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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전해석 논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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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K.B.s의 논어방영과 더불어 논어를 중심한 고전해석이 많은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최근 일간지를 중심한 보도들은 그러한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이는 과거에 보기 어려웠던 상황이다.그러한 매체의 반응만으로도 이제껏 있어왔던 고전문헌에 대한 곡해와 이해의 결여문제를 풀어야한다는 매우 힘있는 목소리의 역을 잘 수행해주고 있다.

이미 학계 내부에서는 80년대 후반부터 각 분야의 인문학의 내용적 발전과 함께 그 역할과 사명 학문적 본질문제 등 일반적 자성이 요구되었고 그 가운데서 고전과 역사전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이 강하게 현실의 문제로서 대두해왔었다.다만 그 의견과 믿음들이 일반의 이해의 부족이라는 벽에 부딪어 잠복해있었다.

이제 고전 음미의 필요성은 충분히 논의된 것 같다.그리고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고전을 다루고 사고하는 구체적인 고전적 행동 부분으로 그 관심이 넘어가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고전적 행동이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님을 더 강조할 필요는 없어졌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도 이미 한차례 논어해석과 노자해석을 두고 일부 격하기까지한 논란이 있었으므로 이미 고전적 행동은 구체적으로 수행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이제 경전을 다루고 문헌을 해석하는 것이 하나의 <일반현상>으로 우리 사회의 일반문화의 장에 드러나기작하였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무슨 말이야하면 지금까지 주로 서재에 꽂혀있던 경전이 일반적 삶의 광장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논의도 일부 소위 <문화권력>의 범위에서 논의되는 틀을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지성으로서 거듭나기 사작했고 모든 학문분야가운데서 그것도 제일먼저 일반적 목소리로서 공론적 공기를 구성하기 사작했다는 것은 참 의미심장한 대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제부터는 어떤 제한된 틀 속에서 일부의 연구자의 논설로서 유교가 묶여있을 수 없다는 믿음을 널리 주었다.그 원래의 본령대로 상하(上下)와 고저(高低)를 포괄 조화 균형을 유지하는 새로운 시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그것도 극히 넓은 무제한의 공론의 장인 방송과 일간지면을 통해 유교가 새로이 우리 문화 속으로 새로운 메시지에 실려 돌아왔다고 보고 싶다.이제는 이를 되돌릴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유교논의는 공공성 일반성을 새로운 주류성향으로 확립하고 그 공론적 힘에 의해 새로운 부활과 발전이 이루어져야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구체적 분야로서도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문학 예술의 각 분야에서 유교적 결핍을 해소하기 위한 수혈이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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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논란중에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는것은 <논어논란>이다.최근 고전연구원 전호근 교수 서울여대 홍광훈 교수 등이 그 논란들을 정리하고 새 방향을 제시하려한 점은 그런 뜻에서 의미 있다.

전호근 교수는 "저마다의 공자만 있고 모두의 공자가 없다"고 비판하고 논어의 유행은 중요한 문화적 사건이지만 독단적 해석을 경계하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지적으로 수용할 것을 말하고 있다.

홍광훈 교수도 유사한 입장의 견해를 발표하였다.그리고 아울러 구체적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였다.그러나 실은 두사람의 해석의 오류 지적도 역시 하나의 해석 가능성을 보인 것이며 그들이 비판대상으로 삼은 모모한 해석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고전 문헌에서 어느정도의 기초 독법을 가진 해석이라면 <틀린 해석이란 사실 존재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개념의 연결법이 독법이므로 어떤 의미 연결법이든 제한 없이 수용되고 검토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허용의 확대에는 분명한 전제가필요하다.그 전제란 <1>일관된 의미로서의 경전이해 <2>통일된 유교사상의 이해 <3>개념간의 의미를 열어주는 이해 <3>보다 넓고 깊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창조적 이해를 지향해야한다는 것이 그것이다.경전이 영원한 그 무엇이리고 생각할 수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구현 수립하기 위해서다.결국 단적으로 <대학>에서 말하는 일신(日新)의 의미에 유용해야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논어의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溫//溫/은 앞의 삼수변 대신 마음심변)에 대해 도올의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하였고 구름은 "자신이 깨닫지 못해도 성내지 않는다"고 해석하였는데 사실은 이 두 해석은 모두 극히 전통적인 해석의 범위 속에 있다.해석의 본질에 있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전자는 가장 전통적 해석이요 후자는 위진 남북조시대에 이미 수립된 해석법의 하나이다.전통경전해석의 논란에서도 그정도의 논란은 흔히 이미 있어왔다.문제는 왜 어떤 해석으로 통일될만한 중심화 통일화의 길을 열지 못했냐하는 데에 있다.

이제 그 길을 의식적으로 열어가기 위해 바로 그 전제로서 오히려 지금보다 몇배더 다양한 해석이 시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그것이 새로움의 길의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기에 귀중한 것이다.

더많고 더 다양하고 더 놀랄만한 해석이 니와야한다.아직은 논란에도 불고하고 그런 해석이 전연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해석과 의미 설명이 유리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기존의 어떤 지식 뜻으로 구절을 해석하지 말라> <자구에 얽매이지 말라>는 전통적인 해석법은 역시 귀중한 해석기술이다.경전의 문헌이 현재 살아있다는 전제아래 번역되어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공자가 시성(時聖)이라고본 맹자의 견해는 바로 거기에 공자의 위대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명쾌한 통론이다.


夏夷案者

兪德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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