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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29 August 2009

20090828_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졸업식을 마치고 피곤에 뒤덮인 상태에서 문화사회학회에 갔다. 발표 제목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발표자는 정수복 선생. 사실 발표는 기대하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첫 단어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발표 제목이기도 했거니와, 내가 학회에 간 진실된 목적은 민우와 이나영 선생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발표문이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 했을 뿐, 발표 제목과 같은 이름의 책이 이미 2007년에 발행되어, 이 속내 모를 세상 속에서 나름대로 유의미한 작업으로 부유하고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발표를 들으면서 불편하고, 불쾌했다.

1. 정수복 선생의 문제의식은 "그동안 한국의 사회운동이 계급, 불평등, 민주화 등의 거대 담론에만 주목했을 뿐, 가족주의, 연고주의, 학연과 같은 사적 영역에서의 억압에는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 일견 동의할만한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논의가 위치하게 되는 맥락에 따라 사적 영역에서의 억압에 문제제기를 하는 운동'도' 거대하지 않은 수준으로 늘 있어왔다는 사실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또한, 지금까지의 한국의 사회운동이 제도개혁과 법개정을 중심으로 한 권력/정치지향적이었을 뿐, 문화적 수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언급하면서 문화와 권력을 별개의 것으로 치부한다.

2. 정수복 선생의 논의 범주는 변화하는 것보다는 변화하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것으로서 문화적 '문법'을 이야기 하는 것. 실제로 정수복 선생은 발표에서 가다머와 브로델을 인용하면서, 변동 패러다임보다 지속 패러다임을 연구할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문제설정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불편했던 것은 바로 그가 지속적으로 여러 대(남성)학자들의 이름과 연구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지성을 뽐내려 들었다는 것이다. So what? 그는 많은 논의 지점들과 연구 결과들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3. 정수복 선생은 자신만의 '한국인' 담론을 세우기 위해, 한국인 행위패턴의 규칙을 6개(현세지향적, 감정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의 '심층적, 문화적(근본적) 문법'과, 개화기 이후에 생긴 6개(사회진화론, 국가중심주의/감상적민족담론강화, 속도지상주의,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이중규범주의)의 '파생적 문법'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그 기원을 종교에서 찾는다.

→ 너무나도 자의적이고 의도적인 범주화다. 정수복 선생의 범주화를 비판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그가 고정된 문법으로서의 문화를 강조하면서 역사(첫번째 비판)와 권력(두번째 비판)의 문제를 탈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러한 문법을 어떻게 파괴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안은 당연히 나올 수가 없는 문제고. 문법이 지속-변형되는 (역사적) 현실에서 계속되는 것은 권력정치의 문제인데 그것을 간과하고 있으니.

→ 첫째, 심층적, 문화적 문법과 파생적 문법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개화기라는 시기가 왜 중요하게 강조되는가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개화기의 충격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화기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개벽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의 흐름('기')이다. 역사를 그렇게 단절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민족담론의 강화 등 역사적 분석이 필요한 것들이 많은데, 하나의 순간적이고 급작스러운 이벤트로서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둘째, 각각의 범주들이 완벽한 것이 아니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정의 정도가 너무 나이브하다. 관점에 아니라, 권위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등)와 갈등회피주의는 별개의 것이라기 보다는 권위주의가 갈등회피주의를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갈등회피주의의 동의어는 '조화'가 아니라 갈등의 '묵인'이다. 문화적 수준에서도 권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권위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혹은 그의 문화와 문법이라는 개념이 권력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절대로 '사람들의 의견이 자유롭게 찬반으로 5:5로 나눠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의견은 찬/반이 아니며, 5:5도 될 수 없고, 어떠한 관계에서 모두가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주장을 개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4. 정수복 선생에 따르면, 기존 학자들의 유교 비판은 한국이 가난하게 된 원인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식민지가 된 원인이나 가족주의의 폐해를 지적하지 못했다.

→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 실제로 유교 비판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범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은 2번에서 제기된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그가 선택한 참고문헌은 이광수, 신채호 등의 유교 비판일 뿐이다. 정수복 선생은 너무 당연시해온 문법이라 문제제기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가 그러한 문제제기에 귀기울이지 않은 것 뿐이다. 분야로는 여성학자들, 시간적으로는 보다 현재에 가까운 시간 대역 내에서 발표되었던 수많은 학자들의 논의가 지워져 있다. 또한, 그가 제기하는 사료들(실제로 사료를 본 것도 아니니 역사적 참고문헌이라고 해야할까) 역시 국사 교과서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인의 문법'은 '국(nation 혹은 nationality)의 문법'이자 '남성 문법'이 된다.

5. 정수복 선생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 개인보다 집합을 우선시하는 유교적 집단주의에 빠져있으므로, 개인의 고유성, 책임성, 주체성을 강조하는 서구 근대 개인주의로 문법이 '고쳐져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 지속되는 것은 지구적 표준(global standard)에 맞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 개인주의 없는 집단주의적 문법에서 우리나라에는 보편적 인권사상이 존재한 적도 없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대립시키고 한 국가와 국민의 성향을 이런 식으로 위치시키는 것을 당당하게 얘기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참 오랜만이다. 동양의 전통적 주체가 갖는 집단주의만큼이나 서구의 근대적 주체와 고유성, 독립성을 등치시킬 수 있을지를 의심해봐야 하고, 그러려면 근대적 주체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발화자의 위치를 생각해 봤을 때, 이것은 오리엔탈리즘이기 이전에 식민성의 문제라고 본다.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이분법에서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 '원래 그러한 것'과 '한국에만 오면 일어나는 돌연변이'라니. 나아가 오리엔탈리즘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한 대항담론으로서 옥시덴탈리즘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방어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재현의 문제는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재현이 있는가, 재현의 문제가 항상 재현의 위기로 이어지느냐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일테지만, 재현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항상 담론의 중추를 비판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 통치 사상으로서의 유교가 전개, 변형되는 과정에서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인권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최근에 글을 읽다 그만둔 게 있는데, 다 안읽어서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 대부분의 개념사에서 빨라야 개화기 수입품으로서, 느리면 해방 이후부터를 연구 범주로 잡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6. 그 밖의 비판들

→ 경험적 연구가 아니다. 게다가 실천과 제도적 맥락보다는 상징만을 강조한다. 경전 자체와 상징만을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실천의 맥락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법을 지켜나가야 하는 의무를 부담하게 되는 것은 여성이며, 한국에서의 기독교가 가족주의를 넘어선 적은 없었다. 정수복 선생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얘기하면서, 한국인의 문화가 기반하고 있는 (그러나 한국인들 그 누구도 꼼꼼히 읽지 않고 모두가 동일하게 읽어낼 수도 없으며 읽은 그대로 실천하지는 더더욱 않는) 텍스트의 문법만을 독해하고 있다.

→ '문화적 교양층'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문법으로서 기능하는 문화와 즐길 수 있는 것으로서의 문화를 혼용하고 있다. 특히 '문화적 교양층'에 여성들이 많이 해당되기 때문에 여성이 더 가능성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남성/과학/이성 vs. 여성/문화/감성의 이분법이 엿보였다.


이제서야 네이버 검색을 통해 책 정보를 알아보니, 평이 꽤 좋다. 수상한 세상. 유교가 난리는 난리다. 유교르네상스는 마치 젊음을 다 소비한 나이 많은 서구 백인 남성이 필리핀과 일본 등지에서 잘 '훈육된' 아시아 여성을 선호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지만, 그 반대에서의 논의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비판했다). 더더욱 수상한 세상. 한겨레에서 계속되고 있는 민족주의/애국주의 논쟁을 보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이곳도, 저곳도, 갈 곳이 없다. 좋게 말하면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니라서 여기서도 저기서도 욕먹는 상황. 결국, 이렇게 되는거지.

그래도 수상한 세상치곤 매우 즐거운 밤이었다. 첫째는, 발표를 들을때의 고통과 달리 토론 자리에서 (물론 다들 결론은 부실하게 봉합되었지만)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해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또 아이디어들이 튀어나갈 수 있었다는 점. 둘째는, 이나영 선생님과 함께 한 자리가 매우 좋았다는 점. 의도치 않게 만나게 된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오늘 아침에서야 어떤 관계인지를 기억하게 된) 두 사람이 눈에 밟히고, 그들을 통해 어제의 일들이 스멀스멀 불편한 진실로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나도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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