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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랑 초 서 



김남조


1

사랑하지 않으면

착한 여자가 못 된다

소망하는 여자도 못 된다

사랑하면

우물곁에 목말라 죽는

그녀 된다


2

하늘땅 끝머리

저승만이나 먼먼 집에

아침엔

햇빛 나르고

저녁엔

바람 나르고


3

너무 굶기면 사랑도 죽네

더운 물을 삼켜도 가슴 추운

병이 깊어

내 사랑, 사랑이여

눈 감았음을


4

먼 길 긴 시름으로

새 풀 초당에 임 돌아오시면

온천지 불혀이네

어질머리의 눈물 나는

교회당이네


5

소리 없이 뿜기는 샘물

소리 없이 엉기는 이슬

이쯤의 것이네

젖어서 전기가 와도

침묵 안의 것이네


6

나를 먹이는 사람

원자로 먹이는 사람

불씨 한 점으로

해돋이 저녁노을

다 불 붙이네


7

탄생에 축복을

만남과 헤어짐에 축복을

죽음에 더 축복을

사랑에겐 사랑을

보태어주소서 주여.


8

말은 잔모래

물결에 쓸리는 돌의 포말

말로선 못 가는 수평선에

이름으로 못 부를

사람 하나 있다.


9

오늘은 사랑이 내 인격이다

아니, 모든 날에

사랑이 내 인격였다.


10

사랑은 관습의 세력

되풀이하는 해후

세 번 세상의 同一靈肉


11

마음에 대답하는 마음

영혼에 산울림 하는 영혼

이를 생각만 해도 나는 운다

굶주렸고 바보인

아이처럼


12

사랑의 추위

추워지려고 사랑하는지도 모를

둘의 만남


13

소리 지르게 쓸쓸한 이 날

존재의 밑바닥에 시린 샘물에

큰 용서처럼 생긴

사랑 하나 빛나고 있다.


14

사람 몸엔 그림자

사람 마음엔

아홉 하늘 살 맞대고 오는

청 메아리


15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난생 처음 알게 된

영혼의 동맹


16

이름 없는 사람아

이름 없는 은총에서 태어난

나의 금동 아기


17

어리디 어린 봄날

흙 속 구근들 귀밑머리 돋아서

첫 햇살 쬔다

보고 싶은 가려진

내 마음도


18

새벽에 그가 온다

이 날의 삶이 열린다

아마 둘의 가난이 만나

해로의 연분을 맺은 외엔

더 아는 것이라곤 없다


19

내 임종엔

성탄절 찬미가를

다 쓰고 가는 사람을

영혼의 어부

주 그리스도를


20

저무는 날 해어스름

박명의 아름다움을 안다

안개 너머 벙그는

별들을 안다

사랑하기 전엔 몰랐던 빛들


21

불청의 추운 여자

그냐하고 산다

여러 날에 내가 그녀 자신이다

그럴 만도 하지

사랑은 특별한 초대

양심의 영접인 걸


22

음악을 들으랴

음악마저 도취의 화약이고 말아

나 못 살겠네

천만 모세관의

소금 절인 기갈


23

여자가 달가와져 미칠 때

누가 고치나

탕약 졸아든 먹피는

누가 먹어주나


24

온 세상 삶 전쟁

빈집엔

죽어야 할만치 피가 달가운

여자


25

정녕 내 사랑이면

그 영혼 안에 내 집 주시리

그 영혼의 세월 나눠 주시리

정녕 내 사랑이면


26

구천에랴 머리 풀고 부르면

죽은 삶도

넋이야 한 번 온댔는데

있는 머리 다 풀은

지금이 그때인데


27

내밀한 소름끼치는 고요

제일로 이태하고

제일로 안정된 나를

한 사람만은 알리라


28

구할 길 없는 사랑

까맣게 탄 낙심의 날개여

불의 세례도 그 무엇도

어쩌지 못했음을


29

석양 불지를 하늘이여

이 사랑, 한 젯상으로 거두시면

첫날 흙 한 덩이의

영일에 돌아올 걸


30

사랑과 허무

미혹도 회오도 함께 흐르는

온갖 파도의 대양


31

피흘리지 마라

그대 날 사랑하지 마라

사랑은 내 안에 가득하여

둘이 먹어야만 하리


32

더 아파야만이 사랑이래

더 외로와야만이 사랑이래

쌓을수록 남아도는

천형의 벽돌


33

내가 길 잃은 곳에

그대 있다

내 어둠에 등불 비추며

아무도 없느냐고 울며 외칠 때

그대 음성 울린다


34

평생에 그 하나

손 안댄 죄를

죄 지으려면 그대와 나눠야지

마른 날 불벼락도

그대하고 나눠야지


35

이젠 괜찮습니다

더는 없을 밑바닥에 떨어져

불의 밑불과

물의 밑물의

그 적멸 익힙니다


36

우수와 극기

가라앉은 진실

강한 이의 승복처럼

울려 못 견디겠는

오늘의 당신


37

늙은 겨울의 겨울 음악 울리네

초록으로 멍든

인고의 찬가

사랑과 매우 닮은

깊은 겨울의 노래


38

아무렇게나

우설에 젖어 온 두 사람이

서로의 추위에

공손히 입술을 대는

이 일이라니


39

내 말 그대 알지

그대 말씀 서럽게 닮은 거

나도 알지

평생에 말없는 말

둘은 알지


40

피밭에 넘어진 그대

가시 숲을 헤메인 그대

혼자 있게 한

모두 내 탓이네


41

귀신 붙은 사람아

연금 불가마에

몇 달 몇 해 더 굽히면

편안한 주물 되나


42

삶의 애련의

이 같은 심해에 올 줄이야

네게 못 준 거

내가 다 안다


43

사랑은 귀한 능력

내게 그 힘이 없다고

허공에 降書 쓴다

오늘

다른 진실은 없다


44

하늘이 못 주신

사람 하나를

하늘 눈 감기고 탐낸 죄

사랑은 이 천벌


45

두 낱의 화제

사랑, 그리고 또 사랑,

하나는 시작에

하나는 끝에


46

나는 가네

새하야니 하앟게 씻어 바랜

한 낱 허심

진다홍 노을 따라

하직 길 멀리 가네


47

사람을 버리느니

사람에게 버림받게 하소서

사람끼리 사랑할 때

내가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48

사랑은 冬天의 반달

절반의 그늘과 절반의 빛으로

얼어붙은 수정이네


49

절망을 넘어선

고갯마루에

종은 울리며 서걱서걱 뿌리는 신설

눈이여

펄펄 날리거라

당신이여


50

열 손톱 숯이 되어

임의 산천 다 넘어온

새 천지개벽에

저승인가

임 먼저 와 계시네


51

고난의 땅에서만

만나는 신

사랑의 형장에 못 왔더면

영 못 뵈었을

나의 신이여


52

오늘은 견딜 만하다

겨울 숲의 늙은 마술녀처럼

무료하고

복습할 지혜도 하나 없다


53

떫은 사랑일 땐

준 걸 자랑했으나

익은 사랑에선

눈멀어도 못다 갚은

송구함뿐이구나


54

사랑 이상의 것은

사랑이지

하늘 위에 더 높은 건

하늘나라 하늘이지


55

한바다 수량을

혼자서 다 뎁히는 사람

물결 하나하나

심령 입혀 보내는 사람


56

국가를 부르는

노인들의 합창이 나를 울린다

저만 나이엔

나라사랑 그 심정도

청남 빛 수심이리


57

세월의 글씨여

지아비의 흰머리, 가슴을 친다

이가 누구인가를

남김없이 아는

운명의 내 사람아


58

삶의 쓸쓸함

그러나 삶의 아름다움

헐겁게 넉넉한

待天命의 품안에 왔네


59

무량상련(無量相憐)

따습고 겸허한 그 저류를

삶과 죽음 간에

항시 함께


60

위대한 해가

선지피 큰 바다로

몸을 풀듯이

새날의 아침 해로

거듭 솟듯이


61

무상(無償)의 마음임을

사람이 데려온 심산유곡

이름 하나 못 붙은 저녁

지적(地籍) 밖의 땅임을


62

만상이 그에게

장미의 혈액을 주게 하소서

이중의 가려진 건

저옵기에

숨긴 축원이게 하소서


63

사랑의 말은 없이

마지막엔 거기 가리라고 마는

고향의 산 같으신

당신


64

사람의 측은함을

사람끼리 돌보는 일

연분의 성좌마다

은하 흰 강이 물 대주는 일


65

타버리고 시간에 삭은 재

백발로 오네

유한(遺恨)은 없이 비로소 내 핏빛

맑고 편안해


66

사랑의 선, 사랑의 가책에도

진실로 지쳤다

사랑의 신이

주무시는 까닭을

오늘 안다


67

겨우 피가 좀 식을만한 때

한 고비만 쉬어서

또 넘는 고개


68

최면 되었을까

열 살쯤에서 이적지 못 깨어난

어리석고 기쁜

사랑의 최면술에


69

가시와 꽃들이

불타는 곳에

내가 재 되는 줄 알면서

아프면서 기쁘면서

그대와 불타는 곳에


70

저토록 진홍인 노을

겨레의 가슴 하나하나에 불타는

민주주의 햇불같이

불의 함성같이


71

사랑은 마법의 질량

불에도 안타는 혼령으로

품을수록 부푸는 육신으로


72

이상한 일진이다

미지의 가난한 손님이

내게 해갈의 물을 주셨다

처음 보는

고독의 관(冠)을 쓰신 분이


73

갑자기 눈 떠

당신을 찾았다

내 양심의 한가운데서

급한 통곡과

긴 침묵 속에서


74

존재의 어둠

내성(內性)의 밤길 가는 그 터널에

은총의 눈썹인가

여윈 당신 계심이여


75

사랑에겐

사랑일 수 있었음이

이미 보답이다

내게 이를 가르쳤음은

당신의 힘이다.


76

사랑은 전 인격의 서원

꼭 절명지같이 생긴 땅

돌아 나와서

하늘 우러르면

이 때 아느니


77

내 마음 진흙에 버려짐을

당신은 아셨다

내 고죄(告罪) 들으시는 사제(司際)처럼

이 때 당신도

아무 말씀 없으셨다.


78

표백한 야마실처럼

희디 하얀 외롭고 긴 마음은

이승 너머 저승 가는

연실이나 삼을 밖에


79

배고픔보다 더 서러운

해일의 그리움

땅에 버리면 실 뿌리는 내리는

희생의 이 그리움


80

햇발에 갈앉은

임의 그림자

어스름에 피어나는 황촛불은

기도하라 이르는

이승의 낙조


81

나는 백랍이니

불 붙이거라

열두 겹 어둠에 감싸인 기름

한번 켜면 못 끄는 불

그대 부싯돌이면



♬ 1. Beethoven 
Romance for Violin and Orchestra 
No. 2 in F major, Op. 50
Anne-Sophie Mutter : Violin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2. Johan Severin Svendsen
Romance for Violin and Strings, Op.26   
Gil Shaham : violin
Orpheus Chamber 
출처 : 노을빛으로 물든 그리움
글쓴이 : 죽장망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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