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오랜만에 쓰는 에세이 입니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바짝 긴장하고 열심히 해야지 하던 마음도 어느새 조금씩 풀어지는 듯 합니다. 금요일까지 기간이 있다는 그런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나태해지는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글을 쓰고 있는 날도 금요일 입니다. 오랜만에 쓰려니 잘 안될것 같지만 그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쓰려고 노력하려 합니다. 저는 이번 주 에세이는 그냥 제가 생각하는 것을 쓰려고 합니다. 일본과 우리나라 즉, 한국은 예로부터 많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말이죠. 우선 삼국 시대때에는 백제가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다른 국가 혹은 민족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많이 발전했었습니다. 가까운 예로 장영실의 측우기를 들 수 있겠고, 우리의 선조들은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살고있는 제가 생각해도 "아~ 옛날에도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점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인접국이면서 서로 교류도 하며 싸우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여 나라가 거의 멸망할 뻔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개화를 먼저 함에 따라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일본과 우리나라의 악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강화도 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서서히 침식해서 1910년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죠. 일본에게 그 억압받던 시절....그리고 그게 끝이 아닙니다. 오늘날에 이러서도 독도 영역 문제등으로 많은 다툼이 있습니다. 독도 영역 문제라고하니...갑자기 생각나는군요. 역사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요. 1909년에 체결된 간도협약입니다. 간도협약이란 압록강 북쪽의 영토가 일본에 넘어가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토에 관한 협정인데도 불구하고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서 멋대로 계약을 했습니다.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외교권이 박탈되었기때문입니다. 간도협약은 일본이 만주의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게 내 준 것입니다. 이렇게 간도는 우리나라의 영토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중국과의 동북공정 문제도 있습니다. 이렇듯 일본과는 예로부터 많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내용이 조금 샜지만, 다시 임진왜란 시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임진왜란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지 못할 뻔한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영웅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이순신장군이 당연 압권일 것입니다. 나라를 패망의 위기에서 구해줬으며 많은 명언도 남겨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이순신장군을 존경합니다. 이순신장군의 얘기를 꺼낸 이유는 역사적사실을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관한것 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순신 장군님은 노량해전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셨다는 것이 일반론입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님의 죽음에는 여러가지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우선 이순신 장군은 판옥선을 탑니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써 선봉에서 적들을 공격하는 함선인데, 지휘관인 이순신 장군이 굳이 타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론 지휘관의 배는 적진 깊숙히 들어가지 않을텐데, 노량대첩에서는 이상하게 이순신 장군이 타고 있던 지휘관선이 적진에 돌입을 했습니다. 본국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마지막으로 공격한다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굳이 그래야 했을까? 라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제각각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화살, 다른 곳에서는 총탄, 죽을 당시 이순신 장군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등 모두 다 제각각입니다. 이와 같이 '자살설'이 있습니다. 이순신은 노량 해전 당시 우연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사의 형식을 빌어 자살하기 위해 갑옷마저 벗고 함대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종식 뒤 17~18세기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논했습니다.
그리고 은둔설이 있습니다. '은둔설'이란,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미리 친족 및 측근들과 합의하고서 노량 해전 당시에 야음을 틈타서 몰래 빠져나가 그 후 약 16년간 은둔하여 살아갔다는 주장입니다. 최근 남천우 씨에 의해 처음 제기 됐으며, 이 주장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료는 많지 않습니다. ①이순신이 부하 장수인 유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로부터 만약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하여 인정을 받아 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날에 죽음으로써 유감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②이순신의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로운 신하 때 못 만나 한이구나 소매 속엔 적을 꺾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하여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엔 피비린내 진동하네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보낸 뒤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③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전을 주로 구사하였기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해전에 임하였는데, 노량 해전만큼은 야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야음을 틈타 이순신을 도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④이충무공 전서에 부록으로 수록된,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이 기록한 행록의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기록에는 이순신이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을 당시 이순신의 사망을 알았던 인물은 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몸종 김이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사망한 뒤 임시로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이 역시 이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참모들과 부하 장수들로 가득한 기함 지휘소에서 함대 사령관이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을 때에 그것을 단지 3명밖에 알지 못했다는 점과 그 지휘권이 고참 부하 장수가 아닌 신참인 아들과 조카에게 돌아갔다는 점은 의심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분의 기록은 이순신의 은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합니다.
⑤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에 '사망'하여 그 시신은 20일 뒤인 12월 10일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집니다. 하지만 국가가 장례비용을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는 그로부터 80일이 경과한 다음 해 2월 11일에 치러집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614년에 묘지가 이장됩니다. 이것은 이순신이 노량 해전 이후 은둔하여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새 생활을 정착한 뒤, 1614년에 실제로 사망하여 장례를 치렀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순신 장군님의 죽음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시대에 살지 않았고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연구와 역사적 사료를 통해 거의 비슷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읽다가 저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영웅중에서는 이순신 장군님을 많이 존경하고 그래서 더욱 호기심이 갔습니다. 자살론이나 은둔설이나 여러가지 설을 읽으며 아! 저럴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보면 재밌는 사건도 많고 다르게 생각하여 이랬지 않았을까? 라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이영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