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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매일은 문자의 길을 따라 달린다.
문자가 없는 삶을 기질적 삶이라고 한다.
기질적 삶도 완선할 수 있으니 성인의 길이 그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문자 없이는 통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대부분 사람의 길이다.

사람의 말은 실제로 상서롭지 않은 경우가 없으니
상서롭지 못한 것의 실체는 어짊(賢)을 가리우는 것이다
(맹자 진심)

어짐을 가리운다는 것은 내 내면의 통찰력을 방치하거나 남의 어진 말 즉 문자 혹은 힘의 텍스트를 왜곡하는 것이다.문명의 힘 텍스트는 언제나 역사속에 쓰임을 기다려 영생한다.

사람이 진화론의 궤도를 달리는 역사적 존재임이 분명한 한 그 삶의 누적으로서의 역사란 이성의 실현사이며 도덕적 정의의 구현사라고 하는 정의는 이미 낡은 명제가 되어버렸다.낡았다는 것은 새로움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자연 내함하게 된다.

고대문명을 황금시대로보려는 태도가 고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 빅퀘스천(Big Question)이 성립된 b.c 3-8 세기의 현성(賢聖) 철인(哲人)의 시대가 영구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현재사 즉 개별의 삶은 그 문명과 정신의 구체적 구현과 실행을 기초로 구축되어야한다는 그 당위을 벗어날 수 없고 결국은 새로움의 수혈이 없이는 모두 어느 정도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결국 문제일 것이다.영육을 갖추지 못한 영물(靈物)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전이라든가 보편정신이란 비유컨데는 하나의 완벽하게 그려진 건축 설계도일 것이다.실제로 세우고 그 실내를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야할 책임과 자유는 각 시대의 주인에게 있다.유로를 달리는 항해선에 무엇을 싣고 어디로 갈 것인가는 고객들의 욕구에 달려있다.그 설계도와 길은 멀리는 태양의 황도 아래를 맴돌고 가까이는 도로 표지판 위에 빨래처럼 결치어 있다.숨쉬고 입고 살아야하는 그런 것으로서 언제나 일상에 침투해 있다.하늘을 보고 연못을 보라는 중용의 글이 이를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아득한 여정을 항해해온 역사의 선로 끝에서 그 굳고 단단한 지표를 건드리며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활동은 바로 그선로를 살아있게 하려는 본능적인 그무엇이며 그 하나하나의 씨앗들이 새로운 품을 비집어내는 것이 바로 개인의 삶이며 공공동체의 성과로 거두어진다.우리는 그것을 현대문명이라고 부른다.시경에 등장하는 한탄과 기쁨 근심과 분노들이 부딪는 소리는 바로 그 생태의 현장음이다.

위와 같은 시공을 통달하고 있는 보편논은 항시 필요하고 요긴하다.그러나 그 일반론과 보편론이라는 대원칙은 그 스스로는 충만해질 수 없고 항시 새로움으로 재발견됨을 통해서 그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화생활을 극히 구체적으로 영위해야하는 까닭이다.

이 점을 지적하여 유자들은 시의(時宜)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거창한 말로 시대정신을 추구해야한다는 뜻일 것이나 실제의 삶으로 확실하게 피워내야한다는 뜻이다.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역사와 나와의 일치란 말도 그런 의미에서일것이다.

각 문화권의 다양한 문화가 아직 불충분하지만 광범한 교루가 가능해진 오늘 각각의 그 문명특질을 아무리 넓게 비교하고 수용해도 그것만으로 문명감각이 넓어지거나 깊어질 수는 없다.그것만으로는 육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각 사회는 각개 별도의 달려온 길이 있고 이를 벗어나기 어렵고 또 그래서도 안되기 때문일것이다.집합명사로서의 세계문명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자기가 선 두 발 위에서 그리고 자신의 두팔 안에서만 모든 것들이 유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일것이다.

증자가 수행의 원칙으로 삼았던 매일 자성하는 삶(日三省吾身)이야말로 영원한 라이프스타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그러나 공자의 학습의 삶(學而時習之)의 삶에 비하면 그 삶과 의식이 다소, 3 번이라는 거리로 인해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 핵심문제일것이다.

삶과 의식 사이의 거리가 해소되는 삶은 공자가 영위한 가장 위대한 삶의 양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것이다.공자가 일관(一貫)을 말한 이유이다.의식과 삶 혹은 배움과 삶이 어떨게 촌철의 여유없이 하나로될 수 있는가.사람이 호흡하고 의식주 생활을 하듯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서의 학(學)일것이다.

매일 일상이 그대로 학문이 되어야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루하루가 힘찬 텍스트만을 딛고 나아가야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문자를 다루는 문인의 길이 단순한 문인이 길에 그칠 수 없는 이유이다.
매일의 일상이 문자가 그려내는 의미에서 시작되고 귀결될 수 있을 때 바로 그 힘으로 누구나 시공을 뛰어넘는 광통(廣通) 철골(徹骨)의 절실함을 구현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불후(不朽)의 삶이란 그런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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