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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유교적 상황

대개 우리는 이사회에 현재 흐르고 있는 사유와 정감의 범위에서 생각해볼 때 유학이란 하나의
복합적인 그리고 불안정한 어떤 개념체로 영상지워지는 것이 보통인 것 같다.1990년까지만 해도
한국은 1000만 유교인을 자처하는 나라였다. 그후 10년 정도 지나면서 유교인을 자처하는 인구는
400여만명으로 조사되었다. 절반이상의 숫자가 감소하였다. 반면에 그 자리를 기독교와 불교가
차지하였다. 이것은 엄청난 사회변동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 문제의 의미를 짚어보려는 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물론 유교가 종교라고만 볼 수는 없으므로 유교를 자처한다는 것 자체가 정확한 지표는 아니다.
유교를 종교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많고 유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도 불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그러므로 그 숫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유교적 의례는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결혼식과 장례식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
인 것이다.정치와 사회의 분야에서도 유교는 그렇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위민정치>라는
오랜 유교이념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아래 그 빛이 가리웠다. 철학과 역사와 이데올로기로서도
유교는 완전히 한물 간 학술로경원의 대상으로 전락한 느낌이다.가족을 지도하는 생활이념으로
서는 더욱이나 힘을 잃고 있다. <호주제>의 폐지라든가 <성씨표기 자유화>와 같은 개혁을 표방
하는 사회운동세력의 주된 타킷이 유교이다. 그것은 물론 옳은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사회의
흐름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공격적 대응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문제는 유학사상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가소로운 부분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유학의 본질을 조금 맛볼 수 있는 기회
공간을 비집어내고 싶다.



<2>유학의 실체묘사의 시도


유교 또는 유학이란 무엇인가?
가장 친근한 정통이면서도 답하기 여려운 질문이다.나는 그에 대한 대답이 아주 여러 단계에 따라
정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유교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의 정도에 따라서 답을 모두 달
리 해야하기 때문이다.

유학에서는 인 의 예 지 덕 등의 개념을 지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개념들은 하나로 정의되어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 스스로 유교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직결되어 있고 개별적인 답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첫째 유학은 삶의 사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왜 삶의 사상이라고 정의되어야하느냐 하면 유학은 삶의 전체 사공에서 경험한 것들은 그대로 다
포용하여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유한 결과를 그대로 인생에서 창조적으로 재현하는 의지와
힘을 창출하여 이행하여 나아간다. 이를 유학의 실천적 측면이라고 낯익은 언어로 정의할 수 있다.

둘째 유학은 삶을 초월하는 사상이다.
유학은 삶과 인간에 얽매아지 않는다. 인생의 과정을 통해 결국은 인생을 초극하려는 사상이다.
막연한 초극이 아니라 논리와 의지를 통하여 보편세계와 호흡함으로서 비로소 초월의 힘을
얻게 된다.



(3)유교적 사유의 실례


유교적 사유의 정의곤란성을 대표하는 것이 주역적 사고이다. 그리고 유교적 사유의 표면을 보여주는
것은 주역을 제외한 유교 경전들이다. 경전 마다 독특한 해법과 의미가 각각 있지만 이들 일반 텍스
트 경전들은 주역과 대비된다. 주역은 비텍스트적 경험을 포괄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유교적 사유를
내포하고 있다.

주역에서 3개의 효로 이루진 소성괘는 개별 상황과 사물의 본질개성을 포괄적 범주로 나타낸다. 그
둘로 구성되는 대성괘는 그 상황과 본질의 결합으로 구성되며 새로운 창조된 일반상황을 표현한다.
3개의 기초적 효는 사물의 본 중 말의 전통적 이념을 의미한다.

유교적 사유는 범주적으로 이루어지며 다시 개별적 본질의 이해를 확고하게 한다. 개별과 본질과의
넘나듦을 유추(推)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 하나는 <길다>고 유추될 수 있고 <가늘다>고
유추될 수 있고 <약하다>고 유추될 수 있으며 <끝>이라고 유추될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무한한
유추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화를 통해서 각 개체는 여러 통로의 통일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계속:2002/8/7)

그와 같이 사물들은 감각적으로는 각기 하나의 형상으로 존재하지만 그 존재의 의미의 영역은 다차
원적이다. 우리는 대개 실용적 차원에서 사물의 의미를 포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실용적
차원은 역시 그 사물의 존재의 영역중에 중요한 한 분야일것이다. 그러나 실용적 차원도 역시 여
러 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다층성을 통관하는 의미관통의 길을 찾으려는 것이 결국 유학일 것
이다.

예를 들어 과학은 경험적으로 새로운 존재의 차원을 열어보는 작업이며 문학과 예술은 직관적 미
학적으로 존재 의미의 새로운 차원을 감각하고 표현하는 일이다. 예술이나 과학은 결국 일상적 이
해의 전제차원을 초월하려는 점에서는 동질성을 구유한다. 촌재의 평면적 차원을 초월하여 입체
적 존재의의를 구축하는 것은 그만큼의 삶의 힘을 실현하게해주는 실용적인 그 무엇이다. 방만하
게 초월 자체를 목표로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실체를 무시하고 아무 조건 없는 초월을 추구하는
것은 학술이나 사상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비주의적 영영의 일인데 유학은 그러한 노작을
중요시하지는 않으나 전면적으로 부정하여 자신이 사유작용 가운데서 배제하지는 아니한다. 유
학에 모든 종교에 대하여 열린 자세 혹은 포용의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까닭이다.(200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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