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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자서
□ 하이안자 사유기록(1)
서(序): 유학의 학문적 의의
학문과 사상은 삶이며 그 주체자의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탐구란 스스로 절대적인 제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크게는 시대적 제한이 있고 지역적 공간적 제한이 있고 문화적 제한이 있으며 작게는 개인의 삶의 의지와 환경에서 초래되는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과 학문은 그것이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받아들임과 수행의 길은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절대의 삶의 제한성이야말로 학문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여건에 제한 받는 학문은 역으로 그 제한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이이러니를 동시에 지닙니다. 그러므로 학문과 사상은 일종의 역설적 수행법입니다. 오늘날은 학문하는 많은 분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스스로 모두 균형된 본격의 사상은 아닙니다. 어떤 분야이든 학자라면 사상성의 탐구가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결국은 삶의 제한을 풀어가는 장대한 목표에 봉사된다는 점에서입니다. 사상성 없이 분절된 학문은 오히려 그 제한을 강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또한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똑같은 이치로 모든 생활인과 직업인은 결국은 사상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한된 육체와 제한된 기질을 타고 난 인간은 그 자신의 궁극의 본질성을 회복함으로서 그 제한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선설은 바로 인간의 제한에 대한 최소한의 해법입니다. 왜 성설이 최소한의 해법이냐 하면 그런 관념 없이도 도의 근원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무한한 인격으로부터의 탈화라고 하는 자포자기적 방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인격을 생생히 유지한 채 어떤 의미의 자기로부터도 유리하지 않고 객관의 장을 통하여 그 중개의 힘으로 자신의 한계를 무력화하고 영원한 이성과 만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선이란 극히 창조적 해법의 기초적 광장을 제공하는 기호언어입니다. 우리가 성악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인간의 모든 제한을 강화하고 그 제한을 정당화해주는 작용을 할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선과 성악의 논쟁이란 성립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만일 그 누가 성악을 믿거나 혼재설을 주장한다면 그는 유학자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그 즉시 그는 부분적인 학구에 종사하는 분석자일 수는 있겠습니다. 유학자는 순수학으로서의 사상사를 모색하는 존재입니다.
유학은 또한 인생의 측면에서는 쉼 없는 자신과의 투쟁의 개인사의 집적으로부터 구축되는 사상사의 결과물입니다. 나는 한 순간도 투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맹수 같은 투쟁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유학은 그 투쟁을 종식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처열하기 그지없는 자기투쟁입니다. 이를 유학에 있어 현실과 이상의 모순적 전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유학은 중첩된 모순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요약하여 공과 사의 긴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처열하지만 그 삶은 그만큼의 자신감에 넘칩니다. 당당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사로움의 영역에서 목숨을 지키려는 쟁투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그들의 싸움은 군자적이라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경기와 같은 이성적 싸움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을 사례(射禮)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예는 결국 유학자의 탐구의 결과를 표현하고 결행하는 창조적 양식입니다. 결국은 자기 제한을 넘어서는 초월의 최종 양식 바로 그것입니다. 요컨데 그러므로 안락을 추구하는 삶은 현재에 만족하려는 삶은 현실을 적당히 호도 하려는 삶은 유학적인 삶은 아닙니다. 답답함과 절대의 제한의 구속감과 의도하지 않은 삶의 심각한 왜곡으로부터 오는 대소의 고뇌가 없는 삶은 유학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유학은 자기와 대결하는 삶입니다. 모든 삶의 구조를 자기와의 대결로 전환하는 삶입니다. 그 대결의 과정에서 치열한 사단칠정이 일어나고 공과득실이 일어납니다. 유학은 결코 소극적인 회피의 삶은 아닙니다. 부정의 비난을 두려워하고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고 오류를 겁내고 용기의 부족을 한하고 지혜의 무딤을 부끄러워하며 성과의 미약함을 안타까워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궁극적인 유학의 길에 해가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껏 말한 삶의 제한성입니다. 유학은 바로 그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학의 보편적 특질과 민족학적 본질성
유학은 보편 학문이다. 라고 하는 명제는 유학의 학문적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적 정체성이다. 학문이라고 한 까닭은 유학이 ‘유교’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데서 오는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종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편이라고 말한 것은 그 속에 모든 학문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세세하고 작은 사적인 경험과 정념에서부터 거대담론과 이상론에 바탕을 둔 인생론과 우주론, 그리고 치열하고 미세한 사물론 등 거느리지 않은 부분이 없다. 종교에서 철학을 거느리고,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회학을 포괄하였다. 다만 근대사 속에서 유학이 더 심화 내지 분화되거나 오늘의 현실 속에서 새롭게 음미하는 노력이 적었을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교 유학에 대한 인식은 생각보다 아직은 저급하고 많은 이해상의 왜곡이 광범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유교에
대한 오해는 (1)강화되어가는 서구하 취향의 현재의 문화와 시류의 영향 (2)주요 문화주도계층의 의도적 비난 (3)자신의 문화와 사
상에 대한 역사학적 이해의 결여 등 배경적 원인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근현대사는 최근 세계화로 정의되고 있는 역사적 현상에서 일 수 있듯이 어떤 의미에서든 광역의 세계사적 역사무대의
형성의 장이었다. 이 세계화의 시대에 국가간의 경쟁이나 다툼이 해소되어야하는 것이 최대의 역사과제이다. 그 분쟁은 민족내부의
갈등과 민족간의 갈등으로 크게 나누어질 수 있겠는데 그 양상은 단순히 생존하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서 패권적 지배욕이라고 하는
이기주의 요소가 그 중심 배경으로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물론 그 저변을 이루는 경쟁구조는 개인간의 갈등에서 근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으로 일개 종에 속하는 인류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강한 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힘은 물질적이고 물리적
인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원한 지성의 힘이(문자 그대로의 “知性”의 의미에서) 더 긴요할 것이다. 서구적 이
론과 사상으로 이끌리어온 근현대사는 짙은 명암의 대비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평할 수 있겠다. 과학과 기술 새로운 시민사회를 위
한 시회정치사상으로 특징지워지는 근현대성의 본질은 그리이스의 철학과 사양근세의 혁명의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즉 근 현대성
의 절반을 이루고 있는 것이 역사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은 역사학을 꽤 늦게 깨우친 문명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
마도 서양근현대의 지식인들은 여러 학문범주를 통해서 그리스 철학을 능가하는 새로운 지성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
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학술적 경험에서는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지식인의 득의만만한 태도에 비해서 반면에 동아시아의 지성들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자신의 근대이후 역사
를 혐오하였다. 그들의 지성은 외부지향적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고자 하였던 때문에 그들 역사에서 유지해온 사상
적 성과나 문명사 자체의 성과와 위대한 힘을 방기하여왔다.
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힘의 철학이다. 철학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유학이 곧 철학이라는 의미에서는 아니며 철학이라는 일반의
미로 이해 할 때 힘을 불러 일으켜주는 전연 새로운 공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위함이다. 유학의 힘은 공적 질서에 대한 일치의
의지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맹자가 사생취의(舍生取義)라고 하였을 때 그 막강한 힘을 느낄 수 있다. 우주간에 생명보다 강한 힘은
없고 그 생명보다 의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의 범주에서는 그것은 그저 일반적이고 당연한 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학문이 정밀한 진리발견을 지향하고 있
고 그 발견된 진리의 길을 따라서 사는 것이 인생의 힘을 증진해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지식인의 진리의
길 보다 유학의 길은 더 철저하고 엄중하며 실천적이다. 지식의 발견과 그 힘의 운용이 분리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동시적으로 혼연
일치되어 있다. 또 반드시 일정한 경험조직을 통해서 밝혀지는 만큼만 진리를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고 진리
에 의해서만 삶과 우주가 제대로 움직인다고 확신하며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진리의 통로와 감각을 통하여 진리와 교류하려는 노
력 자체를 자신의 삶의 전국면으로서 수행한다.
마치 한 포기 풀일지라도 완벽하게 우주자연과의 균형된 호흡을 통해서 스스로 생기를 가질 수 있듯이 사람의 삶이 그와 같아야 한
다고 믿는다. 아니 오히려 일치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고는 그 생명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다만
사람은 이를 자각적으로 적극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일반 자연보다 크고 강한 생명력을 얻게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연
과의 융통을 제한하고 자신의 내부질서에 치중하는 것은 이기주의라고 하고 사사롭다고 한다. 이 경우 당연히 진정한 창조적 생명
력은 감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 충신열사들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의열한 행동을 보게된다. 그 의열함은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일 것이다. 그와 같은 의열함은 헌신의 형태로 세계사상 일반적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역사에서 나타난 의열함은 그
질과 의도와 배경에서 단적으로 구분된다. 또 동아시아가 의(義)를 표방하는 삶을 역사적으로 영위해온 특징적인 역사문명권이지만
특히 한국은 의의 실천적 방면에서 뛰어난 장기를 발휘해왔다. 그러나 그 의열함이란 꼭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 형태로 그 힘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삶에서 견지되는 의열함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죽음보다 더 처열할 수 있는 인생에서 그
의열함을 간직하기가 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힘 자체로서의 유학은 바로 정신력과 사유의 진지함과 그리고 일상에서의 유지력으로 특징 지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을 “삶의 전국면으로서의 학문” 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전국면으로서의 학문을 지탱하는 것은 직접적
으로는 역사상의 텍스트이다. 문헌으로 알려져온 오랜 유학의 전통이 그것이다. 아나가서는 이를 집대성한 공자학과 맹자의 해석
문장이 그것이다. 그리고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정밀한 사고와 논리로 재구성한 요약적 텍스트가 또한 그것이다.
유학은 논리와 언어의 텍스트로 그 체제가 전승되고 누천년 삶의 힘이 되어왔었다. 그러나 그 논리와 언어의
집대성하여 보여준 것이 주역(周易)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므로 언어와 논리로서 유학을 세론하기 전에 주역의 의의에 대한 이해
가 필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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