연구한 송찬식은 1977년 규원사화를 진서로 인정하는 학계의 연구경향 속에서도 ‘위서설’을 제기하였다. 물론 이는 학계의 연구성과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점을 들었다. (1) 『문헌비고』등의 고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과 위서『단기고사』보다 후대에 나왔다는 점에서 1920년대의 위서에 불과하다. (2) 민기(民氣)·선민(先民) 천주(天主)는 효종 숙종대의 용어가 아니다. (3) 말갈·여진을 우리민족의 분파로 보고 만주의 고토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근대 대종교 내지 민족주의사학의 주장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는 어떠한 학문적 연구성과를 기술한 논문이 아니라 단순히 대중지에 의문을 제기한 수준이었다. 
 그의 주장은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1987년까지 송찬식의 주장이 통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히려 1980년 11월 17일 천관우(千寬宇)는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규원사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서 한영우의 주장을 근거로 규원사화의 위서설을 부정하였다. 
 더욱이 1980년 9월 29일 단군정신선양회의 주체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기독교목사 김산(金山)도 규원사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기독교계에서도 일정부분 규원사화의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영훈은 1981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규원사화를 주제로 한 최초의 정치학 석사학위논문을 받는 등 규원사화 진서론은 더욱 강화되고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정영훈은 규원사화가 선행 선가들의 사상적 축적을 바탕으로 성립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 후대의 민족의식 내지 민족노선이 바로 이 선가계열에서 흘러나왔다는 점에서 규원사화를 근대민족주의의 원류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처럼 근대민족주의 출현배경을 규원사화에서 찾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선가-대종교-국학이라는 한민족 선가의 흐름을 국학-신도-국수주의라는 일본 사상의 궤적과 대비시키면서 민족의식의 성장이 일본에 비해 늦은 이유를 선가사상의 ‘매몰’에서 찾았다. 
 1980년대에는 1982년 윤이흠(尹以欽)의 연구에서 보듯, 규원사화의 의미는 정치·역사학을 넘어 종교학에서 더욱 강조되는 경향성을 보였다. 아울러 국문학에서는 이상택(李相擇)의 연구가 주목된다. 물론 역사학계에서도 송호수·박성수 등이 꾸준히 규원사화의 연구를 이어갔다.  
 이러한 일연의 연구는 규원사화는 사회적으로 더욱 주목을 받게 되고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이는 한학자 김재환이 1981년 9월 간행한『단국총사(檀國總史)』에서 규원사화 등 선사류 뿐만 아니라, 수백권의 관련사서를 조사하여 기자·위만조선의 허상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1984년 박성수는 동아일보에 「북애의 반 사대 민족사관」이라는 제목으로 투고하였다. 여기에서는 그는 북애의 사관이야 말로 민족사관의 모델이라고 주창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고동영은 1986년 5월 새로이 규원사화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영우은 1986년 11월『민족지성』에서 자신의 주장을 다시 강조하였다. 더욱이 규원사화의 사실성을 밝힌『주간조선』연재물「단군조선 이렇게 말살되었다」가 1986년 9월 책으로 출간되어 규원사화의 존재성과 그 사실성은 일반에 더욱 깊이 확산시켰다. 
 식민사학 극복을 위한 이러한 움직임에 친일 식민사학자 이병도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연구자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다. 그 결과 1986년 12월 조인성이 이병도의 구순기념 한국사학논총에 스승의 뜻에 따라(?)「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조인성은 이 논문에서 본격적인 규원사화 위서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대체로 규원사화가 진서라고 믿는 학계와 사회의 합의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위서설을 주장하였다. 
(1) 규원사화의 백두산에 대한 어휘고증은 한지서(韓鎭書)가 1823년에 간행한 『해동역사(海東歷史)』「지리고(地理考)」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규원사화는 1823년 이후에 나온 것이다. 특히 백두산을 설명하는 부분은 규원사화와 해동역사에 고려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이라고 하여 모두 잘못 인용되어 있다. 이는 고려사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서를 저본으로 한 것임을 의미한다. 규원사화는 근대에 알려졌으므로 북애가 해동역사를 참고한 것이다. 
(2) 규원사화의 「단군기」에 나온 문화지개발(文化之開發)의 ‘문화’는 20세기초 정치·경제 ·예술 등의 일본 번역어로 Kultur 또는 Cultur의 뜻이다. 이점에서 문화라는 용어는 문치교화(文治敎化)의 뜻이 아니다. 
(3) 규원사화에 인용된 각종 문헌자료의 대부분은 한치윤(韓致奫)의『해동속사(海東續史)』(1800-1814)에 의거하였다.
(4) 「단군기」의 금양이언서병용(今若諺書幷用) 이하의 구절은 1900년 전후 어느 시기에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5) ‘한 조각의 진역’, ‘한 줄기의 유민’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우리민족의 처지를 가르키는 말이다.
(6) 규원사화가 김광의『동사사강』에 최초로 인용된 것을 보면 그 저술연대는 1928년 이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일 것이다.
 따라서 규원사화는 1910년 이후에 쓰여진 위서이다. 
 이처럼 규원사화가 사학계 일각에서 부정되는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소설· 자료집 등 단군관계 출판물이 쏟아져 베스트셀러 상위 10을 석권하였다고 언론에 보도되는 등 일반 대중들은 위서설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이상시(李相時)는 1987년 2월「『揆園史話』에 대한 文獻考證」을 발표하여 기존의 연구성과를 종합하면서 규원사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북애의 역사·문화의식을 조명하였다. 그는 문헌고증에 집중하여 구체적으로 규원사화에 국내 사서 9종(선사 사서 6종, 유가 ·불가 사서 3종)·중국 사서 34종 모두 43종이 인용되었음을 밝혔다. 이는 규원사화가 선사류만을 의지하여 기술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존재한 거의 모든 역사서를 망라하여 저술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규원사화의 문헌고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책에서 강조하였다.  
 이상시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조인성은 위와 같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7년 3월 다시 한편의 짧은 글을 발표하였다. 이글에서 그는 1920년대말 시흥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서 등사하여 규원사화를 판매하였다는 이유립이 정영훈에게 했다는 회고담, 이선근의 소장본에 ‘A.D. 1932. May’라고 기록된 점을 주된 근거로 단군교에서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허황된 내용의 규원사화가 갑자기 윤덕영의 집에서 나왔으므로 윤덕영의 위작.”이라는 이병도의 주장을 근거로 규원사화가 단군교(윤덕영)의 위서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조인성이 이병도의 주장을 규원사화 위서설의 핵심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의 존재를 부정한 일제도 규원사화의 내용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제의 상고사 날조와 왜곡에 일조한 이병도의 사견을 규원사화 위서설의 근거로 삼는 것은 학자의 자세가 아니다. 그것도 실증으로 확인된 것이 아닌, 이병도의 근거 없는 ‘낭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기술한 사실은 조인성이 이병도의 구순기념 책자에 실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어서 조인성은 이병도의 애제자 이기백이 주도한 1988년 2월『한국사시민강좌』에「「揆園史話」와 「桓檀古記」」를 투고하여 기존의 규원사화 ‘위서설’을 재차 강조하였다. 1988년 1월 5일자 『한국경제신문』「논설」에 조인성의 주장이 실리는 등 규원사화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식민지근대화론에 매몰된 일부 학자들의 본격적인 반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친일사학자라고 평가 받는 이병도의 영향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모대학 출신과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연구자들이 규원사화 위서설을 앞장서 퍼트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신채호·박은식·김교헌 등의 근대민족주의사학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자부하고 현대 민족주의사학자들의 대응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최광렬의 비판에 이어서, 이상시(李相時)는 1988년 3월『민족지성』에 송찬식·조인성의 규원사화 위서설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1) 숙종대(1677년)의 을지문덕 사우(祠宇) 건립기사가 숙종실록에 있고 이에 대해 북애가 언급하고 있으므로 당대에 쓰인 것이다. 
(2) 친일파 윤덕영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규원사화 간행을 지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더구나 이는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3) 이유립의 주장은 규원사화의 단군 존속연대와 자신이 신봉하는 『환단고기』의 그것과 맞지 않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4) 민기(民氣)는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천주(天主)는『지봉유설(芝峯類說)』에 나오는 말로 근대어가 아니다. 특히 문화라는 용어는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약자이지, 컬쳐(Cultur)의 번역어가 아니다. 그리고 금약이언서병용(今若以諺書幷用)은 한글을 사용하면 어리석은 백성도 단군이 ‘박달임금’이라는 뜻을 알 수 있다는 점과 한글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5) 만주가 우리의 역사무대에서 살리진 것은 발해 멸망 해인 926년이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6) 국내 사서 9종과 중국 사서 33종 총 43종의 역사서를 활용하였다. 특히 세조실록에 『진역유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서가 언급되어 있다. 
(7) 선가사서가 간행될 수 없는 조선의 구조적 모순을 간과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진서의 『해동역사』에 규원사화가 인용되지 않은 것을 근거로 규원사화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것은 선가를 이단시한 유가의 경향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결과이다. 그리고 규원사화는 명대 이전의 문헌만을 인용하였고, 해동역사는 청대의 문헌까지 이용하고 있다. 이점에서 규원사화가 해동역사보다 간행시기가 앞선 것은 분명하다.  
 (8)김광의『대동사강』·이창환의『조선역사』·정진홍의『단군교부흥경략』·서계수(徐繼洙)의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1938) 등은 오히려 규원사화가 근대 이전에 저술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9) 규원사화의 「단군기」는 진역유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임이 틀림없다. 특히 규원사화에 인용되지 않은 중국사서『죽서기년(竹書紀年)』·『후한서(後漢書)』의 동이(東夷)관계 기사는 규원사화의 그것과 중요골자·연대가 서로 부합하고 있다. 이점은 규원사화가 진역유기를 저본으로 하였다는 증거이다.
 이후 1988년 이상시는 『대한변호사협회지』와 『정우』에 이와 같은 내용을 실어 조인성의 위서설에 대한 반박을 이어갔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1970년대는 주로 번역서를 중심으로 규원사화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1972년 국립중앙도서관이 김수일 소장본이 진본임을 판명한 것은 규원사화 연구의 한 핵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970년대 중반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영우는 본격적인 규원사화 연구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17세기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북애의 규원사화에 대하여-」을 발표하였다. 이에 힘입어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민족사학은 대중속으로 확산되었다. 1977년 송찬식이 규원사화 위서설을 제기하였으나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오히려 1981년 정영훈의 석사학위논문이 나오는 등 80년대 전반기의 규원사화 연구는 역사학을 넘어 종교학·국문학으로 확산되는 조짐을 보였다. 물론 이는 규원사화 위서설이 규원사화 연구와 인식의 공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1980년 중반 이후 이에 위기를 느낀 조인성을 필두로 ‘식민사학자들’이 위서설을 제기하면서 이상시 등이 이에 반격을 가하는 연구양상을 보였다. 

 3) 진위논쟁의 격화와 연구의 심화(1990년대)
 1990년대에 들어와 규원사화 연구는 조인성의 위서설에도 흔들림 없이 진행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연구자는 정영훈(鄭榮薰)이다. 그는 조인성의 주장을 “우리 정신사를 유가들의 사고수준만 염두에 두고 논하는 ‘단견의 소치’.”라고 비평하였다. 특히 그는 1990년 「揆園史話에 나타난 民族意識」을 발표하여 규원사화의 연구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정영훈은 북애와 규원사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 규원사화는 선가 사상의 영향 아래 양난이후 성립된, ‘아족(我族)’으로써의 국사를 명백히 자각하면서 저술된 책이다. (2) 북애는 양난 이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유한 조선 역사와 문화정통을 회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실성(失性)의 현실과 정면 대결하였다. (3) 규원사화의 민족의식은 민족국가의 재거(再擧)열망, 고유문화전통에 대한 집착·계승·보전을 추구한 것으로 요약된다. (4) 규원사화는 단군민족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대중화되었고, 근대 저항민족주의의 활력소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정영훈의 연구는 규원사화의 역사적 위치와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1990년대 대표적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괄목할만한 정영훈의 연구성과가 발표된 2달 후 1990년 9월 박광용은 전반적으로 조인성의 위서설 위에서 위서 주장을 되풀이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사학에 대한 ‘거부감’을 바탕으로「대종교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을『역사비평』에 발표하였다. 
 그 제목에서 학문의 객관성을 저해하는 ‘선동가’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민족종교임을 주장하는 이른바 유사종교단체들.”이라고 하여 대종교를 ‘유사종교’라고 폄하하였다. 이는 대종교를 유사종교단체로 매도하여 탄압하던 일제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박광용은 규원사화「만설」의 “경주 첨성대는 천수년 지났는데.”라는 내용을 근거로 그 대를 1830년-1940년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1901년 5월 3일자『황성신문』「논설」의 필자 북애자(北涯子)를 거명하면서 규원사화의 저자를 1910년대 조선사편찬위원회나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 관련자로 추정하였다. 
 물론 이는 규원사화의 ‘연일청론(連日淸論)’을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 또는 자치론적 민족개량주의 논리와 결부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동양삼국동맹론이 친일 개화론자들의 논리라는 전제 하에 규원사화의 논리를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와 일방적으로 등치시켰다. 이 가설 위에 규원사화의 논리는 바로 대동아공영권의 그것과 같은 것이므로 규원사화는 윤덕영 등의 개화친일세력의 위작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은 박광용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를 내놓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모두 친일세력만이 삼국동맹론 또는 일선동조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격한’ 그의 주장은 한국근대사의 연구성과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반역사학적 태도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삼국동맹론을 주장한 최익현·안중근 등도 친일파이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근대 대종교세력 등 민족주의자 또는 근대 평화세력은 모두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 선전구호’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이병도의 주장 위에 성립된 위서설은 “친일파가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승국과 강수원(姜壽元)이 이러한 박광용의 주장을 적절하게 비판하였다. 임승국은 박광용이 “웅비(雄飛)라는 용어를 일제가 말들어냈다며 대한민국 군대를 비난한 것.”에 대해 웅비(雄飛)의 출처가『후한서』「조온열전(趙溫列傳)」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규원사화의 삼신(삼일)사상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모방했다는 주장에 대해 삼일(三一)이라는 용어가 『사기』「봉선서(封禪書)」와 『한서(韓書)』율력지(律歷志)에 나오고 있고, 신향(神鄕)이라는 말도『漢書』에 나온 것임을 밝혀 박광용의 비학문적 태도를 질타하였다. 박광용은 이러한 지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있지 않다. 이는 자신의 논리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이후에도 규원사화에 대한 연구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진행되었다. 1992년 박성수, 1993년 심백섭의 석사학위에 이어 특히 정영훈은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박사학위 논문『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을 발표하였다. 이는 그의 규원사화론이 학문적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99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는 예술분야로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연구가는 1994년「우리나라 무용과 음악의 발달」을 쓴 서정자이다. 
 이러한 규원사화 연구 경향은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켜 김성구가 번역서를 간행한 배경이 되었다. 규원사화 등 선사에 대한 일반의 뜨거운 반응과 관심은 1997년 12월 단군학회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199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는 초기부터 박광용의 주장으로 연구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박광용의 규원사화 위서설은 학계로부터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박광용의 가설은 학문의 수준을 넘어서 민족진영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비난만 초래하였다. 임승국·정영훈 등은 박광용의 주장에 적절하게 응수하였으며 규원사화 연구 수준은 더욱 깊어졌다. 무엇보다 정영훈과 심백섭이 박사학위와 석사학위 논문을 생산하는 등 규원사화 연구는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무렵 정영훈의 연구성과는 큰 주목을 끌었다. 연구분야도 예술론으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4) 시민사회의 활동·남북동연구와 연구의 다양화(2000년대-현재)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조인성은 새로운 내용이 없는 위서설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어느 일본 학술잡지에 위서설과 관련한 글을 투고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여운건은 “한국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기본관점이라고 하여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는 기원전 10세기경이며 읍제국가 형태였다.”라는 조인성 주장의 핵심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제의 한민족 상고사인식을 상당수의 한국상고대사 연구자들이 답습하고 있음을 스스로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질타하였다. 아울러 그는 조인성이 규원사화에 대해서도 위서라는 가설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설을 학계 일반의 평가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조인성의 주장을 단군의 역사를 말살한 일제 식민사관의 연장선에 있다고 한 여운건의 평가는 대단히 타당하한 지적이다. 이처럼 조인성의 가설은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반하여 진서론 위에 이루어진 규원사화 연구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김명하(2002년)·박병섭(2003년)·김한식(2004년)은 규원사화를 상고사 연구에 적극 활용하여 그 지평을 넓혔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시민단체들이 규원사화 등 단군관련 고기류의 보급과 그 인식의 확산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 대표적인 단체는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이다. 이 단체의 주최로 2002년 열린 학술회의에서 박성수는「환단고기와 규원사화」를 발표하여 규원사화의 가치를 되짚어보았다.  
 김한식은 2003년·2004년에 걸쳐 상고사 관련 문헌비판을 주도했다. 그는 2003년 논문에서 규원사화의 영향을 받은 사서로 김교헌의『신단실기』(1914)를 들어 규원사화의 역사성을 한층 강조하였다. 2004년 논문에서 그는 조인성 등의 위서주장을 비판하면서 대체로 규원사화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드러냈다. 
 2002년의 시민사회의 활동은 2004년에도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30일 ‘국사찾기협의회’ 주체로 ‘중국동북공정 대비 단군조선사광복 국민대토론회’를 개최하고 ‘국사찾기협의회장’인 고준환이 「환단고기 규원사화와 단군조선사」를 발표하였다. 물론 이는 기존의 규원사화론을 정리하는데 그쳤으나, 규원사화 논리가 중국의 한민족 상고사 왜곡의 방어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이는 규원사화가 중국과의 역사전쟁의 기본서로 활용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200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의 특징으로 남북공동연구를 들 수 있다. 북한 원로 학자 손영종의 글은 남북이 함께 한 연구라는 점에서 규원사화 연구사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물론 손영종이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내놓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2005년-2006년 상고사 남북공동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이는 남북의 공동역사연구의 출발이 한민족 상고사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대목이다. 아울러 남북이 중국의 한민족 상고사 왜곡에 공동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한편, 김한식·김성환은 규원사화 연구를 철학분야로 확대시켰다. 이들은 주로 규원사화에서 엿볼 수 있는 한국인들의 자연관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김성환은 위서설을 펼치고 있는 조인성 등에 대해 “학자들이 대체로 근대적 역사학의 선입관에 사로잡혀 전통적인 도교 역사서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박광용의 경우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다소 편향된 분석을 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규원사화의「조판기」에 한국도교(선교·신교)의 한국적 창조신화의 전형이 담겨 있다고 평가하였다. 
 신운용은 2004년 조선의 건국배경 중의 하나를 여말선초에 등장한 단군세력라고 설명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단군론자 북애에 착목하면서 규원사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물론 그는 북애의 논리를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민족주의의 전사(前史)라고 평가하였다. 
 이후 이재원도 2005년 규원사화 관련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북한학자 김봉환·손영종 등의 논문들이 단군설화를 규원사화와 적극적으로 관련지었다고 평가하면서 『단군설화집』 43편 중 2편이 규원사화를 인용하였음을 밝혔다. 이는 북한의 상고사 연구에서 규원사화가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과 북한의 규원사화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러한 가운데, 2005년과 2006년은 규원사화 연구에 한 획을 긋는 해로 기록될 만한 해였다. 한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정영훈이 중심이 되어 ‘환단고기·규원사화 등 선가계 사학에 대한 남북공동연구’가 2년에 걸쳐 진행되어 2006년 11월에 결과물을 제출하였다. 
 이 때 발표된 눈문은『한민족연구』에 수합되었다. 남한에서 정영훈·김성환·서영대가, 북한에서 사회과학원의 최인철과 문혁이 참여하였다. 이들 중 규원사화에 대한 연구는 정영훈과 최인철이 맡았다. 정영훈은 근대민족사학을 개괄하는 동시에 위서설을 비판하면서 규원사화와 같은 선가류 사서가 근대민족주 태동의 배경이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최인철의 규원사화론은 북한의 규원사화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는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1) 규원사화에 국내외 문헌 40여종이 인용되고 있다. 특히 중국사서는 대명일총지(『大明一統志』) 이전의 고전이 활용된 반면, 1678년 이후의 국내 서적은 인용되지 않았다. 이점에서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다.  
(2) 규원사화의 문장이나 용어는 다른 단군관계 비사들(『단기고사』·『단군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래된 것이며 후세에 추가된 내용이 별로 없다.
(3) 규원사화「단군기」의 47대 왕명, 통치년간 기록도 『조대기』나 『진역유기』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4) 규원사화의 인명·지명은 대부분이 고대시기의 인명·지명으로 근대 이후 가필되었거나 조작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5) 규원사화의 문화라는 용어는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약자이며 북애의 개탄은 양란 이후 조선의 현실을 읊은 것이다.
 최인철은 한국의 많은 규원사화 연구자들처럼 규원사화를 대단히 진보한 사서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의 규원사화론이 이상시의 연구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도 보였다. 그럼에도 한민족 상고사 연구에 규원사화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활용하면서 논리적 근거를 마련한 북한 학자의 자세는 남한 연구자보다 진일보된 면을 보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처럼 정영훈·최인철은 대체적으로 규원사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 때 함께 한 김성환은 「대종교계 사서의 역사관」을 기술하면서 그 배경으로써 규원사화를 착목하지 못하였고, 서영대는 규원사화 위조론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이점에서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남북공동연구는 색을 바래는 모습을 연출한 점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2006년 이덕일·김병기는 규원사화를 통해 치우의 의미를 추적하였다. 이어서 민영순은 2008년 규원사화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이는 규원사화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그 중요성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2009년부터는 규원사화 연구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연구기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200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점에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와 그 관계기관이 최근의 규원사화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 대표적인 학자는 임채우이다. 그는 규원사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2009년부터 2013년까지 2009년·2010년·2011년·2013년 4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2009년 논문에서 규원사화 위서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이어서 임채우는 규원사화를 통해 한국선도(도교)의 위상·특징·전통을 확인하는 일련의 작업을 시도하였다. 2010년 논문에서는 한국선도의 제천(祭天) 형식을 규원사화를 통해 규명하였으며, 2011년의 논문에서는 규원사화를 한국선도의 기원과 근거를 확인하는데 활용하였다. 특히 2013년의 논문에서는 청학집과 규원사화의 비교를 통해『사문록(四聞錄)』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규원사화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진전된 연구로 평가된다.  
 이처럼 규원사화가 다양하게 연구되는 가운데서도 위서설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규원사화 연구에 끼치는 그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이상에 보았듯이,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는 주로 정치·철학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의 특징은 위서설 연구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규원사화가 위사가 아니라는 연구성과와 인식의 확대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또한 시민단체들이 중국의 한국 상고사 왜곡에 대한 대항이론을 규원사화에서 찾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한국시민사회와 일련의 학자들이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을 규원사화 등 선가류 사서 연구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유가의 입장에서 서술된 한국사는 일반에 더 이상 통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2000년대에 들어와 남북이 규원사화를 매개로 상고사 인식을 공유하였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2006년 남북학술대회는 이러한 가능성을 규원사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점에서 이 학술대회는 규원사화 연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남북 공동연구가 정치적 이유로 진척되지 못한 점은 한민족 구성원 모두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그리고 이시기의 또 다른 특징으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관계자들의 연구성과에서 보듯, 이전시대보다 연구자가 양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는 규원사화 연구의 깊이와 폭이 다양해진 결과에 따른 것이다. 이점에서 앞으로 규원사화 등 선사(仙史)와 선교(仙敎) 연구의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3. 향후 연구과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68년 신학균이 규원사화 번역본을 낸 이후로 규원사화 연구는 다양해졌고 그 수준도 높아졌다. 하지만 앞으로 규원사화 연구를 넘어서 ‘규원사화학’ 탄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연구과제가 쌓여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약적인 연구과제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크게 대과제와 소과제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대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선가사관(仙家史觀)의 정립이 필요하다. 
 한국사를 보는 시각이 여러 가지 있음을 분명히 보여야 한다. 유가사관·불가사관·도가사관·기독교사관·공산주의사관·자유주의사관 등 모든 사관은 역사를 해석하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역사교육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이지만, 사관이 연구방법이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역사학의 기본을 알릴 필요가 있다. 
 특히 선도사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역사 기술은 사관에 따라 너무나 다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규원사화 연구 발전을 위해서는 선교사관의 확립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2) 선가류 사서와 경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연구기반 구축도 시급한 문제이다. 
유가사학이 한국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가사학의 이론을 연구하고 정착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선사(仙史) 연구에 대한 지원과 기관의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 이 점에서 단군관련 단체들이 공동으로 단군관계 종합연구기관(대학원) 설립을 위한 협의회를 구성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그리고 남북의 공동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역사인식의 공유는 통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소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체호 등 선가사가(仙家史家)들의 상고사 기술과 규원사화를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신채호가 1931년 6월 18일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은 근래의 위서설과 관련하여 대단히 주목되는 대목이다.

위서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태종의 焚書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 될 책이 적지 않지마는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 쉽다.
 
 여기에서 보듯이 신채호는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위서로 보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규원사화를 접했다면 이 역시 위서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2) 규원사화의 중요 용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규원사화 속에 담겨져 있는 용어의 출처는 신향(神鄕)(『한서』), 三一( 『사기』), 대고(大誥)(『서경』), 대과(大塊)(『장자』), 주신(主神)(『일본서기』), 민기(民氣)(『여씨춘추』), 선민(先民)(『서경』), 천주(天主)(『天主實義』) 등이 밝혀졌을 뿐이다.
 다른 사서에서 규원사화에서 사용된 용어를 국내외의 사서에서도 찾을 필요가 있다. 이는 규원사화의 성격을 확인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선민’이라는 용어는『세종실록』에서도 확인된다.
3) 규원사화의 한국사상사 상의 위치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의 “이도흥치(以道興治)”, 신라 낭랑비서문의 “국유현묘지도왈풍류(國有玄妙之道, 曰風流)”, 고려 이승휴의 홍익인간(弘益人間), 고려의 팔관회, 여말선초의 단군론 등 규원사화와 선(仙)의 관계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구려 호태왕비의 이도흥치의 도는 선도(仙道)임이 분명하고 늦어도 호태왕비가 세워진 414년(장수왕 2)까지는 선도에 의해 고구려가 운영되었음을 이 비는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의 건국배경으로 선도가 강력히 작동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규원사화가 나올 수밖에 없는 가강 중요한 배경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규원사화와 대종교계통의 사서와 경서(經書)의 비교연구도 필요하다. 이는 규원사화가 적어도 여말선초와 근대를 잇는 매개체였음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4) 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이 요구된다.
『한(환)단고기』나 『단기고사』의 별자리 연구에서 보듯, 규원사화의 진위를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저인 방법을 규원사화 연구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한(환)단고기나 단기고사와 같은 결과라 나올 것이다.

5) 민족의식에 대한 동시대 타국 (청국과 일본 등)의 상황을 비교 연구할 필요가 있다. 
  민족의식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전인류사적 측면에서 주변국과 비교연구가 절실하다. 이는 선교사가 특수사가 아닌 보편사 속에서 성장해왔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해야만 하는 연구이다. 특히 한민족의 선교와 일본의 신도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밝히는 일도 아울러 요청된다. 

6) 연구분야를 다양화해야 한다.
  신학·국문학·민속학·예술학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규원사화를 연구해야 한다. 이들 분야에서 연구된 규원사화는 아직 초보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 분야의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7) 위서 주장에 대한 반박기술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까지 연구만으로도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님이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더는 위서설을 반박하는 일은 무의미한 작업이다. 이제부터는 통사적이고 미시사적으로 더욱 치밀한 연구가 요청된다. 

4. 맺음말
 글쓴이는 이상에서 규원사화가 연구되어온 과정과 그 의미를 짚어보면서 앞으로의 연구과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항일전쟁기 1925년『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인용되면서 규원사화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규원사화는 1925년 이전의 사서에 활동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항일전쟁기 양주동 등이 비장하던 규원사화는 국권회복 이후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났다. 규원사화 연구사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신학균이다. 그는 최초로 규원사화를 번역 출간하여 연구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1970·80년대는 주로 번역서 중심으로 규원사화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이 1946년 김수일 소장본이 진본임을 1972년에 판명한 것은 규원사화 연구사에 기록되어야 할 일대 사건이었다. 이로써 규원사화의 연구가 촉진된 발판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1977년 송찬식의 위서 주장도 있었지만 규원사화 연구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1981년 정영훈의 석사학위논문이 나오는 등 80년대 전반기에는 규원사화 연구가 역사학을 넘어 종교학·국문학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1980년 중반 이후 조인성을 필두로 ‘위서설’이 등장하면서 이에 이상시가 반격을 가하는 연구양상이 전개되었다. 
 199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는 1990년초반부터 박광용의 ‘광적’인 주장으로 연구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이에 대해 임승국·정영훈 등이 적절하게 대응하였으며 연구 수준은 더욱 깊어졌다. 무엇보다 정영훈의 박사학위 논문과 심백섭의 석사학위 논문이 나오는 등 연구수준은 더욱 발전하였다. 이 무렵 정영훈은 괄목할만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그 연구분야도 예술론으로까지 확대되었다.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는 전 시대보다 정치·철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연구의 다양화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규원사화 연구의 특징은 위서설이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규원사화가 진서라는 연구성과와 인식의 확대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시민단체와 학자들이 중국의 한국 상고사 왜곡에 대한 대항이론을 규원사화에서 찾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상고사 연구 방향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며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한 필사의 노력에 따른 결과이었다. 유가의 입장에서 서술된 한국사는 더 이상 주류시각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남북이 규원사화를 매개로 상고사 인식을 공유하였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2006년 남북학술대회는 이러한 가능성을 규원사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지만 더 이상 남북의 공동연구가 진척되지 못한 점은 남북이 서로 반성해야 할 점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다른 특징으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관계자들이 적극 참여는 등연구자의 다양화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는 여러 방면에서 규원사화를 연구한 결과에 따른 것이지만 이전시기보다 선사와 선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깊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점은 규원사화 연구의 미래를 밝게 해 준다. 
 앞으로의 연구과제는 크게 대과제와 소과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과제로 선교사관의 정립이 필요함이 역설된다. 선교사관의 정립 없이는 규원사화의 올바른 평가는 불가능하다. 유가들이 지배해온 한국사를 선도 사관에서 보면 많은 부분 해석을 달리할 수 있고 새로운 사실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구자의 확충과 연구기반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소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규원사화 속의 용어 대한 엄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2) 한국사상사 상의 규원사화의 위치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더욱 기우려야 한다. (3) 규원사화 내용의 과학적인 논증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5) 신학·국문학·민속학·예술학 등의 분야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규원사화를 연구해야 한다. (6) 규원사화 관련 논문에서 위서설의 기술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현대 ‘韓國仙道’의 전개 양상과 ‘丹學’ -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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