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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빛접모음전>에 대한 상념



따스한 문명함의
눈부신 빛의 올들
투명한 삼재
어울려 - 충만한 정념으로 -
영롱한 수상
그 가없는 드리움을...

인간이란 놀람으로써 깨우치는 존재이다. 나는 그림 이전에 그의 진지함에 크게 놀란다. 그것
은 하나의 기쁨이며 빛이다. 우리는 친근한 신변의 사물들과 길이 간직하여 살아가고픈 사람
들에 대하여 어떤 새로움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빛나는 의미적 진상과 만나게되는 것이 이치
의 길일 것이다. 도학의 선구자인 소강절 선생이 어느 여름밤 한 갈피 호수의 수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결에 놀라 천지를 새로 깨우친 것과 같은 의미적 쇄신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바라
는 것일 것이다. 아마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런 뜻일 것이다. 나는 이 조용한 작가의 체취야말로 그와 같은 일치의 기쁨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김 화백의 화풍을 <봄볕의 온화한 광휘를 시공을 넘어 영속하려는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의 모든 화폭의 저변에서 삼베의 올을 타고 살아 돋아난 낮의 온기와 화사한
빛이 스며 있음을 짜여진 색상과 질감선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면의 상하를 감도는
은은함은 빗살무늬 토기에서 홍도의 육질의 색으로 이 강토에 유구하게 이어온 편안함의 색조를
머금었고 쪽빛의 하늘과 서늘한 우물색 익어가는 감빛을 평화롭게 아울렀다. 그것은 바로 친근한
우리 역사와 문물의 감성이며 또한 지성이다.

한편 화면의 전면에 충일한 그 화사한 발색은 분명 태양의 얼굴이다. 실은 엄연히 불타는 심혼
이 그 원 정체라는 뜻이다. 그의 내면에 이미 남모를 뜨거운 태양심이 있고 일반존재의 건너편
에서부터 빛으로 넘어오는 태양광이 서로 만나 빚어낸 <빛의 간섭> 같은 어떤 아스라한 절제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그의 몸에 밴 일상의 폴라이트함이 어느 순간에 해맑은 웃음
의 파격으로 이어질 때 거기 공기처럼 투명하게 조금 열려 보이는 숨겨진 자유의 산실 같은 그
비밀이다.

예컨데 그의 연작 <소녀>의 미소로 표현된 자화상적 실체는 입술과 볼의 홍조의 채도만큼 그 안락
함의 깊이에 거기쯤 있을 것이다. <정토>시리즈에 비추인 달과 별과 태양을 잇는 숨은 오색선의
사출이라든가 하늘의 푸른 별이 저무는 대지의 곳곳에 노란 점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별빛으로 명
멸하도록 꿈꾸는 지상적인 구현의 구도적 열망 속에도 있을 것이다. 또한 <률>에서 보듯이 통일
된 침묵 같은 일관의 색상 속에서 꺾임의 율동으로 유동하는 동선과, 그 극기(克己)의 의지적
음보(音譜)가 그리는 보폭에는 바로 그 열락의 풍류가락 굴절각 속에 은밀히 지켜온 건실한 각고
의 시간이 있었음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낸다.

그 율려(律呂)의 음적(音跡)인 예각은 직각으로 교차하는 경위화면(經緯畵面)에 실현하고픈 이상
을 표현한 것으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겸손한 성찰을 위한 자기지표이다. 그는 그러나 어떤 발
걸음이 휘거나 호흡의 공간이 좁아지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빛접다"고 선언하였다. 그 어
의는 그러나 꺾임이 전무한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빛의 굴절 같은 전환을 구현하고자하는
호쾌한 자연의 굽도리를 말한다. 중첩된 수많은 색광의 투사와 반영은 종횡으로 새 공간을 거느리
며 규각(圭角)을 해소하고 온후한 원의 대동(大同)을 그려간다. 그러므로 승화하는 이상의 궤
적으로서 그의 화면은 삼베의 반듯하게 중첩된 직선의 교직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바로 방사되
어 줄줄이 짜여지는 광선 빛 길이 그의 길이다.

이러한 태양성의 견지는 아마 《주역(周易)》에서 "군자가 내내 밤낮으로 건건(乾乾: 견지)
하고 척약(그리움)하다"고 한 말과 잘 통할 것이다. 그런 류의 본원적 의지의 드러남은 바로
<상도(常道)>라든가 <현룡재전(見龍在田)>의 의미범주를 거느린다.

그에게 모노크롬(monochrome) 추상표현에서 정토(淨土)를 주제로 한 도기합일(道器合一)의 새로
운 눈을 주었던 고향의 저녁놀과 신원사의 풍경소리 속에 불현듯 환상으로 피어올랐던 화려한 연
꽃은 이미 그 <상도>의 <드러남>을 여는 하나의 숙명이었으며 그것은 단지 한 시작이었다. 그 끝
에서는 분별 없는 공명의 화음이 실상으로 일어서고 빛과 색조의 환상을 피워내고 진절한 정감의
얼굴과 격조를 입힐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사실 태양은 절대 공간에서 한 순간도 사라진 적이 없듯이, 세밀히 들여다보면 그의
화면엔 새벽 이전의 밤은 없다. 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무광 무색의 밤을 그리기보다
는 그에게는 생명이 고이는 그 시간마저 이미 스스로 함축하여 빛으로 표현하고 싶은 때문일 것
이다. 한 겨울의 동지에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는 이치의 깨달음이리라.

그가 머물고자 하는 색의 정토(淨土)는 한마디로 화사하고 따뜻하기 그지없는 빛의 축제의 장 그
자체이다. 실로 빛의 천손들에게는 광명은 생명이며 사랑이며 인(仁)이며 의(義)이다. 부드러우면
서도 당당한, 의지해 살만한 힘찬 근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빛은 강건한 에너지이다. 빛은
또한 허용되는 모든 공간에 들어 차별 없는 미학을 구현하는 실체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의 빛
은 넘치는 파동이다. 그러나 그 빛은 충실함이 없이는 허무한 것이므로 채워짐을 기다려 광휘를
발하는 실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빛은 충실한 마음의 입자이다. 따라서 그의 새 공간은
허(虛)와 령(靈)을 공유한다. 이를 전통적 관념으로는 밝음의 덕, <명덕(明德)>이라고 불러왔었다.

그의 화력(畵歷:in his individual history)에서 새로운 길은 어스름한 새벽의 언어로서 개벽의
말 걸기로 출발했다. 피어나는 연꽃의 형상에서 산의 능선으로 얼굴로 일월의 천문도상으로 확
장해간 단초는 회회청의 남빛이었다. 그는 그 색의 언어를 위해 빛과 환상을 탐닉했었다. 최치원
선생의 새벽찬가(詠曉)를 연상케 하는 청명한 푸른 남기(嵐氣)에서 모든 빛과 색이 일어나는 소리
를 마치 새벽을 여는 고요한 마을의 모습처럼 느끼게 된다. 물론 그 성숙은 전환의 계기와 시간
의 경과를 필요로 하였다. 그가 삼베를 그의 세계로 택한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지만 우선은 그
배접한 캔버스 위에서는 암흑을 구현하는 길 자체가 없음을 직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화면은
번짐으로 이어 암흑을 풀어버리는 일종의 첨단 소재인 셈이다. 《춘추(春秋)》에 "날로 날을 잇는
다(以日繫日)"는 것은 그런 뜻일 수 있을 것이다.

한올 한올 따라가던 색들은 어느덧 나신의 절절함으로 어둠을 훌훌 벗는다. 거기서는 어떤 적막
함도 청색의 새벽 색조를 벗어날 수 없고 새벽의 싯점을 더 이상 소급해 돌아갈 수 없다. 모든
부정적이고 암흑적 어둠이란 사실 일종의 자의의 몽환적 추억일 뿐임을 그는 믿는다. 요컨데 유
일한 그의 진실은, 그 만큼 그는 너무도 빛과 온기와 색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배움
을 호색(好色)하듯이 하라"고 하였던 것은 그와 같은 심의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고향의
소스라칠만하고 신령하기까지한 붉디 붉은 흙색의 그리움과 열정이 언제나 그의 그림의 중심
에 있음을 아울러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는 또한 나약한 문객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색조로 천하를 통일하고 싶은 <의외의 패기>
를 지녔다. 그 패기는 역시 황토와 그 황토 위의 산천의 싱싱함이며 그 위를 스치는 바람결의
음악과 산중의 종소리이며 모란꽃 장미꽃 향기 그리고 솔 내음이다. 사실은 그보다 야심적인
화가도 드믈 것이다. 그는 감히 색으로 향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가 색향(色香)이라는 말을 즐
기는 이유이다. 그것도 짙은 춘향목 솔잎 같은 향을! 한술 더 떠서 그는 고향의 안방에 있
었던 가야금 소리를 그리겠다고 하였다. 물론 그가 항시 밟고 다니던 고향의 토양색으로 산 빛
으로 들내음으로... 그것은 말을 바꾸면 거의 신(神)을 그리겠다는 용기일 것이다. 그 젊은 혈
기가 이제 영글어 여기에 답을 써내려 갔다. 이름하여 <빛접모음> 이라!

그는 빛의 청동거울 다뉴세문경이 간직한 동이족의 비사를 연구하거나 읽어본 적은 없다. 그
역사를 적은 글도 없지만 또 문헌을 읽을 필요가 이미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장롱 속에
서 꺼내주신 6호짜리 정도의 삼베 천을 받아 보는 순간 그는 올올히 줄 따라 스며있는 빛의 문
명의 세례를 손끝으로 이미 전승 받았던 것이다. 그 빛은 따스했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기뻤다.
무한한 인애(仁愛)의 천심(天心) 사랑의 본질을 한순간 내려 받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 힘으로 그
리기도 침묵하기도 했다. 그려도 침묵해도 그는 언제나 빛을 구현하였다.

그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소년 같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까닭이다. 그는 위대한 화가인지
는 몰라도 환상과 실상을 크게 분별하지 않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화가이며 가장 행복한 화
가이다. 그의 그림은 결국 <천진한 행복의 그림>이라고 결론 지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술
이란 행복으로 충분히 족한 것일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가야금 산조 같은 행복의 율격을
느끼지 않는다면 또 삶의 아름다움을 냄새맡지 못한다면 오히려 아마 좀 이상할 것이다.

그는 천지심과 어머니의 권능으로 언제나 "굽지 않고 죄지 않고" <빛접>게 되었다. 호연한
그리고 건실하고 늠름한 우주적 자연어의 생기를 제대로 받았다는 뜻이다. 그 모성애의 은혜
를 새기기 위하여 그는 <모음(母音)>이라고 붙여쓸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빛은 어머니
의 애틋한 표정이며 아버지의 인자한 음성이며 바로 그 색이며 사랑이며 생명의 울림이며 그
음율이다. 그리고 모시등걸 다 떨어지도록 아들을 업어주시던 어머니의 등이며 아버지의 땀
내음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자신의 환한 얼굴>이면서 <어머님에 대한 은혜로운 추억>이다. 그는 이
미 어렵지 않게 우주심에 도달하고 활달한 광거(廣居)에 살게 된 것이다. 그는 거창하게 <예
도(藝道)>며 <천성불멸(天性不滅)>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의 문자적 감성표현으로서는 많이 어
눌한 것이지만 조금도 과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그만한 창조의 기쁨을 누리고 있
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크고 작은 의미의 융통과 짜임의 비밀은 아마 분명 화면의
질실함과 필법의 건실함 화의의 소박함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색광의 변상을
주목한 인상파화가들이나 테이블에 비추는 광선의 시각에 따른 변화상을 성찰한 러셀의 통찰력은
빛나는 것이었고 근세 이후 서양의 <시간의 발견>이라는 역사주의 지성의 거대한 본류를 구동하
는 힘이었고 개성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출발이었다.

그에 비하여 천 지 인 만물의 변화와 매순간 변환하는 자아의 정념 위에서 이를 그대로 불변의
질서구조로서 혼융하여 파악하고 일관된 빛과 기쁨을 추출하려한 동아시아적 지감은 그 이상
경이로운 것이었다. 역사적 감성은 그 안에 이미 엄존하는 것일 것이며 근대성 역시 그 외의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 화백의 화의는 역시 넓은 의미에서 문명적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시 한 수로서 그 형언할 수 없는 심회의 끝자락 여백을 넘겨 보이고자한다.

올올히 빛나며 녹아드는 온기는
열 손끝으로 타오르고
번짐선 마다 새벽빛을 터 내어 격막을 여는
맑디 맑은 자아의 새 깃 같은 가벼움이여

황토위로 반사하는 화사한 양광은
천지부모심의 미소와 음성으로 깃들고
은미하고 진한 생명으로 울리어
일어나는 색과 향과 리듬은
이미 그대로 경외로운 천연한 조화리니

종소리 들으며 새겨두었던 어느 날의
작화 노트의 메모는:

"새로운 경이와 그윽한 밀도를 내려주소서"
"평온하고 따스한 숨결이 어리게 하소서"
"춘향목 같은 신선한 향기와 새벽 같은 정결함"
"설레는 새로움을 주소서"

이미 텡그리의 주술처럼 꽃피웠어라!




:: 지난 2월에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경원대학 김관호 화백의 <빛접모음전>의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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