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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사상연구

하이안자 2012. 8. 28. 04:31

 

 

연전에 필자가 발표한 글입니다

 

간재사상.hwp

 

 

 

 

 

 

논문요약

Haian Digital Review 6

문물과 사상 제6호

2003-12/12~1/12

 

 

 

 

 

 

 

간재 사상의 정체성 - 그 동아시아적 보편사유

 

 

艮齋田愚先生之東亞思想史中的正體性

The Essencial Thought 0f Grand Master GanJae Jeonoo

Stsnding in the World of East Asian History of Ideas

 

 

 

A Spontanious Approach of

The Text of The Essays and Epistles

 

 

하이안자 유 덕 조

 

 

 

 

 

 

 

 

 

 

1.서론

 

 

 

 

 

 

간재 전우(1841-1922) 선생은 율곡 학설을 위주로 학문을 모색했던 학자로서 한말에 걸출한 대표적 사문(師門)을 구축하였다. 한국에서 주자 성리학과 퇴계 율곡이라는 삼각의 사상적 역학구조를 구성하면서 동아시아 성리학의 최고수준이 난만하게 개화한 그 첨단적 전개 속에서 그의 학문적 성과가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은 조선 성리학의 계승발전을 물론이고 중국주자학의 미래적 방향을 제시하는 거시적 지표를 창출하였다는 데에 있다. 즉 동아시아 사상사의 과거와 미래를 통관하는 그의 학설적 커패시티는 조선의 이기론쟁을 결말지우고 해소하려는 학문적 역사적 순수함에서 발원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학문이 율곡학설과 퇴계의 학설을 연구하고 주자학을 성찰하면서 분파주의적 학풍을 개선하고 순수한 학문적 활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 과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주목의 대상은 경서에 대한 새로운 개안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자 율곡 퇴계가 그의 학문의 중요한 대상이었지만 그 궁극의 학적 기준은 경전이었다. 그의 당당하고 함찬 논리력의 정체성은 결국 경전해석을 새로히 하고 이를 통해서 일반 보편의 이성을 세워나아가면서 얻어졌고 그 궁극 목적은 민족사상과 문화로서 유학을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유학의 권위라든가 자긍심에 대한 깊은 확신과 존중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민족적 정체성을 학문을 통해 민족의 신성하고 지고한 역량으로서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완성하려는 절실한 멸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는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역사성의 균형된 추구가 그 주된 의지였음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은 단적으로 강렬한 역사주의 문화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문제는 그의 학문적 민족적 목표가 보편적 이성과 한국사상사의 역량을 통하여 이루졌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그 해결의 방식과 학문적 수행과 그 구체적 대응은 사념성 논리성을 따라서 이루어진 깊은 성찰이라는 성리학적 철리로서만 운용되었는가 아니면 사상사적 광대한 사유가 겸행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학의 역사적 본질성 혹은 본원성의 재확립이라는 동아사아 전통적 과제와 조선성리학의 높은 수준의 발전결과와 그 여파라고 하는 두가지 학문적 상황 속에서 어느 한 쪽에 무게를 두었는가 아니면 유학의 본래적 윈리주의에 충실하면서 그와 같은 제상황을 소화 해결 진척하였는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다.

 

공자이래 유학은 장기간에 걸쳐 형식와 유형화의 구조화의 길을 걸어왔고 그것은 주로 중국적 유학현상이었다. 그 형식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어난 송학(宋學)은 성리이기문제

(性理理氣問題)를 중심으로 하고 현실의 실경험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유학의 본래적 학문본질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으므로 학문적 부흥이라고 할 수도 있고 유학의 보편적 사상 가치를 모색하는 근대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의 발전은 조선 유학의 몫으로 회부되었던 것이 사상사적 사실이었으므로 조선유학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하며 차제에 유학의 진실한 역사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노력을 겸행하는 것이 현대 역사학의 기초적 과제일 것이다. 간재사상은 그 같은 역사적 의의 탐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간재 서간의 분석

 

 

 

 

1-1 上全齋先生書

 

 

 

제1서-기질과 본체론 일반

 

 

 

(1)제1서 원문 해석

 

 

 

1)上全齋先生書(戊辰:1868/28세-스승 全齋任憲晦에 올린 서간)

 

선생께서는 “氣質의 本體는 心에 該當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인데 지금 그대의 오류(病)는 氣質을 합치(合致:合就)하지 못하고 體用을 구분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제(愚)가 주의 깊게 생각해보았습니다만, 사람이 天으로부터 稟賦받은 形․氣․心․性이라는 4가지는 총괄하여 말하면 性이 心․氣․形의 本體이며 나머지 3가지는 그 作用으로 나온 것일 것입니다(用). 구분하여 논하면 이 4가지는 각자 또한 體用의 작용이 있어 渾然(渾淪-분별 없이 합일됨)히 섞이어 충막(冲漠:깊고 고요함)한 가운데서 條理가 分派되는 것이 <性의 體用>일 것입니다. 잠연(湛然-고요히 고임)히 응결하여 고요히 쉬고 측연(惻然-연민의 모습/애처로움을 느끼는 모습)히 반응하는 것이 <心의 體用>일 것입니다. 手足眼鼻(손 발 눈 코) 등이 잡고(執-手) 기울고(傾-足) 보고(瞬-眼) 숨쉬는(息-鼻) 것은 <形의 體用>일 것입니다. 고요하여 순전하게(醇然-純全)하지만 움직이어(動) 간혹 混雜되는 것이 <氣의 체용>일 것입니다.(천하 고금의 허다한 병통이 모두 이로부터 일어나서 생기게 된다) 기질이 고요히 있을 때 순전하여 혼잡됨이 없어야 그러함을 보게될(臆見然)뿐이며 고거(考据-생각에 의지함)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 우연히 孟子 夜氣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저 스스로의 견해와 합치된다고 느꼈습니다. 이로부터 이려(迆邐/迤邐-나아가)하여 볼 때 朱子가 이 意義를 논한 것이 증거삼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夜氣란 곧 夜間에 자라나는(息) 기질로서 청정한 것입니다. 평명(平明)한 이른 아침의 氣란 바로 이것이 밤을 자난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제가 살피기 어렵습니다.(기의 작용은 현인 이하에 이르러 말하면 실오가 없을 수 없으므로 움직임에 혹 혼잡됨이 있다고 한 것이다) 事物에 대한 旣往의 念慮가 이미 고요하여도(息) 또한 氣質이 청정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이 心의 本體가 드러날 수 있으므로 그 發現되지 않은 가운데서의 상황이 만일 그러하지 못하다면 비록 사물과 접촉하지 않았을지라도 思慮의 싹이 단지 다소 있으면 濁駁함이 있게 될 것이니 마치 바람이 처음 고요할 때에 淸凉한 기운이 오히려 있는 것과 같으며 물결이 처음 고요해질 때에도 渾然한 물이 이 당시에 청정하지는 않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대개 <未發之體>란 어느 경로를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인지요.?

 

 

 

 

2)上全齋先生(戊辰2)

 

未發의 시기에는 氣質이 淸粹하여 聖人과 凡人이 이미 같은(同一) 하고 氣象도 또한 동하며 分數도 또한 조금도 優劣이 없고 또한 조금도 加減이 없을 것입니다. (미발 이하의 31자는 나의 說이며 선생께서 이런 점에서는 결국 곧 옳다고 하셨던 것이므로 지적하여 문의드립니다.) 곧 이로 인해서 氣質의 本體가 영향을 주지(乞/줄기)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無不可乞) 밝은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2)제1서의 분석 - 기질론의 의의

 

 

기질론은 불가불 인간론일 것이다. 선생이 기질을 논한 것은 단지 철학적이거나 지적 의문에서만 촉발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의 학문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절실한 중심주제이며 경전 해석의 관건이었고 더욱이는 그가 살았던 당대의 구성원으로서 <지인(知人)>하여 <경세치인지도(經世治人之道)>를 강구하는 출발이며 바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적 물음의 언사는 단도직입적이고 절실하기 그지없으며 깊은 사려로 인한 강고한 믿음을 허보하고 있었고 이 믿음을 공고히 하려는 열망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전재선생의 가르침을 경건히 응시하되 그에 대한 엄중하고 예를 갖춘 반론을 불사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선생의 그 같은 학문적 열성과 진성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출발일 수 있을 것이다.

 

全齋先生의 학설비판으로 촉발된 이 서간은 氣質과 形氣가 本體와 相互作用하는 과정과 의미에 대한 성찰이다. 전재선생이 간재의 학설을 두고 <體用>을 구분해 보려는 기본 자제가 옳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러한 비판은 막연한 體用區分의 비판이라기보다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理氣論의 전개가 四端七情論을 중심으로 학파간에 방만한 分化를 거듭하고 있었고 이 분파주의적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깊은 것이었으므로 안이한 再反論이 허용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간재는 자신의 체용구분론이 기존의 분파주의적 학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분화된 학설을 통합하려는 것임을 밝히고 바로 그 통합적 이해를 위한 각고의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새로운 통합적 이해의 틀로서 1)形․氣․心․性을 구분하되 性이 본체이며 形․氣․心은 그 작용이라고 보았다. 2)形․氣․心․性의 각각의 단계에 다시 體用작용이 있다고 보았다. 즉 <性의 體用> <心의 體用> <氣의 體用> <形의 體用>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아마 그러한 생각은 周易의 <太極論> 가운데 <兩儀의 太極> <四象의 太極> <八卦의 太極> 같은 생각과 유사한 것이다.

 

그의 체용론은 소위 <中體西用>같은 고정적 의미이거나 이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哲理的인 것으로서 그 당시 체용론의 새로운 양태인 理氣論에 대한 도식적 이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평가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각단계에 체용설을 적용함으로서 체용론이 어떤 도그마를 위한 것이 아니고 格物致知 즉 窮理의 과정에서 하나의 과정과 방식으로 운용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체용론의 확대해석은 기와 리의 <존재론>과 <작용론>을 아울러 설정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의 학설의 유력한 기초가 될 수 있었고 기존의 학설적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중대한 방향을 열어 보인 것이라고 평가된다.

 

문제는 유학의 최종 목적일 <논의의 절실함>의 정도가 과연 증대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인데 우선 학파적 대립을 해소하려는 의지 자체가 학문적 절실함을 위한 것이었고 리와 기의 개별적 존재와 작용을 인정함으로서 존재와 작용의 상호 본질적 차이점을 이해라는 새로운 방향의 학문적 과제를 드러냄으로서 단순한 ‘理無爲’ ‘氣有爲’의 설명방식을 심화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人物之性同異論>도 역시 긍극적으로는 인간본질론으로서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대개 性善의 理致를 믿음으로서 삶과 역사의 희망을 확보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문제와 유리된 성선-성악논쟁은 급기야는 성악혼재설이나 절충설의 용인이라는 사상적 왜곡을 불러왔었다. 그 왜곡의 바탕은 결국 현세적 절실함을 결여한 학파적 학리 일변도의 공연한 전개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이기논쟁도 그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간재의 학설 역시 그와 같은 고식적 절충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의문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문제를 일언하지 않을 수 없다.

 

간재는 맹자의 夜氣章을 인용하여 平明한 기상이 청정하게 이루어진 후에 心의 본체가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그 전재선생이 강조하는 <未發之體>를 절실하게 체험해낼 수 있는 별다른 방도가 있는지를 역으로 물음으로서 서간을 맺고 있다. 간재의 절실한 소망도 바로 그 <本體>의 <作用>의 실질적 정황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기론의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본질의 문제를 거듭 제기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바로 그의 순수한 학문적 요구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그의 관점에서는 理의 작용이란 본질성을 벗어남을 규제하려는 自克의 범주에서 유용하며 기의 작용이란 생체로서의 인간이 역동하는 환경에 대응하면서 창조적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움의 가능성에 두어져 있었다. 그 새로움의 확장을 통하여 학설적인 무리한 대립은 자연히 소화되고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라고 평가된다. <밤의 고요할 때>와 <낮의 격동> 사이의 상호작용의 변화가 그의 절실한 관심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이 양론에서 動時에도 靜時에도 상호 淸濁이 어느 정도 공유된다고 한 생각은 그다운 절실한 사유의 출발이었다. 그는 전재의 비평과는 전연 달리 오히려 형식적 구분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실 공자의 <一以貫之>의식에 충실한 것으로서 확고한 정단성을 수립할 수 있는 것이며 유학의 기초적 주의점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상적 기초의 이해의 중요성을 두고두고 절감하게 된다.

 

 

 

 

 

제2서-중정 인의예지 동정설 일반

 

 

 

(1)제2서 원문해석

 

 

 

1)上全齋先生(壬申:1872/32세)

 

 

中正 仁義 動靜에 관한 학설은 앞의 학자들이 논한 내용이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용이하게 확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周濂溪의 본의에 의거해 보면 이 4가지는 곧 五行의 象 가운데 仁은 火陽이며 動的인 것입니다. 正義는 金水이며 陰며 靜的인 것입니다.(이것은 農巖의 설이다) 또한 中正이란 禮智인데 禮智라고 하지 않고 中正이라고 한 까닭은 아마 仁․義․禮․智란 性의 본체로서 말하려는 때문일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孟子의 언급과 같습니다. 中正이란 仁義를 두고 性이 流行하는 견지에서 말한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易의 元․亨․利․貞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行하는 것은 中하고(과 불급이 없는 것을 이름) 居處하는 것은(語類에서는 處를 居라고 하였는데 字意가 더욱 分曉하다.) 正하고(조금도 偏倚됨이 없는 것을 말함) 發揮하는 것은 仁하고(發育으로 말함) 裁量하는 것은 義로운(收斂으로 말함) 것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러한 圖解는 正義를 靜으로 생각하고 體로 생각한 것이며 中仁을 動이며 用으로 본 것이어서 濂溪이 본의가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大全에서는 張․呂 양씨에게 보낸 서간에서 곧 正을 中에 상대되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中이 중요시된 것이며 義가 仁에 配合된다고 하였으니 仁을 근본으로 본 것입니다. 또한 中과 仁이 모두 靜으로부터 遊離되지 않은 것이 正義라고 하였으니 모두 사물에 감응하여 변동하는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뒤에 그러한 설명이 만족스럽지 못함을 스스로 느끼고 변경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張敬夫에게 답하였던 것은 우리가 말하는 主靜之說이라는 것인데 이는 中正仁義의 動靜문제에 그 위치지움이 합당하지 못한 면이 있으므로 당연히 中을 正과 對答되는 것으로 본다면 正이 근본이며 仁義가 義와 配合되는 것으로 본다면 義가 바탕이 되는 것으로 보아야만 흠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定說일 것입니다.

 

退溪는 東萊書에 주를 달아 말하기를 이 서간과 敬夫에게 답한 글은 모두 中과 仁을 靜에 속한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圖說의 本註에서는 正義를 靜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正義가 靜인 것은 확실하므로 記論性答稿에서 이를 定論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中仁이 靜에 속한고 보는 경우에 대해서도 반드시 說明이 있어야만 더욱 의미가 상세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義理면에서 만족되는 경우를 생각할 때 이미 그와 같고, 여러 의논의 早晩(始末)을 생각해보아도 또한 이와 같으니 제가 向來(最近)로 생각한 글들이 모두 근거 없는 것은 아닐듯합니다. 延稿에 실린 栗谷 尤庵 두 선생의 말씀은 제가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만 退溪의 말씀은 매번 圖解와 大全의 내용이 같지 않아서 의혹을 품어온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동안 미루어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 비로소 대략 그 까닭을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그점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中과 仁이 靜한 處地가 體’라는 부분에서부터 말한다면 正과 義가 역동하는 경우가 곧 用이라 할 것입니다. 正과 義가 靜한 처지가 體라는 부분에서 말하면 中과 仁이 역동하는 경우가 곧 또한 用이라 할 것입니다. 대개 4가지가 모두 體用이 있으므로 서로서로 체용이 되는 것입니다. 양설이 비록 다르나 동일한 의미적 귀결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해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節要註에서 말한 것으로 中仁爲靜의 문제에는 별도의 다른 학설이 있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4가지 體用의 의의를 泛論한다면 이와 같은 설명에 역시 큰 잘못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설명이 周子의 의미와는 어긋나는 것이므로 朱先生은 이 두 설에서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렸습니다. 지금 退溪는 두 설이 같은 의미적 귀결을 이루는 면에 해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므로 剳疑에서도 말하기를 朱先生의 本意가 결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尤翁의 定論이 근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延公에게 답한 글 가운데 本註를 周子의 뜻과는 같지 않다고 한 것은 아마도 照檢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어서 그리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선생님의 尊意로는 어떠하신지요. (尤翁의 설은 朱子大全의 答南軒最後書에 보이고 剳疑는 農巖의 說이다. 本集의 雜議에 보인다)

 

 

 

 

2)上全齋先生(壬申2)

 

 

大學章句에 <無不到> <無不盡>의 양 구절을 두고 선생께서는 사물도 허다하고 알아야 할 것도 허다하므로 朱子는 <無不>이라는 두 어귀로 포괄하여 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臨時的-部分的學說(橫說)일 것입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비록 사물의 이치를 推尋한다고 하여도 충분히 다하는 경지에는 이를 수 없을 것이므로 理致의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가 없을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미 이치의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면 마음으로 안다는 것도 반드시 미진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궁리하여 物理를 지극히 하여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않음이 없게 하고자 하고 지식을 推極하여 그 아는 것이 다함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無不到> <無不盡>이라는 두 구절은 一端의 견지에 나아가 충분히 지극한 경지를 해득한 것을 곧 지칭하여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 구절을 朱子가 본래 단지 하나의 橫說로서 말한 것이라면 구 上句에서 반드시 <博窮物理>를 말했어야 하며 또한 반드시 <廣致知識>을 말한 이후에야 비로소 下句의 橫說과 서로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窮至>라고 하고 또한 <推極>이라고 하였으니 단지 이 4자만으로도 곧 이미 스스로의 一部 分數를 미루어서 全部의 의의를 깨달은 것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전의 견해를 바꾸어 새로운 의미를 따르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선생께서는 또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程子는 오늘 格物致知한다는 가르침을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여기의 無不到란 견고한 학설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살펴보면 드디어 一物에 止格하였을 때 어찌하여 곧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않음이 없게 하려한다고 한 것인가? 만약 나의 생각을 말한다면 비록 지극한 경지일지라도 <無不到>라고 하는 것인가?

 

 

 

 

3)上全齋先生(壬申3)

 

 

지난해에 저에게 말할 것이 있다는 이가 말하기를 우리는 世上 사람들을 번번히 流俗的이라고 부당하게 지목하는데 이 같은 사람은 아마 생각의 規模가 좁은 것이라서 거의 사람과의 관계를 끊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명에 대해 저는 거의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다시 생각해보니 도리어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儒者들은 마음을 영위함에 당연히 四海를 하나로 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도리어 混淆되는 일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만 일일이 변별(剖析)하려고만 하므로 한 등급이라도 汚濁하거나 卑下한 무리들에게는 더불어 和同하지 못합니다. 다만 處事하는데 道理가 있게 하고 甚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할 뿐입니다. 오직 이와 같이 한 후에야 비로소 儒者의 高明하고 廣大하며 磊落峻正한 道를 이룰 것이며 拕泥帶水하여 확고히 하나의 大規模의 경지를 포괄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 사이에 마음을 심고 기름에 무한한 병통이 없어질 것입니다. 孔孟이 鄕原을 논한 부분을 보면 그 彼此의 양자의 사이에 남은 여력이 없을 정도로 截然히 논하였습니다. 그것이 어찌 규모가 작고 식견과 도량이 얕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개 大規模 가운데 스스로 嚴重한 心法이 있으니 털끝만큼도 어긋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서로 유용한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학문을 논의함에 圓熟한 이가 많습니다만 일에 임하면 오직 서로 撤回합니다. 朱子도 오늘날의 학자들이 단지 공자를 배우되 곧 공자가 미복을 하고 宋을 지났다는 내용, 군주가 부르면 멍에 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내용, 佛肹이 공자를 불렀다는 내용 등 부류를 공부하고, 공부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으며 단지 그런 내용만 배우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그 글을 읽고 배를 잡고 抱腹絶倒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에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곧 사람을 한없이 惻隱하게 합니다. 委靡(시들고 쇠약함)하여 세속을 따라가는 자는 時宜를 따를 수 없고 오직 굳세어 特立해야만 時宜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은 伊川先生이 緊要하게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 속에 든 허다한 猥濫되고 雜된 識見을 모두 씻어내고 곧 이러한 의리를 살 속에 스미고 몸에 사무치게 하여 바뀌거나 변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까요? 이미 이런 일들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당할 것입니다. 이 같이 근심(忉怛)만 하고 있습니다. 이미 마음 속에 感興이 있으나 또한 선생님이 아니고는 어찌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마음 속에 혹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 여러 벗들을 차례로 헤아려보아도 결국은 함께 논의하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선생께 매번 이같이 陳達합니다. 참으로 선생께 번거로움을 드려 모독되어 미안스러움을 잘 압니다만 제 情을 또한 그칠 수가 없습니다. 혼자 생각하니 선생께서는 밝은 답을 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에 라고 한 부분은 申箕善을 말한 것이다.)

 

 

 

 

 

(2)제2서 분석-동정의 문제

 

 

 

<中正> <仁義動靜>의 문제 역시 高踏한 峻論의 하나로서 결국은 <格物致知>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는 仁義禮智의 상호작용이라는 예민한 문제를 사유한 것이다. 五行論을 적용한 논의의 경우는 仁義-禮智 구도를 仁義-中正 구도와 동일시하고 仁-中, 禮-正 이라는 의식을 도출한다. 이 경우 中이란 德目과 正이란 義理가 본질상 상당히 대립하게 되는데 이 때 仁은 生育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火혹은 木(陽)이라고 보고 動的인 것으로 생각하며 禮는 節制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金혹은 水의 陰으로 보고 靜的인 것으로 생각하게된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 朱子와 退溪가 모두 일견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動靜比定上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詳論한 것이다. 朱子의 경우는 中을 중요시하면서 義가 仁에 配合된다고 하여 仁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中과 仁이 모두 靜이라고 하고 이것이 正義라고 하였으니 상당한 혼선이 야기될 수 있었다. 부연하여 中이 正이 대답되는 경우는 正이 근본이고 仁義가 配合되는 경우는 義가 바탕이 된다고 하여 逆의 해석을 허용하였다. 간재는 앞의 경우는 仁義가 私物에 감응하여 변동하는 경우를 지적한 것이며 후자가 본질상의 定說이라고 단정하였다.

 

교육의 문제에 적용하면 이 문제의 의의를 잘 생각할 수 있다. 어진 가르침은 상대 학생을 역동적으로 배우게 할 수 있으므로 동적이므로 火인 것이며 정의로운 절제의 가르침은 상대의 동적 면모를 靜肅하게 하는데 효용을 발휘한다. 그런데 의로운 가르침일지라도 仁을 구현하려는 것이므로 결국은 仁義-動靜은 서로 配合되어야 한다는 當爲性을 지니고 있다. 始終의 線上에서는 서로 逆의 경우를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주자는 순수한 正中의 구현 문제에서는 正이 중심이며 仁義의 문제에서는 中이 중심이라고 한 것인데 이는 가르침의 경우는 仁義의 구체적 문제를 중요시하고 개별 인격에서의 이념의 구현에 있어서는 正中의 문제를 중시하여 전자의 경우 中이 중심이며 후자의 경우는 正이 중심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가르침은 仁義라는 動的인 목표를 중시하고 개별 인경의 수양에서는 正義를 중시하게 된다. 간재는 그 같은 방식으로 朱子의 논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退溪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의 東萊書註에서는 中과 仁이 靜的이라고 하였다. 圖說本註에서는 正義가 靜에 속한다고 하였다. 正義가 靜이라는 것은 정설이므로 당연하나 中仁이 靜에 속한다는 것은 一見 矛盾이다. 바로 이점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설명이 적용된다고 간재는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아도 大全의 견해와 서로 그 동정비정 자체가 다르다는 重且大한 問題가 發生한다는 점을 간재는 核心的으로 지적한다.

 

그 문재를 간재는 “<中仁이 靜한 경우(中仁之體)는 正義가 역동하여 用이 되고 正義가 靜한 경우(正義之體)는 中仁의 작용이 역동하여 用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해결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은 이미 周子의 의견과 다르기 때문에 原論中心의 정신에 따라서 朱子는 한 쪽의 경우를 <버렸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의 과정에서 農巖과 尤庵의 설을 원용하였다.

 

간재선생은 朱子 栗谷 退溪 尤庵 등의 학설을 읽으면서 그 상호간의 異同이 있을 경우 이를 擴大하여 異引하려하지 않았고 그들의 학자적 성심을 깊이 신뢰한 깊이를 가지고 최대한의 새로운 의미적 상황을 창조적으로 조성하고 부여함으로서 矛盾과 相異点을 解消-解決하면서 보다 새로운 절실함과 깊이를 구축하고 있다. 실로 순수하고 위대한 학문방법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선학들의 발론의 상황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와 신뢰를 보여줌으로써 학자의 본분을 다하고 그 학설의 혼돈을 해결함으로서 지식계의 혼란과 낭비를 막고자 하였다. 그가 어찌 명예욕으로 치열한 논변을 벌인 것이랴. 그러므로 또한 그가 어찌 후일에 나약한 의지로 학문에 숨어들려 하였으랴. 이미 높은 이상을 보였으니 죽음으로서도 그 공을 무산할 수 없거늘 시국의 비운 속에서 그 학문을 완성하려 한 것이 어찌 추호라도 비난받을 일이랴. 맹자의 말에도 의지가 지극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의 의지가 어찌 어느 衝天한 勇夫의 義氣에 비해 遜色있는 것이랴.

 

오늘의 관점에서 냉정히 바라볼 때 仁義․中正․體用說은 새로운 청신함을 줄 수 있지만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오히려 그 때문에 학문이 발전하는 것일 것이다.

 

끝으로 부언한 格物致知論의 이해상의 착오를 지적한 것은 그의 상밀한 학자적 태도를 보여준 경이로운 탐구의 모습이다. 그의 제반 논의가 그 같은 치열한 사유의 소산이었음을 유감없이 증거 할 만 하다.

 

 

 

 

 

 

제3서-‘’“고자출후‘ 장자불참 제자위사설 등 예제문제

 

 

 

 

(1)제3서 원문해석

 

 

 

1)上全齋先生(丙子:1876/36세)

 

 

전에 重菴의 서간에서 孤子도 역시 出後할 수 있고 長子는 父親을 계승하는 嫡子의 지위가 소멸하지 않으며 弟子가 스승을 위해 訟冤한다는 3가지 일로 크게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저의 비루하고 졸렬한 식견으로 어찌 논란에 참여하여 그 설을 평가하겠습니까?(上下其說乎) 그러나 이미 논의의 실마리가 제기되었고 또한 결국은 피하지 못할 면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 3가지 일을(三事) 일일이 근원적인 문제로부터 다루고 설명하여 나아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대개 孤子가 出後하지 못하는 뜻(義)은 스스로 天理人倫가운데 지극한 것이며 백 세대를 지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을 두지 못할 일입니다. 비록 人君일지라도 그 뜻을 빼앗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은 이 같지 그 처음부터 이해하려하지 않고 단지 君上이 듣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 논란이 話頭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이 다시는 언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논의를 어찌 다시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長子服制의 說에 이르러도 역시 後世儒者들의 脚註下段을 따라 설명하고 전연 經傳의 本文에 입각하는 방향으로는 강론한 적이 없었습니다. 農翁이 탄식하신 대로 “끝내 正義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형편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 인용된 續解에서 풀이한 <不繼祖之說>은 본래 喪服傳의 鄭氏註입니다.그 글의 처음과 끝까지 350자 논설은 어느 한 자도 <禰嫡亦服長子斬>을 증명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이를 원용하여 설을 세웠으니 역시 밝을 수가 없습니다. <爲師訟寃論>은 그 처음 3설이 모두 오늘날 논쟁하는 내용과는 같지 않습니다. 다만 그 중에 ”스승이란 道의 소재처이다“라고 한 데서부터 ”어찌 개괄하여 논변하지 않으랴“고 한 데까지에는 충분한 道理가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그 설이 참으로 옳습니다. 다만 저의 소견을 말한다면 이는 비단 제자가 스승에게 그러할 뿐 만 아니라 모든 同朝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역시 스승을 위하여 訟寃한다는 것을 별도로 하나의 주제로 하는 것을 옳지 못합니다. 또한 그 말은 在朝와 在野를 막론하고 한마디로 정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和靖說을 아꼈었습니다. 程氏의 학설을 배운 某氏는 斥語를 가지고 得體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분은 도리어 도리를 밝혀 上心을 밝게 하려 하지 않고 尹公에게 허물을 돌리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上의 마음을 만약 돌릴 수 있다면 단지 이 한마디 말도 역시 밝히어 깨닫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 만 마디의 말을 소비하고서도 일에 보탬이 되지 못할 것이며 다만 치욕을 얻을 뿐일 것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린다면 和靖은 당시에 부름을 받고 있지 않았다면 이 말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혹 便宜를 엿본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밝은 가르침을 내려주시기를 바라오며 金丈의 書信과 저의 答을 말씀드리고자 아울러 올립니다. 저의 論辨 가운데 詞理가 부족한 곳이 있으면 繩削(바로잡아 없앰)하사 경망하고 흠이 없게 해주신다면 천만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2)上全齋先生(丙子2)

 

 

저는 최근에 儒學과 佛敎의 차이를 우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바로 우리는 理를 위주로 하고 저들은 氣를 위주로 할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요즘에 일부의 士友들이 비록 理를 위주로 설명하고 있으나 곧 知覺運動하는 것을 지목하여 理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主本되어야 할 것들이 끝내 刑而下의 경지를 벗어날 수 없고 그리고 刑而下란 곧 불교와 같은 의견일 것입니다. 가르침을 주시기를 엎드려 청합니다.

 

 

 

 

 

(2)제3서 분석 - 예제 논의의 문제

 

 

 

군주의 禮制와 연관된 이 서간은 1)첫째 君王의 강제적 영향력이 바른 禮說의 수행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2)둘째 학자들이 禮制의 근본적 문제를 도외시하여 유교적 윤리의 근본 도리를 유추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통탄하였고 3)셋째 논자들이 文獻的 脚註를 위주로 논하고 經傳의 본문에 의한 심찰을 하지 않고 있다는 本末顚倒의 문제를 논하였으며 4)넷째 주석을 인용함에도 그 본의를 왜곡하여 마음대로 원용하여 自說을 세우려 한 학자적 양식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5)아울러 禮說論爭이 일어난 실제 상황을 도외시하여 恣意的논의가 일어나고 있고 排斥의 선입견을 가지고 논하고 있다는 논의상의 無理를 痛打하였다.

 

禮說을 바로잡고자 논의를 전개하였으나 실은 禮自體의 是非를 가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기 보다는 학자적 자세를 보다 더 문제삼고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특히 경전의 본문을 중시하지 않고 각주의 설을 인용하고 또 자의적으로 援用하고 있다는 치명적 문제를 지적하려는 것이 그 본의일 것이다. 아울러 道理로 대표되는 기초적 當爲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 것도 오히려 학문하는 전반적 자세와 연관된 주장이라는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된다.

 

일반적으로 학설왜곡의 주된 경로가 대개는 본말을 전도하거나 발론의 상황적 이해상의 미스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고 이것이 학설과 인물의 분파를 강화 조장한다고 본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군왕일지라도 學的이어야 한다는 큰 목소리에 있으며 非學問的 分派主義 排斥主義는 排擊되어야한다는 遠慮를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제2서는 학문적 완숙기로 접어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는데 불교적 사유와 유교적 사유를 비교하고자 하는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유교는 理를 위주로 하고 있고 불교는 氣를 위주로 하고 있다는 이해는 退․栗이 학설적 차이에 비추어 기묘한 감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는 학파적 분리의식보다는 통일적 이해를 도모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退理․栗氣의 분파적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율곡의 학설이 결코 氣의 독존적 강조에 있지 않다는 審察을 그의 학문 입장에 비추어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주목해야할 부분일 것이다.

 

 

 

 

 

 

1-2 上肅齋趙丈(秉悳:戊辰 1880/40세)

 

 

 

 

(1)원문해석

 

 

 

老洲先生이 말하기를 中庸章句에서 ‘大本은 天命의 性이다’라고 하였는데 ‘<天命의 性>이 이미 <人物과 통한다는 說>’은 整菴이 말하는 <未發한 가운데 모든 事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설명이 매우 명쾌한 것 같지만 실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감히 門下에 여쭈오니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 말씀 주시기를 바라오며 저 혼자서 의문을 품어보았습니다. 性과 中은 다소 구별이 있는 듯하오며 하나로 일괄하여 논하기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未發之中>을 논한 淵翁의 설에 지극하다고 한 부분과 지극하지 못하다고 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혼자 의문스러운 것은 이미 中이라고 하였다면 어찌 지극하지 못함이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최근에 老洲의 雜識을 보니 대개 三淵의 <未發說>을 “<前人이 밝히지 못하는 것을 밝힌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農翁의 四七論과 竝稱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어떤 뜻으로 그러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淵翁이 渼湖를 설명한 부분>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2)분석-天命之性의 문제

 

 

천명지성을 논하는 것은 인간의 心性作用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사람의 삶에서 이상 실현의 가능성과 현재적 희망의 소재를 적실하게 발견하기 위한 깊숙한 모색의 과정 한 모색이다. 유자들은 당연히 그 이전에 이미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일상 가운데서 살아있는 생각과 믿음 그리고 처신으로서 체현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考究가 필수적이다. 비록 空理空談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그러한 사유는 가능하다면 더 치밀하고 더 진지할수록 좋을 것이다. 간재 선생이 선학들의 문집을 읽고 성리문제에 깊이 진입하면서 당연히 의문이 없을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특히 선학들 사이에서 <定說>로 통하는 문제들에 대해 위와 같이 異議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그의 기본적 태도가 보다 切實함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는 후일 그의 학문적 성취를 예견하게 하는 중요한 서간일 것이다.

 

 

 

 

 

 

1-3上苟菴申丈(應朝)

 

 

 

 

(1)원문해석

 

 

 

1)제1서(癸巳 1893/52세)

 

 

제가 門下에 절실하게 仰請할 問議 말씀이 있어 이같이 감히 분수 넘치는 글을 올립니다. 저 (1)변방의 오랑캐가 우리 문명국을 어지럽히어 그 재앙이 천하에 이르고 있습니다. 王者가 당연히 엄히 막아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2)道를 무시하고 민중을 迷惑하여 그 해가 백성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朝廷에서는 마땅히 法을 시행하여 禁絶해야 할 것입니다. (3)異端이 진리를 어지럽혀 그 해가 우리 性理道術에 이르고 있습니다. 儒學師門에서 당연히 學說을 세워 분별해 밝혀야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는 비록 그 책임 소재가 각각 달리 있겠습니다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형세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君相이 혹 그 職務를 이행할 수 없을 경우 儒學者들이 부득이하게 말과 글로 邪道와 亂政은 반드시 誅滅해야한다는 法을 밝히어 천명하고 오랑캐들이 문명국에 교활한 짓을 할 경우 응징해야만 한다는 懲戒를 엄히 드러내어 이 백성들이 鬼魅나 犬羊 같은 部類가 되는데 이르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天地의 仁을 體現하고 聖賢의 義를 지키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이 아래는 글을 소실하였음.)

 

 

 

2)제2서(丁酉 1897/56세)

 

 

제가 따르지 못할 박한 자질로 門庭에 누를 끼쳐 드린 지 이제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父師께서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외롭고 천한 저는 선생님께 일심으로 우러르고 숭앙하는 마음을 강물처럼 깊이 하지 않았다면 어느 날 어느 밤인들 그 슬픔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근년 나라가 變亂을 만나 腐心 切齒하고 끓는 피로 눈물을 마시며 고향을 떠나 자취를 감추고 호수와 산 속에 몸을 감추고 살았으므로 철따라 문안 말씀을 例前처럼 올리지 못하였으니 스스로 門下에 죄를 얻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바다 같으신 도량으로 감싸주시지 않으실 리가 없다고 믿습니다. 문득 宋毅燮이 먼저 못난 저에게 問安한 글을 보니 평생 왕래하며 講論했던 일들이 갖추어 쓰여있었습니다. 그 뜻이 지극히 정성스러워 이에 저는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의지를 더 굳게 하고 채찍질하며 선생님의 깊은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원대함을 기약하려는 생각을 감히 잠시도 끊지 못합니다. 지금 또한 바닷가에 전전하는 客으로서 骨肉이 離散하고 신세가 외롭소 쓸쓸합니다만 道術이 장치 망할 것을 생각하고 나라 형편이 어렵고 위급함을 슬퍼하며 衰殘해버린 산수의 사이에서 외로운 그림자 홀로 끌고 가면서 저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다가는 이어서 통곡을 하고 맙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선생께서는 오랜 世臣이시고 斯文의 元老匠人이시니 제 말씀 들으시고 응당 저와 같이 슬퍼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가을 서늘해질 때를 기다려 전에 다 못한 큰 포부와 道言을 말씀드리고 가르침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神聖하신 尊體, 편안하시도록 寢膳 精調하시기를 저는 오직 간절히 빌 뿐입니다.

 

 

 

 

(2)음미 - 國家的 悲運속에 흐르는 師弟의 情談이 의미하는 것

 

 

 

이 서간은 한말의 시운을 1)국제정세적인 광역의 대응 2)내정적인 대응 3)학술 사상적인 대응이라는 3분야로 나누어 성찰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책임의 분야가 다르다는 이해는 자신이 속한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학술 사상적 전통의 수호가 그 본분인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바로 1)王者 2)朝廷 3)儒門으로 시대를 열어갈 그 책무의 주체를 설정하고 있었고 이것은 그의 기본 입장으로서 굳게 견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君相이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유학자들이 정도를 밝혀야한다고 한데서 보면 스스로 무거운 자존의식과 책임의식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그의 治亂論은 그러나 천지의 仁을 실현하고 성현의 義를 지키는 범주에서 생각되었다. 위와 같은 생각은 전통정신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가능한 것이었으며 사상적인 면에서 높은 개안으로 뒷받침된 것이었다. 이른바 한말의 선각자로 불리우는 개혁주의 인사들의 사상과는 본질적으로 극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이 근대적인 것들의 힘과 위력을 경이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그시절에 그리고 나라의 살길이 바로 그러한 열강의 경제력과 기술 및 제도와 힘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로 여길 수밖에 없던 그 시기를 호흡하면서도 가치관과 전통적 믿음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개혁의 필요성은 사실 많은 부분이 내정(內政)에 두어져야 할 것이었고 바로잡힌 내정을 기초로 새로운 내외 정세에 대응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음에 틀림 없다.

 

동아시아 역사상 新戰術과 新武器 혹은 新戰法 등의 힘에 의해 많은 왕조들이 무너졌고 또 새 왕조가 나타났다. 그 동아시아 왕조교대의 역사는 아직 정확하게 그 본질패턴이 연구사적으로 정립되지 못하였으므로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역사상의 수많은 왕조교체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정신과 문명은 크게 훼손된 적은 없었다. 예를 들어 왕조흥망사의 요소는 1)사회혼란과 국민생활의 모순의 발생 진전 2)국제적 환경의 격변 3)정치상의 혼란 등 적어도 3가지 이상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환언하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요소의 발전의 과정에서 나타난 모순현상이 역사변동의 중심요인이었다. 그 같은 역사요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상사와 문명사의 궤도와 본질이 지속되었던 것은 바로 유교라는 보편사상의 힘과 권능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전통의 전면적 부정을 주로 의미한 근대적 개혁은 어쩔 수 없이 <반역사적(反歷史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근대 이래의 개혁의 주장이란 거개가 반역사적이라는 의외의 본질성을 피할 수 없다. 자기적 전통의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서구적 侵侮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었고 이것은 자연히 역사적 자기비하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자기비하가 없이 당당한 정신으로 서구화를 추구할 수 있었다면 근대화 자체의 도정이 다소 달랐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근대화의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처럼 삶의 중심과 가치와 사상의 주축이 탈자기화(脫自己化)되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이런 현상을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적극 용인해야하는 것인지 깊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시점에서 근대화의 도정을 살펴볼 때 우리는 일본의 침략이라는 힘의 간섭을 통하여 정상적 자기주체적 근대화를 추구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 전통적 틀에 있어 비교적 박약하였던 일본은 쉽게 서구적 가치에 매몰되었고 그들의 강요나 영향을 받은 韓末에는 서구적 가치에 저항한 지식인들은 전근대적인 것으로 왜곡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대륙침략이란 몽고족의 정복활동이나 만주족의 침임 혹은 그 이전 五胡의 침입에 비하면 적어도 동아시아 문화적 변방세력이 일으킨 문화지대에 대한 역사 구조적 침공으로서는 많이 다른 특질을 드러낸다. 그 최대의 차이는 일본의 침략의 본질적 특징은 서구의 지식과 기술 사상을 등에 업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동아시아 문명지대 침범은 서구적 문화와 가치가 왜곡된 형태로 동아시아를 침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이나 중국점유는 그러나 반대로 서구세력이 제3세계를 점령한 사실과는 엄정한 차이를 또한 드러낸다. 서구제국주의가 침범한 제3세계는 오랜 역사적 구조상 1)세련된 사회제도 2)높은 이상구현의 역사와 사상 3)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역동적인 역사를 창출한 광역의 문명권의 영위라고 하는 높은 수준의 문명권적 영위의 성숙성이 비교적 미약하게 영위되었던 지대였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서구가 발전시킨 모든 제도와 사상의 가치를 능가하는 발전을 지속해온 권역으로서 <도저히 비하될 수 없는> 문화적 격조를 가진 권역이었다는 점에서 그 본질적 상위점을 발견하게 된다. 서구제국주의는 그 점을 지속적으로 왜곡해왔었다. 이제 이러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위배는 장래에는 그들에게도 뼈아픈 반성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단 그것은 우리 한국-중국을 중심한 동아시아 중심국들이 자존심을 회복하는 당당함의 역사가 다시 열릴 때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자기 전통에 대한 신념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극히 중요하며 다시 확고한 삶의 주축이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간재의 믿음>은 지금도 그 가치를 그대로 가지고 있고 더욱더 절실하게 그 비중이 높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腐心 切齒하고 끓는 피로 눈물을 마시며 고향을 떠나 자취를 감추고 호수와 산 속에 몸을 감추고 살았으므로......>(제2서)에서 볼 수 있는 극단의 우환의식은 그 같은 시국관에 따라서 가지게 된 것이며 적어도 당시로서도 독특한 對比를 드러내는 出處觀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독특함의 실체로서 그 은둔의 자세 역시 전통적인 치세와 난세를 구분하여 대응하는 방식에 따른 것이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의 선택은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그러나 그대로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것이 독특한 것이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는 있겠다. 즉 국가지성을 주도해온 유교지식인의 일부에서는 서구사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세계질서나 국제환경에 일방적으로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 사회 정치를 지향하면서 당시의 심각한 문제들을 풀고 대응하려 하였다. 말하자면 선구적 근대화론자들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곧 <근대화>라는 움직임은 당연한 흐름이었으나 그 움직임이 전통적 인맥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하고 새로운 세력화의 길을 갔던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전통과 보수논쟁과 같은 틀을 형성하면서 서구화된 운동을 지향하였으므로 전통의 분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장기적으로 야기하였다고 생각된다.

 

 

 

1)반일 반외세 운동의 상당한 타협성의 노정

2)전통 순수 유교지성의 점진적 소외와 약화

3)정부와 유림간의 유대의 약화 움직임 진행

4)절대적 국민사상인 유교의 위상격하 상황구조의 조성

5)서구문화와 사상의 유행과 가치관의 역전작용 인기

6)전반적 정치 사회의 換骨運動의 일어남

7)탈전통적 움직임의 최종적 指向과 推動

8)유교적 정서의 강인한 지속으로 서구지성과 괴리전선 형성

9)반유교적 제도문화의 유입 성장

10)유교적 외연의 전반적 붕괴 진행

11)유교적 문화 사상의 반성적 沈潛 作用 전개

12)보편사상으로 재 탄생되어야 할 유교과제의 등장

13)유교적 세계관의 창조적 수립 요구의 절실화

 

 

 

등이 그것이다. 그 긴 끝에 오늘의 세계화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화가 민족적 개성의 경시라는 특질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그런 배경에서 보면 간재의 전통고수의지는 선명히 드러나는 오늘의 의미 문맥에서는 깅렬한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출처관을 보수주의라고 부르려한다면 이는 바로 역으로 자신의 역사를 격하하는 입장에 서있는 것이 되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보수 개혁이란 이해방식은 깊은 철학적 자아성찰의 결론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오로지 결기에 찬 민족주의적 행동만으로 문화와 사상과 전통이 지켜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실 정명론적 어의상으로는 <개혁>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음미와 평가를 통한 <서구적인 것의 수용 소화>가 필요한 것일 것이다. 자신이 언제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기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 가운데에 타자를 수용하여 살찌워야한다고 보는 것이다. 단적으로는 모든 행동적 선택의 중심에 전통적 사상이 주축으로서 작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와 같은 사상과 행동은 오히려 자기애이며 문명애이며 민족애의 깊숙하고 진정한 발로일 것이다. 한 시대의 지성을 이끌만한 선현의 역사적 의미는 어떤 경우도 격하 축소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위에 한국근대사상의 결기(決氣)의 역사 주체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탐구해야 할 것이다.

 

 

1-4上溪雲金丈(洛鉉 甲申 1884년 44세)

 

 

 

 

(1)제1서

 

 

 

崔君이 기록한 敦論과 서간을 열어보니 다행스러워 경건히 읽었습니다. 제가 항시 말하였던 것은 王者가 선비를 선출할 때는 바로 실제로 쓰기 위한 것인데 本朝의 抄選은 虛名을 따름을 면하지 못하여 無實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위아래 200년간 被選된 諸賢들은 虛禮를 위하여 스스로 출사하기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가 묻기를 伊川은 3번 사양한 후에 微職에 나아갔는데 牛溪는 어째서 끝내 나아가지 않았는가 하였습니다. 栗翁이 말씀하기를 伊川은 당시에 登用에 應하려는 뜻이 있어 벼슬에 나아갔고 牛溪는 그럴 뜻이 없어 부름을 공연한 것으로 보았으므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宣祖 때에 牛溪를 위하여 처음 經筵官을 두었는데도 栗翁께서 오히려 이런 말씀을 하였으니 하물며 그 후대에야 말할 것 있겠습니까. 예전에 만약 조정에서 맞이할 때 공경을 다하여 예를 행하고 나라를 맡기어 정권을 준다면 선배 제현들이 역시 반드시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였을 것이니: 道術이 밝혀지지 못하고 기강이 떨치지 못하며 풍속이 바르지 못하고 이웃나라가 업신여기며(陵轢) 민심이 풀리고 흩어짐이 결코 이런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슬프게도 조정에 있는 諸公들이 이와 같은 일을 군주 곁에서 경해(謦欬-기침소리 혹은 面謁하여 대화하는 소리)하여 말씀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항상 慨歎하고 한(惌)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선생님(函丈)께서 上奏하신 글을 보니 참으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저는 과연 主上께서 이 경계의 말씀을 깨달아 몸소 실천하여 明賢을 찾아가시고 뜻을 모아 吉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 국가가 망할 것인지 아닌지 기쁜 일이 있을지 어떨지를 모르겠습니다. 구구한 몸으로 책임 없는 초야의 사람이 다행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제 생각을 書啓에 밝힌 것은 아마 疏章의 鄭重함처럼 상세히 서술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다만 諭召만 있고 職名이 없어 역시 書啓로 修理해야할 것이며 辭疏에 해당할 수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살펴보니 지금의 國勢로는 도리어 당연히 賢者를 渴求하여 맡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程子의 養賢剳子처럼 길러내야 한다는 것을 불가불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性․心과 體․用은 動․靜, 寂․感으로 분별할 것이 아니며 곧 理․氣, 本․末로써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이 未發하여 치우치지 않고(無偏) 이미 발하여(已發) 어긋남이 없는 것(無乖)은 모두 마음의 오묘한 작용이며 未發 已發의 경우에 無偏 無乖한 것은 또한 性의 本體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이 어긋남은 없겠는지요) 上蔡의 설 같은 경우는 크게 거친 부분(太麤)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는 것 등 작용으로 드러난 것일지라도 참으로 역시 마음입니다. 그러나 다만 이것만으로 마음을 논한다면(論心) 心이란 것이 도리어 치우치고(偏側) 주정(周正-굳고 바름)하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性이 당연히 視․聽․擧․運의 근본(本)이 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단지 이것만으로 性을 말한다면 性이 動靜․寂感하는 所以然의 오묘함(妙)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朱子가 그르다 한 것이 옳을 것입니다.

 

 

 

 

 

(2)答溪雲金丈

 

 

 

渼湖說을 보여주시고 비유하신 것은 다시 어떻게 究明하고 勘案해야 할 것인가요. 간절히 말씀 듣기를 원합니다. 저는 그 말씀을 상세히 살펴보고 각각 한결같은 그 性을 本然之性으로 보고 圖說의 大旨를 밝힌다면 단지 이 性의 本善을 발휘하는 것이 되므로 이 뜻이 참으로 역시 善한 것이긴 합니다. 다만 朱先生이 이미 本註에서 그 기질을 따라서 稟賦 받은 것이 같지 않게 된다하여 각각 그 性이 한결같다는 것을 단언하였고 大全과 語類의 여러 설들이 또한 각각 氣質之性으로 이 구절을 논하였습니다. 이점은 당연히 자세히 성세함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개는 氣가 구별되고(殊) 性이 다른(異) 것을 氣質之性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질이 다르다는 것은 곧 濁駁함을 겸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나무가 부드럽고 쇠가 강한 것을 지적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性의 差異란 곧 邪惡함을 포함하여 말한 것이 아니며 仁의 溫和함과 義의 斷乎함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같이 생각하면 비록 이것을 기질지성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어찌 全篇의 性善의 큰 뜻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매양 말하듯이 각각 일개화(一個化)된 性理的作用(各一其性)을 깨닫게 되는 데서 보아 이를 기질이라하는데 참으로 本然이라고 해도 역시 통할 것입니다. 대개 쇠와 나무가 품성이 다름을 따라서 말하면 이를 기질지성이라고 하나 그 본연의 理를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仁義가 同善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本然이라 할 수 있고 그대로(依舊) 이는 一偏의 理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연전에 벗 宋炳華에게 답한 서신에서 참람되지만 각각 일개화(一個化)된 性理的作用(各一其性)은 分殊化된 本然이라고 하였었습니다. (筆者註:이는 性質이라고 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氣質에 따라서 품성(所稟)이 다른 것이 소위 分殊일 것입니다. 所稟이 비록 다르나 性理는 모두 善한 것이 소위 本然입니다. 만약 스스로를 깨달음이 없는(自昧) 자가 보다면 本然과 氣質은 양쪽 모두 막히게 될 것입니다. 대개 기질지성이라고 하면 거기에 악이 있는 것인가를 의심하고 본연지성이라고 하면 곧 純全本體라고 간주하여 말하니 어찌 사람의 氣를 어둡게(悶)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義를 일으키지 못하는 仁이나 仁을 일으키지 못하는 義란 質의 不同함에 따라서 分殊한 것으로서 附屬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作義할 수 없고 作仁할 수 없어도 그 義와 그 仁은 有善無惡하여 本然에 配屬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이 서로 통하는 脈絡을 활발하게 열고 상당한 超脫 灑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答溪雲金丈(丙戌 1886년 46세)

 

 

 

사람이 태어나면서 성정이 고요하다는 以上의 朱子(1130-1200)說에 대한 해설로는 참으로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明道(程顥)의 이 설은 본래 首句의 의미를 스스로 해석한 것이니 곧 또한 먼저 首句는 生未生을 설명한 것지 아니면 發未發을 설명한 것인가를 확정한 후에 그 확정된 것을 가지고 그 解釋語를 살펴야 할 것인데 곧 朱子의 해석 중에 어느 것이 定論인지를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陳安卿은 未生을 未感으로 바꾸어 明道의 論性說과 일치시키려고 하였는데 朱子는 이에 답하여 말하기를 이 설은 노력을 들였으나 단지 합치되게 하려고만 하여 전의 내용 그대로를 다시 생각한 것이다. 라고 하였고 또한 語類에서도 論性說을 구주(舊做-舊慣대로 논한 것)라고 하였을 뿐이니 지금 이에 관한 黃商伯의 서신이 어찌 舊說이 아닌지를 알겠습니까. 가르침을 받들고 싶습니다. 商伯은 朱子의 喪에 始終 장례를 주관하였다는 데서 보면 이 서신이 晩年의 것임이 확정적일 것입니다. 저의 얕은 소견으로는 도리어 黃氏가 비록 그러하긴 하나 이 서간문이 어느 해의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語類로 생각해보면 董銖錄에서 生未生으로 해설한 것이 丙辰年(1196년)이후입니다. 이는 67세에 이후에 논의한 것이 됩니다. 어찌 黃書의 연월이 상세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晩年에 定論한 것이라고 하고 董錄을 舊說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Haian Digital Review 6

Moon Mool & Idea 2003-6th

문물과 사상 제6호

2003-12/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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