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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민속과 유교>
조선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유교의 신념을 외형적으로 표출시키는 기제가 상실됨으로써 유교儒敎는 “집안의 종교로 맥을 이어온 침묵의 종교”로 이해되었으나, 조선시대의 유교는 엘리트의 지적 전통을 통해 유교의 이념이 구축되었고, 풍부한 예제禮祭를 통해 정형화된 행동양식行動樣式으로 표출表出되었으며, 국가와 지방의 행정 및 교육 조직을 통해 종교공동체가 구성된 점에서 신념체계, 의례, 조직을 갖춘 종교였습니다.
이에 반해 민속종교popular religion는 공적 제도를 갖추지 못했으며, 신념체계의 내적 조리도 갖추지 못해 비종교로 이해됩니다.
고정된 신념체계가 없을 경우 삶의 한 방법method에 불과하기 대문에 비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민속에도 나름대로 인간, 신 그리고 세계에 관한 지식을 오래 전승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삶의 위기를 진단하고 위기의 극복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를 신념체계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더구나 민속은 의례지상주의적일 정도로 다양한 의례와 종교적 관행을 지녔으므로 풍부한 종교적 실천체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유교儒敎와 민속民俗은 조선시대에 공식종교official religion와 비공식종교non-official religion, 엘리트의 종교와 대중의 종교popular religion(혹은 common religion, folk religion, mass religion)라는 이분적인 차원에서 구분되었습니다.
공식종교와 민속종교의 구별은 제도의 분화, 전문화의 측면에서 관찰되므로 민속종교는 공식화된 종교의 신념체계, 종교의례, 종교조직 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비조직적인 종교를 의미합니다.
전근대사회의 공식종교는 신념, 의례, 공동체가 국가의 권위와 결부되어 조직화된 체제종교였던 데 반해 민속종교는 공식 권위로부터 소외된 비체제종교였습니다.
공식종교는 엘리트전통의 뒷받침 속에서 교리를 계발하고, 확립된 예제로 종교의례를 거행하고, 법과 국가기구를 통해 종교조직을 유지한 반면 민속종교는 대중의 열망과 정서를 의례로 분출시키는 의례전문가의 직능을 통해 유지되었습니다.
민속종교의 전통은 잠재적이면서도 집단적으로 전승되었고, 이 과정에서 대중의 구복적求福的 열망을 의례儀禮로 표출시키는 종교전문가로서 무巫가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민속종교는 신비적인 학습의 과정을 통해 종교적 직능을 배양培養하고, 이를 토대로 대중의 종교적 열망을 의례적인 직능으로 풀어낼 줄 아는 무巫가 주도해나갔습니다.
일반적으로 무巫의 종교적 직능은 의례적 직능(사제司祭), 치료적 직능(무의巫醫), 예언, 점복적 직능(점무占巫)으로 구체화具體化되었습니다.
이런 무巫의 세 가지 종교적 직능은 국가 및 왕실(내행內行)의 차원에서 공식종교의 종교전문가의 직능과 충돌을 빚었습니다.
무巫의 의례적 직능은 국행의례의 주체인 왕王과 조신朝臣의 의례적 직능, 무巫의 치료적 직능은 공인된 교육과 과거제도를 통해 양성된 의관과 시대부이면서 의약의 기술을 익힌 유의儒醫의 직능 그리고 무巫의 예언, 점복적占卜的 직능職能은 국가 공인의 교육과 선발을 통해 직능을 부여받은 일관日官의 직능과 상호 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유교가 왕과 조신이라는 핵심적인 엘리트와 이를 보조하는 엘리트(의관醫官, 일관日官)에 의해 직능을 수행한 반면 민속종교는 여러 직능을 한 몸에 익힌 무巫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유교와 무속을 차별화하려는 강한 문화의식의 표현이 마침내 유교와 민속이 안고 있는 구조적 이질성을 정사正祀와 음사淫祀라는 틀로 구체화했습니다.
정사의 확립은 각종 예제禮制를 확정해 국가 및 왕실의 의례를 유교문화의 바탕 위에 정초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으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비롯한 각종 예전禮典들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아울러 음사의 확립은 각종 법제法制를 설정하여 공식적인 유교문화의 영역에서 비유교적인 종교문화를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드러났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한 각종 법전法典들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정사의 구별의식에 입각한 음사론이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세종 23년 정인지鄭麟趾가 올린 상소上訴에서 발견됩니다.
무릇 제사에는 정正과 사邪가 있습니다. 천지, 일월성신, 산천, 사직, 종묘, 선성先聖, 선사先師 등과 같은 제사는 정正이며, 불佛, 노老, 무격巫覡 등의 제사는 사邪입니다.
정인지의 상소는 유교예제로 확립된 공식종교의 의례는 바른 제사이고 무속의례와 같이 비공식적이고 비유교적인 의례는 그릇된 제사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예기禮記』에도 “제사해야 할 바가 아닌데 제사하는 것을 음사라 하며 음사는 복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에게 보낸 명明 태조太祖의 조서調書에는 “천하天下의 신사神祀 가운데 백성에게 공이 없고 사전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것은 음사에 해당하므로 유사有司는 제사를 행할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무속은 음사 중의 음사였습니다.
최충성崔忠誠은 『산당집山堂集』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한 음사가 있습니다. 무격巫覡이 민속에 해됨은 불씨보다 심합니다. 나주의 금성산과 광주의 무등산은 백성들이 다투어 가는 곳으로 시장에 들어서는 듯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도 곧 양식을 가지고 연초에 두어 번 이릅니다. 나주로부터 광주까지 광주로부터 나주까지의 양주兩州의 왕래의 길은 사람들이 부딪쳐 닳을 정도입니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바른 사람에게는 요물이 스스로 범하지 못하니, 도깨비가 태양을 피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무격巫覡과 불가佛家의 류는 모두 간계한 요물인데, 지금 불교는 쇠퇴했으나 무격은 아직도 많이 있다. 조정과 사대부가 몸소 정도正道를 행하여 그 간계함을 알아 배척한다면 사류邪類는 저절로 행해지지 못할 것이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교異敎의 화禍가 여기에 이르러 가장 심했고, 요무妖巫의 황당한 설은 흉악하고 참혹했다. 집안이 기울고 가산을 탕진해도 아까운 줄 모르기도 하며, 심한 자는 어버이가 죽어도 곡하지 않고 장례와 제사를 폐하기까지 했다. 이런 박절한 해악이 불교보다 만 배나 더했다.”
무속과 같은 민속종교의 전통을 음사로 규정하고 유교의 바른 제사를 어지럽히는 그릇된 제사로 인식하는 음사론의 논리는 법제를 통해 구체화되었습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무격巫覡이 경성 내에 거주하는 것과 무격이 행하는 의례는 용인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도성 안의 무속문화는 성 밖으로 축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음사에 대한 분리조치는 확대, 강화되어갔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성숙청星宿廳이 혁파됨으로써 국무國巫에 의해 국무당國巫堂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행해진 국행별기은國行別祈恩이 종식되었고, 17세기에 이르러 폭무暴巫와 무巫의 산천기우의례山川祈雨儀禮가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에서 일단락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러 동서활인서의 활인경비로 충당되던 경성 무녀의 무세巫稅가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활인서에서의 무巫의 국행활인 활동도 중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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