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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이란 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적인 working program 이나 일상의 상념을 펼 때 혹은 어떤 행사를 계획하고 치를 때 아니면 어떤 결단이나 칭조적 작업을 할 경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교적인 것>이라할 그 무엇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생활을 성찰하고 긾은 사유를 추구하거나 문화 예술을 감상할 경우 나아가서는 학문을 탐구하고 글 쓰기를 할 경우 적용할 <유교적인 것>이라할 그 무엇이 있는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립하고 일상의 준칙으로 삼아 스스로가 당당해지고 떳떳해지며 보람이 있어지고 기뻐지는 나아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분야에도 <유교적>이라 할 그 무엇이 있는가?



더욱이는 자연과학을 탐구하고 실험하고 구 결과를 응용해 삶을 개선하는 오늘날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에 기여할 <유교적>이라할 그 무엇이 있는가?



경제제일주의의 이 시대에 경제생활에 유용할 <유교적>이라 할 그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유교와 연관해 그와 같은 다양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나 그 답은 <있다>이다.

사람들은 보통 말한다



"왜 있는가 없지 않은가? 지난시대의 낡은 생각의 모음이 아닌가? "



유교는 원래 그러했으니까 <있다>고 할 수 있고 지난생각은 결코 아니다.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은 그러나 유의해서 이해해야한다.

유교가 어떤 도통의 길을 보여주거나 사람을 신통하게 만들어주는 도깨비 방망이인 것은 아니다. 또 요즘 동양 서양의 일부 지식인이 기대를 걸듯이 유교의 이념자체가 가치로운 것이라서 새시대를 열어줄 빛나는 이상이 되어줄 것이라는 말도 사실은 자신없이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인(仁) 효(孝) 충(忠) 등의 가치관과 삼강오륜의 국가주의 가족주의 사상이 비록 가치로운 것이라고 해도 그 개념 스스로가 신비한 힘이 있고 또 그것이 유교의 본질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유교의 한 실천 행동 계획안 같은 것이다.

그 인 효 충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역사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갱신되는 변하는 그런 것이다.하나의 그릇 같은 것이다.그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하는 것은 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정할 문제이다.



유교는 그러한 거창한 이념과 도덕률이기에 앞서 <생활의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임을 주시해야한다.생할의 어떤 스타일 인가?



자신의 사유(이를 요즘말로 지성이라고 불러두자(에 의지해 사는 지성적 삶을 말한다.지성적 삶이란 가장 간단히 정의하면 각 사람 자신의 내면의 여러 울림들 - 예컨데 식욕 성욕 성취욕 같은 욕구와 삶에의 애착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힘과 기술 사물에 대한 정감과 느낌 등의 정신적 영적 총체가 일으키는 모든 출렁임들 - 을 온존하여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항시 견지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가 보통 사단칠정 혹은 오욕칠정이라고 부르는 내면의 그 울림을 유교는 극히 중요시한다.바로 이점이 종교와 다른 점이다.그 오욕칠정을 모두 필요하고 요긴한 것이라고 긍정하는 위에 유교는 그대로 발을 딛고 선다.다만 그 여러 마음의 요소들이 어느 하나에 집착하거나 편향되거나 혹은 어느 하나의 노예가 되는 삶을 경계한다.



그러나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고 거의비인간적인 일일 수도 있다.한시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데에 에너지를 서야한다면 그 정신은 피로해질 것이다.



그래서 일정한 확고한 신념으로 구성된 공식~ 틀을 만들어 보편적인 상황에 대응하여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바로 그것이 인이며 의이고 충이며 효이다.이런 개념을 나는 <불가공파논라>라고 부른다.삼강오륜의 필요는 오직 그래서 나왔다.전통시대에는 산강오륜을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마치 식생활을 할 때 그릇을 사용하고 수저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먹을 때 마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는 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완전한 논리에 의한 상위 개념을 간직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내면의 울림을 조화롭게 하고자 한다.그러면 그의 품위유지 노력은 상당히 에너지를 절약하게 된다.



유교적 덕목이란 그와 같이 우리에게 일단은 편안함을 줄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요즘의 문화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시를 쓰고 읽고(한국인은 세계에서 시를 가장 많이 읽는 민족이다( 예술을 감상하고 창작하고 자신을 성찰하곤 한다. 그 삶이 그대로 유교적인 것과 통하는 것이다.다만 이 경우에도 언제나 마음의 균형과 평정을 먼저 생각한다. 공자가 삼년상이 너무 길다고 불평하는 제자에게 <네 마음이 편하면 하라>고간단히 답한 것이 바로 진정한 정답이다.



그렇게 하고서도 그래도 사람은 시시각각 구체적 사물에 응하여 그 삼상이 변화무쌍하므로 완전힌 평정을 그대로 이어가기는 힘들다. 그 순간의 균형파괴를 회복하기위한 노력이 바로 성찰이다.증자가 하루에 3가지씩(사실은 3번일 것이다) 자신을 반성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적어도 아침 점심 저녁의 세번)



사실 자연게에 직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거의 모두 파동으로 나아간다.사람의 삶도 파동성을 띨 수 밖에 없고 파동을 타고가는 인간에 있어 자주 성찰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유교적인 것이란 성찰하는 것이다.다만 그 성찰의 목적이 자신의 어떤 마음을 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통해서 갈등을 풀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성찰은 사실 탐구하는 것이다.자신 자연 사물을 그냥 성찰할 수는 없다. 그 모양은 마음에 드는가? 그것은 의미가 있는가?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간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학문(學問(이라고 하고 배울학자와 물을 문자를 쓴다.



성찰이란 결국 질문을 간직하는 삶이다.이러한 질문의 삶을 구현하는 것을 학습의 삶이라고 공자가 정의하였다.(學而時習之( 학이시습지에서 <시(時>란 언제나 그래야한다는 뜻이다.



2.경험적 균형이란 무엇인가



유교를 그저 마음의 평정을 위해 성찰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일반적 사고에서의 일반적 명상과 다를 것이 없고 유교적이라고 이름할 이유가 없어진다.유교가 일반적 보편적 생각의 길이니까 꼭 다른 사유식하고 구별될 필요는 사실 없지만 유교는 단지 보다 성과의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변별하려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변별의 기준은 바로 균형의 방식이다.예를 들어 증오나 미움을 삭제함으로서 기쁨과 호감을 상대적으로 높이려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다른 마음과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독특하고 특이한 포용적 방식이 우선 가장 큰 변별의 준거이다.유교의 최대 특질은 온존(穩存(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소멸의 방식이 특이하다는 말이다.이를 무사(無私(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인데 사심을 없앤다는 것이 아니고 사사로움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된다.그러므로 유교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정사>를 즐겨 쓰지 않는다.사사로움은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포용적 균형방식은 전체 유교적 사유의 시작과 끝을 지배하는 즉 사고와 논리과 개념 그리고 그를 위해 경험을 선택하고 경험을 분석하여 사고 판단하는 그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관철된다.공자가 나의 도는 하나도 일관된대고 했을 때 그 일관이란 그와 같은 경험처리의 포괄성의 유지를 두고 한 말이다.



경험처리의 포괄성 균형성 조화성이 유교의 바탕 생명인 셈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적 경험의 균형을 추구할 뿐아니라 외적인 현상경험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하다.



단적인 예를 들면 유교의 경전에서 중심 경험으로 쓰여지는 경험현상의 범주는 크게 (1(자연 (2(인간 (3(역사 (4(문물 (5(언어 행동 (6(문자 (7(신비현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을 포괄한다.그 각 현상간의 일치와 울림을 추구하는 것이 유교의 방식이다.그것이 바로 <유교적>인 것의 본질이다.이것은 간단한 말인듯하지만 깊이 깊이 음미해야할 관건이다.유교를 아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고 자연을 알며 자연을 탐구하여 인간을 안다.그리고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여 이를 더 심화한다.유교는 단지 그 뿐이다.다른 어떤 현란한 유교정의도 요긴하지 않다.우리는 지금도 이미 상당히 유교적으로 산다.그런데 보다 더 잘하기 위해 유교를 더 알아야할 뿐이다.유교는 어떤 문제에든 답을주려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는 방법을 갈고 닦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실제의 답은 치열한 각인의 삶 속에서 찾고 세워나아갈 일이다.또 그 답이 모두 같을 필요는 전연 없을 것이다.



<시>춘초몽-텍스트 텍스트 텍스트




세상은 오직



함성

의기

확신



저리 파릇파릇

저리도 힘차게 자라오름이여



갓난아기의 피부같은

야리야리한 몸을 하고도

저 군왕같은 당당함이여



한나절 그 짧은 누림이

영원한 까닭은

저 눈부신 맑은 빛

광통신의 선로

그 투명함만으로 열리는 것





이곳은 단지



무도

연주

서술



순진무구한 생명의 즐김!

보라 저들이 벌이는 그저 환희에찬 성전은

그 스스로 지닌 지고한 문채 때문일뿐



눈 한 번 깜박여

만인의 시상에 깊이 깊이 그 영상을 담은 후

이내 오프라인에서 사라지지만



과연 사라진 것인가

그들이 던지고 간

신성문자의 기호 있는 것을!





지금은 역시



충만

순결

미려



어찌 사람만

경전문자를 세우랴

그림으로

글자로

음악으로도

전환되어 유동하는 메시지는

진정

문헌중의 문헌

텍스트중의 텍스트

상을 그저 아름답게하는

영광과 힘



그 아니 불후한가?



춘초의 꿈은 어짐

기계어는 기립

태그는 자유



광대무변함과

상하통달함으로

그어지는 십자성의

별빛



그 살폿한 드리움 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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