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삶의 양식은
이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가?
the Confucian Style of Our LIfe
is Available Yet, Now?
유교(儒敎)는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서 최대의 가치를 지닌다. 국민의 개별의 삶에 관여하여 그 삶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일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 유교 혹은 유학의 본연의 임무이며 존재이유일 것
이다. 물론 오늘의 유학은 이미 2500년 이상의 오랜 기초 교전에 근거하고 있고 2000년 된 유학적
문헌과 텍스트에 영향받았으며 유학의 혁신을 시도했던 새로운 유학운동일 성리학의 출현된 때로
부터 생각해도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신유학으로서 성리학이 만개하였던 조선의
유학은 그중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고 또 동아시아 지성의 첨단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개는
난해하다고 느끼고 너무 사변적이라고 느끼기 쉽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우리가 유학의 본
모습에 질 접근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교의 발전 지속 기간이 장구하였다든가 오래 되었다는 객관적 사실은 유학의 가치의 진면목
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기는 하나 그것이 유교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통성을 이유로 유학
을 낡은 것으로 보려는 경솔한 시각은 우선 가장 잘못된 관점이다.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한국의
조선 신유학이 사단칠정론 인물성동이론 예송논쟁 등 의례적이고 형식적 개념에 몰두하여 현실성을 약화시
켰다는 역사적 추궁도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조선 유학의 논쟁은 허공에 떠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
었으며 그 시대를 살아간 유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신유학적으로 긴장되게 유지 수행하고 그 위에 시대적
가치를 세우고자한 문명적 노력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는 진부한 것이 아니었고 치열한 삶의 기록이었다
고 보아야 하며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진정 역사적인 삶을 추구한 결과였다. 허식과 기만의 역사가 결코 아
니었다는 것이다.
우린 유교의 기초 교전들을 음미해본 경험이 없이는 함부로 유교를 논하거나 혜손해서는 안된다. 더욱이는
유교의 학습적 전수체제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는 현재의사정으로 인해 자의적으로 유교를 해석하고 또
왜곡하는 일이 성행하고 있는 일도 우리들 지성에 도움이 되지 안는다. 시중에 범람하는 유교전적의 해석
물들은 유교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공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게 유교에 대한 다소의 왜곡을 수반한 경우가
적지않다. 현재로서는 우리가 자장 믿을 것은 이미 맹자가 그러하였듯이 시대를 뛰어넘어 그 원래의 모습
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가치있고 의미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역시 유교 기초교전들을 담담히 읽으면
이를 자신의 경험과 조율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분명 우리들 삶
에 힘을 주고 뿌리를 무성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Haianja the 1st. Haian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