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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호뉴욕전

 

 

 

 

 

 

 

 

 

 

 

 

네이트지식인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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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olganmisool.com/200108/artist_01.htm출처

 


감각의 통제와 의식의 조절 이동석;미술비평
비디오아티스트 조승호

 

 

 


아직 조승호라는 이름은 국내에서 낯설다. 그러나 한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중에 세계 정상권에 가장 근접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별 이의는 없을 듯하다. 사실 그 동안 작가가 거친 경력은 누구보다 화려하다. 그 하이라이트인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비디오 전용실(가든 홀)에서의 개인전을 비롯해서, 휘트니 미술관, 필라델피아 미술관, 위싱턴 국립 갤러리, 런던 국립 필름센터, 호놀룰루 미술관 등의 비중 있는 전시에 작가는 지속적으로 소개되었다..
또 조승호는 ZKM에서 1996년과 1998년에 연이어 ‘TOP 50(Internation Award for Video Art)’에 선정된 바 있고, 미국 최대의 비디오 아트 배급사 겸 에이전시인 EAI(Electronic Art Intermix)와 유럽의 유력 배급사인 몬테비데오(암스테르담)에 한국 국적 작가로는 유일하게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해외에서의 경력이 한 작가를 평가하는 데에 불변의 잣대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선입견을 불러 한 작가를 이해하는 데에 벽으로 작용해서도 안 될 것이다. 흔히 한국에서 한 작가의 해외 경력은 무분별한 상찬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맹목적 비판이나 편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질문화의 혼성과 선택적 조합.
원래 조승호는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디자인은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다. 그러나 영화를 좋아하고 음악에 심취했던 그는 곧 바로 비디오 아트로 전향한다. 그에게 비디오 아트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경이로운 경험이었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후 그는 비디오 아트의 세계를 한번도 떠나 본 적이 없다. 조승호가 뉴욕에 체류한 지 벌써 14년이 지났다. 현대미술에서 이질문화가 만나서 발현되는 방식은 확실히 흥미롭다. 전통적 의식이 서구의 시각적 전통과 마찰하며 뒤섞이는 양상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문화적 패턴이 직조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디자인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비디오를 시작한 조승호의 경우, 국내에서 공유된 경험이나 의식을 한국의 감각적 전형으로 조직하는 데에 낯설다. 이를 뒤집어 이야기하면 한국미술의 감성적 틀이나 정서적 관성에서 작가가 자유롭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로라 막스(Laura Marks)도 《영화의 피부(The Skin of the Film)》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서구의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승호가 동아시아의 전통적 문화의식보다 서구 비디오 아트에서 형성된 전통에 충실하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는 조승호 같은 혼성국적의 작가들이 서구의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타문화적인 것이기보다 서구의 문화적 흐름에서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조승호의 작품에서 이질 문화간의 혼성적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유래된 자의식에 대한 탐구와 서구의 ‘시각성(visiuality)’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선택적으로 조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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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류>비디오설치 1994 .

 


여기서 ‘선택적 조합’이라는 로라 막스의 언급은 일단 설득력이 있다. 작가 역시 ‘동양적 분위기를 지닌다’는 평가에 대해 자신의 작품 속에 “의도된 것은 특별히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전통적 의식이나 고유의 사유체계가 작품 속에 기계적으로 반영되거나 인위적으로 의도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조승호가 불이나 물, 그리고 땅과 하늘의 이미지를 즐겨 사용한다고 음양오행의 철학적 개념을 그의 작품에 대입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한국의 정서나 사유방식, 그리고 감성의 기저는 작품 안팎에서 ‘스며 나오고, 배어 나오는 것’이다. 물론 태생적 연원에서 축적된 의식이나 공유된 시간 속에서 누적된 특유의 정서에서 자유로운 작가는 아무도 없다. 이와 관련하여 언젠가 조승호는 “눈을 뜨는 것은 곧 마음을 여는 것이다”는 말로 동아시아의 시각적 전통이 시선의 지배력보다 관계성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의식의 흐름과 심리의 흔적.

 


조승호는 초기부터 비디오 설치와 싱글채널 비디오를 병행해 왔다. 어느 쪽이든 작가의 작품은 영상 이미지의 완성도와 밀도를 우선한다. 그래서 작가는 ‘설치'라는 형식마저 조심스러워한다. 설치에서는 구조물이나 오브제가 공간적으로 환기하는 효과 때문에 화면으로 보여줄 수 있는 내용과 시각적 범위가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의 비디오 설치에서는 모니터와 유사한 형태를 이루는 입방체 구조물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조승호의 비디오 설치는 그 배치나 구조가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비디오 이미지의 내용과 분명히 맞물리는 긴밀성과 시간·공간적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해 조승호의 작품은 개념과 양식에 있어 상당히 다양한 진폭을 보여 준다. 어떤 작품은 영화적 내러티브를 강하게 갖추고 있으며, 어떤 작품은 편집 효과에 의해 ‘구성된 이미지’가 무작위로 충돌하기도 한다. 그 영상 이미지가 주는 분위기도 때론 차갑고, 기계적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때론 시적인 정취를 섬세하게 담아 내기도 한다. 가령, 싱글채널 작품 〈아이리스(Iris)〉는 시적인 분위기와 서정적인 영상미가 압권인 작품이지만, 〈차가운 조각들(Cold Pieces)〉은 물의 흐름이라는 자연현상마저 톱니처럼 분절하여 기계적이고 금속적인 이미지로 치환한다. 그런가 하면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에 설치된 〈체류(Sojourn)〉 같은 작품은 신체의 일부분을 시차를 두고 우연히 점멸시킴으로써 일상에 틈입하는 관념적인 불안과 공포를 노출시키기도 한다. 또 〈동일한 시간(Identical Time)〉처럼 인간의 고립과 고독을 문학적인 서사로 번안하기도 하고, 설치작품 〈헤지라(Hejira)〉나 〈97-67〉에서 보듯이 생명과 일상을 기계문명의 메커니즘에 냉소적으로 대비시키기도 한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승호의 작품은 대개 자의식적 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작가의 비디오 이미지들은 의식의 흐름이나 개인의 심리적 궤적이 섬세하게 감지된다. 응축되고 시공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응결된 심리의 흔적이 섬광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유동적인 의식의 흐름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순환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상은 단편화된 신체나 조작된 시각적 효과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미묘하게 변형된 대상의 이미지에 잠재되기도 한다..

 


가령,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비디오 전용실에 설치된 작품, 〈…한 가운데…(…in the midist of…)는 ‘샤워’라는 일상적 행위를 심리적으로 번안한 작품이다. 바닥으로 투사되는 대형 스크린과 허공에 매달린 6개의 모니터로 이루어진 비디오 설치작품에서 작가는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지닌 심리적 공간으로 치환한다. 카메라의 앵글과 편집 효과에 따라 수면 위의 파장이 만드는 이미지의 나타남과 사라짐이 의식의 이면을 추적하여, 일상을 사적이고 불가해한 영역으로 몰고 간다. 샐리 버거(Sally Berger)는 이 작품이 ‘마음의 눈’을 통해 숨겨진 시선을 발굴함으로써 리얼리티의 표면을 넘어 내부 의식으로 육박해 간다고 말한다.

 


개념과 시각 효과의 균형.

 


이처럼 조승호는 사적 영역이나 일상의 현실을 낯설게 변주하여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는 데에 탁월한 감각을 보여 준다. 알전구 속에서 점멸하는 필라멘트에서도 만상의 빛과 어둠이 있고 무심히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에도 드넓은 바다의 이미지를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들은 비현실적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보는 이의 심리적 반응이나 암시적 효과를 극적으로 증폭시킨다. 가령 〈로빈슨 혹은 나(Ronbinson or Me)〉에서 가스레인지의 불꽃이 일식(日蝕)처럼 장엄한 자연현상을 연상시키고, 〈분석(Analysis)〉에서 단속적으로 켜지는 성냥불들이 기억과 (무)의식의 편린을 관객에게 환기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작가의 비디오 작업은 보편적 지각의 허점을 이용하여 관객의 의표를 능청맞게 찌르는 시각적 반전이 있다. 그것은 관습적 지각이 놓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작가의 예민한 감수성이 만든 또 다른 지각적 세계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작가는 현실적 모티프를 섬세하게 관찰하여 포착하고, 편집 과정에 그 이미지를 끊임없이 조절하고, 통제하고, 조작한다..

 


작가는 연출과 촬영, 음향과 편집 등 비디오 작업에 요구되는 제작 프로세스를 혼자서 수행하기 때문에 자신을 ‘원 맨 밴드(One man band)’로 설명한다. 그중에서 편집 프로세스는 대단히 중요하고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그 과정은 단지 촬영된 영상을 적절히 조합하는 후반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또 하나의 창조 과정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그 과정은 감각의 통제와 의식의 조절을 통해 새로운 의식의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비교적 오랜 제작 기간을 거치는 것도 비디오 편집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가히 ‘편집적(?)’이라고 할 만한 비디오 편집과정은, 우연적 효과를 존중하기도 하지만 초를 나누어 프레임 한 장 한 장을 헤아릴 만큼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다. 사물의 의미가 ‘배치’에 따라 바뀌듯, 영상 이미지 역시 앵글이나 속도, 색조나 음향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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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가운데...>.

 


비디오 설치 3채널 6모니터 1997.

 


1980년대에 비디오 아트를 시작한 작가는 아날로그 편집기 세대다. 작가가 테크놀러지에 대해 배타적 이지는 않지만 미디어의 기술적 효과를 섣불리 추수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지금은 디지털 편집기를 쓰고 있지만 그 과정은 철저하게 수공적인 것이며, 그 시각효과 역시 개념적 개연성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다. 가령, 싱글채널 작품인 〈선형추적(Linear Tracking)〉에서 영상이미지의 해상도를 떨어뜨려 마치 회화의 점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이것은 물 위에 반사된 이미지와 단속적으로 삽입되는 폭설 장면과의 호응을 위해 의도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작가의 작업이 지니는 미덕은 작품의 개념과 시각적 효과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또 영상이미지가 미학적으로 완결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미디어 자체의 논리나 기술적 효과에 쉽게 함몰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선(線)/불(火)>비디오설치.
2채널 2비디오 프로젝터 1999 .
지각적 애매함의 옹호.

 

 


기본적으로 작가는 실재하는 이미지의 명징성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본다는 것이 곧 세계를 파지(把持)하는 것’이라는 시각의 지배력과 통어력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작가에게 실재하는 이미지들은 의식과 기억, 환영과 시지각의 경계 위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시각과 상상작용, 지각과 일루전의 간극과 진폭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가령 〈선/불(Line/Fire)〉에서 흔들리며 유동하는 지평선처럼, 보이는 것과 연상되는 것이 완벽하게 일치되었다고 느끼는 다음 순간, 양자는 아득히 멀게 분리되어 버린다..
실재하는 이미지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은 곧 언어나 지각의 모호함을 옹호한다는 뜻이다..
〈호흡(Respiration)〉에서는 붉은 비상등이 끊임없이 돌아가고 그 사이에 단어들이 쉴새없이 떴다가 사라진다. plumb, goi, drag, freak, blur…, 그 단어들은 대체로 어둡고 애매하고 약간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것들이다. 따라서 그 단어들이 의미도 고정되지 않고 진자처럼 유동하는 의식 속에서 시시각각 달라진다..
조승호의 작품 속에서는 음성이나 문자적 텍스트가 자주 등장한다. 〈아이리스〉에서는 나지막하게 내레이션이 삽입되고, 〈마약과 기억(Opium & Memory)〉, 〈호흡Ⅰ,Ⅱ〉, 〈97-67〉에서는 의미망을 이룰 수 없는 단어들이 맥락 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싱글채널 작품 〈로빈슨 혹은 나〉에서는 칼 크롤로브(Karl Krolow)의 시구가, 〈동일한 시간〉에서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구가 자막처럼 삽입된다. 그가 애매모호한 단어와 함께 시구를 자주 차용하는 것은, 통사적 오용이 허용되는 시의 애매함과 함축성이 영상 이미지의 다중 의미와 유연하게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중 옥타비오 파스의 동명 시(El Mismo Tiempo)를 명제로 차용하여 동틀녘 뉴욕의 지하철 풍경을 담아 낸 조승호의 싱글채널 비디오 〈동일한 시간〉은 한 편의 탁월한 영상 시다. 개인적으론 작가의 작품이, 옥타비오 파스의 시 만큼, 아니 그의 시보다 더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도시에서의 '남루한 여행’을 노래했다고 생각한다..

 


<차가운 파편들>.
싱글채널 비디오 11분 20초 2000.

 

 


지하철 차창에 어지럽게 되비치는 반사광 사이로 간간이 강렬한 불빛이 가로질러 간다. 그 불빛을 다시 산란시키는 물방울들은 손에 잡힐 듯 촉각적이다. 사이사이로 텅 빈 지하철 안에는 시선을 잃어 버린 창백한 얼굴들이 흘러간다. 그 희미한 얼굴 위로 다시 날카로운 불빛이 할퀴고 지나갈 때 비로소 관객들은 이 모든 풍경이 차창에 반사된 이미지임을 깨닫는다. 작가는 말한다. “저 불빛이 지나가는 것처럼 나는 저 사람의 인생을 모른다. 그냥 흘러가는 움직임이 좋고 아름답다.”.
여기서 로라 막스는 〈동일한 시간〉을 분석하며 조승호의 비디오가 ‘보는 것(seeing)'의 촉각적 성질을 강조함으로써 자명한 지식을 산출하는 시각(vision)의 기능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명백하게 자명한 형태는 어디에도 없고 이미지의 지층도 카메라 렌즈의 표면과 불확실하게 관계를 지닐 뿐이다. 마찬가지로 아득히 먼 사물도 자신의 몸에 비추면 일 인치(inch)도 못 되는 것처럼, 사람의 시각 역시 이미지의 표면이나 지각의 결정 면과 촉각적인 관계를 지닐 뿐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로라 막스는 조승호의 표면적이고 의표를 찌르는 영상 이미지도 일종의 문화적 치환과 관련된다고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다시 말해 조승호가 지각의 자명함을 회의하는 것도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체류하며 작업하는 현실, 혹은 일상적으로 퍼붓는 맨해튼의 감각적 포화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조승호 역시 뉴욕을 ‘지옥’이라고 서슴없이 표현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뉴욕에서 단신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해 나름의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작가는 원했던 만큼 길을 가보지 못했고 아직은 뜻과 여력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현재2001.8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리는 동안에도, 다섯 개 국가에서 작가의 최근작이 소개되고 있다.

 

 

부산미술들여다보기ㅣ조승호등

 

자연과인간조화의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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