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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學的 史論을 中心으로) 德田 張 俸 赫
유가철학(儒家哲學)을 공맹사상(孔孟思想)이라고 하는 것은 유교의 조종(祖宗)인 공자(孔子)와 공성(孔聖)의 버금가는 아성(亞聖)으로 존숭되어오고 있는 맹자를 빼놓을 수 없어서 공맹사상(孔孟思想), 혹은 공맹철학(孔孟哲學)이라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孟子> 서(書)에 대하여 어느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유교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는 경전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書가 처음부터 유교경전의 중요한 위치에 놓인 것이 아니고 여러가지의 우여곡절 끝에 경서(經書)의 한자리를 굳히게 되었으니 그 까닭을 더듬어서 살펴보면 자못 흥미로운 대목이 엿보인다.
좋은말 해 주고 핀잔받거나 충간(忠諫)하고 귀양가는 것처럼 <孟子> 書의 대접받는 과정이 통치자들의 심층심리의 한 단면을 엿보이게 하는 것이다. 서적의 내용을 조사하여 그것을 몇개의 부류(部類)로 분류함과 동시에 그 원류(源流)나 판각(版刻) 등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을 우리는 <目錄學>이라 부른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일찌기 이 목록학이 발달하여 사가(史家)들이 정사(正史)를 쓸때에는 왕조의 역사와 더불어 그 당시에 존재하였던 서적의 총목록을 예문지(藝文志) 혹은 경적지(經籍志)의 형식으로 수록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왔으며 그 시작은 후한의 사가(史家)인 반고(班固:AD32-92)가 <漢書>를 쓰면서 <예문지>를 지은데에서 비롯되어 그 후의 많은 정사(正史)가 이같은 방법을 따랐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正史로서 최초로 서적의 목록을 정비정돈한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를 살펴보면 <맹자> 書는 경부(經部:六藝)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자부(子部)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AD600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타서의 경적지(經籍志)에도 자부에 수록되어 있으니 <孟子>書가 기원전 300년경에 쓰여졌다고 추정한다면 쓰여진지 90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경전의 서열에 오르지 못했다고 하여야 할 것이며,쓰여진지 150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난 다음에야 확고한 경전(經典)의 위치를 확보하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맹자> 書는 본래 제자서(諸子書)로 분류되어 목록학적 차원에서 자부(子部)에 속하였으므로 다행히 진시황의 분서(焚書)의 난(亂)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해오는 바이며 그래서 고문학자(古文學者)와 금문학자(今文學者)들간에 <맹자> 書를 두고는 논쟁을 벌리지 않았으며 학구(學句)의 착간(錯簡)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성(孔聖)의 버금가는 아성(亞聖)인 맹자가 썼다하는 글이 왜 장구한 세월을 두고 경전의 서열에 오르지 못했을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뿐인가! 경전(經典)의 서열에 오른 이후에도 통치자에 의하여 맹자의 배향(配享)이 중지되기까지 한 일도 있었고 과거(科擧)의 시험문제에서도 출제가 금지되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고대이래(古代以來) 어느 시대(時代)를 막론하고 종교와 통치자와의 관계는 밀접하였고 좋은 약은 입에 쓰듯이 좋은 글은 통치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 것이다. 다름아닌 <맹자>의 글 속에 통치자의 마음을 아프게하고 불안스럽게 하는 내용이 한 두군데가 아니어서 좀처럼 가슴을 열고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니 그 대표적인 한 대목이 바로 탕무 방벌론(放伐論)으로서 비교적 짧은 61字로 서술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를 전개시킨 것이다.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이 신하가 그 임금을 죽여도 좋으냐고 맹자에게 물었을때에 어진것을 해롭게 하는 것을 적(賊)이라 하고, 옳은것을 해롭게 하는것을 잔(殘)이라 하며 잔적한 사람을 한 지아비라고 하니 한 지아비인 紂를(殷나라의 마지막 王을 周나라의 武王이) 베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맹자가 대답함으로써 도덕성이 결여될 때에 통치자의 성을 갈 수 있다(易姓)는 혁명논리를 편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말이 <맹자> 書의 여러군데서 찾아볼 수 있으니 그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반복해서 간(諫)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을 갈아 치운다(易位)는 적극적인 표현이 만장하편(萬章下篇)에서 보일 뿐 아니라 임금이 신하를 토개(土芥)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고 이루하편(離婁下篇)에 써 놓았고 민(民)이 위귀(爲貴)하고 사직(社稷)이 차지(次之)하고 군(君)이 위경(爲輕)하다고 진심장하편십사(盡心章下篇十四)에 표현하고 있다.
백성보다 존귀한 임금을 백성보다 가벼운 것이라고 하였으니 고대의 어느 통치자치고 이러한 <맹자> 書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뿐만이 아니고 일본에서도 하나의 금기서로 반가워하지는 않은 듯 하니 중세에 쓰여진 일본의 수필집인 <雨月物語>에 일본의 국체(國體)와 상반(相反)되는 글이 적힌 <맹자> 書를 실은 배는 반드시 바다에서 조난당한다는 전설이 쓰여 있다. 7세기 초에 왕조(王朝)통치가 시작된 일본으로서는 그 후 상당 기간동안 <맹자> 書를 금기의 書로 여겨온 듯 하다. 경학(經學)의 사론적(史論的) 차원에서 <맹자> 書에 대한 개설(槪說)을 약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반고(班固)가 저술한 정사(正史)인 <漢書豫文志>에는 <맹자>十一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 전해지는 七편본의 <맹자> 이외에 四편으로된 <孟子外書>가 있었다는 것으로 한(漢)나라 응(應)의 <風俗篇>과 한(漢)나라 유흠(劉歆:?-23AD)의 <七略>에도 <맹자> 11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이 4편의 편명(篇名) 뿐이지 <孟子外書>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는 것은 송대(宋代)이후에 나온 위서(僞書)라고 알려져 오고 있다.
BC160년경에 전한(前漢)의 삼대제왕(三代帝王)인 문제(文帝)는 <논어> <효경> <이아>와 함께 <맹자> 書를 학관(學官)으로 세워서 사박사(四博士)의 하나로 되었으나 이로부터 20여년 후에 무제(武帝)때에 이르러 사박사(四博士)를 없앴으니 그 후 <맹자> 書는 제자서(諸子書)로 전락하는 쓰라린(?) 푸대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천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제자서(諸子書)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 <맹자>書는 북송(北宋)의 신종(神宗)때인 AD1070년 경에 와서 비로소 자부(子部)에서 경부(經部)로 편입시켰으니 통치자들은 <맹자> 書를 인색하게 푸대접 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 1084년에야 추국공으로 추존(追尊)되고 그 이듬해에야 비로소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되었다. 그 뿐이겠는가? 그 이후에도 집권자에 의하여 박해를 받은 바가 여러차례 있으니 한가지 예를 들자면 <맹자> 書가 유교경전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난 300여년이 지나서도 明나라 태조(太祖)인 홍무제(洪武帝)는 왕위에 오른다음 <맹자>書 내용중 마음에 안드는, 집권자에게 불편한 구절 85조를 제거케하고 맹자의 배향(配享)을 중지시킨 바 있으며 마침내는 <맹자> 書로 부터 과거시험문제를 출제하지 못하도록 하고, 諫하는 者가 있을 경우 대불경죄(大不敬罪)로 처벌하겠노라고 상명(上命)을 내린바가 있었다. 이토록 전제정치(專制政治)의 치자(治者)계급으로부터 박해와 학대를 받았으니 명사(明史). 권139. 전당전(錢唐傳)에서 이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유교의 기틀을 잡은이가 맹자일진데 그 맹자가 유교적 전제사회(專制社會)의 집권자들로 부터 학대와 박해를 받아왔다는 사실은 어떠한 면으로나 흥미를 떠나서 통치자들의 심층심리의 단면을 엿보이게 하는 것이다.
고대 이래로 학자들 간에도 <맹자> 書를 두고 찬성과 비판이 꾸준하게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순자(荀子:313-238BC)는 비십이자편(非十二子篇)을, 후한(後漢)의 왕충(王充:27-96)은 그의 저서인 <論衡>에서 날맹편(剌孟篇)을, 사마광(司馬光:1019-1086)은 의맹(疑孟)을, 李 (1009-1059)는 비맹(非孟)을, 조열지(晁說之:1059-1129)는 孟을 써서 <맹자> 書를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꾸짖었으나( )나 이정자(二程子)가 대학.중용.논어와 배(配)하여 사서(四書)라 이르고 주자(朱子)가 집주(集註)를 써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표장(表章)하여 세상에 내놓은 이래로 비로소 확고한 경전(經典)의 위치를 차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맹자> 書에 대하여 공로가 큰 사람을 든다면 조기(趙岐:108-201)를 빼 놓을 수 가 없을 것이다.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에서 조씨왈(趙氏曰)로 시작되는 인용문(引用文)은 모두가 조기(趙岐)의 글이며 주자의 <맹자집주>가 신주(新註)라고 한다면 조기(趙岐)의 <孟子正義>는 구주(舊註)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의 십삼경주소본(十三經注疏本)이 바로 조기(趙岐)의 글인 것이다. 그는 맹자칠편(孟子七篇)은 상하로 나누어서 14편으로 가르고 장구(章句)를 261장으로 갈라서 34,685字로 <맹자> 書를 확정지은 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이 장구대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후한 사람으로서 정무(政務)의 감찰관(剌史)이였으나 정무의 감찰과정에서 환관과의 의견충돌로 피하는 몸이되어 변성명(變姓名)을 하고 시중(市中)에서 떡장사를 하다가 잡히게되는 위기를 피해서 행상을 하게 되었는데 조기(趙岐)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충절을 알아주는 한 선비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집에 숨겨주었으므로 숨어 사는 동안에 옳은 것을 앞세우는 <孟子> 書에 장구를 가르고 註를 해서 <孟子正義>를 썼다고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그의 전기는 <후한서> 권94에 보이고 있다. 그 다음으로 <맹자> 書에 대한 공로가 큰 사람은 주자(朱子:1130-1200)를 아니들 수 없다. <孟子集註>를 집필하면서 조기(趙岐)와 이정자(二程子)를 비롯해서 42人의 제가설(諸家說)을 319회나 인용하여 집주를 완성하였으니 <論語集註>에서 38人의 제가설을 인용집필한 것을 비교한다면 심혈을 기울인 주자(朱子)의 공로를 크다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론적으로 <맹자>書와 주역(周易)과는 무관하다고 말하여 오고 있으나 맹자의 글 속에 주역을 인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글속에 들어잇는 사상과 철학이 이미 주역과 동화(同化)되어 한단계 앞선 논리(論理)를 전개하는 과정인고로 굳이 易의 글을 인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이미 오래전에 제기되었으니 그 내용을 더듬어 살펴볼 만한것이다. 첫째로 맹자와 역경(易經)과 연관지워 놓은 사람은 조기(趙岐)인데 <孟子題辭>에서 맹자는 오경(五經)을 통달했다고 하여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에 능통하였다고 하였다.
둘째로 주역(周易)을 맹자(孟子)보다 더 잘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 정이천(程伊川:1033-1107)의 글은 주자의 <孟子集註序說>에 소개되어 있는 것으로 <程子가 말하기를 맹자 말씀에 벼슬 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칠 만하면 그치고 ,오래 할 만하면 오래하고, 빠를 만하면 빠르니 공자는 성인이라, 때에 따라 적절하게 하시었다 하셨으니 그런고로 易을 아는이는 孟子만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셋째로 학경( 敬 1558-1639)은 明나라 말기의 경학자(經學者)로서 <맹자>書와 주역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연관지워 볼려고 애쓴 흔적을 남기었는데 일부에서는 그의 학설을 비약적인 논리의 전개라고 좋지못한 평이 뒤따르고 있다. 그의 요지(要旨)는 다음과 같다. 맹자가 말하는 인예의지(仁禮義智) 사단(四端)은 즉, 역(易)의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사덕(四德)인 것이며, 맹자가 말하는 인의(仁義)는 즉 역에서 인지도(人之道)를 세우는 것이다. (立人之道曰仁與義一說= 1)고 하였고, 맹자가 말하는 성선(性善)은 易의 계사상오장(繫辭上五章)에서 말하는 "一陰一陽은 하늘의 道요 易의 길이다. 天道를 따르는 것이 善이며 이를 구체화 한 것이 인간의 性品인 것이다." 고 하였으며 그 외에도 맹자의 사상과 철학이 역의 궁리진성(窮理盡性)과 상통(相通)하고, 건괘(乾卦) 사괘(師卦) 부괘(否卦) 복괘(復卦) 무망괘(无妄卦)의 뜻이 맹자의 학설과 상통한 것이니 <미루어서 살피건데 易을 참으로 맹자처럼 아는이가 있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으니 학경의 논리(論理)가 전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그뿐아니고 맹자의 역성혁명논리(易姓革命論理)를 주역(周易)의 택화혁괘(澤火革卦)에서 교육에 관한 논리는 산수몽괘(山水蒙卦)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평소 생각하여 보는 것인데 교육이라는 어휘는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20에서 인류역사상 맹자가 최초로 사용하였고 <敎>字의 분합적(分合的)의 자의(字義)는 손에 회초리를 들고 아이에게 좋은일을 본받도록 훈계하는 회의(會意)인 고로 (許愼의 說文解子 참조) 손에 회초리를 든다는 것은 몽괘(蒙卦)의 초효(初爻)속에서 이용형인(利用刑人)의 뜻이고 좋은 일을 본받도록 하는 것은 주효(主爻)인 구이(九二)의 포몽(包蒙)과 육오(六五)의 동몽(童蒙)의 뜻이고, 훈계한다는 것은 상구(上九)의 계몽(繫蒙)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보는 것이다. 맹자의 교육철학은 지식이나 기술교육이 아니고 도덕교육을 의미하는 고로 도덕이 잘못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회초리를 들어서 형벌을 씀이 이롭다(利用刑人)는 자세를 취함으로서 인간생활의 기초가 되는 도덕을 세워서 길러야 한다고 산수몽괘(山水蒙卦)의 뜻에 따라 교육이라는 어휘를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표현한들 부회(附會)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맹자>의 일서(一書)가 무더운 여름날에 청량음료처럼 가슴을 후련하게 하여주는 시원한 철학서(哲學書)라는 것을 온갖 수식어를 사용한 필설(筆舌)로서 설명을 다할 수 없겠으나 대산(大山)선생님을 뫼시고 월요일 밤마다 학회사무실에서 집주본(集註本)을 공부하면서<맹자>書의 사론적(史論的) 단면을 살펴봄으로서 오뚜기처럼 살아남은(?) 글속에 품기어진 진수(眞髓)에 접근해 볼려는 마음이 간절하다. 근래에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荀子>書의 상당부분이 각광을 받고 있으나 제자서(諸子書)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하여 볼때에 비록 늦기는 하였으나 푸대접받던 <맹자>書가 11세기 중엽에 유가(儒家)의 정경(正經)으로 채택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 발행 1991년 7월호 <동인>지에 기고 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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