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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철학적 종교적 가치성

 

 

 

 

정약용선생은 과연 한국의 실학자다 실학이란  현실에 대한 배려와 개혁적 마인드를 의미한다

당대의 비리나 부정에 대한 대책을 사색하고 개혁을  논하는 것은 매우 절실한 문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조선의  정치가  모순을 가지고  있었고 유교적 도덕이 왜곡되어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를 유교의 탓이라거나 유교의 가치관이 더이상 통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시 잘못

일 것이다 언제나 이상은 있어야하고 또 있어왔다 그 이상의 중심이  유교였고 그런 면에서 바

꾸어야 할 것은 없다

 

문제는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꾸려가는 당대사의 문제이다  역사란 모순을 생산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며 이는 이상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모순이란 역사적 정의와 현실과의 갈등

이다 이를 해결할 길도 이상에 있다 이상이란 모순의 책임소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인류역사상

종교가 있고 철학이 있어왔다 각  시대의  모순은 종교나 철학의 내부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유교 역시 그러하다

 

                                                                                            /haianja the haianist

 

 

 

 

 

 

 

 

 

 

 

 

<참고기사>

 

 


[세상읽기] 다산의 개탄 / 배병삼

세상은 흘러가고...2009/09/26 21:32 leerberg
 
 

유교정치는 '권력자 자의로 정치를 행한다'는 뜻에서 인치(人治)라고 비난받곤 했다. 하나 유교의 입장에서 인치는 나쁜 뜻이 아니다. 덕과 능력을 겸비한 정치가를 얻느냐 마느냐에 정치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뜻으로 쓰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있으면 정치가 일어나고, 그 사람이 없으면 정치가 사라진다”라는 <중용>의 표현 속에 인치, 곧 사람의 중요성이 잘 담겨 있다. 여기 ‘그 사람’이란 재상 곧 총리를 뜻한다.

달리 유교정치의 비전을 덕치(德治)로 표현하기도 한다. 덕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은 높일 때 피어나는 힘이다. 그러니까 유교정치의 희망은 외부에서 힘이나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끌려들 수 있는 도덕적 매력을 발산하는 데 있다. 이건 꼭 진공청소기 작동법과 닮았다. 청소기가 제 스스로를 비워 진공상태가 되면, 오라 마라 하지 않아도 주변 먼지들이 빨려드는 양상과 흡사한 것이다.

한데 다산 정약용은 유교의 꿈이, 말하자면 ‘진공청소기’가 조선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배려한다’는 덕치가 막상 세도가들끼리 서로 봐주는 도구로 타락하여 도리어 정치를 망치는 주범이 되었다는 것.

평생 다산을 연구해온 박석무는 다산사상의 열쇳말로 염(廉)자를 꼽는다. 이건 보통 ‘청렴하다’는 뜻으로 새기는 글자인데 본래는 ‘직각으로 난 모서리’를 의미했다. 이를테면 부정한 짓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된다’고 거절하는 공직자의 모난 짓이야말로 청렴의 조건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산은 전래의 덕치도 해체시켜 버린다. 덕치란 겸손하게 상대방을 위하는 행동이 아니라 제 일을 올바로 행하는 ‘정직’을 뜻할 따름이라는 것.

이를 뒤집으면 다산의 목마름과 만나게 된다. 공직을 사익의 도구로 삼는 모리배를 척결할 칼날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덕을 ‘정직’으로 재해석하고 ‘청렴’을 공직자의 덕목으로 요구하는 목소리에 그의 분노가 서려 있다. 조선을 새로 일으키려면 ‘사익에 휘둘리지 않는 정직하고 청렴한 공직자’가 필요하다는 절규다.

이 정부가 근래 강조하는 것이 ‘법치’임은 잘 알려져 있다. 용산 철거민 참사도 ‘엄정한 법 집행’과 관련이 있고, 지난주 서울대에서 강연한 여당 국회의원도 “국가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면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품격 있는 문화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끄저께 끝난 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청문회 요지는 위법과 탈법, 편법과 범법의 기록들이었다. 법치를 강조한다는 법무부 장관과 또 그를 지휘하고 감독해야 할 총리의 이력 속에서 다양한 위법과 탈법, 편법 사실들이 발견된다면 이건 정치의 근본을 따져봐야 할 문제가 된다. 누구들 말처럼 자기들은 “위장전입과 땅투기를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와서”, “자기들은 법을 만들 뿐이고, 국민은 법을 지켜야 할 뿐인 것”이 법치라고 우기는 사태가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시금 사람이다. 법치든, 덕치든, 인치든 모든 정치는 사람이 행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치가 위정자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고, 덕치는 인민의 감동에 초점을 맞추고, 법치는 제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정치에서 ‘그 사람’의 중요성은 변치 않는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한데 정말 어쩌면 이 정권이 등용하겠다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인물이 이다지도 없을 수가 있을까! “두려움도 없고 희망도 없는 것이 어찌 오늘날 같을 수 있을까!”(其無所而無所希, 其如今日哉. <경세유표>)라는 다산의 개탄 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하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기사등록 : 2009-09-24 오후 10:16:01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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