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의 거대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명(civilization) 개념은 우리에게는 번역어 중의 하나이다. 문화(culture)역시 번역어로서 이 두 용어는 많은 경우 혼용되고 있다. 어의상 문명은 "교화하다"에서 문화는 "경작하다"는 의미에서 출발하는데 서양의 역사가 결국은 합리적 지성의 발달사이며 물질적 개발의 역사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처럼 정신지향적인 풍토에서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기 위해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물질적 측면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본질에 비추어 이 두용어가 서양의 역사적 성과를 표현하는 말로서 모두 유용하며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자연스럽게 빋아들이는 일반용어로서는 '문화'를 사용한다는 견해가 꼭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어감으로는 개개의 구체적인 문화적 노력의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성과를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생각한다.그 때 문화라는 개념에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어왔다. 최근에는 레슬리 A 화이트의 상징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는 상징이다"라는 그의 견해는 상징물(symbolates)이라는 개념분석을 위주로 "의미부여된 것"이라는 측면에서 지적-창조적 부면이 강조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 전통용어로서 문명(文明)이란 용어는 동아시아의 고전적 지성을 대표하는 용어로서 <번역어>에 머무르기에는 그 개념이 너무나 이채롭고 심오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명이라는 번역어의 어의를 벗어나서 동아시아 역사 성과를 대변하는 문명의 원의를 회복하고 여기에 Civilization, Culture 개념을 함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주역에 자주 등장하는 '현룔재전천하문명(現龍在田天下文明)'의 문명(文明)이란 어의는 이미 시경 서경 나아가 사서오경의 경전 문헌에 핵심용어로 등장하는 개념이다. 처음엔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으나 춘추시대의 싯점에서 오늘날 전승된 지성적 의미의 문(文) 명(明)으로 그 의미가 발전한 것이다.
문(文)이란 원래 문신(文身)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확정하기는 어려우며 의상(衣裳)과 장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된다.즉 처음에는 아름다움의 표현이었고 나아가 지성적 가치의 드러남을 의미한다.
이는 소재(素材), 소박함 충실함을 의미하는 질(質)이라는 용어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단적으로는 '문'과 '질'은 "본질과 꾸밈"이라는 개념으로 세속적 용도에 부응한다. 공자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하여 양자간의 조화를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결국 문은 질(質)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 질은 다른 표현으로 물(物)이라고 하였으므로 문물(文物)이라는 용어도 혼용되었다.
그러나 물(物)이란 단순한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물채(物彩)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물의 가치를 드러냄'을 의미한다. 단순히 문의 바탕이라는 의미에서 발전하여 적극적으로 물질의의(物質意義)를 구현하는 것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개 문(文)이라는 어휘는 '가치의 표현'을 의미하고 동시에 물(物) 질(質) 등의 고급개념을 거느려 함섭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문물의 의미와 '문질빈빈'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다시 명(明)의 개념이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물론 아름답다는 의미의 문은 문자 의상 예술 언어 행동 예의 격식 등 모든 의미있는 표현을 포괄한다.
명(明) 역시 신비적 개념으로 출발하여 신(神)의 항격(降格)을 감응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역시 춘추시대적 싯점에서 지성적 개명의 뜻으로 발전하였다. 대학의 첫머리에 명덕(明德)이라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지선(至善)에 이르는 지성의 밝음을 말한다. 물론 그 지성적 깨달음은 사물의 탐구(格物致知)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문명이라는 개념은 결국 동아시아적 지성을 총체적으로 대표하는 말이다. 그 핵심은 사물과 인간 신 문화 사이의 "경험균형'이라는 경이로운 사유의 절제와 조화에 있다. 동아시아의 문명이라는 개념은 서구용어에 비해 그 포괄성과 깊이 그리고 구체성에 있어 한층 절실한 것이므로 종속적 번역어로 사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그 원의를 확고히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고 당연하다고 믿는다.
-하이안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