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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신화와 역사

하이안자 2004. 5.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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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과아이/1985/45.6x36.7cm/암채+순지+먹



나를 흔히들 석채화(암채화)를 그리는 화가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원석 암채화를 그린 것은 아니다.

1960년대에는 반추상적인 그림을 그렸는데

60년대 중반에는 소나 말, 염소, 잠자리, 비둘기 등이 화면에 많이 등장한다.

선과 선이 교차하여 반복되는 데서 오는 중첩의 효과를 살리고,

다시 채색으로 불필요한 선은 지우고 살리는 작업을 하였다.



불상/1988/59.5x71.8cm/암채+순지+먹



그 후 1970년대 초에는 추상계열의 그림을 제작하였다.

화면을 롤러나 골판지 등으로 문지르고 찍어내고 또는 걸레로 닦아내고

다시 칠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전개하였다.

그때의 작품들은 먹과 아교를 중첩하여 바르는 어두운 화면이 주종을 이루었다.

색채는 갈색과 붉은 색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화면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스폰지나 물로 닦아내고 다시 걸레로 닦아내었다.

작품의 소재는 시골이나 밭두렁에 노니는 염소나

벌거벗은 아이, 잠자리, 개구리, 홍학, 저녁 노을, 늪이나 웅덩이 등을 많이 다루었다.



불상/1983/60.6x72.7cm/암채+순지+먹



1970년대 중반에는 우리 조상들이 남긴 와당이나 천마도, 동굴벽화나 암각화 등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그 당시의 국전특선작품이나 수상작품들도 모두 우리의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대상물을 소재로 제작된 것이다.

1974년도에 일본 동경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귀국한 후부터

석채화가 나에게 가장 알맞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현재까지 석채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말과아이/1978/107x141cm/수간채색+순지+먹



석채화라는 것은 재료의 구입이 용이하지 못하고 또 제작하는 과정도 몹시 까다로워

작품이 갖는 예술성과 관계없이 제작을 기피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화선지를 몇 겹으로 배접하여 화면 위에 부착한 다음, 민어부레로 된 어교와 사슴가죽을 삶아 만든

아교를 합하고 거기에 수정분말을 섞어 5, 6회 덧칠한 다음에

그리고자 하는 대상물을 루비분말(붉은색), 공작석 분말(초록색) 등의 원석 암채분말로 제작한다.



고추잠자리/1978/88.8x133.4cm/수간채색+순지+먹



그리고 나서 전체적 윤곽을 따라 소위 「가생작업」을 끝내고 캔버스화된 화면에 모필 대신

죽필이나 편필, 유화 나이프나 날카로운 송곳과 같은 것으로 선을 그어나가게 된다.

먹선인 경우에 암채를 파내어 가면서 먹물을 주입시키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농묵을 이용한 발묵처리를 함으로써 한 점의 암채화가 완성된다.

말로는 간단한 것 같지만 암채화 제작에 드는 기법상의 어려움은 하루 이틀에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이 배접과정에서도 순지를 여러 겹 바르는 과정에서부터 기름기를 제거한 썩힌 풀로 마루리하기까지

제작의 전과정에 기울이는 정성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색채는 절대로 화공색채나 봉채나 분채를 쓰지 않고 원석 암채를 써야 한다.

그 이유는 봉채나 분채를 사용할 경우에 시간이 지나면 변색되기 때문이다.



마음의문/1972/53x97cm/수간채색+순지+먹



원석 암채가 주는 색의 현란함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미 채색된 색 위에 다시 묵을 배이게 하여

원석이 주는 현란함에 안전성을 기하고, 여백을 남겨 두어 안정성 있는 여운의 영상을 남길 수 있도록 한다.

나는 작품에 있어서 대상물의 원천을 우리 고유의 민화나 불화, 혹은 흉배 등에서 이미지를 발굴해 내거나,

강렬한 향수를 일깨워 주는 어린시절의 농촌생활의 기억에서 모티브를 채집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각종의 공해로 오염된 도시생활의 긴장된 분위기와 가열된 삶의 피로를 해소할 수 있는

청량제와 같은 소재들이다. 거기에 동화적 요소를 가미시킴에 따라,

또 불필요한 부대요소들을 제거시킴에 따라 시적 흥취가 배가되기도 한다.



토상/1971/129.5x159.4cm/수간채색+순지+먹



한 작가의 평가는 궁극적으로 어디까지나 작품 그 자체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를 보통 비구상작가로 지칭하는데 나의 화면은 완전 비구상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반추상적으로 이루어진 것들도 많다.

최근에는 화면을 원, 삼각, 사각 등으로 분할하고 그 위에 다시

까치, 호랑이, 거북, 장승, 원앙 또는 십장생 등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 미술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세계인 민화의 세계를 오늘의 시점에서 재창조하고자 한 것인데,

그것은 전통에 대한 조형적인 주장을 통해서 현대 속에 민화라는 고전을 재생시키려는 구체적인 의도인 것이다.



닭/1969/128x156.9cm/수간채색+순지+먹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살아있는 정신을 이어받고, 참다운 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며

그것을 한국미술로 차원 높게 승화시킬 때 한국미술의 세계성과 가능성은 예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회화가 가지는 큰 가치는 민화를 통하여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가늠하고

그 표현의 산물인 겨레그림으로서 예술 작품을 재해석하고 그것을 현대적 시각으로 변용, 형상화시키는 데 있다.

우리가 회화에서 새로운 정신과 형식의 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회화가 그만큼의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비상/1969/100x128.2cm/수간채색+견+먹



1978년, 마산 경남대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작가로서 전념하기 위해 서울로 와서 10여년간

작품에만 몰두하였던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넓은 바다를 향하여 흘러가는 강물이 되기 위하여 내린 결단이었다.

현재는 다시 단국대학교 예술대학에 교수로 몸을 담고 있지만 작가는 부지런히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겨야 한다.



불상과사슴/1970/129x190cm/수간채색+순지+먹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에게 친구가

『너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발명을 하여 발명왕이 될 수 있었는가』라고 묻자

그는 『내 머리가 너보다 더 명석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잠자고 먹고 하는 8시간 이외의 시간을 연구에만 전념하였기에 오늘의 내가 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 작가는 작품에만 전념하여야지 다른 곳에 한눈을 팔면 안될 것이다.

사람은 가도 좋은 작품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

영원불멸한 암채화의 연구를 위하여 앞으로도 더욱 매진할 것이다.



무제/1990년대



1944년 충남남도 한산출생

196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1986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 재 :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학장


(cafe.daum.net/art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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