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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론의 방향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유교문명권의 일원임을 자처한다.그러나 사람마다 꼭 같은 의미로 자처하진 않는다. 대개는 심상하고 막연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어떤 측은 19세기 계몽주의시대적 열정만으로 유교를 청산의 대상으로 삼는 일에 뛰어들어 가히 혁명적 혁파의 주장으로 무장한 채 21세기의 선구자인듯이 나선다.어데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는 나는 전연 알 수가 없다.그 투사적 진영의 정면에는 전통유교의 방패가 도열해 있다.
오늘날 세계문명의 관점에서 유교는 분명 문명권적 차원의 정신이다.그리고 한국은 유교문화권 가운데 가장 인상적으로 유교이념을 실천했고 많은 명징하고 귀중한 성과를 역사상 거두어 그 중심국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유교문명권이라는 말은 유교가 이 문화권의 중심사상이며 보편사상이라는 의미를 공인하는 용어이다.나는 이 공인된 용어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다만 몇가지 주목해두어야할 일들이 있음을 지적하고자한다.
유교는 먼저 보편적 사상이다.그 정신사의 가지에 덕 인 의 예 지 충 효 등 유교적 밀과들이 열린 것 자체보다도 그 밀과적 보편가치를 창출하는 생각 사상 정신 철학 의지 이념 사색법 관찰법 같은 가치창출의 실 과정이 극히 보편적 원리에 입각하고 있다는 믿음이 동시에 확인되어야하고 다시 시도되어야한다. 당연히 그 밀과적 개념들의 의미적 보편성의 확인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그 정신적 태도를 견지한 주체로서의 역사인격 즉 유자(儒者:공자이전 공자이후를 관통하는 의미)의 사적 실존성도 밀착 탐구되어야한다.
유교가 공교(孔敎)와 구별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공교로서의 유교가 공자이후의 중국유학의 각 시대별 전통을 지칭하는 한학(漢學)의 의미로 좁혀지기 때문이다.그래서 필요해졌던 개념이 원시유교(原始儒敎)라고하는는 물리적 시간성으로 사상사를 대충 구분한 지칭용어이다.그러나 유교에서는 원시유교라는 정의는 잘 맞지는 안는다.예를 들어 유교적 삶의 표면에서는 그런 구분이 가능하나 유교사상사에서 초기시대이래로 그 사유태(思惟態)가 변화발전한 측면보다는 그 사유범주(思惟範疇)가 축소되어온 측면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이런 현상은 유교가 반역사적이라는 의미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서양의 사상사 분석 이론에서 말하는 내용적 계승성이 강조돼오지 못했다는 점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나아가 유교는 극히 역사성이 강한 사유방식이면서도 현대에 이르도록 진정한 역사학적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방대한 자치통감의 사론이 형식 개념논에 그치고 성리학의 철리가 역시 역사적 내면성을 기초적으로 통찰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명징한 예이며 현대에 들어서는 동방적 지식인들의 자의식적 자신감의 결여가 적극적 분석의 열정을 도출하지 못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또한 대학에서 격물치지가 강조되었음에도 유교사상의 경험적 성찰이 크게 진전되지 못한것도 그 명백한 증좌이다.
따라서 유교의 정의적 의미가 좁아져온 것은 유교의 학적반성(學的反省)의 불철저함에 주로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개 전근대 역사의 한계로서 (1)중화주의의 극복 (2)국제정치 (3)민족사와 자의식 (3)문물의 역사와 사상사에 대한 이해 등의 분야가 역사적으로 충분히 성숙발전하지 못한 결과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그러므로 논어의 서두에 등장하는 학문론은 이시대 우리가 주목해야할 중심명제일 것이다. 곧 우리는 바로 다음의 문장의 엄중한 의미를 재발견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子曰學而時習之 不亦說乎
(2)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3)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이 텍스트는 여러 의미를 당연히 함축할 수 있다.그러나 이 문장의 역사성과 생활성을 주목한다면 통상의 해석과 변별되는 새로운 이미를 석출해낼 수 있다.(1)은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3개념이 문제가 된다.
해석상의 필요에 의해 뒤의 어의부터 잡아본다면 습(習)은 연습(練習)의 뜻으로 이해해왔지만 연습이란 대상은 배운것을 지칭하므로 그 범위가 좁아지게 된다.그러므로 좀 넓은 해석을 취하여 연습(演習)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배운 것을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한다는 의미이므로 연습(演習)보다도 오히려 더 실행(實行) 실습(實習)의 의미가 되어야할 것이다.
<때때로> <무시로>라고 알아온 시(時)의 경우는 삶의 전 시간성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그러나 전통적으로주자주에 나타나는 無時而不習(언제나 익히지 않는 때가 없다)는 의미보다는 시(時)의 의미를 불특정하게 열어두고 <항시 때에 맞게>라고 이해하면 이 전체 문장은 <배우며 언제나 그때 그때 시의적절하게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의미가 될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경우에도 학(學)과 시(時)와 습(習)은 삶의 행동으로서 미묘한 선후관계(先後關係)가 상정될 수 있는데 그 경우 역시 학의 작용이나 운용의 범위가 좁아지게 되므로 바로 이 시간적 선후인식의 벽을 허물어 동시공간성 속에 이 3개념을 용융해 이해하는 것이 긴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3개념은 학=시=습 동시성과 동일공간성을 부여함으로서 단일한 당위를 말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왜 같은 시간 공간성을 부여해야하는가?그것은 이 이 삶의 지침을 포괄적으로 말하는 거의 유일한 친절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배우면서 언제나 시의적절하게 행하며 살아간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를 손상하지 않는 방법일것이다.지금은 선택보다는 의미의 온존과 포용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또 다른 이유는 이 텍스트가 성립된 시기가 춘추시대로서 춘추시대 이전의 종교적 신비적 삶의 체제가 지성적 삶의 체제로 전환되는 변환기였다는 점 때문이다.원시사유 시대 이래의 전통적 삶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된 것이 유교이며 학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더욱이 그 삶의 체제를 지탱하고 유지한 인격의 주체는 유자(儒者)자신이었으므로 그들의 전통시대의 삶의 체제를 지탱하는 그 역할을 회복하고자하는 열망과 고난의 난세로 인식된 그 시대에 대한 대책으로서 제시된 것이므로 이 문장은 취미적 기호적 교양적인 안일한 여유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매우 절박하고 절실한 생할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인격을 갖춘 군자의 도덕적 인간상>은 그 다음에 성립되는 성과일 것이다. 학(學)이란 삶의 일부가 아니라 그 전부로서 제시된 것이며 전생적(全生的)이며 절대적(絶對的)인 의미로서의 긴밀함을 갖추고 있다.
사마천이 육가요지에서 그 선대 이래의 눈부신 역할을 회고하고 그 당대에 그와 같은 빛나는 위상을 회복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도 그러한 분위기의 실질한 반영일것이다.그가 공자학을 이상으로 삼았던 것도 같은 배경 위에서 일어난 믿음이었다.맹자가 공자를 시성(時聖)이라고 평가한 것이 <동시성의 의미>를 원초적으로 가지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것이다. 이런 생활합치성의 면에서는 이조선비는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2) (3)의 텍스트는 (1)을 생활의 장에서 부연설명한 의미를 지닌다.(2)는 시공을 초월한 동지의 만남을 희구한 의미로 받아들여야하겠고 (3)은 동시공간 속에서의 동지의 만남이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신비적 삶의 체제를 전환해야할 그 시기에 신비적 관습과 새로운 지성적 삶의 교차 속에서 사회적 변동의 불안정함을 타고 일어나는 이기주의적 삶의 분위기 가운데 자신의 삶의 새 지침이 효과적으로 수립되기를 바라는 인내와 믿음이 내포되어있다. 그러므로 (2)는 어떤 벗이 먼 시공으로부터 나에게 지금 (여기로) 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3)은 주변의 사람이 (전통시대처럼) 나(유자)를 알아주지 않아도 분해하지 안는다면 군자다운 것이 아닌가 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자하가 <배우지 않았어도 배웠다고 하리라>고 한 말은 바로 그러한 삶의 이상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증자가 견지한 3성(三省)의 생활론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2천여년전에 강조한 학문론이 오늘의 시기에 새로이 더욱 진채를 내고 있음을 보아야할 것으로 생각한다.오늘날 역사와 삶과 경험적 통찰의 입체적 시의성을 갖추어 긴밀하게 조화를 이룰 것을 촉구하고 있는 논어 학이장의 제1문의 의미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유교문명권의 일원임을 자처한다.그러나 사람마다 꼭 같은 의미로 자처하진 않는다. 대개는 심상하고 막연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어떤 측은 19세기 계몽주의시대적 열정만으로 유교를 청산의 대상으로 삼는 일에 뛰어들어 가히 혁명적 혁파의 주장으로 무장한 채 21세기의 선구자인듯이 나선다.어데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는 나는 전연 알 수가 없다.그 투사적 진영의 정면에는 전통유교의 방패가 도열해 있다.
오늘날 세계문명의 관점에서 유교는 분명 문명권적 차원의 정신이다.그리고 한국은 유교문화권 가운데 가장 인상적으로 유교이념을 실천했고 많은 명징하고 귀중한 성과를 역사상 거두어 그 중심국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유교문명권이라는 말은 유교가 이 문화권의 중심사상이며 보편사상이라는 의미를 공인하는 용어이다.나는 이 공인된 용어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다만 몇가지 주목해두어야할 일들이 있음을 지적하고자한다.
유교는 먼저 보편적 사상이다.그 정신사의 가지에 덕 인 의 예 지 충 효 등 유교적 밀과들이 열린 것 자체보다도 그 밀과적 보편가치를 창출하는 생각 사상 정신 철학 의지 이념 사색법 관찰법 같은 가치창출의 실 과정이 극히 보편적 원리에 입각하고 있다는 믿음이 동시에 확인되어야하고 다시 시도되어야한다. 당연히 그 밀과적 개념들의 의미적 보편성의 확인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그 정신적 태도를 견지한 주체로서의 역사인격 즉 유자(儒者:공자이전 공자이후를 관통하는 의미)의 사적 실존성도 밀착 탐구되어야한다.
유교가 공교(孔敎)와 구별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공교로서의 유교가 공자이후의 중국유학의 각 시대별 전통을 지칭하는 한학(漢學)의 의미로 좁혀지기 때문이다.그래서 필요해졌던 개념이 원시유교(原始儒敎)라고하는는 물리적 시간성으로 사상사를 대충 구분한 지칭용어이다.그러나 유교에서는 원시유교라는 정의는 잘 맞지는 안는다.예를 들어 유교적 삶의 표면에서는 그런 구분이 가능하나 유교사상사에서 초기시대이래로 그 사유태(思惟態)가 변화발전한 측면보다는 그 사유범주(思惟範疇)가 축소되어온 측면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이런 현상은 유교가 반역사적이라는 의미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서양의 사상사 분석 이론에서 말하는 내용적 계승성이 강조돼오지 못했다는 점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나아가 유교는 극히 역사성이 강한 사유방식이면서도 현대에 이르도록 진정한 역사학적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방대한 자치통감의 사론이 형식 개념논에 그치고 성리학의 철리가 역시 역사적 내면성을 기초적으로 통찰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명징한 예이며 현대에 들어서는 동방적 지식인들의 자의식적 자신감의 결여가 적극적 분석의 열정을 도출하지 못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또한 대학에서 격물치지가 강조되었음에도 유교사상의 경험적 성찰이 크게 진전되지 못한것도 그 명백한 증좌이다.
따라서 유교의 정의적 의미가 좁아져온 것은 유교의 학적반성(學的反省)의 불철저함에 주로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개 전근대 역사의 한계로서 (1)중화주의의 극복 (2)국제정치 (3)민족사와 자의식 (3)문물의 역사와 사상사에 대한 이해 등의 분야가 역사적으로 충분히 성숙발전하지 못한 결과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그러므로 논어의 서두에 등장하는 학문론은 이시대 우리가 주목해야할 중심명제일 것이다. 곧 우리는 바로 다음의 문장의 엄중한 의미를 재발견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子曰學而時習之 不亦說乎
(2)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3)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이 텍스트는 여러 의미를 당연히 함축할 수 있다.그러나 이 문장의 역사성과 생활성을 주목한다면 통상의 해석과 변별되는 새로운 이미를 석출해낼 수 있다.(1)은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3개념이 문제가 된다.
해석상의 필요에 의해 뒤의 어의부터 잡아본다면 습(習)은 연습(練習)의 뜻으로 이해해왔지만 연습이란 대상은 배운것을 지칭하므로 그 범위가 좁아지게 된다.그러므로 좀 넓은 해석을 취하여 연습(演習)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배운 것을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한다는 의미이므로 연습(演習)보다도 오히려 더 실행(實行) 실습(實習)의 의미가 되어야할 것이다.
<때때로> <무시로>라고 알아온 시(時)의 경우는 삶의 전 시간성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그러나 전통적으로주자주에 나타나는 無時而不習(언제나 익히지 않는 때가 없다)는 의미보다는 시(時)의 의미를 불특정하게 열어두고 <항시 때에 맞게>라고 이해하면 이 전체 문장은 <배우며 언제나 그때 그때 시의적절하게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의미가 될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경우에도 학(學)과 시(時)와 습(習)은 삶의 행동으로서 미묘한 선후관계(先後關係)가 상정될 수 있는데 그 경우 역시 학의 작용이나 운용의 범위가 좁아지게 되므로 바로 이 시간적 선후인식의 벽을 허물어 동시공간성 속에 이 3개념을 용융해 이해하는 것이 긴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3개념은 학=시=습 동시성과 동일공간성을 부여함으로서 단일한 당위를 말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왜 같은 시간 공간성을 부여해야하는가?그것은 이 이 삶의 지침을 포괄적으로 말하는 거의 유일한 친절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배우면서 언제나 시의적절하게 행하며 살아간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를 손상하지 않는 방법일것이다.지금은 선택보다는 의미의 온존과 포용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또 다른 이유는 이 텍스트가 성립된 시기가 춘추시대로서 춘추시대 이전의 종교적 신비적 삶의 체제가 지성적 삶의 체제로 전환되는 변환기였다는 점 때문이다.원시사유 시대 이래의 전통적 삶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된 것이 유교이며 학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더욱이 그 삶의 체제를 지탱하고 유지한 인격의 주체는 유자(儒者)자신이었으므로 그들의 전통시대의 삶의 체제를 지탱하는 그 역할을 회복하고자하는 열망과 고난의 난세로 인식된 그 시대에 대한 대책으로서 제시된 것이므로 이 문장은 취미적 기호적 교양적인 안일한 여유분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매우 절박하고 절실한 생할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인격을 갖춘 군자의 도덕적 인간상>은 그 다음에 성립되는 성과일 것이다. 학(學)이란 삶의 일부가 아니라 그 전부로서 제시된 것이며 전생적(全生的)이며 절대적(絶對的)인 의미로서의 긴밀함을 갖추고 있다.
사마천이 육가요지에서 그 선대 이래의 눈부신 역할을 회고하고 그 당대에 그와 같은 빛나는 위상을 회복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도 그러한 분위기의 실질한 반영일것이다.그가 공자학을 이상으로 삼았던 것도 같은 배경 위에서 일어난 믿음이었다.맹자가 공자를 시성(時聖)이라고 평가한 것이 <동시성의 의미>를 원초적으로 가지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것이다. 이런 생활합치성의 면에서는 이조선비는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2) (3)의 텍스트는 (1)을 생활의 장에서 부연설명한 의미를 지닌다.(2)는 시공을 초월한 동지의 만남을 희구한 의미로 받아들여야하겠고 (3)은 동시공간 속에서의 동지의 만남이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신비적 삶의 체제를 전환해야할 그 시기에 신비적 관습과 새로운 지성적 삶의 교차 속에서 사회적 변동의 불안정함을 타고 일어나는 이기주의적 삶의 분위기 가운데 자신의 삶의 새 지침이 효과적으로 수립되기를 바라는 인내와 믿음이 내포되어있다. 그러므로 (2)는 어떤 벗이 먼 시공으로부터 나에게 지금 (여기로) 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3)은 주변의 사람이 (전통시대처럼) 나(유자)를 알아주지 않아도 분해하지 안는다면 군자다운 것이 아닌가 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자하가 <배우지 않았어도 배웠다고 하리라>고 한 말은 바로 그러한 삶의 이상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증자가 견지한 3성(三省)의 생활론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2천여년전에 강조한 학문론이 오늘의 시기에 새로이 더욱 진채를 내고 있음을 보아야할 것으로 생각한다.오늘날 역사와 삶과 경험적 통찰의 입체적 시의성을 갖추어 긴밀하게 조화를 이룰 것을 촉구하고 있는 논어 학이장의 제1문의 의미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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