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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의 함정-2
<1.예방액션의 부재현상과 오버액션>
최근의 잇단 대형 재난을 접하면서 특히 몇 일 전의 대구참사를 당하고 나서는 더욱 우리
사회에 <인재(人災)>라는 비교적 생소했던 용어가 유통력을 강화하고 있고 우리사회의 특정
현상을 지칭하는 언어적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하철방
화는 가장 극명한 모습으로 우리 사회의 그 의미적 단면을 보여주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의 일련의 재난적 현상들은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거나 자연적 재해가 아니라
는 점에서 분명 <인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인재>라고 규정하는 평가자
들의 이구동성의 견해가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를 아무도 지적하려고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인재>라는 비판은 <사람이 일으킨 재난>이라는 보편적 의미라기보다는 정확
히는 <타인이 일으킨 재난>이라는 무책임한 의미를 지니고 유통된다는 사실이다. 절실하게 문
제를 나의 내부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대구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반복되고 있다. 사고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벌써 그 같은 징조를 드러내고 있다. 방화범이 사고로 인한 장애인이며 정신질환자라
고 알려지고 보도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내가 아닌 다른>사람의 부당한 행위 때문이
라고 몰아가기에 바빴다. 그리고 장애인 관계자와 단체는 몰론 이에 반발하였다. 잠시후 실제
로는 기관사의 판단착오와 상황실의 근무태만으로 인해 대형참사로 이어진 것임이 알려지자
기관사와 사령실 관계자를 구속하여야한다는 의견이 일어났다. 이 역시 내가 아닌 <타인의 잘못>
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나>의 존재는 그 오류의 내부에서 초연한 것으로 위치 지
우려는 노력이 그 내부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일반적 현상이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
<오류의 사슬> 즉 <비극의 사슬>을 감추기에 급급한 것이 사실인 것이다. 여러 매체에서도 젊
은이들의 그 같은 자성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들렸다.
이와 연관하여 재난커뮤니케이션의 부재가 지적되기도 하고 사회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이 문제
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진단들이 <사고공화국>이라는 오명의 실체를 적확하게 밝힌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 그토록 참혹한 재난과 사고가 이어지는데도 사람들은 그 재난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려는 <구체적 예방 액션>이 전반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 자
체가 심각하게 질문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준비된 해법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가부장 권위주의>를 지적하기도 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아직 멀었다>는 평결을 내림으로써 우리사회가 기준미
달의 저급한 사회라는 의식을 심어줄 뿐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는 자존의식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는 것도 <문제의 중요한 하나의 원인구조>일 것이다. <편가르기> <특권의식> 등이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특히 <시스템의 부재>라는 지적이 형식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인간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즉 기계적 구조체를 조성하여 자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을
이루자는 것인데 오늘의 재앙이 어떤 전문적이고 첨단화된 시스템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그 견해는 대표적이며 책임회피적인 자기비하적 <선진국형 해법 기다리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시스템이 구원의 길일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미 지적되어 있듯이 지하
철 시설과 시스템구조는 선진국의 기술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인간이 문제인 것이다. 특히
인간의 사고와 감정이 문제인 것이다. 그로 비롯한 행동이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국내
의 것은 적당히 만들고> <수출용은 철저하게 만든다>는 그 한 자세와 태도에 있다. 곧 국민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경제 발전론이라든가 한국근대화의 내면논리 즉 선진국비약론이 결국은
일부의 사욕을 지탱하는 것이고 허상에 그치는 무용한 것임을 의미한다.
최근 어떤 유명한 교양강의매체에서 한 인사는 50대이상은 배고픔을 아는데 그 이하 새로운
세대들은 배고품을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과연 한국은 <현재 배고품을 잊어도
좋은 번영된 나라인가?> 오히려 아직 <배고픔을 과거에 못지 않게 더 뼈아프게 실감하는 많
은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현재 배고
픔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수의 배고품을 모르
는 사람들이 사회를 주도하기 때문에 바로 그와 같은 <경제발전 수출지상주의라는 중심
의 논리>로 구성된 오버액션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의 배고픈 시장기는 결코
50-60년대에 뒤지지 않는다. 굶주린 사람들이 다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무성한 반성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해법에서도 자신의 내부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려
는 진지한 일관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것이 결국 문제일 것이다. 한동안 <내 탓이요>운동
을 일으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탓>이란 <내 탓>이 될 수 없다. <탓>이
란 <원인> <이유>를 객관적으로 규명하려는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탓이란 <책임을 면하려
는 자기 합리화>의 방식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일 수 없는 언어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유는 대개 나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데 있으므로
항시 회피할 수 있는 조건을 주게된다. 아마 진정한 해답은 의외의 곳에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들의 잃어버린 자아가 그것이다.
<2.자아의 상실현상의 직시요구>
우리는 사회가 근대화될수록 자아상실의 현상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자아상실의
현상 중에 가장 분명한 것이 삶의 실제 모습이다. 삶의 가치를 자신 속에서 찾을 수 없도록 강요
하는 삶의 분위기는 해소되어야 한다. 자아의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자라나야 한다고 믿
는다.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가치이면 더욱 좋을 것이나 서로 남의 부분을 박해해서 얻
어지는 가치는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근대적 가치는 재평가되어야할 시점에 도달하고 있고 가치지향성이 없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사회인가를 처절히 목도하고 있는 지금이다. 조목별로 보자.
(1)서구물품에 대한 경이로운 찬탄으로 시작된 근대적 생필품문화는 양복 양장으로 대표되는
외국복장을 이 사회에 넘치게 하였다. <신사> <숙녀>로 지칭된 복장문화는 그대로 서구적 생활
을 이상으로 그려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양옥집에 침대생활 서구음식의 유입 육아 결혼 등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행해지는 여러 의식의 서구화 같은 것이 자연히 부수되었다. 그러나 옷을
꼭 그렇게 입어야하는 것은 아니고 일상생활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생
활방식과 물품이 있음을 충분히 참조하면 그만인 그런 것이었다. 문제는 서구적인 생활문화
가 환상처럼 우리를 뒤덮었다는 것이다.
(2)문화와 사상은 더욱 심각하다. 오늘의 창조적 작업을 지배하는 것은 서구의 미학이며 오
늘의 사회정의란 서구의 법과 제도이다. 물론 그 가운데 지성적이고 철학적인 기초에서 우러
난 진절한 면이 있는 것을 부인 할 수 없고 특히 과학적 사고를 통한 지식의 새로움은 인류
사상 혁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지고한 지성적 지표로 그대로 전환
내지 전용되어도 좋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모더니즘 시는 얼마나 허위로 가득차 있으며 반전통적인가?> <우리의 근
현대 소설은 얼마나 자의적이고 전통 파괴적인가?> 라고 자문했을 때 상당한 탈전통의 실체성
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근대화는 전통을 부정함으로서 시작되고 있다는 중대
한 오류이다. 그 전통이란 정념과 사고의 일반적 지성의 영위 면에서 가정 결정적으로 괴멸
되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문화의 체제로서는 또는 지식으로서는 전통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문화유산을 수호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적 자성은 없고 구체적 액션도 없다. 허무한
연극 같은 미사여구만 만연하고 있을 뿐이다.
(3)철학과 역사학 문학은 어떤가? 역시 그 학문적 이론이 서구모델이다. 그 가운데는 전통사상
에서 바탕을 둔 것은 거의 없고 부정일변도이다. 과학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나는 전통적 방식
으로도 첨단의 과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후학이나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등등의 학문
적 분류는 동아시아에는 없었지만 그 과학은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과학의 내부에서도 전통
적 방식이 사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험> <분석> 등의 면에서 서구가 독자적인 면이 있지
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3.한국 지성의 분석력의 현주소>
최근 한국의 최고지성의 한 분이 <아직도 천하태평>이라는 제하의 월요포럼을 모 일간지에
실었다. 평론가로서의 식견을 유감 없이 구사하여 <신중한 지휘관>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
으로 결론을 맺었다. 아마 새 정부의 위기대처방식에 대한 우려라고도 볼 수 있는 의견이
었다. <위기 사태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 근거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지에 입각한 그 견
해는 지금의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지적이지만 그 논리를 뒷받침하는 지적 소스는 <역사>
를 거론한 것이지만 <역사>가 아닌 <사실 참조>였다.
사실참조란 무엇인가 역사에서 교훈성을 발견한다는 초보적 역사의식으로서 근대 역사학이
배제하려는 방식이었다. 물론 <배제하려는>이라는 뜻은 <그 이상의 깊고 절실한 의미를 찾아
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동아시아는 이미 그런 역사를 해왔었다. 인간탐구의 일환으로
역사분야를 중요한 사색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맹자의 <오백년왕자설>은 그 하나의 결
과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에 대답하는 귀머거리와 같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그는 역사는 참고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교훈의 대상이라면 그것은 반성을 의미하고 역사의 부정을 의미한다. 긍정
할만한 사실의 역사는 경시되는 것이다.
그 부정성은 결국 자신의 부정을 내포하므로 위험하며 나아가서는 진절한 자기발견에 해악
이될 것이다. 인생은 반성으로만 개선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한국이 외
국을 침략한 일이 없다>는 일반의 이해는 <고려와 원의 일본침공>에 비추어 사실이 아니라
고 말하여 역사지식의 불안정성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침략한 일이 없다>는 말은
한국역사의 본질을 잘 설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될 수 있지만 <엄연한 사실성>은 강
열하게 지니고 있다.
또 사회학자 8명이 쓴 <한국사회의 위험과 안전>이라는 예언적 저술이 있었다고 최근 소
개되었다. 그 논리는 (1)압축적 근대화과정에서 모험을 추구하는 영웅신화의 추구 (2)친족
동향 동창 등 사적 네트워크로 구성된 한국사회의 조직적 특성이 공적 제도와 충돌 (3)압축
적 근대화를 통해 도달한 단기적 서구화의 결과 탈산업사회에 진입한 서구의 극한적 개인주
의가 여과 없이 유입되었다는 의견 (4)예방위주의 관리체계보다는 상황위주의 관리체계의문
제로 부처벌로 분산된 관리체계를 통함조정해야 한다는 안 등이 주장되었다.
이들의 주장 속에도 근대화의 역사가 거론되고 있으나 역시 위의 <참조>적 수준을 넘지 못
하고 있다. <근대화와 그 부수된 행동>들은 한국 근대사의 한 부면일 뿐이며 그 자체는 역
사의 학적 자료로서 <역사사실>일지언정 <역사자체>는 아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지성적
전승>과 연관된 그 무엇이어야 한다.
<4.결론 - 초역사주의의 회복이란 절대명제>
이상에서 한국 지성의 비역사성 혹은 반역사성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반
세기 이상을 이끌어온 우리의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비역사적인 것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
하다. 이미 조선말의 개혁운동가들과 신지식 엘리트들이 역시 그러한 길을 열어놓았었다.
그것은 그 시대적 여건상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비역사주의는
근대지성으로서는 결정적 한계가 될 것이다.
나는 서양식의 역사주의를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며 서양 역사주의의 지적 억압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망각하는 비극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우리의 이상은 서양의 역사주의를 초월하는 데
있고 동아시아 중심사상은 이미 초역사주의로 영위되어 왔다. 나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역사주의>와 <초역사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두 문명적 패러다임은 모두 전
문적으로 역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역사자체에 편중되지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준 것이 동아시아였다.
한국은 현재 초역사주의의 이상을 물론 요원한 것이고 서구식의 역사주의마저 포기함으로서
서구적 근대화성공의 역사마저 <19세기 계몽주의> 가치관으로 포장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성취한 역사사실을 왜곡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이며 그 이상의 지적 범죄
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냉정히 자신의 역사사실을 사색할 때다. 그 역사적 시색의 결과가
이 사회를 우서 인도해야하고 나아가서 초역사주의적 사상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법이다.
각 현장의 실무자들을 질책하고 조직을 재편하고 엄한 형법을 만들고 하여도 아마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며 무슨 통합관리라든가 시스템의 첨단화가 아무리 진전해도 사회의 위기
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자존의식>이 없는 곳에서 나오는 삶의 불안정함이 결국
문제이기 때문이다.
<夏夷案子>
Whashim the Haianist
HAIANJA
Deog Jo Yuu
<1.예방액션의 부재현상과 오버액션>
최근의 잇단 대형 재난을 접하면서 특히 몇 일 전의 대구참사를 당하고 나서는 더욱 우리
사회에 <인재(人災)>라는 비교적 생소했던 용어가 유통력을 강화하고 있고 우리사회의 특정
현상을 지칭하는 언어적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하철방
화는 가장 극명한 모습으로 우리 사회의 그 의미적 단면을 보여주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의 일련의 재난적 현상들은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거나 자연적 재해가 아니라
는 점에서 분명 <인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인재>라고 규정하는 평가자
들의 이구동성의 견해가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를 아무도 지적하려고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그 <인재>라는 비판은 <사람이 일으킨 재난>이라는 보편적 의미라기보다는 정확
히는 <타인이 일으킨 재난>이라는 무책임한 의미를 지니고 유통된다는 사실이다. 절실하게 문
제를 나의 내부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대구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반복되고 있다. 사고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이 벌써 그 같은 징조를 드러내고 있다. 방화범이 사고로 인한 장애인이며 정신질환자라
고 알려지고 보도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내가 아닌 다른>사람의 부당한 행위 때문이
라고 몰아가기에 바빴다. 그리고 장애인 관계자와 단체는 몰론 이에 반발하였다. 잠시후 실제
로는 기관사의 판단착오와 상황실의 근무태만으로 인해 대형참사로 이어진 것임이 알려지자
기관사와 사령실 관계자를 구속하여야한다는 의견이 일어났다. 이 역시 내가 아닌 <타인의 잘못>
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나>의 존재는 그 오류의 내부에서 초연한 것으로 위치 지
우려는 노력이 그 내부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일반적 현상이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
<오류의 사슬> 즉 <비극의 사슬>을 감추기에 급급한 것이 사실인 것이다. 여러 매체에서도 젊
은이들의 그 같은 자성의 목소리가 적지 않게 들렸다.
이와 연관하여 재난커뮤니케이션의 부재가 지적되기도 하고 사회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이 문제
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진단들이 <사고공화국>이라는 오명의 실체를 적확하게 밝힌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 그토록 참혹한 재난과 사고가 이어지는데도 사람들은 그 재난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려는 <구체적 예방 액션>이 전반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 자
체가 심각하게 질문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준비된 해법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가부장 권위주의>를 지적하기도 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아직 멀었다>는 평결을 내림으로써 우리사회가 기준미
달의 저급한 사회라는 의식을 심어줄 뿐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는 자존의식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는 것도 <문제의 중요한 하나의 원인구조>일 것이다. <편가르기> <특권의식> 등이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특히 <시스템의 부재>라는 지적이 형식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인간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즉 기계적 구조체를 조성하여 자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을
이루자는 것인데 오늘의 재앙이 어떤 전문적이고 첨단화된 시스템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그 견해는 대표적이며 책임회피적인 자기비하적 <선진국형 해법 기다리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시스템이 구원의 길일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미 지적되어 있듯이 지하
철 시설과 시스템구조는 선진국의 기술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인간이 문제인 것이다. 특히
인간의 사고와 감정이 문제인 것이다. 그로 비롯한 행동이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국내
의 것은 적당히 만들고> <수출용은 철저하게 만든다>는 그 한 자세와 태도에 있다. 곧 국민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경제 발전론이라든가 한국근대화의 내면논리 즉 선진국비약론이 결국은
일부의 사욕을 지탱하는 것이고 허상에 그치는 무용한 것임을 의미한다.
최근 어떤 유명한 교양강의매체에서 한 인사는 50대이상은 배고픔을 아는데 그 이하 새로운
세대들은 배고품을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과연 한국은 <현재 배고품을 잊어도
좋은 번영된 나라인가?> 오히려 아직 <배고픔을 과거에 못지 않게 더 뼈아프게 실감하는 많
은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현재 배고
픔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수의 배고품을 모르
는 사람들이 사회를 주도하기 때문에 바로 그와 같은 <경제발전 수출지상주의라는 중심
의 논리>로 구성된 오버액션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의 배고픈 시장기는 결코
50-60년대에 뒤지지 않는다. 굶주린 사람들이 다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무성한 반성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해법에서도 자신의 내부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려
는 진지한 일관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것이 결국 문제일 것이다. 한동안 <내 탓이요>운동
을 일으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탓>이란 <내 탓>이 될 수 없다. <탓>이
란 <원인> <이유>를 객관적으로 규명하려는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탓이란 <책임을 면하려
는 자기 합리화>의 방식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합리적일 수 없는 언어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유는 대개 나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데 있으므로
항시 회피할 수 있는 조건을 주게된다. 아마 진정한 해답은 의외의 곳에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들의 잃어버린 자아가 그것이다.
<2.자아의 상실현상의 직시요구>
우리는 사회가 근대화될수록 자아상실의 현상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자아상실의
현상 중에 가장 분명한 것이 삶의 실제 모습이다. 삶의 가치를 자신 속에서 찾을 수 없도록 강요
하는 삶의 분위기는 해소되어야 한다. 자아의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자라나야 한다고 믿
는다.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가치이면 더욱 좋을 것이나 서로 남의 부분을 박해해서 얻
어지는 가치는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근대적 가치는 재평가되어야할 시점에 도달하고 있고 가치지향성이 없는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사회인가를 처절히 목도하고 있는 지금이다. 조목별로 보자.
(1)서구물품에 대한 경이로운 찬탄으로 시작된 근대적 생필품문화는 양복 양장으로 대표되는
외국복장을 이 사회에 넘치게 하였다. <신사> <숙녀>로 지칭된 복장문화는 그대로 서구적 생활
을 이상으로 그려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양옥집에 침대생활 서구음식의 유입 육아 결혼 등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행해지는 여러 의식의 서구화 같은 것이 자연히 부수되었다. 그러나 옷을
꼭 그렇게 입어야하는 것은 아니고 일상생활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생
활방식과 물품이 있음을 충분히 참조하면 그만인 그런 것이었다. 문제는 서구적인 생활문화
가 환상처럼 우리를 뒤덮었다는 것이다.
(2)문화와 사상은 더욱 심각하다. 오늘의 창조적 작업을 지배하는 것은 서구의 미학이며 오
늘의 사회정의란 서구의 법과 제도이다. 물론 그 가운데 지성적이고 철학적인 기초에서 우러
난 진절한 면이 있는 것을 부인 할 수 없고 특히 과학적 사고를 통한 지식의 새로움은 인류
사상 혁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지고한 지성적 지표로 그대로 전환
내지 전용되어도 좋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모더니즘 시는 얼마나 허위로 가득차 있으며 반전통적인가?> <우리의 근
현대 소설은 얼마나 자의적이고 전통 파괴적인가?> 라고 자문했을 때 상당한 탈전통의 실체성
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근대화는 전통을 부정함으로서 시작되고 있다는 중대
한 오류이다. 그 전통이란 정념과 사고의 일반적 지성의 영위 면에서 가정 결정적으로 괴멸
되어갔던 것이다. 우리는 문화의 체제로서는 또는 지식으로서는 전통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문화유산을 수호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적 자성은 없고 구체적 액션도 없다. 허무한
연극 같은 미사여구만 만연하고 있을 뿐이다.
(3)철학과 역사학 문학은 어떤가? 역시 그 학문적 이론이 서구모델이다. 그 가운데는 전통사상
에서 바탕을 둔 것은 거의 없고 부정일변도이다. 과학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나는 전통적 방식
으로도 첨단의 과학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후학이나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등등의 학문
적 분류는 동아시아에는 없었지만 그 과학은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과학의 내부에서도 전통
적 방식이 사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험> <분석> 등의 면에서 서구가 독자적인 면이 있지
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3.한국 지성의 분석력의 현주소>
최근 한국의 최고지성의 한 분이 <아직도 천하태평>이라는 제하의 월요포럼을 모 일간지에
실었다. 평론가로서의 식견을 유감 없이 구사하여 <신중한 지휘관>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
으로 결론을 맺었다. 아마 새 정부의 위기대처방식에 대한 우려라고도 볼 수 있는 의견이
었다. <위기 사태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 근거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지에 입각한 그 견
해는 지금의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지적이지만 그 논리를 뒷받침하는 지적 소스는 <역사>
를 거론한 것이지만 <역사>가 아닌 <사실 참조>였다.
사실참조란 무엇인가 역사에서 교훈성을 발견한다는 초보적 역사의식으로서 근대 역사학이
배제하려는 방식이었다. 물론 <배제하려는>이라는 뜻은 <그 이상의 깊고 절실한 의미를 찾아
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동아시아는 이미 그런 역사를 해왔었다. 인간탐구의 일환으로
역사분야를 중요한 사색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맹자의 <오백년왕자설>은 그 하나의 결
과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에 대답하는 귀머거리와 같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그는 역사는 참고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교훈의 대상이라면 그것은 반성을 의미하고 역사의 부정을 의미한다. 긍정
할만한 사실의 역사는 경시되는 것이다.
그 부정성은 결국 자신의 부정을 내포하므로 위험하며 나아가서는 진절한 자기발견에 해악
이될 것이다. 인생은 반성으로만 개선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한국이 외
국을 침략한 일이 없다>는 일반의 이해는 <고려와 원의 일본침공>에 비추어 사실이 아니라
고 말하여 역사지식의 불안정성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침략한 일이 없다>는 말은
한국역사의 본질을 잘 설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될 수 있지만 <엄연한 사실성>은 강
열하게 지니고 있다.
또 사회학자 8명이 쓴 <한국사회의 위험과 안전>이라는 예언적 저술이 있었다고 최근 소
개되었다. 그 논리는 (1)압축적 근대화과정에서 모험을 추구하는 영웅신화의 추구 (2)친족
동향 동창 등 사적 네트워크로 구성된 한국사회의 조직적 특성이 공적 제도와 충돌 (3)압축
적 근대화를 통해 도달한 단기적 서구화의 결과 탈산업사회에 진입한 서구의 극한적 개인주
의가 여과 없이 유입되었다는 의견 (4)예방위주의 관리체계보다는 상황위주의 관리체계의문
제로 부처벌로 분산된 관리체계를 통함조정해야 한다는 안 등이 주장되었다.
이들의 주장 속에도 근대화의 역사가 거론되고 있으나 역시 위의 <참조>적 수준을 넘지 못
하고 있다. <근대화와 그 부수된 행동>들은 한국 근대사의 한 부면일 뿐이며 그 자체는 역
사의 학적 자료로서 <역사사실>일지언정 <역사자체>는 아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지성적
전승>과 연관된 그 무엇이어야 한다.
<4.결론 - 초역사주의의 회복이란 절대명제>
이상에서 한국 지성의 비역사성 혹은 반역사성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반
세기 이상을 이끌어온 우리의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비역사적인 것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
하다. 이미 조선말의 개혁운동가들과 신지식 엘리트들이 역시 그러한 길을 열어놓았었다.
그것은 그 시대적 여건상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비역사주의는
근대지성으로서는 결정적 한계가 될 것이다.
나는 서양식의 역사주의를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며 서양 역사주의의 지적 억압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망각하는 비극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우리의 이상은 서양의 역사주의를 초월하는 데
있고 동아시아 중심사상은 이미 초역사주의로 영위되어 왔다. 나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역사주의>와 <초역사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두 문명적 패러다임은 모두 전
문적으로 역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역사자체에 편중되지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준 것이 동아시아였다.
한국은 현재 초역사주의의 이상을 물론 요원한 것이고 서구식의 역사주의마저 포기함으로서
서구적 근대화성공의 역사마저 <19세기 계몽주의> 가치관으로 포장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성취한 역사사실을 왜곡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이며 그 이상의 지적 범죄
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냉정히 자신의 역사사실을 사색할 때다. 그 역사적 시색의 결과가
이 사회를 우서 인도해야하고 나아가서 초역사주의적 사상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법이다.
각 현장의 실무자들을 질책하고 조직을 재편하고 엄한 형법을 만들고 하여도 아마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며 무슨 통합관리라든가 시스템의 첨단화가 아무리 진전해도 사회의 위기
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자존의식>이 없는 곳에서 나오는 삶의 불안정함이 결국
문제이기 때문이다.
<夏夷案子>
Whashim the Haianist
HAIANJA
Deog Jo Y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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