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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아시아적 전범의 불후함
최근 문학 예술 사상 등 서구문명의 현장들은 그들의 ‘현재적 전범의 파괴’를 통하여 미래의
출구를 열고자하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충만하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일원인 한국은 전통전범의
무모한 파괴’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거세다. 이 대비되는 양측의 움직임은 ‘전범성의 피괴’를 시
도한다는 문면어의는 동일하지만 그 내포의미는 명징하게 서로 상반된다.
우선 ‘현재적 전범’과 ‘고전적 전범’은 우리의 경우는 반의어이다. 서구의 경우는 거의 동의
어이다. 서구는 그 근대지성이 고전고대를 부활함으로서 출발하였지만, 동아시아는 근대사를 통하
여 전통문명을 파괴한 위에 소위 근대성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주류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인류사
상 전대미문의 문명적 자해를 수행해오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자기사상과 자기문명에 대한 신뢰
의 결여현상이다. 일찍이 공자는 신이호고(信而好古)라고 하였으니 요즘의 감각으로 말하면 “자신
의 역사와 문명의 가치를 확신하고 고전적 사상과 전범을 전승한다”는 의미이다. 공자는 걸출한 역
사학자였던 것이다. 육경이 모두 역사라는 말이 그 말이다.
서구사가들이 말하는 “동아시아 역사학은 아직 초보단계‘라는 이해는 타문명을 폄하하는 자의적
인 태도이다. 따라서 서양 사상사가 혹은 문명사가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는 서구적 해석과 평가
를 통하여 비로소 그 의미를 발견 고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오만과 편견일 것이다. 윌
리엄 해너스의 ’한자의 한계론‘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류의 오도된 연구결과에 우리가 이끌
려서는 아니 될 것이나 상당수의 한국지성들이 그 영향에 의해 자기의 지성적 자아를 약화시키고 있
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동아시아 문명사사가 웨스턴 시빌라이제이션의 역사와 똑같은 동질성을 지향해야한다는 보편한 역
사학적 믿음은 한국일반 지성에게는 교과서적인 인식이지만 -서구 지성이 발견한 이상이 진정 구원
한 인류의 이상으로 통한다는 이해- 아직 충분히 우리의 삶 속에서 검증되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
서 자기 확신 없이 문명적 해체주의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재발견 노력을 통해 사
상적 정체성과 문명적 자아를 반추하고 확립하는 일은 우리의 진정한 근대를 확고히 여는-근대란
단적으로 삶의 창조적 개선 역량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거의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 성찰의 과제 중심에 바로 우리의 문명사상인 유교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유교사상은 서양의 현재
적 전범인 근대가치의 형성사처럼 계몽주의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혁명으로 무
너뜨린 것은 전근대의 중세적 역사모순이었으며 그들의 지성을 혁파하려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역
으로 우리의 당당했던 지성적 전통을 혁파하려하고 있고 역사모순을 지성적 전통의 탓으로 돌리
려는 즉, 비겁한 반역사주의의 이기적 자기변명에 몰두하고 있다. 군사정권의 권위주의마저 유교
탓으로 돌리는 동양학자의 세미나도 최근에 있었다. I.M.F나 집단이기주의를 유교의 탓으로 돌리
는 이기주의 지성도 아직 시퍼렇게 범람하고 있다. 유교사상이 남성만의 사상이라는 천박한 이야기
도 날개를 달고 있다. 이는 역사적 지성역량의 미숙으로 인한 ‘삶의 역사와 이상적 사상’ 사이
의 일대 혼동일 것이다.
대개는 오늘의 한국의 부패상을 유교적 가치에서 비롯한다고 말하며, 그들의 근대화가 얼마나 허위
와 자기부정 위에 세워지고 있는지는 돌아보려 하고 있지 않다. “내 탓이요”운동 정도의 반성이
어찌 증자(曾子)의 삼성오신(三省吾身)의 절실한 극기(克己)의 깊이를 따라갈 수 있겠는가? 현재
의 모든 모순은 자기문명과 사상사를 부정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진단은 지나친 것이 아닐 것
이다. 동아시아 근대화 도정에서 자기 전범을 회복하거나 세우려한 적이 없는데도, 현재의 모든 모
순은 명백히 서구지향의 결과인데도, 부정해야할 현재적 전범이 있고 그것이 바로 유교라고 보려
는 역사자학적 급진주의는 그야말로 현대적 ‘마녀사냥’ 외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유교
를 문명사적으로 재음미해야하는 이유이다. 유교는 천연-인간-문물간의 지극한 균형을 모토로 하
는 무쌍의 불후한 보편사상이다. 삼재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haianist. haianja
Deok Jo Yuu
<주> 동아대학보에 기고한 글입니다(2003년 9월 8일자)
최근 문학 예술 사상 등 서구문명의 현장들은 그들의 ‘현재적 전범의 파괴’를 통하여 미래의
출구를 열고자하는 새로운 움직임으로 충만하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일원인 한국은 전통전범의
무모한 파괴’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거세다. 이 대비되는 양측의 움직임은 ‘전범성의 피괴’를 시
도한다는 문면어의는 동일하지만 그 내포의미는 명징하게 서로 상반된다.
우선 ‘현재적 전범’과 ‘고전적 전범’은 우리의 경우는 반의어이다. 서구의 경우는 거의 동의
어이다. 서구는 그 근대지성이 고전고대를 부활함으로서 출발하였지만, 동아시아는 근대사를 통하
여 전통문명을 파괴한 위에 소위 근대성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주류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인류사
상 전대미문의 문명적 자해를 수행해오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자기사상과 자기문명에 대한 신뢰
의 결여현상이다. 일찍이 공자는 신이호고(信而好古)라고 하였으니 요즘의 감각으로 말하면 “자신
의 역사와 문명의 가치를 확신하고 고전적 사상과 전범을 전승한다”는 의미이다. 공자는 걸출한 역
사학자였던 것이다. 육경이 모두 역사라는 말이 그 말이다.
서구사가들이 말하는 “동아시아 역사학은 아직 초보단계‘라는 이해는 타문명을 폄하하는 자의적
인 태도이다. 따라서 서양 사상사가 혹은 문명사가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는 서구적 해석과 평가
를 통하여 비로소 그 의미를 발견 고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오만과 편견일 것이다. 윌
리엄 해너스의 ’한자의 한계론‘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류의 오도된 연구결과에 우리가 이끌
려서는 아니 될 것이나 상당수의 한국지성들이 그 영향에 의해 자기의 지성적 자아를 약화시키고 있
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동아시아 문명사사가 웨스턴 시빌라이제이션의 역사와 똑같은 동질성을 지향해야한다는 보편한 역
사학적 믿음은 한국일반 지성에게는 교과서적인 인식이지만 -서구 지성이 발견한 이상이 진정 구원
한 인류의 이상으로 통한다는 이해- 아직 충분히 우리의 삶 속에서 검증되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
서 자기 확신 없이 문명적 해체주의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재발견 노력을 통해 사
상적 정체성과 문명적 자아를 반추하고 확립하는 일은 우리의 진정한 근대를 확고히 여는-근대란
단적으로 삶의 창조적 개선 역량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거의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 성찰의 과제 중심에 바로 우리의 문명사상인 유교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유교사상은 서양의 현재
적 전범인 근대가치의 형성사처럼 계몽주의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혁명으로 무
너뜨린 것은 전근대의 중세적 역사모순이었으며 그들의 지성을 혁파하려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역
으로 우리의 당당했던 지성적 전통을 혁파하려하고 있고 역사모순을 지성적 전통의 탓으로 돌리
려는 즉, 비겁한 반역사주의의 이기적 자기변명에 몰두하고 있다. 군사정권의 권위주의마저 유교
탓으로 돌리는 동양학자의 세미나도 최근에 있었다. I.M.F나 집단이기주의를 유교의 탓으로 돌리
는 이기주의 지성도 아직 시퍼렇게 범람하고 있다. 유교사상이 남성만의 사상이라는 천박한 이야기
도 날개를 달고 있다. 이는 역사적 지성역량의 미숙으로 인한 ‘삶의 역사와 이상적 사상’ 사이
의 일대 혼동일 것이다.
대개는 오늘의 한국의 부패상을 유교적 가치에서 비롯한다고 말하며, 그들의 근대화가 얼마나 허위
와 자기부정 위에 세워지고 있는지는 돌아보려 하고 있지 않다. “내 탓이요”운동 정도의 반성이
어찌 증자(曾子)의 삼성오신(三省吾身)의 절실한 극기(克己)의 깊이를 따라갈 수 있겠는가? 현재
의 모든 모순은 자기문명과 사상사를 부정하는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진단은 지나친 것이 아닐 것
이다. 동아시아 근대화 도정에서 자기 전범을 회복하거나 세우려한 적이 없는데도, 현재의 모든 모
순은 명백히 서구지향의 결과인데도, 부정해야할 현재적 전범이 있고 그것이 바로 유교라고 보려
는 역사자학적 급진주의는 그야말로 현대적 ‘마녀사냥’ 외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유교
를 문명사적으로 재음미해야하는 이유이다. 유교는 천연-인간-문물간의 지극한 균형을 모토로 하
는 무쌍의 불후한 보편사상이다. 삼재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haianist. haianja
Deok Jo Yuu
<주> 동아대학보에 기고한 글입니다(2003년 9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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