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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e/미의 교감

유동조해외설치미술

하이안자 2014. 1. 25. 04:56

 

WATER  PERFORMANCE INSTALLATION

                                                              By Dong Jo Yoo 2013

 

 

 

 

 

 

 

 

 

 

 

 

 

 

 

 

 

 

 

 

 

 

 

 

 

 

 

 

 

 

 

 

 

 

 

 

 

 

 

 

 

 

 

 

 

 

 

 

 

 

 

 

 

 

 

신성한 생명의 심혼, 그 경외의 심연에서

 

                       -유동조 물푸로젝트-                   

 

 

 

 

 

바이칼 호의 알혼섬에

신비롭게 솟아난 부르한 바위는

샤마니즘의 성소이며 태초의 원시자연,

북아시아의 신성한 중심이다.

 

한국 시인들로 하여금 ‘아아! 우린 북방에서 왔구나!’

하고 영탄하게 만든, 그 차갑고 투명함 위에 엉기어,

생명의 태초, 그 엄숙한 영성이 깃든 곳이다.

 

샤만의 복장을 갖추고

소박한 제찬에 술을 올리고

축을 읽고 우러러 제를 올리니

한파람 가슴을 파고드는 계시 같은

청정한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서는 누구나 샤만이며

모든 것이 오직 샤만 만의 것은 아니다

진절하게 느끼는 자 곧 샤만이며

생명을 그대로 행하는 자 곧 성령이다

바로 그 아들이다‘

 

종을 울리고

제주의 향이 바람에 흩어지고

축 읽는 목소리가 호수 수면에 이르렀을 때

분명 그 응답이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호수의 중심을 향해서

‘무겁고 무거운 마음의 덩어리’를 던졌다.

생명의 근원 ‘물에 대한 염원’을 담은 텍스트다.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그 궤적과 함께 드디어

호수는 하얗게 한참동안이나 높이 솟아오르는 물보라로

어쩌면 크나 큰 환희로 ‘우리 마음’을 받아 주었다.

비스듬히 하강하는 궤적에서는 거대한 호수의 손

그 받아드는 손길의 감촉과 움직임을 느꼈다.

 

일렁이는 푸른 물결은 생명의 율동 그것이었으며

뽀얀 물안개는 그대로 호수의 마음이었다.

생명의 그 근원의 진하디 진한 만남 그것이었다.

보고 감촉하며 호흡하는 일종의 절실한

주체할 수 없이 일렁이는 감동이었다.

 

호수는 우리에게 말하고 손짓하며 미소하고

의외의 기쁨으로 환대하여 맞아준 것이었다.

두근거리는 놀라움이며 어쩔 줄 모를 경외였다.

“브리야트족과 한민족은 형제다”

샤먼의 말씀 그대로였다. 고향의 더없는 따뜻함이었다.

우리는 그 위대한 모체의 깊고 깊은 중심을 향해

우리의 크나큰 염원을 담아 보낸 것이었다.

 

그 모든 순간에

호수는 내내 조용하고 청정하였다.

바람은 화창하고 편안했다.

호수의 깊고 깊은 모정이었다.

 

 

 

 

우리가 생명을 소중함을 그 아름다움을 접할 때 우리는 한없는 희열을 느낀다. 바람처럼 물처럼 그 생명이 생동하는 직접적 현상의 힘을 그대로 느낄 때 우리는 진정 그 태동을 감지한다. 그러나 그 절실한 생명감각을 우리가 결코 쉽게 얻을 수는 없다. 생명은 단순한 관념을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우리가 투명해지면서 오직 생명 자체로 영접해야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뼛속 깊이의 울어남으로 만날 때, 피부가 전율하는 감촉으로 만날 때 비로소 생명의 문이 열기기 때문이다. 생명을 소중함을 이해한다는 것이 진정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옴 몸으로 심혼을 다하여 만나지 않는 다면 우리는 그 근원에 다가갈 수 없다. 호수처럼 맑은 심혼이 아니고는 이를 영접할 수도 없다. 산고의 고통만으로 직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잉태하기 위한 희원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매순간 살아감의 절실함으로 항시 하나 되지 못한다면 아마도 생명은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생명의 시공에서 엄중한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바이칼 호는 알혼섬의 부르한 바위를 통해서 바로 이점을 선언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두에게 ‘내 가슴을 열게 하라’고 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하면 결국은 생명이다. 그 창조의 힘이다. 우주는 물론이고 삼라만상이 오직 생명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것이리라. 흙과 바람과 물과 비와 구름과 산하 돌과 먼지까지도 그것이 아름다운 형상을 지니고 아름다운 속성을 보유하고 태양아래 빛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생명의 중심을 향해 몸짓하고 있음을 느낀다. 숲과 초원의 풀들과 아름다운 꽃 사슴과 백조 시라소니와 은빛 늑대들 곰과 호랑이 모두 생명이 이루는 교향곡을 이룬다. 인류 역시 이 가운데 어울려 있다. 우주는 위대함에도 스스로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자연은 아름다움에도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이를 알아채고 그 뜻을 받드는 것은 역시 사람의 지성이며 그 문명이다.

 

그 하늘과 땅과 사람 중에 사람이 이루는 것은 역시 위대한 문화의 힘이다. 사람은 진실과 의미를 알아채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이 생명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중세 중국의 시인들은 고급문명이 없는 자들은 사람의 영역에서 제외했었다. 아마 그것은 중대한 오판이었을 것이다. 원시 부족이나 중원의 변경 사람들도 신을 느끼고 받들었다. 신이란 다름 아닌 생명의 찬연한 드러남이다. 생명의 신비를 경배한 것이었다. 그들이 생명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고 속단하는 것은 분명 오류였다. 신을 감지하고 느끼는 것은 바로 알아채는 힘이며 생명과 함께하는 신성한 신의 영역에 함께하는 것이리라. 문화는 신과 함께함으로서 비로소 새롭게 창조된다. 생명의 근원을 경배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샤만의 존재는 바로 문명의 시원이며 지성의 근저였다. 그 샤만의 거소에서 접하는 감동이 깊고 깊었던 까닭이리라. 호수와 물결과 물안개는 신성한 영적 실체가 우리에게 보내는 감격적인 상호작용이었다. 어울림 이었다. 아득한 생명의 열림이었다.

 

‘닫힌 생명을 영위할 것인가 열린 생명의 길을 지켜갈 것인가.’ 이는 오직 우리의 선택의 문제이긴하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에게 모든 선택의 여지까지 부여한 신의 선택은 심오한 오의가 담겨있다. 생명의 열고 닫음을 깨우치려는 것이며 스스로 선택하는 아름다움을 위해서였다. 만일 오직 닫힘의 길을 간다면 이는 초목 금수의 자연적 품격에도 못미치는 선택이다. 신의 물음의 목소리가 청정한 물과 바람 속에 엄숙히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호수와 섬과, 산과 바위, 바람과 안개에 실려 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엇을 들으려할 것인가?

 

 

                                                                                                                                           - 하이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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