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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齋先生의 수제자의 한사람인 悳泉 成璣運(1877:고종14 - 1956) 선생의 문집에는 1~3권에 걸쳐 서간문이 등재되어 있다. 그 중 제1권에 실린 9편의 <上艮齋先生書>에서는 중요 문제에 대해 스승의 자문을 구하고 특정 주제에 대해서 <丙午上書>에서는 특히 <問目>을 별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상서는 내용상으로는 모두 스승의 자문을 구하는 문목을 포함하고 있다. 이 자문한 부분들은 선생의 처세관의 골간을 이루고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학파적 학행의 要核을 논하고 있는 中心懸案에 속하는 것이었다. ......

 

본 논문은 필자가 수년전 집필하여

온라인 상에 발표한 글입니다.

 

덕천선생문목고

덕천문목.hwp

 

 

원문소개(주생략 : 주석은 파일을 다운로드)

 

 

Haian Digital Review 문물과 사상 1 (2003.12.1) 하이안 유교연구소

 

 

 

 

 

 

 

 

悳泉先生問目考

유 덕 조 (*)

1.검토의 배경과 상황

2.서간의 구조와 의미

3.서간의 종합적 해석

4.결론-사상적 정체성

 

 

 

 

 

 

 

 

 

1.검토의 배경과 상황

 

 

艮齋先生의 수제자의 한사람인 悳泉 成璣運(1877:고종14 - 1956) 선생의 문집에는 1~3권에 걸쳐 서간문이 등재되어 있다. 그 중 제1권에 실린 9편의 <上艮齋先生書>에서는 중요 문제에 대해 스승의 자문을 구하고 특정 주제에 대해서 <丙午上書>에서는 특히 <問目>을 별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상서는 내용상으로는 모두 스승의 자문을 구하는 문목을 포함하고 있다. 이 자문한 부분들은 선생의 처세관의 골간을 이루고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학파적 학행의 要核을 논하고 있는 中心懸案에 속하는 것이었다.

스승의 자문을 구한 것은 간재선생의 허여(許與)아래서, 門徒的 學行의 본질을 확고히 하고, 특히 책임 있는 師門으로서 명분과 의리에 입각해 시대에 의연히 일관되게 대응하기 위한 <학파적 조율>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러 위기대응 움직임과 주장이 무성하던 당시 총체적 분란상황에서 일어나는 분파적 의견을 경계하려는 현실적 응찰을 반영하였다. 서간을 올린 것은 그의 학구의 일상적 과정이기도 하였지만, 스승의 존재를 위기를 헤쳐갈 학행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그 같은 실체성을 가시적으로 확고히 구축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일 것이다. 일치되고 모아진 학파적 공의의 수립과, 통합적 이성의 결집을 시도하되, 엄정한 學理로서 추구하려는 이 태도는 의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의 시대 대응과 문제의식은 지금까지도 현안으로 남아있는 근대사적 과제이기도 하다. 현재의 사회 문화적 궁극의 정황도 어떤 의미에서는 한말의 상황과 구조를 명백히 청산하고 있지 못한 것이 엄연한 현실일 것이다. 곧 지식의 근-현대화와는 달리 전통적 의리관을 고수하고 지적 본질과 정체성을 탐구하는 문제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오늘날 무엇보다 주요한 과제로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국가적 쇠운의 시대에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서 안일한 학문적 문제의식이 용납될 수는 없었으므로 그 문목의 내용은 정밀한 분석을 요하는 것일 것이다. “시세를 알지 못하면 학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전통적 믿음에 철저했을 당시에 이 문목들은 극히 절실한 문제의식의 소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가 “節義와 道學은 別個의 것이 아니다”라는 믿음을 가졌고 간재 학파의 대시대 대응자세를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

그동안 조선조의 성리학자군에 대한 연구는 퇴계 율곡 우암 남명 등 저명 학인을 주로 검토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리고 도학의 내면적 발전사 혹은 자기성찰의 내밀한 구조분석보다는 개념형식 의의나 유형, 절의 방면의 연구가 주로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간재 선생의 대표적 계승자인 덕천의 학행을 검토하는 것은 당대 학인의 전모에 대한 이해지반을 넓혀보려는 한 시도이며 전통지성의 학맥의 정통성을 바로잡고 재구축하려는 노력의 일부이다.

단적으로는 사제간의 전승구조 자체를 중시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을 말하려는 것이다. 걸출한 고급 사문의 스승들의 학문이 높고 중요하나 그 문생들이 이어가는 학적 전승의 힘에 의해 그의 학문이 역사화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전승구조의 연구는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덕천 선생의 시대는 더 이상 철리론의 발전에만 매진함을 허락하지 않았고 냉엄한 시대상에 대응하여 학파적 태도로서 의 명백한 행동적 <선택>과 <표명>을 요구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가 격동하는 위기적 배경 속에서 사문의 문생들에게는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고 동시에 변화의 방향을 모색해야할 책무가 부여돼 있었던 것이다.

문목에 비치는 내용은 경전과 역사 그리고 당 시대 <상황과 문제> 등을 함섭하면서, 말하자면 <보편적 대응논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적 근세 내지 근대적 전통지성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반영한다는 특질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지성성’의 탐구는 조선유학과 오늘을 이어주는 중요한 가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갖게 된다. 특히 형식상으로는 전통적 사유를 고수하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해석과 함께 시대성을 가미함으로써 새로운 지견을 창출하려는 치열함이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서간의 의도이며 목적일 것이다.

약관 30세에 처음 선생께 올린 상서는 불혹을 넘긴 46세까지 이어지고 있다. 24세에 처음 집지(執贄)하였으므로 그 배움의 의지는 20년이 넘도록 한결 같이 열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학파적 믿음과 열성의 자체도 오늘의 상황에서는 의미심장하다. 자신에 대한 확신과 진성이 있어야 어떤 성취가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문중심의 자세는 결국 시대에 대응한 그의 중요한 지적 태도이다. 고금을 통해 지식인들의 개인적 삶과 시대 대응은 학자적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예컨대,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인의 성향이 한 시대를 지배하는 주류 특질로 승화될 때 역사적 의미를 형성하게 된다는 점이다. 금년 3월 선거혁명을 두고 모 인터넷 신문은 한국의 주류가 바뀌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7개월이 지난 9월 말경에는 그에 대한 반론들이 강하게 대두하고 있다. 지식인의 존재와 그 처신이 현재의 한국적 모든 상황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근년에 들어 국내 지식권력의 지도를 그려보겠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물론 그 지식권력이란 말이 매우 편중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은 문제일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모 언론에서도 지식권력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데 순수 인문학자는 배제하고 ‘사정상’이라고 양해를 구하고 있다. 그와 유사한 일종의 사회운동적 지식인들을 비판한 내용도 여기 서간에서 나타난다. 전통적 지식인과 오늘의 지식인의 상황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힘차고 당당한 논리 전개의 모습에서 보아 간재 학파는 그 당시 지적 주류의식이 매우 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서간의 구조와 의미

 

(1)병오상서

 

1)서간전문

 

엎드려 생각하니 이 봄에도 선생님의 道體와 神明의 妙相을 숭앙하는 정성으로 아침 저녁으로 방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학문의 도란 이치를 밝혀서 행사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치(理致)를 밝히는 가운데 성품이 같다는 설과 같지 않다는 설이 있고 마음이 <기>라고 하는 설과 <리>라고 하는 설이 있으며 <리>는 無爲하다는 설과 有爲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대개 성리학 공부가 깊은 이는 事功에 힘쓰지 않고 事功에 힘쓰는 자는 성리학의 근본을 깊이 공부하지 않습니다. 광대함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정미한 것을 소홀히 하고 근소한 것을 삼가는 학자는 원대한 것을 소략히 여깁니다.

그 같은 유별(類別)을 생각해보면 매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예가 많습니다. 그것은 비단 품성적 차이와 가르침을 받고 익힌 내용의 다름에 기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처럼 각각 자기의 견해를 중심으로 하여 같은 생각을 가진 學人을 끌어들이고 다른 생각을 가진 人士를 밀쳐내며 門派를 가르고 나누어 심성을 바꾸어 무기로 삼고 文辭를 꾸며내어 방패를 삼아 서로 겨루고 있으니 이미 聖人의 門生다운 仁愛와 義理의 풍모는 다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고요히 생각해보니 선생님이 논하셨던 人物性之同異論에서는 “인물의 본성이 나의 본성이요, 다만 형기가 같지 않아 다름이 있게 된다”고 하였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인물이 똑같이 천지의 이치를 받아 본성을 이루었으나 오직 사람은 형기의 바른 본질을 얻어 그 본성을 보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본색을 논하신 경우에 말씀하시기를 “ 기운 가운데 정밀하고 밝은 것을 靈處라고 하는데 이는 마음이며 본성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無爲와 有爲를 논하신 경우에는 말씀하시기를 “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며 도가 사람을 넓혀주는 것은 아니다. 도의 본체는 무위하고 사람의 마음에는 지각이 있다. 이것으로 두뇌를 영위하여 4통 8달하니 그 운용은 무궁하다.”하였습니다.

洙 泗 洛 閩의 학통을 이으셔서 덕이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하고 가까운 것을 말할 때 원대한 것을 빠뜨리지 않았고 작은 것을 납득하여 자족하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셔서 일심에 천고의 비전을 통하시고 한 몸에 사계절의 기운의 화평함을 갖추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선비들이 문하에서 복종하여 섬기지 않는 이가 없는 까닭입니다.

저도 또한 다행이 찾아뵙고 배알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리적으로 멀어서 매일 모시고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는 것은 理氣의 미묘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行實은 한가지 善함으로도 이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사로이 스스로 말씀올린다면 어떤 학파의 준칙을 막론하고 모두 하나의 善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는 한가지일 것입니다.

한 집안에서 소견과 논점이 혹 다르다하여 서로를 원수처럼 바라본다면 그것이 어찌 제 정신의 본심이겠습니까? 기상과 습관의 달라짐이 전전하면서 격화되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일 것입니다. 학자라면 먼저 스스로의 눈에 物我를 비워두고 도량을 크게 하여 우주를 함축하고 함께 논의할 때에 혹 다른 의견을 보아도 놓아두고 거론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이 역시 近少한 것을 삼가는 한가지 일일 것입니다. 함께 행할 때는 함께 善을 행하려는 자를 準據로 하여 愛護해야할 것입니다. 이 역시 廣大함을 이루는 한가지일 것입니다. 이는 또한 머금고 호도하며 혼란에 빠져서 스스로 눈금 없는 저울이 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데 斯文을 함께 하여 이 쇠운의 시대의 한줄기 陽脈을 부지하고싶습니다. 이것이 도를 강론하는 본의가 아닐는지요. 세상의 학문의 피폐를 개탄하오며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이같이 稟議하오니 엎드려 바라오니 살펴주소서.

 

2)문목

 

음양오행이 연변하여 왕래작용하니 그중 맑고 수려한 것을 얻어 현자가 되고 탁하고 섞인 자는 어두워집니다. 만일 고요하고 적막한 사려를 얻어 천지간에 털끝만큼이라도 다름을 보려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는 바로 탁하고 섞임과 맑고 수려함을 분별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이는 두 가지는 氣이면서 탁한 가운데 맑음이 있으므로 예컨대 만약 기로서 발현되지 않았을 때는 탁기를 조절하고 혼연히 화합하여 기가 한결같이 고여서 스스로부터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기와 화기의 한열은 기 스스로가 한냉 작용을 하고 기가 발열 작용을 하는 것입니까? 만약 한열이 본연의 본성이라면 기질적인 성품은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한기를 얻어 한랭하나 차거움이 같지 않고, 열기를 얻어 뜨거우나 뜨거움이 같지 않은 것이 기질적 성품인지요?

사람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것은 부모가 兩存하여 생명을 준 것 같아서 그런 후에야 세상에 태어날 수 있고 세상에 스스로 살아가게 되는 것인데 왜인지 우리나라 풍속에 이미 낳은 庶子들을 방치해두고 다른 사람의 子息을 맞아들이는 일이 있습니다. 자식된 마음에 항상 의문되어 여쭙습니다.

 

3)고찰

 

병오상서는 덕천선생 입지의 나이일 30대의 관심을 논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논의 깊이를 추구하면서 사람의 유위와 무위의 문제 즉 인간의 의지적 행동의 가치에 대한 스스로의 절실한 사색 결과를 논하고 있다. 이는 철학적 사색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간재 학파의 깊이를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서간의 본의는 학파간의 대립으로 인한 학문의 쇠퇴를 우려하는 데 있다. 특히 학설적 대립이 지식인의 분파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에 무게를 두고 서술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원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1)무위설과 유위설 그리고 성리학파와 사공학파의 대립은 학행의 성격상 있을 수 있는 현상이며 오랜 관습이다

2)문제는 그러한 학행의 관습이 아니고 문파를 가르고 나누어 사람을 끌어들이고 배척하면서 가식된 문사를 구사하는 것이다

3)그 결과 성인의 문생 다운 의리의 풍모가 사라지고 있다.

는 것이 선생의 분석이다. 선생은 그 분파작용의 부당성을 원리론에 입각해 통박하고 있다. 그 때 원리론의 중심어를 스승 간재의 어록에서 찾음으로서 학파내의 결집을 먼저 도모하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인용한 <人物性之同異論> <本色論> <有爲無爲論>이 그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각 학파의 주장을 초월하여 지식인의 도리는 모두 善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는 그 같은 <화합의 정신>을 한줄기 <陽脈>이라고 하였다. 국가적 사회적 위기를 이겨갈 <유일한 희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양맥을 扶持하고 싶다”는 말은 깊은 시대적 고뇌를 반영하고 있다. 망국의 순간에도 <학문을 희망의 빛>으로 보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중대한 지적 확신일 것이다.

별기한 문목에서는 그 당시 사회를 통찰한 두 건의 중요한 주제를 논하고 있다. 첫째는 이기주의에 편승하며 타락해가는 지성인들의 모습을 두고 그 배경을 사려한 글로서 사람의 탁한 기와 맑은 기가 어떻게 분간되는가를 묻고 있다. 이어서 水氣-火氣論을 물은 것도 같은 의미에서일 것이다. <淸濁> <寒熱>이라는 말로 질문한 요점은 결국 당시의 사회상 지식인상을 물은 것이다. 당시의 사회현상을 학문적으로 소화 정화하려는 노력이 주목된다.

두 번째는 적서차별을 비판한 내용으로 적자와 서자가 같은 부모의 자식임을 망각한 일반적 차별 관습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항상 의문되었다’는 것은 그가 당시 사회적 모순을 광범히 통찰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이는 일종의 <의식각성> 혹은 <의식개혁>의 의미를 가진다. 국가적 위난을 우려하고 대책을 찾기에 부심하는 가운데 대외적 운동이나 활동 이전에 사회와 자아에 대한 內省을 통하여 그 근본적 원인을 성찰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간재집』에서는 분명히 존재하였을 선생의 이 문목에 답한 직접적 답서는 싣고 있지 않아 간재 선생의 입장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간재집』에는 癸卯答書(1903) 壬子與書(1912) 與成璣運書(?) 등 3편을 싣고 있는데 모두 순수한 학술적 주제를 논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서간을 통하여 그와 유사한 주제를 논하고 있으므로 별도의 답서는 사실 긴요한 것은 아니었다. 『艮齋先生全集』에는 간재선생이 덕천선생에게 보낸 답서와 서간 18편을 등재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면

대개 사람의 본성이란 渾然至善하니 그 마음이 결집되어 혼잡되지 않고 天地神聖과 더불어 털끝 만한 차이도 나타내지 않는다. 氣質 자체도 역시 원래는 천지의 정기를 따른 것이니 다름이 없다(不二). 바르고 치우치지 않은 경지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용렬하고 어리석음이 심한 자일지라도 만일 고요한 배움을 경험한다면 스스로 淸粹해질 수 있다.... (答成璣運書 癸卯:1903 문목이전의 답서)

<문목>의 전후에 깊은 이학적 문답이 이어져 왔고 <壬子與書(1912)>의 경우는 “우리 유학은 性學이다”라고 서두를 시작한 매우 긴 장문의 서한을 보내주고 있다 그 후 전체 서간은이 한결같이 <語類> <大全> <淵齋集> <栗谷說> 등 주자와 선학들의 문집을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구체적인 성리학적 학술 논변으로 일관되어 있다. 부언할 것은 <人物性同異論>부분에서 덕천선생은 스승의 설을 따르되 맹자 등 경서의 견해를 학술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 운용하면서 이를 성학의 정통이념으로 재정립하려는 은미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를 철저한 <經學演義>의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정미상서

 

1)서간전문

 

書經에 말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利用厚生이라고 하였고 孟子 7편 가운데 王政을 논하면서 井田制度를 거론한 것이 3차례입니다. 대개 일반 백성들은 恒常的인 생산이 없으면 恒常的인 마음이 없게 되므로 반드시 먼저 후생을 도모한 후에 庠序學校를 설치하여 孝悌 忠信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지라서 협곡이 많고 정전제도대로 토지를 다 구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전을 할만한 곳에서는 법대로 구획하고 할 수 없는 곳에서는 가족 수를 헤아려 나누어주고 혹은 정전제가 가능한 넓은 곳으로 옮겨준다면 모두 그 이로운 산물을 유용하게 쓰고 삶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禮樂의 가르침을 일으켜서 때에 따라서 따를 것은 따르고 개혁할 것은 개혁한다면 거의 다스림을 행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그런 시책이 어떠할지요?

聖王의 정치에서 말하기를 벌은 후손에게 이르지 않고 죄인은 처자에게 연루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후세에 삼족을 해치고 九族을 멸하여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게 하여 범법의 뜻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不軌를 도모하는 자의 마음과 일을 3족과 9족의 戚族들이 어찌 서로 알 수 있겠으며 어린 자식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반드시 선왕의 법을 따르는 것이 천지 생살의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어느 때 성인이 나온다고 해도 이 법을 시행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傅說은 版築 築城하는 사이에서 등용되었고 膠鬲은 魚鹽의 海邊에서 등용되었으며 管夷吾는 죄수의 신분으로 등용되었고 孫叔敖는 바다에서 등용되었고 百里奚는 市場에서 등용되었으나 천하와 국가가 크게 다스려졌고 뒷시대에도 한나라의 衛靑과 晉의 陶侃이 모두 천한 출신이었으나 그 지위가 각각 그 재주와 맞게 충원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 동방은 이를 본받지 않아 그 가문의 문벌을 보는 것이 특히 심한 것입니까? 이는 국토가 좁기 때문입니까?

하늘이 이 같은 영웅호걸과 재주 있고 지혜로운 이를 배출하였으니 이는 이미 하늘의 귀한 精氣를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 이를 賤視하고 쓰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 成宗 시기에는 丘宗直을 春秋官으로 除授하였습니다. 당시 그 문벌이 비천하여 臺諫에서 논의가 일어났었습니다. 上께서 臺諫들에게 春秋를 강론하게 하니 모두 하지 못하였습니다. 상은 말하기를 “춘추를 강론할 수 있는 자가 이 관직을 맡는 것이 옳은가 강론하지 못하는 자가 이를 맡는 것이 옳은가? ”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진 이를 등용함에는 부류를 따지지 않는다는 聖君의 의지였습니다. 후일에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가 아니고는 크게 등용될 수 없다는 것이 나라가 쇠망한 이유일 것입니다.

 

2)고찰

 

정미상서는 민생을 위한 정전법의 시행과 교화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정전법은 극히 오랜 고대의 토지제도이고 교화 역시 삼대 이래의 제도이다. 옛 제도의 부활을 주장한 이유는 오히려 그 삼대시기에는 민생을 생각하는 정책이 이루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의 학자들이 정전법의 부활을 시도한 것도 농민에게 토지를 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연좌제의 해악을 지적하고, 조선시대에 문벌을 강조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지 못하는 것이 쇠망의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인재의 공평한 등용이 막히면서 정치상 이기주의 사권(私權)이 발동하였고 그것이 나라 쇠망의 이유라는 이해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근현대사에서도 익히 경험한 일로 소수 기득권 층이 권력을 영속하려하고 신흥 세력은 사사로히 권력을 차지하려할 뿐 진정한 공기로서 국가를 영위하려는 의지와 전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원인을 국토의 협소함에서 찾고 있다. 그 원인적 성찰의 태도는 자체가 중요하다.

그 실 내용들은 이론이 있을 수 있고 개선돼야 할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승과 함께> 국정의 중심을 논하려는 자세는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자신의 학파가 공동으로 당대를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음을 거듭 표현한 것이다. 특히 만고의 공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강력한 정당성을 견지하고 있다. 지식인의 진정한 책무가 국가의 기강을 수호하는 일에 있다는 자각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모든 위기 대응의 중심이 될 만 한 것이다. 결국 그 논의가 어떤 사심에서 비롯하지 않고 있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후일 『간재문집』 간행을 둘러싼 제자간의 갈등은 그와 같은 노력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3)계축상서(1)

 

1)서간전문

 

선생님의 大稿를 約齋 宋丈(宋炳華)이 교열하고 말하기를 천지 사이에 몇 문자가 있어 멀리 요 순 우 공자 맹자가 서로 이어온 도를 계승할 수 있고 가까이는 程朱潭華의 적통이 될 수 있으니 뒤 시대에 가려 쓴다면 만세토록 태평성대를 열리라 하였고 또한 말하기를 “金․柳가 시비를 논한 가운데 가장 연관이 밀접한 책 부분에는 별도로 사사로이 기록을 해두었으니 이는 그 급박하고 부득이한 마음을 보이기 위함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좋게 한다 좋게 한다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그(君)의 뜻으로 하는 것인지요. 그러나 이것은 존귀한 <사문의 일대 의리>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부득불 原編에 넣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뜻과 같사오며 뒤로 좀더 시일을 기다려 가르침 말씀을 따라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梁基韶가 이미 힘을 다한 正本의 바탕에 깊은 遠慮가 배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득불 묘수를 택하고자 다시 한번 살펴보는 가운데 겨우 몇 사람을 얻어 금년 안에 작업을 마치기로 기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은 크고 일할 사람은 적어서 과연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내심으로 항상 두려웠습니다.

기록 가운데 “潛身海上”이라고 한 아래 부분은 쇠퇴해가는 세상을 위한 일반적인 언급이신데 다시 서술하시기를 “나라가 망한 후 마침내 바다로 들어가 계화도 사이의 고운 고개와 여러 산을 왕래하고 다시는 육지를 밟지 않겠다고 ”이라고 하신 뜻은 어떠한 것인지요. 이 말씀은 선생님의 處變의 大節이시니 기록해두지 않을 수 없을 듯 합니다.

지난 해에 외람된 몸이 자세히 살펴주시는 은혜를 입어 경건한 마음으로 한번 읽었사온데 곳곳에 “그 같은 籤記 글”을 첨부해 두신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명을 모두 삭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기록은 보존하고 삭제하는 것은 선생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인데 글을 깎인 것을 보고는 或者는 璣運을 원망할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장래에 천백 가지 일 가운데 혹 일치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正書(正本)를 준비하여 보시도록 올려드린 후에 계화도에 보관해두고 후일에 才德이 감당할만한 인재을 살펴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관하고 있는 것을 옳지 못할 듯 합니다.

 

2)고찰

 

이 서간은 간재학파의 大義를 정립하려는 의지와 책임감을 표현하고 있다. 艮齋私稿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분야별 편찬의 의견을 말한 것이다. 특히 학설적 논변은 간재학파의 중심일 것인데 이 부분을 부록으로 편찬함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학파적 주장과 의견을 떳떳히 전면에 표출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학통의 떳떳함은 비판적 쟁론을 통해 더욱 확고해지는 것이며 그것이 오히려 학파결집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록으로 처리하는 것은 간재 선생의 독톡한 학설을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본 의견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어서 간재의 入海 행적을 두고 문의한 것은 시의상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아마 선생은 스승께서 이 부분을 좀더 명확히 의견을 표명해주기를 바랬던 것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志山의 입장에서도 보이듯 나라가 망한 지식인으로서 그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명일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명백한 문서화된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다. 특히 원고를 계화도로 반환하겠다는 것은 겸손한 표현의 배면에 강한 의지를 실어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읽어야 하겠다. <艮齋 入海問題>는 당대 최고 지성으로서의 명분을 사려한 당당한 선택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명확한 의미부여의 성패는 거의 학파적 사활이 걸린 명분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4)계축상서(2)

 

1)서간 전문

 

璣運은 근년에 37세입니다. 父師의 가르치심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한가지 善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나라가 또한 망함에 따라서 저는 더욱 얼올(臲卼)함을 느낍니다. 저의 偏執된 견해를 말씀드린다면 敵의 民籍에 올리지 않으려면 7-8년 동안을 한 가족이 숨어사는 것도 요행일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들 도적들이 저를 체포하고 마음을 구속할 것은 필연적인 일일 것입니다. 슬픈 이 희미한 마음으로 고요히 梅竹軒의 높은 충절과 탁월한 절의를 생각하니 감동적입니다.

尹公裕가 뒤에 遺文을 간행하면서 나라의 역사에서 널리 채록하여 제가의 기술과 근세 사실을 모아 종합하고 한편으로 만들어 목판에 새기어 세상에 전함으로써 亂臣賊子들이 두려움을 알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데 선생님께서 絶筆하신 지가 오래 되셨으나 특별히 책의 서문을 쓰셔서 忠魂들이 백년토록 역도들의 肝을 깨뜨리도록 위로해 주시옵고 남아들이 의롭지 못한 부귀를 구하는 것은 개돼지 짓이며 맑은 의리를 역사에 기록함은 日月같은 영광임을 알게 해주십시오.

재배하고 품의 말씀 올리오니 매죽헌 선생의 부록 편차를 대략 가르침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채록하여 넣은 문장들은 바뀌어진 부분이 많아서 감이 제가 시비를 정하지 못하옵고 편장에 따라서 籤記를 붙였습니다. 번거롭게 풍의 올립니다만 바르게 정정하지 못하여 千秋의 한을 남기는 것보다는 사실에 가깝도록 편찬작업의 시작을 신중하게 삼가 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또한 이 책을 선생의 당세에 편집한 것은 아마도 뒤의 인재가 후에 정비해주기를 바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찌 두 번 세 번 고하여 簡要하고 精詳하기를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력이 허락하시는 대로 반복해서 살펴주시옵고 첨기를 따라 批答하여 교시해주소서. 기운이 지은 梁文과 跋文 후손들의 은근한 촉탁이 있어 감히 제가 멋대로 지은 것입니다. 문장이 심히 졸렬하고 식견이 짧아서 말씀 올릴 수도 없습니다. 속 깊이 말하고자 한 것을 矜憐히 여기셔서 바로잡아 주시옵고 大賢의 사적에 누가 되는 거친 글이 되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한없이 기쁘겠습니다.

 

2)고찰

 

이 역시 앞의 서간에서처럼 스승이 梅竹軒의 史實을 편찬하면서 序文의 형식을 빌어 입장을 표명해줄 것을 간곡히 청하고 있다. 비록 “입해 절필의 태도를 견지하고 계신 가운데일지라 충혼의 의지를 천명”해주시기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충의의 역사일지라도 사실에 정확한 편찬을 할 것을 말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문헌편찬의 깊은 의미를 잘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이 나라의 정신을 지키는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要路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간재의 한마디 말씀이 전체 지식인을 감동 분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의리를 역사에 기록함은 일월 같은 영광임을 알게 해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요청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조선 학맥을 지탱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주류적 선도 지식인 군으로서 간재학파의 강한 책임감을 반영한 것이다.

 

(5)을묘상서(39세)

 

1)서간전문

 

어제 蘭谷(宋炳華)의 訃音을 받았습니다. 통탄스럽습니다. 통탄스럽습니다. 난곡 선생님은 태산 같이 북두성 같이 의지하던 분이었습니다. 하늘이 어여삐 여겨주지 않으시고 이같이 혹독하게 斯文을 잃게 하시니 원망하며 묻고 크게 울부짖습니다. 삶의 의지가 막히는 듯합니다. 제가 비록 스승과 제자의 연분을 맺지는 못하였으나 경전을 들고 어려운 곳을 여쭌 은혜와 의는 깊습니다. 벗과 같이 시마(緦麻) 3개월 상례 복을 입고 싶습니다. 흰 건을 쓰고 요질(腰紩)을 두르고 흰옷과 의대(衣帶)를 하고자 하옵는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오오 영명하고 豪俠한 기상과 宏闊한 도량에 博文의 학식에 約禮의 공부는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생각하면 우리 선생께서는 당대의 子雲이요 堯夫 이셨습니다. 다만 이 선생이 계시더니 또한 먼저 세상을 하직하시니 누구와 더불어 상의하겠습니까? 우리의 도가 날로 孤虛해지리니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내려다보며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십니다.

 

2)고찰

 

蘭谷 선생의 죽음을 애도한 이 글은 “우리나라의 道가 날로 고립되고 쇠약해질 것이라는”데에서 상심을 더하였음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난곡이 그러할진대 스승에 대한 상념은 더하였을 것이며 특히 이 글을 통해서 스승의 절필에 대한 안타까움을 거듭 간접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스승의 入海와 絶筆은 하나의 의도적 의지의 표현으로 견지할 필요가 있으나 그 외의 순수한 부분에서는 적극적인 전통의식 수호의 노력을 단호하게 결행하는 것이 옳다는 그의 의견은 주목된다. 실제로 그 入海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그 목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도가 孤虛해진다>는 언급은 그의 그 같은 깊은 우려를 절실히 반영하고 있다. 스승의 <入海>만으로는 학자적 책무가 다할 수 없음을 공손히 나타내고 있다.

 

(6)기미상서(43세)

 

1)서간전문

 

國家 服喪 문제를 선생님이 강론하고 論定하였을 때 어떤 이가 綱目의 학설로써 물으니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만세토록 가르침을 드리울 인군의 공의이다. 내가 論定하는 것은 당시 臣民들의 사사로운 논의이다.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묻지 말라. 先王의 先朝에서 백성에게 남겨준 것을 40여년 신하로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不服하는 것이 마음에 편안한가? 모든 나의 문하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心服 삼년을 입으며 여러분들은 모두 銘心 刻骨하고 있는데 어떤 자가 거짓으로 꾸며내고 속여 모함하니 이것은 어떤 속셈인가? 천하의 일이 오랜 시일 후 밝혀지면 다만 그들 입만 더러워질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郭俛宇(郭鍾錫)에게 下諭하신 일은 오직 治療所에 囚人으로 收監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위생상의 해로움을 稱託하며 삭발을 결행하고 말하기를 단발한 것은 내 의사에 관계된 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재판을 청하며 하는 말은 나는 대한의 신하인데 어찌 너희들에게 재판을 받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公義上의 第一義로 논하면 『周易』에 말하기를 천지가 어진이를 가두면 사람이 隱居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천하에 나라가 없어지고 告할만한 天子도 諸侯도 없는 상황이니 단지 피눈물 흘리면서 스스로 고요히 自靖하면서 義를 지키는 것이 옳을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미 통분한 마음으로 巴里에 屋事長書를 보낸 것은 이 역시 義理입니다. 대중들이 모두 崇仰하고 있고 그가 말하는 裁判을 받을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卓越하고 그 知見은 밝은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삭발할 때에 죽음으로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 사림의 치욕입니다. 그 당시에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죽음으로 삭발에 항거하고 또한 재판을 청구하여도 의에 합치되지는 못합니다. 군자의 의로운 처신이란 시종 흠이 없어야하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엎드려 말씀 올리오니 이러한 저의 생각이 어떠한지요?

 

2)고찰

 

郭俛宇의 파리장서와 단발 사이의 의의의 차실과 부동함을 지적한 이 글은 매우 중요한 학파적 의지를 나타낸다. 비록 장서발송과 재판거부 등 혁혁한 의리의 표현이 있다고 하더라도 失節行動이 있다면 그 의절의 의미는 반감될 것이라는 점과 의리와 타협은 공존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지식인의 의롭지 못한 자기합리화와 일관되지 못한 행동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결의의 표현일 것이다. 당시 유림들의 행동은 起義 自靖 亡命으로 크게 3분되었는데 간재학파는 자정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고 그 이유는 주로 어떠한 경우에도 失節을 단호히 거부하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嚴正한 節義의 分別과 固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한 점이다.

우리에게 타협적인 민족운동을 하던 많은 지식인들이 결국 친일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은 뼈아픈 경험이다. 또한 公義上 第一義를 강조하고 周易을 거론하여 스승 간재의 入海問題를 정당화하려는 논지를 잊지 않았다. <朝鮮儒學>을 <수호>하려는 그의 의지는 강하고 열렬한 것이었다. 전통정신에 대한 믿음도 오늘의 거울이 될 만 하다.

 

(7)기미상서(제2서)

 

1)서간전문

 

萬東廟 관계 일은, 宋友가 제공들에게 장서에 비천한 저의 이름을 등재하고자 하였을 때 화란중임을 명분으로 사양하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 선생께서 이미 세상을 피하여 바다로 들어가신 일을 생각하여 사양하였습니다. 小子는 辭讓하고 나서 마음속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사롭게 偏執된 마음을 가지고는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海觀 志山 두분 선생이 과연 이러한 거사를 하실 지 알 수 없어 혼자 의혹을 품었었습니다.

지난번 宋亮燮의 회답 글에 말하기를 海觀께서 서신으로 말하시기를 “하늘과 땅이 가두이고 현인이 은적하였으니 설령 大老일지라도 한마디 말씀도 내놓지 못할 상황이다. 어떤 일을 막론하고 그 공은 사직이 있은 연후에 가능할 일이다. ” 라고 하였다 합니다.

志山은 말하시기를 “일찍이 한 사람이 있어 통문을 만들어 나의 비루한 이름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나는 고사하고 말하기를 사직이 이미 망했으니 나 같은 자는 죽은 지 이미 오래이다. 스스로 용렬하고 졸렬하며 비천하고 나약하여 비록 감히 머리를 내밀 수 없으나 오히려 나라의 선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란다.”고 하였다 합니다.

두 분이 가지신 뜻이 이미 이러하시니 누가 다시 머리를 들고 앞장서겠습니까. 한줄기 밝은 빛도 돌이킬 길이 없고 곧 그 거사가 다만 욕만 당할 것이니 이미 두 분의 논의가 그러하시고 선생과 더불어 같은 생각이십니다. 일이 이미 이지경이 되었고 다만 죽은 사람으로 자처하여 저들과 더불어 교유하지 않았으니 곧 中正한 일입니다. 비록 尤翁(尤庵 宋時烈)같은 일은 맡아 지킬 수 없어도 실로 尤翁 같은 의리를 행할 수 있었습니다.

宋友는 또한 鄭宋이 만동묘 제사를 폐하고 捺章한 죄를 성토하였습니다. 소자의 뜻을 말해보면 이는 당연히 왕의 王章으로서 시행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나 일의 중대한 관건은 그가 먼저 저들에게 (먼저 직접)서신을 보내고 춘추의 대의를 밝히는 데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성토함이 그 후에 있었다고 해고 그 허물을 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저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런 일을 먼저 하였다면 단지 내부에서 분란만 일으키고 일을 이룸에는 해가 됩니다. 宋友는 또한 말하기를 장서를 보내어 죄를 성토하는 것은 우선 강산의 과일과 물고기를 욕심내는 것을 그치게 하고 제사를 폐지하지 하지 않으려 함이라고 하였으니 가상한 일입니다.

 

2)고찰

 

불의를 성토한 일을 두고 비판적 의견을 개진한 이 글은 간재 문하로서 엄정한 義理觀을 반영하고 있다. 지식인으로서 성토 이전에 대의를 밝히는 의사의 표명이 먼저 있었어야 한다는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사전의 비판이 더 효과적이고 진실하다는 것으로, 성토의 實效性과 眞情性을 강조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엄정한 儀節을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 경솔히 사회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이고 있다.

국권을 상실한 참담한 좌절의 시기를 맞아 자식인의 책임감을 반추하며 지산과 스승의 의지에 동참하여 內省의 길이 먼저 필요하다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아는 기미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사실과 대극적으로 크게 대비되는 자세일 것이다. 이러한 태도도 어떤 민족운동과 같은 가치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8)경신상서(44세)

 

1)서간전문

 

따라 배우는 자에게 내려 보여주시어, 많은 사람이 이미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응당 그러한 가르침을 받들어 읽으니 황공하여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저 기운의 文行은 볼만한 것이 없음을 모든 사람이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상종하는 것은 저 기운이 외람 되게도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혹 생각하기를 제가 학문의 대략을 전수 받았고 이 때문에 바르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이미 깨달음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講堂을 지을 적에 諸君들의 집안에 窄妨(어려움)이 있어 부득이하여 처음 몇간을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너무 과하고 사치하게 하여 크게 낭비하였습니다. 천지조화로 생성된 이 인간이 사람들에게 조금의 이로움도 없으니 하늘의 꾸짖음이 있을까 두려워 아침저녁으로 근심스런 생각을 스스로 그칠 수 없습니다.

 

2)고찰

 

간재 문하로서 학파의 聲望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글이다, 간재 학파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사람으로서 매사 정성을 다할 것을 표명한 이 서신은 경건한 스승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思想守護, 育英意志를 결행하는 등 使命感으로 넘치고 있어 조선선비의 내면적 氣槪를 잘 나타내고 있다,

 

(9)임술상서(46세)

 

1)서간전문

 

저 기운은 僭濫 되고 부족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宋子大全이 화재를 입은 것을 걱정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최근에 立齋 宋相公이 편찬한 宋書類選을 받았습니다. 곧 韓文公集처럼 구절을 따라 添註 기록한 것을 판각하여 이제 찍어내게 된 것입니다. 이미 類選이라 이름하여 중간한 것은 정밀하고 정밀하며 편차도 바르게 되었습니다. 일 해낸 것이 훌륭하고 대략 내용을 살펴보니 이 大老께서 아마 제일 먼저 선出한 것들이고 2차 3차의 것들은 포함하지 못한 듯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대개 선현들의 編書의 의의에 따랐으며, 經禮와 史文으로 編次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중용 대학 『近思錄』 『性理大全』 같은 예가 그것입니다. 이 책은 尊王攘夷의 정신을 머리로 삼았는데도 己亥禮說은 禮篇에 들어 있지 않고 별도로 한 편에 실었습니다. 중복해서 나오는 것이 백여 편에 이르고 또 의혹 스러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큰 학자가 하신 일을 경솔하게 옮기고 변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곧 <宋書節類>라고 이름하고 그 편차는 성리대전 같이 하여 각각 스스로 한 서책이 되도록하고 싶습니다. 제가 집필한 원고의 편차 범례와 함께 서책을 올리오니 그 가부를 여쭙고 싶습니다.

 

2)고찰

 

『宋子大全』을 보완하는『 宋書類選』의 편찬에 관여하면서 올린 이 글도 선현 사적 편찬의 중대한 의의를 살리기 위해 부심한 모습이 역력하다. 간재의 뜻에 따라 선현의 의리서를 간행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지켜가려는 원려가 그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문화 정신적 투쟁의 길이 그들의 길이었던 것이다.

특히 尊王攘夷 정신을 대표할만한 禮說 부분의 위상이 편찬 체제에서 격하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의견을 올리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환언하면 민감한 의리적 시비분별을 회피하고 현실문제에 편의적으로 치중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원리적 맥락에 의지하여 義理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되 구체적인 실상을 회피하는 것은 일종의 책무방기일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에게 특히 義理儒學을 견지해온 조선의 유학자로서 異端의 聲討에 필적하는 엄정한 是非分別은 필수적인 것이며 단호한 의리분별아 회피된다면 이는 안일하게 공허한 의리를 내세우면서 실제적으로는 타협적인 행동을 촉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3.서간의 종합적 해석

 

-전통적 학행의 견지와 시대 대응의 의미

 

선생이 스승 간재께 올린 상서의 내용은

1)至極至誠에 이르는 긴장되고 치열한 학구적 생활 태도의 견지

2)숭앙 받는 師門으로서 학파적 본질을 수립 강화 표현하려는 노력

3)스승의 학문과 태도를 견지하되 지성인의 공적책임에 철저한 자세

4)순수한 의리적 의지의 엄정한 분별과 처신의 견지 ,경서의 적극적 演義

5)스승을 중심한 학파적 태도의 규합정돈과 명확한 표명

6)망국에 책임 있는 지성으로서 자숙과 자성을 통한 復興大計의 모색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서서간의 특질은 그가 先輩師儒에게 올린 上某某丈 서한에서 보다 명확하고 심화된 모습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與某某, 贈某某 등의 서한과 雜著에서 거듭 확인되어 나타나고 있다.

宋秉璿 선생에게 보낸 서한 上淵齋宋丈(1904년)에서는 그의 梅竹軒祠堂記와 東洲逸稿序의 서술의지를 양위 선생의 <意志>와 <學問>의 <道>를 잘 밝혔다고 보고, 이를

두 선생이 편안히 성취한 유지를 체득한 것으로서 천년토록 빛나는 불후한 거작

이라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아울러 자신의 학행을 반성하면서 ‘傷時之歎’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天下陸沈”이라고 통탄하고 그 망국의 쇠운은

“제대로 개화하지 못하여 서로 불의에 빠져 짐승같이 된데 있다”

고 보고

“大老들께서 도를 강구하여 나라를 막고 학자들이 따르게 하여 義를 강구하고 道를 지키는 길이 정당한 대응책”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의리와 도의 확고한 견지>가 궁극적으로 국가의 쇠망을 넘어서서 존립을 지키는 유일하고 정당한 길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나라를 부지할 수 없었을지라도 나라를 부지하는 실효를 크게 거들 수 있을 것입니다.

라는 언급은 깊이 경청할만한 사려를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約齋 宋秉華 선생께 올린 서한에서는 일부 禮說을 개진하면서

우리나라가 200여년간 儒賢들이 조정에 서지 못하여 성리를 언급하는 일은 많았으나 經世濟民을 언급하는 일은 적었습니다.

성리를 연구하는 것은 경제의 근본이기 때문이며 여기에 고착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성리의 명목을 학문으로 알고 가풍과 인습에 젖은 글로 현묘한 이치를 논할 수 있으나 處心과 行事를 도외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고 하면서 의리의 실천 궁행과 실학적 탐구를 겸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반성적 성찰의 내용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勉菴 崔益鉉 선생을 배알하였을 때 “그 英邁剛直한 기품은 타오르는 불같아서 범할 수 없는 느낌이었으나 사람을 접대할 때는 자상하셨다”고 말하고 함께 쑥국을 막으면서 면암이 “쓴 나물뿌리를 먹을 수 있어야 百事를 돌볼 수 있다”고 한 말씀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또한 志山 金福漢 선생에게 올린 글에서 擧兵하여 討賊한 일을 “빛나는 대의를 숭앙한다”고 말하고 동참하지 못한 일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도 그와 같은 열열한 투쟁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성의 뜻을 말하고 선생은 거의 의구심을 가지지 않으신 剛大한 기상을 가지신 분이라고 賞讚하고 있다.

지난 여름 저를 아껴주시는 서장을 받고 10년의 오랜 期約 같고 끝없는 정을 느꼈습니다. ...제게 주신 글에서 말씀하시기를 체포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疑懼心을 면할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만 ...

令監의 豪邁한 기상과 크나큰 절개와 맑고 소박한 덕이 이같으시니 저의 용열함으로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의구심이 8-9에 坦蕩함은 1-2일 뿐이며 영감은 의구심이 1-2에 탄탕함이 8-9이십니다. ...단지 스스로 반성하니 슬플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말하여 자신이 열혈한 투쟁보다는 스승의 길을 따라 선비의 의리학행의 정신을 연마하고 지키려는 뜻을 겸손히 표하여 두었다.

영감과 저 기운은 저들의 속박의 칼로 베이거나 烹刑을 당할지라도 두려울 것은 없을 것입니다. 1)나라가 망하고 2)道는 사라졌으며 生民들을 누가 구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서로 눈물을 뿌릴 뿐입니다. 山窓에 돌아오니 때마침 달이 밝아 ....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결국 덕천 선생은 스승 간재 선생의 충실한 학문적 傳受者로서 학문과 의리 그리고 처세함에 있어서 거의 완전히 일치되는 핵행을 수행하였다. 위 인문의 1)나라와 2)도의 본질을 같은 속성으로 보고 있는 것이며 <國家는 道의 中心>이라고 인식한 것이 그의 학행의 중추였다. 그리고 국가를 향한 절의는 양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의 독립운동사가 무장투쟁과 문화 정신 투쟁으로 양분된 것은 당연한 일반추세였던 것이므로 정신의 수호자로서 유학적 의리투쟁은 그에 합당한 자리 매김이 있어야 하겠다.

한국 지식인의 근대적 대응은 다방면적이었고 다양했으므로 일률적으로 평가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근대 지식인의 대응이 얼마마한 근대성을 확보하고 있느냐에 촛점이 맞춰졌었다. 그리고 그 근대성이란 거의 서구적 이념과 제도를 준거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 근대 민족주의를 1)국가주의 2)자유주의 3)민주주의 4)민중주의로 구분한 김용직의 이해는 상당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가 3.1운동을 창조적 대응이라고 부른 것은 신선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全體像을 그리기에는 크게 미흡한 것은 전통에 대한 깊은 배려의 미비가 바로 그 이유에서 일 것이다.

또한 지적 본질 면에서 보면 전통적 지식인은 <전통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거나 새 <시대는 전문성을 요구>하였는데 전통지식인은 <종합적 학문>이었다는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새 시대에 적응하여 신지식을 수용하거나 유학을 통해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지식인들의 대응은 실질적으로 엄연히 일정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변절의 굴레를 벗어나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전통적 지식인이 그와 같은 改新의 의지가 없었던 것은 全然 아니므로 <傳統的 世界觀>의 가치를 放棄하는 것은 큰 손실일 것이다.

아울러 민족주의의 성장의 의미와 모습 역시 다양한데 사상적 문화적 전통성을 강조하는 유림세력의 입장이 꼭 퇴영적인 것은 아니었다. 덕천 선생의 표현대로 <실질적으로 나라를 지탱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지탱하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언급은 절실한 지식인의 고뇌의 결단에 의한 <한 대표적 대응방식> 이었음을 새로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적극적 근대 대응세력이 유림을 일정정도 경시한 것은 문제일 것이다. 그들의 사상적 위상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또한 나라의 독립과 존속운동에서 기독교 불교 등 종교 세력이 활발하였던 것은 별도의 가치부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4.결론-사상적 정체성

 

-經傳 師承 中心主義-

 

한 민족 지성의 성과로서 사상이란 문물을 창조하고 가치를 정립하며 처신-행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주체이다. 또한 결단의 길을 열어감으로써 국가를 보위하고 민생을 영위해, 역사적 삶을 지탱하는 힘의 중심이다. 이는 또한 역사적 시공을 통관하는 전승 궤도와 당대를 통어하고 장악하는 응변의 장을 동시에 거느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적 과거에 묶일 수 없음과 함께 또한 오직 계속해서 근대화라는 현실 명제만으로 민족사를 영위할 수도 없다.

전통적입정에서는 天命說이나 사마천의 『史記』 이래로 응변적 형세론으로 성취의 역사를 適宜하게 해석해왔고 일종의 자유주의적이고 감성주의적인 성찰-표현의 방식으로 좌절의 역사를 그 승화된 自樂의 의지로 넘어서 왔다. 아울러 성취와 좌절을 아우르는 전통적 우환의식 함께 유지해 현실을 직시하고 그 내면적 성찰의 중심을 견지하였다. 그 같이 전통적으로 균형적 절제적이며 이지적 감성적 본질이 병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상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 전통적 사상성을 영위하는 조건은 최소한

1)지식인의 학문 사상적 일치와 교감의지의 광범한 존재

2)공정하고 정당한 지식인 비평정신의 공유 유지

3)국가적 차원에서 그들의 위상을 인정하고 유용하게 하는 일

4)사상적 전승 체제와 구조의 비중 있는 운용

등이 필수적이다. 덕천 선생이 “도가 말살되었다”고 통탄한 것은 위의 4가지 사상적 학문적 영위구조가 궤멸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선생은 그 사상적 전승성의 궤멸이 국가 존립 영위상의 해를 초래하였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선생은 국권을 상실하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하였던 그 시대를 살아간 선비로서 감당하기 힘든 학자적 자괴감이 일생을 지배하였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스승을 따라 계화도로 들어간 것은 바로 그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더욱 학문에 매진하고 스승으로부터 배움을 돈독히 하고 스승 거소의 주변에 강당을 지어 후학의 가르침에 나섰던 것은 난국에 대처하는 간재 선생의 뜻에 전향적으로 적극 동참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물론 그것은 유자로서 책무의식을 통각한 데 연유하는 것이었다.

선생의 서간을 면밀히 검토하면 간재학파의 시대 대응 태도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바로 그 같은 반성적 자아통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간재학파는 말하자면 <가장 근본적인 대응>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국가수호를 위한 저항이며 국가 命運을 지켜 가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또한 면암과 지산에게 보낸 서간에서 알 수 있듯이 ‘통렬한 비통함’을 벗어날 수 없었으나 이를 초극하여 의연히 학문과 講學에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같은 확신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스승의 학문의 가치를 확신하고 경전의 原義를 지켜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각성도 그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유일한 삶의 힘이 되었던 것이다.

간재학의 계승자로서 덕천 선생의 <自靖理念>은 기존의 이해로는 <保守的> 혹은 <道學的>인 것으로 이해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衛正斥邪>파나 <實學> <開化思想> 등의 전통과 변별되는 의미가 있으므로 그 동질성과 이질성을 엄밀히 분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의 서간에서 經傳과 성리학 선현들의 格言을 엄정히 사용하고 스승의 言說을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해석 심화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역시 간재학파의 특질로서 학문적 분파를 <이설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해소하되, 당당하고 힘찬 논리력을 통해 正統聖學을 구현하려는 遠大師承의 전통을 수립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간재처럼 先賢의 학문을 초극하지는 못하였을 지는 몰라도 師承傳統의 構築을 강조 주창한 것은 스승과 선현의 의지를 순수하고 충실히 계승하려는 깊은 사상사적 통찰력을 반영한 것으로서 스스로 不可侵의 歷史的 意味領域을 확고하게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덕천에 이어진 학맥의 전통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끝으로 다시 지적해두어야 하겠다.

 

 

 

 

 

 

Letters of Deokcheon, Gioon Seong

to Master Ganjae, Asking for Some Advices

 

by Deok Jo Yuu

 

Deok-cheon Gioon-Seong, one of the disciple of Ganjae Jeonoo, had sended nine letters for his Master and asked him several advices about the age they had lived, struggled to prevent the nation , Choseon Impire from Japaneses invasion and restore the national rights. Yooja, the Korean Confucian scholar have leaded their country and people for thousands years, in especial during the Choseon kingdom their readerships are the greatest one.

Their reactions for the times are divided in three attitudes. The first, be called to quarrel with weapons, working over the country. the second, be called movement of reformations with the great aggreated public people. the third be called selfexamination, reflecting about the traditional ideas and national systems, they firmly believe the traditional idea, confucianism have been decaied for thousand years, yet could overcome the all obstacles of the peoples and it would be a only one way for them.

Deokcheon belonged in the third group and the master Ganjae was also in it. Because the ist. group could'nt maintain their strong oppositions and the 2.nd group also was in danger to indulge in declining for japanese scheme. Now although the 3rd. group have estimated as conservatism of a coward and weak Yooja, but their attitude was not feeble they did not avoid persccution and even in front of the the death they did not have fear any all. on the contrary Deokcheon himself had confidence the historical capacity of continuation of the traditional culture and idea, chiefly depended on confucianism as a form of new Confucianism.

Scholar Deokcheon wanted to congregate the all opinions in their school and to make the national idea and actions be reconcile or harmonical pacification by the justice (ruth and right), Jeoleuy(節義). It could be called as spiritual war against japan and the all corrupt intentions. As the master Gajae he has thought that Jeoleuy(righteous working) and Dohag(Confucian philosophy) are not different each other.

His attitude that want to maintain the traditional idea and have believe the historical capacity of Korea was so strong that he could continue the life of scholar to his end. The scholarship of Yooja is not only a study about nature and human, but also is a style of life itself. Study and life are not divided at any means for them. The unification of study and life was his chief opinion for restoration of national capacity to be independent. And then he wanted to come to an agreement between his school members. centralizing the idea of the member of his sect of school he could realize the dream ,he thought. Today his idea and attitude has significant value newly against he world trends going to be global.

 

 

Haian digital Review

MOON MOOL & IDEA 1

Haian Yuu Laboratory

2003. 12. 1

 

 

 

 

 

 

덕천문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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