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 1.오늘 현황 :: ::

요즘 동양학 담론이 무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공자와 논어 노자와 도덕경 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잇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10여년전 부터 특히 90년대 중반경부터 지식인들 사이에 동양학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가 있어왔습니다.그리고 이것은 거의 세계적인 추세를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유교의 중심지에서 우리들 스스로 그 문명과 정신을 추스리고 새로이 돌아보는 일은 여러면에서 이미 피할 수 없는 명제로 이미 소리없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 상황은 그러나 아직 크게 유동적이고 아무것도 심정적으로 일치되거나 합의된 흐름은 없습니다.어던 분의 지적대로 지금의 일반의 대중적이라할 동양학에 대한 관심이 <일과성의 유행으로 그치고 마는> 문명적 선택의 오류의 지속이라는 문제로 돌아갈 소지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허심탄회한 현실의 진단은 우리들에게 여러모로 소중한 자각을 불러올 수 있을 것입니다.


:: :: 2 시론-자유와 엄숙 :: ::

근일에 중앙일보 오피니언 기사에 고려대 서지문 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그 내용은 최근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도올의 강의에 대한 비판의 글입니다.

서교수의 지적대로 도올의 강의가 문제시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서교수는 주로 그 강의언설의 조야함을 거론하며 유교적 풍모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입니다.이는 유교의 본질을 인격의 도야에 두고 보았을 때 당연히 일어나는 비판일 것입니다.아울러 강의자 도올의 행동과 인격 자체가 유교의 이상인 군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실천비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서교수의 비판은 당연히 오늘의 시대에 절실히하 요구되는 한 단면을 지적하고 있으며 매우 당당하고 건실한 목소리로서 많은 사람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도올이 강의는 유교와 동양적 사유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이른바 세계사적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합니다.두 학자의 목소리는 다르나 각기 뚜렷하고 유용한 목소리입니다.다 이 사회에 필요한 언설입니다.다만 그 상호간에 서로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의식이나 비판의식을 염두에 두고 다져나아가야할 것입니다.

사실 유학을 두고 이런 정도의 논설밖에 다룰 수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슬픈일일 것입니다.아마 이보다는 더 진전된 주제를 더룰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재의 지적 한계일 것입니다.

도올의 강의 그리고 그에 가해지는 여러 찬반의 견해들이 표출되는 것을 보면서 화심은 문득 지금이 문명적 전환기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잠시 생각하고 떠오른 생각이 <아아 지금은 엄숙주의 문명의 시대가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중국의 문명이 전통적으로는 문(文)의 시대와 질(質)의 시대의 교직(交織)으로 짜여져왔고 공자는 일찌기 그 문제를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이상을 향한 큰 움직임으로 파악한 적이 있습니다.공자의 견해로는 성주(成周)의 문명이 그러했다는 평가입니다.

요즘말로 <문>이란 자유로운 개성 표현주의라 할 수 있겠고 <질>이란 실질과 이상의 절제된 추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환언하면 엄숙 소박의 질과 자유분방의 색채적인 문이 어울려서야 평안과 안식 조화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성향을 칼로 물베듯 갈라 취하기는 사실 어려우나 사실은 요즘의 세태가 일견 자유방임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그리고 현대의 여러 징후로 보아 일반적으로 과거의 엄숙주의로 돌아가기는 어려워보입니다.그래서 이러한 문명적 현상을 <엄숙주의이 종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일 이 엄숙주의의 종언이라는 말이 역사적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용어라면 그 전제아래 몇가지 미래상을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엄숙주의는 문명적 본질로서 교대되어오던 오랜 역사성을 반영한다

둘째 동시에 전근대의 계급주의적 혹은 봉건적 역사를 일부 첨가하고 있다.

셋째 지성적인 학자적 개인적 삶의 두 측면으로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지속되고 있다

는 등의 생각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역설적으로 (1)지금의 문적 문화는 당연히 엄숙주의 쪽으로 다시 흘러갈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합니다. (2)역사적 용어로서의 엄숙주의는 전근대사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현대이래의 자유주의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으므로 신형의 자유주의적 엄숙주의가 새 시대의 역사목표가 될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신형의 자유주의적 엄숙주의란 아마도 공자의 문질빈빈의 이념을 내부에 계승하면서 그 표현은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그 자유의 범위는 <자연스런 정감>의 정도 수준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자연스럽기만 하다면 어떤 표현도 무리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따라서 당연히 자유표현에 절제를 가미한다는 전통적 덕목의 가치와 권위를 재삼 음미하게 됩니다.

:: :: 3.의열함 텍스트 :: ::

또한 최근 방화로 인한 화재가 빈발하면서 소방관들의 헌신적 죽음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분명 우리사회의 원천적 힘의 근원의 하나인 <의열한 죽음>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열한 죽음이란 사실은 <텍스트적 삶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텍스트적 삶이란 문자로 표현된 정신성을 삶의 뼈대로 삼는 삶입니다.단순히 물질이나 사단칠정이 바라는 욕구나 편안하고 안일하고 행복한 삶을 오로지 추구하지 않는 삶입니다.

김기석 소방관은 후배에게 보낸 E-메일에서

<남의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의 직책을 성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열결식장에 놓여진 소방관의 기도문에는

<......>

<남을 구할 수 있는 힘을주소서>

<만일 순직하게 되거든 남은 가족을 보살펴주소서>

<....>

라는 비장한 결의와 가족애를 표한한 애틋함을 함께 싣고 있습니다.

그것이 산문이든 기도문이든 종교적 영향이든 할 것없이 이 두 문장들은 분명 이 시대 소방관의 텍스트입니다.이시대 사람들이 목숨으로 지키려는 빛나는 가치입니다.

오늘 영결식을 치르면서 어느 소방관은 인터뷰에서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나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다는 화재현장에서 몇명의 소방관이 기꺼이 삶을 버렸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남아있는 감동적인 일들중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바로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텍스트이며 삶의 가운데 이루어진 그 텍스트들이 그대로 경전이 됩니다.경전은 별다른 창작품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텍스트를 만드는 고귀한 삶이 지속되고 있으므로 경전적인 삶은 아직 굳건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 :: 4.물량사회의의 활로 :: ::

우리에게 의열함이 엄연히 현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이 살아있다는 뜻일것입니다.

일반의 직업인에게 그같은 텍스트적 삶이 영위되고 있고 오히려 유복하고 지적인 지도적 위치의 사람들이 비텍스트적 삶을 살아가는 일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이사회의 괴리와 모순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들의 경전은 그와 같은 모순과 오류를 바라보게하기위한 것일 것입니다.

의열하고 텍스트적인 삶은 일반의 많은 사람들이 자각적으로 적극적으로 <그러한 삶을 표방>하고 구현할 때 명실상부한 귀중한 삶을 분명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5.경전의 의미 해석 :: ::

최근의 일들을 경험하면서 <맹자>의 첫문을 돌이키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
왕이 말하기를:노인장께서 천리길을 멀다하지 않으시고 오셨으니 또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주실 말씀이 있으시겠지요?

맹자는 대답하였다: 왕께서는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제가 드릴 말씀은 오직 인(仁)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찌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시면
대부들은 어떻게 내 가문을 이롭게 할까 할것이며
서민들과 사인들은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할 것입니다.

상하가 서로 이익만을 취하려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

이 글구는 하나의 경전화된 텍스트로서 오랜동안 우리사회에서 <텍스트로 간직해온> 것입니다.전통시대의 많은 선비들이 이 텍스트를 읽고 삶의 역경을 헤쳐왔습니다.

맹자는 선비란 천작(天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세속의 부귀영화(인작/人爵)가 아니라 양심의 명령으로 영위되는 이상 세계의 책임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춘추전국의 혼란기란 이기주의의 부딪음으로 가득했던 시대였습니다.높아진 생산력 발전하는 정치 군사 조직 그와 반대로 고통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서민들의 삶 이런 것들이 지금과 닮았습니다.

그 시대를 통찰한 맹자는 단적으로 사리(私利私欲)의 병폐를 직솔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적어도 왕의 정치란 사리사욕을 직시하는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어야함을 말한 것입니다.바로 그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적 바탕이었습니다.지금의 민주정치가 어떻게 왕도정치의 이상을 능가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겟습니까? 지금의 자본주의 자유경제가 어떻게 민본주의 위만경제(民本主義 爲民經濟)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겟습니까? 우리가 고전적 텍스트를 회복야하는 까닭입니다.

이들 텍스트를 딛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텍스트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오늘의 유일한 희망일 것입니다.

동영상보다는 먹물(텍스트)로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