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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인터뷰


개인전봄여름가을겨울(부천2014.3-)


이광복전아이콘(비잔틴미술)




개인전갤러리,오픈식


사과


누드








포스코전서한평문

  오마이뉴스서한원문




이 화백님!

모든 애플들이

온몸 표정으로

끝없이 걸어오는 대화에

진지하게 귀기울이며

각개 생명의 자연을 직접

아무 차별 없이 그대로를

심호흡으로 숨쉬는 장관입니다

낙천적 사랑의 붓질로

극기의 절제로 한껏 드넓어진

또 한 세상

새로운 향연을 축하드립니다.

이 화백님!

저는 먼저 모든 벽면을 분할하고 있는 정연한 네모꼴 창형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엄숙한 색광의 진지한 공세에 크게 놀랐습니다. 지난 연전의 애플들에 비해 놀랍게 절제된 힘으로 묘현된 질감과 선과 색조는 더욱 절실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알알히 빛나는 애플들이 펼치어 보이는 - 역사적 실체임을 그린 - 애플들의 행렬의 엄정함을, 또한 고요한 그러나 반복법으로 강조된 사각공간에 가득 자리하여 넘쳐나는 '육질의 절실함으로 숨막히는 살아있음'을 보며 그 당연한 이치를 오히려 충격으로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하나 그림의 격막 사이 틈으로 비워둔 은닉적 공간과 짙은 색조의 격선은 그 곳이 안락의 빈터임을 직감합니다. 그곳은 아마 허령(虛靈)의 세계일 것입니다. 영원의 구조 틀이겠지요. 거기서 비로소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 내면까지 단도직입적으로 그리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로운 전환의 미학 그 치열한 작업을 위해 정말 애쓰셨군요.

이번 포스코 갤러리에 준비된 화면들을 보면서 비로소 하나의 생명의 덩어리가 울려내는 전률하는 공명음을 생생히 듣습니다. 그것은 쇄신된 삶의 의욕을 불러 일깨우는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리크리에이션(Recreation)이거나 소슬한 바람 혹은 눈 시린 하늘빛의 온도와 같은 청유법으로 다가오는 그런 신선함의 메신저였습니다. 허나 그 배면에서 아득히 밀려오는 것은 지중해의 에메랄드빛에 대비해왔던 그 동안의 '그리기'만으로는 결코 멈추어 머물 수 없는 - 근원을 찾아가려는 열정의 - 순화된 의지입니다. 그 소매를 당기는 의미로 되살아나는 색조는 사실주의를 넘어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창조하려는 새로이 고무된 모색의 요약된 결실일 것입니다. '존재의 근원과 질체의 박진하는 현세적 공존'을 내밀한 동양 어법으로 아울러 성찰하고 드러내려는 의취이며 시도이겠지요.

두어둔 생생한 표현채(表現彩)의 건너편에서는 지난번 '어둠 속의 사과'처럼 잔잔한 보편 존재와 나와의 족보 같은 사슬이 보이는 군요. 그렇게 절제된 미학언어로 구사한 문법은 분명 조선왕조의 조선어입니다. 백자술병의 빛과 이기론의 개념이 펼치려했던 세계의 일단입니다. 혹은 고향 공주 금강의 여울 끝을 딛고 섰던 정지방, 백제왕성 건너편의 사라진 제사터의 유적이 컴퓨터그래픽으로 보여주는 그 이채로운 그리움으로 방울방울 점철된 환상입니다. 결국 그 전통적 기념물들이 지향하던 신비적 종교적 신앙에 버금가는 명상적 이상의 한 자락이겠습니다.

Apple-00024를 보는 순간엔 당당한 우리 자신의 존재의 크기를 기슴 벅차게 느낍니다. 그렇게도 지천으로 그렸던 사과들이 드디어는 그 꼭지의 아픔을 잊고 어느덧 환영으로 녹아들어 - 그 큰 열 덩어리 몸의 중심을 이루는 정감과 가슴의 아스라한 소망 그리고 밝게 작열하는 지성의 만만한 즐거움이 뒤엉킨 - 다름 아닌 순수한 그대로의 인간으로 일치 전환하고 부활하여 연연히 달아오르는군요.

한아름 가득히 다가오는 사과의 눕고싶은 능선은 그저 아름다울 뿐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지중해의 사과는 어느덧 우리의 사과 세계의 사과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허울을 벗는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금단 사과라는 허울은 아름다운 훈계였지만 사람의 숨길 수 없는 실체라든가 인간성을 비하하려는 그런 것은 원래 결코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 사상에 대한 일종의 새로움을 위한 이해-표현상의 의도적 왜곡이었고 역설적으로 나아가 근대성의 과제를 세워주었습니다. 사실은 허울 속에서만이 진실한 지성과 감성을 빛나게 할 수 있다는 파라독스였습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논리적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사과의 아름다운 피부 빛과 밀과의 과즙이 그 눈부신 욕구의 드러남을 절제하여 경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오히려 하나의 진실의 언어였습니다. 우리는 그 같이, 그 빛나는 서양의 르네상스도 완전하지는 못하였다는 직관이 있기에 이렇게 새로운 몸짓으로 감히 도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란히 3중으로 중첩해 놓인 배치 형상 속에서 둥근 애플 볼륨은 이미 필요한 만큼 충분히 절제된 색과 적절히 강조된 빛의 명도로 재구성되면서 그 원래의 언어성으로 확고하게 환원하고 있음을 봅니다. 인생은 분절적이지만 스스로 위대하고 영원하다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애플은 이제 어떤 고유명사로서의 Apple이 아닙니다. 보편어의 텍스트로서 새로운 전형을 준비하고 있는 진지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애플은 이제 드디어는 그 허울마저 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긴장된 정사각형으로 뿌려진 모자이크의 보라색은 붉은색 노랑색 파랑색을 융통하는 공유의 대지로 서로 소통하며 일관된 의미로 환기되고 있습니다. 오른편 가슴 께에 백열하여 빛나는 극광의 하이라이트는 화면의 보이지 않는 뒤켠에 짙디짙은 암흑이 있음을 은유하면서 동시에 색의 문을 여는 동작을 권유합니다. '색시공'일 뿐이 아니라 동시에 '색은 전부다"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과연 그렇습니다. 화려한 색은 역시 화려한 색입니다. 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기에 "공(空)'이라는 극치의 술어를 썼었습니다. 당신은 "색시공(色是空)"을 "色是空?"이라고 하여 그 원어를 회복하였습니다.

Apple-002에 드러나는 질체적 생생함은 결국 싱싱한 생명의 힘으로 오히려 그 배면의 어둑한 신비로운 색조 속으로 시선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또 그 언어성을 보다 분명한 메시지로 전한 것이 새로 준비한 여성의 입상 실루엣이겠지요. 물론 그 여성은 수수한 남성인 자아를 상징합니다. 이미 '애플들 앞에 절규하던 남성'의 나신은 어느덧 지나간 역정의 힘으로 역사화 하였습니다.

당신은 친절한 분이며 언어에 무게를 주기를 천성적으로 싫어하고 직솔한 표현을 즐기기 때문에 드디어는 속맘을 참지 못하고 Apple-0021, Apple-0020에서 암흑의 미학을 직접 드러내었습니다. 물론 그 사이 중간의 그림들은 바로 그 매개령들입니다.

그것은 아마 "암흑을 두려워하지 말라 암흑은 질서의 근원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애플들을 악보처럼 리듬 있게 한없이 배치해 나아가려고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질서라고도 결국 말하고 싶은 거겠지요

이번의 Posco Apple Text의 가장 이채로운 것은 분명 목질과 플라스틱 금속질 기물 위에 놓아 배치한 사과일 것입니다. 이 새로운 표현상황은 애플이 암흑공간을 넘나드는 존재임과 동시에 모든 사물과 동질의 존재임을 자연스럽게 강조적으로 교정부호처럼 보여줍니다. 존재와 존재사이 질체와 질체 사이에도 그 상호 융통성의 견지란 영원한 과제였고 차후의 미래적 진상임을 말합니다. 존재의 제극단 사이의 소통을 표현하여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Apple은 하나의 존재의 극단입니다. 나무와 금속과 플라스틱과 인간도 역시 하나의 극단입니다. 그 '문물은 하나'라는 문맥은 존재와 공간 존재와 존재사이의 화해를 언표하고 있군요. 모든 '사이'란 사실은 사심을 정화한다면 어색할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이는 바로 오랜 동아시아적 핵심 지관(知觀)입니다.

'인간과 애플과의 대화( Dialogue Between Apple and Human)'는 그 의미를 확장하여 동아시아적 전통을 수용하면서 세계적 의미로 성장할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바로 '모든 개별존재와의 대화(Dialogue Between Every Individual Beings)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넓은 의미의 자연어로서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확장된 아시아적 내츄럴리즘'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색조의 절제와 배면으로부터의 비유' 라고 하는 표현적 과감한 결단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론 그림을 그리기 전 손으로 뽀드득 뽀드득 부드럽게 사과를 닦았을 터입니다. 씻어 청결함을 드러냄이야말로 텍스트 이전의 진실입니다. 모든 가능한 공로를 투명화 하여 명랑함을 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거친 남성의 손으로 여성의 손길보다 부드럽게 붓질을 더하였습니다. 이제는 이미 자유를 갈구하는 듯 한 낭만적 화법은 이제 그리 절실하게는 필요가 없어진 것 같군요. 바로 그러한 시점으로서 지금은 곧 우리의 사상사로 돌아가는 길목 앞에 선 순간입니다. 다만 우리의 현실이 아직은 자신을 찾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문화적 비극의 막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오직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화백님!

새로운 개안을 축하합니다.

그 색조와 빛이 새시대의 금단의 모든 문을 열어 - 스스럼없는 삶의 조화를 이룩하는 동서융회로 - 진정 세계화된 우리들 문화의 미래를 여는데 크게 유용한 성과로 승화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젠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다는 세속적 믿음은 새로운 미학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전도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더 활활 타오를 신념을 역시 축도합니다.

2003년 4월 9일

夏夷案子 禾芯(하이안자 화심)

<각주> 이 평론글은 '월간미술세계'가 간행한 "봄여름가을겨울"(이광복개인전텍스트)에 실렸습니다.(2014-3)










필자의평문(2)


 

 빛의 논리 

 

 

빛은 제한없이 내려

무심하고 공평하다

빛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쏟아진다

 

한낯의 그림자 주변을

가득히 채워 흐르는 것은

바로 빛의 난무다

 

빛은 역시

실체가 있는 곳에서 빛난다

팔달의 허무한 공간은

개념없이 스치고 만다

실실함이 없다면 영채도 없고

빛 역시 분명 허허롭다

 

우리들 눈에는 빛은 또한

역동하는 사물에서 더 반짝이며

살아있는 충만한 생명을 더 찬미한다

 

영원함을 믿고

역동할 수 있음을 믿으며

모든 슬픔의 근원 까지도

삶과 죽음의 순간 까지도

새로이 빛의 논리로 정의하자

 

비록 텅빈 손이거나 무력함에

혹 죽음을 앞에 맞이한들 어떤가

영겁의 긴 소멸의 시간까지는

죽음(死)일 수 있지만 멸망(亡)은 아니다

빛이 부딪어오는 찬연함이 있으니

 

빛은 역시 한순간

모두를 구원하는 힘이다

 

애플처럼 한껏 둥글게

혹은 시내 처럼 반짝이며

곱게 빛나지 않으면 어떤가

 

덤덤히 선 작은 산이

그 은은한 산빛이

더 아름답다

 

오후 늦게 호올로

벽오동 마른 잎에

내리는 빛을 본다

 

 

 

                            /haianja haianist

 



필자의평문(3)

새로운 형과 색의 자유주의적 열림

 

 

 

이광복  화백의 2009년 전시회가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사과를 중심한 연작을 주제로한 그의 작품은 사과에 머무르는 것

은 아니다 누드 풍경 화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사과는 바

로 그  요약적 미학의 표현이며 그의 예술의 중핵을 차지하는 표

현 양식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과는 이광복 미학의 요체이다      

 

지중해의  프르른 색을 딛고 사과는 이제 더욱 다양한 표정과 색

조를 드러내면서 농밀한 고유세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과는 무한 반복되는 미학질서의 중심이다 반복된다는 것은 변

함없다는  뜻이며 영원하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피카소의 그림이

결국 원형의 형상성을 강조하였듯이 완정한 형체는 결국 원형의

형상 속에 함축될 수 밖에 없을 것이므로 그의 미학의 기초는 평

이하면서도 강렬하다                                                         

 

 원형의  그 풍부한  힘찬 조형 구조는 다양 색감과  색조를  통해

서 시시각각 변화할 수 있다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그같은 변전

질서의 표현은 처음 사과  배열을  통해 구현되었고 다음으로는

사과의   질실한  색조의  다양함을  통해  모색되었으며  나아가

 서는 색조와  형상의  변화를  통한 자유로운 표현단계에 이르고 

있다고  보인다  그의  사과는  이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수 있

는  친근하고  편한  어법의  인격적인  형상으로다시  태어나고

있다                                                                              

                                                                       

    최근  <미술세계>  3월호에서  이경교시인은 <숨쉬는 사과>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아울러  <장엄한 오케스트라> 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그 감동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아마 시인은 그의 말 대

   로 다표현하지 못한 언어로서  <전시장을 나서면서 결코 이 화백

   그림을 보았다 하지 말라>고  역설로  말하고  있다  과연 이 연작

   들은 그 미학적 의의를 일일히 다 집어내기 어려울 만큼 집약적이

다                                                                               

 

 

 

 

                                      -haianja the haia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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