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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성당(盛唐)의 문화는 세계문화였고 그 예술과 문학은 보편적 아름다움과 귀족적 전아함을 동시에 발휘한 진채를 지니고 있다. 두보의 애환과 이백의 낭만은 그상징이다. 그러나 그 미학의 정신적 가치에 대해 사상사적인 엄정한 분석은 아직까지도 미결의 장을 남겨둔 채로 우리는 그 주옥같은 시를 논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될 수 없다.

우리가 300여편의 시경의 시들을 읽고 그 시정신을 논해온 오랜 전통에서 본다면 오히려 시경의 여러 해석들이 형식적인 것이고 당시(唐詩)는 이를 초극하여 새로운 미학적 자유의 여지를 개척하고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자(朱子)는 중용 서문에서 공맹 이래로 한당(漢唐)이라는 장구한 역사적 시간을 사상사적 공백의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한 문화의 생생하고 새로운 전개를 성취한 이 시대들을 감히 무의미한 공백으로 단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실 그가 이 시대를 경시하고 무시하려는 의도에서라고 보기는 어렵다.주자는 바로 그 문화가 사상사적으로 해석되지 못한 시대임을 강조하려고 하였다고 생각된다. 해석을 확보하지 못한 문화는 그같이 평가절하될 수 있고 또 그래도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시경의 작품을 능가하는 시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 문화적 사상사적 의미가 정립되지 못한 것은 사실 커다란 손실일 것이다. 자기의 미학의 전통과 사상사적 전통성을 자각적으로 계승 구현하지 못한 결과는 그 같이 막대한 손실을 역사적으로 기록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중대한 사상사적 예술적 숙제를 크고 깊게 남기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사적 문화적 과제는 우리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해석되지 못한 고급문화의 아쉬움을 우리 역시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조선시대까지에도 역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조선왕조 시대를 통하여 중국에서 주자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해석이 상실된 문화>가 다시지속되고 있을 때 고려 말 이래의 학문적 전통을 확고하게 수립 형성하면서 바로 그 주자의 자각을 심화시켜 새로운 사상의 경지를 개척하고 명실상부한 유학의 중심국가로 거듭태어났다. 중국에서 <당시(唐詩)>의 분위기와 유사한 새로운 자유주의가 계승되고 확대재생산되면서 사상적 자아의 추구가 느슨해진 데 비하여 조선에서는 처열한 행동주의를 수반한 유학의 전형적이고 사상사적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새로 개척된 사유의 경지를 확산하여 이를 문화 일반의 해석으로 더욱 발전하여야할 시점에서 즉 다시말하여 예컨데 전통적 조선의 문화와 예술 문학과 종교 등의 자유로운 발전의 결과를 수용하고 그 사상사를 더욱 자기화하고 보편화하는 난숙한 발전의성취를 추구해야할 싯점에 불행히도 국운의 쇠퇴기를 맞이하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격변을 만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마치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한국-중국의 문화의 중심지역에 대한 북방 야만세계의 공격과 파괴가 반복되었던 전통적 역사와 유사한 사련기이기도 하였다.오호 십육국의 화북 점거라든가 거란족 몽고족 만주족의 중국점령이나 병자호란 임진왜란과 같은 야만대 문명의 충돌이라는 특질을 나타낸 것인 동시에 전연 새로운 세력인 서구세계의 힘과 문화의 내습을 동시에 받아들여야하는 이중 삼중의 격변을 겪었던 것이다.지금은 그같은 미증유의 격변화 문화적 혼돈을 거두어야하는 싯점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근세초에 우리가 서구세력을 양이(洋夷)라고 불렀던 것은 그와 같은 자각을 나타내는 독특한 문명어이다. 그러나 서세동점은 결과적으로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글로벌문화를 결국 지향하는 대세를 지니고 있는 것임을 그 당시는 잘 알 수 없었다. 격변의 시대를 보다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역시 전통적으로는 <唐詩>라든가 조선시대의 시가와 문학이 보여주는 새로움의 추구가 전통사상사의 범주 속에서 적절히 해석 소화되지 못한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과 문화의 해석은 그같이 자기 개신의 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경전인 대학(大學)에서 절실한 언어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음에도
그를 적극적으로 구현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사상사의 본질을 강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계화를 표방하는 오늘의 문화적 역사적 위상도 위의 전통적 과제와 유리된 것은 결코 아니다. 새 시대를 열어가는 진정한 힘은 그들 스스로의 자아의 역사에서 구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사회의 지식인의 풍향을 재검토하는 일은 우리의 미래 역사에 사활이 걸린 일일 것이다.

히딩크현상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노력들이 역시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더 시급하게 해야할 일들이 더 많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느껴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나친 유럽주의 서구주의 합리주의는 경계되어야하고 오늘날 사회적으로 전통 문명의 혼란을 가져올 정도의 무분별한 문화 사회 운동들이 자유 시민사회의 이름으로 무소불위로 자행되는 일은 조금 더 역사적 해석이라고 하는 사상사적 깊이를 갖추어야한다.

서구적 무분별한 개방주의와(예컨데 성개방 풍조) 가속되는 가족 파과와 남녀평등의 이름으로 추진되는 성간대립의 구도는 시급히 절제되어야할 것이고 신중히 접근해야할 중요한 사안들이다.그리고 너무나 서구화된 문화 풍토와 전통성을 상실한 자의적 문화 사회 논리들은 엄숙히 자숙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사와 전통이 새로운 해석의 힘으로 새롭게 갱신되지 못할 때 스스로의 삶이 지겨워지고 나약해지며 자신의 문명을 비하하게 되고 부평초와 같은 무책임한 자유주의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이른바 깊이 없는 <몸의 철학>이 그것이다,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주의는 새로움을 지향하는 문화적 역사적 본능의 소리이다. 그 소리가 스스로에게 들릴 때 우리는 그 바람같은 자의성에 목숨을 맡기고 있어야할 것인가? 지금의 월드컵신드롬은 바로 그런 거대한 자아의 목소리이다. 이 거대한 문화적 욕구는 단적으로 적절히 문화사 속에서 해석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위기이며 동시에 위대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무산하여 날려버리게 될 것이다. <夏夷案者>


<그림-백제연화문전:세계문화의 한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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