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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사상사적 함정-1
<1>
한국사상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극히 막연해진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절대의 지적 함정을
처음부터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과연 한민족은 지성적으로 그렇게 불행한 민족일까하고 생
각하지 않을 수 없다. (1)적어도 유학사상을 그들의 사상적 본류에서 제외한다면 그렇다는 것이
다. 유학을 제외하고 우리 사상사를 볼 수 있는 자료는 (2)역사 문물 유적 유물 문학 예술 민속
언어 생활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제 분야는 내면에서 유학의 이념과 어떤 형태로든 교섭하
고 있다. 그러므로 비유학적 독자의 연구대상이랄 수 없다. 그 (2) 가운데서 다시 독자적인
분야를 석출해내야 한다. (3)특히 선사시대의 지적 상징으로부터 사상사의 본질적 발원을 검
토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과연 한국사상사 독자의 자료를 독립적으로
완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못하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
상은 우리민족 만의 일은 결코 아니다. 민족사상의 길은 어디 있는가? 유교적 양식과 비유교
적 양식의 두 측면의 모든 사상사적 내용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한국사상사의 독자적 전개의 내용과 실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은 상시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사상사적 개념과 외양이 어떠하든 넓은 의미에서는 한국사상사에 함축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독자의 언어와 개념으로 완성되어야할 것이다. 즉 어떤 사상
사적 자료나 대상이든 불문하고 그 내부에서 민족사적 지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제의식은 오늘날의 지적 상황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의 사조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창의적이고 쇄신된 우리 정신의 이해를 도모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중심개념
의 전승을 바탕으로 영원한 민족사상사를 구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족사상사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는 필연적일 것이다. 현재의 최대의 지적 딜렘마는 바로 우리 사상사에 대한 기초
개념의 정의가 부족하고 그 정의된 개념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사상사적 힘에 대한 관심
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그같이 유학의 권외에서면 다소 사상적 형식과 체제에서 당혹스런 질문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혹스러움이란 결국은 유교사상적으로 체제화된 사유관습에 기인
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결국은 유교사상에 대한 성찰로서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이
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문제 우리의 사유전통은 <독차적 형식> <유교적 형식>의 두 양식
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를 유교적 딜렘마와 전통적 딜렘마의 공존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이중적 딜렘마로부터 우리 사상사는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함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단언해야 하겠다. 그것은 알고 보면 함정이 아니고 일종의
축복이다. 왜 함정을 두고 도리어 축복이라고 말하는가? 독자적 사상사 전승상의 과정에서
는 고정된 자기 아집적 성격이 오히려 적어지고 보편적 사색을 자극하는 다양한 매체를 사
용해왔다는 뜻이다. 아니 그보다도 보다 기초적 사유가 다양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이
유에서이다. 그 자유란 사상영위상의 자유가 아니라 지적 오만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
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비하의 해를 입었다. 그 해는 오만함보다는 낫다. 중화주의 보다는
그 왜곡의 정도가 적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동시에 형식화된 중국유교의 유행으로 사상
사적 활력을 다소 상실한 것도 사상적 장애에 해당한다.
중국의 경우 민족사상사의 정립문제에서는 우리보다 더 심한 딜렘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그
들은 형식상 유교라는 주류사상을 확립하였지만 그것은 거의 허울이었다. 유교라는 이름과
경전만으로는 사상사가 전연 영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사상사가 한왕조로부터 당말까
지 중단되어 있었다고 단언하는 송대 성리학자들의 말은 상당한 사실성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기준 관점은 사상사란 보편한 사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구체적 경험적 질
체가 기초가 되는 사유여야 한다. 그 사유의 보편성면에서 송대 이전의 제국의 역사는 거
의 경험적으로는 허구의 사상사가 영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엄밀히 사실이
]다. <허구의 사상사란 무엇인가> 개념에서 개념으로 건너가며 전승되는 것으로 경험상
상을 상실한 사상사를 말한다. 모든 논리와 사유는 튼튼한 대상경험을 질료로 하여 비로소
창조적 활성을 지니고 새 시대를 호흡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사상사적 정체성의 추구와 문명권적 혹은 세계사적 보편성의 추구는 정신사의 양대지
주이다. 우리의 경우 이 양측이 다 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
신사적 정체성의 추구라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모든 지적 문화적 작업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2>
한국사상사의 메시아는 <홍익인간>이라는 구원한 개념이다. 사상의 역사에서는 이 말은 언
제 정립된 것인지를 우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개념형성의 시점을 문제삼는 이유는
과연 이 언어가 신화시대 이래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서 비롯한다. 먼저 홍
익이란 용어는 일반의 한문 표현으로서 매우 특수하다. <증익>이라든가 <부익>이라는 말은
한문적 표현으로 흔한 것이나 홍익이란 표현은 그러한 일반적 의미를 변별하는 의미적 쇄신
성이 있다. <홍>이란 글자(弘)팔을 굽혀 활을 당기는 모습이며 글자의 발음은 홍수(洪)에
서 유래한 것이다. 무한 이 넓어지는 역동성을 말한 것이다. <익>이란 그릇에 넘치는 물(<溢>
에서 유래하여 분화함)을 의미한다. 충만함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의미를 연결하면
<이익 되게 한다>는 세속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 목적어는 <인간>이다.
인간(人間)이란 문자 그대로 <사람의공간>이다, 무엇을 사람의 공간이라고 하였는가? 인간이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는 인체의 공간 점유성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점유한 공간은 일
반공간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를 지칭한 경우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한
것인데 이 경우는 그대로 일반공간을 매개로 사람이 관계를 맺게되는 것이므로 역시 일반공
간성을 강하게 지닌다. 사람의 관계란 일반적 이법상(理法上)의 보편적 규율에 의지해야하는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공간과 사람 사이의 공간은 크게 분별할 이유가
없다 공간의 성스러운 일반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매 순간에 인격체인 인(人)은 어떤 위치에 서게 되는가? 자기인격의 일반적 공간성을 폭넓게
이해하여 존재의 궁극의 끝에 서기를 권장 받게 될 것이다. 즉 일반 공간성을 자각하는 존
재가 된다는 의미를 언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그 지시성은 극히 고상하고 힘찬 그 무엇이다.
<1>
한국사상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극히 막연해진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절대의 지적 함정을
처음부터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과연 한민족은 지성적으로 그렇게 불행한 민족일까하고 생
각하지 않을 수 없다. (1)적어도 유학사상을 그들의 사상적 본류에서 제외한다면 그렇다는 것이
다. 유학을 제외하고 우리 사상사를 볼 수 있는 자료는 (2)역사 문물 유적 유물 문학 예술 민속
언어 생활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제 분야는 내면에서 유학의 이념과 어떤 형태로든 교섭하
고 있다. 그러므로 비유학적 독자의 연구대상이랄 수 없다. 그 (2) 가운데서 다시 독자적인
분야를 석출해내야 한다. (3)특히 선사시대의 지적 상징으로부터 사상사의 본질적 발원을 검
토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과연 한국사상사 독자의 자료를 독립적으로
완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못하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
상은 우리민족 만의 일은 결코 아니다. 민족사상의 길은 어디 있는가? 유교적 양식과 비유교
적 양식의 두 측면의 모든 사상사적 내용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한국사상사의 독자적 전개의 내용과 실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은 상시적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사상사적 개념과 외양이 어떠하든 넓은 의미에서는 한국사상사에 함축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독자의 언어와 개념으로 완성되어야할 것이다. 즉 어떤 사상
사적 자료나 대상이든 불문하고 그 내부에서 민족사적 지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제의식은 오늘날의 지적 상황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의 사조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창의적이고 쇄신된 우리 정신의 이해를 도모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중심개념
의 전승을 바탕으로 영원한 민족사상사를 구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족사상사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는 필연적일 것이다. 현재의 최대의 지적 딜렘마는 바로 우리 사상사에 대한 기초
개념의 정의가 부족하고 그 정의된 개념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사상사적 힘에 대한 관심
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그같이 유학의 권외에서면 다소 사상적 형식과 체제에서 당혹스런 질문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혹스러움이란 결국은 유교사상적으로 체제화된 사유관습에 기인
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결국은 유교사상에 대한 성찰로서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이
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문제 우리의 사유전통은 <독차적 형식> <유교적 형식>의 두 양식
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를 유교적 딜렘마와 전통적 딜렘마의 공존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이중적 딜렘마로부터 우리 사상사는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함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단언해야 하겠다. 그것은 알고 보면 함정이 아니고 일종의
축복이다. 왜 함정을 두고 도리어 축복이라고 말하는가? 독자적 사상사 전승상의 과정에서
는 고정된 자기 아집적 성격이 오히려 적어지고 보편적 사색을 자극하는 다양한 매체를 사
용해왔다는 뜻이다. 아니 그보다도 보다 기초적 사유가 다양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이
유에서이다. 그 자유란 사상영위상의 자유가 아니라 지적 오만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
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비하의 해를 입었다. 그 해는 오만함보다는 낫다. 중화주의 보다는
그 왜곡의 정도가 적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동시에 형식화된 중국유교의 유행으로 사상
사적 활력을 다소 상실한 것도 사상적 장애에 해당한다.
중국의 경우 민족사상사의 정립문제에서는 우리보다 더 심한 딜렘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그
들은 형식상 유교라는 주류사상을 확립하였지만 그것은 거의 허울이었다. 유교라는 이름과
경전만으로는 사상사가 전연 영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사상사가 한왕조로부터 당말까
지 중단되어 있었다고 단언하는 송대 성리학자들의 말은 상당한 사실성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기준 관점은 사상사란 보편한 사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구체적 경험적 질
체가 기초가 되는 사유여야 한다. 그 사유의 보편성면에서 송대 이전의 제국의 역사는 거
의 경험적으로는 허구의 사상사가 영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엄밀히 사실이
]다. <허구의 사상사란 무엇인가> 개념에서 개념으로 건너가며 전승되는 것으로 경험상
상을 상실한 사상사를 말한다. 모든 논리와 사유는 튼튼한 대상경험을 질료로 하여 비로소
창조적 활성을 지니고 새 시대를 호흡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사상사적 정체성의 추구와 문명권적 혹은 세계사적 보편성의 추구는 정신사의 양대지
주이다. 우리의 경우 이 양측이 다 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
신사적 정체성의 추구라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모든 지적 문화적 작업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2>
한국사상사의 메시아는 <홍익인간>이라는 구원한 개념이다. 사상의 역사에서는 이 말은 언
제 정립된 것인지를 우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개념형성의 시점을 문제삼는 이유는
과연 이 언어가 신화시대 이래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서 비롯한다. 먼저 홍
익이란 용어는 일반의 한문 표현으로서 매우 특수하다. <증익>이라든가 <부익>이라는 말은
한문적 표현으로 흔한 것이나 홍익이란 표현은 그러한 일반적 의미를 변별하는 의미적 쇄신
성이 있다. <홍>이란 글자(弘)팔을 굽혀 활을 당기는 모습이며 글자의 발음은 홍수(洪)에
서 유래한 것이다. 무한 이 넓어지는 역동성을 말한 것이다. <익>이란 그릇에 넘치는 물(<溢>
에서 유래하여 분화함)을 의미한다. 충만함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의미를 연결하면
<이익 되게 한다>는 세속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 목적어는 <인간>이다.
인간(人間)이란 문자 그대로 <사람의공간>이다, 무엇을 사람의 공간이라고 하였는가? 인간이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는 인체의 공간 점유성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점유한 공간은 일
반공간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를 지칭한 경우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한
것인데 이 경우는 그대로 일반공간을 매개로 사람이 관계를 맺게되는 것이므로 역시 일반공
간성을 강하게 지닌다. 사람의 관계란 일반적 이법상(理法上)의 보편적 규율에 의지해야하는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공간과 사람 사이의 공간은 크게 분별할 이유가
없다 공간의 성스러운 일반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매 순간에 인격체인 인(人)은 어떤 위치에 서게 되는가? 자기인격의 일반적 공간성을 폭넓게
이해하여 존재의 궁극의 끝에 서기를 권장 받게 될 것이다. 즉 일반 공간성을 자각하는 존
재가 된다는 의미를 언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그 지시성은 극히 고상하고 힘찬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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