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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rding of life/유교유학

유림의 도올비판

하이안자 2009. 12. 19. 11:12

<주>몇년전에 필자가 글사랑에 올렸던

글이 소개되어 있어 여기 게재합니다

 

                              -하이안자-

 

 

 

 

 

출처 진구자의 세상보기 | 진구자
원문 http://blog.naver.com/jinguja/90043555937
 
                        유림의 도올 비판
 
작성자 : 유화심(兪禾芯)
출처 : 도올과 생각하는 삶
 
:: 비판논에 대한 상념 ::

<1>이 시대에 유교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기는 어렵겠지요. 우리의 역량 아시아의 역량 세계의 역량이 아직은 더 쌓여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이는 유자들 개인들이 더 치열한 의식으로 탐구할 것이 먼저 요구된다고 느낍니다.
 
<2>도올의 강의에 대한 반응과 비판은 우리사회의 한 척도가 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지금까지 그 비판의 논조는 대개 몇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도올강의의 주관성의 문제가 지적되었었습니다.

예컨데 학계의 의견과 일치되지 않는 몇가지 주장이 주관적이라고 판단한 분들의 견해였을 것입니다. 또 공자나 유학에 대한 도올 스스로의 평가부분에 주관성이 드러날 때가 당연히 있게 됩니다. 그러나 철학에서 주관성은 하나의 중요 뿌리이기 때문에 꼭 배제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독단적인 주장에 가까운 경우는 그것이 본인의 확신과 관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확신의 정체성을 함께 고려하여 비판하여야할 것입니다. 다만 그 주관성이 보편성을 바탕으로 할 경우에만 일반화될 수 있으므로 결과는 잠시 기다려보아야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올이 중국 일본 유학중에 느낀 학문적 태도나 정감 같은 이야기도 유학의 방법론으로서는 주관적인 것에 속하지만 그것이 도올의 개인의 학적인 체험사에서 의미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 성장사를 회고한 경우도 그러합니다. 제 3자가 관여할 일은 아닙니다. 경험은 다양한 포용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서 우리의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그 무엇을 더 천착해야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논어해석이 의외로 전통적 해석을 따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은 것은 그의 해석이 어떤 형식을 지니던 전통적 삶의 제체험과도 튼튼한 유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가 외국 물을 많이 먹었어도 여전히 한국인의 형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꼭 혁신적 해석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필요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기 체험에 충실하다면 언제나 유용한 것일 것입니다.
 
둘째는 그의 학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가 고백하였듯이 서양적인 학문뿌리를 추적하기보다는 동학을 중심으로한  민족적인 것을 추구하겠다는 학적 결의를 표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은 결의의 범주에 머물러 있고 극명한 성과물을 내놓지는 못한 것이 사실일것입니다. 다만 그가 학적인 체질을 독자적으로 세워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결국 아직은 서양의 철학사의 궤적 위에서 동양사상을 바라보는 일에 더 익숙하다는 점을 아직은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가 그러한 학문적 편중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컨데 서양고대 중세 근세의 문명사의 흐름을 인용해본다거나 아니면 공자의 전기를 검토해보려는 시도들이 그것일 것입니다. 혹은 한일 민족사적 본질을 생각해보려는 시도도 역사적인 통찰의 일부를 시도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도올은 사실은 역사학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도올의 역사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은 국내 역사학자들의 책임입니다. 사상사의 부재현상은 일본의 경우도 아직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래도 일본에서는 일반적이고 비역사적인 분야에서라도 사상사의 궤적을 추적하는 노력들이 있어왔습니다. 다만 동양의 경전 역사등 전통문명성과 과소평가하려는 일부 움직임이 내재한 것은 유감일 수 있긴합니다만 그 영향은 전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그 일부 내용을 인용했고 평가했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될 것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유학사상사라할 체계적 사상사가 확립되지 못한 지금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도올이 왕부지의 사론을 분석한 의욕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적 바탕은 역사학이 아니기 때문에 오류가능성이 있습니다. 도올은 이를 다양한 체험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 도올비판으로 출간된 책에서 <일본베끼기>라고 했는데 아마 잠시 참조한 것일 것이고 학적 체험의 일부를 구성할 지언정 그의 체질의 중심을 이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당론""은 아직은 역사적으로 확립된 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설명이 될 수 없고 철학적 동양학적 일반론의 입장에서 개진된 것이기 때문에 가볍게 인용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진실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의 사상이 어느 면에서 종교적 신비주의의 극복사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그야말로 무당의후계자이기도합니다. 물론 공자는 정신사에서 신비적 영성을 부정하거나 말살하려한 적이 없는 균형조화주의라는 유학사의 본류를 지키고 있습니다. 공자가 귀족출신으로서 귀족으로서의 이지적 기득권을 초개처럼 버렸다는 점이 공자의 본질이므로 그가 귀족이 아니라 해도 좋습니다. 그가 은나라 이래의 신비주의를 계승하고 있는 면이 사실 있으므로 무당의 아들이라해도 망발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자의 입지의 혁신성과 전통성>이라는 균형성을 보다 주목해야할 것입니다. 도올은 그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그에 대한 문헌학적 비판도 무성합니다.

경전에 대한 그의 해석은 <독법의 전통성과 해석의 혁신성>이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해석의 혁신성>이란  현재의 체험적 감동을 경전해석에 융합하려는 것이므로 정상적인 학의 과정에서 항용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그 끊임없는 해석적 혁신의 과정을 거쳐 경전은 현재화하는 것이므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역시 텍스트 분석의 어법적 논리적 치열성은 도올의 과제입니다. 이 문제는 오늘의 누구에게도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그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텍스트의 어법분석의 궁극의 실 목표가 아직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어법 분석의 기술분야도 역시 아직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들 학인 모두에게 요구되는 학적 바탕의 문제입니다.
 
그런 비판이 있는 것이 학문과정상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학적 목표가 논의되는 것이 더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되어 최근 도올과 추기경의 <그리스도교와 유교와의 대화>를 계획한 일을 두고 다른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아래에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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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거대한 목소리:추기경과 도올의 대화-환영과 전제
 
어제의 보도에 의하면 김수환 추기경이 KBS1 도올의 논어이야기에 출연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와 유교와의 대화>를 제의한 도올의 정중한 요청에 추기경이 응함으로써 17일 녹화하여 20일 밤에 방영할 계획이라고 주요 매체에서 일제히 전하였다.
 
지난해 추기경이 <나의 피 속에 유교의 전통이 흐르고 있다.>고 선언하여 하나의 거대한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였었다. 이어서 도올의 논어강의가 방영되면서 <공자의 논어 속에 노자도 다 들어 있음을 알았다>고 한 그의 언표는 일반다중을 대상으로 역시 거대한 메시지를 형성하였다.
 
지난해에 이루어진 이 두 메시지는 현재 그 힘과 크기에서 어떤 목소리보다 크고 널리 그 영향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같이 만나 화음을 이루어 새로운 메시지를 형성하려하고 있다. 이미 그들의 목소리가 거대한 것이었고 다시 그 합쳐진 목소리가 얼마나 클 것인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 목소리는 오늘의 문화적 풍토에 가해지는 마음을 울리는 초강력 목소리로는 유일한 것이라서 그 파장과 영향은 넓고도 깊게 퍼지고 있다. 이미 많은 대중들은 그 음질을 음미하고 더러는 분석하며 그 목소리의 질량이 무엇인지 보려고 하고 있다. 다만 우리사회를 덮고 있는 두터운 왜곡의 피막이 있어 모든 소리와 형상이 왜곡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구조적 문제이다. 도처에 있는 황토층과 같은 그 투명막의 두께만큼이나 우리들의 정체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를 받아들일 준비는 아직 덜된 것이 사실이라는 뜻이다. <나 > <우리>는 아직 깊은 껍질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외피 피막은 아직 견고하다.
 
그 기왕의 목소리는 이미 충분히 크고 그 메시지는 벌써 넘치는 감동을 일으켰다. 그 목소리와 감동은 거의 충격과 파동 같은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측면이 있다. 하나의 각성작용을 강력하게 유발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현상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목소리효과의 의미도 우리가 음미해야할 대목이 되고 있다.
 
일부 종교인들은 벌써 이 <만남>을 두고 종교적 평형성에 어긋난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반면 일반적으로 역사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자성의 움직임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지적도 이미 나왔었다. 논어를 두고도 많은 파문이 일기도 했고 비판도 있었다. 도올의 복장과 어투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종교적 불만 문헌해석적 공박이나 강의 의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번의 <만남>에 대해 네티즌들의 즉각적인 환영의 의사표시와 함께 대화신중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 이왕의 목소리는 또한 이미 스스로 완결적이다. 하나의 목소리로서 그 자체가 한 의미를 획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런 동질적인 음색의 목소리가 이미 여러 갈래 있었다. 어찌보면 서세동점의 시대 이래로 우리가 문화본능적으로 포기할 수 없었던 문화적 생리에 의해 주장된 목소리가 이미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이 역시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진실의 목소리였음은 분명하다. 전통유자들의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이미 유학을 생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조건 없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이 목소리는 신세대에 이어지면서 새로운 목소리로 변전하였다. 하나는 극단적 반유교적 목소리로서 유학을 해악으로 인식하는 서구편향적 목소리이고 또 하나는 서구적 문법과 철학으로 유교를 재음미하는 새로운 이해의 목소리이다. 도올의 목소리는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전세계적 서구화의 진전결과 동서양의 도처에서 서구화의 역작용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미래가 모색되기 시작한 세기말이후 세계화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그 세계화의 바탕 전제로서 민족적인 것을 음미하는 새 움직임이 크게 태동하고 있다. 이와같은 문화적 추세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새로운 조음판을 전통의 악기채를 들고 먼저 두드린 것이 바로 추기경과 도올이었다. 그들은 분위기의 연주자로서 손색이 없었고 그 연주음은 강하고 완결적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거대 목소리는 이미 한 시대를 획할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사실 더 클 필요는 없다. 이제는 그 울림의 여운을 조절하면서 의미있는 결과를 위해 염려해야할 때라고 느낀다. 어느 철학도 네티즌은 도올의 강의와 연관해 <동양학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서구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불만에도 불구하고 유교이야기는 이제 진정 시작된 데 불과하다. 실질적으로는 아직 제대로 출발도 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유교적 삶을 살기에는 우리는 이미 너무 서구화되었고 정신과 감정은 서구편향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으며 제도와 문화와 사회적 제도와 양식은 서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서구적 조건아래 살아가는 삶은 따라서 당연히 전통생리와 충돌돼왔고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였을 뿐 사실은 누구나 불안정한 타자(他者)의 삶을 살아온 것이 그 동안의 사정이었다.
 
우리의 전통적 문화적 생리는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는 약간의 시일이 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거의 완전한 그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좀 더 많은 시일이 요할 것이다.
 
우리의 삶의 중심이며 불후한 영원한 지표가 될만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매우 많은 시일이 요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유교란 우리 민족사와 문명사가 지어낸 문명의 대하이며 바다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적어도 한 세대의 혼신의 정화 노력이 요할 것이다.
 
유학이 과학이며 종교일 수 있고 기술이며 문학이요 예술일 수 있는 보편무비한 균형된 삶의 체제임을 이해하는 데는 한 세대이상의 자성의 시간과 넓은 시각의 자기애가 필요할 것이다.
 
새로운 목소리는 그러한 시대적 요구의 실현에 구체적인 유용함을 줄 수 있어야할 것이다. 환영과 기대의 념과 함께 다소는 우려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필자가 글사랑에 올렸던 글입니다>
 

[출처] 유림의 도올비핀|작성자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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