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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교의 토착화
-성리학의 계승․비판․이탈-
최영진(성균관대학교 교수․한국 철학)
2002.6.17, CCK
1. '토착화'의 사전적 의미는 외래의 사상이나 문화․제도 등이 뿌리를 내려 그 사회에 알맞게 동화됨을 뜻한다. 그런데 유교는 상고대에 동이족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일방적인 전래와 수용․토착화라는 등식이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1) 유승국은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주대의 예제(禮制) 문화 성격을 가진 유교 사상이 한국에 전래하는 것과 그 이전부터 고대 동방 문화 사상을 계승하여 살아 온 한국 고대 신앙과는 스스로 다른 바가 있으며, 또 한편으로 요순 이래 역사적으로 은․주 문화를 집성한 공자 사상에는 동방 사상과 양자가 화합할 가능성의 바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공맹 이후 육경 사상(六經思想)을 수용 섭취함에 있어서 큰 모순 없이 민족 사상으로 동화될 수 있는 동시에 한국적 특성을 나타내어 한국 민족사 발전에 힘이 된 소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2)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본고는 실학의 성립을 성리학의 계승과 비판․이탈이라고 하는 각도에서 고찰하여 '유교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실학 이전, 성리학의 토착화는 우선 16세기 퇴계-고봉, 율곡-우계의 사단 칠정 논쟁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 논쟁은 당시 조선 사회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대응 양상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이른바 4대 사화(四大 士禍)로 불리는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 4년, 1498년), 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 10년, 150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14년, 1519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명종 즉위년, 1545년) 가운데 3회의 사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16세기 초에 해당하는 중종 초기에 기묘사림(己卯士林)으로 불리는 조광조(趙光祖),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등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적 이념을 현실 사회에 정치적으로 구현하고자 진력하였으나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로 좌절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림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은 이 시기에 사단칠정론으로 대표되는 정밀한 이기심성론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퇴계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한 단서를 발견할 수가 있다.
"정암(整庵) 조광조는 천품이 진실하고 아름다웠지만 학문적 역량이 미흡하여 그의 행위가 지나침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마침내 일을 그르치게 된 것이다. 만약 학문적 역량이 충분히 갖추어지고 덕이 성취된 뒤에 나아가 세상의 일을 담당하였더라면 쉽게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을 것이다"(≪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
이 글에서 퇴계는, 정암을 위시한 사림들이 순결한 이상을 품고 있었음에도 결국 현실 정치에서 실패하게 된 이유를 '학문적 역량의 미흡'에서 찾고 있다. 곧 '지치'(至治)라고 하는 성리학의 이상적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불충분했다는 자기반성이다. 정치 현장에서 물러난 사림들이 치열한 논변으로 이기심성론을 발전시켜, 마침내 조선 성리학의 기초 이론을 정립하게 된 이유는, 순수한 학문적 동기 이외에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성리설 가운데에서도 사단칠정론, 인심도심설 등 심성론이 중심 주제로서 논의된 이유를 해명할 수 있다. 정치․경제 등 사회적 모순의 근본 요인을 인간의 심성에서 찾는 것이 유교, 특히 성리학의 기본 관점이다. 곧 외적인 문제는 내적인 양심의 문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3) 퇴계와 율곡은 사화기와 경장기라는 시대 상황이 제기하는 문제점의 근본적 해결책을 마음에서부터 모색하였으며, 그 이론적 기초로서 이기론을 정립한 것이다. 그들이 정립한 성리학의 이론 체계를 토대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라는 학파가 형성되어 조선 후기의 문화와 사상 그리고 정치․경제 등 사회 전반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주자 성리학이 조선 성리학으로 토착화되고 이에 대한 변용 또는 이탈로서 실학이 형성되어 한국 사상사의 커다란 줄기를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논쟁은 호락논쟁이다. 이 논쟁은 '성인과 범인의 마음은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聖凡心同不同論), '인간과 물(物)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人物性同異論),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미발심체(未發心體)의 선악 문제 등이 그 쟁점이었다. 이 논쟁은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대외 인식의 함수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그 배후에는 오랑캐 청에 대한 인식, 17세기 이후 성장해 온 하층민에 대한 인식, 탕평 정국에 대한 노론의 대처 방안 등의 문제들이 간접적으로 개입되었다.4) 이 논쟁을 계기로 낙론계는 호론계를 중앙 정치권에서 탈락시키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성리설 논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실학사상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갖게 된다.5)
성리학의 토착화는 사회적인 요인과 아울러, '정합성의 추구'라는 조선 유학의 기본 방향이 중요한 동인이 된다. 사단칠정론의 쟁점 가운데 가장 첨예한 문제는 이발설(理發說)인데, 이것은 주자가 이(理)의 능동성을 부정하면서도 긍정하는 등 논리적인 문제성이 그 요인이다. 이 논쟁은 주자학의 범위 안에서 그 정합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점철된다.6) 호락논쟁 가운데 가장 알려진 인물성동(人物性同) 논쟁도 주자가 ≪중용집주≫에서는 인물성동(人物性同)을, ≪맹자집주≫에서는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주장한 것이 그 중요한 요인이다. 주자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논리적 정합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에 중국의 주자학과는 다른 조선 성리학이 형성되었으며, 이와 연관하여 실학이라고 불리는 학적 체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토착화의 두 가지 요인은 그 담당자인 사대부들이 관료․정치가 겸 학자였으며, 유교 자체가 이론과 실천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이념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 실학(實學)은 허학(虛學)에 대한 대립 개념이다. 성리학에서 유교를 '실학'이라 말할 때, 그 상대로서의 허학은 노자․장자의 사상과 불교이다. 조선 초기에는 실학=경학, 허학=사장학이라는 관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실학-허학의 구도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다음 주장을 검토해 보자.
"17, 18세기 조선 주자학(朝鮮朱子學)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족한 현시점에서 그와 암묵적으로 비교하면서 당시의 일부 특정한 학풍과 사상을 '실학'과 '실학사상'이라고 부를 때에는 그와 비교의 대상이 된 조선 주자학의 사회 이념으로서의 변화 발전 과정이나 그 역사적 의미, 사회적 기능 등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은 채 동질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17, 18세기 조선 주자학의 사회적 기능과 성격에 대한 학계의 공감대가 없는 현시점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이라 하여 그를 일방적으로 '실학', '실학사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실학', '실학사상'이라 지칭된 학문과 사상의 올바른 평가에도 혼란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7)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학의 '실'(實)은 '허'(虛)에 대한 대립 개념이다. 주자가 ≪중용주≫(中庸註)에서 '실학'이라고 했을 때에는, 그 서문에서 "이단사설(異端邪說)이 일신월성(日新月盛)하여 노불(老佛)의 무리가 나옴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치에 가까워 진리를 크게 어지럽혔다."라고 말한 바의 그 노불(老佛)을 허(虛)로 규정하고 유교를 실(實)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유교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노불(老佛)을 '허무공적'(虛無空寂)하다고 비판했을 때의 그 허는 일상과 인륜을 저버리는 초세간적(超世間的), 향내적(向內的) 경향(傾向)이며,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주장했을 때의 그 실은 '일용평상도리'(日用平常道理)8)라고 하는 현실적인 일상성(日常性)으로서, 이것은 군신지의(君臣之義), 부부지별(夫婦之別)과 같은 인륜(人倫)과,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과 같은 생활 속에 천리(天理)가 현현(顯現)한다고 하는 형이상학적 토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9) 이것은 인륜․일상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절대적인 것을 획득하려는 송대(宋代) 사대부들의 이상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실학자라고 규정하는 학자들은, 성리학자들이 노불(老佛)(특히 불교)의 근본 교리를 '허'(虛)라고 규정하여 비판하였던 것과는 달리, 성리학을 명시적으로 허학(虛學)이라고 규정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학문을 그 대안으로서의 실학(實學)이라고 자처하지도 않았다. 담헌과 다산이 비판한 것은 당시 일부 성리학의 말폐적 현상으로, 다산은 ≪오학론≫에서 성리학을 '도를 알고 자신을 알아 그 실천할 도리를 스스로 힘쓰는 것'으로 정의하기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성리학과 대비된 새로운 학문 체계로서의 실학은 조선조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10)에 우리가 동조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실학자들이 활동하는 시기였다고 하는 17세기 이후 19세기 중엽까지의 성리학자들은 철학적인 차원에서 성리학상의 문제들(특히 호락논쟁과 그 지양)에 진력하여 학문적인 업적을 쌓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주자의 경세론에 의거하여 토지 제도, 신분 제도 등 제도 개혁에 대한 주장도 펴고 있었다.11)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이들과 궤도를 달리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었다. 우선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학자는 미수 허담(許穆, 1595-1682년)이다. 그는 당시의 집권 여당이었던 노론 학자들이 주자주(朱子註)의 칠서(七書)와 ≪주자대전≫, ≪주자어류≫를 중심으로 학문을 하던 것과는 달리 육경 자체에서 학문의 준거를 찾으려고 하는 복고성을 보이고 있다.12) 이와 같은 성향은 두 차례의 예송 때 송시열 등 노론이 ≪주자가례≫를 원형으로 한 ≪가례집현≫(家禮輯覽),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근거로 하여 기년설(朞年說, 1년)과 대공설(9개월)을 주장한 데에 반하여 허목 등 남인은 고례(≪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를 이론적 근거로 하여 삼년설(三年說, 2년)과 기년설을 주장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13) 허목은 남인 정파의 대표적 인물이지만 본래 가계는 소북(小北)계로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의 북인 정권이 몰락한 후 남인에 편입된 기호남인(畿湖南人)이며, 그 학문적 연원은 화담 서경덕이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남인은 서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정계의 주도권을 잃으면서, 향촌 근거지인 영남으로 물러난 영남 남인과 근기 지방에 자리를 잡은 기호 남인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 가운데 기호 남인은 숙종 초년 남인의 산림 총수였던 허목의 제자와 그 계열을 중심으로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14) 이 계열에서 채제공(蔡濟恭)이 "생각건대 우리 도(道)에는 유서(由緖)가 있으니 퇴계는 우리 동방의 부자이시다. 그 도를 한강(寒岡)에게 전하고 한강은 그 도를 미수에게 전했으며 선생[星湖]은 미수를 사숙하였으니 미수를 배워 퇴계의 유서를 이으신 것이다."(≪성호 선생 전집≫ 부록 ≪묘갈명≫(墓碣名))라고 밝힌 바와 같이 조선 후기 실학의 대표적 학자인 성호가 나타난다. 그리고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평가받는 다산이 바로 성호계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학파의 계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15)
△ 퇴계(退溪)-정구(鄭逑)-허목(許穆)-이익(李翼)-안정복(安鼎福)-황덕길(黃德吉)-허전(許傳)-허훈(許勳)
△ 권철신(權哲身)-정약용(丁若鏞)
허목과 함께 남인으로서 예송의 주역이었던 백호(白湖) 윤휴에게 노론계의 정통 성리학자들에게서 일정한 이탈 현상이 보인다. 위에서 기술한 예론도 그 가운데 한 경우이며, 특히 ≪독서기≫(讀書記)에 수록되어 있는 ≪중용≫과 ≪대학≫에 대한 논술은 주자본(朱子本)과는 매우 다른 장차(章次)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윤휴가 당시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비판받을 만큼 반주자학자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는 주자학을 긍정적으로 볼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우암을 '간정위주'(奸程僞朱)의 무리라고 비난하였으며 그의 후학들은 백호가 주자의 정맥을 잇고 있다고 자부하였다.16) 그러나 양명(陽明)의 경우에서도 뚜렷이 드러나듯이, 백호의 ≪대학≫관은 주자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자학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다. 이 같은 사실은 주자가 연문(衍文)이라고 규정한 "차위지본 차위지지지야"(此謂知本此謂知之至也)에 대하여 "이 두 구절은 아마도 윗글 네 마디의 뜻을 총결지어 전장 본말의 뜻에 응한 것 같다."(≪대학고문별록≫(大學古文別錄))라고 하여 정주와 다른 견해를 표명한 것이라든지, 주자가 '지'(至)로 주석한 격자(格字)를 '정의감통'(精意感通)으로 해석한 데에서도 확인된다.17) 뿐만 아니라
"첫째도 상제요 둘째도 상제이니, 한 가지 일을 행하면 '상제가 명한 바이다'라 하고, 선하지 못한 일을 행하면 '상제가 금한 바이다'라 하니, 어찌 징험할 수없는 말을 가지고 내 마음을 속이며 유매(幽昧)하여 궁구 수 없음을 빌려서 천하 후세를 미혹하는가?"18) 라고 하는 구절에는 시서(詩書)에 나타나는 중국 고대 인격신적인 상제관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 구절과 함께 "군자는 외천(畏天)하는 마음을 갖고 또한 수시처중(隨時處中)한다"(≪중용주자장구보록≫(中庸朱子章句補錄)).
"먼저 군자가 마음을 세워 위기(爲己)하는 뜻을 말하고 다음에 신독(愼獨)의 일을 말하고 다음에 계신공구(戒愼恐懼)의 일을 말하였으니, 모두 시천(事天)하는 소이이다."(위와 같음) 라는 구절은 다산의 ≪중용자잠≫(中庸自箴),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등에 나타나는 천제, 상제관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천관은 천을 이(理)로 파악하는 주자의 천관에서부터 선진 유가의 경전에 나타난 원초적 천관으로의 복귀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호에게서 유의할 점은 그의 학맥이다. 백호의 생애를 보면 일정한 사승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친 효전(孝全)은 본래 소북계로서 어려서 화담의 문인인 습재(習齋) 민순(閔純)에게 배웠으며, 백호는 허목에게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19)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백호의 학맥은 남인 중에서도 소북계와 연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퇴계의 적통을 이은 영남 남인과 율곡의 적통을 이은 노론이 주자학의 범위 안에서, 퇴계 율곡 등 조선 성리학자들이 제기한 성리설을 해명하면서 자신의 이론 체계를 수립하는 데 진력한 반면, 그러한 학문 성향으로부터의 이탈 현상이 기호 남인 중에서도 소북계에서 시작하였으며, 여기에서 실학사상이 발원한다는 가설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20)
3. 17세기 후반은 사회 경제적으로 변화가 많은 시기였다. 외침으로 피해를 입었던 농경지도 거의 복구되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상업 자본이 축적되었으며, 이 같은 경제적 변동은 자연히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21) 그리하여 18세기 후반 이후의 한국 사회는 점차 농업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를 향하여 변화하여 나갈 조짐을 보이게 된다. 18세기 중반 홍대용, 박지원 등 노론 집권층의 젊은 자제들이 새로운 개혁 운동을 일으킨 것은 이와 같은 사회 경제적 변화에 토대를 둔 것이다. 이들의 개혁 운동은 기존의 화이론(華夷論)에 근거를 둔 '북벌론'(北伐論)에서부터 '북학'(北學)으로의 의식 전환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근기남인의 실학자들이 그 학문적 기초를 선진 유학에 두었다가 그 복고성 때문에 서학으로 경도되어 간 데에 반하여, 북학론자들의 기본 입장은 사상적 기반을 전통 성리학에 두면서 기술 문명은 청에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22)
북학의 이론적 바탕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최대의 성리학 논쟁인 호락논쟁 가운데 낙론(洛論)인 인물성 동론(人物性同論)이라고 볼 수 있다.23) 낙론의 인물성 동론(人物性同論)은, 무엇보다 병자호란 이후 부동의 이념이었던 북벌론의 이론적 기반인 화이론을, '인물균'(人物均)이라는 명제에 기초한 '화이일야'(華夷一也)의 논리로 전환시킬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으며,24) 나아가 '성인사만물'(聖人事萬物)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함으로써 북학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25)
북학 사상의 형성에는 인물성 동론 외에, 같은 노론이면서도 송시열(宋時烈) - 권상하(權尙夏) - 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계파와는 달리, 조성기(趙聖期) - 김창협(金昌協) 계열의 '명물도수지속'(名物度數之屬)으로 표현되던 경제지학(經濟之學)의 영향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학문의 경향 면에서 담헌과 연암에게는 김창협, 김창흡에게 영향을 주었던 조성기(趙聖期) 계통의 경제지학과 아울러 김창흡의 문인으로 낙론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금석문(金錫文) 계통의 상수학(象數學)이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 같다.26)
담헌은 "율력(律曆) 산수(算數) 전곡(錢穀) 갑병(甲兵)은 비록 넓어서 요령부득하여 한 가지라도 얻은 것이 없지만은 또한 지극한 이치가 깃들여 있는 바이니, 인사(人事)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다."27) 라고 하여 전통적인 본말론(本末論)에 입각하여 본다면 말(末)에 속하는 산학이나 경제학, 군사학 등에도 지극한 이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가 전통적인 덕본재말론적(德本財末論的) 가치관이나 예(禮)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정심(正心)․성의(誠意)는 진실로 학문과 실천의 본체이니 개물성무(開物成務)가 학문과 실천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읍양승강(揖讓升降)이 진실로 개물성무(開物成務)의 급무(急務)이니 율력․산수․전병․갑병이 어찌 개물성무의 대단(大端)이 아니겠는가?"28) 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정심(正心)․성의(誠意)라는 도덕적 수양과 예라는 도덕적 규범은 여전히 체와 급무(急務)로써 위치하고 있다.
그의 학문관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난다.
"학문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으니 의리지학(義理之學)이 있고, 경제지학(經濟之學)이 있고, 사장지학(詞章之學)이 있다. …… 의리를 버리면 경제가 공리(功利)에 빠지고, 사장이 부조(浮藻)에 넘치니, 어찌 학문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또한 경제가 없으면 의리를 조치할 바가 없고, 사장이 없으면 의리가 나타나는 바가 없다. 요컨대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버리면 학문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의리가 그 근본이 아닌가?"29)
'의리지학'과 '경제지학'과 '사장지학'의 균형성을 강조하면서 의리학을 근본으로 보는 것이다.
4. 이상 검토한 바와 같이, 비록 기존의 성리학(性理學)을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대체 이론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학문 경향으로서의 실학의 계보는 기호 남인계(그 원류는 소북계)와 노론 가운데의 낙론계에 속하는 북학파의 두 계보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공통적인 현실 인식 위에 당색․학파․계층을 초월한 지식인들 사이의 교유가 성립되면서 두 계보 간에 교류가 이루어진다. 이들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은 산림의 주자주의적 의리지학풍(義理之學風) 위주에서 경제지학(經濟之學)과 사장지학(詞章之學) 그리고 명물도수지학적(名物度數之學的)인 박학풍(博學風)으로까지 관심 범위를 넓혀 갔으며, 이는 전 시대와 달라진 사회 현실에 대한 직관과 사회적 지도층으로서의 사(士)의 사회적 책임 각성에 따라 더욱 촉진되어 갔다.30)
노론과 소론계의 학자들이 교류하고, 기호 남인들도 퇴계 이래 정통 주자학풍을 보수하였던 영남 남인의 학풍보다는 당색이 다르지만 자유로운 학풍의 공감대를 지녔던 경화 학계 내의 노․소론 학자들과 교류가 빈번하였다. 그리고 담헌이 미호를 사사할 때 성호가 생존하고 있었고, 그 문도들이 서로 교류하였으며, 담헌․연암․초정 등 북학파의 핵심 인물들이 모두 성호사설을 읽었다. 또한 담헌은 율곡의 ≪성학집요≫와 함께 남인인 반계의 ≪반계수록≫을 '경세유용지학'(經世有用之學)이라고 평가했다.31)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다산은 기호 남인의 학풍을 이어, 원초유가(原初儒家)의 근본정신을 사서(四書)․육경(六經)에 대한 새로운 주석을 통하여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여기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여 노론 북학파의 북학 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선배들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전진적이며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32) 곧 실학사상은 남인계와 노론계라는 각각 상이한(어떤 의미에서는 대립적인) 당색과 학맥의 전개선상에서 성립되었으나 그들은 기호 지방, 특히 서울이라는 공통된 장(場) 속에서 두 학문적 성향을 종합함으로써 실학사상이 집대성되었던 것이다.
5.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조 후기 실학은 조선조 성리학과 대비된 의미에서 그 대응항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실학사상은 성리학과 깊이 연관되어 형성되었다. 이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받는 다산 사상 가운데 성리학과 구분되는 것은 천(天) 관념이다. 주지하다시피 다산은 천(天)을 이(理)로 규정하는 성리학의 천(天) 관점을 비판하고 인격적 존재인 '상제'(上帝)로 재규정하였다.33) 상제는 인간의 선악을 살피고 선한 자에게 상서로운 복을 내리고 음탕한 자에게 재앙과 화를 내리는 존재이다.34) 이러한 다산의 천관(天觀)은 내적으로 ≪시경≫, ≪서경≫ 등 고대 유교의 경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한국 유학사적으로 본다면 앞에서 언급한 윤휴의 천관(天觀), 더 나아가 퇴계의 이관(理觀)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천명유행처와 별도로 주재하는 뜻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이(理)는 극히 존엄하여 상대가 없으니 물(物)에게 명령을 하고 명령을 받지 않는다."35)
퇴계는 이(理)를 만물을 주재하는 지상의 입법자로 규정한다. 이러한 이(理)의 성격은 중국의 고대 형이상학적 실체 개념이 천명(天命), 천도(天道)에서 발원하며,36) 주대의 천은 은대의 상제로 소급될 수 있고37) 상제는 종교적인 절대의 주제자로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근원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38) 퇴계는 '물(物)에게 명령을 하고 물(物)에게서 명령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는 이(理)의 주재성을 상제와 연계시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주재하고 운용하여 부리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은 곧 서경의 '오직 위대하신 상제께서 백성들에게 본성을 내려 주신다.'라고 말한 바이며, 정자가 '주재(主宰)로서 말한 것이 제(帝)이다.'라고 이른 것이 이것이다."39)
주지하다시피 상제는 인격신적 존재로서 극히 존엄한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이와 같은 상제의 인격성이 퇴계의 이(理) 개념의 원형을 이룬다고 할 때에 이(理)는 단순한 자연계의 원리적 차원을 넘어서서 종교적인 신성성이 근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퇴계의 존리사상은 한갓 주리 의식이라든가 이(理) 우위적 사고라고 하는 피상적 시각에서 설명되기 어려운 것으로서, 종교적인 차원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서 진리를 경외하는 퇴계의 경(敬) 사상이 정립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다산의 천관은 남인계의 이(理)․천관(天觀)과 일정한 연관성 하에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서학의 궁극자관이 외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40)
다산학에서 성리학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이론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학설이다. 이것은 그의 ≪중용≫과 ≪맹자≫의 주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
1) "하물며 초목금수는 하늘이 화육하는 초기에 낳고 낳는 이치를 부여하여 종으로 종을 전하여 각각 성명을 온전히 할 뿐이다"(況草木禽獸 天於化育之初 賦生生之理 以種傳種 各全性命而已).
2)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 천하만민이 각각 배태된 초기에 이러한 영명함을 부여받아 만류를 초월하며 만물을 향유하고 이용하게 되었다"(人則不然 天下萬民 各於胚胎之初 賦此靈明 超越萬類享用萬物).
3) "이제 건순오상의 덕을 인물이 같이 얻었다고 말한다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이겠는가. 모두 등급이 없으니 어찌 상천이 물을 낳는 이치가 본래부터 이와 같겠는가"(今乃云 健順五常之德 人物同得 孰主孰奴 都無等級 豈上天之生物之理 本自如此乎).
4) "인의예지란 명칭은 본래 우리 사람들이 일을 행하는 데서 일어난 것이요, 마음에 있는 현묘한 이치가 아니다.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것은 다만 이 영명함뿐이니, 인할 수 있고 의할 수 있고 예할 수 있고 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상천이 인의예지 네 가지를 인성 가운데에 부여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실상이 아니다. 사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오상의 덕을 물이 똑같이 얻었다고 말하는가"(仁義禮智之名 本起於吾人行事 巡ゎ?希犧服a 人之受天 只此靈明 可仁可義可禮可智 則有之矣 若云上天 以仁義禮智四顆 賦之於人性之中 則非其實矣. 人猶然矣 況云五常之德 物亦同得乎).
5) "주자의 성․도․교에 대한 학설이 매양 인․물을 겸해서 말했기 때문에 그 막히고 통하기 어려움이 대부분 이러한 부류이다"(朱子之於性道敎之說 每兼人物故 其室0難通多此類也[이상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6. "(다산)내가 홀로 생각해 보건대 본연지성은 원래부터 같지 않다. 사람은 선을 좋아하고 더러움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닦고 도를 지향하는 것이 본연이다. 개는 밤에 지키고 도둑을 향해 짖고 더러운 것을 먹으며 새를 쫓는 것이 본연이다. …… 각각 천명을 받아 옮기거나 바꿀 수 없으니, 소가 억지로 사람이 하는 바를 할 수 없고 사람이 억지로 개가하는 바를 할 수 없다. 형체가 같지 않아 서로 통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여받은 바의 이치가 원래부터 스스로 같지 않은 것이다"(臣獨以爲 本然之性 原自不同 人則樂善恥汚 修身向道 其本然也. 犬則 守夜吠盜 食穢從禽 其本然也`…… 各受天命 不能移易 牛不能强爲人之所爲 人不能强爲犬之所爲 非以形體不同 不能相通也 乃其所賦之理 原自不同 (≪맹자요의≫(孟子要義) ≪생지위성장≫(生之謂性章)).
다산이 인간과 자연은 '그 본연지성이 같지 않다'고 하여 인물성 동론적 인식을 부정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호론의 인물성 이론을 계승한 것일까. 다산과 남당은 인(人)․물(物)의 다름이 '본연적'(本然的)임을 주장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이론적 근거로서 부여된 바의 '이'(理)와 그 이(理)를 부여하는 '명'(命)이 다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다산과 남당은 분별의 논리라는 공통 터전 위에 서 있다. 그는 일정 부분 인물성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41)
그러나 다산은 자연의 도덕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당을 비롯한 성리학자들과 현격하게 구별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 동아시아의 유학 사상 가운데 이와 동일한 현상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명말 청초의 학자 왕부지는 ≪중용≫ 수장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 대한 주자의 주석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중용≫의 본지가 수양론에 있음을 지적하고 성(性)․도(道)는 오로지 인간만을 말한 것이지 사물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2) 그는 말은 타고 소가 밭갈이 하는 것은 말과 소의 본성을 따르는 도가 아니라 인간이 사물을 이용하는 도일 뿐이라고 하여 물에 규범성이 적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43) 주자가 성(性)․도(道)를 인(人)․물(物)을 겸하여 말한 것이 근본적인 결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위의 인용문 5번에 제시된 다산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같은 관점이 일본에도 시대의 유학자 수재관학(水哉館學)의 ≪중용봉원≫(中庸逢原)에 나타난다. 그는 '천명지위성'장에서 천명은 다만 인간에게만 부여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만물을 겸하는 것이 아니며,44) 이 장은 오로지 인도만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주자주의 '인물구'(人物句)가운데 물자(物字)를 삭제해야 된다고 주장한다.45) 그리고 ≪중용≫은 학자를 위해서 지은 것으로 모두 인리(人理)․ 인도(人道)이기 때문에 비록 아버지를 해치는 짐승이 있고 어머니를 먹는 새가 있다고 할지라도 군자는 뜻을 두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6) ≪중용≫ 수장의 성․도․교는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며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는 도덕성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 학자들이 어떤 영향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 보는 관점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것은 성리학(주자학)에 지배되었던 동아시아 사상계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해 준다. 이와 같이, '중세적 연속성의 해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자연의 탈도덕화47)에 의한 인간과 분리'는 유학 사상사적으로 볼 때에 획기적인 사건이다. ≪중용≫의 "성자천지도야 성지자인지도야"(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20장)라는 구절이 언명하듯이 천도와 인도는 본질적으로 연속된다. 주자는 '성'(誠)을 '천리지본연'(天理之本然)으로, '성지'(誠之)를 '인사지당연'(人事之當然)으로 주석하여 존재에서부터 당위 규범을 도출하는 유가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다산은 인간에게만 도덕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금수의 도덕성을 부정함과 아울러 필연적인 자연 법칙에 종속된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세계를 분리했다. 이제 탈도덕화한 자연은 인간이 향유하고 이용하는 '대상'으로 재규정된다(향용만물(享用萬物)). 이 점이야말로 다산에게 있어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근대성'일 것이다.48) 왕부지(王夫之)와 수재관학(水哉館學)의 관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지금까지 검토해 온 바와 같이, 실학의 성립은 성리학의 계승․비판․이탈이라는 세 가지 양상이 복합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당시의 학문적 풍토와 학파적 계보, 정치 사회적인 조건, 서학이라는 외부적인 동인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유교는 당시 조선 사회에 실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새로운 학적 체계로서 토착화되었던 것이다.
■ 약정 토론:김용헌(한양대학교 교수․철학)
1. 서언
외래 사상의 토착화를 둘러싼 논의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유교 토착화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외래 사상의 토착화는 결국 원래의 사상이 이 땅에 들어와서 어떻게 변화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 땅에 산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면서, 역으로 그 삶에 적응하면서 그 삶의 질을 고양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 그 사상은 단순히 외래 사상에 머물지 않고 토착화된 사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토착화 과정은 단선적이지도 않고 순차적이지도 않다.
외래 사상은 본래의 사상이라는 중심에서 멀어지는 원심화의 길과 중심을 향하는 중심화의 길이 중첩되면서, 때로는 대립하고 투쟁하면서 토착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땅의 유교는 특정한 시기에 유입되어 자기 발전이라는 단일한 길(원심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다. 삼국 시대 이전에 유입되기 시작한 이 땅의 유교는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유교가 준거가 됨으로써 끊임없이 중국 유교를 닮아 가려는 중심화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 결과 시대마다 중국 유교로부터 새로운 수혈을 받기도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원리주의적인 성격을 중국보다 강하게 띠기도 하였다. 그만큼 토착화의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유교 사상을 살피는 것은, 아무리 실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발제자의 논문은 실학사상을 중심으로 유교의 토착화를 잘 포착해 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요약
1) 성리학의 토착화가 사회 정치적인 요인과 정합성의 추구라는 조선 유학의 기본 방향에 따라 추동되었고, 그 결과 사단칠정론이나 인물성 동이론과 같은 토착화된 조선 성리학이 성립되었다.
2) 실학의 흐름은 기호 남인계와 노론 낙론계에 속하는 북학파로 나누어지는데, 정약용이 이 두 흐름을 종합하고 집대성하였다. 주자학으로부터의 이탈은 허목과 윤휴와 같은 기호 남인계에서 먼저 시작되는데, 이들은 범퇴계학파의 일원이면서도 학문적 연원이 서경덕에 닿아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허목의 경우는 이황에서 정구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면서도 주희가 아닌 육경 자체에서 학문의 준거를 찾으려고 하는 복고성을 보이고 있다. 윤휴는 ≪중용≫과 ≪대학≫의 체제나 해석에서 주희와 다른 견해를 보였다. 특히 그의 상제관은 중국 고대 인격신적인 상제관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정약용과 매우 비슷하며, 따라서 주희의 천관과는 다른 면모이다.
3) 농업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변화하여 나갈 조짐에 따라 홍대용, 박지원 등 노론 집권층의 젊은 자제들에 의해 새로운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이들의 개혁 운동은 북벌론에서 북학으로의 의식 전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북학론자들의 기본 입장은 사상적 기반을 전통 성리학에 두면서 기술 문명은 청에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북학의 이론적 바탕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인물성 동론이며 조성기, 김창협 계열의 경제지학과 김석문 계통의 상수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4) 기호 남인계와 노론 낙론계의 북학파는 18세기 후반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공통적인 현실 인식 위에서 당색, 학파, 계층을 초월한 교유를 하면서, 경제지학과 사장지학, 그리고 명물도수지학적인 박학풍까지 관심의 범위를 넓혀 갔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정약용은 기호 남인의 학풍을 이어, 원초 유학의 근본정신을 사서육경에 대한 새로운 주석을 통하여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한 걸음 더 전진하여 노론 북학파의 북학 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선배들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전진적이며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수립하였다.
5) 정약용 사상 가운데 성리학과 구분되는 것은 천 관념이다. 그의 인격적인 천관은 고대 유교의 경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윤휴의 천관, 더 나아가 퇴계의 이관(理觀)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이황의 이(理) 존중 사상은 한갓 주리 의식이라든가 이(理) 우위적 사고라고 하는 피상적인 시각에서 설명되기 어려운 것으로서, 종교적인 차원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이다. 정약용의 사상에서 두드러진 점은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본성이 다르다고 본 것으로, 한원진의 인물성 이론에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연의 도덕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리학자들과 현격하게 구별된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관점은 일본과 중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것은 성리학에 지배되었던 동아시아 사상계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제 탈도덕화한 자연은 인간이 향유하고 이용하는 대상으로 재규정된다. 이 점이야말로 정약용에게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근대성일 것이다.
3. 질문
이와 같은 발제자의 논문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음을 감사드리며, 궁금한 점 그리고 좀 더 알고 싶은 점에 대해서 질문을 드린다.
1) 허목, 윤휴의 육경 중심주의와 상제천적 천관이 기호 남인계 실학의 두드러진 특징이고, 결국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된 실학의 한 축을 이룬다면, 유형원과 이익의 경세주의적인 실학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리고 육경 중심주의와 상제천적 천관만으로 실학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육경 중심주의와 상제천적 천관을 통해 확보될 수 있는 실학적 특징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발제자는 실학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견해를 들려주기 바란다. 발제자는 실학이 성리학을 계승하면서도 비판하고 이탈하였다는 각도에서 고찰하고 있는데, 그 계승, 비판, 이탈을 관통하고 있는 실학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만약에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없이 단순히 성리학을 비판하고 이탈하는 것을 실학의 범주에 넣는다면, 정제두의 양명학도 실학에 집어넣을 수 있는가?
2) 발제자는 유봉학 교수의 이론을 많이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물성 동론과 북학파를 연계시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유봉학 교수는 유형원, 이익을 조선 성리학자로 파악함으로써 실학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반면에 발제자는 실학의 한 흐름을 허목, 윤휴로까지 소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유형원, 이익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유형원, 이익을 성리학자로 보기 때문인가? 이와 관련하여 정설로 굳어져 가고 있는 듯한 '조선 성리학'의 개념에 대해서 발제자의 생각은 어떠한가?
3) 기호 남인 측에서는 그들의 학통이 이황, 정구, 허목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실제로 발제자도 정약용의 천관을 윤휴, 나아가 이황과 연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발제자는 허목, 윤휴의 학통적 연원을 서경덕으로까지 소급하고 있는데,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서경덕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시 말해 서경덕은 이들의 사상이 형성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4) 이황이 주재를 설명하면서 정이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과연 이황의 천관과 정이, 주희의 천관은 어떻게 차별되는가? 정약용의 천관과 이황의 천관은 어떤 공통점이 있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정약용의 천관이 이황의 천관을 계승한 것이라면, 정약용의 천관이 지닌 사상사적 의미는 크게 약화되는 것 아닌가?
5) 발제자는 인물성 논쟁의 배후에는 오랑캐 청에 대한 인식, 17세기 이후 성장해 온 하층민에 대한 인식, 탕평 정국에 대한 노론의 대처 방안 등의 문제들이 간접적으로 개입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기 바란다. 동론과 이론의 이론적 차이가 현실 문제에 대한 견해의 차이와 명확하게 대응되는가?
6) 인물성 동론이 북학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는 것과 인물성 이론이 정약용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어떻게 정합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근대 과학 기술의 관점에서 자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탈도덕화가 필연적이다. 실제로 발제자의 말처럼 자연의 탈도덕화 경향은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삼국에서 부분적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박세당, 정약용, 최한기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 논리이긴 하지만 인물성 이론이 근대적 자연학에 더 친화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인물성 동론에서 인물균론이 나오고, 나아가 이용 대상물로서의 물이라는 새로운 물론이 나왔다는 유봉학 교수의 주장은 성리학과 북학의 연계성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아닌가? 최 교수님도 밝히고 있듯이 인물성 논쟁은 이론의 논리적 정합성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의 산물이고, 그러한 만큼 철저한 주자학적 이론 논쟁이다. 그리고 이간이나 낙학파의 대다수 인물성 동론에서도 인물성 이론과 마찬가지로 인간 우위의 관점이 강하게 견지되고 있다. 반면에 북학은 어떻든 주자학적 사유를 탈피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한원진의 인물성 이론과 정약용의 인물성 이론을 단순히 논리적 발전 관계로 설명할 수 없듯이 주자학의 동론과 북학의 동론 사이에도 일정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인물성 동론이 북학 발생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북학 사상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된 것이 아닌가? 이 주제와 관련해서 발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주>
1) 유승국, "유학 사상 형성의 연원적 탐구", ≪동양 철학 연구≫, 근역서재, 1983년, 12-15면 참조. 예를 든다면 유교의 핵심 덕목인 '효' 관념은 유교가 전래되기 이전 한국 고유 신앙인 조상 숭배 관념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같은 책, 83면).
2) 위의 책, 100면.
3) 이태진, ≪조선 유교 사회사론≫, 지식산업사, 1989년, 143면.
4) 조성산, "조선 후기 성리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조선 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 비평사, 2000년, 482면 참조.
5) 유봉학, "18-19세기 연암 일파 북학 사상의 연구", 서울대 박사 논문, 1992년, 78-92면 참조.
6) 졸고, "퇴계 이사상(理思想)의 체용론적 구조", 「조선조 유학 사상의 탐구」, 여강출판사, 1988년 참조.
7) 유봉학, "18-19세기 연암파 북학 사상의 연구", 서울대 박사 논문, 1991년, 2면.
8) 陳北溪, ≪중용장구대전≫, 1권, 小註.
9) 도모에다, "주자", ≪중국의 사상≫, 114면 참조.
10) 김용옥, ≪독기학설≫(讀氣學說), 통나무, 1990년, 18-36면.
11) 유초하, "조선 후기 성리학의 사회관", 「한국 근세 문화의 특성」, 단국대, 1994년 참조.
12) 정옥자, "미수 허목의 역사 의식", 「조선 후기 역사의 이해」, 일지사, 1993년, 88면.
13) 위의 책 참조.
14) 유봉학, 앞의 책, 17면 참조.
15) 위의 책, 19면 참조.
16) 유영희, "백호 윤휴 사상 연구", 고려대 박사 논문, 1993년, 6면 참조.
17) 위의 논문, 36-39. 47-56면 참조.
18) "경신일록"(庚申日錄), ≪백호전서≫(白湖全書) 33권, 위의 논문, 99면 재인용.
19) 위의 논문, 17면 참조.
20) 유명종, "윤백호와 정다산", ≪철학 연구≫ 27호, 1979년; 정옥자, "미수 허목 연구", ≪한국사론≫ 5집, 1979년 참조.
21) 이태진, "사화와 붕당 정치", ≪한국사 특강≫, 서울대, 1990년, 169면 참조.
22) 정옥자, 앞의 책, 136면.
23) 노론이 18세기 이후 호론과 낙론으로 분열되는 과정은 유봉학의 앞의 논문 23면 참조.
24) 홍대용, ≪의산문답≫ 참조.
25) 낙론이 그대로 북학 사상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유봉학, 앞의 책, 86면 참조). 그리고 담헌의 ≪의산문답≫에 보이는 '인물균'(人物均)의 논리는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의 사고와 매우 비슷하다는 점에서 노장 사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26) 유봉학, 앞의 책, 94면 참조.
27) ≪여인서≫(與人書) 제2서, ≪내집≫ 3권, ≪담헌서≫.
28) 위의 책.
29) ≪연기≫(燕記), ≪외집≫(外集) 7권, ≪담헌서≫.
30) 유봉학, 앞의 논문, 29면.
31) 안재순, "조선 후기 실학파의 사상적 계보", ≪동양철학연구≫ 12집, 78면 참조.
32) 정옥자, 앞의 책, 192면 참조.
33) "천위상제야"(天謂上帝也),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1권.
34) "赫赫之天命 循而順之 則爲善而祥 慢而違之 則爲惡爲殃"(「중용자잠」(中庸自箴)).
35) "不可謂天命流行處亦別有使之義也 此理極尊無對命物而不命於物"(≪퇴계전서≫(退溪全書), 성대 영인본, 일책(一冊), 354면).
36) "天命天道的傳統觀念 發展至中庸已轉爲 '形而上學的實體' 一義"(모종삼, ≪중국철학적특질≫(中國哲學的特質), 학생서국(學生書局), 1975년, 36면).
37) 서복관(徐復觀), ≪중국인성론사≫(中國人性論史),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1979년, 15-30면 참조.
38) 적총충(赤塚忠), "도가 사상의 본질", ≪동양사상≫, 동경대학출판회, 1967년, 3책, 20면; 중국 철학의 실체관은 전통적인 상제관으로 소급된다. 유가는 상제관 가운데서 인격신적인 면, 곧 인간 세계의 궁극적 목적과 인륜 질서를 추출하였고, 도가는 자연 현상 지배의 면을 추출하여 초월적이며 필연적인 원리로서의 도(道)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39) "若有主宰運用 而使其如此者 卽書所謂惟皇上帝降衷于下民 程子所謂以主宰謂之宰是也"(≪퇴계전서≫, 일책(一冊), 354면).
40) 최기복, "유교와 서학의 사상적 갈등과 상화적 이해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 박사 논문, 1989년, 345-357면 참조.
4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졸고, "다산 인성․물성론의 사상사적 위상", ≪동아시아학의 모색과 지향≫, 성대 동아시아 학술원, 2000년 참조.
42) "道則一因之性命 固不容於一動一靜之間 審其誠幾(靜存性 動硏幾) 而反乎天則 …… 審乎此 則所謂性道者 專言人而不及乎物 亦明矣"[「독서대전설」(讀書大全說) 2권, 「중용」(中庸)].
43) "若牛之耕馬之乘 乃人所以用物之道 …… 則物之有道 固人應事接物之道而已 是故道專以人而言也"(위의 책).
44) "天命者 指天特賦予於人者而言 不兼萬物"
45) "是章專言人道也 …… 凡注中人物九 ?削物字以後可"
46) "中庸爲學者作 皆人理也人道也 何曾論物性哉 是故雖有?父之獸 食母之鳥 君子不措意焉"
47) 사군자 예술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유가는 자연에서부터 인간이 지켜야 할 당위의 규범을 도출해 내는 구도를 기본으로 하여 윤리관을 구성한다. 이것을 최진원(崔珍源)은 '자연의 규범화'라고 부른다(「강호가도연구」(江湖歌道硏究), 성균관대 박사 논문, 1975년, 50-64면 참조).
48) 이정우, "다산의 사유와 근대성", ≪다산의 공부론과 지식론≫, 다산 학술 문화 재단 제2회 학술 대회 논문집, 57-62면 참조; 안재순은 북학파의 인물성 동론적 사고가 인(人)․물(物)의 차별성을 해소시켜 물을 물로서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물에 대한 연구와 이용의 중요성을 제시한 데에 반하여, 기호 남인 계열의 인물성 부동론은 '인간의 만물에 대한 우위=도덕성 확보=보편적 이성 실현의 추구'에서 시작되었으나, 역으로 물의 개체성의 중시를 가져와서 물을 물로 보는 시각을 가지게 하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위의 책, 74-75면). 다산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을 인간계에서 분리해 향용의 대상으로 보게 된 것이다.
P. 윤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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