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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전통 사상과 문화 등에 대한 광범한 좌담회가 있었다.

새시대를 위하여 양국이 학술교류를 수행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한국의 문적 경향,일본의 무적 경향을 추출하고 문화적 특질론으로서 한국의 선 중국의 형 일본의 색을 논하는 일도 유용한 관점일 수 있다.

그러나 일반론의 보편적 수립이라든가 역사적 이해력의 확장 그리고 특히 사상사적 조예의 통시대적 통관 같은 것이 전제되지 않고는 그러한 중대한 주제를 논하기는 좀 어렵고 조십스러워야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한국의 문화의 특질을 선이라고 보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문화 전체를 왜곡 하면서 한 단면적 부분을 전체로 확대한 무리한 견해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한국의 어떤 문화유산을 선을 중심으로 관찰할 수도 있고 그 선질의 특질이 한국문화에서 독특한 미감을 창조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그러나 그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일본인에게 일반화된 한국=선 인식은 사실 왜곡된 것이다.백제토기의 넉넉함이나 고구려 토기의 위엄 같은 것은 선 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위와 같은 왜곡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역사와 사상 즉 주류정신사로서의 유교사상의 핵심을 등을이해하지 못하는 한 교정되기 어렵고 그런 의미에서는 아직 완결된 형식적 문화론은 위험하다.

또 전통사상의 조화사상성을 지적한 이어령 교수의 언급은 유효한 것이지만 그 조화사상의 실체를 절실하게 탐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나아가 자연과의 조화라고 하는 상투적 이해도 이제는 지양되어야한다. 세싱에 자연과의 조화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실은 그 조화의 방식과 과정 그리고 그 법위와 정도 등이 주제가 되어야한다.

새로운 문화적 발상을 위한 논예(論例)로서는 좋으나
이를 구체적으로 문화분석의 만능의 잣대로 삼는일은 삼가야할 것이다.


夏夷案者

<아래는 한국일보 좌담회 기록기사>


................................................

[제4회 한·일 교류좌담회] 전통의 근간은 선비정신과 무사도

자연과의 조화 중요시한 미의식

◈ 한일교류좌담회 참석자 약력

△이어령(李御寧)=67세. 문화부 장관, 새천년준비위원장역임. 이화여대 석좌교수
△정양모(鄭良謨)=65세.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경기대전통예술감정대학원 석좌교수
△최병헌(崔柄憲)=57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사연구회장,한국사상사학회 부회장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76세. 국제 일본문화연구센터고문, 일본 펜클럽회장
△미즈오 히로시(水尾比呂志)=70세. 무사시노(武藏野)미대학장역임. 문화재보호심의회 전문위원
△우메야마 히데유키(梅山秀幸)=51세. 기후(岐阜)경제대교수.

◈진행

△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 국차장
△ 즈게 마사토시(柘植雅俊) 요미우리신문 편집국 국차장

◈일시ㆍ장소

△ 6월 3일 경주 현대호텔



한국일보사와 요미우리(讀賣)신문사가 공동주최하는 한일 교류좌담회 4번째 행사가 ‘문(文)의 전통 무(武)의 전통- 닮았지만 다른 것’을 주제로 2~4일 경주 현대호텔에서 열렸다. 발언내용을 요약한다.


△ 이어령= 한국은 문(文)의 나라, 일본은 무(武)의 나라로 인식돼 왔고, 흔히 붓과 칼에 비유돼 왔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무’ 속에도 문의 전통이 스며 있으며 일본 무사도에는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 신라의 화랑은 문무를 겸비한, 어느 의미에서는 무인집단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문과 무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용을 중시한 유교에서는 문무 겸비를 지향했고, 어느 한 쪽을 업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문의 전통을 이야기할 때 선비정신, 일본에서는 무의 전통을 이야기할때는 무사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편의상 나누겠습니다.

△ 우메하라= 무사의 전통이 일본에서 주류가 된 것은 16세기 이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리 빠르게 보아도 13세기, 가마쿠라(鎌倉)시대에 들어서입니다. 무의 전통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 것은 에도바쿠후(江戶幕府)가 성립된 이후라고 봅니다.

천황중심의 정치가 끝나고 에도시대로 접어들면 대단히 분명한 봉건제도가 성립되고 무의 전통이 굳어집니다. 지배자는 무사이고 농업에 비해 공업 상업은 낮추어 졌습니다. 이런 체제가 250년간 지속되면서 현대에도 무의 전통이 지배적이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유교이념이 채택된 것도 에도시대이지만 무사계급에 맞게 왜곡됐습니다. 충의(忠義) 효행(孝行)등 두 가지 도덕을 중심으로 유교를 해석했고 이 두 가지는 근대일본으로 이어져 메이지(明治) 이후의 도덕이 됐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기까지는 무사적으로 변용된 유교 도덕이 일본의 지배적 도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의 전통이 분명해진 것은 대체로 400년 전의 일입니다.

△ 최병헌= 일본에서의 무의 전통은 가마쿠라시기 이전까지도 올라가지 않나 생각됩니다. 일본의 가마쿠라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 무인집권기에 무인집정관이었던 최우(崔瑀)에게 대표적 불교 승려 혜심(慧諶) 스님이 "화두(話頭)를 참구(參究:불교에서 참선하고 연구함)하라" 고 편지를 보낸 일이 있습니다.

무인이라도 문을 더 중시한 사회분위기를 알 수 있는데 같은 무인집정기이지만 가마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문과 무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 이어령= 일본에서는 칼이 발달했는데 한국에서는 신라때 우수한 야금술로 세계 최대로 불리우는 봉덕사신종, 즉 에밀레종을 제작했습니다. 야금술에서 앞서고도 칼에서는 일본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칼과 붓의 문제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 최병헌= 불교도 서로 많이 다릅니다. 일본불교는 상대적으로 종파성이 강해 나라(奈良)시대의 남도육종(南都六宗:法相宗 三論宗 俱舍宗 成實宗華嚴宗 律宗)등 수많은 종파가 분열을 거듭해왔습니다.

또 종파마다 염불이면 염불, 선이면 선에 전념하면서 다른 요소는 배격합니다. 이런 종파적 경향은 한국불교의 회통적인 성격과 확실히 구별됩니다.

한국불교의 호국적성격과 일본불교의 진호국가설도 국가주의적 성향을 나타내는 공통된 특색이지만, 일본불교가 국가주의적 성격이 더 두드러집니다. 메이지(明治)시대에는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의 일치를 주장하는 국가주의적 불교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 우메하라= 일본은 중국에서는 주변적이었던 종교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키고 이어왔습니다.

한국에 없는 것은 정토종입니다. 나무아미타불만 입 속에서 되뇌면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지요. 불교 전체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에 집약했어요. 난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불경 이름을 말하면 모두 구제를 받는다고도 했어요.

△ 이어령= 한국문화는 형태가 없고 관념적이며 철학적이고 내적인 성격을 띠는 반면 일본은 틀이 있고 쉽고 명료하고 물질적인 성격이 강해 불교에서도 추상성과 구상성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우메야마= 조선왕조의 문화를 살펴 보면 주자학을 받들면서 대의명분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는 자세가 두드러집니다.

왕보다는 진리나 이념에 대해 충의를 다하면서 순(殉)한다는 자세입니다.

일본에선 “죽음이냐 삶이냐를 택해야 하는 국면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죽음을 택하라. 그러면 틀림이 없다”는 말도 합니다. 조선왕조에 순사의 풍습이 있는지 조사해 봤는데 없는 것 같습니다.

△ 정양모= 한국에서 부모상을 당했을 때 3년 시묘(侍墓)를 하는 것은 묘막(墓幕)을 짓고 3년간 곡기(穀氣)를 끊고 겨우 사는 정도로만 먹는 것인데, 오히려 더 인내해서 오래오래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아니라 단지(斷指)를 해서 그 피를 부모나 자식에게 먹이는 것도 죽는 개념이 아니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개념일 것입니다.

△ 이어령= 한국은 죽음을 미화하거나 찬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바친다는 의리는 있지만, 주군이 죽었으니 따라 죽는다는 순사가 제도화되거나 찬미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충의에 비해 효를 중시한 점도 순사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칼의 세계는 매우 구체적이지만 문의 세계는 추상적입니다.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이념적이죠. 죽음에 대한 문제도 일본은 형식화ㆍ양식화 하지만 한국에는 그런것이 없습니다. △ 정양모= 도자기를 중심으로 살펴 보면 일본 중국 한국은 같은 동양권이지만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일본과 중국은 자연과 인간이 대립합니다.

한국은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여깁니다. BC 4500년~BC 6000년의 세 나라 토기를 비교하면 일본의 조몬(繩文)토기에는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이 화려한 장식적 요소로 나타납니다. 중국에서는 색깔이 화려한 채문토기가 생깁니다.

하지만 한국은 단순히 음각을 한 빗살무늬토기와 요즘 말하면 양각(陽刻)이라는 띠를 둘러서 표현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청자도 12세기 전반에 산화동(酸化銅)으로 붉은 색을 나타내는 것을 세계최초로 발견하고도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 미즈오= 각국의 조형미술을 비교하면 중국은 형(形)입니다. 매우 대칭적인 형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은 무늬랄까, 색이랄까, 그런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대칭적입니다.

한국은 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부드럽고, 흐르는 듯한 선입니다. 중국사람의 미의식으로 볼 때 바람직한 게 아니지만 일본인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입니다.

△ 정양모= 한국 미학에서 지고한 것은 자연과 똑같은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전체가 어우러져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자연을 따른 데 반해, 일본은 인위적인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미즈오= 일본 도자기의 특색은 한 마디로 장식기술이 성했다는 점입니다. 이로에(色繪)라고 해서 색을 칠하고 무늬를 디자인하는 것이지요.

회화적 성격은 일본 조형미술의 큰 특징으로 장식성이 강하다는 말도 됩니다. 무늬가 없는 도자기를 높이 치는 미학도 있었습니다.



△ 이어령= ‘중국은 형, 일본은 색채, 한국은 선’으로 구분하는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씨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또 일본의 셋슈토요(雪舟等楊)가 그린 달마도(達磨圖)와 조선조때 일본에 통신사 일행으로 갔던 김명국(金明國)이 그린 달마도를 비교하면 금방차이가 드러납니다.

셋슈의 달마도는 눈을 크게 뜨고 금방 달려들 것 같은 무사같은 표정인데 김명국의 달마도는 둥글둥글하고 부드럽습니다.

△ 미즈오= 한국과 일본 미의식의 공통점은 자연과의 공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는 대칭이 없습니다. 전부 비대칭입니다. 때문에 조형물도 비대칭이 됩니다.

그것이 자연에 맞는 것이며,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감각적으로 동조하게 되는것입니다. 다만 일본인들은 아름다운 물건을 손에 넣으면 나름대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강하지요. 불상도 일본의 불상으로 변해갑니다.

△ 최병헌= 우리나라는 초기에 청동으로 만드는 것이 유행했고 9세기 이후 철불이 한 때 유행했습니다. 후대에 가면 소조불(塑彫佛)이 만들어집니다.

일본에서는 목불이 발달합니다. 백제 신라에서 청동불상이 일본에 전래되면, 모양은 따르지만 목조로 바뀝니다. 탑도 중국이 전탑(塼塔)의나라, 한국이 석탑(石塔)의 나라라면 일본은 목탑(木塔)의 나라입니다.

△ 우메하라= 한국과 일본불상의 결정적 차이는 일본불상은 헤이안 시대에 들어오면 거의 대부분 목조불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명한 차이입니다.

한국에는 철불상이 많지만 일본에는 철불상이 거의 없습니다. 철로 만든 불상을 보면 일본사람들은 큰 위화감을 느끼게 되지요.

△ 이어령= 문의 전통, 무의 전통은 현대에 이르러 다른 정치적 이유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살아가며 연대해야 할 아시아인데, 대동아공영권 재편과 같은 사고방식을 부활시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교과서의 몇 부분을 수정하지 않는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 우메하라= 나는 일본교과서 문제,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문제, 헌법 개정문제에 모두 반대합니다.

나는 야스쿠니 신도(神道)가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난 신도와 다르며, 유럽 국가주의에 의해 왜곡된 신도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야스쿠니를 참배한다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과서문제는 자민당 일부 정치인과 일부 학자가 결탁해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을 만들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일본문화에 대해 빗장을 풀고 있고, 내년 월드컵 대회 공동개최를 계기로 양국 관계가 호전되려 하는 때에 그처럼 조심성 없는 일을 한 것은 일본의 책임입니다.

일본이 문화의 공통성을 자각, 문화적인 기초를 토대로 경제적으로 공영하는 동아시아연합체와 같은 목표를 갖고 나가면서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면 한일관계가 더욱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 정양모= 양국이 똑같은 문화를 갖고 있다면 재미가 없겠지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에도 선비정신과 같은 점이 있고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계승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곳에서 새로운 것들이 생겨난다고 봅니다.

△ 최병헌= 우리들은 일본교과서 내용 중 한일관계만 문제삼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다음세대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일본 내 양심적인 지식인들도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 대부분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우리와 생각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 이어령= 원래 아시아에는 이질적인 것을 결합하고 조화시키려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대와 집단에 따라 무를 더 숭상하는 문화와 문을 더 숭상하는 문화가, 같은 뿌리에서 두 가지 색깔의 꽃이 피어나듯 발전했습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창조적 에너지가 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골자인 것 같습니다.



일본의 무사도


가마쿠라(鎌倉) 시대(1192~1333년)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2세기 들어 권력을 장악한 귀족출신 무사인 사무라이(侍)들이 상당 수준의 무예와 함께 나름대로의 행동규범을 정착시킨 것이다.

그 뒤 무사도는 조금씩 변해 무로마치(室町ㆍ1338~1573년)시대부터는 불교 선종(禪宗)의 영향을 받았다. 무사들은 무예에 능통하면서도 절도 있고 극기적이어야 했으며 검소함과 정직성, 효도 요구됐다.

패배나 불명예를 당할 경우 할복자살(切腹)하는 것이 제도화하기도 했다. 평화기인 도쿠가와(德川)시대(1603~1867)이후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의리나 의무보다 도덕성을 우선하는 쪽으로 바뀌고 검소ㆍ청빈하게 살면서 하층민에게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무사도 정신은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등을 거쳐 봉건제도가 붕괴된 뒤 국민 윤리교육의 근간이 되기 시작했다. 목숨 바쳐 충성할 대상도 봉건 영주인 다이묘(大名)에서 덴노(天皇)로 바뀌었다. 일본 군국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무사도 정신을 이용했다.

정리=유승우기자 swyoo@hk.co.kr

황상진기자 april@hk.co.kr

유성식기자 ssyoo@hk.co.kr

입력시간 2001/06/2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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