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새로운 에포크를 위하여
-개혁운동의 보편화를 위한 제언-
새 정부 출범 100일을 넘기면서 생각해보면 전에 볼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근대화운동'
이 중심이 되었던 개혁운동이 그 구체성을 부각하면서 오히려 근대초기적 자유주의적 운동의 성격
을 보다 결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지적 운동법칙상 본질로의 회귀
현상일 수 있다.
환언하면 상대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이념적 성찰이 진전되었다기보다는 약화되는 것이며 이는 보다
행동주의적 운동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여러 방면에서 '구체제'가 아직 강고하게 살아있으나 그 지
배력이 현저히 약화된 공간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열정 혹은 욕구가 '백화제방운동'과 유사하
게 분출하고 있지만 진정한 근대성의 창출 방책은 유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근대성이 거창한 이념으로서만 존재하기에는 우리의 근대적 경험은 너무나 절실함을 다하였다.
현재의 우리에게 거대담론이 쇠퇴하고 있는 이유이다. 시련과 고통 비극과 아픔의 부정적 차원의
근대적 대지 위에서 근대 이념의 수용이나 세속의 생활사적 진보를 이룬 긍정적 성과는 경이로운 것
이었다. 우리의 근대적 경험의 빛과 그림자이다.
그러나 실물과 의미와 가치는 같이 가야하는 것이므로 근대성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묻되 "행복지수"
라는 소박한 준거를 이탈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민족사"라고 하는 우리 명운(역사적 의미
에서)을 초월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우리에게 거대담론이 필요한 까닭이다.
문제는 그 절실화한 욕구(열정의 정도를 넘어선 것 같다)가 그 같은 철학적 역사적 물음의 결여로
인해 상당한 정도로 안목의 편향성을 고수하게 되었다는 사실성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근대적 이상이 현실과 보다 가까이 접목하면서 그 구현 과정에서 주관적 속성을 일반적으로 나
타내고 있는데 특히 그 결과로서 아집 집착 성급함 특히 격렬함을 보이고 있고 더욱이는 공동체의
정신을 위협할 정도로 타자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첨예화하고 이를 경쟁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확실히 큰 문제일 것이다.
한국 근대사는 젊은 피의 역동으로 그 활력을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위대한 항일운동과 독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은 한국 개혁운동의 고전적 모습이었다. 아울러 '서구수준으로 선진화된 발전된
사회'를 표방한 각종의 자유주의적 개혁운동이 근대화를 위한 제반 노력의 배면에서 꾸준히 성장하였
던 것도 사실이다. 단적으로 한국 근대지성의 목표는 단적으로는 서구화에 있었다.
서구화의 추세는 피할 수 없는 현대사의 맥락이었으므로 저간의 운동은 분명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
러나 세계보편적 가치로서의 범주에서는 당연한 그 이상들이 그 자체만로서 민족적 이상과 등가화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보편성 자체에 대한 의문
을 동시에 남기게 된다.
현재의, 그 서구적 규준과 관행마저를 능가하려는 '순 이상주의적 개혁'의 의지 표출은 상당한
임의성을 띠어 (1)일반 보편적 현실적 이상을 넘어서고 (2)자아의 개별적 절실함을 규합함을 오로지
근거로 하여 (3)집단적으로 힘을 통해 특정 목표를 달성하려는 왜곡된 흐름을 일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그와 같은 격한 움직임들은 실은 자아발견의 한 과정이며 노력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자위 하지만 그러한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할 경우 지
금의 운동들은 민족의 장래를 위한 무거운 족쇄일 수 있다.
우리 현실을 하나의 일반 현대사로서 '넓고 크게'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함과 함께 우리의 민족적
삶이 민족사적 사상사적 전통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좁고 깊은' 이해도 치열히 모색되어야할 현
실적 전제이다. 물론 그러한 역사적 자아의 성찰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그러
나 그 인식은 쉽지 않다. 우리 근대사가 자아훼손의 역사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무엇보다 민족의 식민지경험은 민족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였고 해방의 과정과 민족상잔
을 겪으면서 서구의 힘과 문화에 대한 깊은 동경과 함께 끝없는 자기 비하의 념을 초래하였다. 일
본에 대해 과거사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그 증표이다. 일본도 당연히 그 '자학의 동아시아사'의 일
원일뿐이다.막연한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으로는 그 상처들을 치유할 수는 없었다. 바로 우리
가 진지하게 역사와 전통을 구체적으로 실직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최근 한국의 지성인들은 대개 발전된 사회이상을 논할 경우 흔히 전통역사의 부정적 배경을 말하고
전통사상의 고루함을 강조하여 새 이념이 정당한 것임을 부각하려 하였으며 우리의 전통 생활양식
이나 관습마저도 그러한 틀 속에 가두어 개혁의 목포화 하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
한 근거를 깊이 탐구해본 적이 없는 유행과 같은 지적 분위기일 뿐이었다. 그런 지적 풍토는 문화적
사실성을 일탈한 것이므로 위험한 것일 것이다. 동아시아 혹은 민족역사로서 생활사 문화사 사상사 등
역사성을 시급히 구비할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현재 나의 마음이 가는 대로 사는 삶'은 행복의 한 요소일 수는 있으나 비역사적이므로 위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임의성이나 주관성은 귀중하면서도 경계해야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
러므로 먼저 근대사에 일관되었던 우리의 역사적 '자기비하'를 끝내야 한다.
예를 들면
중국과 한국이 식민지 경험을 한 것은 전근대사회에서도 동아시아에 흔히 있었던 역사 일반의 일
이다. 중국의 역사는 그들 역사의 40%이상이 이민족 침략과 지배를 받은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
지대에 대한 야만세력의 침입은 상시 있었다. 게르만의 로마침공이 서양 중세를 열었던 것과 같은 이
치이다. 야만의 침공이 그리스-로마를 기초로한 서양문명을 변질하지 못하였듯이 동아시아의 근대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그들의 문명적 본질을 말살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만큼 동아시아 사
상 문화 중심국가로서 한국 중국의 문명적 전통은 가치로운 것이다.
그와 같은 새로운 인식으로 자신의 문명성을 회복한다는 대전제가 결여된 모든 개혁은 머지않아
그 힘을 잃게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바로 우리 역사의 새 기원이 시작되어야하는 이 시기
에 우리 역량을 낭비해서는 안될 것이다.
부언할 것은 개혁 자체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진정 개혁해야 할 일
들이 산적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혁의 워킹프로그램을 결정할 때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하는 그 해답의 출발선도 결국 자아성찰의 큰 틀 안에 있을 것이다.
그 자아성찰은 모두의 몫이므로 개혁운동은 이제 운동가들의 범주를 넘어서야 한다. 모두를 포함하
는 개혁논의가 절실한 과제로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성을 직시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현재의 우리
모두 뿐 아니라 역사상의 한국 생활인 모두에게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포용과 화해
가 요구된다는 것이다.물론 화해의 당사자들의 절실한 자아성찰이 그 전제이다.
순논리로 말하면 요컨데 문명이란 공허한 우주 공간과 애련의 생명체인 인간의 사이 그 제3의 공간
에서 창출된 '구현된 창조와 자유와 결단의 잉여물'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역사(history)를 시세(時勢)라고 하였다. 역사는 물질적 결과물이 아니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쓴 근본 이념의 하나이다.
철리적으로는 모든 물질성을 함유한 질체들은 시간 즉 역사의 산물이다. 뒤집어 말하면 시간이나
역사란 역으로 물질성을 통해서만이 역동성을 구현하게 된다. 아마 우리들의 전체 공간이 허령한 것
일 뿐이라면 '유동하는 것'으로서의 시간이란 의미와 가치가 말살되게 될 것이다. 정지한 공간이 된다
는 것이다. 단적으로 시간이란 물질역동의 본질
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물질과 역동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이를 서구적 깨달음으로
표현 한 것이 '상대성 원리'일 것이다. 상대성 원리는 그 삼자간의 형평의 진상을 다소 왜곡하여
시간과 역동을 통합해 에너지(E)로 환산함으로써 다소 이해상의 혼란을 야기하였다고 생각된다. 실
은 아마 (시간을 A, 질량을 B, 동력을 C라고 하여 수학이 아닌 수리적 표현을 해보면) AB=AC 이어야
하고 B=CAA, C=BAA AA=BC 라고 하는 일반 공식을 전제로 하였을 것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대학의 장구에서 '허령불매(虛靈不昧)란 공허한 공간이 명백한 현상의 본질로 넘치고 있다는 이해이
므로 이미 전통적으로 그 삼자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역동으로서 역사
를 창출하는 것이므로 개혁이란 신성한 것이며 대학에서 일신(日新)을 말한 이유이다.그러나 도리
어 개혁이라는 이념이 자유로은 역동을 제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한 일은 아니다. 다시 말
하면 개혁지향성은 일부의 전유 이념으로 남아 있으려 하기 보다는 보편한 의념으로서 확충되어 나
아가야한다는 것이다. 내성과 자제와 화해와 응찰이 요구된다. 그 응찰의 주제는 당연히 동아시아란
무엇인가? 근대라든가 역사의 이상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다.
하이안자
-개혁운동의 보편화를 위한 제언-
새 정부 출범 100일을 넘기면서 생각해보면 전에 볼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근대화운동'
이 중심이 되었던 개혁운동이 그 구체성을 부각하면서 오히려 근대초기적 자유주의적 운동의 성격
을 보다 결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지적 운동법칙상 본질로의 회귀
현상일 수 있다.
환언하면 상대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이념적 성찰이 진전되었다기보다는 약화되는 것이며 이는 보다
행동주의적 운동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여러 방면에서 '구체제'가 아직 강고하게 살아있으나 그 지
배력이 현저히 약화된 공간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열정 혹은 욕구가 '백화제방운동'과 유사하
게 분출하고 있지만 진정한 근대성의 창출 방책은 유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근대성이 거창한 이념으로서만 존재하기에는 우리의 근대적 경험은 너무나 절실함을 다하였다.
현재의 우리에게 거대담론이 쇠퇴하고 있는 이유이다. 시련과 고통 비극과 아픔의 부정적 차원의
근대적 대지 위에서 근대 이념의 수용이나 세속의 생활사적 진보를 이룬 긍정적 성과는 경이로운 것
이었다. 우리의 근대적 경험의 빛과 그림자이다.
그러나 실물과 의미와 가치는 같이 가야하는 것이므로 근대성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묻되 "행복지수"
라는 소박한 준거를 이탈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민족사"라고 하는 우리 명운(역사적 의미
에서)을 초월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우리에게 거대담론이 필요한 까닭이다.
문제는 그 절실화한 욕구(열정의 정도를 넘어선 것 같다)가 그 같은 철학적 역사적 물음의 결여로
인해 상당한 정도로 안목의 편향성을 고수하게 되었다는 사실성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근대적 이상이 현실과 보다 가까이 접목하면서 그 구현 과정에서 주관적 속성을 일반적으로 나
타내고 있는데 특히 그 결과로서 아집 집착 성급함 특히 격렬함을 보이고 있고 더욱이는 공동체의
정신을 위협할 정도로 타자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첨예화하고 이를 경쟁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확실히 큰 문제일 것이다.
한국 근대사는 젊은 피의 역동으로 그 활력을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위대한 항일운동과 독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은 한국 개혁운동의 고전적 모습이었다. 아울러 '서구수준으로 선진화된 발전된
사회'를 표방한 각종의 자유주의적 개혁운동이 근대화를 위한 제반 노력의 배면에서 꾸준히 성장하였
던 것도 사실이다. 단적으로 한국 근대지성의 목표는 단적으로는 서구화에 있었다.
서구화의 추세는 피할 수 없는 현대사의 맥락이었으므로 저간의 운동은 분명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
러나 세계보편적 가치로서의 범주에서는 당연한 그 이상들이 그 자체만로서 민족적 이상과 등가화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보편성 자체에 대한 의문
을 동시에 남기게 된다.
현재의, 그 서구적 규준과 관행마저를 능가하려는 '순 이상주의적 개혁'의 의지 표출은 상당한
임의성을 띠어 (1)일반 보편적 현실적 이상을 넘어서고 (2)자아의 개별적 절실함을 규합함을 오로지
근거로 하여 (3)집단적으로 힘을 통해 특정 목표를 달성하려는 왜곡된 흐름을 일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그와 같은 격한 움직임들은 실은 자아발견의 한 과정이며 노력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자위 하지만 그러한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할 경우 지
금의 운동들은 민족의 장래를 위한 무거운 족쇄일 수 있다.
우리 현실을 하나의 일반 현대사로서 '넓고 크게'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함과 함께 우리의 민족적
삶이 민족사적 사상사적 전통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좁고 깊은' 이해도 치열히 모색되어야할 현
실적 전제이다. 물론 그러한 역사적 자아의 성찰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그러
나 그 인식은 쉽지 않다. 우리 근대사가 자아훼손의 역사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무엇보다 민족의 식민지경험은 민족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였고 해방의 과정과 민족상잔
을 겪으면서 서구의 힘과 문화에 대한 깊은 동경과 함께 끝없는 자기 비하의 념을 초래하였다. 일
본에 대해 과거사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그 증표이다. 일본도 당연히 그 '자학의 동아시아사'의 일
원일뿐이다.막연한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으로는 그 상처들을 치유할 수는 없었다. 바로 우리
가 진지하게 역사와 전통을 구체적으로 실직하게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최근 한국의 지성인들은 대개 발전된 사회이상을 논할 경우 흔히 전통역사의 부정적 배경을 말하고
전통사상의 고루함을 강조하여 새 이념이 정당한 것임을 부각하려 하였으며 우리의 전통 생활양식
이나 관습마저도 그러한 틀 속에 가두어 개혁의 목포화 하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
한 근거를 깊이 탐구해본 적이 없는 유행과 같은 지적 분위기일 뿐이었다. 그런 지적 풍토는 문화적
사실성을 일탈한 것이므로 위험한 것일 것이다. 동아시아 혹은 민족역사로서 생활사 문화사 사상사 등
역사성을 시급히 구비할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현재 나의 마음이 가는 대로 사는 삶'은 행복의 한 요소일 수는 있으나 비역사적이므로 위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임의성이나 주관성은 귀중하면서도 경계해야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
러므로 먼저 근대사에 일관되었던 우리의 역사적 '자기비하'를 끝내야 한다.
예를 들면
중국과 한국이 식민지 경험을 한 것은 전근대사회에서도 동아시아에 흔히 있었던 역사 일반의 일
이다. 중국의 역사는 그들 역사의 40%이상이 이민족 침략과 지배를 받은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
지대에 대한 야만세력의 침입은 상시 있었다. 게르만의 로마침공이 서양 중세를 열었던 것과 같은 이
치이다. 야만의 침공이 그리스-로마를 기초로한 서양문명을 변질하지 못하였듯이 동아시아의 근대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그들의 문명적 본질을 말살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만큼 동아시아 사
상 문화 중심국가로서 한국 중국의 문명적 전통은 가치로운 것이다.
그와 같은 새로운 인식으로 자신의 문명성을 회복한다는 대전제가 결여된 모든 개혁은 머지않아
그 힘을 잃게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바로 우리 역사의 새 기원이 시작되어야하는 이 시기
에 우리 역량을 낭비해서는 안될 것이다.
부언할 것은 개혁 자체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진정 개혁해야 할 일
들이 산적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혁의 워킹프로그램을 결정할 때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하는 그 해답의 출발선도 결국 자아성찰의 큰 틀 안에 있을 것이다.
그 자아성찰은 모두의 몫이므로 개혁운동은 이제 운동가들의 범주를 넘어서야 한다. 모두를 포함하
는 개혁논의가 절실한 과제로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성을 직시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현재의 우리
모두 뿐 아니라 역사상의 한국 생활인 모두에게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포용과 화해
가 요구된다는 것이다.물론 화해의 당사자들의 절실한 자아성찰이 그 전제이다.
순논리로 말하면 요컨데 문명이란 공허한 우주 공간과 애련의 생명체인 인간의 사이 그 제3의 공간
에서 창출된 '구현된 창조와 자유와 결단의 잉여물'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역사(history)를 시세(時勢)라고 하였다. 역사는 물질적 결과물이 아니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쓴 근본 이념의 하나이다.
철리적으로는 모든 물질성을 함유한 질체들은 시간 즉 역사의 산물이다. 뒤집어 말하면 시간이나
역사란 역으로 물질성을 통해서만이 역동성을 구현하게 된다. 아마 우리들의 전체 공간이 허령한 것
일 뿐이라면 '유동하는 것'으로서의 시간이란 의미와 가치가 말살되게 될 것이다. 정지한 공간이 된다
는 것이다. 단적으로 시간이란 물질역동의 본질
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물질과 역동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이를 서구적 깨달음으로
표현 한 것이 '상대성 원리'일 것이다. 상대성 원리는 그 삼자간의 형평의 진상을 다소 왜곡하여
시간과 역동을 통합해 에너지(E)로 환산함으로써 다소 이해상의 혼란을 야기하였다고 생각된다. 실
은 아마 (시간을 A, 질량을 B, 동력을 C라고 하여 수학이 아닌 수리적 표현을 해보면) AB=AC 이어야
하고 B=CAA, C=BAA AA=BC 라고 하는 일반 공식을 전제로 하였을 것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대학의 장구에서 '허령불매(虛靈不昧)란 공허한 공간이 명백한 현상의 본질로 넘치고 있다는 이해이
므로 이미 전통적으로 그 삼자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역동으로서 역사
를 창출하는 것이므로 개혁이란 신성한 것이며 대학에서 일신(日新)을 말한 이유이다.그러나 도리
어 개혁이라는 이념이 자유로은 역동을 제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한 일은 아니다. 다시 말
하면 개혁지향성은 일부의 전유 이념으로 남아 있으려 하기 보다는 보편한 의념으로서 확충되어 나
아가야한다는 것이다. 내성과 자제와 화해와 응찰이 요구된다. 그 응찰의 주제는 당연히 동아시아란
무엇인가? 근대라든가 역사의 이상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다.
하이안자
'recording of life > 경전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에 대한 고언과 분석 (0) | 2003.06.29 |
---|---|
동아시아 사상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0) | 2003.06.24 |
자연주의로 경도되는 의식을 우려한다. (0) | 2003.06.02 |
호주제 추진과정 문제 있다 (0) | 2003.05.30 |
호주제 폐지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0) | 2003.05.28 |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 Total
- Today
- Yesterday
링크
TAG
- 문명
- 홍익인간 연의 논어
- 헬렌후랑켄탈러
- 팔괘
- 일기
- 홀홀히
- Karin Batten
- 회흑색
- 폴 레몬
- 문재인
- 새벽
- 해군항적도
- 한스 호프만
- 존재
- 휘쳐
- 자연주의
- 요즘
- 편향지지율
- 이상
- Carmen Cicero
- 유교
- Bruce Cohen
- 열정
- 폴헨리브리흐
- 항적도
- 시공
- 삼재사상
- 하늘그리기
- Helmut Dorner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