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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무령왕릉 추보》 (6) 이빨은 출토지점도 모른다
이빨 고고학이 참상을 빚었다는 지적은 이미 내가 2001년 무렵에 했다. 나는 관재에 대한 분석도 없이 그 관재를 밤나무라고 지적한 발굴보고서 내용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이를 '밤나무 고고학'이라 명명했듯이, 무령왕릉에서 유일하게 인골로는 건진 어금니 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눈대중 감정을 '이빨 고고학'이라 표현했다.
한데 관재는 정작 분석 결과 밤나무와는 하등 거리가 먼 일본 열도 특산 자생종인 금송으로 드러났으며, 이빨 역시 발굴보고서가 인용한 30대 여성 운운한 감정이 눈대중에 지나지 않았음이 이후 백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지점에서 이 어금니 문제를 다시금 생각해야 할 대목은 이 어금니는 출토 지점을 모른다는 점이다. 그 출토 정황에 대해 김원룡은 발굴보고서에서 "구치臼齒의 법랑질만 남은 것이 1개가 바닥을 쓸은 잔재물에서 검출되었는데..."(46쪽)라고 했다.
나아가 김원룡은 "그 결과 쓸어 담은 진토 속에서 조그만 구슬들과 쇠장식 편들이 나왔는데 특히 검사 결과 30세가량의 여성의 것이라고 밝혀진 소구치小臼齒가 1개 나온 것은..."(16쪽)이라고 했다.(이상은 졸저 << 직설 무령왕릉 >>, 메디치미디어, 2016, 266~267쪽 참조)
단언한다.
발굴보고서 출간 이후 각종 소설을 양산하는 빌미를 양산하는 '왕비 어금니'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 출토 지점을 모른다.
둘째, 그것이 왕비 것인지도 모른다
출토지점도 모르는데 그것이 무슨 얼어죽을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이 무슨 30대 여성 운운하는 근거가 된다는 말인가?
저 이빨은 눈으로 드러난 큰 유물들을 대강 건져낸 다음 아카시아 뿌리로 뒤엉킨 그 바닥을 삽으로 박박 긁어내고 빗자루로 쓸어담아 쌀가마니에 쑤셔박은 쓰레기 더미에서 확인한 것이다.
한데도 그것을 왕비 것으로 추정 운운하는 것은 담대하기가 하늘을 찌른다.
어떻든 이 눈대중 이빨 고고학을 토대로 해서 이후 한국고대사학도들이 쏟아낸 각종 '소설'은 차마 내가 그들의 체면을 고려해 졸저에서는 실상을 공개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점점 바뀌어 낱낱이 까발릴까 생각 중이다.
《직설 무령왕릉 추보》 (4) 崩에서 박탈하는 특권
崩이라는 글자는 의미를 한정 혹은 제한하는 부수가 山인 데서 엿보듯이 애초에는 산이나 둔덕 같은 사물이 무너짐을 묘사하는 동사다. 역대 자전 집성집인 강희자전 이 글자 항목을 보면 그 음을 《廣韻》을 인용해서는 北과 滕의 반절(北滕切)이라 하고 《集韻》과 《韻會》를 끌어다가는 悲와 朋의 반절로서 音은 繃이다(悲朋切,音繃)고 했으니, 그 소리가 지금의 ‘붕’과 같거나 흡사함을 추찰하겠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說文》을 끌어다가 이르기를 “산이 무너지는 것이다. 山이 뜻, 朋이 소리인 형성자이다(山壞也,从山朋聲)”고 했으며, 《玉篇》을 끌어다가는 “훼손한다는 뜻이다(毀也)”고 했다. 나아가 《禮·曲禮·註》에서 형병郉昺이 한 말을 끌어다가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붕이라 한다(自上墜下曰崩)고 했다.
이 글자를 쓴 전고로는 《詩·小雅》에 보이는 말, 다시 말해 “남산과 같이 장수할지니 이지러지도 말며 무너지지도 말지어다(如南山之壽,不騫不崩)”를 드는가 하면, 《春秋·僖十四年》에 보이는 “가을 8월 신묘일에 사록이 붕괴했다(秋八月辛卯,沙鹿崩)는 예문을 들었으니, 이에 대한 《註》에서는 ”사록은 산 이름이다(沙鹿,山名)고 했다.
나아가 강희자전은 이 崩에는 “또한 조락한다(又殂落也)”는 뜻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런 실례로는 《穀梁傳·隱三年》 조에 보이는 “(죽음을) 높여서 崩이라 하고, 그 뜻을 깊게 해서도 崩이라 하며, 존숭하여 崩이라 한다(高曰崩,厚曰崩,尊曰崩)는 어구를 들었다.
기타 崩은 명사로써 성씨에도 쓰임을 들었지만 이는 논외로 친다.
이에 모든 한자 자전의 조종(祖宗) 혹은 남상(濫觴)을 이루는 설문해자를 다시금 볼지면 저 풀이와 같은 어구가 보이면서 朋 왼편에 ‘阝’를 부수자로 붙인 글자를 소개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古文의 崩이라는 말을 덧붙인 대목을 본다. 단옥재가 설문해자 전체를 주석하면서 해당 글자에 설명하기를 “산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것을 인신하여 천자의 죽음을 일컫는데 사용한다. 山과 朋을 이용한 형성자이다. 음은 方과 騰의 반절이다.(山壞也。引伸之天子死曰。从山。朋聲。方滕切)”고 했다.
이로 보아 崩이라는 글자는 그 근원이 산처럼 서 있는 것이 무너져 내린다는 뜻이요, 그에서 引伸하여 사람의 죽음을 지칭하는 데도 썼으며, 특히나 천자와 같은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의 그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諸葛亮의 그 유명한 《出師表》를 보면 “그런 까닭에 선제(先帝)께서 崩하심에 이르러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故臨崩寄臣以大事也)는 말이 보이거니와 이에서 천자의 죽음을 崩이라 표현했음을 볼 수 있다.
이중에서도 천자의 죽음을 崩이라 한다는 것은 그 근원이 禮記 曲禮下에 보이는 다음 구절, 곧 “천자의 죽음은 崩이라 하고 제후의 죽음은 훙薨이라 하며 대부가 죽는 것은 卒이라 하며 士가 죽으면 불록이라 하고, 서인이 죽으면 死라 한다(天子死曰崩,诸侯死曰薨,大夫死曰卒,士曰不禄,庶人曰死)이니, 이것이 절대의 보루다.
한데 우리가 과연 물어야 할 것은 이런 선언이 과연 그대로 실제에 통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崩은 천자 혹은 그에 준하는 최고 권력자만이 독점한 특권어였는가? 이를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그에 앞서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山은 무너지는 것을 崩이라 하는데 사람은 왜 굳이 천자만이 독점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불만이 대두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불만 혹은 의문은 뒤에서 살피겠지만, 이미 일찌감치 제기되어 실제 그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 반란의 양상을 보면 설혹 무령왕의 죽음을 백제인들이 崩이라 표현했다 해서 무령왕을 중국의 천자에 버금가는 존재로 여겼는가는 별개 문제로 대두한다. 이 글자를 토대로 하는 자주 국가, 주체 왕조 백제의 신화를 나는 여지없이 붕괴할 것이다.
《직설 무령왕릉 추보》 (3) 독자는 귀신이다
모든 텍스트는 독자가 있다. 이 독자 문제는 그 텍스트가 어찌해서 작성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가늠자다. 하지만 독자가 누구인지는 거의 모든 텍스트가 숨기는 일이 많으니, 그런 까닭에 장구한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목적성을 캐내는 일이 쉽지는 않다.
총 2장 4쪽 분량인 무령왕릉 묘권墓券이 독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무척이나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안치된 장소다. 1971년 발견 발굴되고 나서 묘권은 독자가 대중이라는 불특정 다수가 되었거니와, 하지만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이 텍스트를 만든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은 현상을 결코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전연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무덤 속 세상에 있었다. 저승 세계와 황천 세계가가 그 텍스트가 통용하는 공간이었다. 이는 실제 텍스트 분석 결과 또한 이에서 한치 어긋남이 없다. 묘권은 지상 세계의 절대 패자인 무령왕이 부인과 함께 죽음의 세계로 가서 그네 부부가 영원히 잠들 곳으로 점지한 땅을 저승 세계를 관장하는 신들에게 돈을 주고 샀음을 증명하는 문서 일체를 말한다. 그것이 2장짜리 4쪽 문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건 4종류는 개별로 보면 차이가 있지만, 결국은 그네들 뭉치가 하나를 이루어 묘권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제3쪽 소위 매지권買地券이라 하는 것을 보면, 매매 당사자가 명확히 보이거니와, 이를 보면 매지권을 포함한 묘권은 무령왕이 저승 세계를 관장하는 귀신들과 매매주체가 되어 작성한 것임은 백주대낮에 뜬 태양을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분명하다.
한데 이런 텍스트가 환경이 변화하여 지금 우리 앞에 출현했다. 그와 더불어 그것을 소비하는 층이 변화했다. 간단히 말하면 무령왕릉 묘권은 독자가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귀신들에서 불특정 다수로 드라마틱하게 변질했다.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 텍스트를 남긴 백제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위해' 이 텍스트를 써 놓았노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저들은 결코 묘권을 우리를 위해 남긴 것은 아니다.
묘권에서 발견한 '崩(붕)'이라는 한 글자에서 민족주체성을 읽어내는 행위 혹은 의지는 애초 이 문건의 남긴 텍스트의 맥락에서는 언어도단인 이유다. 백제인들은 결코 묘권을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남긴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 소비층, 다시 말해 독자는 지극히 제한되어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귀신들이었다.
그런 귀신들을 향해 씨부렁거린 문건에 崩이라는 글자가 있다 해서 어찌하여 그것이 백제가 자주적인 왕조, 주체적인 국가였음을 증명하는 증좌가 되리오?
《직설 무령왕릉 추보》 (2) 독자가 없는 텍스트
이건 내가 졸저 《직설 무령왕릉》에 담는다고 하다가 그만 잊어먹고 빠뜨린 대목이라 아쉬움이 크다. 늦었으니 어찌 하리오?
무령왕릉 묘권(墓券) 제1장 제1쪽은 흔히 무령왕 묘지(墓誌) 혹은 묘지석(墓誌石) 혹은 묘지명(墓誌銘)이라 하거니와, 이에는 무령왕이 언제 몇 살로 죽어 어찌해서 이곳에 묻히게 되었는지 간단한 내력을 적었기 때문이다.
...더 보기이를 위해 무엇보다 생소함을 혁파하는 일이 시급하다 생각했으니, 그런 절박감에 시달리다 5년전쯤에는 마침 페이스북과 좃또버그를 만나 그에 기대어 독자가 그 생소함을 지우는데 미친 듯 매달렸다.
후세가 나를 평가한다면 문화재에 미쳐 살다가 그 불길에 자발로 뛰어들어 산화한 놈이라고 기록해 주었으면 한다.
문화재 보수업체 진수종합건설 김영일 회장을 양재동 사옥으로 찾고는 졸저를 증정하다.
김 회장은 무령왕릉 발견자다.
이번 졸저에는 그의 인터뷰를 토대로 하는 기술이 적지 않고, 실제 발견과 발굴, 그리고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건 흐름에서 그의 증언은 눈동자만 남겨둔 용 눈과 같았다.
미적미적 대다가 출간 직전에야 그를 찾아뵙고 녹음기 틀고서 세 시간 인터뷰한 내용이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발견 발굴은 벌써 45년 전이라, 그의 기억이나 증언도 착란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크로스 체킹을 했다.
나아가 진위 확인이 힘든 증언은 그것이 필요함을 전제로 하면서 그것을 채록했으니 후세가 혹 내 글을 보다가 그것을 사실로 간주할 일은 방지하려 했다.
오늘의 무령왕릉이 있게 한 절대의 공신이 김영일 회장이다.
종래 무령왕릉 관련 글들을 보면 김영일은 아예 언급을 하지 않거나 공사업자로 그려놨다.
나는 이 점이 못마땅해 김영일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그 발견자로써 그리고자 했다.
무령왕릉은 정부에서 위탁받은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필연으로 출현한 그 무엇이 아니라 발견의 산물이다.
그리 출현한 왕릉 전축벽은 뜯어버리고 말았으면 그만이다.
그것을 수상히 여기고 그 조사를 의뢰한 사람이 있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계 고고학상 유례없는 졸속 발굴의 대표본 무령왕릉 발굴조사를 옹호하거나 혹은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리 말한다.
그때는 다 그랬다.
그게 우리의 수준이었다.
고 말이다.
이 유례없는 도발굴 총감독 김원룡은 내 머리가 돌았다느니 환장했다 하면서 그나마 이 졸속발굴이 곧이어 전개된 경주 발굴에서는 교훈으로 작동했다고 자위한 바 있다.
사진은 황남대총 남분 발굴 현장이다.
아마 1974년 무렵일 것이요 무령왕릉 도굴로부터는 불과 3년이 지난 뒤다.
그때는 다 그러했는가?
그게 우리 수준이었는가?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김원룡만 그러했고
김원룡만 그런 수준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삼불은 고고학도, 발굴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김원룡의 수준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봐라..동시기에 일어난 발굴인데 천마총 황남대총은 저 수준인데 어찌하여 유독 무령왕릉만 개돼지가 휘저은 수준인가?
무령왕릉보다 물경 7년전인 공주 석장리 발굴이 저러했던가?
속았다.
다 속았다.
그땐 다 그랬다는 말에 빨갛게 속았다.
아껴서 저축 비축한다 해서 좋은 글 좋은 논문 좋은 책이 연타로 나오는 건 아니다.
졸라 쓰다 보면 또 튀어나오는 게 글이다.
글을 쓰는 원동력은 글이 있을뿐이다.
원고 서너 편을 두고 첫째 어떤 것을 해직 1탄으로 할까 고민했고, 둘째 1탄과 2탄 사이에 어느 정도 기간을 둘까 고민했다.
아다시피 1탄을 나는 <직설 무령왕릉>으로 질렀고, 2탄은 틈을 두지 않기로 했다.
주변에선 많은 이가 말렸다.
소진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글은 쓸수록 쏟아지는 법이다.
남들이야 다작이라 하건 말건 나로선 그 하나하나가 다 나름 의미가 없을 수가 없으니 걸리는 족족 질러버리려 한다.
2탄 가제는 <박제상, 충신에서 국민으로>다.
전통시대 충신의 표상 박제상이 국민국가 시대에는 어떤 방식으로 국민의 표상으로 변모했는지를 짚을 것이다.
출판사는 확정하지 않았다.
박제상으로 정한 까닭 중 하나는 내가 발굴전문 작가로 낙인찍힐까봐서다.
난 발굴전문 작가 아니다.
역사학도다.
나는 문화재 답사기도 낼 것이다.
이건 아무리 잘해야 유홍준 따라지다.
소나무 사진 아무리 잘 찍는데도 영원히 배병우 시다바리 꼬리표를 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 유홍준을 짓밟지 않을 순 없다.
<<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그제 KBS1 아침뉴스에 소개한 졸저라 한다.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1쇄가 거의 소진되었다면서 2쇄에 반영할 교정을 보내라 해서 보냈다.
한달만이다.
많은 저자가 그렇겠듯이 나 역시 막상 공간된 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오류나 오식을 바로잡을 제1의 책임이 있지만, 질려버려서 거개 당분간은 책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저자가 버린 책을 독자들이 찾아주셨으니, 더구나 오류까지 바로잡아주셨으니
감읍하고 감읍하며 또 감읍한다.
感泣感泣又感泣, 欽哉欽哉又欽哉 하노라
아직 주인공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왕릉급 무덤임이 확실한 무령왕릉이 출현한 그날 밤..
장대비를 뒤로하고 발굴조사단이 모조리 철수해버리고 그 현장은 문화재 보수업체 직원들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나는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 채록에서 밝혀냈다.
이는 패악이다.
발굴현장은 폭포수 같은 비가 내려 넘치는데 나몰라라고 조사단은 모조리 피신했다.
이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발굴을 보수업체 직원과 공사 인부들이 다 했다는 말..
결코 과장이 아니다.
주요유물의특징
발견과정과유물들
제목 : [이규태 코너] 山 - Krei.re.kr
무령왕릉 출토유물서 뼈조각 4점 발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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