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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김창협의 인물성론과 낙학 |
農巖
金昌協의 人物性論과 洛學 1.문제 제기 18세기 조선조 성리학계의 주요 관심사였던 人物性同異論辨에서 同論의 견해를 견지했던 학자들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遂庵 權尙夏(1641-1721) 문하의 동론이 그 하나이고 三淵 金昌翕(1653-1722), 杞園 魚有鳳(1672-1717), 陶庵 李縡(1680-1746), 黎湖 朴弼周(1665-1748) 등과 같은 洛下, 즉 서울 및 서울 근교의 동론자들이 다른 하나이다. 이 낙하의 학맥을 洛學이라는 말로 통칭할 수 있는데, 낙학의 학자들은 대체로 서인, 특히 노론 계열에 속하기 때문에 학통으로 보자면 크게 율곡 학파의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절충파로 분류되는 것처럼 이들의 학문적 경향은 尤庵 宋時烈(1607-1689), 遂庵 權尙夏, 南塘 韓元震(1682-1727)으로 이어지는 호서 지방의 학자들과는 달랐다. ) 18세기 이래의 인물성동이논쟁은 잘 알려진 대로 우암의 적전 제자인 수암의 문하에서 발단이 되었다. 노론의 핵심이자 교조적 주자주의자였던 우암의 주자학이라는 것은 율곡이 이해한 주자학이었다. 퇴계의 이론이 맹자의 성선설의 본지를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아 理를 절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반면에, 율곡의 이론은 理,기,사단,칠정,인심,도심 등과 같은 기본 범주 및 개념을 명료화함으로써 그 이론 체계의 정합성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만큼 율곡의 이론 체계는 자기 완결적이었고, 그러했던 만큼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체계화는 율곡의 이론을 통해서 일단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제자인 沙溪 金長生(1548-1631)의 예학은 그 실천적 강령의 완성이었다. 따라서 율곡과 사계를 계승한 우암이 탄력성을 잃고 이론적.실천적 교조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반이 17세기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남당과 巍巖 李柬(1677-1737)이 각기 인물성의 다름과 같음을 가지고 날카롭게 대립했지만, 이들의 대립은 어디까지나 율곡 철학, 특히 이통기국(理通氣局)에 대한 해석의 차원이었다. 그러므로 외암, 冠峯 玄尙璧과 같은 수암 문하의 동론자들이 호서 지방의 일반적인 학문 경향과는 달리 동론을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곡의 이론 체계를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논쟁이 비록 율곡의 이론을 더욱 엄밀하게 천착해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율곡 철학의 이론틀 안에서였다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栗谷 李珥(1536-1584)의 이론틀을 견지하면서도 율곡의 이론에 배타적으로 집착한 것이 아니라 율곡을 비판적으로 계승, 극복하면서 아울러 退溪 李滉(1501-1570)의 학설을 수용했던 것이다. 낙학은 農巖 金昌協(1651-1708)에서 근원한다. ) 장지연, 『조선유교연원』, 단국대학교출판부, 1979, 107면. 현상윤, 『조선유학사』, 현음사, 1982, 277면. 18세기 이후 낙학을 이끌어 가던 많은 학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연은 그의 동생이었으며, 기원, 여호 등은 농암, 창흡 두 형제의 문하를 드나들었고, 도암 역시 낙학의 학문적 풍토에서 그의 학문을 성숙시켜 나갔다. 도암 문하에서 배웠던 渼湖 金元行(1702-1772)은 농암의 양손자로서 그의 문하에서는 이齋 黃胤錫(1719-1791), 近齋 朴胤源(1734-1799), 寧齋 吳允常 등이 배출되었다. 나아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활약했던 梅山 洪直弼(1776-1852)은 근재의 문인이며, 老洲 吳熙常(1763-1833)은 그의 형인 영재에게 배웠다. 그리고 臺山 金邁淳(1776-1840)은 삼연의 현손자이다. 이렇게 보자면 18세기 이후 낙학의 학맥은 농암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될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농암의 인물성론과 낙학의 인물성동론의 관계가 그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낙학의 인물성론은 동론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농암은 낙학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인물성이론자이다. ) 배종호, 『한국유학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 205면과 『한국유학자료집성』상,연세대학교출판부, 1980, 754면.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 384면, 397면. 유명종, 『조선후기성리학』, 이문출판사, 1988, 147면. 만일 그러하다면 적어도 낙학의 인물성동론만큼은 농암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낙학의 많은 학자들이 그들 이론의 근원을 농암으로 소급시키고 있듯이 농암의 이론은 낙학의 뿌리이며, 그 낙학의 이론적 핵심에는 인물성동론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농암의 인물성론은 단순히 인물성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분명 동론의 요소 내지는 동론의 경향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낙학이 농암에게서 나왔다는 기본 전제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이 논문의 관심은 농암을 이론이나 동론 어느 한 편에 귀속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낙학의 동론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농암 인물성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것이 이 논문의 과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농암의 인물성론을 분석하고, 나아가 그러한 농암의 견해가 그 이후 낙학의 인물성동론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살피려 한다. 2.농암 인물성론의 내용 분석 (1) 「上尤齋中庸疑義問目」 농암이 인물성동이의 문제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것은 「상우재중용의의문목」으로서, 『중용』 1장의 주희 주에 대한 의문을 우암 ) 尤齊는 우암 송시열의 또 다른 호이다. 에게 문의한 글이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각기 부여받은 理를 얻어서 健順 五常의 덕으로 삼으니 이른바 성이다 ) 『經書』, 「중용」,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3, 769:아래. 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라는 『중용』 1장의 朱熹 주는 인물성동론의 주요한 논거였다. 그런데 농암은 이것 (『중용』 1장의 주희 주)은 만물이 생겨남에 각기 五性을 온전히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 ) 김창협, <<農巖全集>>, 권12, <상우재중용의의문목>, 曺龍承 영인본, 1976, 249:아래. 第一章註: 人物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此謂萬物之生, 各全五性, 便與人無別耶? 라고 우암에게 질의를 하면서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답을 한다. 그 이유는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하나의 理를 똑같이 얻어서 생겨나지만, 그 理가 이미 성을 이루게 되면 치우침(偏)과 온전함(全)의 차이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곳. 抑恐有不然者. 人物之生, 固同得一理以生, 然旣成性矣, 不能無偏全之殊. 그리고 농암은 벌과 개미(蜂蟻)의 仁과 호랑이와 이리(虎狼)의 義는 오성의 하나일 뿐이라고 구체적인 예를 든다. ) 같은 곳. 如蜂蟻之君臣, 虎狼之父子, 或仁,或義, 只稟得五性之一耳. 이것을 미루어 보면 다른 사물들도 모두 그러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천명 자체가 고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에 통함(通)과 막힘(塞)이 있어서, 理도 따라서 편전이 있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 같은 곳. 此豈天命之不均哉? 亦其氣有通塞 而理隧以便全耳. 이때 농암 이론의 근거가 되는 것은 理로써 말하자면 인의예지의 부여받음이 어찌 사물이 얻어서 온전히 한 바이겠는가? 라는 『맹자』 「生之謂性」장의 주희 주임 . . . 』을 제외하면 인성과 물성이 같은가,다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암의 인물성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회의 방법이 필요하다. 농암은 낙학의 종장으로서 이기론, 사칠론, 심성론, 지각설 등 낙학의 기본틀을 만든 사람이다. 그렇다면 인물성론의 경우에도 농암과 낙학은 어떤 형태이든 연결 고리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농암이 직접적으로 인물성동론을 이론화하지는 않았다고는 하더라도 인물성동론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이 농암의 이론에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농암의 인물성론을 추적하는 것이 그 우회의 방법이다. 그의 인물성론 전반에 걸쳐 견지되고 있는 근본 입장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편전으로 말하면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다르며, 理로써 말하면 인간이든 사물이든 성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인물성론에 대한 농암의 이해는 편전에 의한 차별성과 理에 의한 통일성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그러나 젊은 시절에 이루어진 「상우재문목」을 제외하곤 어디까지나 그 강조점이 후자에 있었다. 농암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물은 오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농암에게 중요했던 것은 모든 사물에 천명의 성이 내재해 있다는 것, 만물의 성이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점이었다. 비록 기품에 따른 편전의 성을 그 사물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라도 한 사물의 진정한 가치는 편전의 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성의 근원, 즉 천명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성론은 理의 지위를 고양시키려는 농암 이론의 일반적인 경향과 맥을 같이한다. 결국 편전의 성을 기질의 성으로 치부해 버리고 본래의 성을 추구해 들어갔던 동론자들의 문제 의식을 농암 역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농암의 인물성론에는 인물성동론의 경향이 이미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농암의 이론이 삼연을 비롯한 낙하의 학자들에게 이어졌고,그것을 바탕으로 낙학의 인물성동론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낙하의 학자들이 끊임없이 농암을 인물성동론자로 해석했다는 것이 그 중요한 증거이다. 따라서 「상우재문목」을 근거로 하여 농암을 일방적으로 인물성이론에 포함시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고, 결국 농암과 낙학의 동론을 단절시키는 잘못을 범한다. Tag : 성리학계, 상우재중용의의문목, 농암 인물성론의 내용 분석, 일반학술자료, 문화, 역사, 분석,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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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자유로이 살아보자~~!!
글쓴이 : 국민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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