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당선작
이중섭 예술의 구조와 종족적 미의식
전인권
화 가 이중섭(1916~1956)은 주로 신화와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해돼왔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천재란 수식어가 붙어다녔고, 그의 예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논의됐다. 예를 들어, 김광균은 1955년 「미도파 전시회」 팸플릿에서 『중섭이 어디다 뿌리를 박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고, 고은은 『이중섭 평전』에서 『중섭의 예술은 이미 비평의 숙도(熟度)를 소유한다』 하여, 비평의 대상에서 초월해 있는 것처럼 말했다. 다시 말해 중섭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비평의 포기 현상이 유포돼 있었다.
다른 한편, 소수의 견해이기는 하지만 기행과 일화가 과장되었을 뿐 작품은 대단치 않다는 견해도 있다. 식민지 시대의 유미주의(원동석), 무분별한 예술지상주의(김윤수), 타락한 르네상스의 예술의식(「계간미술」 79년 여름)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의 예술 자체에 대한 검토는 언제나 불충분했고, 지난 40년 동안 이중섭론의 필요성만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이중섭은 가장 널리 알려졌으나, 가장 잘못 알려진 화가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다.
이 글은 위와 같은 작가론의 공백을 의식하면서 중섭 예술의 기본구조와 특성을 논의하려고 한다. 특히 소그림 위주의 작가론에서 벗어나 그의 예술 전체를 문제삼으려 한다. 일부의 과장된 주장처럼 그는 결코 난해한 화가가 아니다. 그의 그림은 하나하나 즉시 이해된다. 그럼에도 그의 예술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오리무중 상태에 있는 것은 중섭 예술의 전체 구조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1차적 목표는 중섭 예술의 전체적 구조를 밝히는 것이다.
이 글의 또 다른 목표는 중섭 예술의 독특한 구조를 가능케 한 종족적 미의식(種族的 美意識)을 구명하는 것이다. 중섭 예술의 표현양식은 근대적이며 현대적이다. 소그림의 표현주의, 엽서 그림의 상징적 처리, 닭 그림의 낭만주의, 군동화의 선묘화법 등은 전적으로 현대회화의 표현양식을 따른다. 그러나 중섭 예술을 떠받치는 정신적 배경은 표현양식과 일정한 괴리를 보인다.
종족적 미의식은 매우 낯선 용어이긴 하지만, 중섭 예술의 원동력을 구명하는데 적절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종족미는 중섭의 예술과 인생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관철되는데, 중섭이 불과 40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또 종족적 미의식은 이른바 근대적 자아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다. 요컨대, 이 글은 중섭 예술의 정신적 배경을 구명하는 가운데 근대화 여명기의 한국 미술이 서양 미술을 수용하면서 부딪힌 문제와 이를 대응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기술하려고 한다.
중섭 예술의 큰 대조와 작은 대조
① 소그림과 군동화의 큰 대조
중섭의 그림을 반복적으로 감상하다 보면, 대조적인 세계를 만나게 된다. 소그림과 군동화(群童畵)가 그것이다. 중섭은 소의 화가일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화가라 해야 옳다. 사실 그는 소보다 더 많은 어린이를 그렸다. 그런데 소그림과 군동화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너무 대조적이어서 동일한 화가의 그림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두 유형의 그림군의 대조성에 관심을 집중할 때,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소재의 숫자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섭의 소는 언제나 한 마리다. 한 마리의 소는 화면 전체를 압도하며 등장한다. 굵은 선이 나타나고 강렬한 색상과 터치가 강조된다. 또한 중섭은 한국소를 그리겠다는 자의식이 강했지만, 그의 소는 코뚜레, 쟁기, 마차와 같은 필수품을 벗어 던진다. 그의 소그림에는 어떤 잡물도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부족해서 소의 얼굴만 클로즈업되기도 한다. 이런 특성들은 시인 고은이 「소의 종교」라고 일컬었던 소의 절대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반면, 군동화에는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많은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봄의 어린이」에는 개미, 나비, 풀, 나무도 등장한다. 군동화로 분류할 수 있는 「제주도 풍경」에도 많은 게가 나타난다. 게들에 특유한 몸 동작은 게들이 수없이 많아질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따라서 군(群)이란 표현을 어린이만 많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 많음 속에서 중섭의 아이들은 절대성을 상실한다.
군동화는 박용숙의 표현처럼 『서로가 서로를 즐겁게 하는 공희(共戱)의 세계요, 친교의 동작이 강조되는 상대의 세계』다. 이와 같은 어울림의 세계는 한 마리의 소그림에서 처음부터 불가능한 장면이다.
대조적 특성은 소재의 숫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섭의 소는 그림 밖의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애쓴다. 소그림에서는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밖으로 향하는 외침이나 울부짖음 같은 것이다. 또한 소는 고개를 70도쯤 휘저어 강렬한 시선을 던지며, 무언가를 의미있게 바라본다. 따라서 중섭의 소는 정물이나 동물이라기보다는 사람에 가깝고, 요동치는 정신의 치환물(置換物)이다. 소그림이 표현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중섭의 소가 인간을 대신하여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변용의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반면, 군동화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세계에 빠져 있다. 중섭의 군동화에는 보통 4, 5명의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아이들은 갓난아이처럼 머리털이 없으며 하나같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고 있다. 군동화에서도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많은 경우 군동화의 소리는 갑자기 음악과 대화가 중단된 영화처럼 화면 속으로 흡수된다. 아무튼 아이들은 나비를 잡거나 물고기와 놀고, 게에게 잡히거나 끈을 잡는 등 놀이에 열중하며 어떤 행복을 즐기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아이들 나이가 10세 안팎으로 추측되지만, 그들의 자세와 태도는 젖먹이 시기로 돌아가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퇴행의 과정을 거쳐 군동화의 아이들은 고도로 양식화되며, 개성을 박탈당한다.
중섭의 소가 고개를 쳐든다면, 군동화의 아이들은 고개를 뒤로 젖힌다. 소가 금방이라도 돌진하려는 데 반해, 아이들은 완전한 무위(無爲)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외에도 소그림과 군동화에서는 색채와 선의 대비 등 여러 가지 대조적 성격을 지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중섭 예술은 소그림만 강조되었고, 군동화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나 만약 군동화가 없었다면 소그림의 진정한 의미는 반밖에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요컨대, 소그림과 군동화는 대조적 세계인 동시에 서로 다른 측면을 조명해 준다. 따라서 두 유형의 그림군을 「중섭 예술의 큰 대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② 엽서그림과 닭그림의 작은 대조
중섭 예술에는 또 다른 대조적 세계가 있다. 엽서그림과 닭그림의 대조적 세계가 그것이다. 그것은 큰 대조, 그러니까 소그림과 군동화의 사이에 위치한다. 따라서 「중섭 예술의 작은 대조」라고 부를 수 있다.
중섭은 동경에 유학중이던 1940년경부터 1943년 사이에 200여점의 엽서그림을 남겼다. 후일 그의 아내가 된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에게 편지 대신 보냈던 것들이다. 그리고 4점의 닭그림도 남기고 있다. 엽서그림과 닭그림의 대조적 세계는 연애와 결혼, 즉 마사코란 여인이 일차적 모티브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엽서그림 중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새사냥」과 「두 사슴」이다. 두 그림에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들 그림은 중섭의 연애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은 닭그림도 마찬가지다. 닭그림은 결혼생활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엽서그림과 닭그림은 모두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같은 구도에 놓인 셈이다.
그러나 두 유형의 그림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대조적 특성은 여러 측면에서 포착되지만, 논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각 그림에 나타나는 두 주인공의 시선 및 자세의 방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선, 「새사냥」과 「두 사슴」을 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두 주인공은 서로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새사냥」의 남자는 여자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활시위의 초점을 허공에 맞추고 있다. 그 남자의 외면 자세는 「두 사슴」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슴과 유사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새사냥」의 여자는 상대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가 취한 표정과 자세는 정작 연모하는 남자 앞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처럼 두 그림에는 시선의 외면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외에도 엽서그림 중에는 이와 유사한 구도를 갖는 그림이 여러 점 있다. 이들 엽서그림은 두 주인공이 서로 가까이 하려는 욕망이 넘쳐나지만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 엇갈린 시선과 외면의 틈 사이로 진한 에로티시즘을 노출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반면, 닭그림의 큰 특징은 명백한 방향성이다. 두 마리 닭은 언제나 정면을 향한다. 「투계」의 싸움과 「부부」의 입맞춤은 닭그림의 고정된 주제인데, 이들 닭그림에서는 「새사냥」과 「두 사슴」에서 나타났던 엇갈린 시선, 외면, 억제된 욕망이 완전하게 해소된다. 닭그림의 묘미는 부리가 맞닿은 지점에 형성된 강력한 집중력과 긴장감이다. 그것은 「부부」에서 더욱 강력한데, 그 집중력이 너무 강해서 두 마리 닭은 거의 한 일자(一)로 자지러질 듯하고, 그에 따라 화면은 금세라도 두 쪽으로 찢어질 것 같다. 그리하여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투계」조차 그들의 마주침은 비극적이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해 엽서그림과 닭그림은 안타까운 연애와 행복한 결혼이란 계기적 발전을 담고 있다. 또한 닭그림은 「새사냥」과 「두 사슴」의 발전된 세계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대조적 세계임을 보여 준다.
중섭 예술의 구조와 원형적 미의식
① 중섭 예술의 구조
중섭 예술에는 거의 체계적이라고 할 정도로 일관된 전개과정이 있다. 소그림과 군동화의 큰 대조, 엽서그림과 닭그림의 작은 대조가 그 전개 과정에 큰 틀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거대한 실체인 소의 해체 과정이요, 하나에서 여럿의 세계로 나아가는 증식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에 만남은 필수적인데, 엽서그림과 닭그림은 그러한 이행과정을 보여준다. 엽서그림과 닭그림은 소그림이 군동화로 나아가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중섭의 그림들은 서로 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그 전체적 구조는 다음과 같이 도해할 수 있다.
이 도해에 따르면, 중섭 예술의 구조는 소 - 닭 - 어린이와 가족, 다시 말해 하나 - 둘 - 여럿의 계기적 발전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중섭의 그림이 하나(소)에서 둘(닭)로 확장되기 전, 그외 엽서그림에서는 「엇갈린 시선」이라는 단계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중섭 예술의 전개과정은 중섭의 개인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을 요한다.
중섭 예술은 자신의 자의식, 연애와 결혼, 자녀의 탄생과 죽음 같은 개인적 체험과 정확하게 조응한다. 그와 같은 상관관계는 그의 예술에 어떤 내면적 논리가 잠재함을 암시한다. 그 내면적 논리란 이른바 중섭 예술의 자기표현성이며, 이 글에서 말하는 종족적 미의식이다.
이러한 구조 파악의 일차적 의의는 이중섭 이해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의 도해는 제작과정의 사적(私的) 성격 때문에 본격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아온 엽서그림을 중섭 예술의 본류에 합류시키고 있다. 사실 중섭 예술에는 사신(私信)과 본격적인 작품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 위와 같은 구조파악은 소그림 위주의 감상에서 벗어나 중섭 예술 전반에 대한 유기적 이해를 촉진한다. 여기에서는 군동화도 소그림에 버금가는 의미를 획득한다.
「새사냥」과 「두 사슴」을 포함한 200여 점에 이르는 엽서그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별도의 논문이 필요하다. 또한 중섭의 예술세계에는 청년시대의 연애감정을 표현한 엽서그림의 「억제된 에로티시즘」과 결혼 이후의 성적 느낌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음담패설류의 에로티시즘」이란 영역이 있다.
이들 두 유형의 에로티시즘은 「중섭 예술의 제3 대조」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위의 구조 파악이 중섭 예술 전반에 걸친 쟁점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② 원형의 미의식과 가족도
중섭 예술에는 「원형의 미의식」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중섭은 원형 그 자체를 선호하여 호박, 꽃, 천도복숭아 같은 둥근 물상을 화면 중심에 즐겨 배치하곤 했다. 또한 화면 전체가 원형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와 같은 사례는 「아이들과 끈」「춤추는 가족」 「제주도 풍경」과 거의 모든 가족도에 나타난다. 이들 그림에서는 주인공들이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또는 서로의 만짐과 접촉을 통해 하나의 원형을 이룬다.
또한 중섭은 말년에 원형광태(圓形狂態)란 특이한 정신병 증세를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원형광태란 눈(眼), 접시, 도넛, 문의 손잡이와 같이 둥근 물체를 보면, 극도의 아름다움과 극도의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그런 양가감정(ambivalance)이 그를 극단적 흥분상태로 몰아넣곤 했던 증세다. 실제로 원에 대한 미묘한 감정 상태가 그대로 노출된 그림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베잠방이를 입은 아버지와 벌거벗은 두 아들이 동그란 원을 만들어 놓고, 그 원형이 금지 구역이라도 되는 양, 그 안으로는 한 치도 더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 「판화 그림」이다.
원형에 대한 중섭의 특이한 태도는 지금까지 천재의 광기란 관점에서 다루어졌지만, 사실은 중섭 예술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소그림(하나)-엽서그림과 닭그림(둘)-군동화와 가족도(여럿)란 중섭 예술의 전개 과정은 궁극적으로 원형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섭 예술은 정신적 실체인 소의 해체 과정이요, 해체의 궁극적 모양은 원형이란 구조를 띠게 된다. 이러한 이해방식 속에서는 그의 소도 분화(分化)되기 이전의 원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중섭이 원형의 미에 천착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천재화가가 아니라, 한국미에 충실한 한국의 화가였음을 말해준다. 사실 원형의 미의식은 중섭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미의 궁극적 모양(prototype)이라고 할 수 있다. 김환기에서 원형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고려청자와 같은 고아함의 근원이다. 장욱진은 해와 달, 앞마당, 멍석, 나무 등 생활 주변의 모든 물상들을 원형으로 재처리한다. 김수근에 이르러 원형은 자궁 공간이란 모성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이만익은 신화가 탄생하는 원초적 상황에서 해와 달, 화합, 구도(救道)의 이미지를 원형과 연결시킨다. 그 외에도 한국미에 정통한 예술가들은 예외없이 원형의 미에 천착한다.
이들과 비교할 때, 중섭의 원형은 전통적 한국 가옥의 울타리에 가까운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가 가족도를 많이 그렸다는 것과 가족도가 대부분 원형이란 사실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결국 중섭의 원형은 가족적(종족적) 동질성을 전제로 하며, 잃어버린 가족[우리(we)=울타리=우리(enclosure)]에 대한 처절한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군동화의 어린이가 젖먹이로 퇴행 현상을 보이는 이유는 그의 원형적 미의식이 모성의 품속에 대한 기억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는 잃어버린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형의 일반적 느낌은 원만함이지만, 중섭의 원형은 붙잡음과 만짐을 통한 유대감의 표현이요 강력한 추구의 대상이다. 그와 같은 유대감은 물고기가 게와 어울리고, 게는 아이의 고추를 물고, 아이는 새를 붙들고, 새는 나뭇잎을 무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접촉의 연속 속에서도 강조된다.
확대된 자아와 종족적 미의식
① 자기표현적 특성과 확대된 자아
앞에서 본 것처럼 중섭 예술은 어떤 내면적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원형의 미의식을 지향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와 같은 물음은 한국 미술에서 근대적 자아 문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수용되며, 어떤 장애물에 봉착하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라는 중대한 질문과 관련되어 있으며, 조심스러운 해석을 요구한다.
중섭 예술은 자기표현적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중섭 예술은 중섭의 개인사로 환원될 수 있다. 그의 예술이 식민지 시대의 유미주의, 무분별한 예술지상주의, 타락된 르네상스 예술의식이란 비판을 받는 것도 그런 특성 때문이다. 중섭 역시 『그림은 나를 말하는 수단』이라고 말하였다. 중섭 예술의 자기표현적 성격은 움직일 수 없는 특징인 셈이다. 그런데 중섭의 자기표현적 성격은 해석상 몇 가지 주의를 요한다.
우선 중섭은 자신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자화상이나 인물화를 그리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자화상이 미술사에 등장한 것은 근대적 자의식이 형성되던 15~16세기의 일이다. 중섭의 그림에도 중섭을 상징하는 주인공이 많다. 그러나 중섭은 자기 자신을 어머니, 애인, 아내,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표현하였다. 닭그림의 부부가 그렇고 가족도가 그렇다. 중섭 자신은 언제나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는 자화상의 역사에서 참여 자화상의 단계를 연상케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중섭의 예술적 상상력은 결코 중섭 자신이 아니라 가족 또는 가족처럼 친밀한 것들을 통해서만 발휘되었다. 예컨대,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루 빨리 당신과 하나가 되어 작품을 표현하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하오』라거나, 『하루 빨리 당신과 아이들 곁에서 단 일년 만이라도 제작할 수 있다면 …』 하고 간절하게 염원했다. 중섭의 서간집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에서는 창작에 대한 열망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토로하는 무수한 표현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아내에 대한 애정표현 이상의 의미, 즉 중섭의 자아관을 알려주는 것들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활동은 공동체 구성원과의 관계, 구체적으로는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서 설정되고, 그런 관계 속에서 추동력을 얻었다. 중섭의 창작활동 역시 정신적 차원에서는 아내와의 공동작업 성격을 띠고 있다. 중섭은 40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그런데 그가 요절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겨우 4년간 지속된 아내 및 가족과의 이별이었다. 가족과의 이별, 아내의 부재는 그의 창작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연적 생명마저 앗아갔던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중섭이 『그림은 나를 말하는 수단』이라고 할 때의 나는 중섭 개인을 지칭하는 「근대적 나」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나는 1차적으로는 가족까지 확대되고 가족과 결합된 나이며, 2차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 「확대된 자아(extended-self)」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상황은 소그림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중섭은 『저 소는 나』이며 『나는 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중섭의 자아는 소라는 친숙한 동물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다. 따라서 중섭 예술은 표면적으로 자기표현적이나, 내용적으로는 공동체표현적일 수밖에 없다. 중섭 예술의 전체 구조가 놀랄 만큼 단순한 체계를 지니는 것도 그의 예술이 공동체로 확대된 자아의 표현이란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② 종족적 미의식과 중섭 예술의 방법론
중섭 예술의 진정한 특성은 그의 예술이 종족적 미의식으로 충만한 세계라는 것을 파악할 때 그 전모가 명확히 드러난다. 중섭 예술의 표현양식은 전적으로 근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중섭 예술의 정신적 특성을 한 단어로 표현할 때, 종족미(種族美)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다. 그의 작품 세계는 성스러움과 의미심장함으로 가득한 종족의 세계다. 이와 같은 표현양식과 표현정신의 괴리가 중섭 예술에 미묘한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얼핏 보면 중섭 예술은 개인사 또는 가족사로 구성된다. 그러나 중섭 예술은 그 이상이다. 중섭은 소와 닭, 게와 어린이, 물고기와 나무들을 자신의 그림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 과정에 중섭의 독특한 방법론이 끼어든다. 중섭이 소재를 이해하는 방법은 탁자 위에 놓인 사과를 인지하는 것과 다르다. 중섭은 일단 소에 사로잡히고 난 후, 해가 지도록 들판에 앉아 소를 관찰했다. 그냥 관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소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보고 또 보았다. 너무 그러다가 소도둑으로 몰렸던 일화는 유명하다.
소에 대한 중섭의 태도는 중섭이 소와 정신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과정을 보여준다. 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닭이 중섭의 소재가 되기까지 중섭은 닭이(彛)가 오를 정도로 방 안에서 닭과 함께 뒹굴었다. 그리고 그 닭을 잡아먹기도 했다. 그리고 닭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면, 닭은 그제서야 중섭의 소재가 됐다. 중섭이 소재를 파악하는 방식은 소재와 친밀해지는 과정, 몸으로 관찰하는 몸찰이었다. 또 중섭이 소재를 몸찰하는 방식은 종족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통과의례, 그것도 의미심장한 통과의례를 치르는 것에 비유할 수가 있다.
중섭이 창작행위에 많은 터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종족적 미의식을 엿보게 한다. 『한두 번 본 것은 그릴 수 없다』는 것도 그와 같은 터부의 일종이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반복 관찰의 여부가 아니라, 종족 같은 친밀성이 확보되었느냐의 문제였다. 그는 여자와 남자 어른을 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정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자화상, 초상화, 풍경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근대적 자아의 표현양식으로 등장한 이들 장르의 그림이 중섭의 종족적 미의식을 반영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중섭은 「배에서 바라본 갈매기」를 갑자기 그릴 수 없었고, 지독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레스토랑에서 연인과 더불어 식사하는 풍경」을 그려야 하는 신문연재소설의 삽화그리기를 거절한다.
중섭의 종족적 미의식은 예술과 인생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평론가들은 중섭을 예술지상주의자라고 이해해왔고, 세간(世間)에는 『처자식도 버리고 그림만 그리다가 미쳐 죽은 사람』이란 유미주의자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사정은 오히려 정반대다. 많은 경우 그는 예술이 인생에 봉사하기를 원했으며, 중섭 예술이 때때로 주술화(呪術畵)의 경향을 띠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사실 중섭의 정신세계에서는 그림조차 삶의 일원으로 참여한다고 보아야 한다.
중섭은 팔삭둥이 첫아들이 죽었을 때, 『우리 새끼 심심하지 말라고……』 염원하며 그림을 그려 관에 넣었다. 이것이 군동화의 시발점이다. 또 중섭은 친구의 쾌유를 빌 때나 친구의 부고(訃告)를 접했을 때의 슬픔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도원(桃園)」은 중섭이 열망한 「대표현」(이중섭은 자신이 열망한 작품세계를 스스로 대표현이라고 불렀다), 벽화의 세계를 가장 근접하게 보여주는 그림인데, 신기하게도 「일월도(日月圖)」나 「장생도(長生圖)」를 빼닮았다. 이들 그림이 주술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들은 중섭 예술의 정신적 배경이 다분히 종족적이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들이다.
맺음말
화가 이중섭에 관한 기존 논의는 주로 표현양식에 관한 것이었다. 예컨대, 그의 예술이 루오, 마티스, 피카소 중 어떤 요소를 더 많이 간직했느냐는 문제가 중요한 관심거리였다. 이는 소그림의 강렬한 표현주의적 경향과 그의 천재적 영감 및 한국 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불가피했던 논의과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섭은 미술사조상의 어떤 표현양식도 배타적으로 고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그림의 표현주의, 닭그림의 낭만주의적 경향, 군동화의 민화적 기법, 엽서그림의 상징주의, 음담패설류에 나타나는 다시점(多視點)의 큐비즘 등은 중섭이 다양한 표현양식을 자유자재로 차용했음을 보여준다. 즉 그에게 있어서는 표현양식보다 표현내용이 압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러한 특성들은 예술을 공동체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미의식, 중섭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참다운 화공」의 예술관을 보여 준다.
그러나 중섭 예술을 근대의식의 결여, 근대적 자아의 부재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한 이해가 아닌 것 같다. 그와 같은 견해는 서양의 근대성을 무오류의 진선미로 이해하는 식민사관에 따른 견해일 뿐이다. 오히려 중섭의 미의식은 외재적으로 주어진 서양의 현대 예술을 수용하여 한반도란 풍토에 걸맞게 재창조하는 적응과정, 고난에 찬 투쟁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확실히 중섭의 방법론은 『본 것만 그리겠다』는 쿠르베나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하면 냄새까지도 그릴 수 있다』는 세잔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그의 예술은 몸으로 느끼며, 가족처럼 친해진 것만 그릴 수 있다는 일종의 몸각주의 또는 범가족주의, 그것을 통해 이기적 또는 좁은 의미의 사적 세계를 넘어서는 그런 예술이다.
그러나 중섭은 일본 화우(和牛)와 스페인 투우에 대해서 한국의 고생하는 소를 대립시키고, 한두 번 본 것은 그릴 수 없는 대신 자신과 친밀한 것만을 소재로 삼고,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전래의 익숙한 것만을 고집하고, 부정타는 것과 부정타지 않는 소재를 구별하며, 자신의 가족을 성가족(holy family)으로 이해하는 대신, 타인의 가족을 성스럽지 않은 가족으로 이해했을 여지를 내포하는 등 체계적이며 계서적인 종족적 미의식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에 중섭 예술의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섭의 절친했던 친구요 후원자였던 구상(具常)은 「성당 부근」을 다룬 회고문에서 이와 같은 한계를 암시적으로 다룬 바 있다. 중섭 자신도 정신병이 극도에 달했을 무렵, 그와 같은 한계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넘어보려고 애를 썼다. 가족이 아닌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려 했고, 천주교란 세계를 통해 삶의 고통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섭은 그가 열망한 대표현의 시대를 열기에는 너무나 닫힌 세계의 미의식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을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중섭은 그러한 한계 때문에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는 인생과 예술이 어느 지점에선가 타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이 글에서 중섭 예술이 얼마나, 어떻게 한국적인가를 다루지 못했는데, 그의 비타협적 예술관은 참으로 독특한 한국미를 창조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중섭의 한계란 것도 분석적 차원의 논의일 뿐, 그것이 없이는 중섭 예술이 존재할 수 없었던, 중섭 예술의 일부였다. 따라서 나는 중섭 예술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종족적이라기보다는 아름답다고.
◆당선소감
당선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기뻤지만 쑥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노래를 못 하는 사람이 얼떨결에 「전국노래자랑」에 나가게 된 격이라고나 할까. 예술과 학문이 삶을 표현하고 풍요롭게 하는가 하면, 신분을 높이고 위선을 은폐하기 위한 장식물로 기능하는 경우가 있다. 이중섭처럼 예술과 사랑을 죽음에 이를 정도까지 밀어붙였던 비극의 예술가들은 매우 그럴 듯한 장식물이 된다. 지난 40년 동안 중섭 예술은 다분히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며 사랑을 받아왔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것도 없는 것 같다. 우리의 해방 50년은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쓰며 살 수 없었던 격동의 세월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젊은 세대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느끼며 글을 써야 할 것이다.
나는 이중섭론에서 종족적 미의식(種族的 美意識)이란 정체불명의 개념을 사용했는데, 이번 수상은 그것이 받아들여졌다는 뜻인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점이 신기하고 기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격려와 충고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림이 걸려 있는 곳을 좋아한다. 더구나 그 그림이 누군가의 특별한 관심 속에 걸려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림에 관한 나의 글쓰기 역시 그와 같은 관객의 입장에서 시작된다. 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관객의 입장을 고려하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