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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롯데갤러리 개관 4주년 기념전시회 세미나
2004년 3월 15일 (롯데백화점 롯데갤러리)
전통회화에 일관된 지적 본질
Intellectual Essance of
the Korean Traditional Pictures & the Fine Art
fineart
유교연구소 소장 하이안자 유덕조
韓儒學習院 유교연구소
서구 괴정동 93-50 Tel. o42-525-6154
축 사
하이안자
롯데갤러리 개관 4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기회를 빌어 우리 지역사회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꾸준히 문화행사를 열고 계신 롯데 운영진 제위께 각별한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사려 깊게 추진해주신 친애하는 윤후영 큐레이터께도 깊은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1,2부 전시에 흔쾌히 동참해주시고 귀중한 작품을 출품해주신 작가님들께는 그 열성과 진지한 의식에 대하여 형언할 수 없는 저의 가장 깊은 감사의 정념을 올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 자리에 참석하여주신 학계 예술계 인사 여러분 그리고 문화예술을 애호하시고 우리 문화생활의 진정한 증진을 위해 몸소 생활미학을 실천-향유하시고 계신 지성인 여러분께 특별한 우의와 고마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크나큰 일치의 기쁨을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저의 충심으로부터 나오는 경의와 사랑을 드리며 저의 두서 없는 세미나일지라도 모쪼록 여러분의 과분하신 기대에 만분지일이라도 부응하여 유용하실 수 있다면 저의 무상의 행복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한한 행운을 빌며......
롯데갤러리 개관 4주년
기념전시회 세미나(2004-3-15)
전통회화에 일관된 지적 본질
유교연구소장 하이안자
<1>
우리의 선진화된 오늘을 가져온 근 100년정도의 근대사에서는 전통에 대한 폄하와 냉담한 평가가 지속되었고 그 반면 서구를 학습하고 모방하려는 움직임이 점증하였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근대화된 오늘의 우리 사회와 문화는 당연히 서구취향의 미학과 가치관을 강렬하게 표출해오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과의 그늘에서 오늘의 여러 부정적 세태가 조성되었고 민족적 감성과 지성을 왜곡하는 문화적 상황을 또한 초래하였다. 그 <문화적 상황>이란 결국 우리의 방기할 수 없는 역사적 힘이며 문화의 원동력일 전통성의 약화 내지 훼손과 혼란을 지칭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성공과 좌절과 성취와 상실의 극명한 대립구조의 근대사에 자체에 대한 심각한 성찰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자신의 목소리와 자아의 감성적 울림을 중심으로 영위하는 우리 미술인들은 처음 충격적이고 경이적 영향력의 세례를 동반한 서구적 미학과 회화를 극히 인상적으로 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생득적으로 끊임없이 전통성을 지키려하고 또한 이를 부단히 모색해왔다. 우리 문화와 역사의 유전자가 작가의 몸 속에서 진절한 감성작용을 지속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미술인들은 지적 유희를 능사로 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작업을 의식적으로 결연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사상사의 부활을 절대 전제로 해야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학의 일반적 저변이 크게 부족한 대로 전통회화의 담당자들은 서구미감과 동아시아미학의 접목을 위해 노력을 지속해 온 것이 그동안의 가장 중요한 동향이었다. 아마 그것은 미술인 특유의 순수한 표현욕구와 전통화화의 미학적 절대 권능에 의해 가능하였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그들의 심절한 예술적 고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각층의 동아시아 역사 문화 사상에 종사하는 전문 연구자들은 성공적으로 그를 뒷받침할 개념적 이념적 사상적 기초를 충분히 구체적으로 제공해주지 못하였다. 현재 우리 사상사의 중대한 결함이다.
물론 그런 이면에는 (1)동아시아 사상사 혹은 유교사상사 자체의 오랜 왜곡의 역사가 작용하고 있고 (2)근대 이래의 일반 생활사와 지성사에 만연했던 어쩔 수 없는 자기비하와 자학의식이 있었다. 그러한 <서구 중세말의 르네상스의 필요상황>에 필적하는 우리 사상적 전통전승구조 자체의 불완전함이라든가 나아가 탈자존의 역사 동향속에서는 드높은 의기에 찬 사상이나 이채로운 작품이 불가능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는 오늘의 우리의 일반적 과제는 동아시아문화가 서구문화를 의연하고 당당하게 함섭하고 소화해야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문명과 제반 문물의 기초토대로서 그리고 미학의 지반으로서 일반 사상사를 평가할 때 동아시아 사상은 서구사상을 포괄할 수 있는 높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서구사상의 핵심은 자연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그 전형이 수립된 후 오늘의 서양철학과 과학으로 발전한 것이 그것이다. 동아시아에도 엄연히 자연철학이 있었으나 그것은 동아시아 사상의 한 요소로 다루어지는 것이었다. 동아시아 유학사상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처음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조선성리학에서 인성물성동이론(人性物性同異論)(주1)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가 우리전통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과거>가 <현재>를 숨쉬도록 활기차게 부활하면서 어떤 형식으로든 서구적인 것들을 극히 주체적으로 포괄하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2>
오늘의 문명적 전환기의 상황에서 우리가 민족사적으로 진정 의미 있는 문화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창조적 작업에 종사하는 경우이건, 감상자의 입장에서건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다. 전환의 시기일수록 역사적 사상적 <자기확립>이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비약이나 전진을 꿈꾸려해도 역시 먼저 <자아의식>의 위상의 확보는 더없이 중요하다. 서구중심의 문화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세계적 객관적 상황 때문에서가 아니라 모든 <개성 있는 창조적 삶>의 기초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에 이룩한 성과들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자아를 훼상하였다는 점에 기인한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사상일 수밖에 없고 특히 대다수 지성인이 그토록 경멸하였던 유교사상이 엄연히 우리 전통사상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반추하지 않고는 새로운 의식의 갱신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전통사상의 역사적 사실성을 밝히고 일반적 오류를 광정(匡正)하려는 것이 소론의 주요 목적이다
우선 가장 왜곡된 의식을 중심으로 중요한 과제를 지적한다면
............창조적 작업의 대전제
1)동아시아 사상은 철저한 경험적 사상이다. 결코 직관에 매달린 신비한 사상이 아니다.(고대사상 이래의 경험주의 회복)
2)어떤 새로운 의식과 사태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 절감하는 사태나 현상의 의미 이해가 닫혀있기 때문인데 역사적 전통과 사상에 대한 일반의 태도도 그와 같다. 속단과 왜곡이 그것이다. (근대적 가치관과 고정관념의 응찰 혁파)
3)유교사상은 동아시아의 문명권의 사상이며 그 본질이나 발원 남상은 동이족의 것이기도 하다. (문명사상의식의 재발견-제국유교와 보편유교, 동이유교)
4)삼재사상(三才思想/天地人)의 이해가 그 기초인데 사실은 삼재사상이 아니라 삼재사유양식(思惟樣式)이다. 삼재사유법이란 현상과 경험을 다루기 위한 보편적 사유양식이다. (사상적 정체성의 반추)(주2)
5)동아시아적 모든 행동적 표현은 문물인데 문물이란 문화와 물질이 아니라 의미의 발견과 창조를 지칭한다. (동아시아적 창조의 본질성 : 文明 -> 文物) (주3)
그러므로 위와 같은 왜곡구조를 해소하고 삼재적(三才的) 사유를 통해 새로운 지견을 창출할 것이 요구된다. 삼재라는 사상과 이념의 기본 구도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결여된 채 무성히 회자되는 이름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주4)
<3>
오늘의 문명적 사상적 제 사태를 반영하고 새로운 회화성을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절대적 대전제로서 한국회화의 전형에서부터-산수나 화조 인물 풍속화를 막론하고-지속일관되는 어떤 문명사적(文明史的: History of civilization as a Light and Pattern) 의식이 추출될 수 있다면 한국적 회화성의 에센스를 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관된 의식의 추출이 요구되는 것은 다름아니라 오늘날 문화 사회의 각 분야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이 절실한 명제로 떠오르는 지금 전통회화도 창작인 이상 그 화론의 방향과 내용이 제한 없는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너무 다양한 논의가 가능하여 현재의 <비전통적 미학적 개별화론(個別畵論)>만으로는 손쉽게 그 본질에 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일관성의 범주에서 생각하면 개별화론의 구체적 설명이나 확립된 미적 개성을 넘어 하나의 본질론이 비록 고식적일 지라도 우선적으로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개별화론을 일정수준 집적함으로써 본질론을 재 구축해야하므로 아직 충분히 저변의 화론축적이 충분하지 못한 현재의 본질론은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는 원론 내지는 시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전체전통회화를 일관할 수 있는 의식의 길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데 있다. 전통적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따르면 그 하나로 귀일하는 도정은 무한하기 때문에 어떤 회화도 그와 같은 리(理;the Dynamic Truth of the World and Universe as a Order of General Beings)를 지향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러나 어떤 길이든 그 모색할 수 있는 여지도 또한 허다한 것이므로 일관성의 탐구(道,理의 追究) 역시 개별화론 이상으로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선은 당장의 구체적 현재적 현상적 심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된다. 바로 지금의 순간을 숨쉬는 나의 마음과 정념으로부터 조건 없이 자유롭게 회화적 달통의 길을 바라보려는 태도가 요긴하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현저성이 강하고 대표적인 문명(Sic-Light and Pattern) 개념으로 먼저 논의를 여는 것이 긴요하다고 생각된다.
동양문명은 예(禮)의 문명이라고 말해왔다. 그에 필적하는 회화적 양상은 획선(劃線)의 묘사일 것이다. 물론 공간에 칼라를 가미함으로서(물론 준법의 사용도 있었다) 표현대상의 개별성을 증강하였으나 실은 칼라링보다는 선의 변화를 통해서 회화적 문법을 구축해왔었다. 단적으로 동아시아 회와의 색은 개별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선은 본질성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색보다 선이 강조되었다는 것은 동아시아 회화가 <본질묘사적>이라는 점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1.회화적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색채적 표현을 절제 내지 포기해야 하는가
2.개별 개성의 정밀한 묘사를 추구하는 일반 회화성은 무의미한가
3.면과 입체감을 현저하게 강조하는 묘사는 비동아시아적인 것인가
4.추상화의 개념은 어떤 동아시아 이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5.오늘의 다양한 새로운 미술운동을 어떤 견지에서 전통으로서 소화할 수 있는가
....미리 결론적 해법제시한다면...이들 문제에 적극적 전향적 자세 필요
하는 문제들이 그것이다. 우선 이런 문제들에 대한 포괄적 답을 준비하면서 소기의 일관론을 개진하려고 한다. 그리고 오직 <역동하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관념이 새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또 어떤 의미에서든, <현재속의 과거>가 어떻게 유의미하고 당당하게 실존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려한다. 역사와 전통이란 현재화됨으로써 부활되는 것이며 <관행과 전통과 오류와 성취가 범벅된 과거 가운데 의미를 확보한 것>라고 믿는다. 즉 역사는 언제나 재발견의 통로를 통해서 부단히 새 생명을 획득하는 실존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회화적 본질론은 역사적이지만 원론적으로는 단지 가장 진성한 새로운 발견의 노력으로 귀결되는 것이며 그 참된 성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통회화는 크게 형체선과 묘사선으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형체선은 존재의 범주이며 생명이나 존재의 외연이다. 그리고 공간을 차지하는 회화적 힘의 크기와 철학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중심 선묘는 단순한 형상의 묘사임에 그치지 않고 존재 의미와 존재 위상을 동시에 나타낸다. 그 내부에 묘출되는 색과 선들은 개성을 나타내며 그 개별성이 전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분석된 구조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존재의 내부표현을 병행한다. 그것은 형체 외연선의 표현의 본질을 부연 서술하는 의미도 갖는다.
본질론의 논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외연선을 주로 말하게 된다. 이미 언급한 대로 회화적 외연선은 오늘의 일반 회화가 가지는 표현욕구를 집약적으로 묘현한다는 특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전통회화의 선은 개곡선의 연결로 이루어진다. 숨막히는 폐곡선은 포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회화가 1)존재와 존재 2)존재와 공간 3)존재자체의 내외 사이에 상시 <융통의 문호를 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열린존재성을 그 회화의 생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가장 극명하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 한자-한글이며 서예일 것이다.(주5)
상호간의 문호를 여는 양상은 부분적 선의 특질과 표현을 위해 연결된 전체선의 형상이라는 양차원에서 구현되는데, 전자는 선의 질감 선 자체의 내외의 내반 외전 등 미세한 변화를 통해 적극적 개방적 의지를 구현하고 후자의 경우 하나 하나의 개곡선의 연장선으로 타원을 형성함으로서 다른 개곡선과의 연합을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주6) 우리가 팔을 똑바로 펴서 칠판에 마음껏 휘둘러 원을 그으면 정확한 원이 그려진다. 그러나 팔을 굽히고 자연스럽게 원을 그으면 팔이 조금씩 펴지면서 대체로 타원이 그려진다. 무수한 타원적 취향을 가진 개곡선의 겹합으로 형체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타원성도 개방성을 내포하므로 또한 중요한 본질일 것이다. 타원과 선은 환언하면 <존재>와 <힘>의 포용적 양식을 차례로 의미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너무 할말이 많다보니 두서 없는 글이 되었음을 양해바란다. 요컨대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미술이란 범주적으로는 문물에 속한다. 이 때 <문물>이란 원어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돼야 한다. 그 문물이란 중용조화사상에 기초한 삼재의 사유법으로 구현된 것이어야만이 동아시아적 혹은 한국적인 것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적이란 말은 결국 제국적문화와 동이적문화가 확산되어 이루어진 보편한 가치를 가지는 문명의 고유한 범주이며 인류가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이상과 보편문명의 한 극단을 보여주어야 한다.
문명이라는 말은 문물의 의미와 그 가치적 향유를 동시에 의미하는 또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문명이란 삼재중에 <인>의 범주를 말하는 것인데 문명이라는 용어가 당당히 독립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천> <지>의 정신과 질서를 함축하고 일치화된(7)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은 <천지> 그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전연 새로운 창신의 의미를 지녀야하기 때문에 결국 존재와 그 의미의 확대를 이룩하기 때문이다. 사양사상사에서도 이런 점을 지적하여 <제3의 차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서양의 이 용어는 단순히 초월의 욕구를 의미하는 것이며 담담하고 지속되는 힘으로서의 사상인 문명개념과는 엄격히 변별된다. 우리는 그러므로 구태여 그용어를 빌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초월적 가치란 자연스럽게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그림과 일반회화는 재현이나 모사가아니며 궁극적으로 전연 새롭게 창출된 그 무엇이다. 그 새로움이란 <전연(全然) 새로운 것>이 최고의 이상이다. 그것은 새로운 감각, 새로운 형체, 새로운 상황을 종합적으로 현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새로움은 동아시아사상의 최고 덕목이며 이상이기도 하였다.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전통적으로 새로움의 창출도정은 『대학(大學)』의 <명덕(明德)>으로부터 출범된다. 명덕이란 일종의 빛의 사상이다. 이 경우 빛이란 궁극의 우주정신 또는 우주심이다. 그러나 명덕은 명상으로 얻어진 도(道)가 아니며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의미한다. 격물이란 단적으로 사물분석이다. 치지란 단적으로 통일된 세계이해의 지적 성과이다. 공자의 일관(一貫)이 그것이다. 여러해 전 프랑스 철학회에서 <철학이란 세계를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말과 상통한다. 명덕의 과정은 다음의 6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대학』에서 말하고 있다.
1.지(止)-착안 이해의 필요 절감
2.정(定)-사고의 범주 분석의 대상 선택
3.정(靜)-심찰 분석 종합 등의 내면 과정
4.안(安)-자아적 감성과의 조응 일치화
5.려(慮)-모든 사상(事象)에 대한 배려 융섭
6.득(得)-최종적 이해 성취
등이 그것이다.
명덕의 구현과정은 명명덕(明明德)이라고 하는데 다시 8단계로 나뉜다.
1.격물(格物)-사상분석
2.치지(致知)-현상의 궁극이해
3.의성(意誠)-진심의 회복
4.정심(正心)-성선(性善)의 견지-의지화
5.수신(修身)-내면 행동화
6.제가(齊家)-인간화
7.치국(治國)-사회화
8.평천하(平天下)-세계화 보편화
이 명덕과 명명덕의 전과정을 통하여 추구하는 것은 일신(日新) 즉 <날로 새로워짐>
이다. 대학의 서두에서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과 친하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데 있다고 하였다. <백성과 친하게 함에 있다>는 내용에 대해 주자(朱子)는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다>고 바꾸어보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오히려 오류인 것 같다. 친민(親民)이란 명덕을 추구하는 삶이 일반 백성들에게 친근하게 구현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명덕은 문자 그대로 덕(德)이다. 바로 그 덕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덕의 어원을 보면 (德)- 十 一 心 등의 요소로 이루어 졌다.
(1) -길 행하다. 통하다, 행동, 현상, 신의 강림
(2)十 -빛
(3) (目) -눈
(4)一 -균형 일치 합일 통일
(5)心 - 내면화
즉 덕 자체가 명덕의 과정을 집약하고 있다. 우리의 회화는 넓은 의미에서 그와 같은 범주에서 창출되는 중요한 요약적 결과물일 것이다.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새 차원 새 공간 새 의미를 지칭한다. 새로움은 왜 필요한가?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또 모든 산 것들의 의무로서 새롭게 확장되는 포용력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서 보다 넓은 일치의 길 일치의 세계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보다새롭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환희로서 즐겁다는 열락을 의미한다. 공자가 <배우고 익히면 기쁘다>고 한 의미와 같다. 그러므로 결국은 덕의 새로움을 의미한다. 새로운 덕이 신민(新民)의 길을 여는 요체이다. 그 새로움에 의해 우리들은 전연 새로운 삶의 차원을 연다. 또 새로운 공간을 구축한다.(주8) 전통사상의 왜곡을 해소하는 것은 마치 우주개척의 의지와 같은 것일 것이다.(주9) ......새로운 동아시아적 공간론의 필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든 공간과 시간에
모든 존재적 상황 가운데
항시 생동하며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조건화된 공간에서
조성되어 주어진 시간 속에서
숨쉬는 존재이므로
인간은 조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는 생체다
그러므로 삶이란...창조란...
생명을 발휘하는 과정인 동시에
조건을 창조하고 확장하여
시공을 넓히려는 의욕으로 점철된다
조건을 넘어서서
너른 공간의 존재가 되려는 열망은
홍익인간...
우리의 영원한 신화가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공간의 점유자이며
생이란 시간 공간의 확장의 과정이다
회화란 바로 그 궤적일 것이다.
<주석>
(1)인성물성동이론(人性物性同異論)-성리학에서는 대개 성선설에 입각하여 만물이 각각 천성을 지니는데 천성을 가장 맑고 순수하게 부여받은 것이 인간이라고보고 있다. 예를 들며 간재(艮齋) 선생이 "인물의 본성이 나의 본성이요, 다만 형기가 같지 않아 다름이 있게 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德泉文集』 券一 上艮齋先生)
(2) 형식상 선적인 묘사를 위주로 해 온 동아시아 문명은 바로 그 원의로서 文과 明을 일관된 원리로 하고 있다. 文이란 文彩와 物彩로 구분되며 明이란 自明과 昭明으로 나뉜다. 문채와 물채 자명과 소명을 이해하는 것이 동 아시아적 표현의 일관된 본질을 추구하는 한 요소일 것이다. 이와 같은 구분된 인식이 가능했던 것은 주역에 전하는 삼재사상(三才思想)에 기인한다. 天 地 人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 삼재사상은 그러나 단순히 하늘 땅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天)은 이념과 종교 미학 등의 로고스 혹은 도(道)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사상사의 영역에 속한다. 땅(地)란 현재의 세계에 현시되는 현상계의 경험적 사상을 지칭한다. 사람(人)이란 비로소 사람의 가치의식으로 창출된 제3의 세계이다. 바로 문명의 세계이며 예술과 예의 세계이다. 인간은 물성과 인성을 공유하고 있고 이 중에 인성적인 요소가 삼재의 한 주축이라는 인식전통이다.
(3) 동 아시아적 표현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1)획 선의 사용 2)색조를 통한 삼재조화의 구현 3)빛과 색과 암흑의 조화를 통한 삼재의 드러남 4)구별 없는 화재의 사용을 통한 그 조화의 표현 5)새로운 기법을 동원한 일치 일관의 표현 등을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참고문의 지중해 사과전은 전형적 유화 고전기법을 사용한 것이나 오히려 그 암흑과 색의 조화 빛의 응축을 통하여 하나의 동 아시아적 실체를 구현하였다고 생각된다.
(4)『주역(周易)』《설괘(說卦)》: 삼재(三才)
< 是以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兼三才而兩之 故易六劃而成卦 >
주역의 十翼은 공자가 편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성립의 시기는 속단하기는 어렵다. 치밀한 논리적 구조로 보아 진한(秦漢) 시대 이후의 저작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 삼재사상의 기언 자체는 보다 오래 전으로 소급하며 설괘전의 설명이 민족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구체적으로 선진시대 특히 공자이전의 현자들의 변론 속에 실질적으로 삼재적 사유양식이 관철되어 있으므로 지적 현자들의 논리 속에 작동하고 있었던 구체적 사유법이었다. (拙稿 《春秋左傳硏究》참조) 설괘전의 논법은 음양설과 탈신비주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둘은 원시유학사상의 본질에서 보면 권력의 측근포스트를 점유하려는 타학파에 대한 대항논리로서 정치적 의식으로 재구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나라 조정에 존재하던 지적 엘라트들의 권력투쟁의 산물일 것이다.(예컨대 ①유학 ②4형식의 신학 ③제자학 사이의 경쟁)
(5)대개 천은 감각을 넘어선 질서이며 고대에는 빛과 암흑으로 대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리학의 발전을 반영한다면 이제는 광자이거나 파동인 빛이라든가 쿼크로 가득한 소립자의 암흑공간도 이제는 더 이상 천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이란 우주정신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지는 질체와공간을 가진 감각가능한 모든 현상이다. 하늘 땅 자연 인간이 포괄되는 현상계 전체이다. 인이란 정신과 행동과 문물로 이루어진 인간의 창조적 성과를 총칭한다. 사람의 정신과 문물은 천지와 일치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바로 중용사상이며 조화사상의 궁극의 의미이다.
(6)이점에 대하여는 졸고 <선과공간의 소통> <한석봉서예론> 예방미술세미나 (2003년 5월 16일-30일 한국예방미술연구소) 발표문 참조.
(7)중용(中庸) 사상이란 불편불의(不偏不倚)한 것이라고 정의되는 용어로서 서경(書經)의 윤집궐중(允執厥中)에서 기원한다, 출발에 있어서는 신권정치 시대의 경건한 지도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절대보편신의 보편한 권능을 인간이 실현한다는 원대한 제왕의 정신이었다. 이것이 그대로 본격적인 사상사로서의 중심을 차지한 것이었다. 동아시아 사상의 이채로운 특질이다.
우리는 중용정신을 수양의 정신으로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도(道)를 실현하는 대법(大法)이며 공자학의 비밀스런 가르침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중용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3차원의 사물분석 태도를 바탕으로 하여야한다고 믿는다. (1)경험적 선택의균형 (2)현상해석의 균형 (3)실천적 균형이 그것이다. 실천적 균형이란 공심과 사심의 균형을 의미하고 경험적 선태의 균형이란 삼재포용의 방식이며 현상해석의 균형이란 일관(一貫-孔子道) 정신을 현재화하여 수립하는 사유기법이다. 요컨대 중용이란 도를 구현하는 정신인 동시에 사물과 인간을 탐구하는 일반의 태도이기도하다.
(8)동아시아적 공간이란 이젠 이미 빛이나 어둠, 음(陰)이나 양(陽) 등으로 정의되는 비경험적이고 신비한 현상을 지칭할 수 없다. 진보된 과학적 세계관의 성과를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근대문명의 최대의 성과는 진정한 공간을 무(無)의 여백 즉 정신의 영역으로 재확립하게 해주었다. 동아시아 원래 공간의 본질성을 원본그대로 회복하게 해주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주역(周易)의 용(龍-정신)의 부활이 바로 그러하다. 현황(玄黃)한 천지 가운데 우주자체는 이제 더 이상 동아시아적 순수공간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공간은 오랜 미망을 벗고 순수정신으로서 당당히 새로 일어서야 한다. 없음(無)이란 단지 인위(人爲)의 배제가 아니라 현상이전 혹은 비현상의 순수공간을 의미하여야 한다.
(9)제국유교(帝國儒敎)와 보편유교(普遍儒敎)-우리는 세계사적으로 역사상 여러 차례 제국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사상적 성숙이 부족한 제국은 영속될 수 없었다. 동아시는 지속적으로 제국의 역사가 명멸하였다. 보편유교는 제국사의 구조 속에서 형식화하고 강한 왜곡을 경험하였었다. 제국에 의한 사상적 왜곡이 있었고 그 왜곡의 대상은 비중국세계 동이족 기원의 순수한 사상전통이었다고 생각된다.
<축시>
나 무 처 럼
하이안자
숲에 사는 나무
군자여
한 자리에 나서
평생을 서서 지내도
그 기다림으로 불만이 없어라
숲의 나무
현자여
토끼들과 사슴들이
그대 가슴을 헤치며 뛰어도
느긋이 내려다보고만 있네
향긋한 토양 위에
있고 떠날 수 없음을 아나니
숲에 나무
하늘이며 사람
바람이며 빛인 그대여
발 밑을 간질이는 지하수
얼굴과 앞가슴을 스치는 바람
함께 있음을 오직 기뻐하네
숲에 있는 나무여
우린 그렇게 사는 것
너의 키 크는 투명한 소리 따라
넓어지는 팔들이 허공에 그리는
크고 작은 반경의 원을 바라본다
항시 누구 것보다 하루하루 더 넓어지는
네 새로운 세계를 본다.
<참고문 1>
이광복 화백
-메소기오스 지중해 사과 초대전
2004년 2월 17일 서울아산병원 갤러리서울 송파구 풍납2동 388-1
존재의 다채로움... 그 열린 가능성
하이안자
님의 사과들은
저편의 공간을 넘어
우리들의 오늘 여기에
생명을 구가하는 실체로
절절한 소망의 몸체로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의연하고 당당하게 있습니다.
묵시록처럼 엄연히 아름답습니다.
천지현황의 깊고 깊은 현흑색
지중해의 은은한 물빛으로
모든 고뇌와 슬픔을 거두고
고요함으로 통일된 세계
광명과 암흑이 직조되는 곳
온갖 신비로움의 모태입니다.
그 어스름한 색조는 영원의 시공입니다
그 배면은 바로 애플들의 고향입니다
규격된 틀... 틀...
수많은 구획 속에 존재하는 사과들은
절대 긴장의 사각의 기호를 채우며
자유롭게 마음껏 자신을 체현합니다.
알알히 뒹굴며... 안고 서고 아득히 누우며...
오오! 사과들이 빛을 뿜어내지 않고
머금어 색으로... 색으로... 색으로 전환했던 것입니다.
광채를 흡수해 성숙한 칼라들은 빨, 파, 노
고요히 암흑을 아우르고 격렬히 빛을 응축하여
그 삼원색의 정체를 생생하게 설파합니다.
어둠은 빛으로, 빛은 색으로, 색은 실체로 변전한 때쯤
빛은 사과의 색과 향으로 뒤엉켜 화생한 채 말합니다.
"빛은 단순한 희망이나 색이라기보다 오히려 생명체 그 자체이다"
진실을 집적해 충실한 것이 빛이라는 경전언어의 주석입니다.
<참고문2>
대전 롯데화랑 기획초대전-신 중 덕 전
생명률-그 회화적 발현
The Rhythm of Life
LOTTE GALLERY
2003. 11. 28 - 12. 4
- 기획전에 보내는 서간 -
하이안자
Ⅰ
사물의 사이
모든 이들의 사이에서
투명한 색광의 길들이 열립니다
인간의 모든 사이(間)가 의미 있게 합니다.
공간으로 나선 빛은 모이고 이어져
교차하는 넓은 행로가 됩니다
그 확장된 길들이 서로 합체하며 드디어는
모든 공간을 완벽하게 대체합니다
물빛 유리질의 공로(公路)......
모든 생체 사이를 이어 달리는 길은
격막과 경계를 연결하는 로선......
물길과 땅의 길
육체의 길과 사물의 길
그리고 하늘의 길
달리고 오르는 그 길은
모든 다이내믹한 궁극적 역동의 궤적입니다.
타오르는 열망으로 드러나는 생명선입니다.
총화된 길의 집합 그 맑은 각막으로 본 세상은
오로지 아름답고 평화롭고 순정하군요...
Ⅱ
도록(圖錄)의 글을 떠올리며 작품들을 하나하나 살폈습니다. <생명률(生命律)>이라는 주제어 외에 각 작품들에 별다른 제명을 달지 않은 것이 먼저 인상적으로 기억에 자리합니다.
작고 큰 공간들, 청색 푸른색과 대비된 붉고 노란 혹은 혼색 색상의 변별, 형체에서 드러나는 자연과 인간과 기호의 안배와 차별적 배치... 그런 화면 자체의 변화 외에는 어떤 새로운 상황을 그린 것일지라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명징하는 <다른 이름표>를 붙이고 싶지 않다는... 하나의 숨겨진 언표일 것입니다. 거창하게는 율(律), 혹은 친근한 리듬 아니면 기운 생동하는 기학적(氣學的) 역동 체계와 그 궤적, 그 자체를 그리고 있다는 보편함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겠지요.
이 <생명률> 주제로 드러난 미학은 단적으로 존재와 공간, 삶과 죽음을 넘어선 하모니(harmony)를 지배하는 역동에 대한 근원적 추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모든 작품들에서 현상적 실재는 인체라든가 능선 언덕이거나 물결의 파동이 그리는 실루엣의 외선으로 집약되고, 드디어는 자유로운 선의 유동으로 해탈하였습니다.
그 선은 육체의 최전선이며 영혼이며 마음이기도 할 그런 것일 것입니다. 또는 생의 족적 자체입니다. 선은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분 부분... 순환되며 어디론가 나아가는 선, 벗어날 듯 절제하다가는 순환론의 권위로 복귀하는 선,... 혹은 역으로 선으로부터 다시 육화 되고자 하여 면과 입체의 형상조성을 기도하는 선 등 그 반전과 반동까지를 거느립니다.
Ⅲ
짙은 그린(green) 색조 위의 벽화처럼 드러난 선에서 출발하여, 선은 진보와 순환과 반전 등 모든 <꾀함>을 시연하다가는 드디어는 물 속에 비친 선으로 즉 출렁이는 <빛의 선>으로 돌아가고 있군요. 그것은 어떤 구조에서도 변함 없이 존재하는 힘의 골격이며 마치 수면에 미끌어지는 배의 자취를 빗댄 역설로서, 지울 수 없는 파일임을 주장합니다. 모든 미학적 권능으로서 힘이란 과연 그렇습니다. 인생은 그런 의미에서 단지 선일 것이며 인체 자체도 선일 것입니다.
그 객관적인 선의 내부는 사실 아리스토 텔레스의 형상인(形象因)이 아니더라도 선의 경계를 열기만 한다면 모든 질료를 수용하는 질료인(質料因)의 공리(公理)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형체의 최전선인 선은 동시에 영혼의 태극이며 존재의 한 극단이기도 합니다. 그 형상의 자유와 질료의 보편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내(內) 외(外) 없는 논리(無內無外)의 기호적 선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선은 드디어는 완정한 원형으로 돌아가 자신의 정체의 근원을 드러내고 모든 현란했던 그동안의 무도(舞蹈)가 결국은 단지 우주정신 혹은 세계정신이 포장하는 여유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임을 일깨웁니다. 너비 없는 위상적 집약선이 토해내는 거대담론입니다. 실재세계의 진정한 비밀이 분명 그 안에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Ⅳ
캔버스를 삶과 생명의 제2의 실재공간으로 구축하려는...특히는 그것을 갈등이 없는 일반의 정화된 공간으로 변환하여 허물과 부끄러움이 없는 그저 자유공간으로 운용하고자 하는 그것은, 오늘의 우리들의 삶에서는 참으로 당연한 몸짓이며 욕구일 것입니다. 그 새로움은 마치 우주 정거장을 건설하는 정도의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캔버스는 정통용어로 말하면 가치와 당위의 중심, <나의 일삼음(事)>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궁극적 실현을 위해서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직 힘의 역동과 자율(自律-Self Rhythm)이 스스로 의미 있어지는 그런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동과 충돌의 장(場)인 이 현상의 세계에서 즉 이(理)와 기(氣)의 <사이(間)>에 心 性 情 欲 등의 마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心에서 性-情-欲을 거쳐 육체(肉體)를 향하여 진행 구체화된 현상계의 내면 모습입니다. 바로 그 공간에서 우리의 마음이 역동하는 힘의 주체로 운용되면서 창조가 가능한 것이므로 비록 미(美)와 추(醜)가 혼재한다고 하더라도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은 역시 귀중한 것일 입니다.
그 마음의 다양함을 아울러 그릴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그 일원론을 시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텍스트를 사용하게 됩니다. 사람과 만물 속에 존재하는 마음을 만물일여(萬物一如)로 생각할 때 우리들 마음은 편해집니다. 그 편안함은 로고스(logos)의 빛과 색조로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이 천리이며 진상이라는 유일한 확증입니다. 그림 위에 그려진 폐곡선과 개곡선이 그것입니다. 그는 역동하는 마음이며 소립자의 세계가 가시적 현상으로 전환하는 계기의 문이며 그 궤적입니다. 세속의 언어로는 생명선이며 살아 있음 혹은 살아감을 지키는 나성 성곽이며 소망이나 희망을 그리는 메시아적 기도문의 하얀 행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Ⅴ
존재에서 발해지는
그 고유한 칼라와 빛은
물채(物彩)입니다
물채로 창조되는 새로움으로
직조하여 열린 새 길....
바로 문채(文彩)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명(文明)일 것입니다
은미하고 깊은 색과 빛
형체와 선, 그 자유의 향연을
축하드립니다.
<참고문3>
다음칼럼 2003/06/24 00:18
:: 한국의 실질주의 중국의 제국주의 일본의 이상주의
최근 동양철학자들의 동아시아 사상 이해에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동아시아의사상 특히 유교를 두고 직관적이라든가 비분석적이라는 이해가 그것이다. 특히 삼재사상을 막연한 화해주의로 보려는 태도는 사상사의 상식에 비추어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환경론적 해석은 더구나 많이 왜곡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동아시아 사상사의 전통은 몇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왜곡되었다.
(1)서구문명의 충격으로 인한 자존의식의 훼손은 최근의 이유이며 서구적 사상과 문화가 대대적으로 유입해 그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역사상 서방사상인 불교사상의 영향도 있었다. 귀족사회를 지배한 불교사상의 논리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 있었다.
(3)제국사의 장기간의 전개로 인한 형식화 체제화의 압력이 있었다. 이는 역사공간의 광대함과 다민족구조에 기인한다.(제국유교적 특징)
(4)한국사 형성기 이래의 역사공간적 유동성이 안정을 추구하게 하고 제반 문제에대한 해답을 절실히 요구하였다. 동시에 한국사는 역사규모의 적절함으로 인해 형식화의 압력은 덜하였으므로 한국역사상의 형식과 체제란 이념적 성격을 보다 강하게 나타내었다, 그러나 형식화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등등의 요소가 한국과 중국에서 전통사상의 왜곡을 초래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고 자신의 역사전개의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한 과정이었다. 그 결과 중국의 문명은 <다양한 형식의 생성>을 촉진하였다. 많은 양식과 문화체제가 만들어지고 평가의 틀이 생성되었다. 나는 이것은 "중국역사의 강고한 질서 체제구조에 대항한 현실적 형식의 갱신"현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반대로 일본의 경우는 자신들의 비교적 고립된 역사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과 한국의 발전된 체제를 수입하고 이 형식을 절대시하고 소중히 간직하였다. 나는 이를 "일본 역사의 문명적 질서를 획득하기 위한 열망에서 나온 <절대형식 고수>와 이상의 추구"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사의 경우는 그와 같은 형식적 질서체계의 압력이 강하지 않았고 충분히 발전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으므로 문화 형식에 대한 절대적 추종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는 형식화의 틀보다는 형식과 내질이 조화된 실질적인 문화의 향유를 추구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도 역사적 자아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였으므로 사상사 전통의 본질 회복을 완전히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상당한 정도로 사상사에서 중국유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형식유교를 받아들였으되 이미 언급한대로 이념적 성격이 강하여 결국 성리학을 대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성리학적 내성이 어느 정도 자아의 본질을 발휘하게 해주었던 것일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삼교통합의 노력은 그 같은 사정을 반영한다. 최근의 현재에까지도 그러한 움직임이 있고 그런 방향으로 유교사상이나 사상사를 이해하는 것은 아직 사상사적 성찰이 오히려 미급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동아시아 사상사는 본래 강한 경험성과 분석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춘추시대의 논설을 분석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춘추필법이라는 것도 결국 그 문필의 내부에 절실한 현실경험현상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춘추필법이란 이데올로기이기 이전에 극히 경험적 분석적 사유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그러므로 춘추필법을 "바다필법"이라고 부른다. 일렁이는 파도 같은 힘찬 주장의 아래로 바다와 같은 깊고 넓은 경험분석의 실체가 역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안자)
(주)이상은 칼럼의 내용을 일부 다소 부연한 것이다. 이 칼럼은 현재 다음 불로그
U-Korea - 상념, 힘, 역사 (韓儒) ncolumn.daum.net/haianist 에서 볼 수 있다.
문물공간론
동아시아적 전통에서는 삶의 공간은 모든 차원에서 제한 없이 열리고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은 인생은 모든 시공에서 저절로 그대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며 상황과 조건을 생각하고 조절하고 창출함으로서 가능하다. 이 조절과 창출의 과정을 문(文)이라고 한다.
동아시아적 지성에서 모든 지적 활동이란 그생의 차원을 새로이 열어가는 모든 행위이며 상황을 해석하고 조건을 창출하는 행위이어왔다. 예를 들어 월식이 일어나면 음기의 지나침이라고 생각하여 양기를 북돋우는 북을 울렸다. 하늘의 신 혹은 조상신을 사유하는 방식은 더욱 그 특징을 잘 드러낸다, 동아시아인들은 신의 존재마저 일정한 상황과 조건으로 수용하고 신비적 사유를 전승하면서 우주의 내밀한 의미 탐구를 지속해왔다. 예를 들어 민심천심론은 인간의 몸과 행태를 천의 의지의 반영체라고 보고 그들의 뜻을 하늘의 뜻으로 생각한 것은 대표적인 것이다. 물론 신의 뜻은 소나 말 거북 등 각종 생체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비과학적이라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이를 모든 이해 곤란한 현상에 대한 조건적 사유 혹은 조건화의 기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문제가되는 것은 결국 이해가 곤란한 현상일 것이다. 최종의 절실한 문제는 현상이거나 조건화된 현상을 <해석>하는 문제이다.
동아시아적 해석은 어떤 경험현상-신비현상의 어떤 현상도 제외하지 않는 온존성 포용성을 유지하였다. 이를 삼재사고의 균형과 함께 중용사상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현상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간일 것이므로 동아시아적 공간은 현상의 진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공간은 현상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이란 현상이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현상이전은 가능성으로 충만한 그 무엇이다. 그 현상과 비현상의 사이를 사고하는 것 곧 실체와 공간 사이의 긴장된 관계를 상정하고 이를 사유하는 것을 도(道)라고 하였다. 문물이란 그러한 현상 비현상 사이의 사색의 결과를 구현한 새로운 현상이다. 인간이 창출한 전연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문물공간이란 <천 지 인> 삼재공간 가운데 인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문물이 창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창출한 문물공간도 자연과 생체 천(신비현상/理)과 마찬가지로 공간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점(筮占/주역점)이 나왔던 것이다. 그림 건축 예의 행사 같은 것들이 그대로 궁극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문물공간은 태극공간과는 다르다, 현상이전의 비현상이 공간이듯이 그 위에 수립되는 문물공간은 비문물이 모두 문물공간이다. 우리의 미술공간은 바로 문물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연 자체는 현상이지만 문물의 입장에서는 창출의 대상이며 공간일뿐이다. 그러므로 문물공간은 삼재의 인(人)인 인간과 인위에 대한 지극한 존중을 의미한다. 홍익인간이란 바로 유의미한 인위의 확대를 의미하고 새로운 삶의 차원을 열어감을 의미한다. 바로 예술공간이며 지성의 공간이다. 이 예술공간과 지성의 공간은 결국은 궁극의 태극공간을 이해하는 도정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문물공간에서는 인을 제외한 천과 지는 일종의 물리학적 공간에 속한다. 문물 창조의 실질적 소재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문물의 진정한 궁극공간은 무의 공간이다. 비현상의 공간이며 경험불가능한 공간이다. 이미 질서의 세계는 리(理)라는 이름으로 혹은 천(天)이라는 이름으로 현상 공간에 함유되었으므로 진정한 공간의 세계는 아니다.
아무런 질서도 현상도 경험도 없는 진극공간(眞極空間)에서는 오로지 문(文)의 근원일 인위(人爲)만이 질서가 될 수 있다. 다만 그 인위는 이미 언급한 대로 천 지와 조화를 이룬 그 인(人)이다. 인위(人爲)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결국 동아시아 문물의 정체성일 것이다. 이를 문물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고 새로움의 창출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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