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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유교-자유 지성의 발전사



<1>문제성


맹자는 서경(書經)의 글을 두고 <역사 서경의 기록을 다 믿는다면 기록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이는 철두철미한 역사감각의 소유자인 맹자가 역사를 부정하라고 한 말은 아니다. 오히려 각 기록에는 해당된 시대를 반영하는 진정한 시의성이 있고 그 시의성이란 역사적 시간의 전개에 따라 변환되는 것이므로 언제나 꼭 같은 의미로 역사와 문헌이 독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해석학적 자유선언일 것이며 동시에 적극적으로 문헌의 내부에서 시대를 초월해 일관되는 정신성을 발견하고 현재화하여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사상사의 취급법은 현대의 지성사가들에 있어서도 공통되는 자세일 것이다.<사상의 전승성과 선택성>을 강조하는 지성사론의 이론적 연구자들의 견해가 그것이다. 또 동양의 사상사가 기초적으로 경전해석의 갱신을 통해 새로운 성취를 이루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꼭 서구적 의미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라는 명제를 지지하기 위해서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또 사상 철학 도덕 종교 지식 지혜 성찰 등등 적합한 표현이 있음에도 <지성>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도 역시 20세기 이후 역사학의 한 명제인 <모든 역사는 사상사>라고 하는 서양 역사학의 성과라든가 문화사 혹은 지성사의 등장이 경이로운 당위성을 확보한 흐름임을 기꺼워하는 의미에서도 아니다. 물론 그런 의미를 함축할 수도 있지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 <본성을 성찰하는 삶>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어떤 시대적 텍스트적 제한도 넘어서야 한다는 믿음에서이다.

오늘날 문자그대로 그같은 제한 없음과 본질의 성찰이란 의미로서 <자유>와 <지성>이 요구되는 것은 현재의 일반화된 인식 가운데서 자신의 사상사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많은 텍스트적인 또는 시대환경적인 제한이 너무나 많고 대부분 그로부터 해방된 사유로서 문헌과 경전을 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며 그 당연한 주장과 정의를 다시 명기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학문-학습론의 의미


공자 전후한 시기에 배태하여 유교로 집성된 학습(學習)이라는 새로운 태도가 삶의 일부가 아닌 전체로서의 항시적 삶의 스타일이라는 생각은 하나의 역사학인 발상에서 온 것이다. 말하자면 그 당시로서는 신비주의적 혹은 종교중심의 삶을 벗어나 사려하는 삶을 힘차게 출범하는 의미를 지닌다.오늘날 학문(學問)이라고 부르는 개념에다 전국면적인 생활성과 예술성까지를 투여한다면 그것이 곧 현대판 학습론이 될 것이다. 학습 혹은 학문논은 그러나 새로움을 향한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서 출발한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역시 지성적 삶을 시작하고 그 자유의 여지를 넓히기 위한 절실한 몸짓으로 성취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러한 학문론의 원 의미를 살리지 못하는 학습 습관이 오래 유지되었고 또 현재 특히 그 점을 직시하지 못함으로 인해 역사의 기초 동력으로서의 우리들의 사상사가 더 이상의 진전이나 성찰이 방해받고 왜곡되고 있다고 분석된다. 물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문헌해석이나 역사해석의 학문적 성과들이 무용하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학문적 검토나 모색은 그 스스로 다양할 수 있고 아무런 조건과 전제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성 현실성 시대성이 서로 유리된다면 그 학문의 현재적 의미가 격감될 것임은 당연할 것이므로 본질에 대한 성의있는 성찰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일 뿐이다.

대학에서 명덕(明德)을 말하고 중용에서 불편부당을 말한다. 이 명덕이나 불편부당이 유학의 심법을 전한 것이라는 정의에 동의한다면 그 결실은 인(仁) 의(義) 예(禮) 지(知)가 될 것인데 명덕과 중용의 구상어는 바로 인의 예지를 구현하는 덕(德)을 지칭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명덕 중용이라는 명제와 함께 인의예지나 덕 가운데에 역사성을 투여해 불어넣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신화화된 율칙으로서 또는 기념비적 문자로서 생존을 지속하는 과거 사상사의 찌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이 과연 그런가? 아니면 과연 그래도 좋은가? 사상사의 필요성은 여기서 비로소 의문의 바람을 타고 출범한다.


(3)공동체 정신과 개인의 성장사 위의 사상사


명덕과 중용의 기원은 그리 추상적인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의예지의 덕목이 오로지 장로들의 지도력에 의해 하나의 인위적이고 도덕적인 율칙을 목표로 해 권위스럽게 제정된 법조문인 것도 아니다. 단지 고대 역사의 어느 한 순간 질식할 만한 혹은 삶의 정상적 영위를 위협하는 어떤 고정돼가는 풍조를 타개하기 위한 절실한 노력으로 얻어진 성과이다. 서경에 전하는 무풍(巫風) 음풍(淫風) 난풍(亂風) 등 말하자면 종교적 사회-개인적 삶의 혼란이 그 배경일 것이다.

중국사의 경우 고대신화가 지배하였던 시대는 일반적으로 춘추전국을 상한성으로 종말을 고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춘추전국에서 진한시대에 이르는 사이에는 형해화되고 붕괴된 고대 신화에 대신할 신형의 신학이 요구되었고 유학은 넓은 의미에서 고대신화를 대체할 새로운 신화로서의 정체성의 확립이 요구되었다. 예를 들어 황노학(黃老學)이 유행하였다거나 무제(武帝) 시기에도 미신이 숭배되어 각종 사당이 유행하고 봉선(封禪) 제사를 올리고 한 것들은 전통 종교지도자 유자 그리고 기타 학파의 인사들이 그러한 신학적 요구 상황에 적극 개입하여 이루어진 역사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신학이 요구상황이 증대된 것은 당연히 진시황 제국의 유교문헌 말살시책이 보여주듯이 유교 스스로가 그 본래의 기능과 공능을 온존하거나 적극 수행하지 못한 결과였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예를 들면 공자 사후에 즉시 공자학의 왜곡이 우려되었다는 사실과 상통하는 이야기가 된다.

한 무제 시대는 주지하듯 유교사상이 국가의 이념으로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한 시대이다. 그것은 유교에서 창조한 텍스트와 문장 명제들이 지니고 있는 뛰어난 지도성에 주로 그 원인이 있다. 뛰어난 지도성이란 춘추시대 이래의 지식인들이 국정에 관여하면서 다양한 논리로서 사회와 국가를 논한 깊고 치밀한 논리적 준비의 튼튼한 뒷받침을 받고 있고 한나라 시대에 이르면 이미 그러한 논리적 전제 없이도 그 표면 텍스트가 그대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유교 논리적 텍스트의 승리의 귀결이라는 역사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그 개념들은 고정되거나 자의화(恣意化)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그 본질적 기초구조로부터 일탈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유교왜곡의 큰 흐름의 출발이었다. 그후 2천여년간 유교라는 이름의 텍스트 자체가 반면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 본원적 특질과는 다소 유리된 채로 극히 자의적으로 혹은 좁개 축소 해석되면서 동시에 절대의 세속적 권위를 지니고 각 시대를 수용해 나아갔다. 사상적 협소화를 우려하는 이 점 대해서는 사기의 육가요지에서 이미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바탕에서는 공동체정신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사 사이의 긴장된 모순과 대립이 사회 문화 정치환경의 변화에 따라 증폭되면서 실질적 역사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른바 시경 서경의 시대부터 그로한 사정을 반영한 상념과 정서와 힘께 그 생생한 역사적 실상을 기록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시경 서경의 어느 임의의 구절에서도 그와 같은 부딪음을 볼 수 있다. 그 부딪음의 소음을 거두어들이려는 힘이 학(學)적 삶에서 나왔던 것이다. 특히 정치 사회사나 문명 사상사상 획기적 발전을 성취한 춘추전국시대에 그 부딪음이 더욱 격해지면서 학적 삶의 필요성이 보다 절실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4)학습론의 의미와 역사성


배울학(學)자는 위에 두개의 손 사이에 X 형 두개를 상하 배치하고 그 아래에 역 U 형과 아들의 그림을 두었다. 이 그림에 대해 역 U형을 역 V형으로 보아 가정이나 가옥을 의미한다고 보고 X형을 그물로 보는 설이 있었다. 즉 가정에서 생활 기술을 익히는 어떤 동작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 역시 가능한 견해이긴 하다. 또 그 문자의 등장기의 역사 환경과 맞는 점도 있으나 절실성과 긴장성을 느낄 수 없고 너무 일상적이다. 더이상의 해석적 여지가 별로 남겨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배울학자의 향후의 의미에 비추어 다른 해석이 모색될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學의 자형을 잘 살펴보면 손과 X가 아이의 머리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덮는 다는 의미의 역U 형이 아래로 연결돼 있다. 이 세가지 요소의 상호관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아이는 원래 신적인 것을 상징한다)

X자 형은 대개는 식물섬유의 올을 표현한 것이거나(爽 #) 무희의 옷소매 장식을 나타낸 것(爾)이 있는데 人 入 등의 형태와도 유사한 친연관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무(巫)의 人이나 양(兩) 내(內)의 入과도 긴밀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매달아 두었거나(兩 內) 세워둔(巫) 어떤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 선이 교차하는 모습에서 九 十 七 등의 글자와도 유사성이 있다. 배울 학자의 X형은 그러나 이들 가운데 그 외형적으로 일치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의미 본질상으로는 상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爾 巫 등을 제외하고는 그 의미적 계통을 직접 연관지워 설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學은 X자형을 채용한 일반글자와는 다른 의미구조를 가졌다고 보아야하겠다는 것이다. 특이한 예로서는 卍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태양의 빛을 나타내는 글자로 요즘 보고 있다. 배울학의 X는 이 卍이거나 별성(星)자의 이체인 * 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아름다울미(美)자의 상부가 새의 깃털을 표현한 것이거나 머리 위로 발산되는 밝은 광선의 광채를 표현한 신비한 문양이므로 배울학자의 X 형도 그같은 신비적 대상물 즉 태양이나 별 혹은 신성한 풀줄기나 구슬장식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學의 상부는 아이의 머리장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아이는 바로 접신의 시동(尸童)일 수 있으므로 일종의 접신술의 일부 장면을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요즘의 의미로는 어린이의 머리를 꾸며주거나 장식해주는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접신의 의례중에 손의 어떤 작업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는 즉 신비적 의례 행위라는 점에서는 고기를 손에 들고 올리는 제사제(祭)와 통하는 면이 있다. 아마도 아이의 머리에 어떤 신물을 장식하여 앉히는 그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동작은 오로지 신비적 이유에서만 나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복장기원설에서 논하는 장식설 수치설 생체보호설과 유사한 여러 이유가 복합되어 있을 것임은 당연할 것이다.

문자상 모든 신적인 것 자체를 묘사할 때는 신주(示)가 표시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무(巫)나 유(儒)등의 접신의례 수행자의 묘사에서는 신주 표시가 없다. 그러므로 유사한 구조의 學은 인격 자체를 나타낸다. 접신의 인격은 시동이나 무당 무희의 모습일 것인데 학(學)에서의 행위는 오로지 손과 덮음이다. 아이는 어떤 동작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 인격은 아이 자체가 아니고 그 손이 주체인 것이다. 그리고 X와 아이(子)는 그 주체의 한 대상이다.

이렇게 보면 학(學)은 신비적 종교적 행사에 어떤 조건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인격이 주체가 되어 어떤 종교적 의례를 인격주도적으로 수행하는 그림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단순하게는 아이의 머리에 천을 장식하고 그 위에 다른 장식을 가하는 그림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의도적 의식적 표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조건을 부여한다는 기법은 춘추시기에 일반적으로 행해졌다고 셍각되는 새로운 발상을 넓혀가기 위한 일종의 보편적 사고기술이었다고 생각된다.

배울학자는 결국 어떤 인격자의 한 표현작업을 나타내고 있다. 일종의 문(文)이다. 문의 하부 X 표시는 대개 문신(文身)이라고 이해돼왔다. 학(學)은 결국 <표현>을 의미하고 창작의 의미를 나타낸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 부여된 행동의 한 모습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연관 <학이시습>의 습(習)자의 경우도 전통적으로는 새의 깃털과 일백백(百)의 조합으로 보고 새가 수없이 날기를 연습하는 뜻으로 이해해왔다. 물론 그와 같은 수련(修鍊)의 의미가 내포될 수 있음은 당연할 것이지만 그 원초적 본질 의미에 있어서는 우(羽)는 그대로 새의 깃털을 백(白)은 그 원래의 형상에 입각해 옥이나 장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역사설명의 오랜 용어인 문질(文質)개념의 속성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배움이란 의미의 전승성과 아울러 생각할 때 지식과 정신을 표현하여 삶을 설계하는 한 형식의 삶의 모습을 그린 것이 바로 배울학이라고 생각된다. 그 출발은 접신술에서 시작하여 인격적 주도성을 의미하다가 후일 신비적 요소가 감쇄되고 공자시대의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서 표방제시된 어떤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주체적으로 의미를 설정하고 이를 표현하는 새로운 형식의 삶을 가장 소박한 형태로 절실하게 나타낸 것일 수 있다. 이 때 그 의미의 설정은 극히 경험적 사유를 그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은 경전의 전승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경전문헌의 초기시대에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짐승의 뼈를 불속에 던져 점을 치던 원시 골점이 발전하여 거북의 배뼈에 홈을 파고 불을 가하고 어쩌면 찬 물을 뿌려 그 균열을 조절하였고 나아가서는 주역적인 서점(筮占) 형식이 고안되어 사람의 주체적 동작이 중심이 되었다. 즉 신비적 영성의 영역은 조절될 수 있게 되었다. 신의 영역마저 일반 경험의 영역처럼 생각하고 다룰 수 있는 일반의 경험현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해석의 대상이 되지 못할 현상은 없어지게 되었었던 것이다.

경전 초기시대 이래의 이러한 발전이 춘추시대에 들어 본격화되고 극히 일반화되었음은 춘추좌전의 수많은 정론 속에서 수천의 예로 허다하게 발견할 수 있다. 아이의 머리에 천을 장식하고 머리를 땋고 무엇을 꽂아 꾸미는 것과 같은 가장 소박한 표현주의와 그 이념 그 행동을 배울학자 익힐 습자가 담고 있다고 보아야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해야하겠다.

우리가 지금 통용하고 있는 학습이란 용어해석은 그 원래 의미에서 보면 극히 일부의 뜻을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공자가 문질빈빈(文質彬彬)을 강조한 것은 바로 표현위주의 학습이 내용없는 것이 될 위험이 있기에 그 표현의 이전에 본원적 의미의 확립을 놓치지 말것을 경계한 뜻에서 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공자이전의 논객들도 이미 문채(文彩;표현된 아름다움)와 물채(物彩;사물 자체의 의미)를 명확이 구분해 탐구하고 조화롭게 사용하고 있었고 그것이 군주론 신하론 사물론 등 허다한 입론의 준거로 사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 당시의 일반적 지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유교적 경전이나 역사 문헌에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그 특징과 흐름이 유교적 사유의 원질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즉 유교는 우선 보편적이고 경험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위해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현실을 타개하는 삶의 일부로서 절실성을 가지고 발전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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