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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에 접근하는 두길


(1)유교에 대한 일반의 생각은 극히 막연한 경우가 많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는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었거나 심지어 유교전공자의 경우도 크게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2)이 칼럼에서 아무리 목이 터져라고 <유교는 보편사상이다> <우리의 체질이며 역사이다> <문명권적인 차원의 성과이다>라고 주장해도 그것이 공허하게 들리는 까닭도 유교에 접근하는 기본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게 하지 못한 때문이란걸 알았다.

(3)유교에 가까이 가는 가장 전통적인 길은 경전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경전을 해석해서 그 문의를 파악하고 자기의경험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다.그러나 그 이상의 길이 있다. 해석의 내면을 반추하는 길이다.내면을 반추한다는 것은 "군자불기(君子不器)라든가 "군자 불중즉 불위(君子不重則不威學則不固)"같은 개념을 인격 수양의 언어로 보는 의미의 표면을 벗어나 그러한 이념이 나오게된 역사적 보편적 근거나 배경을 살펴보는 길이다.

전통적인 길은 심오함을 추구함으로써 유교의 심도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주요 개념과 명제들을 그대로 오늘에 되살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 인(仁)의 사상에서 현대의 근대적 가치성을 찾아내려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 류의 근대적 의식과의 상통성을 찾으려는 연구들이 상당수 나와 있다. 물론 그것은 가능한 길이고 당연히 그런 연구가 정당하다.왜냐하면 유교이념이 극히 보편 타당한 경험처리를 통해 얻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유교의 본령은 아니다.유교의 성과를 표현한 최고명제일뿐이다

그러면 유교의 진정한 본령은 무엇인가? 그러한 생각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사고의 길을 추체험하는 일이다.경험과 논리를 분석하고 그리고 주요 개념의 표면의의 내면적 의의를 추구하고 그 원관념을 복원하며 그 위에 다시 근대성이나 미래적 가능성의 크기를 생각해야하는데 이런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유교는 설득력을 많이 상실할 우려가 있게된다.

유교는 우리가 원시유교라고 부르는 공맹시대이 모습이 원바탕이 아니다. 따라서 원시유교라는말은 사실 잘못쓰여지고 있다. 공자 맹자 한나라시대는 유교경전이 확립되고 학파를 형성한 시기이지만 그 시대의 성과는 사실 경전과 그 해석 뿐이다. 그것은 경전이후의 사실이므로 경전이전을 문제삼지는 못한다.

원시유교란 공맹이전에 그 뿌리를 두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스이는 원시유교라는 말은 유교의 처음을 의미하므로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역사의 범주안에서만 논한다면 그것이 맞는 말이지만 유교가 중국사의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이전 이래의 (예컨데 춘추좌전 초 중기 시대) 정신으로 대하고 그 최초기 시대의 사고의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유교연구를 역사주의적 연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유학의 원 본질에 맞는다. 청나라 장학성이 육경은 모두 역사라고 한 이상의 의미가 유교 속에 있고 공자나 맹자 모두 깊은 역사해석자이며 문명해석자였던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유교사상이 역사주의 일변도는 결코 아니다.

유교의 역사주의란 역사성을 따져야한다는 의미이고 그 내용은 자연 인문 정념 사물 사실을 포함하는 모든 경험세계를 포괄하는 포괄 균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중용이란 철학적인 용어 일 뿐아니라 그런 경험적 특질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4)앞의 칼럼과 일부 중복되는 주장도 되겠지만유교의구체적 논의를 위해서는 유교와 경전을 대하는 일반적 문제점을 좀더 논의할 필요가 아직은 더 았다고 생각된다. 그 학문성 자체를 유념해야하겠다는 뜻이다.

방만해보이고 산만해 보이는 여기 칼럼의 담론은 꼭 거쳐야한다고 생각되는 개괄론을 위한 것이므로 이해를 바란다.이해의 방향이 어긋났을 경우 어떤 깊은 논의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5)이해상의 왜곡이 너무 광범해서 아직은 논할 부분이 너무 많고 막힌 부분도 널려있다. 이를 쉽게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정관념들이 심하고 그 고정관념들이 대부분은 근거가 합리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고정관념의 밀림 속에서 길을 내기는 쉽지가 않다는 점을 역시 이해를바란다.

위의 예문중에서 하나만 살펴보면 "군자가 신중하지 않으면(君子不重則)..."이란 어구는 사실 유학의 기초를 말한 것으로 신중하다는 인격을 말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군자는 법칙성(則/곧즉이 아닌 법칙으로)을 중시하지 않으면 이라고 읽어야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이어지는 "배워도 견고하지 않다(學則不固)"란 말도 유학의 법은 아집이나 고집을 벗나야한다는 뜻으로 보아야한다.(이 내용은 필자가 동아커뮤니티의 유교문화의 복원문제 게시판에서 제기한 것이다)

이와 같은 그 원뜻을 살리는 검토가 없이는 모든 개념에 대한 논의는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시각을 더욱 찾아내기 위해 유교에 접근하는 길에대한 논의는 많을 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동안은 너무 개념해석에만 매달려와 유학의 본질인 균형감각을 잃었었다고 반성된다.

미세한 생각을 그대로 적어 논의가 정돈되지 못함을 양해반란다 그러나 일부러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어떤 특정한 주장을 위한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생각과 느낌을 그대로 적고싶어서이다.


하이안자 夏夷案者
The 1st.haia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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