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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주의로 경도되는 의식을 우려한다
........형평성 회복의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며
하이안자
자연주의만으로는 퓨어리즘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지구적 환경운동의 이념에 공감하고 있고 그 대안적 의식으로서 자연주의는 순수하거나
순결한 그 무엇이라는 퓨어리즘에 무작정 몰입하기 쉽다. 이것은 아마도 그 저변에 인간은 죄의
근원이라는 원죄론적 자의식으로 인해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
의 욕구와 행동은 스스로 자연주의에 배치되는 그 무엇이라고 인식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올바
른 인식의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이 생명체인 이상 일반 자연물의 영역에 속하므로 자연의 범주 가운데 있고 인간의 심성과
육체 그리고 그 생체와 생리가 여기서 제외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사고법은 어느정도는 극단적이거나 이해상의 혼돈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적인 것을 이상시하는 것은 상당한 이해상의 오류를 내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자연적인
것은 이상일 수 있고 영원한 것일 수 있다. 단 특정한 조건하에서 그러하다. 자연의 본질과 본성을
정의한 뒤에 가능한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대개 전통적 성선설을 부정하고 있는데 그런 태도 아래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경한다면 이는
일대의 커다란 모순이다. 성선설이란 단적으로 자연의 본질론이므로 인(仁)의 정신과 쌍벽을 이루
는 동아시아적 사유의 핵이다. 결국 자연 찬미론은 단적으로 동아시아적 사유로서만 진정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 사상의 큰 흐름을 유가와 도가로 나누어 이해해온 것이 오랜 관습이었다. 흔히 이해
하는 대로 정치와 사회 문화적 중심 사유로서는 유학을 소외적 출세간적 예술 사조로서는 도가를 꼽아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인위적인 사상사 이해라고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미 사기의 육
가요지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도가와 유가 등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한나라 당시의 시대모순을 반영
한 한 시대의 이해상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그 구분이 중요하다는 뜻은 전연 아니
었다.
자연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또한 근대 서구지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라는 르네상스기 이후의 관점은 적어도 자연의 의미를 탐토하려했다는 점에서 동아
시아적 사유와 접점을 공유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자연주의 철학은 그 뿌리가 오늘의
자연주의적 편견과도 닿아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그 편견이란 철학자들의 순수한 지적 노력
은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구지성과 동양의 지성의 바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려 함
이다.
동아시아 사상은 경험현상의 형평한 받아들임으로 성립되었다.
동아시아의 대표적 주류사상 개념으로서 중용(中庸)이나 천인조화(天人調和)를 말하는 것이 보통
이다. 그 명제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 이해는 간단하지 않다. 무엇에 대한 중용이냐 하는 물음이 전
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용사상은 경험수용의 형평성으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물론 그 수용의 주체는 대학에서 말하는 자아이다. 그 목표는 '밝은 깨달음과 가시화된 실
천'(明明德)에 있었다. 바로 그 다의성을 주목해야하고 특히 근원적 사유법으로서 지닌 제1의 경험
적 본질을 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조화(harmony)가 우주의 본질이라는 이해는 그리스 철학에서도 있었으므로(피타고라스) 그 조화사상
자체는 공통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사상의 내용은 판이하다. 하모니즘은 존재하는 자연
실체간의 조화를 말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조화란 더 구체적으로 절실하게 '사유의 질료로 수용하
는 경험현상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므로 단적으로는 이해와 사유상의 균형이며 이를 구현하는 삶의
형평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자연의 찬미란 동아시아적 사유에서는 심중한 의미로 스스로 나아가기는 어렵
다. 공자가 "물이여 물이여"하고 물을 찬미했던 것은 '쉬임없이 나아가 바다에 이르는 영원한
유동성', '빈 곳을 비약하지 않고 반드시 채우고 나아가는 충실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공자가 "동자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바람쏘이고 싶다"는 증점
의 자연친화적 포부에 깊은 공감을 표시하였던 것은 사실은 '자연주의'라기보다는 '형평이상(禮)의
실천적 좌절'을 안타까워하는 심경의 표출이었다.
인간의 문명은 스스로 대안적 제3의 공간이었다.
동아시아 고대문명은 인간의 육욕과 사심으로 구성된 질체가 보편적 의미와 교응을 수행하는 숭고
하게 조건화된 공간을 창출하였다. 이를 전통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형평을 구현하는 기초가 일
찍이 마련된 것이었다.
역사상 이 전통문명이 개체와 보편과의 중계공간으로서의 구실을 상실한 것은 문화 양식의 고가성
(高價性) 귀족성 때문이었고, 근대에는 특히 자본성 상업성이 크게 대두하면서 가격 신분 자본 상업
에 의해 타자의 육질로 돌아가는 경향을 강하게 나타낸다. 점점 본래의 실질한 가치를 상실해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문명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과 우주적 원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임에도 하나의 가상의 질체로 돌아
감으로서 영원히 공허한 우주공간을 맴도는 궤도를 잃은 우주선과 같은 존재로 전환되고 있다.
의미적 절실함이 사라진 문명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새로운 창조적 공간을 발견한 것은 적어도 3000년 전의 일이다. 인류은 그 공간에서 글
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었다. 도기를 굽고 기물의 디자인을 행하고 문양을 그리고 설계를
하였다. 이른바 문물의 사용과 창조 그것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그 문명의 향유 과정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문물의 의미를 점점 축소하였다. 소수의
의식적 지성인들은 가난함에도 그 공간의 창조적 가치를 이해하고 청빈함으로도 그 공간 사용
자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붓 한자루만으로도 그 공간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그같이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창조적 공간을 영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이었고,
예컨데 조선왕조의 문명이 가장 고급한 문명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한 이유
가 된다.
우리는 그같이 고통을 영위하는 문명의 주인공의 시대를 매우 오래 이어왔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런 고통의 산고를 이어가야할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정보혁명이 일어나면서
등장한 디지털의 세계는 인류에게 완전히 새로운 제4의 공간을 선사하였다. 아직 얼떨떨한 인류는
그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공간인지 질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새문화는 결정적으로 새로운
의식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인터넷 공간은 우선 제4의 공간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양식에 따
라 극히 자유로운 창조와 향유가 가능하도록 구현되고 실현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의미에서 새
로 열리는 공간이 제4공간이다.
그러나 실제공간과 혼동되는 부분을 청산하지 못한 면이 있으므로 그 청산을 통해 완전히 자유롭
고 독립된 완전소통의 공간으로 발전할 것이므로 그 자유로움과 독립성의 확보에 의하여 제5공간 제
6공간 혹은 그 이상의 방식으로 무한히 새 공간으로 전환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제4공간은 사실 복
합공간으로서 무한수의 공간명으로 분화할 것
이다. 인간이 거의 신이되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
다.
과거 일만년의 문명사가 신을 대신하려는 역사였다면 21세기 이후의 문명사는 인류가 직접 신이
되는 신화(神化)의 역사가 새로 시작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전통적 종교로부
터의 저항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도 결국 즐거히 동참하게 될 것이다. 바로 새로운 해석학을
통해서일 것이다.
나는 이 새 공간의 중심 개척자는 결국 동아시아 전통지성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어떤 사상도
문명을 생명과 등가시하는 사유근거를 확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인식하고 스스로의 사유
법으로 사용하는 신유자의 탄생은 필연적이다. 그런 공간의 가치를 믿는 신유자의 등장을 기대하고
믿는다.
편중된 자연주의나 문화주의는 똑같이 우려된다.
........형평성 회복의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며
하이안자
자연주의만으로는 퓨어리즘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지구적 환경운동의 이념에 공감하고 있고 그 대안적 의식으로서 자연주의는 순수하거나
순결한 그 무엇이라는 퓨어리즘에 무작정 몰입하기 쉽다. 이것은 아마도 그 저변에 인간은 죄의
근원이라는 원죄론적 자의식으로 인해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
의 욕구와 행동은 스스로 자연주의에 배치되는 그 무엇이라고 인식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올바
른 인식의 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이 생명체인 이상 일반 자연물의 영역에 속하므로 자연의 범주 가운데 있고 인간의 심성과
육체 그리고 그 생체와 생리가 여기서 제외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사고법은 어느정도는 극단적이거나 이해상의 혼돈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적인 것을 이상시하는 것은 상당한 이해상의 오류를 내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자연적인
것은 이상일 수 있고 영원한 것일 수 있다. 단 특정한 조건하에서 그러하다. 자연의 본질과 본성을
정의한 뒤에 가능한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대개 전통적 성선설을 부정하고 있는데 그런 태도 아래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경한다면 이는
일대의 커다란 모순이다. 성선설이란 단적으로 자연의 본질론이므로 인(仁)의 정신과 쌍벽을 이루
는 동아시아적 사유의 핵이다. 결국 자연 찬미론은 단적으로 동아시아적 사유로서만 진정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 사상의 큰 흐름을 유가와 도가로 나누어 이해해온 것이 오랜 관습이었다. 흔히 이해
하는 대로 정치와 사회 문화적 중심 사유로서는 유학을 소외적 출세간적 예술 사조로서는 도가를 꼽아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인위적인 사상사 이해라고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미 사기의 육
가요지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도가와 유가 등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한나라 당시의 시대모순을 반영
한 한 시대의 이해상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그 구분이 중요하다는 뜻은 전연 아니
었다.
자연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또한 근대 서구지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라는 르네상스기 이후의 관점은 적어도 자연의 의미를 탐토하려했다는 점에서 동아
시아적 사유와 접점을 공유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자연주의 철학은 그 뿌리가 오늘의
자연주의적 편견과도 닿아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그 편견이란 철학자들의 순수한 지적 노력
은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구지성과 동양의 지성의 바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려 함
이다.
동아시아 사상은 경험현상의 형평한 받아들임으로 성립되었다.
동아시아의 대표적 주류사상 개념으로서 중용(中庸)이나 천인조화(天人調和)를 말하는 것이 보통
이다. 그 명제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 이해는 간단하지 않다. 무엇에 대한 중용이냐 하는 물음이 전
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중용사상은 경험수용의 형평성으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물론 그 수용의 주체는 대학에서 말하는 자아이다. 그 목표는 '밝은 깨달음과 가시화된 실
천'(明明德)에 있었다. 바로 그 다의성을 주목해야하고 특히 근원적 사유법으로서 지닌 제1의 경험
적 본질을 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조화(harmony)가 우주의 본질이라는 이해는 그리스 철학에서도 있었으므로(피타고라스) 그 조화사상
자체는 공통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사상의 내용은 판이하다. 하모니즘은 존재하는 자연
실체간의 조화를 말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조화란 더 구체적으로 절실하게 '사유의 질료로 수용하
는 경험현상의 균형'을 말하는 것이므로 단적으로는 이해와 사유상의 균형이며 이를 구현하는 삶의
형평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자연의 찬미란 동아시아적 사유에서는 심중한 의미로 스스로 나아가기는 어렵
다. 공자가 "물이여 물이여"하고 물을 찬미했던 것은 '쉬임없이 나아가 바다에 이르는 영원한
유동성', '빈 곳을 비약하지 않고 반드시 채우고 나아가는 충실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공자가 "동자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바람쏘이고 싶다"는 증점
의 자연친화적 포부에 깊은 공감을 표시하였던 것은 사실은 '자연주의'라기보다는 '형평이상(禮)의
실천적 좌절'을 안타까워하는 심경의 표출이었다.
인간의 문명은 스스로 대안적 제3의 공간이었다.
동아시아 고대문명은 인간의 육욕과 사심으로 구성된 질체가 보편적 의미와 교응을 수행하는 숭고
하게 조건화된 공간을 창출하였다. 이를 전통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형평을 구현하는 기초가 일
찍이 마련된 것이었다.
역사상 이 전통문명이 개체와 보편과의 중계공간으로서의 구실을 상실한 것은 문화 양식의 고가성
(高價性) 귀족성 때문이었고, 근대에는 특히 자본성 상업성이 크게 대두하면서 가격 신분 자본 상업
에 의해 타자의 육질로 돌아가는 경향을 강하게 나타낸다. 점점 본래의 실질한 가치를 상실해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문명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과 우주적 원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임에도 하나의 가상의 질체로 돌아
감으로서 영원히 공허한 우주공간을 맴도는 궤도를 잃은 우주선과 같은 존재로 전환되고 있다.
의미적 절실함이 사라진 문명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새로운 창조적 공간을 발견한 것은 적어도 3000년 전의 일이다. 인류은 그 공간에서 글
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었다. 도기를 굽고 기물의 디자인을 행하고 문양을 그리고 설계를
하였다. 이른바 문물의 사용과 창조 그것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그 문명의 향유 과정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문물의 의미를 점점 축소하였다. 소수의
의식적 지성인들은 가난함에도 그 공간의 창조적 가치를 이해하고 청빈함으로도 그 공간 사용
자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붓 한자루만으로도 그 공간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그같이 고통과 가난 속에서도 창조적 공간을 영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이었고,
예컨데 조선왕조의 문명이 가장 고급한 문명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한 이유
가 된다.
우리는 그같이 고통을 영위하는 문명의 주인공의 시대를 매우 오래 이어왔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런 고통의 산고를 이어가야할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정보혁명이 일어나면서
등장한 디지털의 세계는 인류에게 완전히 새로운 제4의 공간을 선사하였다. 아직 얼떨떨한 인류는
그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공간인지 질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새문화는 결정적으로 새로운
의식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인터넷 공간은 우선 제4의 공간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그리고 문화의 양식에 따
라 극히 자유로운 창조와 향유가 가능하도록 구현되고 실현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의미에서 새
로 열리는 공간이 제4공간이다.
그러나 실제공간과 혼동되는 부분을 청산하지 못한 면이 있으므로 그 청산을 통해 완전히 자유롭
고 독립된 완전소통의 공간으로 발전할 것이므로 그 자유로움과 독립성의 확보에 의하여 제5공간 제
6공간 혹은 그 이상의 방식으로 무한히 새 공간으로 전환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제4공간은 사실 복
합공간으로서 무한수의 공간명으로 분화할 것
이다. 인간이 거의 신이되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
다.
과거 일만년의 문명사가 신을 대신하려는 역사였다면 21세기 이후의 문명사는 인류가 직접 신이
되는 신화(神化)의 역사가 새로 시작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전통적 종교로부
터의 저항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도 결국 즐거히 동참하게 될 것이다. 바로 새로운 해석학을
통해서일 것이다.
나는 이 새 공간의 중심 개척자는 결국 동아시아 전통지성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어떤 사상도
문명을 생명과 등가시하는 사유근거를 확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인식하고 스스로의 사유
법으로 사용하는 신유자의 탄생은 필연적이다. 그런 공간의 가치를 믿는 신유자의 등장을 기대하고
믿는다.
편중된 자연주의나 문화주의는 똑같이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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