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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會參加記 |
中國 北京大學 開校100周年 記念
“漢學硏究國際會議” 參加記
金 燁 (前 世明大 總長)
Ⅰ
中國 北京大學이 1998年 5月 4日로써 開校 100周年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 5月 5日~9日에 걸쳐 北京 서북 교외의 명승지 香山(香山飯店)에서, 중국에서는 아마 처음 있는 文·史·哲·考古 합동의 “漢學硏究國際會議”를 개최한 것이다.
會議參加記에 앞서 개교 100주년을 맞는 北京大學의 발전 개황을 간단히 살펴 본다. 1989년 淸朝 극말에 變法維新의 산물로 京師大學堂이란 이름의 근대적 대학이 처음으로 세워졌다. 그것이 辛亥革命 후 1912년 5월 北京大學으로 개명되고 초대 校長(총장)에 嚴復이 임명되었다.
1916년 12월 蔡元培가 校長이 되자 저명학자들을 대거 초빙하고 대학행정을 개혁하여 근대적 대학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때 陳獨秀를 문과학장, 李大釗를 도서관 주임, 胡適·錢玄同으로 문과 교수, 馬寅初를 교무장으로 하고 魯迅을 또한 北大敎授로 초빙하였다. 이렇게 하여 당시의 북경대학은 自强과 혁명운동의 중심지요, 新文化運動의 책원지며, 5·4운동의 발발지로 부상하였다. 교수들도 중국에서 가장 훌륭한 분으로 알려져 중국 근현대의 교육 발전과 학술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北京大學은 淸華大學, 南開大學과 함께 남천하여 國立西南聯合大學을 만들어 항일에 대비하였다.
항일전이 끝난 1946년 북경대학은 다시 북경으로 복교되고, 그 뒤 中共政權이 성립하자 정무원은 1951년에 馬寅初를 신중국 북경대학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익년 북대는 燕京大學과 합병하고 沙灘에서 지금의 海淀區 燕園으로 캠퍼스를 옮겼다. 院, 系를 조정하여 기초학문에 치중한 文理科綜合大學을 만든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이후 半世紀가 지난 지금은 명실공히 중국 대학의 대표격으로서 인문, 사회, 자연, 기술, 관리, 교육, 어언, 의약 및 신형공정과학을 포함한 새로운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전체 소속 인원은 약 3,000명, 그중 교수 814명에 이른다.
이번에 개최한 “漢學硏究國際會議”는 바로 이러한 북경대학의 100년간의 발전사를 경축하면서 한학이 이미 국제성의 학문이 된 이상 漢學硏究의 최신 성과를 국제간에 교류함과 동시에 21세기에 다가올 광영된 전도를 豫示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대회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대회를 주관한 기관은 북경대학내의 “中國傳統文化硏究中心”으로서 2년여에 걸쳐 준비하여 개최한 바, 세계 16개국에서 300여명의 학자들이 초빙된, 아마 중국대륙에서는 초유의 국제학술대회가 아니었던가 싶다. 한국에서는 朴元熇 교수(高麗大, 東洋史學會長), 曺永祿 교수(東國大, 前 東洋史學會長), 李亨求 교수(鮮文大, 考古學), 梁承武 교수(中央大, 中文·哲學), 그리고 필자 金 燁(世明大, 東洋史) 5명이 초청되었는데, 梁 교수가 사정상 불참하고, 현지에서 北大 硏究敎授로 가 있던 江陵大 金白鉉 교수(철학)와 延世大 金裕哲 교수(동양사)가 참석하였다.
대회의 성격은 중국에서 개최된 여느 국제대회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규모가 크고 文·史·哲에다 考古까지 포괄된 명실공한 국제한학회의로서 세계적 저명 漢學者들이 대거 참가한 대회였다. 특히 이번 대회는 美國人(羅傑偉, Roger E. Covey)의 원조를 얻어 개최하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근년에 개최된 다른 국제학술회의와는 달리 참가자 전원에게 숙식비와 기타 유인물대가 공제되었다. 각자의 항공비만이 자담이었다. 羅錦堂 교수(하와이대)의 「我所知道的漢學會議」(������’98漢學硏究國際會議論文提要������)란 글에 보면 이번 대회는 과거 몇 번 있었던 국제한학회의 즉 1964년의 파리대학, 1966년의 대만의 중국문화대학, 1980년의 臺灣 中央硏究院 第一屆 國際漢學會議, 1986년의 第二屆 國際漢學會議, 1991년 싱가폴 國立大學 등이 개최했던 국제한학회의와 같은 성질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1986년 臺灣 中央硏究院의 第二屆 國際漢學會議에 참가해 본 경험이 있는데, 참석 인원과 회의 성격은 그때와 비슷하였다. 대우면에서도 양 곳 모두 최대의 대우를 해주었으나 대만에서는 주최측이 항공비까지를 부담한 것으로 기억된다.
Ⅱ
회의의 日程과 안배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5월 5일 報到(등록), 5월 6일 9시~10시 開幕式, 개막식에는 北京大 校長 陳佳洱 교수(核物理學)의 환영사에 이어 특별초청된 費孝通(社會學), 羅傑偉(美國)의 致辭가 있었고, 이번 대회의 총책인 袁行霈(北大 中文系, 中國傳統文化硏究中心 所長)의 개막사가 있었는데, 漢學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 받아 연구 영역을 확대하고 연구 방법을 갱신하며, 세계문화와의 교류를 통하여 중화문화는 물론 세계 각 민족문화의 번영을 도모함으로써 세계의 화평과 문화의 진보를 기원해 마지 않는다는 패기에 찬 개막사를 하였다.
30분간 휴식, 합동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10시 30분~12시까지 大會報告(공동주제발표)가 있었다. 任繼愈 교수(北京圖書館, 哲學)의 사회로 季羨林(北大, 印度語文), 饒宗頤(香港中文大, 古文字學), 杜維明(하버드大, 哲學), 淸水茂(京都大, 中文學) 등 諸 敎授가 한학의 특색, 세계문화에의 공헌, 전망 등에 대하여 차례로 발표를 하는데, 任 교수의 유모러스한 사회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당일 오후에는 2:00~5:30분까지 分會(분과별 발표)가 열렸다. 분회는 文學語言分會, 歷史分會, 哲學分會, 考古分會의 4 파트로 나누고, 각 분회는 文學語言分會가 3조, 나머지는 2조로 다시 나뉘었다. 역사분회는 제1조 先秦~唐, 제2조 宋~淸의 시대로 나누어 발표하였다. 이 분회의 발표가 5월 6일 오후에 시작하여 7일 오전·오후, 8일 오전까지 연 3일에 걸쳐 약 200여건의 발표가 있었다.
처음 각 사람에게 부쳐온 대회의 邀請書와 啓事에 의하면 회의 주제를 “我與漢學硏究”로 정하고, 각자의 발표 내용을 여기에 맞추어, 연구 경험, 방법, 성과, 또는 학술류파, 師承, 혹은 지역, 국가, 기구의 연구 현황과 성과의 그 어느 것도 가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국인은 대부분 그 나라의 한학 연구동향을 많이 발표하였고, 중국인은 대체로 자기의 최근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 한국의 우리는 朴元熇 교수가 「韓國近五十年來中國史硏究的回顧與展望-試論建立獨創性的東亞歷史體系」를, 曺永祿 교수가 「竹筏“東亞地中海號”黃海漂流的意義和韓中交流史硏究課題」, 李亨求 교수가 「最近韓國南江流域新發現的靑銅器時代玉器工房遺址爲韓國玉器文化來源問題之商討」, 필자가 「韓國的中國古代史硏究之現狀及展望」을 발표하였다.
필자가 참석한 歷史分會 第一組에서는 약 20여건의 발표가 있었는데, 참고로 몇 개를 들면 다음과 같다. 李學勤(中國社會科學院, 「夏商周斷代工程的新進展」), 王叔岷(臺灣中央硏究院, 「慕廬述學」), 費路(獨逸 베를린 흄볼트大, 「我與漢學」), 韓復智(臺灣大, 「我所認識的錢穆先生」), 張傳璽(北京大, 「應劭‘漢改郵爲置’說辨證」), 葛劍雄(復旦大, 「從沿革地理到歷史地理學」), 池田溫(創価大, 「������貞觀政要������之日本流傳與其影響」), 平勢隆郞(東京大, 「中國古代的預言與正統」), 吳宗國(北京大, 「隋唐政治體制的發展變化」).
3일간의 分會 발표가 끝난 후 8일 오후에는 또 大會報告가 있었다. 전후 2부로 나누어 伊維德 교수(홀랜드 라이든大, 서양인명을 원어로 적지 않고 모두 漢文으로 적음) 사회로 何玆全(北京師範大, 「中國傳統文化와 未來世界」), 徐苹芳(中國社會科學院, 「中國古代城市」), 費奧克基斯托夫(러시아科學院, 「作爲哲學体系的儒學的發展前景」) 등 교수가 발표하였고, 후부에는 王鍾翰 교수(北京中央民族大)의 사회로 何莫斯(노르웨이 오슬로大, 「������馬氏文通������以前的西方漢語語法書槪況」), 丁邦新(버클리大, 「趙元任과 中國語言學」), 吳同瑞(北京大, 「中國傳統文化硏究中心의 所任과 中華文化의 弘揚」) 諸 敎授의 발표가 있었다. 마지막 閉幕式에는 張岱年(北京大, 哲學), 王叔岷(臺灣中央硏究院, 歷史) 등 老學者의 式辭와 北京大 校長室의 何芳川 교수의 閉幕辭로 大會를 마쳤다.
대회에서는 이름만 듣던 耆宿大家들의 면면을 만나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발표를 들을 수 있었고, 또 분회의 발표장에서도 낯익고 이름있는 외국 교수들을 만나거나, 혹은 새로 인사를 교환한 많은 교수들이 있었는데, 이런 일들이 학문 교류에 유익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 李學勤(中國社會科學院 歷史硏究所長), 張傳璽, 吳榮曾, 祝總斌, 吳宗國(以上 北京大), 何玆全(北京師範大), 張立文(北京人民大), 沈善洪(杭州大 韓國硏究所長), 葛劍雄(復旦大) 등 대륙학자, 臺灣서 온 韓復智(臺灣大), 黃寬重(臺灣 中央硏究院 歷史語言硏究所) 등 여러 교수, 또 오랜만에 만난 臺灣 출신의 丁邦新 교수(버클리大) 내외분, 일본서 온 池田溫(創価大), 佐竹靖彦(東京都立大) 등 구면에 平勢隆郞(東京大) 같은 신진도 만났다. 어쨌든 국제학술대회는 발표도 중요하지만, 享譽의 국제적 학자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랄 수 있겠다. 특히 이번에 臺灣의 老朋友 韓復智 교수와 北京大의 張傳璽 교수와는 매일 만나다시피 하고 식사도 함께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미 70 고개를 넘었거나 70 고개를 바라보면서 언제 또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발표가 있은 3일간의 晩餐 또한 의미가 있고 즐거웠다. 이때 요리와 함께 술이 나오고 흥겨운 詩唱도 나왔다. 첫날 만찬 때는 각국에서 온 代表 한사람씩 나와 인사를 하는데, 韓國 대표로는 나이가 많다고 해서 내가 나가 서툰 중국어로 인사를 하였다. 둘째날은 만찬 후 북경의 유명한 京劇, 昆曲을 관람하였다. 京劇은 <單刀會>란 題名으로서 ������三國誌演義������의 關羽와 魯肅이 만나는 장면을 웅장 호방하게 연출하는 극이었다. 關羽 분장에 朱家溍이란 85歲의 老人이 수십년간 이어온 노익장의 연출에는 모두들 감탄했다. 昆曲은 明代 湯顯祖의 <牧丹亭·游園·惊夢>을 연극화한 것으로서 아름다운 노래가 겻들인 낭만적 연극이었다. 마지막날 만찬 역시 요리와 술이 나오고 이별의 노래와 춤이 어울려 흥겨웠다.
Ⅲ
첫날의 등록과 3일간의 발표를 마치고 마지막 5일째인 5월 9일엔 北京大學을 구경하지 않은 外國人을 위하여 北大參觀팀이 결성되었다. 나는 1991년에 구경한 일이 있으므로 이번에는 모처럼의 기회에 泰山과 曲阜를 탐방하기로 하였다. 山東省 省都인 濟南까지 비행기로 가서, 마침 靑島 부근의 한 韓國會社에 근무하고 있는 조카가 승용차를 갖고 마중 나와서 함께 구경하는데, 첫 날은 曲阜로 가서 孔子의 廟와 孔子의 옛집(孔府), 그리고 孔子와 子思의 무덤(孔林)을 구경하였다. 孔廟의 웅대함과 孔府의 아기자기한 예술적 건축미에 경탄을 불금했거니와 孔子墓를 보고 중국 묘제와는 사뭇 다른 우리나라 묘제(봉분, 비석 등 형태)와 비슷한데 놀라움과 정감을 느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묘 형태가 이 공자의 묘를 본떠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泰安에 와서 일박하고 10일 泰山에 오르는데, 하필이면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泰山의 중허리 中天門까지 오르고 더 이상 오르지 못하였다. 空中索道(케이블카)가 운행되지 않아 부득이 하산하여, 과거 제왕들이 태산에 오를 때 먼저 제를 올리고 시발하던 장소인 岱墓를 참관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秦始皇帝와 漢武帝가 封禪을 행하고 역대 많은 皇帝가 封禪祭를 올렸다는 그 유적을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하여 유감이었다.
귀로에는 다시 濟南에 들러 山東師範大學과 山東大學을 구경하고, 黃河 하류도 구경하면서 靑島에 와서 일박하였다. 마지막 靑島에서 비행기로 서울로 날아오기 때문이었다. 靑島로 오는 길에 淄博을 지나면서 이곳이 옛날 齊의 수도 臨淄였음과, 또 卽墨을 바라보면서 齊의 장군 田單을 생각하였고, 靑島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 가운데 아직도 田橫島가 있음을 듣고 옛날 田橫의 무리 500人이 自刎한 故事를 생각하고 잠시 감상에 잠겼다. 靑島는 중국에서 드물게 보는 바닷가의 깨끗한 도시로 지금 개발이 한창인데, 새로 들어선 獨逸式 서양풍 건물들이 보이는 것은 역시 淸末 獨逸 租借地(膠州灣)에 기인한 것으로 역사의 인연이 무서움을 실감하였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학계의 소식을 듣고 새로운 풍물에 접하며, 보고 싶던 고적도 찾고 그리고 역사를 생각하는 기회를 가져 정말 좋았다. 앞으로 현직에 있으면서 국제회의에 참석할 기회는 아마 없을 것 같아 이번 기회가 나에겐 매우 뜻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北京大學 成立100周年기념 “漢學硏究國際會議”에 參加의 機會를 마련해 준 北京大 中國傳統文化硏究中心의 籌備委員 諸位와 특히 張傳璽 敎授께 甚深한 謝意를 表하는 바이다(1998.9.30).
원문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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