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20세기의 정치사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역사라 할 만큼 대의제 민주주의는 전지구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의제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소위 ‘제도 정치’가 사회 속에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모든 것을 포괄하지는 못해 왔다. ‘제도 정치’는 그것의 외연을 지속적으로 확장함으로써 사회 속에 존재하는 문제점들과 갈등을 해소하려 해 왔지만, 그것은 실현불가능한 근대의 기획이었고, 서구의 정치사에는 위기의 순간이 도래하게 된다. 결국 서구 정치사에서 분기점으로 작용한 이 위기의 순간이 1960년대에 존재했다고 보는데, ‘60년대(sixties)’, 특히 1960년대 후반은 가치, 이데올로기, 정치면에서 대중들에게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Andrei S. Markovits & Philip S. Gorski, The German Left: Red, Green and Beyond (Cambridge: Polity Press, 1993), p. 4.
1960년대 후반이라는 시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때, 그것은 1968년이라는 특정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1968년에 서구의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국가, 곧 프랑스, 미국, 서독 내에서 전후 최대의 저항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국가에 따라 특유의 운동 속성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이들은 가치, 운동 형태, 동원 전략, 그리고 운동 실천에 있어서 유사성을 보여주며, 특히 모든 곳에서 나타났던 공통 분모의 하나는, 그 저항이 서구 민주주의가 확립해 놓은 제도들을 향한 도전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성 정당들과 매개 집단이 가지는 독점적인 대표의 권리에 의문을 표했고, 제도적인 정통성에 따른 전통적인 정치 구조를 부정했다. Ingrid Gilcher-Hotey, “May 1968 in France: The Rise and Fall of a New Social Movement”, in Carole Fink, Philipp Gassert & Detlef Junker(eds.), 1968 The World Transform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 253.
특히 다른 어느 곳보다도 프랑스는 한 달 이상 나라 전체가 대중들의 시위와 총파업으로 마비되었을 정도로 저항 운동 가운데서도 가장 거대하고, 폭발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 전역에서 1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으며, 파리에서는 1백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석하여 기존 질서에 대하여 비판했다. 이러한 봉기의 양태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물론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주장했던 전위에 의한 혁명 이론 역시 부정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1960년대에 나타난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은 좌·우파의 정치 개념을 넘어서서 정치에 대한 다른 의식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은 프랑스의 1968년 5월 사태에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가장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봉기를 주도해 갔던 일종의 사회 운동 집단이었다. 단순히 말하자면 이들은 사회주의 운동사에서의 제1, 2인터내셔널과 유사할 것이다. 물론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그 조직의 성격상 이전에 존재했던 인터내셔널보다는 더욱 복잡하다. 그러나 그 둘은 모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결합하여 사회 혁명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결성 이후 꾸준히 자신들의 이론적 성과를 담은 잡지(Internationale Situationniste)와 책을 발간했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가 모든 관계들을 상품 거래 관계로 바꾸어 버렸으며, 그리하여 삶이 ‘스펙타클(spectacle)’로 환원되었다”는 주장에서 출발한다. 정치 역시도 스펙타클한 것으로 변하여 개인들은 여기에 대해 단순하고 수동적인 관객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이러한 스펙타클을 파괴하려 하였다. 상황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정치적 사유는 직접 참여를 통한 ‘일상생활의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는데, 이것은 정치를 개개인의 일상이라는 구체적인 영역까지 확장시킨 시도였으며, 앞서 논의한 1960년대의 저항 운동이 공유하는 정치적 의식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2. 아방가르드와 삶(la vie)
맑스는 ‘세계를 변혁하라’고 말했고, 랭보는 ‘삶을 변화시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이러한 두 가지 언명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지리멸렬하게 진행되고 있던 아방가르드 운동을 재통합하고, 나아가 자신들 이전의 아방가르드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아방가르드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이론적, 실천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방가르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아방가르드는 미술 혹은 미학 쪽에서만 다루어지지만, 그것을 단지 미학이라는 한정된 담론 내에서 거론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아방가르드가 급진적인 정치적 사유에 남긴 흔적은 훨씬 심원하기 때문이다. 과연 아방가르드는 무엇인가?
아방가르드는 단순히 그것의 영어 번역어인 전위(vanguard)를 의미하지 않는다. 18-9세기,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일종의 사회적 정체성으로서 아방가르드를 파악할 때, 그것은 시대와 사회 조건의 변화 속에서 약간은 유동적이며 여러 전통이 뒤섞인 개념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처음 쓰이던 초기의 전통에서, 아방가르드는 군사적인 메타포가 강한, 다분히 정치적인 것에 방점을 둔 개념이었다. Matei Calinescu, Five Faces of Modernity: Modernism, Avant-Garde, Decadence, Kitsch, Postmodern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87);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이영욱 외 역 (서울: 시각과 언어, 1994), 127-130쪽.
그러나 점차 문학 쪽에서도 아방가르드의 개념이 사용되면서, 아방가르드는 “자기 시대의 진보적 존재를 의식하고 있으며 의식해야 한다는 함축적 의미”로 변모하게 된다. 아방가르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엘리트 구성원이 된다는 뜻이었지만, 이 엘리트는 과거의 지배계급 혹은 지배집단과 달리 전적으로 반엘리트적인 프로그램을 수행하며, 그것의 궁극적인 유토피아적 목표는 모든 사람들이 삶의 모든 혜택을 동등하게 누리는 데 있었다. 같은 글, 134쪽.
당시까지의 어법 내에서 아방가르드는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예술적 아방가르드로 구분되었는데,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지도에 따라 예술적인 활동을 통해 사회 변혁에 봉사하는 개념이었다.
이와 같은 아방가르드의 두 가지 형태 속에서 19세기 후반부터 두 번째 단계의 독자적인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사회 변혁을 지향하지만 특정 정치사상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예술적 아방가르드 개념이었다. 조주연,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그 개념적 혼란에 관한 소고」, 미학제29집, 2000, 178쪽.
이때의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당시의 사회구조 내에서 자신들의 창조적인 열정이 예술이라는 제도 속에 속박되었으며, 삶 자체로도 발현되지 못한다고 느꼈다. 이들에게 예술은 그 자체가 삶이어야 했으며, 삶 역시 예술이어야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회에서 예술가들의 작업들은 단순히 상품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었고, 그것의 가치 역시 교환과정의 성공 혹은 실패에 따라 평가되었다. Raymond Williams, The Politics of Modernism: Against the New Conformists (London: Verso, 1979), pp.53-54.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질서가 자신들의 작품들을 상품으로 치환시키는 물화 과정을 지켜보며, 예술가들은 상품 가치체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자신들 역시 실질적으로는 착취당하며, 억압받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을 착취당하는 노동자들과 동일하게 여기게 된다. 윌리암스(R. Williams)는 이를 두고 예술가와 노동자 사이에 적어도 소극적인 동일시가 존재했으며, 이러한 지점에서 아방가르드는 맑스주의와 교차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Ibid., pp.54-55.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생산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예술의 이름으로 기존의 문화적인 질서 및 사회 질서 전체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Ibid., p.51.
물론 이때의 기존 사회 질서란 부르주아가 권력을 장악한 사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에게 부르주아적 질서와 싸우는 것은 생활양식상의 의무가 되었다. Roland Barthes, Critical Essays, R. Howard(trans.)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2), p.67.
그러나 사태는 이보다 좀 더 복잡했다. 아방가르드가 도전해야 했던 또 하나의 질서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에서 분리되어 자율적으로 존재하려는 예술 자체였다. 사실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세기가 경과하면서 나타난 “예술이 획득한 일종의 자율성”이라는 토대가 존재했다. H. W. Janson, “The Myth of the Avant-garde”, Art Studies for an Editor: 25 Essays in Memory of Milton S. Fox (New York: Abrams, 1975).
뷔르거(P. Bürger)는 예술이 자율성을 획득한 상태를 유미주의(Ästhetizismus) 혹은 제도 예술이라고 표현하는데, Peter Bürger, Theorie der avantgarde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74);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 최성만 역 (서울: 심설당, 1986), 28쪽, 37-41쪽.
뷔르거는 이러한 제도 예술이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성립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얀손(Janson)과는 달리 적어도 18세기 말엽에는 완성되었다고 본다. 같은 글, 44쪽.
이와 같은 유미주의(예술을 위한 예술), 다시 말해 자율적인 예술은 결국 사회에서 예술 작품을 완전히 독립시키려는 그릇된 관념으로 전도된다. 같은 글, 79쪽.
하지만 자율적인 예술 역시 앞서 논의한 부르주아 사회의 도구화 과정, 즉 상품으로의 물화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예술 속으로의 침잠은 강화되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관점에서 볼 때, 삶에서 괴리된 채 존재하며, 현실에 대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못하는 제도 예술은 아방가르드가 공격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이와 같은 공격을 통해 예술이 다시 실천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예술 작품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닌, 예술이 사회 내에서 기능하는 방식을 겨냥한 요구를 의미했다. 결국 그들은 예술을 통해 새로운 삶을 조직하려 한 것이었으며, 같은 글, 83-84쪽.
그 실천으로서 반(反)예술이라는 극한적 방식을 택했다. 한편 이러한 과정이 실현된 대표적 사례가 20세기 초의 이른바 ‘역사적 아방가르드’였으며, 이때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은 무엇보다도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지칭한다. Peter Bürger, 앞의 글, 175쪽.
그러므로 부르주아적 상품 가치체계에 따라 활동하는 속물적인 ‘예술의 자율성’은 자연스럽게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첫 번째 공격목표가 되었다. 조주연, 앞의 글, 181쪽.
그러나 이상과 같은 아방가르드 미학이라는 것도 분명히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공유하고 있는 전제, 곧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라는 주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Matei Calinescu, 앞의 글, 135쪽.
한편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전통은 무정부주의와 맑스주의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1880년대 무렵부터 최소한 맑스주의자들은 아방가르드를 정치적 용어로 사용하는 데 익숙해 있었으며, 이후 『공산주의당 선언』에 등장하는 아방가르드적 용어를 소위 ‘전위’의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은 레닌이었다. Donald Drew Egbert, Social Radicalism and the Arts in Western Europe (New York: Knopf, 1970), p. 123, Matei Calinescu,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145쪽에서 재인용.
그리고 레닌의 ‘전위당(avantgarde party)’ 이론은 20세기 공산주의 역사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신성하고도 특권화된 개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3.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역사 개괄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흔히 최후의 아방가르드 운동 그룹으로 불린다. 그러나 자신들 이전에 존재했던 아방가르드와는 다르게,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이 자신들의 실천 영역을 문화에 한정지은 것을 비판하면서 Sadie Plant, “The Situationist International: A Case of Spectacular Negect”, Radical Philosophy, Vol. 55, 1990(summer), p. 5.
비판의 범위를 일상생활 전반으로 확장시킨다. 따라서 이들은 이전의 어떤 아방가르드 운동 그룹보다도 더 정치적이었고 급진적이었다. 또한 이들은 맑스에서 출발하여 루카치와 사르트르, 르페브르에 이르는 서구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Peter Wollen, 『순수주의의 종언』, 169-176쪽.
아방가르드와 맑스주의에서 시작되는 상황주의자들의 지적 계보는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이론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 원류가 된다. 이들은 양 쪽 모두를 발전시켰으며, 구체적으로는 아방가르드에게서는 그들의 테크닉과 전술을 수용했고,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는 전위주의를 거부하면서 노동자 평의회(worker’s councils)와 직접 참여를 옹호했다. Sadie Plant, “The Situationist International: A Case of Spectacular Negect”, p. 5.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역사를 간추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쳐 가는데, 이러한 구분은 드보르가 1969년에 발간된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 12에서 밝힌 내용에 따른 것이다. Guy Debord, “The Organization Question For The I.S”,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 12, 1969, in Ken Knabb, Situationist International Anthology, p. 298.
ⅰ) 1단계(1957-1962): 예술 작품의 생산과 정치적 이론의 구체화를 위해 활동하던 시기로, 몇몇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였다. 드보르는 이때의 활동들이 ‘예술의 초월(transcendence of art)’이라는 맥락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걸맞게 그들은 당대의 예술 현장에 개입하게 되는데, 그 단적인 예로, 1958년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브뤼셀에서 열린 미술 비평가들의 국제 회의에 침입해 미술 시장의 선전 활동으로 전락한 직업 비평가들의 역할을 비난하는 전단을 뿌리고, 소동을 일으킨다. 이같은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1962년,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급진 정치보다 전위 예술에 더 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추방하게 된다. 이후 쫓겨난 인원들이 제2의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을 구성하기도 했다. 한편 드보르는 이 시기 동안 앙리 르페브르의 수업을 청강하고, 그와 함께 연구 작업을 하기도 한다. 또한 드보르는 카스토리아디스(C. Castoriadis)가 이끌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 그룹과 연계하여 연구활동을 하는데, 당시 이 그룹이 주요 모토로 내세우던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주장을 드보르가 수용하게 되었다.
ⅱ) 2단계(1962-1968):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 좀 더 급진적인 정치 조직으로 변신하는 시기이다. 이 무렵 상황주의자들은 외부적인 활동보다는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완성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1965년경에 상황주의자들은 이론적인 완성 단계에 이르자 자신들의 이론에 근거하여 사회에 개입할 수 있는 실천 방식들을 탐색하게 된다. 그 와중에 자신들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던 스트라스부르 대학생들을 도와 ‘스트라스부르 스캔들’을 일으키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프랑스의 기성 언론 매체에 크게 회자되고, 자신들의 이론을 프랑스 전역에 알리게 된다. 이때 사용되었던 팜플렛이 「학생 생활의 빈곤에 관하여」 이 저작은 1966년에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학생위원회에서 만든 팜플렛인데, 이를 통해 프랑스에서 새로운 학생 운동의 전범을 보여주었고, 이후 있게 될 1968년 파리의 전조가 되었다. 좀 더 자세한 논의는 Daniel Cohn-Bendit, Gabriel Cohn-Bendit, Obsolete Communism: The Left-Wing Alternative, Anold Pomerans(trans.), (London: McGraw-Hill Company, 1968), pp. 25-28.
이며, 이후 주요한 연구 성과들이 출간된다. 『스펙타클의 사회』(기 드보르, 1967)와 『일상생활의 혁명』(라울 바네이겜, 1967)이 그것이다. 이후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프랑스 1968년의 봉기에 참여하여 반란을 이끌어가게 된다. 1968년이라는 정확한 시점에 그러한 반란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갑작스런 반란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종종 주장했기에, 5월의 봉기 기간 동안에 상황주의자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5월 반란 기간 동안 상황주의자들의 이론적인 요구들은 슬로건화되어 사용되었으며, 곳곳의 벽에 씌어지고, 포스터로 구성되었다. 당시 유명한 슬로건 중에는 “욕망을 현실로 받아들여라”와 “권태는 항상 반혁명적이다” Irving Sandler, Art of the Postmodern Era: From the Late 1960s to the Early 1990s(Boulder: WEST VIEW PRESS, 1998), p.376. 이 슬로건은 상황주의자들의 저술 가운데 있던 것이었다. Editorial, “The Bad Days Will End”,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 7, 1962 in Ken Knabb, op.cit., p.86.
등이 있었는데, 초현실주의적인 ‘권태’ 개념이 상황주의자들을 통해 등장한 것이었다. 이는 삶의 권태를 비판하고 그것을 벗고자 했던 의식을 봉기의 참여자들이 공유했음을 시사하며, 삶 자체를 통째로 뒤바꾸길 원했던 당시의 요구를 고려할 때, 파리 봉기는 분명히 아방가르드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확실히 1968년의 거대한 혁명적 소요 기간 동안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학생 그룹들, 특히 1968년 봉기의 기폭제가 되었던 낭테르의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8년 파리 5월 혁명에 대해 마틴 제이는, 그것이 상황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결과는 아닐지라도, 드보르와 그의 동료들의 사상에 의해 이론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Martin Jay, Downcast Eyes: the denigration of vision in twentieth-century French thought, p. 426. 하지만 제이의 평가와는 다른 맥락에서 프레이저Fraser는 1968년 기간 동안 상황주의자들의 활동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영국, 독일 및 이태리에도 지부 조직을 두었고, 이들 멤버들은 그곳에서 상황주의자의 목소리를 내었다. Fraser, 『1968년의 목소리: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120-121, 163, 213, 219, 296쪽.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소르본 대학을 점거한 뒤 구성한 점거 위원회에 여러 명의 멤버가 참여하여 5월 혁명의 주요한 이론적 노선을 제공하게 된다. 이 시기 이들은 노동조합의 허가 없이 진행하는 이른바 와일드 캣(wild cat) 파업의 당위성을 각 공장에 전달하고, 노동자 평의회의 구성으로 나아갈 것을 고무한다. 이 당시 이들의 잡지는 반란 기간 동안 곳곳에서 읽히고, 그 복사본이 지속적으로 뿌려졌다.
ⅲ) 3단계(1969-1972): 1968년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에게 쓰디쓴 승리로 남게 된다. 자신들의 이론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순간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스펙타클 사회를 벼랑 끝으로 거세게 내몰았던 혁명의 기운을 스펙타클이 흡수해 가면서 그것은 자신의 강력함을 오히려 의기양양하게 드러내었다. 결국 상황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일상생활의 전복을 통한 계급 사회의 철폐, 임노동의 정지 등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후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내부적인 이론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1972년에 조직을 해체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자신의 이론과 실천적 활동들이 스펙타클에 의해 전유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 그들의 마지막 혁명적 임무라고 여기고 있었다.
4. 왜 상황주의자인가?
앞서와 같은 과정 속에서 상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언어로 사회를 분석한 이론을 완성해 나갔는데, 우선은 왜 이들이 자신들을 상황주의자라 명명했는지 살펴보자. 드보르는 창립총회에서 발표한 글을 통해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중심 사상은 상황의 구축, 즉 삶의 계기에 따른 환경을 구체적으로 구축하여 그것을 좀 더 상위의 열정적인 상태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Guy Debord, op.cit., 1957 in Ken Knabb, op.cit., p.22.
라고 선언한다. 이들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것이 어떠한 계기들의 연속 혹은 상황들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삶의 계기에 따른 환경’이라는 표현은 주어진 삶이 계기로서 구성되어 있으며, 상황이란 그러한 계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것은 물질적인 환경과 정신적인 상태를 포괄한다―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특정한 행동을 통해 개입하겠다는 것이 상황주의자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상황주의자들의 상황에 대한 관념은 일반적으로 사르트르(Sartre)의 ‘상황’ 개념에서 차용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야페는, 드보르가 청년 시기에 당시의 지배적인 지적 흐름이었던 실존주의, 그 가운데서도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보며, 그러한 영향은 상황 개념만이 아니라, 기투(Project), 프락시스, 주체의 강력한 역할 등 많은 개념들이 드보르의 이론 속에 반향하고 있다고 본다. Anselm Jappe, op.cit., p.127.
사르트르는 “자유는 상황 내에서만 존재하며, 상황은 자유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Jean-Paul Satre, Being and Nothingness: An Essay on Phenomenological ont ology(London: Metheuen, 1968), p.489, Sadie Plant, op.cit., p.20에서 재인용.
라고 말하며, 또한 “세계에 개입하는 즉자적인 자유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Ibid.
이와 같은 사르트르의 사상과 비교해 볼 때, 상황주의자들의 상황 개념은 이로부터 영향 받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로써 상황 개념의 기원에 관한 논의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르페브르는 상황주의자들이 자신의 ‘계기(moment)’ 개념에서 상황 개념을 도출했다고 주장한다. Kristin Ross, “Lefebvre on the Situationist: An Interview”, October 79, 1997(winter), p.72.
어쨌든 위와 같은 상황 개념 속에서 ‘상황주의자’는 ‘상황을 구축하기 위해 개입하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다. Editorial, “Definitions”,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1, 1958 in Ken Knabb, op.cit., p.45.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상황을 구축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개념이 ‘스펙터클’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상황의 구축은 근대 스펙터클의 파괴 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Guy Debord, op.cit., 1957 in Ken Knabb, op.cit., p.25.
이와 같은 드보르의 진술에서 ‘상황의 구축’과 ‘스펙터클’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대항 개념으로서 인식되어지며, 결국 상황을 구축하고자 하는 상황주의자들의 활동은 스펙터클의 파괴라는 프로젝트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그리고 이때의 “스펙터클은 단순히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다” Guy Debord, La Société du Spectacle (Paris: Buchet-Chastel, 1967); Society of the Spectacle, Freddy Ferlman(trans.) (Detroit: Black & Red, 1977); 스펙터클의 사회, 이경숙 역 (서울: 현실문화연구, 1996), 11쪽.
라고 짧게 정의할 수 있다.
5. 일상생활 비판과 앙리 르페브르
드보르는 1957년, 르페브르의 강의를 청강하면서 그와 교류하기 시작한다. Kristin Ross, “Lefebvre on the Situationist: An Interview”, October 79, 1997(winter), p.69.
상황주의자들의 사상에 르페브르가 미친 영향은 지대했는데, 르페브르에게 고전 맑스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은 반복적이고, 평범하게 흘러가는 비생산적인 활동의 세계에 존재하는 소외에 대해서는 도외시한 채, 생산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는 근시안적 성격에 있었다. 이러한 소외의 세계를 간과한다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의 광범위한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방식을 통찰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나아가 일상생활 내에 존재하면서 그것의 재활성화를 가능케 해 줄 수 있는 잠재성마저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Bradely Macdonald, op.cit., p.93.
르페브르의 소외에 대한 분석은 맑스의 ‘노동에서의 인간 소외론’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Henri Lefebvre, Critique de la vie quotidienne Ⅰ: Introduction (Paris: Grasset, 1947); Critique of Everyday life, Volume 1: Introduction, Jonh Moore(trans.) (New York: Verso, 1997), p.79.
그의 분석은 맑스를 넘어선다. Richard Gombin, Les Origines du gauchisme (Paris: Le Seuil, 1971); The Origins of Modern Leftism, Micheal K. Perl(trans.) (Harmondsworth, Middlesex: Penguin, 1975), p.63.
르페브르는 자신의 시도가 맑스의 소외론을 반박하거나 그것에 도전하고자 함이 아닌, 오히려 그것을 좀 더 심오한 차원에서의 재현이라고 주장한다. Henri Lefebvre, op.cit., p.79.
젊은 시절 초현실주의자로서 활동하며, 브르통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르페브르는, 삶의 변혁이라는 아이디어를 초현실주의에게서 물려받았으며, 그가 말하는 일상생활의 내용에는 초현실주의적 개념인 ‘삶의 권태로움 혹은 진부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Rob Shield, Lefebvre, Love and Srtuggle: Spatial dialectic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9), p.66.
그에게 자본주의에서의 삶은 반복적이며, 권태로운 것이었는데, 삶의 권태로움이라는 초현실주의적 개념은 어떤 사회적 입장의 결여에 의해서 유발된, 실천적 행동의 가능성이 상실된 현상이 낳은 하나의 진공상태를 의미했다. Peter Bürger, 앞의 글, 191쪽.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저 그런 일상생활은 거대한 사회적 쳇바퀴로 기능하면서 사회적 주체들로 하여금 삶의 무료함과 권태 속에 지내도록 만든다. 주체들의 감각은 철저히 마비되어 가고, 이 지루하고, 사소한 일상생활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는다. 결국 감각의 마비는 사회를 조감하고 통찰할 수 있는 철학의 부재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어떠한 행동이나 영향도 행사하지 못한 채 그저 사회적인 강압들에 순응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권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권태가 부정적인 가치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현실주의가 목표로 삼은, 일상적 현실 변화가 가능하기 위한 결정적인 전제조건이 되는 셈이다. 같은 글.
그렇다면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는 이 일상생활에서 르페브르는 어떤 가능성을 본 것일까. 그가 보기에 일상생활은 자본주의에 의한 침투의 장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의 장소이기도 했다. Henri Lefebvre, op.cit., p.86.
즉 사회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지배적 질서를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이자 그것을 전복시킬 힘이 배태되어 있는 공간으로서의 일상생활에 르페브르는 주목했던 것이다. 그는 일상생활을 개인들의 사회적 소외와 연관지으면서,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테크놀로지가 미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Ibid., pp.9-16.
맑스가 분석했던 시대의 경제적 소외는 소외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며, Ibid., pp.61-62.
국가가 사회화 과정을 모두 담당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Ibid., p.91.
다시 말해 사회화 과정은 단순히 국가의 전유물이 아닌, 일상생활이라는 공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며, 테크놀로지가 새로운 인간의 욕구 충족 대상으로 자리잡게 된 현대에 이르러 인간은 맑스가 분석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소외의 실체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 삶이란 이미 일상생활에 포함되어 있으며, 일상생활 비판은 정치적 삶의 비판을 포괄한다고 주장한다. Ibid., p.92.
그가 보기에 맑스주의를 경제학과 정치학의 영역에 제한한 것은 잘못이며 그 분석을 노동은 물론 사생활과 여가에까지, 소외가 존재하는 생활의 모든 측면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일상생활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능하게 되며, 경제적 삶 및 정치적 삶이 모두 일상생활에 포함되므로, 변혁이란 경제적, 정치적 구조의 변혁을 넘어서 일상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의 변혁을 의미하게 되었다. Peter Wollen, 앞의 글, 176쪽.
이와 같은 견해는 상황주의자들에게서 좀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드보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들의 중심에 일상생활을 위치시켜야 한다. 모든 프로젝트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시작하며, 모든 인식은 이것의 진정한 중요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이것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상생활은 모든 것들의 준거이다. 그 모든 것이란 인간관계의 완성 혹은 미완성, 생생한 시간(lived time)의 사용, 예술적 실험, 혁명적 정치 등이다.” Guy Debord, “Perspectives for Conscious Alterations in Everyday Life”,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 6, 1961 in Ken Knabb, op.cit., p.69.
일상생활에 대한 이들의 개입과 그것의 전복은 전통적인 문화와 정치의 개념을 벗어난 것이었다. “지배적인 일상생활에 대한 급진적 비판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문화와 정치를 파기하는 것으로, 그것은 좀 더 상위 차원에서의 삶에 대한 개입으로 이어진다.” Ibid., p.70.
물론 이들의 관점에서 일상생활은 분리(소외)의 영역이자 스펙터클의 영역이었기에, Ibid., p.71.
스펙터클적 효과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일상생활을 혁명적으로 뒤바꾸는 것은 실천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드보르가 매우 적절하게 지적했던 ‘일상생활의 식민지화’는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발전으로 개인의 일상이 이미 자신의 의지나 진정한 삶의 실현과는 무관한 영역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Ibid, p.70. 일상생활의 식민화’라는 개념은 하버마스의 ‘생활 세계의 식민화’라는 개념과 유사한데, 제이는, 하버마스가 드보르의 주장을 모방하여 이것을 ‘생활 세계의 식민화’라는 개념으로 변형시켰다고 말한다. Martin Jay, op.cit., p.431. 또한 드보르의 주장을 통해 당시 프랑스 및 유럽 전역에는 이미 일상생활의 식민화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Mary P. Joyce, op.cit., p.32.
한편 르페브르는 농업에 기반했던 사회에서 축제가 지닌 의미를 분석하면서, “축제란 일상생활이 정지되는 순간이자, 일상생활에 축적되어 녹아있던 힘들이 표출되는 시점”이라고 말한다. Henri Lefebvre, op.cit., pp. 201-202.
축제에 관한 이같은 관점을 통해 상황주의자들은 일상생활을 관류하고 있는 기존의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게 되는 혁명의 순간을 축제로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즉 이들은 축제와 같은 혁명을 상상했던 것이다. Michel Trebitch, “preface” in Henri Lefebvre, op.cit., p.ⅹⅹⅴⅲ . 축제와 혁명의 개념, 파리 코뮌에 대한 연구성과를 둘러싸고 상황주의자들과 르페브르가 갈등을 빚게 되어 결별하여 되었다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갈등에 대한 상황주의자들의 입장은 다음의 글에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다. Editorial, “The Beginning of an Era”,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12, 1969 in Ken Knabb, op.cit.
축제와 같이 즐거운 혁명이자 그 속에 온통 재미있는 놀이와 게임이 가득한 혁명! 강박적인 자본주의적 노동윤리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모두가 알아서 놀이거리를 찾는 축제의 장으로서의 혁명! 앞서도 상황주의자들의 전술이 놀이 개념과 연관되어 있음을 언급했는데, 상황주의자들의 혁명은 집단적으로 즐기는 축제이자 게임이었던 것이다. 드보르는 “상황주의자의 게임은 일상생활로부터 경쟁과 분리의 요소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게임이기에 고전적인 게임의 개념과 구별된다”고 말하고 있다. Guy Debord, op.cit., 1957, p.24.
이것은 그들의 게임이 자본주의적인 무한 경쟁과 주체들을 자신의 삶에서 소외시키는 스펙터클적 분리를 거부하는 활동이었음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일상생활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했던 혁명의 순간은 파리 코뮌이었기에, Editorial, op.cit., 1969, p.228.
파리 코뮌에서 생성되었던 코뮌적 질서에 대해 이론적으로 천착하여야 함을 드보르는 강변하기도 했다. 나아가 이들은 맑스가 살았던 시대 이후, 자본주의가 커다란 변화를 겪어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Edward Ball, op.cit., p.31.
따라서 새로운 자본주의적 질서의 전환을 위한 급진적 모색을 시도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견디기 거북한 것이 되어버렸다. 혁명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그게 전부다.” Editorial, “Instructions for Taking Up Arms”,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 6, 1961 in Ken Knabb, op.cit., p.63.
그리고 이들이 열망했던, 파리 코뮌과 같은 혁명적 순간은 이들의 주장에 영향 받은 주체들에 의해 1968년의 파리에서 부활하게 된다.
6. “스펙터클의 사회”의 완성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데, 이 스펙터클은 단지 볼거리나 이미지의 총체가 아닌 현대의 소비 자본주의를 점령한 새로운 사회 통제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Steven Best & Douglas Kellner, The Postmodern Turn (New York: The Guilford Press, 1991), p.79.
앞서 상황주의자가 말하는 일상생활은 스펙터클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이자 동시에 전복의 장소라는 점을 밝혔는데, 일상생활이 스펙터클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자본주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여 이루어진다. 이론적으로 드보르의 자본주의 사회에 관한 인식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맑스의 상품론과 소외론 그리고 이로부터 발전된 루카치의 물화 이론(상품의 물신화를 포함한)이었다.
스펙터클의 “확산형태는 상품들의 풍요와, 또한 현대자본주의의 거침없는 발전과 연관되며,” Guy Debord, op.cit., 1967, Donald Nicholson-Smith(trans.), # 65(p.42).
종국적으로 현대 자본주의가 도달한 지점은 ‘상품의 세계화이자, 세계의 상품화’ Ibid., # 66(p.43).
이다. 모든 것들이 상품으로 물화되어 버린 세계, 그럴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예술마저도 이미 상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다. 이제 자본주의는 루카치의 분석처럼 인간들의 욕구 충족이나 그러한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 역시 물화된 상태로 치환시킨다. Georg Lukács, Geschichte und Klassenbewusstsein: Studien über marxistische Dialektik (Hermann Luchterhand Verlag, 1970);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역 (서울: 거름, 1992), 163쪽.
그리고 스펙터클은 “상품이 사회적 삶에 대한 자신의 식민지화를 완성하는 역사적 순간과 상응하여” Guy Debord, op.cit., 1967, Donald Nicholson-Smith(trans.), # 42(p.29).
나타난다. 이와 같이 드보르의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맑스의 상품론을 상품화의 최후 단계로 밀고 올라간다. Steven Best & Douglas Kellner, op.cit., p.82.
그리하여 등장한 온 세계의 상품으로의 전환은 스펙터클이 출현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맑스가 이미 상품생산과정에서 나타나는 노동자의 소외 문제에 대해 다루었는데, 이러한 소외 문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품관계는 전사회적으로 자신을 확장하고,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노동의 착취, 노동에서의 인간 소외 등을 철저히 은폐해 버리게 된다. 즉 상품관계 자체가 신비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상품관계의 전사회적 확산 혹은 상품의 세계화는 상품이 은폐하고 있는 소외 문제의 확산과 동일한 결과가 된다.
이때 스펙터클은 상품의 물신화를 은폐하면서 “사회 내에서 소외의 생산” Guy Debord, op.cit., 1967, Donald Nicholson-Smith(trans.), # 31(p.23).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또한 상품관계의 주요한 특성 중 하나인 사용가치의 교환가치로의 전환은 스펙터클 사회에 이르러 “완전한 교환가치의 승리로 결판났으며, 교환가치는 이를 통해 자신의 자율적인 지배를 위한 조건을 창출하게 되었다.” Ibid., # 46(p. 31).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에서 이미 상품의 진정한 사용가치는 그 의미가 퇴색해 버리며, 교환가치의 교환을 위한 상품의 이동, 즉 소비만이 이 사회의 최고 미덕이 된다. “음식이나 집과 같은 가장 빈곤한 형태의 재화에서조차 사용가치는 더 이상 존재할 영역이 없어졌으며, 그것을 모두 대체해 버린 것이 상품소비라는 환상이다……따라서 현실의 소비자는 환상의 소비자가 되어 버렸으며, 상품은 이처럼 실재하는 환상이다. 그리고 스펙터클은 이러한 환상의 보편적 형태이다.” Ibid., # 47(p. 32).
요컨대 현대 자본주의는 소외의 문제, 상품이 내포하는 잉여가치 착취의 문제를 노정하고 있음에도 소비를 통해 개인 욕구와 소외문제는 해결되는 것처럼 진실을 가리고 환상을 심어주는데, 그러한 환상의 총체를 스펙터클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전환되어 후한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양상은 훨씬 세련된 형태로 진화한다. 풀어 말하자면,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작업이 끝난 후 공장을 벗어나게 되면 최소한의 자율성을 간직한 일상생활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여가와 모든 일상적 시간들은 끊임없는 소비로의 요구에 노출되며, 그의 안방까지 확장해 들어온 스펙터클의 도구들에 의해 간섭받고 통제당한다. Michael E. Gardiner, Critiques of Everyday Life(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0), p.109.
결과적으로 스펙터클의 일차적 목표인 진정한 삶에서의 분리가 완성되며, “분리에 기초한 경제 체제의 승리는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화”를 달성한다. Guy Debord, op.cit., 1967, Donald Nicholson-Smith(trans.), # 26(p.21).
상품의 세계화로 대변되는 경제체제의 승리 속에서 경제가, 살아있는 인간을 자신의 지배 하에 예속시키는 만큼, 스펙터클은 인간을 자신의 의지에 복속시킨다. Ibid., # 16(p.16).
그러한 복속의 상태란 바로, 사람들을 자신의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것인데, 스펙터클이 구경꾼에게 요구하는 태도란, 수동적 수용이며, 스펙터클은 외관 혹은 이미지의 영역에 대한 독점을 통해 이 과정을 안정적으로 수행한다. Ibid., # 12(p.15).
즉 단순히 이미지의 집합이 아닌, 이미지들에 의해서 매개되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서의 Ibid., # 4(p.12).
스펙터클은 이제 “지배 질서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영속적으로 자신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수단” Ibid., # 24(p.19).
이 된 것이며, 계급에 기초한 내부적 갈등이나 사회적 모순들을 자신의 번듯한 이미지를 통해 무마하는 사회통합기능을 완수한다. Michael E. Gardiner, op.cit., p.111.
더불어 현대의 생산조건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터클의 거대한 축적으로 나타나기에 Guy Debord, op.cit., 1967, Donald Nicholson-Smith(trans.), # 1(p.12).
개인들의 생각, 무의식, 제스처, 언어 등은 모두 스펙터클에 흡수되어지고, 직접적으로 존속해 왔던 모든 것들은 단지 표상이 되어 버린다. 이제 구경꾼은 어디에서도 집에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스펙터클은 어느 곳에나 있기 때문이다. Ibid., # 30(p.23).
그런데 스펙터클의 편재성을 두고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과연 사회 전체에 편재하는 권력 체계로서 스펙터클이 강고하게 존재한다면, 어떻게 새로운 전복적 주체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상황주의자들은 스펙터클이 완벽하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욕망, 상상력, 환희 등은 결코 스펙터클에 의해 완벽하게 침범당하지 않기에, Sadie Plant, op.cit., p.12.
스펙터클의 그물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주체의 탄생은 가능해 진다고 본다. 맥도널드(B. Macdonald)는 상황주의자들의 욕망 개념이 라캉과 유사함을 지적하는데, 즉 혁명적 욕망은 체제에 의해서 완벽하게 충족되지 않으며, 욕망에 대한 지속적인 결여가 체제에 대한 저항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분석한다. Bradely Macdonald, op.cit., p.96.
7. 상황주의자의 유산
20세기에 등장한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은 꼭 레닌의 ‘전위당’ 노선에 동조하지 않았더라도, 맑스주의 내지 아나키즘과 깊은 친화력을 보였다. 특히 앞서도 살펴본 것처럼, 부르주아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예술 작품들을 상품으로 치환시켜는 물화 과정을 지켜보며, 맑스주의처럼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부르주아 사회를 넘어서려고 시도했었다. 또한 그들은 노동자들 역시 자신들과 같이 착취당하고 있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Raymond Williams, The Politics of Modernism: Against the New Conformists, p. 55.
그리고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이와 같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전통과 더불어 맑스주의라는 이론적 사상 체계를 수용하고 그것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전술한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형태를 스스로가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은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예술적 아방가르드를 대등하게 통합시킨 사례이다. 그러나 자신들을 지칭하는 아방가르드는 레닌주의적인 ‘전위당’ 개념과 상이하다. 이들은 그러한 전위주의(vanguardism)를 거부했고, 혁명적 운동의 주역(star)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Sadie Plant, “The Situationist International: A Case of Spectacular Negect”, p. 5.
오히려 상황주의자들은, 볼셰비즘으로 대표되는 레닌의 ‘전위당’이 러시아에서 승리를 거둔 순간을 현대 스펙타클적 지배의 양상으로 파악한다. 즉 그것은 노동계급의 이미지(전위당)가 노동계급과 근본적으로 대립, 분리된 사태라는 것이다. Guy Debord,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Donald Nicholson-Smith(trans.), # 100(p. 69).
따라서 이들은, 혁명적 조직이 혁명적 계급을 대표(representation)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앞의 글, # 119(p. 88).
그리고 볼셰비즘과 같은 소외된 형태의 투쟁 방법으로는 스펙타클적인 소외와 대결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앞의 글, # 122(p. 89).
상황주의자들은 20세기 초반을 전후로 존재하고 있던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예술적 아방가르드를 절묘하게 융합시킨 사례였다. 레닌의 볼셰비키 전위정당이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가장 세련화된 형태였다면,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가장 급진화된 형태였다. 그 둘은 모두 아방가르드적인 전통 속에서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저항의 시도로 나타났지만, 각기 다른 맥락에서 실패하고 만다. 상황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넘어서고자 했다. 정치와 예술을 결합시킨 그들의 이론적 수준은 이전의 어떠한 아방가르드 집단들보다 가장 우위에 있었으며, 자본주의적 질서에 공격을 가하는 데 있어 가장 급진적이었다. 아방가르드의 ‘삶(la vie)’은 상황주의자에게서 ‘일상생활(la vie quetidienne)’로 변주된다. 즉,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어우러지며 구체성을 획득한, 모든 혁명적 프로젝트의 근거지로서 거듭나게 된다. 스펙터클에 의한 소외의 공간이자 자본주의적 권력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인 이 일상생활을 탈식민화시키는 것, 상황주의자들은 이러한 투쟁이 정치경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 및 상품과 임노동의 폐기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Editorial, “Minimum Definitions of Revolutionary Organizations”,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 7, 1967 in Ken Knabb, op.cit., p.223.
또한 이들은 스펙터클적 시공간에서 유통되는 담론의 질서에도 파열을 일으키고자 했기에 일상생활의 혁명은, 현대 자본주의의 생존근거로서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경제, 정치, 문화적 심급 전체에 대한 투쟁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혹은 그것들이 응축된 메타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일상생활을 단지 문화로 해석한다면 상황주의자들의 급진적 삶정치를 훼손하는 것이다.
한편 상황주의자들의 정치적 실천은 전통적인 정치의 관념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전통적이라 함은 근대적인 의미의 정치를 지칭할텐데, 그러한 정의는 서구에서, 그리고 현재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우월한 지위를 획득한 대의 민주주의를 가리킨다. 상황주의자들은 대안적인 사회 체제로서 직접적인 참여를 고양하는 노동자 평의회를 옹호하였는데, 이들은 전문화된 영역으로서의 정치에 대해 비판하며, 스펙타클에 대한 구경꾼(spectator)으로서의 인간이 인식하는 정치가 그러한 전문화된 정치이며, 이러한 정치에서 모든 이들의 참여에 대한 요구는 추상적인 관념으로 퇴보한다고 주장한다. Editorial, “Instructions for Taking Up Arms”, p. 63.
이와 같은 정치는 스펙타클화 되어 주체들을 소외시키면서, 스펙타클의 부속 장치로 기능할 뿐이다. 현재의 스펙타클화된 제도 정치는 무엇보다도 미디어 선거를 통해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후보자들의 이미지는 선거 기간 내내 텔레비전 광고와 전단을 통해 지상에서 부유하면서, 선거는 말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쇼(show, 보여주기)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선거에서만 그러한 게 아니다. 대의제 하에 작동하고 있는 제도 정치는 이미 정치인 개개인의 이미지 통제와 맞물려 있으며, 대중 매체는 정치적 허상을 잘 포장하여 실어 나르는 스펙타클적 도구가 된 지 오래다. 스펙타클은 진압(pacification)과 탈정치화의 수단이며 Steven Best & Douglas Kellner, “Debord, Cybersituation, and the Interactive Spetacle”, p. 133.
또한 드보르의 표현대로 일상생활에서 영구적인 아편 전쟁을 진행한다. Guy Debord,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Donald Nicholson-Smith(trans.), # 44(p.30).
아편 전쟁이라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주체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실제 삶의 가장 긴급한 임무를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Steven Best & Douglas Kellner, “Debord, Cybersituation, and the Interactive Spetacle”, p. 133.
대의제로 대표되는 제도 정치는, 사람들을 정치적 삶에서 소외시킴으로써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해 버린다. 전문화된 정치는 사람들을 진정한 삶에 분리시키는 스펙타클적 기능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 정치에 대하여 상황주의자들이 가한 공격은 근본적인 것이었다. 즉 사회 구성원의 참여를 보장한다는 명분 아래 일반의지의 구현체로 등장한 의회의 그럴듯한 외피를 벗겨 냄으로써, 상황주의자들은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now and here)에서 시작되는 정치를 요구한다. 모든 전문화된 정치를 거부하는 대신, 자신들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호흡하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상생활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정치의 공간을 창조하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일상생활이라는 영역에서 치열하게 진행된 상황주의자들의 새로운 정치적 관념은 고전적 의미의 정치 개념을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으로 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여기서 ‘정치적인 것’을 간략히 정의하자면 “정치적인 제도의 경계 내에 존재하는지와 상관없이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모든 영역에서 발전할 수 있는 관계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Benjamin Arditi, “Tracing the Political”, Angelaki, Vol.1, No.3, pp.20-21.
정치에 관한 관념이 ‘정치적인 것’으로 전화하게 된 것은 단순히 상황주의자들만의 기여라기보다는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분출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미증유의 정치적인 급진화 속에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해소된, 전혀 새롭고 판이한 정치적 공간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는데, Ernesto Laclau and Chantal Mouffe,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London: Verso, 1985), p.181.
이때의 정치적 공간이란 바로 일상생활일 것이다. 정치적인 주체들의 활성화 속에서 그들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국가 혹은 그와 관련된 제도만이 아니라, 사회가 어떤 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는가, 그 재생산 과정은 어떤 목적으로, 누구의 입맛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가의 문제로 향하고 있다. 일상생활은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이 감추어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Alice Kaplan and Kristin Ross, op.cit., pp.2-3.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 혹은 일상생활이라는 공간에서 시작되는 정치적 활동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총체적 지식과 맞물리게 되며, 공/사의 구분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사고로 귀결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상황주의자들의 일상생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모든 현존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질서가 녹아있는 장소이기에 전복의 장소로서 복권되어야 한다. 비록 스펙터클의 강고함만을 보여준 채 상황주의자들은 해체되었지만,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의 물음에 아방가르드와 상황주의자들은 훌륭한 성과를 남겨놓았다. 총체적 혁명을 실현하고자 했던 상황주의자들은 오늘도 혁명적 삶의 준거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배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