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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보도에 의하면 김수환 추기경이 KBS1 도올의 논어이야기에 출연한다고 한다.

< 그리스도교와 유교와의 대화>를 제의한 도올의 정중한 요청에 추기경이 응함으로써 17일 녹화하여 20일 밤에 방영할 계획이라고 주요 매체에서 일제히 전하였다.
지난해 추기경이 <나의 피 속에 유교의 전통이 흐르고 있다.>고 선언하여 하나의 거대한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였었다.
이어서 도올의 논어강의가 방영되면서 <공자의 논어 속에 노자도 다 들어 있음을 알았다>고 한
그의 언표는 일반다중을 대상으로 역시 거대한 메시지를 형성하였다.

지난해에 이루어진 이 두 메시지는 현재 그 힘과 크기에서 어떤 목소리보다 크고 널리 그 영향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같이 만나 화음을 이루어 새로운 메시지를 형성하려하고 있다.
이미 그들의 목소리가 거대한 것이었고 다시 그 합쳐진 목소리가 얼마나 클 것인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 목소리는 오늘의 문화적 풍토에 가해지는 마음을 울리는 초강력 목소리로는 유일한 것이라서 그 파장과 영향은 넓고도 깊게 퍼지고 있다.
이미 많은 다중들은 그 음질을 음미하고 더러는 분석하며 그 목소리의 질량이 무엇인지 보려고 하고 있다.
다만 우리사회를 덮고 있는 두터운 왜곡의 피막이 있어 모든 소리와 형상이 왜곡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구조적 문제이다.
도처에 있는 황토층과 같은 그 투명막의 두께 만큼이나 우리들의 정체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를 받이들일 준비는 아직 덜된 것이 사실이라는 뜻이다. <나 > <우리>는 아직 깊은 껍질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외피 피막은 아직 견고하다.

그 기왕의 목소리는 이미 충분히 크고 그 메시지는 벌써 넘치는 감동을 일으켰다.그 목소리와 감동은 거의 충격과 파동 같은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측면이 있다.
하나의 각성작용을 강력하게 유발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따라서 그 결과현상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목소리효과의 의미도 우리가 음미해야할 대목이 되고 있다.

일부 종교인들은 벌써 이 <만남>을 두고 종교적 평형성에 어긋난다고 불만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반면 일반적으로 역사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자성의 움직임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지적도 이미 나왔었다.
논어를 두고도 많은 파문이 일기도 했고 비판도 있었다.도올의 복장과 어투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종교적 불만 문헌해석적 공박이나 강 의의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번의 <만남>에 대해 네티즌들의 즉각적인 환영의 의사표시와 함께 대화신중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 이왕의 목소리는 또한 이미 스스로 완결적이다.하나의 목소리로서 그 자체가 한 의미를 획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그런 동질적인 음색의 목소리가 이미 여러갈래 있었다.어찌보면 서세동점의 시대 이래로 우리가 문화본능적으로 포기할 수 없었던
문화적 생리에 의해 주장된 목소리가 이미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이 역시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진실의 목소리였음은 분명하다.
전통유자들의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그들은 이미 유학을 생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조건없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이 목소리는 신세대에 이어지면서 새로운 목소리로 변전하였다.
하나는 극단적 반유교적 목소리로서 유학을 해악으로 인식하는 서구편향적 목소리이고
또 하나는 서구적 문법과 철학으로 유교를 재음미하는 새로운 이해의 목소리이다.
도올의 목소리는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전세계적 서구화의 진전결과 동서양의 도처에서 서구화의 역작용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미래가 모색되기시작한 세기말이후
세계화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그 세계화의 바탕 전제로서 민족적인 것을 음미하는 새 움직임이 크게 태동하고 있다.
이와같은 문화적 추세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새로운 조음판을 전통의 악기채를 들고 먼저 두드린 것이 바로 추기경과 도올이었다.
그들은 분위기의 연주자로서 손색이 없었고 그 연주음은 강하고 완결적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거대 목소리는 이미 한 시대를 획할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사실 더 클 필요는 없다.
이제는 그 울림의 여운을 조절하면서 의미있는 결과를 위해 염려해야할 때라고 느낀다.
어느 철학도 네티즌은 도올의 강의와 연관해 <동양학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서구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제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하였다.
그러나 그 불만에도 불구하고 유교이야기는 이제 진정 시작된 데 불과하다.
실질적으로는 아직 제대로 출발도하지않았다. 본격적인 유교적 삶을 살기에는 우리는 이미 너무 서구화되었고
정신과 감정은 서구편향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으며 제도와 문화와 사회적 제도와 양식은 서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서구적 조건아래 살아가는 삶은 따라서 당연히 전통생리와 충돌돼왔고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였을 뿐
사실은 누구나 불안정한 타자(他者)의 삶을 살아온 것이 그 동안의 사정이었다.

우리의 전통적 문화적 생리는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는 약간의 시일이 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거의 완전한 그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좀 더 많은 시일이 요할 것이다.

우리의 삶의 중심이며 불후한 영원한 지표가 될만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매우 많은 시일이 요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유교란 우리 민족사와 문명사가 지어낸 문명의 대하이며 바다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적어도 한 세대의 혼신의 정화 노력이 요할 것이다.

유학이 과학이며 종교일 수 있고 기술이며 문학이요 예술일 수 있는
보편무비한 균형된 삶의 체제임을 이해하는 데는 한 세대이상의 자성의 시간과 넓은 시각의 자기애가 필요할 것이다.

새로운 목소리는 그러한 시대적 요구의 실현에 구체적인 유용함을 줄 수 있어야할 것이다.

환영과 기대의 념과 함께 우려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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