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추기경과 정교수의 대통령론을 논함
추기경 고언
국내 한 대표적 일간지가 김 추기경에게 <현시국>에 대한 "말씀"을 청하여 6월 24일자 제3면에 대서
특필하고 다음 날은 "추기경의 고언(苦言)에 담긴 뜻은"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추기경이 그
전화대담을 통하여 피력한 내용은 <특검> <노동계 파업> <신문>등 민감한 현안문제들을 거론하고 있는
데 총체적 <진단과 처방>으로서 그의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언
론이 기독교적 종교권위에 의존하려는 것은 형평을 잃은 것이며 일종의 방책적 태도일 것이다. 대담
의 내용이 그만큼 특별하지 않다는 뜻이다. 특이한 면이 있었다면 대담에서 보듯이 '추기경께서, 전
에 없이 <대노(大怒)>'한 배경과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 보도는 '추기경의 말씀'을 따서 "盧, 난국타개 능력 있는지 의문" 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아울러
동 27일자 제16면에 실린 정윤재 교수의 노대통령 발언분석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런 류의 보
도는 그 막대한 대국민적 영향 파급이 예상되므로 일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의 만연한 일반
적 <삶의 엄정함의 필요>(방만한 반엄숙주의의 경계)에 비추어 인위적으로 어떤 현상을 자의적 필요에
따라 혹은 자아중심적 속단에 의해 혹은, 어떤 <자기체계중심적 확신>에 의해서일지라도, 부정적 각도
에서 <증폭>해서는 안될 것이다. <진실의 왜곡상>을 <광포>하는 것은 거의 <재앙>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공의의 장에 어떤 의미에서건 이기주의나 방편주의 등의 <사사로움>이 게재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오늘의 최대의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중심적 공기체제로서 언론은 영욕의 근현대사를 영위한 우리 풍토에서 역시 그 영욕을 딛고 사
회 문화 정치 경제 등 근대화 과정에서 중대한 공헌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좌절과 성취, 의리와
영달, 삿정과 사명의 중첩된 명암을 헤치고 살아온 대중국민과 진솔하게 서로 격려하고 호흡하려하였
음도 사실이다. 비극의 암울함에서 명창한 열락의 대동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이의 소망과 달리
우리는 아직 길고 긴 악마적 명운의 꼬리 끝을 밟고 살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그 동안 책임 있는
사회 문화의 선도주체들이 넓은 시야와 통렬한 자아성찰이 부족함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조장된 문화
와 기풍의 모든 방만함으로 가득한 지금, 그 전방위적 혼돈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이 순간 언
론의 역할과 책임은 진정 사활적이다. 우리에게 문화기풍적 <시평>이 긴요한 까닭이다.
추기경의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추기경은
"지금 우리의 상황은 <망망대해에서 태풍을 만난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장인 대툥령께서
이를 잘 헤쳐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
디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쯤 좀 나아질지 의문>입니
다."
라고 하여 어떤 논객의 비판보다 통렬한 내용으로 대통령을 나무라고 나아가 "<노대통령에게 난국을 타
개할 능력이 있는지 본질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이 때문에 <국민은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비판이 좀 지나치다고 판단했던지 대담자는 "대통령만의 문제입니가?" 물었다. 이에 대해
추기경은 "정치지도자들이 한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해야 합니다" "여야의 대립이 극심해지고 신당이니
뭐니 하면서 싸움이 계속되고 있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인데도 이 사회의 책임자들은 이를 통감하지 못한 채 각자 자신들의 이권과 기득권에만
몰두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라고 단호한 비판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두드러지는 핵심적인 중요한 본론은 대미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지난번 미국에 가서 미국과의 공조를 굳게 약속했습니다. 또 일본에 가서도 한미일의 공
조를 다짐했습니다. 이런 약속을 꼭 지켜져야 합니다. <약속을 하고 돌아와서 딴소리를 해서는 안됩
니다.> 우리는 미국과의 공조가 깨어져도 좋을 처지가 아닙니다....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발
전을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 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며칠
전 6.15선언 3주년을 맞아 KBS TV에서 한 말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노대통령은 말바꾸기>를 잘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것 같습
니다.> 국민 모두에게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게 해줘야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
문을 제대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신문도 읽어야 합니다. ...나는 역대 대통령들에게 신문을
신문을 잘 읽으라고 얘기했습니다. 신문을 꾸준히 읽어야 민의가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
문입니다." 라고 끝을 맺었다.
고언의 배경 의의
추기경의 고언은 언론의 대담요청에 응한 것이므로 피동적 의사의 표현이라고 생각될 것이나 국내에
서 차지하는 추기경의 종교적 위상과 거대언론의 특필보도라는 매체적 영향력이 상호작용하게 되므로
막강한 대국민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 차원의 표현을 넘어서는 그 영향력 때문에 대
담이 요청되었다고 생각되며 추기경이 이에 응한 것은 기초적으로 참여정부의 본질에 대한 공통적 불
신을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참여정부의 등장은 국민적 의사에 따른 것이다.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을 지지하였다는 점
에서는 이론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변화와 개혁이란 국가의 전반적 풍조에서부터 기존의 각종 체
제에 대한 광범한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최근의 과격한 <이기적 운동>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
다, 오히려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개인과 집단들이> 이끌어온 현대사에 대한 진절한 염증의 표시
였다.
왜 대통령 취임 100일을 넘긴 시점에서 그 정권 출범의 의의를 집어 보려하느냐 하면 정부와 국민에게
<초지일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정부 출범의 의의를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강력하게 존제하는
한 그 수립되고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사장되고 혼동으로 돌아가면서 결국은 변화의 희망이 무산될 가
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개혁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추기경께
서 대담과는 반대로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면>좋았을 것이라고 느낀다. 자칫하면 국
민들은 그 대담 보도를 보고
1)나라는 지도자가 이끌어 가는 것이고 백성들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획정한다.
2)대표적 지도자인 대통령이 말을 기분대로하고 대응능력이 없고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
3)아울러 정치권과 지도층은 이기주의와 기득권 수호행태를 버리지 않고 있다.
4)지도층 모두에게 나라걱정 정신이 부족하다.
등등의 절망을 느끼게 할 것이며 대담의 서두에 언급한 대로 나라가 갑자기 "망망대해에서 태풍을 만
난" 것으로 현재를 규정하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현정부 들어 나타난 현상이 아
니라는 점에서 사실의 바른 규정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연 신임대통령은 명백히 <국가와 국민
생활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 확고하지 않다면 역시 진실왜곡이라는 중대한 국가적 혼
돈을 야기하는 결과를 조장하게 될 것이다.
대담을 보면 현재의 책임 있는 사람들은 '쓰디쓴 충고(苦言)'가 한편으로는 뜨끔하기도 하겠지만
역시 "우리들이야말로 국가의 중심이다"라고 착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 대담에서는 국민들의 역
량이나 그 새로운 역할의 의미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절대다수의 구독자를 구성하는 수백
만 일반인은 논외로 하고 얼마 안 되는; 힘이나 권력, 책임과 권위의 소유자들을 향해서만 말했기 때
문이다.>
일반 다수 양식 있는 국민은 그렇게 단순히 <위기로 생각>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얼마만큼 새용
기를 내야할 것인가를 오로지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정교수의 대통령 화법분석
정문연 정윤재교수의 노대통령 화법분석은 그 긍정적 측면을 강화한 것으로서 그가 지난번 평가에
서 '개인적 성장 환경본질에 근거한 것'으로 보았던 언급한 것과 대비되는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평자
스스로 해석을 다소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분석의 핵심은 "대통령의 말이 비판과 혐오의 대상으로 비칠지라도 노 대통령은 일정 정치적 전
략 아래 그런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그것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자산이었
다고 보고 단순한 실수라기보다 권위주의 정치문화 파워엘리트 중심주의 상명하달식 침묵주의를 파괴
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의 결론은 그의 화법이 대중적 반향을 을으키는 데 효과적이었고 취임후 탈권위의 성과를 거두었
으나 동시에 국정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끝으로 대통령에게 '무실역행' '수기'를
주문하였다. '수기'를 강조한 것은 노대통령의 성정과정에서 '두고보자'식의 심리적 특성으로 마음
속에 '화'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의 화법을 (1)직설 (2)직접토론 (3)유머로
분류하였다.
닫힌 분석 열린 분석
말은 중요하다. 그러나 말의 실체인 행동과 연관되지 않은 말의 분석은 '현상분석'의 중심이 될 수
는 없다. 일반인의 말보다 정치인 공인의 말은 당연히 더 중요하지만 말바꾸기가 성행했던 한국적 상
황에서는 역시 말을 그대로 믿는 이는 없었다. '대통령의 말실수'라고 표현되는 현상이 과연 무엇을 상
징하는지는 아직 명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역시 그 뒤따른 행동분석이 주 대상이 되어야 한다. <노
대통령의 성공의 비결이 말>이라고 분석한 것은 일단 맞지 않다. 오히려 <노사모의 형성과정>에서 보
듯이 일관된 의지와 행동이 힘의 시발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말을 대상으로 한 비판은 일단
은 신중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체적 전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이 어긋나는 실제 이유는 현재의 한국 상황에서 '선택의 곤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곤란을 그대로 표현한 말보다는 최종적으로 선택한 정치적 행동을 대상으로 분석하는 것
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그의 실언은 '개혁적 행동과 결단의 현실화 과정의
직솔한 반영'이라고 보고 싶다.
그는 최고 책임자가 되기 전 개혁적 입장에 내내 서 있었다. 집권후 개혁적 동지들에 둘러싸여 정사를
수행하였지만 자의던 타의던 여러 견해들을 들어야 했다. 그 '들음의 과정'을 통해서 개혁의 실체를
재고하고 개혁의지와 사상을 재정립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싶다. 중심에 서서 보니 널리 보이기도 하였
을 것이다.
실로 개혁주의자들의 이념이 모두다 그대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인권운동이나 노동운동이 역시 요구
대로 전부 고칠 수 없는 것임은 '그들도 알고'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비록 약자의 편에서서 일하고
자 하는 의지가 변함이 없을지라도 진정 약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판단하고 어느 선에서 결행하는 것이
옳은지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약자가 이미 약자가 아닌 상황으로 변전하고 힘을
추구하고 있고 나아가 그렇게 배제하고 싶었던 기득
권 권위추구의 길을 오히려 달려가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기득권층과 개혁적 권
위의 독점을 추구하는 세력을 빼면 진정한 개혁을 추구하는 국민의 일반 희망은 전연 설 곳이 없게 되
었음을 역시 '해제지아'도 느낄 것이다. 그의 허허로운 말은 그같은 일반 국민의 냉소를 '자신도 모
르게'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의 말보다는 실상을 분석해보자. 그의 "깽판" "쪽수" "개판" "못해먹겠다" 같은 말 등이 주된 비판
의 도마에 오르고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자랑스럽게 별 필요도 없는 '외래어'를 구사하며 "죄송함니
다"를 붙이는 오만함의 미사여구보다는 호감이 간다. 예를 들어 그의 성장기까지 상상 분석하는 깊
은 학자의 학술적 비판은 결국은 "무실역행" "수기치인"이라는 '무책임한 좋은 말'로 면피하는 처절한
구태를 보여준다, 바로 그것을 개혁해야할 것이다. 성스러운 지도자의 '언제쯤 좋아질지 모르겠다'
말로 대통령을 <청소년시(靑少年視)> 혹은 <유아시(幼兒視)> 하는 가치적 '자기중심성"이라는 오랜
태도도 혁파되어야 할 대상이다. 물론 정교수의 언급도 그런 점에서 같으며 '성숙한 인간' '도인'이라
고 하는 가치인식의 '자기 중심성'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점 역시 같다. 막연히 도덕성과 능력 품
성 인격을 논하는 분석과 비판은 '지금의 이 절실한 상황'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다. 무한 열린 분석
이 필요한 것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의 주장이나 옹호자들의 일방적 찬미로부터도 벗어나서 '대통령직에
있는' 객관적 실체를 그대로 음미하고 해석하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일반인의 분석과 비판이라면 그런 질타도 가능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 문화 학술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언급은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진실왜곡"의 위험이 크고 변화 개혁을 추
구하는 국민의 용기를 좌절하게 하는 것으로서 명백히 <자기보위>행동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지도자에게도 국민에게도 용기와 희망을 약화하려는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학술적 언론적인 모든
<이기적 악의>는 비록 <몰각>에 의거한 것일지라도 사라져야 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자아도취
나 이기주의는 위험한 장벽이다.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기성찰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다만 우리는 오
직 '성찰하며 서로 용기를 주고 더 용기를 키워 나아가야 할' 때라고 느낀다. 용기를 주는 이해가 또
그런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개혁에 대한 비판 대상은 '이기적 운동' '편파된' 운동에 그쳐야 하고 우리의 절실한고 전반적
인 삶의 양식과 풍조 속에 내재한 <혁신의 필요>를 훼손해서는 아니 될 것이며 특히 <과거 찬미>로 돌
아가려는 역작용을 부추기게 됨을 경계해야한다.
우리는 분명 개혁의 제3기를 맞이하고 있다. 제1개혁기는 외부의 힘으로 나라가 무너진 후 다시 새로
운 국가로 출범한 건국적 비주체적 개신이고 제2기는 근대 세계적 국가이상을 추구했던 개발의 시대
를 중심한 시기의 서구적 민주 인권 자유 등을 추구하면서 진행된 근대화작업 속의 이상주의적 개혁
이다. 제3기는 국제환경의 변화와 함께 오래 방치되어온 자아와 전통을 응시하는 본질회복의 개혁운
동이 출범하여야하는 단계이다. 지금은 제2단계가 종결하고 제3단계로 진입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
된다. 이 제3기의 개혁의 본질은 자아회복임을 잠시도 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내부에서부터 다시 일어나야 하는 개혁의 싯점임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외부적 가시적 수립을
조급히 추구하는 데 따른 불안이나 갈등은 부수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결의와 성찰이 선해되어
야 하는 것은 역사적 당위이다. 내적 자아의 확립에 주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결의와 결단과 행
동이 요구되므로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유동하는 말끝과, 시세에 의지해 고무된 공허한 <대갈
일성>에 <일희일비>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의식의 전환이 진정한 이 시대의 힘이라는 사실을 현실 속에
세워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이안자
추기경 고언
국내 한 대표적 일간지가 김 추기경에게 <현시국>에 대한 "말씀"을 청하여 6월 24일자 제3면에 대서
특필하고 다음 날은 "추기경의 고언(苦言)에 담긴 뜻은"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추기경이 그
전화대담을 통하여 피력한 내용은 <특검> <노동계 파업> <신문>등 민감한 현안문제들을 거론하고 있는
데 총체적 <진단과 처방>으로서 그의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언
론이 기독교적 종교권위에 의존하려는 것은 형평을 잃은 것이며 일종의 방책적 태도일 것이다. 대담
의 내용이 그만큼 특별하지 않다는 뜻이다. 특이한 면이 있었다면 대담에서 보듯이 '추기경께서, 전
에 없이 <대노(大怒)>'한 배경과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 보도는 '추기경의 말씀'을 따서 "盧, 난국타개 능력 있는지 의문" 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아울러
동 27일자 제16면에 실린 정윤재 교수의 노대통령 발언분석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런 류의 보
도는 그 막대한 대국민적 영향 파급이 예상되므로 일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의 만연한 일반
적 <삶의 엄정함의 필요>(방만한 반엄숙주의의 경계)에 비추어 인위적으로 어떤 현상을 자의적 필요에
따라 혹은 자아중심적 속단에 의해 혹은, 어떤 <자기체계중심적 확신>에 의해서일지라도, 부정적 각도
에서 <증폭>해서는 안될 것이다. <진실의 왜곡상>을 <광포>하는 것은 거의 <재앙>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공의의 장에 어떤 의미에서건 이기주의나 방편주의 등의 <사사로움>이 게재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오늘의 최대의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중심적 공기체제로서 언론은 영욕의 근현대사를 영위한 우리 풍토에서 역시 그 영욕을 딛고 사
회 문화 정치 경제 등 근대화 과정에서 중대한 공헌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좌절과 성취, 의리와
영달, 삿정과 사명의 중첩된 명암을 헤치고 살아온 대중국민과 진솔하게 서로 격려하고 호흡하려하였
음도 사실이다. 비극의 암울함에서 명창한 열락의 대동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이의 소망과 달리
우리는 아직 길고 긴 악마적 명운의 꼬리 끝을 밟고 살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그 동안 책임 있는
사회 문화의 선도주체들이 넓은 시야와 통렬한 자아성찰이 부족함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조장된 문화
와 기풍의 모든 방만함으로 가득한 지금, 그 전방위적 혼돈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이 순간 언
론의 역할과 책임은 진정 사활적이다. 우리에게 문화기풍적 <시평>이 긴요한 까닭이다.
추기경의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추기경은
"지금 우리의 상황은 <망망대해에서 태풍을 만난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장인 대툥령께서
이를 잘 헤쳐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
디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쯤 좀 나아질지 의문>입니
다."
라고 하여 어떤 논객의 비판보다 통렬한 내용으로 대통령을 나무라고 나아가 "<노대통령에게 난국을 타
개할 능력이 있는지 본질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이 때문에 <국민은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비판이 좀 지나치다고 판단했던지 대담자는 "대통령만의 문제입니가?" 물었다. 이에 대해
추기경은 "정치지도자들이 한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해야 합니다" "여야의 대립이 극심해지고 신당이니
뭐니 하면서 싸움이 계속되고 있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인데도 이 사회의 책임자들은 이를 통감하지 못한 채 각자 자신들의 이권과 기득권에만
몰두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라고 단호한 비판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두드러지는 핵심적인 중요한 본론은 대미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지난번 미국에 가서 미국과의 공조를 굳게 약속했습니다. 또 일본에 가서도 한미일의 공
조를 다짐했습니다. 이런 약속을 꼭 지켜져야 합니다. <약속을 하고 돌아와서 딴소리를 해서는 안됩
니다.> 우리는 미국과의 공조가 깨어져도 좋을 처지가 아닙니다....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발
전을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 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며칠
전 6.15선언 3주년을 맞아 KBS TV에서 한 말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노대통령은 말바꾸기>를 잘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것 같습
니다.> 국민 모두에게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게 해줘야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
문을 제대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신문도 읽어야 합니다. ...나는 역대 대통령들에게 신문을
신문을 잘 읽으라고 얘기했습니다. 신문을 꾸준히 읽어야 민의가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
문입니다." 라고 끝을 맺었다.
고언의 배경 의의
추기경의 고언은 언론의 대담요청에 응한 것이므로 피동적 의사의 표현이라고 생각될 것이나 국내에
서 차지하는 추기경의 종교적 위상과 거대언론의 특필보도라는 매체적 영향력이 상호작용하게 되므로
막강한 대국민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 차원의 표현을 넘어서는 그 영향력 때문에 대
담이 요청되었다고 생각되며 추기경이 이에 응한 것은 기초적으로 참여정부의 본질에 대한 공통적 불
신을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참여정부의 등장은 국민적 의사에 따른 것이다.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을 지지하였다는 점
에서는 이론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변화와 개혁이란 국가의 전반적 풍조에서부터 기존의 각종 체
제에 대한 광범한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최근의 과격한 <이기적 운동>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
다, 오히려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개인과 집단들이> 이끌어온 현대사에 대한 진절한 염증의 표시
였다.
왜 대통령 취임 100일을 넘긴 시점에서 그 정권 출범의 의의를 집어 보려하느냐 하면 정부와 국민에게
<초지일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정부 출범의 의의를 약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강력하게 존제하는
한 그 수립되고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사장되고 혼동으로 돌아가면서 결국은 변화의 희망이 무산될 가
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개혁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추기경께
서 대담과는 반대로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면>좋았을 것이라고 느낀다. 자칫하면 국
민들은 그 대담 보도를 보고
1)나라는 지도자가 이끌어 가는 것이고 백성들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획정한다.
2)대표적 지도자인 대통령이 말을 기분대로하고 대응능력이 없고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
3)아울러 정치권과 지도층은 이기주의와 기득권 수호행태를 버리지 않고 있다.
4)지도층 모두에게 나라걱정 정신이 부족하다.
등등의 절망을 느끼게 할 것이며 대담의 서두에 언급한 대로 나라가 갑자기 "망망대해에서 태풍을 만
난" 것으로 현재를 규정하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현정부 들어 나타난 현상이 아
니라는 점에서 사실의 바른 규정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연 신임대통령은 명백히 <국가와 국민
생활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 확고하지 않다면 역시 진실왜곡이라는 중대한 국가적 혼
돈을 야기하는 결과를 조장하게 될 것이다.
대담을 보면 현재의 책임 있는 사람들은 '쓰디쓴 충고(苦言)'가 한편으로는 뜨끔하기도 하겠지만
역시 "우리들이야말로 국가의 중심이다"라고 착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 대담에서는 국민들의 역
량이나 그 새로운 역할의 의미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절대다수의 구독자를 구성하는 수백
만 일반인은 논외로 하고 얼마 안 되는; 힘이나 권력, 책임과 권위의 소유자들을 향해서만 말했기 때
문이다.>
일반 다수 양식 있는 국민은 그렇게 단순히 <위기로 생각>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얼마만큼 새용
기를 내야할 것인가를 오로지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정교수의 대통령 화법분석
정문연 정윤재교수의 노대통령 화법분석은 그 긍정적 측면을 강화한 것으로서 그가 지난번 평가에
서 '개인적 성장 환경본질에 근거한 것'으로 보았던 언급한 것과 대비되는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평자
스스로 해석을 다소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분석의 핵심은 "대통령의 말이 비판과 혐오의 대상으로 비칠지라도 노 대통령은 일정 정치적 전
략 아래 그런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그것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자산이었
다고 보고 단순한 실수라기보다 권위주의 정치문화 파워엘리트 중심주의 상명하달식 침묵주의를 파괴
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의 결론은 그의 화법이 대중적 반향을 을으키는 데 효과적이었고 취임후 탈권위의 성과를 거두었
으나 동시에 국정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끝으로 대통령에게 '무실역행' '수기'를
주문하였다. '수기'를 강조한 것은 노대통령의 성정과정에서 '두고보자'식의 심리적 특성으로 마음
속에 '화'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의 화법을 (1)직설 (2)직접토론 (3)유머로
분류하였다.
닫힌 분석 열린 분석
말은 중요하다. 그러나 말의 실체인 행동과 연관되지 않은 말의 분석은 '현상분석'의 중심이 될 수
는 없다. 일반인의 말보다 정치인 공인의 말은 당연히 더 중요하지만 말바꾸기가 성행했던 한국적 상
황에서는 역시 말을 그대로 믿는 이는 없었다. '대통령의 말실수'라고 표현되는 현상이 과연 무엇을 상
징하는지는 아직 명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역시 그 뒤따른 행동분석이 주 대상이 되어야 한다. <노
대통령의 성공의 비결이 말>이라고 분석한 것은 일단 맞지 않다. 오히려 <노사모의 형성과정>에서 보
듯이 일관된 의지와 행동이 힘의 시발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말을 대상으로 한 비판은 일단
은 신중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체적 전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말이 어긋나는 실제 이유는 현재의 한국 상황에서 '선택의 곤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곤란을 그대로 표현한 말보다는 최종적으로 선택한 정치적 행동을 대상으로 분석하는 것
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점에서 오히려 그의 실언은 '개혁적 행동과 결단의 현실화 과정의
직솔한 반영'이라고 보고 싶다.
그는 최고 책임자가 되기 전 개혁적 입장에 내내 서 있었다. 집권후 개혁적 동지들에 둘러싸여 정사를
수행하였지만 자의던 타의던 여러 견해들을 들어야 했다. 그 '들음의 과정'을 통해서 개혁의 실체를
재고하고 개혁의지와 사상을 재정립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싶다. 중심에 서서 보니 널리 보이기도 하였
을 것이다.
실로 개혁주의자들의 이념이 모두다 그대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인권운동이나 노동운동이 역시 요구
대로 전부 고칠 수 없는 것임은 '그들도 알고'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비록 약자의 편에서서 일하고
자 하는 의지가 변함이 없을지라도 진정 약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판단하고 어느 선에서 결행하는 것이
옳은지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약자가 이미 약자가 아닌 상황으로 변전하고 힘을
추구하고 있고 나아가 그렇게 배제하고 싶었던 기득
권 권위추구의 길을 오히려 달려가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기득권층과 개혁적 권
위의 독점을 추구하는 세력을 빼면 진정한 개혁을 추구하는 국민의 일반 희망은 전연 설 곳이 없게 되
었음을 역시 '해제지아'도 느낄 것이다. 그의 허허로운 말은 그같은 일반 국민의 냉소를 '자신도 모
르게'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의 말보다는 실상을 분석해보자. 그의 "깽판" "쪽수" "개판" "못해먹겠다" 같은 말 등이 주된 비판
의 도마에 오르고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자랑스럽게 별 필요도 없는 '외래어'를 구사하며 "죄송함니
다"를 붙이는 오만함의 미사여구보다는 호감이 간다. 예를 들어 그의 성장기까지 상상 분석하는 깊
은 학자의 학술적 비판은 결국은 "무실역행" "수기치인"이라는 '무책임한 좋은 말'로 면피하는 처절한
구태를 보여준다, 바로 그것을 개혁해야할 것이다. 성스러운 지도자의 '언제쯤 좋아질지 모르겠다'
말로 대통령을 <청소년시(靑少年視)> 혹은 <유아시(幼兒視)> 하는 가치적 '자기중심성"이라는 오랜
태도도 혁파되어야 할 대상이다. 물론 정교수의 언급도 그런 점에서 같으며 '성숙한 인간' '도인'이라
고 하는 가치인식의 '자기 중심성'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점 역시 같다. 막연히 도덕성과 능력 품
성 인격을 논하는 분석과 비판은 '지금의 이 절실한 상황'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다. 무한 열린 분석
이 필요한 것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의 주장이나 옹호자들의 일방적 찬미로부터도 벗어나서 '대통령직에
있는' 객관적 실체를 그대로 음미하고 해석하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일반인의 분석과 비판이라면 그런 질타도 가능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 문화 학술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언급은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진실왜곡"의 위험이 크고 변화 개혁을 추
구하는 국민의 용기를 좌절하게 하는 것으로서 명백히 <자기보위>행동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지도자에게도 국민에게도 용기와 희망을 약화하려는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학술적 언론적인 모든
<이기적 악의>는 비록 <몰각>에 의거한 것일지라도 사라져야 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자아도취
나 이기주의는 위험한 장벽이다.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기성찰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다만 우리는 오
직 '성찰하며 서로 용기를 주고 더 용기를 키워 나아가야 할' 때라고 느낀다. 용기를 주는 이해가 또
그런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개혁에 대한 비판 대상은 '이기적 운동' '편파된' 운동에 그쳐야 하고 우리의 절실한고 전반적
인 삶의 양식과 풍조 속에 내재한 <혁신의 필요>를 훼손해서는 아니 될 것이며 특히 <과거 찬미>로 돌
아가려는 역작용을 부추기게 됨을 경계해야한다.
우리는 분명 개혁의 제3기를 맞이하고 있다. 제1개혁기는 외부의 힘으로 나라가 무너진 후 다시 새로
운 국가로 출범한 건국적 비주체적 개신이고 제2기는 근대 세계적 국가이상을 추구했던 개발의 시대
를 중심한 시기의 서구적 민주 인권 자유 등을 추구하면서 진행된 근대화작업 속의 이상주의적 개혁
이다. 제3기는 국제환경의 변화와 함께 오래 방치되어온 자아와 전통을 응시하는 본질회복의 개혁운
동이 출범하여야하는 단계이다. 지금은 제2단계가 종결하고 제3단계로 진입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
된다. 이 제3기의 개혁의 본질은 자아회복임을 잠시도 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내부에서부터 다시 일어나야 하는 개혁의 싯점임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외부적 가시적 수립을
조급히 추구하는 데 따른 불안이나 갈등은 부수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결의와 성찰이 선해되어
야 하는 것은 역사적 당위이다. 내적 자아의 확립에 주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결의와 결단과 행
동이 요구되므로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유동하는 말끝과, 시세에 의지해 고무된 공허한 <대갈
일성>에 <일희일비>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의식의 전환이 진정한 이 시대의 힘이라는 사실을 현실 속에
세워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이안자
'recording of life > 경전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암시고/ 문앞의 버들 (0) | 2003.07.27 |
---|---|
상황적 사유와 보편적 사유 (0) | 2003.07.14 |
동아시아 사상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0) | 2003.06.24 |
개혁운동의 새로운 에포크를 (0) | 2003.06.10 |
자연주의로 경도되는 의식을 우려한다. (0) | 2003.06.02 |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 Total
- Today
- Yesterday
링크
TAG
- 시공
- 홍익인간 연의 논어
- 존재
- 한스 호프만
- 이상
- 삼재사상
- 홀홀히
- 편향지지율
- 요즘
- 문명
- Bruce Cohen
- 헬렌후랑켄탈러
- Helmut Dorner
- 문재인
- 해군항적도
- 새벽
- 유교
- 폴헨리브리흐
- 열정
- Carmen Cicero
- Karin Batten
- 폴 레몬
- 항적도
- 자연주의
- 휘쳐
- 일기
- 하늘그리기
- 팔괘
- 회흑색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