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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경험처리법으로서의 『주역』
-하이안자-
유학의 본질성은 그 경험 처리의 방식에서 수립된다. 경험을 스스로 처리하는 방식에서 신비주의는 직관적이고 전경험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경험의 주관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성을 거치지 않고
수립되는 경험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므로 경험 자체로서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그 경험을 임의로 재현할 수 없다는 점을
문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험실적 경험이 순수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경험적 재현성이 만능의 경험처리 기준이 될 수
없다. 역사적 범주에서는 신비경험도 반복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이므로 역시 재현성의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
므로 그 경험 자체의 논란보다는 신비경험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타의 경전이 문헌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논리적 사고의 중심이라면 『역경』은 신비적 사유 즉 천명 중심의 사유의 중심이
다. 동북아시아의 사상은 논리적 사유와 신비적 사유의 조화로운 운용을 통해서 그 특질을 구축하였다. 그러므로 『역경』
은 사상사의 한 중심 축이었다. 아울러 『역경』은 사상사의 남상이며 논리적 혹은 합리적 사유의 발전시킨 기초이기도하였
다. 그러므로 유학사상사는 일단 주역적인 사유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역의 텍스트를 이해함에는 그것이 신비적 논법을 사용하고 있고 어느특정한 일반 경험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는 생각이 먼저 필요하다. 주역』을 구성하는 텍스트적 특성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먼저
지적해 둔다.
(1)음효와 양효는 경험현상 통합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움양의 양효는 미세하고 절실한 확증 적
경험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
(2)음양은 또한 실제 개별 경험현상을 분류 분석하는 데에도 중요한 수단이 된다.
(3)그 경험의 변별방식은 먼저 세상의 모든 경험현상들이 아무런 제한 없이 만날 수 있고 합쳐지는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
는 관계구축의 방식을 검토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규칙이다.
(4)경험적 현상은 일정 시공에서 누락됨 없이 동참하여 종합적 현상의 장을 구성한다. 그 현상의 장은 어떤 계기에 따라 전연
새로운 다양한 경험적 특징을 이차적으로 드러낸다. 음양은 그 경험적 종합의 장이 그려내는 대세를 파악하는 법식이다
(5)그러므로 주역의 괘효는 경험 통일의 장으로서의 세계이해의 방식이며 그 체계이다. 단순한 변화의 학은 아닌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주역”의 <역>은 ‘바뀔역’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의미적 전제가 필요하다. 변화를 연구하는 변
화의 학이 아니라 불변을 탐구하는 영원을 지향하는 학이다. 그러므로 『주역』은 역보다는 <주:광범하고 무제한의 경험의
세계/원래는 농경지의 의미>에 무게를 두어 “다양한”<변화:다기한 현상/원래는 술잔을 바꾸는 의식>를 통일하려는 텍스트
라고 이해해야할 것이다.
이상의 항목들은 바로 주역적 논리로 경험현상을 받아들이는 경우를 가정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주역』
스스로의 독립적 의의와 논리적 특징이 이해되어야하므로 그 텍스트를 통해서 본질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역을 구성하는 도상이 (A)음효와 양효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과 (B)3효를 중첩하여 소성괘(小成卦)를 이룬다는 점 (C)2괘를
중첩하여 대성괘(大成卦)를 만들었다는 그 기호적 배치구조의 의미가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 역은 본질적으로 신비적 경험
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 3개 항목은 신비적 경험을 분류하고 조합하는 기초 방략일 것이다. 여기서 우선 왜 2(음양효)이
며 3(3효)이며 2(上下掛)인가하는 의문이 먼저 생긴다. 그 총수가 6인 점도 주목된다.
현재로서는 그 수적인 논리를 신비적 논리의 어떤 본질성 해석으로 수용할 것인지에대해 확증된 설명체계는 아직 없다. 하도
(河圖) 낙서(洛書)의 원래의 도상(圖象)의 숫자는 9(洛書) 와 10(河圖)인데 이 9와 10수도 하나의 연관 체계 아래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주역』이 신비체험을 위주로 하였다면 그 경험의 범주를 기록함으로써 신비적 체험을 논리의 단위로 마련할 수 있었다고 생
각된다. 따라서 역의 수리는 그 신비적 체험의 장을 구분하는 분야수(分野數)이다. 하도와 낙서가 바로 그러한 신비경험의 장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비경험은 상시 반복되는 일반 경험의 세계와는 달리 특정한 상황에서주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경험자체의 일반성을 약하며 그 내용도 판이할 수 있다. 다만 그 체험의 장만이 공통적이며 불변적이고 재현가능하며
일반체험으로 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돌아가신 조상을 생각할 경우 (1)그 분의 말씀과 처신을 회상하고 그 가치를 새로이 생각할 수 있다. (2)그
분의 존재 자체를 생각할 수 있다. 생시의 존재 사후의 존재 그리고 나이 기억 속의 존재 그리고 언어로서 전승되고 있는 가치로
서의 존재 등 여러 차원의 존재가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죽음과 삶이라는 원초적 주제가 작용하고 개인의 체험이 모두 동원된다. 그리고 그 결론은 어떠하든, 그 결과로서
독자적으로 내려지게 되며 타자의 그와 같은 경험과 일치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거나 하는 문제는 큰 지장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보다 제한 없고 자유로운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의 사유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지시하지는 않으며 사유의 범
주와 방향을 예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건괘의 단사(彖辭)는 「乾元亨利貞」이라고 하였다. 이 경우에 건은 괘의 이름이고 「元亨利貞」이 주된 해석의 대상이다. 이를
해석 이해하는 경우 “건괘는 근본적이며 형통하고 이롭고 확고한 경우를 나타낸다.”고 보는 예와 “건은 근본적으로 형통하니
곧은 것이 이롭다”라고 해석하는 예가 있다“곤(坤)괘의 경우는 「元亨利牝馬之貞”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과연 그런말인
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위와 같은 해석은 너무 문헌적 텍스트 해석법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 해석학
적 갱신이 시급히 요구된다고 믿어진다.
우리는 「건원형리정」을 해석하여 제3의 길을 택할 수 있는데 바로 “건이란 원형리정한 것을 지칭한다”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즉 원형리정 자체가 독특한 개념성을 가지는 특수한 용어로 받아들이는 식이다. 대체 “원형리정”한 것이란 무엇인가? 원이란
사람의 머리를 의미한다. 머리는 생각이며 생명의 근본이므로 크다는 의미와 근본이라는 의미를 아울러 가진다. 형이란 형통
하다는 뜻이다. 막힘이 없이 달통한다는 의미이다. 이란 이롭다는 것으로 창조와 생명을 지향함을 말한다. 정이란 곧다는 뜻이
며 변함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형식의 고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의지나 감정 성격이나 성향의 불변성을 말한다. 건이
빛나는 태양과 사람과 자연의 기운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 3재 사상의 한 표현이다. 건은 3재 가운데 하늘과 사람에 관한
것이다. 곤은 땅에서 전개되는 지상적인 것을 나타낸다.
위와 같이 생각하면 건은 정신과 의지를 위주로 사람의 본질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곤은 지상의 존재가 역시 정신성을 가지
고 확고한 경험적 작용을 수립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도상에서 볼 경우도 양효는 존재의 근본을 나타내고 음효는 존재
의 분화 상대작용 등을 통하여 경험적 현상을 창출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건은 양의 원초적 모습을 곤은 음의 최
종적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건원형리정>의 의미는 <곤원형리빈마지정>의 의미와 대립쌍을 이루는데 역의 본문가운데 1.<원형>이라는 언급은 그 외에
도 2.<둔원형리정/屯> 3.<몽형/蒙> 4.<광형정길:光亨貞吉/需> 등 여러 가지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그에 비해서 1.<길:吉>
2.<흉:凶> 3.<무구:無咎> 4.<형:亨> 5.<길형:吉亨> 6.<불리:不利> 7.<대왕소래:大往小來> 8.<리-:利-> 9.<옹약/顒若-觀>
10.<소리:小利> 11.<무질:無疾> 12.<정길:貞吉> 13.<형무구:亨無咎> 14.<형소리:亨小利> 15.<리정:利貞> 16.<번서/蕃庶,
三接-晉> 17.<-리 정길:利 貞吉> 18.<-리:利 -길:吉> 19.<원길:元吉> 20.<리-리-:利-利-> 21.<유려/有厲-夬> 22.<물용-
:勿用-> 23.<무상무득 왕래정정/无喪无得往來井井-井> 24.<흉 무유리:凶无有利/귀매> 25.<소형:小亨> 등 20여종의 표현으
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원형리정> 등의 표현은 그 상황이 초래하는 길흉을 결국 말한 것인데 어떤 신비적 상황이 지니고 있는
경험적 결과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의 단사만을 본다면 『주역』의 주된 텍스트적 기능은 길흉의 판단에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정밀하게 검토
한다면 신비현상은 다양하지만 죄종적으로 인간이 받아들이게 되는 경험적 현상은 길흉과 연관된 방식으로밖에 수용할 수 없
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다양한 신비체험은 결국 생명을 영위하는 주제인 인간의 <생명경험>으로서는 오로지 길흉의 형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언하면 다양한 신비현상을 그 <생명적 경험>에 의해 길흉의 양대 경험군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것은 결국
신비현상을 유별하는 검토가능한 유일한 방식이다. 어떤 경험이든 결국은 <생명적 작용>의 여하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학을 생명의 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경험적 분야이든 신비적 분야이든 그 학적인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유학을 수련한 가장 실증적 성과는 삶의 당당함으로 나타난다. 고집스러움이 아니고 편협함이 아니고 막힘이 아니고 닫힘도
아닌 채로 진정 당당함을 구현할 수 있기에 유학은 삶의 힘이며 기를 살리는 길이며 힘을 응축하는 길이다. “자포자기하지 않
는 유일한 길이 유학이다. 이를 표현하되 진(眞)이란 말을 쓰기 어렵고 참이라는 말도 쓰기 어렵다. 성(誠)이라는 말을 쓰기도
어렵고 중용(中庸)이라는 말을 쓰기도 어렵다. 학문이라고는 더욱 쓸 수가 없다. 수 천년간 왜곡되고 오도되어와 의미가 크게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텍스트적 정의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래서 그냥 수식어 없이 살아가는 힘(The Real Power Of
Lives)이라고 유학을 정의하고 싶다. 살아가는 힘을 주는 기제로서 유학을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길흉론적(吉凶論的) 텍스트가 귀중한 것임을 알게된다.
1) 주자(朱子) <大學序> <<大學>>에 보면 유학은 상고시대 이래 교육 학문의 전통을 간직한 것으로 보고 있다. (大學之書 古之
大學所以敎人之法也....이하.) 그는 유학사상이 전설시대 이래의 사상 전통을 견지한 것으로 보고 한당시대(漢唐時代)를 지나는
기나긴 공백기를 거쳐 송대(宋代)에 이르러 그 학문적 정체성을 회복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요순(堯舜) 이래로 공자
(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에 이어지는 사상 학술적 전통이 맹자 이후로는 그 학문적 계승과 성과 면 에서 단절되
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학(宋學)이 순수학문을 견지하고 전통사상의 본질에 중심을 두고 탐구하는 자세는 전통계승
혹은 학문 회복이라는 평가가 가능하지만 바로 그 “전통회복성”이 완전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송학은 전통사상으로서의 유
학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그 새로운 사유의 가성을 한국 조선시대의 퇴계 율곡의 유학에서 만개하여 극치를 이루었다.
이제 그 성과에 바탕을 두고 보다 철저하게 유학의 본질성을 심구할 필요가 있다. 유학은 일종의 삶의 강력한 에너지로서 사는
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 힘의 정체성을 집중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절실하다.
2)유학의 논리는 우선 그 텍스트적 성격에 의해 나누어보면 1)『시경』 2)『서경』 3)『역경』에서 각각 ①자연 ②인문현상
③역사(事象) ④인간의 정념 ⑤문물 ⑥신비적 현상 등의 6가지 정도의 경험범주가 그 바탕을 구성하고 있고 그 경험범주간의
일치 조화된 사유를 변함없이 추구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역경>>은 신비적 현상을 바탕으로 한 텍스트인데,
신비적 현상마저 경험의 범주에서 제외하지 않았다는 최대의 경험처리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동시에 신비적 경험
을 계승하여 건실한 일반의 경험구조와 동질화의 길을 걸어왔으므로 <<주역>> 속에는 모든 경험현상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다양한 경험처리법을 망라하여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춘추좌씨전>>의 상세한 사실기록에서 그 사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2>학문과 사상은 삶이며 그 주체자의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탐구란 스스로 절대적인 제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크게는
시대적 제한이 있고 지역적 공간적 제한이 있고 문화적 제한이 있으며 작게는 개인의 삶의 의지와 환경에서 초래되는 제한이 있습
니다. 그러므로 사상과 학문은 그것이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받아들임과 수행의 길은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
다.
그러나 그 절대의 삶의 제한성이야말로 학문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여건에 제한 받는 학문은 역으로 그 제한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이이러니를 동시에 지닙니다. 그러므로 학문과 사상은 일종의 역설적 수행법입니다. 오늘날은 학문하는 많은 분
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스스로 모두 균형된 본격의 사상은 아닙니다. 어떤 분야이든 학자라면 사상성의 탐구가 필요한
까닭은 그것이 결국은 삶의 제한을 풀어가는 장대한 목표에 봉사된다는 점에서입니다. 사상성 없이 분절된 학문은 오히려 그 제
한을 강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또한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똑같은 이치로 모든 생활인과 직업인은 결국은 사상
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한된 육체와 제한된 기질을 타고 난 인간은 그 자신의 궁극의 본질성을 회복함으로서 그 제한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선설
은 바로 인간의 제한에 대한 최소한의 해법입니다. 왜 성설이 최소한의 해법이냐 하면 그런 관념 없이도 도의 근원에 도달할 수
는 있지만 그것은 무한한 인격으로부터의 탈화라고 하는 자포자기적 방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인격을 생생히 유지
한 채 어떤 의미의 자기로부터도 유리하지 않고 객관의 장을 통하여 그 중개의 힘으로 자신의 한계를 무력화하고 영원한 이성과
만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선이란 극히 창조적 해법의 기초적 광장을 제공하는 기호언어입니다. 우리가 성악이라고 할 때 우
리는 인간의 모든 제한을 강화하고 그 제한을 정당화해주는 작용을 할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선과 성악의 논쟁이란 성립할 수 없
는 싸움입니다. 만일 그 누가 성악을 믿거나 혼재설을 주장한다면 그는 유학자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그 즉시 그는 부분적인 학
구에 종사하는 분석자일 수는 있겠습니다. 유학자는 순수학으로서의 사상사를 모색하는 존재입니다.
유학은 또한 인생의 측면에서는 쉼 없는 자신과의 투쟁의 개인사의 집적으로부터 구축되는 사상사의 결과물입니다. 나는 한 순
간도 투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맹수 같은 투쟁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유학은 그 투쟁을 종식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처열하기 그지없는 자기투쟁입니다. 이를 유학에 있어 현실과 이상의 모순적 전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유학은
중첩된 모순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요약하여 공과 사의 긴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처열하지만 그 삶은 그만큼의 자
신감에 넘칩니다. 당당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사로움의 영역에서 목숨을 지키려는 쟁투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그들의
싸움은 군자적이라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경기와 같은 이성적 싸움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을
사례(射禮)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예는 결국 유학자의 탐구의 결과를 표현하고 결행하는 창조적 양식입니다. 결국은 자기 제한
을 넘어서는 초월의 최종 양식 바로 그것입니다. 요컨데 그러므로 답답함과 절대의 제한의 구속감과 의도하지 않은 삶의 심각
한 왜곡으로부터 오는 대소의 고뇌가 없는 삶은 유학적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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