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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한국의유교
1. 역사적(歷史的) 개관(槪觀)
1) 古代
한국유교의 시원에 관한 견해는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B.C 12세기경 은(殷)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와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리에 따라 범금팔조(犯禁八條)로 우리 사회를 교화했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비록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이 있지만, 한국 유교의 전통적 자부심을 확고히 해주었다. 둘째, 고조선과 인접한 전국시대 연(燕)나라를 통해 한자와 문물이 전래되면서 유교사상이 전래되었다는 견해이다. 중국 사료와 문헌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셋째, 삼국의 발생을 전후하여 중국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유교사상이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우리 땅에서 나온 유물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는 주장이다.
2) 삼국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 초기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유교문화의 수용이 더욱 확산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372년(소수림왕 2)에 고구려에서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태학(太學)을 세운 사실은 한국 유교사(儒敎史)에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 백제에서도 상당한 깊이의 유교사상이 수용되어 오경박사를 두고 일본에까지 한자(漢字)와 유교사상을 전파했다. 광개토대왕비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는 유교적 통치원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당시 청년들의 경전연구와 유교정신의 실천 자세를 보여준다. 이처럼 삼국의 유교문화는 경전교육에 기초한 실천적 성격을 띠며, 사회제도의 정비에 바탕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전반기에는 과거제도를 비롯하여 국가의례제도 등 유교문화의 제도적 정비가 확산되어갔다. 최승로(崔承老)의 상소문에 내재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통해 당시 유학자들의 이념적 각성이 뚜렷이 드러나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유교적 역사의식도 이 시대 유교사상의 심화양상을 보여준다. 고려 후반기의 충렬왕 때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朱子學)을 들여와서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여 활기를 띠었다. 이색·정몽주 등의 학자들은 이 학풍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정도전·권근은 조선왕조의 창업에 이념적 뒷받침이 되어 유교적 사회제도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수행했다.
3) 조선시대
조선은 유교, 곧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도학(道學)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행했다. 조선 초기를 통하여 역대 임금들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사회제도를 전면적으로 정비했다. 세종 때에는 유교적 국가의례와 제도를 정비했으며, 유교적 교화체계를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유교사회의 기틀을 확립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들 중에서 공신과 관료의 기존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도학정신의 실천에 진력하던 신진세력인 사림파(士林派) 사이에 대립을 보여 여러 차례 사림파의 선비들이 희생당하는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조선 중기인 16세기에는 도학의 이상정치가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에 의해 추구되다가 실패했지만, 결국 이들이 정치의 담당자가 되는 사림정치시대를 열었다. 사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자 이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당파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하여 서원 설립이 활발해져서 향촌의 유림활동이 확산되었고, 지역사회에서 향약(鄕約)을 시행하면서 향촌 질서의 유교적 교화가 심화되었다. 이 시대에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이 인간의 심성문제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면서 성리학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황(李滉)·이이(李珥)에 이르러 불붙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쟁은 당시의 대표적인 성리학 논쟁으로서, 학문적인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에는 가정의례를 중심으로 예학(禮學)의 발전과 성리학적 논쟁의 확대, 청나라를 배척하는 의리론의 강화에 따라 정통도학도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사변적 공허성과 의리론의 비실리적 명분주의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현실 사회제도의 개혁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학풍으로서 실학이 대두했다. 18세기초에는 심학파(心學派:陽明學)가 형성되었다. 당시 새로 전래해온 서유럽 문물(西學)을 수용하면서 로마 가톨릭교 신앙운동이 일어나자, 도학파는 이단사설로 배척하고 정부는 형벌로 금압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신념들이 서로 비판하는 다원적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4) 한말에서 현대까지
19세기말 서유럽 열강과 일본의 침략위협이 높아지면서 도학자들은 강경한 저항논리로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제기하여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뒷받침했다. 한말 도학자들은 침략자에 대한 배척이론의 강화와 의병운동의 전개 사이에서 다양하고 열렬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무력 위협 앞에 마침내 개항했으며, 프랑스와의 통상조약에 의해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다. 1896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유학자들은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했다. 1910년 조선 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국가종교로서의 유교체계는 허물어졌다. 그러나 도학파의 선비들은 의리론적 신념에 의해 의병운동을 일으켜 항거하거나, 단발령, 창씨개명, 일본어 사용 등 일제의 동화정책에 비타협적 저항을 전개함으로써 전통수호의 보수적 태도를 지켜갔다. 소수의 각성된 유학자들은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고 유교개혁을 추구하여, 1910년경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은 대동교(大同敎)를 조직했고, 1920년경 이병헌(李炳憲)은 공교(孔敎)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은 보수적 유학자들과 서민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8·15해방 후 1946년 성균관(成均館) 유도회(儒道會)의 조직이 유림독립운동가의 대표적 인물인 김창숙(金昌淑)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그 뒤에도 유림분규를 수습하여 조직을 재건하고, 도덕운동을 중심으로 사회교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유교적 규범형식과 가치관은 아직도 전통을 고수하는 데 머무르고 있어서,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응하는 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2. 한국문화와 유교
유교의 기본윤리인 삼강오륜은 전통사회의 일상적 실천원리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부터 〈효경 孝經〉이 중요시되면서 효(孝)의 덕목이 일찍부터 확립되었으며, 충(忠)의 규범은 국가 성장기의 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忠·孝·勇·信·仁)도 유교윤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삼강(三綱:忠·孝·烈)의 규범은 조선 초기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를 통해 모범적 인물들이 포상되고 사회적으로 장려되었다. 3강과 5륜의 규범이 대중 속에 널리 확산되어 사회윤리로 정립되면서, 전통사회의 도덕규범과 가치관의 근거로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의 도학이념은 의리정신을 유교윤리의 표준으로 확인하여, 절의(節義)가 숭상되고 불의에 대한 강인한 저항정신을 실현했으며, 청백(淸白)의 풍속과 염치(廉恥)의 도덕성이 사회기강의 핵심을 이루었다. 다만 지나친 도덕적 순수성의 추구로 물질적 가치와 욕망의 현실성이 무시되는 문제점은 실학파의 실용적 관심을 통해 그의 보완이 탐색되기도 한다. 유교사회에서 풍속의 교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예법의 제도를 들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양(辭讓)의 예법을 비롯한 각종 유교예절이 삼국시대 이래 시행되어 풍속을 이루었으며, 이 때문에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불려왔다. 특히 〈주자가례 朱子家禮〉가 들어온 뒤로, 조선시대에는 이에 따른 의례절차의 모든 법식이 대중 속에 확산되어 실천되었다. 유교의례가 대중생활 속에 확산되면서 전통사회는 미풍양속을 확립했으나, 반면 의례의 형식주의에 빠지는 폐단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유교의 사회제도는 신분계급의식과 장자(長子) 중심의 종법(宗法)제도를 기초로 한다. 사대부(良班)·중인·양인·천인의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엄격하여, 사회적 진출과 통혼(通婚)의 범위가 한정되며, 의복과 언어까지도 차이를 두는 상하의 수직적 계층질서를 형성한다. 조상에 대한 제사권(祭祀權)은 장자(長子)만이 지닐 수 있고, 남녀 사이도 실질적으로 남자 중심의 차별을 바탕으로 한 수직적 질서를 확립한다. 유교사회는 가족제도에 기초하며, 군신관계의 모범을 부자관계에서 찾았다. 대가족 형태인 가문을 지키기 위해 친족 중심의 공동체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전통사회에 안정의 기초를 확보해주었다. 국가도 가족의 확산으로 인식함으로써 사회의 유기적 공동체 의식을 확보하지만, 폐쇄적 문벌주의로 서로 대립하여 분파적 대립을 일으킬 위험도 있다. 유교의 정치이념은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 속에서 천명을 발견하고,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민본(民本)사상과 덕치(德治)주의에 근거한다. 따라서 백성의 교화에 도덕을 앞세우며, 법률은 유교의 기본윤리를 확립하는 수단으로 제정된다. 지배층과 백성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언로(言路)를 넓히고, 그 임무를 전담시키기 위해 언관(言官)의 비중을 높여놓았다. 또한 임금도 경전을 비롯한 유교 교육을 받는 경연(經筵)제도를 통해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유교 교육을 받은 사람만 과거(科擧)를 통하여 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했고, 관리의 업적이 유교적 통치목표에 따라 평가되게 함으로써 전통사회는 치밀하게 유교정신으로 다스려지도록 했다. 유교문화는 한자의 문자생활을 통해 중국 문화의 신속한 수용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자는 대중의 문맹화를 초래했고, 더구나 우리 언어의 고유한 세계를 한자에 예속시킴으로써 문화적 예속성을 초래하게 했다. 한문의 시가(詩歌)는 우리의 고유 음률과 어긋남에 따라, 중국문화를 지향하는 사대부 문화와 우리의 고유문화를 보존하는 서민 문화 사이의 이질성을 보여주게 된다.
3. 교단(敎團)과 의례(儀禮)
1) 성균관(成均館)
재단법인 성균관은 유교조직을 대표하는 중앙기구이고, 산하조직으로서 각 시도별 향교재단이 있으며, 그 아래 전국(남한) 231개소의 각 지방 향교(鄕校)가 있다. 성균관재단은 그 목적을 도의의 천명, 윤리의 부식, 문화의 발전, 공덕의 작흥 등으로 밝히고, 그 기본사업은 문묘향사(文廟享祀), 성균관 및 지방향교의 통할관리, 교화 및 사회사업의 경영 및 보조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균관재단은 이사장이 대표하고, 이사회가 최고의결기관의 임무를 수행한다. 서울의 성균관은 관장·부관장·전의(典儀)·전학(典學) 등 임원이 있고, 성균관총회를 최고의결기구로 한다. 지방의 향교는 전교(典校)·장의(掌議) 등의 임원이 있다.
2) 유도회(儒道會)
유교(儒敎)의 전국적 조직으로서 유교인의 단체이다. 중앙(中央)에 성균관유도회총본부(成均館儒道會總本部)가 있고, 각 시도(市道)에 시도본부(市道本部), 구(區)·시(市)·군(郡)에 지부(支部), 리(里)·동(洞)의 단위에 지회(支會)를 둔다. 시도(市道)의 본부는 1969년 결성이 완료되었으나, 지회(支會)는 아직 결성되지 않은 곳도 많은 형편이다. 총본부(總本部)에는 유도회 총회가 최고의결기구이며, 위원장·부위원장·중앙위원회·상임위원회·감찰위원회의 조직이 있으며, 중앙위원회에는 사무총장이 사무를 집행한다.
유도회의 산하기구로서 성균관여성유도회·성균관청년유도회가 있다. 1975년 성균관여성유도회가 창립되었고, 1976년 성균관청년유도회가 창립되어 여성과 청년 유교인의 조직 활동이 활성화되고 있다. 유교조직의 기관지는 1964년 창간된 〈유림시보 儒林時報〉에서 시작하여, 그 후 〈유림월보〉로 개칭되어 월간으로 간행되다가, 1987년 격주간의 유교신보(儒敎新報)로 간행되고 있다.
그밖에 연관조직으로는 성균관의 교육사업에 따라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했고, 유학대학에서는 유학과를 중심으로 유교사상을 교육하고 있으며, 유학대학원에서는 유교지도자를 교육하고, 그밖에 유림의 계획적인 훈련·연수 기구도 있다.
3) 제사(祭祀) 의례(儀禮)
국가의례로서 제천(祭天)의례는 고려 전기, 조선초의 세조 때 및 대한제국의 성립 후 일시적으로 지냈다. 사직제(社稷祭)와 종묘제(宗廟祭)는 국가의례의 대표적 제사로서, 삼국시대 이후로는 비교적 잘 지속되어왔으나, 일제강점기 사직제는 단절되고, 종묘제는 전주이씨의 가족의례가 되고 말아 유교적 국가의례로서는 소멸되었다. 성균관·향교의 문묘(文廟)에서 공자와 선현(先賢)을 제사하는 석전제(釋奠祭)는 유교정신의 계승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 중기 이후로 서원의 사우(祠宇)에서도 선현을 존숭하는 제사가 매우 성행했다. 가묘(家廟)에서 조상에 제사하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확립된 유교제례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조선시대에는 4대의 조상에 제사드리는 전통(四代奉祀)이 성립되었으며, 가정의례로서 관례(冠禮)·혼례·상례(喪禮)·제례는 광범하게 실천되었다.
4. 현대의 유교
1) 현대유교의 반성과 회고
유교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우주 만상을 비롯한 인사(人事)의 모든 것은 변역(變易)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잠시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유교의 반성과 회고'를 논하는 자리에서 굳이 역을 들춰내는 것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러한 철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유교는 시의(時宜)에 따라 수시 변역을 하지 못하고 교주고슬(膠柱鼓瑟)로 인습을 고집하기만 했다. 그 결과 망국의 한도 머금게 되고 구시대의 유물로 밀려나야 했다. 이제 뼈저리게 그 어리석음을 반성해 보는 것이다.
둘째는 이미 때가 늦었는지 모르지만 어차피 내일을 논하는 자리니까 혹시라도 오늘 이 비방[易]을 되살려 내일 다시 태어나는 계기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보기 위해서이다.
유교가 침체되기 시작한 것은 서구 문명을 재빨리 수용한 일본제국주의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초래되었다. 사실은 일본제국의 국권 침탈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서구 문명에 의해 열려진 신세계의 새로운 기운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었고 이것은 전적으로 유교에 책임이 있었다. 유교는 통치철학으로서의 기득권에 집착한 나머지 이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고 관학으로서의 권위에 사로잡힌 나머지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려는 아량이 없었다.
왕조가 폐막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유교의 종교성이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국가, 민족에 대한 의리정신이 폭발되어 혹은 자결로 정기를 빛내고 혹은 붓을 던지고는 칼을 짚고 일어서서 의병이 되어 항전을 했다. 망국의 문턱에서 순국한 유림의 수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일제시대의 유학은 대체로 세 가지 길을 택했다. 첫째의 선택은 왜적에 죽음으로 대항하는 것으로, 이에 속하는 유림은 항거 끝에 순사하거나 살아남은 자는 중국 등지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두 번째의 선택은 교육구국(敎育救國)을 표방하는 일이었다. 인재를 양성해 이세 삼세의 손으로 나라를 되찾게 하자는 것으로, 이에 속하는 유자(儒者)는 국내에 머물러 전통을 고수하면서 묵묵히 다음 세대 교육에 전심했다. 이들이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일제의 사찰과 간섭이었다. 세 번째는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자들은 황도유학(皇道儒學) 등 이른바 어용 이론의 날조에 앞장을 섰다.
광복을 맞이했을 때 유학은 한동안 재건과 중흥의 꿈에 부풀었다. 처음 1년여 동안은 조금은 희망이 있는 듯도 했다. 일제가 물러간 공백을 정치, 문화, 사상에 걸쳐 전통적인 옛 것이 메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일이 갈수록 이러한 생각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기 시작했고 어디에도 동양의 정신은 없었다. 서양만이 갈채를 받고 힘을 나타내고 있었다. 유교는 부지런히 재건을 시도하다가 자체 내의 열기에 들떠서 고질이 발작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분규에 휩싸이고 말았다.
유교는 시세를 파악하지도 못했고, 따라서 시의(時宜)도 잡지 못했으며, 수시변역(隨時變易)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후 유교는 자기 나름의 몸부림은 있었다손 치더라도 성과를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2) 현대의 특징과 유교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이념은 서구 근대사회의 합리주의 정신이다.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은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촉진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배타적인 양극의 논리로 인하여 사회적 갈등과 투쟁의 문제를 더욱 제고시키기도 하였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함께 갖추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경제성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도덕성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인간관은 정신적 욕구와 도덕적 가치보다는 육체적 욕구와 물질적 가치에 우위를 두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관이다. 즉 이익을 가치의 최우선에 두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가치관은 산업과 과학기술의 경이적인 발전을 촉진시켜 물질의 풍요와 인류의 복지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물질 우선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정신적 도덕성을 약화시키고, 수단이어야 할 물질이 목적이 됨으로써 가치관이 혼란되고 인간의 존엄성까지 상실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인간 관계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즉 공통체보다는 개인의 문제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인권의 신장과 같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게 되었다. 인간 관계에서의 조화보다는 맹목적인 투쟁과 집단적 이기주의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환경파괴 문제도 이러한 이익 중심의 가치의식에서 나오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사이 무절제한 서구 문명의 수용과 배금주의의 범람에 의해 가치관에 혼란이 오고 전통사상이 비하되는 풍조로 해서 유학도 소외될 수밖에 없었지만 근년에 와서는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유학의 '인간을 주체로 하는 인본주의사상'이 현대의 기계 문명, 물질만능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하는 데 유교가 원동력이 된다는 풍조가 일고 있다. 이른바 '유교자본주의'라 명명되어 있는 신조이론(新造理論)이다. 유교적 인간관계의 정립, 의리정신의 확립이 경제 발전의 기틀이 된다는 것이다. 근검절약, 효제충신과 선공후사(先公後私), 애친경장(愛親敬長)의 윤리를 유교자본주의의 덕목으로 드는가 하면 추기급인(推己及人)을 기업가의 윤리, 멸사봉공(滅私奉公)을 노동자의 윤리로 꼽을 수 있다.
셋째는 전통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고조다. 이러한 현상은 그 사이 잃어버리고 살아 온 '자기 것'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기도 하다. 토속적인 것, 민속적인 것에서부터 옛 문물제도, 철학 사상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유교도 당연히 재조명해 보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으며 따라서 연구열도 고조되고 있다. 유학이 과연 새 시대의 윤리로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현대 산업사회에 그 기능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미래사회에서도 그 역할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학자들은 더러 비관적인 의견을 제시하는가 하면 더러는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비관론자는 유교는 이미 18세기에 조종(弔鐘)이 울렸다고 주장한다. 생명이 돌아온다 치더라도 현대 산업사회에는 쓸모가 없으며, 더군다나 미래사회에는 더더욱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낙관론도 만만치 않다. 유학이야말로 현대인이 가장 필요로 하는 정신적 활력이며 미래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 기능을 수행할 철학이라 내세운다.
다만 낡은 것은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학 사상을 현대 산업사회에 알맞게 재조명해서 새로운 가치관으로 정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경대법(大經大法)은 변할 수 없지만 지엽적인 주의주장은 수정되어야 하며 현대 과학 문명과 조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3) 미래사회의 전망과 유교
국제화·정보화·과학화로 치닫는 미래사회에 인류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장애 요인이 있다. 첫째는 핵이고, 둘째는 유전공학이며, 셋째는 환경 파괴, 넷째는 공해다. 이와 같이 미래사회에 나타날 수 있는 특징은 인류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요인도 내포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치부했던 것이 때에 따라서는 부정적인 역할로 돌변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유전공학과 핵은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생래적으로 구유하고 있는 이성에 판단과 행위를 맡길 수 있다면 유교는 다음과 같은 특장으로 미래사회에서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유교는 변화의 원리에 근거하여 미래사회의 다양한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인류의 양심을 지켜 갈 수 있다.
둘째로 유교는 천부적인 성선설에 근거한 인간주체사상을 확충해서 기계 문명의 폐해를 극복 내지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셋째로 성(誠)과 경(敬)의 철학을 생활화하는 방도를 강구해 정보화 시대에 사는 인간의 윤리로 삼을수 있다.
넷째로 유학의 서(恕) 사상은 국제화 시대에 사는 인류에게 '너'와 '나'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설정해 주는 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로 유학의 효(孝) 사상은 조상에 대한 원시보본(原始報本)하는 도리를 가르쳐 주고 부모에 대한 존경심과 자녀에 대한 자애를 일깨워 줌으로써 가정을 지켜 주고 가족·혈족간의 응집력을 배양해 줄 것이다.
여섯째로 유학의 예교(禮敎)는 지구촌의 질서 확립에 기본적인 역할을 담당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유교는 어느 한 절대자나 초월자의 영감 또는 예언에 근거한 종교나 사상이 아니다. 유교는 오랜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공동체 생활에서 조성된 윤리·도덕·문화가 응축된 사상체계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는 인간을 주체로 하는 인간 중심의 철학이고 인간의 궁극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덕적 신념 체계이다.
유교는 중국 대륙을 중심축으로 삼는 동양사회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이념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쳐 온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고 종교·사상이 시대에 따라 명멸을 해도 유교는 인간의 본질과 존재를 설명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이념의 주류로 영원할 수 있었다. 아마도 유교가 주도하고 있는 영역이 인간의 심성에서 시작해 생활규범·생활문화 그리고 넓게는 우주와 역사의 순환법칙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사상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거울 삼아 현재·미래를 비추어 보면 유교는 오늘과 내일에도 의연히 인류사의 정면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흔히 사회학자들은 현대를 '신이 없는 세기'라 규정짓기도 하고, 미래사회를 '기계시대'로 예단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교는 더욱 미래사회에서 기능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4) 현대의 유교 조직과 유림
유교 조직은 중앙의 성균관을 중심으로 234개 향교가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지방의 향교재산을 관리하는 16개 향교재단이 구성되어 있다. 성균관과 향교는 전통적인 교육 기능을 되살려 인성교육의 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성균관은 문묘에 배향된 유교 성인의 덕업을 계승하고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05년부터 유교의 우환의식에 근거하여 유교현대화 원년을 선언하고 사회봉사활동과 교화사업에 치중할 예정이다.
지방 향교는 책임자인 전교(典校)와 임원인 장의(掌議)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전국의 향교에서는 청소년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한문교육과 예절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시연을 통하여 유교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유림은 성균관과 향교에 출입하며 유교이념을 전파하고 신념체계로 여기며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전국 유림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유교의 임원에 해당하는 사람만 30만 명에 이른다. 유림은 평균연령이 높아 향후 유교의 존립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유교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젊은 유림을 양성하고 유교 이론의 현대화에 치중해야 한다. 이것은 현대 유림의 사명이다.
또한 유교에는 유도회 조직이 있다. 유도회는 중앙에 총본부와 16개 도본부가 있고, 지방에 295개의 지부가 설립되어 있다. 지방에서는 향교 조직과 더불어 양대 유교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유도회조직은 향교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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