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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학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경전의 독법에 대해 일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논어와 노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하의 각 대중적 지면들에서 볼 수 있는 논설들은 많은 경우 균형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되어서이다.

사실 문헌의 독법이란 대상 문헌에 대한 정신적 접근의 깊이와 정도 즉 그 조예의 여부에 따라 논의의 본질이 결정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아니면 적어도 해당 문헌에 대한 애정이나 확신의 정도 그리고 그 심태의 객관적 타당도에 따라 의미 본원을 향한 노력의 궁극적 성패가 좌우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문헌을 대하기 이전에 그 문헌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먼저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자가 신이호고(信而好古:확신을 가지고 있고 옛 문헌을 이해하기를 좋아한다) 라고 하였고 맹자가 현세의 벗을 다하고 위의 시대로 소급하여 상우(尙友:옛 현인을 벗하여 배움)한다고 하였을 때 두 말은 모두 전통적 현성(賢聖)에 대한 인격적 확신을 전제로 문헌의 가치가 수립되는 것임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 두 경우 모두 학자 지성인의 인격에 대한 믿음을 말하였으며 동시에 그 시대성을 포착해야한다는 메시지를 내면에 함축한 말들이다.문헌은 역사적 현실의 삶에 충실한 어떤 기록이라는 믿음이다.

그 인격적 시대적 확신을 수립하는 단초는 사실은 선학의 가르침이나 스스로의 직관적 이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어떤 싯점에서의 절실한 자성이나 깨달음이 없이는 시작할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그 시작의 단서는 특별한 제한 없이 여러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고 그 경험을 간직하고 삶을 영위하면서 보다 실체적 믿음으로 확인 상승되어 하나의 확신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확신이 없다면 우선은 그 확신에 이르기 까지는 문헌을 본격 분석할 준비는 덜 되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본격적인 문헌 분석이란 일반의 독해와 다르다.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자아적 생명 즉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다. 적어도 그것이 경학이나 철학 역사에 관한 중심적 경전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경전은 최대한의 확신에 뿌리를 두고 읽을 때 새로운은 의미의 세계가 보인다는 경험을 자주 하곤 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오해가 있어서는 안된다.
확신을 먼저 요구하는 것은 경전을 왜곡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오류가능성 이야기이다.그러나 그런 일은 적어도 진성한 탐구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진성한 탐구자라면 그점을 언제나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또 이 말을 물고 늘어져 부정적인 답을 구하려고 도전적으로 생각해도 안된다.그것은 빙산의 일각을 말한 것이니까.확신의 의의는 그 이상이다.학문적 생명이기 때문이다.확신의 중요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완전히 기름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다.결국은 자신을 부정하는 곳으로 나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환언하여 다른 측면에서 말한다면 유학이든 도가사상이든 어떤 제자백가를 논함에 혹 분파적 사고를 적용한다든가 그 반대의 경전을 공파하려는 노력이 전제되는 것은 위와 똑 같은 이유에서 위험한 일이다.확립된 경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각 경전의 역사적 절실성과 이유를 이해하면 충분하다.그이상의 지나친 학설논란으로 비화 확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맹자의 이단논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맹자의 이단논이란 확립된 경전을 두고 발언한 것이 아니고 형성중의 인물들의 경전 형성 과정의 오류를 비판한 것이며 맹자 당대의 역사적 싯점에서 필요한 경우 힘찬 논리적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하겠다.예를 들어 맹자가 묵자의 소박주의 박애사상을 비판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인데 맹자의 비판 대상은 소박함에 있지 않고 소박주의를 너무 확대하여 전통을 붕괴하려는 행동적 비역사성에 두어져 있었고 그 결과의 비현실성에 두어져 있었다.절대적 의미에서 평등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전연 아니다. 미숙한 묵학도가 실행의 오류를 범한 경우 준엄한 비판을 가한 의미가 강하다.

어떤 학파의 경전이든 그 진성함의 본류는 동질적일 수 있으므로 그 점에 촛점을 맞추어야할 것이다.물론 유학 자체도 그와 같은 오류를 반복해온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기 필요한 것은 문헌 이전에 그 전제적 태도가 왜곡되어 있다면 이미 읽기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문헌을 오독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그 뿐이며 다른 뜻은 전연 없다.

하이(夏夷) 역사세계의 여러 사상이 다른 어떤 사상과 구별되는 사상이기 이전에 대체적으로 보편사유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는 믿음이 없이는 우리는 한 문헌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 분명한 일일 것이다.

왜 주장이 달라졌는가? 개념이 다른가? 하는 것은 그 문헌이 쓰여진 시대에 책임이 있고 주장한 사람의 삶의 배경에 원인이 있다.그 정신 속에서 요즘 지성인들이 사회적 대안을 제출하고 많은 경우 오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 바탕 학문 자체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을 것이다.그 논의가 보편을 지향한 것이라면 비중있는 경전으로서 존중하는 마음으로 앍을 것이 우선 요구된다는 뜻이다.

학자는 그저 학자일 뿐이며 요즘 논의되는 대로 어떤 형식이나 권위를 추구하는 주장들은 언제나 걸러져야함은 당연할 것이다.사기는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육가요지)

그러므로 독해과정에서의 엄밀함의 추구는 필수적이다.쉽게 읽으려는 것은 좋은 태도이겠으나 안일하게 소홀하게 읽어서는 안될 것이다.어렵게 읽으라는 말은 아니다.의미의 받아들임을 절실하게 한다면 그 읽음은 자연 정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문헌의 세속적 측면과 영원한 측면을 혼동하는 것은 그중 가장 큰 오류를 불러올 것이다.주역의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말을 상시 간직할 필요가 있다.

다만 학문에 따라 보편에 접근하는 구체적 길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대안이 다를 수 있다.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종교와 학문마저 온전히 교류할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하므로 학문은 자유사고의 길로서 오직 유지돼야한다.

최근에 어느 회원분께서 장문의 메일을 주셨는데 도가와 유교의 관계를 질의한 것이었다.그분께 즉시 답을 드렸는데 답이 좀 미흡했던 것 같아 연관해 같이 부언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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