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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조-이동하는 물 : 과거 현재 미래
이동하는 물 : 과거 현재 미래
(유동조 화백 설치작품)
시처럼 읽고
관조하는 전망의 영상미
대전미술의 지평전(2014.2.28.-3.30 : 시립미술관)에서는 유 화백의 최근 설치작품인 ‘이동하는 물-과거 현재 미래’를 선보였다. ‘물 작업’에 몰두해온 그는, 근년에 계속해온 바이칼 호를 비롯한 세계의 호수작업을 아울러 소개하였다. 또한 초창기의 작품인 청바지 작업도 같이 전시하였고, 습지에 그린 ‘하늘과 바다’ 그림 작업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작업이 시종일관 물과 연관해 온 것은 그의 물에 대한 전인적 접근의 감성과 믿음을 보여준다. ‘전인적 접근으로 얻어진 어떤 실감’을 그대로 표현 하려는 것이 그의 작품 활동의 중심 의도임을 나타낸다. 대체 삼라만상 가운데서 물의 그 어떠한 요소가 그 같은 창작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자신도 그리고 감상자도 명징하게 단언할 수 없는 비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이는 물이 지닌 무한하고 다양한 의미와 미학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있다는 사실성에 따라서 현상적 이해가 가능할 뿐이다. 실제로 사물의 진상이나 사실성 역시 그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그의 ‘끊임없이 물과 함께하는’ 물에 대한 그의 태도는 넓게 본다면 결국은 오히려 자연스런 영역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물은 끊임없이 흐르며 나아가는 존재다. 그 나아감의 의미는 인격적 열정일 수도 있고 역사상의 진보주의 혹은 직선적 발전을 의미할 수 있다. 나아가 끊임없이 흘러 순환하는 생명계의 가장 특징적 현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움직임과 유동 순환의 의의에서는 생명의 엄연함이라든가 그 포기할 수 없는 절대의 가치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물은 그런 가운데 모든 만물 모든 사상(事象)을 차별 없이 품고 가면서 본래의 의지를 보유하고 관철하는, 용융(鎔融) 혼융(渾融) 함축(含蓄)의 덕성으로 자연계의 중심을 이루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번에 그의 ‘이동하는 물’은 물이 지닌 역사성을 묘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를 뿐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흐른다. ‘우주(宇宙)’의 ‘주(宙)’ 자가 그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물의 역사성은 그대로 공간의 역사성으로 환치될 수 있다. 즉 공간에 시간성을 부여하면 물과 같은 속성이 된다는 것이다. ‘주(宙)’ 자는 ‘집’과 ‘배’를 그린 글자로 알려져 있다. 그 배는 시간을 타고 흐르는 영원한 배다. 동아시아 중세 우주론에서 이미 시간성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동’에서 물은 명백히 ‘과거 현재 미래’의 흐름을 말하고 있으며 그 흐름 자체를 관조할 뿐만 아니라 그 흐름 위에 일어났던 일 그리고 장래에 있어야할 일들을 그리고자 하였다. 미래란 가변적이지만 역사적 미래는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며 더구나 미래는 개척하는 것이므로 인간성을 믿는다면 그것이 결국 빛나는 것임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에서 세 가지 물, 배가 싣고 가는 물, 즉 역사의 물은 삶의 투쟁, 생존경쟁의 처절한 지속을 지적하고, 급속한 기술발달의 현재를 우려하고, 차세대 삶의 덕목으로서 슬로우 템포를 제시하였다. 물과 함께 흐르는 인생이 만난을 함축하면서도 결국은 인간화할 것임을 확신하고 물의 내면처럼 함축하는 응시력으로 결코 조급하지 않은 이상을 찾아갈 것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동’의 작품 상황은 짙은 어둠에서도 계속되는 물의 활태 즉 빛의 반사를 통해서 모든 삶의 시간이 빛과 어둠으로 점철됨을 보여주고 그 한 가운데서 생명의 역사가 중단 없이 이어갈 것임을 예견하고 또한 그 당위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 큰 믿음과 전망은 물이 지닌 영민한 감응력을 끊임없이 감촉해온 그에게서 나온 일종의 실행적 결론일 것으로 생각된다. 철학적 이상에 머문 의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그의 목소리의 질감 때문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물이 과연 ‘이동’처럼 영상을 보여주고 문자로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이 물의 언어인가? 하는 의문은 이미 진부하다.
역사상의 많은 지인들이 물의 의미를 시로 산문으로 풀었고 음악으로 노래하였으며 회화로 표현했었다. 자연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보여줄 뿐이라는 공자의 말씀은 그 ‘보여줌’을 느끼는 이들이 이를 해석하고 생각하고 계승하고 표현하라는 말일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역할일 것이다. 주자는 우리의 느낌을 필설로 다하지 못할 때 시로 음율로 말한다고 하였는데 오히려 더 직접적으로 영상으로 상징하는 것은 그 이상의 여운을 가지는 것이므로 이 ‘이동’의 세 가지 영상성은 결국 ‘시처럼’ 읽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예술적 리얼리즘이 아닌가 한다.
‘이동’이 영상으로 연역한 물의 목소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물을 통해서 존재의 진상과 삶의 진체를 향해가는 우리의 노력에 큰 위안과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프렉탈 거북선’이 나타내는 유영의 흐름 이미지, 빛, 과거와 미래의 이어짐 같은 것들도 시비선악을 초월하여 미래의 가변적 창조성을 말하려 한 것이므로 그 믿음에 있어서 이 ‘이동’은 매우 동질적인 것이다.
‘이동’의 발상은 이미 그에게는 오랜 것이었다. 청바지 천을 빨래판에 빨던 행위에서부터 밤낚시 수면을 흐르는 바람을 감촉하던 시절의 감성 그리고 배에 물을 채우거나 책을 채우던 직접적 발언의 시기도 거쳤다. ‘이동’에 같이 전시하고 있는 ‘동결된 문자’의 이미지 역시 사람이 얼리고 사람이 녹인다는 해동의 의미로서 이채롭지만 역시 물의 본령을 위한 또 다른 측면의 메시지일 것이다. 물론 호수에 ‘물’을 던지는 퍼포먼스 역시 물의 영성을 일으켜 깨우는 의미와 인간적 기원을 담은 것으로서 하나의 요약된 발언이다. 특히 그의 퍼포먼스는 영상을 넘어서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미의 ‘남은 여운’을 다하는 것이며 어찌 보면 궁극의 언어인 셈이다.
이 모든 언표들은 그가 혹은 그의 작품들이 물의 전령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재구성된 문화적 역사적 지견을 유감없이 표현함이다. 그는 일상의 삶에서도 의외로 망설임과 주저함이 없다. 세세하고 작은 배려나 계획보다는 체감의 감성이 그의 열정을 이끌어주는 원동력이기 때문일 것이며 그 스스로 그 감성적 확신을 거의 의식-무의식적으로 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상을 넘어서는 대담한 발상이 가능한 소이이다. 장래 그의 더 놀라운 발상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동하는 물’은 그의 감성이 서서히 요약된 굵직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 하이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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