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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족주의
오픈백과 디렉토리 : 인문, 사회과학 > 사회학
사회, 문화 > 민족문화

한국을 가족주의 사회라고 정의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소위 근대화, 선진화,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가족주의가 "낡은 가치관" 혹은 '패거리문화'의 한 부분인 것으로 폄하되었던 경우가 있었던 것은 옥석을 가리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인류집단 가운데 가족을 중시하지 않는 {문화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족중시의 내용이 다르고 그 전통이 다르고 그 의미부여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가족을 중심한 안정되고 행복한 삶이 인간의 기초적 행복의 조건임에도 특히 한국을 가족주의의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그 가족주의의 외연에 공적심성(公的心性)이라는 {수양(修養)}된 인격공간을 거느린다는 점에서 일반적 {주의('ism')}라든가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그치지 않는 강인한 지성적 전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족주의는 {한국사상사}(intellectual history of korea)의 일환이며 {한국문화사}(the civilization of korea)의 귀결이다. 동아시아적 {문명(文明)} 원어(原語)의 본질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역사상 형성된 것이며 한국지성사의 미래가 또한 그래야할 것이므로 일종의 {역사주의(historicism)}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이를 넘어서야 할 중요한 역사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부 {근대화} 지표를 추구하는 {개혁 운동}가들이 {가족의 해체현상}을 '{근대적}'인 것으로 수용하려는 중대한 오류가 일반적으로 확산되는 비역사적 추세가 일부 있으며, 또한 {핵가족화} 현상이라든가 이혼의 격증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인권평등}이라는 일반적이고 비주체적인 잣대로 해석하여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호주제 페지운동}이라든가 정치 경제 사회의 제부분에서 이른바 {여성할당제}라는 방식까지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여성참여}를 증대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이 그 예가된다.

여성은 존중되어야 하나 한국 가족주의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역시 역사적으로 변화 발전해야 하며 그 어떤 움직임도 역사적 성찰을 회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지금 약화되어가는 가족주의 모습은 옳은 것인가를, 또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여 가족주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은 없는가를 생각할 때인것 같다.


한국 가족주의가 역사적이라고 보는 까닭은 역사상 그리고 지성의 전통에서 가족주의가 항시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성적 전통의 중심'으로 특징지워지는 한국 가족주의는 '탈이기주의(脫利己主義)'를 본질로하며 {인(仁)}과 {의(義)}라는 {공의}의 중심으로 인식돼왔었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는 열린 공간으로 가족주의가 자리매김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가족주의의 근본이념은 {유교경전}과 이념에 의해 지극히 정당화되었으므로 유교적 전통의 핵심이지만 우리는 과연 유교적 전통이 수립된 후에야 그와같은 가족주의 전통이 이차적으로 생겨났다고 볼 수는 없다. 가족주의는 {유교}적 전통 이전부터 강인하게 존속되어온 것이며 오히려 그 역사적 전통이 유교적 전범으로 수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유교이전부터 전승된 오랜 역사적 지성전통이라는 사실은 <<맹자>>에 나오는 {순(舜)}이라는 유교의 선구적 인격이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은 동아시아 역사상 {효}의 이념을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전설상의 인물이다.그 인격이 동이족의 전통 위에 있다는 것을 {맹자}가 언급하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소개하는 순임금의 역사는 {문왕(文王)} {무왕(武王)} 등 {주(周) 왕조}의 건국 주체세력이 역시 동서이족(東西夷族) 출신이라는 언급과 함께 나온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기들 역사의 영역 가운데 있는 동이족이며 서이족이라고 주정하고 있으나 중국의 역사는 시종일관 이민족의 참여에 의해 발전해온 것이 사실이므로 중국민족과 이민족 사이의 {문화접변(acculturation)}문제는 별도의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 동아시아 문명의 한 중심적 특질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이족의 모태는 구이(九夷)였으며 그 일부가 중국영역 안으로 들어가 위대한 왕조를 건설하였던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직접적인 선조들은 만주지방에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며 한국 국가형성사를 지탱해왔다. 여러 민족이 각축하고 있었고 중국이라는 거대제국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으므로 만주시대의 민족적 삶은 위기로 연속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위험과 곤란을 극복할 수 있는 무엇보다 강한 힘을 주었던 것이 바로 가족주의 정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 {해명태자}나 {호동왕자}의 의연한 자결은 그런 가족주의 공의정신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이 국가적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하려는 것이듯이 가족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그이상의 의미가 있다. 개인과 가족의 안정 없이는 그 국가적 삶이 확고하고 편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중심주의는 어느정도 개인의 삶을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경우에는 고통을 줄 수도 있다.그러나 반대로 탈가족주의가 고통을 제거해주고 개인의 성취의욕과 가능성을 무한히 높여주는 것도 아니다.

개인과 가족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순임금의 시대에 이미 극명하게 노정되었었다. 그가 '들에 나아가 하늘을 보고 외쳐울었다'는 유명한 설화는 효이념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생활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대가족제}가 이미 해체되었고 {핵가족}화하는 현상이 자리를 잡았지만 그 내면에 기족주의는 아직 큰 흐름으로서 강인하게 유지되고 있다. 역사적 전통이란 쉽게 변경될 수도 없고 변경되어도 안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 것이다.

지성적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균형된 사고와 행동을 필요로할 것이며 그 경우에 '개인의 행복과 자유로운 일상'을 위해 가족주의를 탈피하는 것이 그 정당한 방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역사상 그래왔지만 먼 미래에 까지도 가족주의는 우리의 중요한 힘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의 형성기}에 화합된 가족주의의 힘으로 국가적 난관을 돌파하며 한국민족사를 건설해왔듯이 현재도 개인과 가족의 조화 균형의 힘으로 국가적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광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진 이웃나라라든가 강력한 무력으로 대륙을 종횡하는 침략세력에 비하여 한국은 좁은 국토 평화로운 국민성 높지 못한 경제력 등 제반 투쟁여건과 상황이 불리한 가운데 오로지 {인격적 유대}의 힘으로 그리고 정신과 이념의 굳건함으로 역동하는 역사무대를 극복해왔었고 가족주의는 그 원천이 되어왔었다.

지금 그 어떤 여건에서도 가족주의를 {해체}할 만한 대안이 성숙된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가족주의는 아직도 우리의 소중한 전통이며 힘이다.

동시에 가족주의는 한국지성사의 요핵으로서 그 외연에 공의정신을 거느리고 있는것이므로 이미 민족의 영원한 가치로서도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한국민의 영원한 정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가족주의정신을 현재에 다시 굳건하게 하고 적극화 하되 동시에 많은 근대적 문제를 풀어가는 열린 자세로 개인 화합의 중심이 되도록 발전되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이안자-

The 1st. Haianist

Haianja D.J yu

 

 

 

 

 

 

 

하이안자의 원문참조

 

 

 

http://blog.naver.com/haianist/120002204974
오픈백과 디렉토리 : 사회, 문화 > 민족문화

한국을 가족주의 사회라고 정의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소위 근대화, 선진화,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가족주의가 "낡은 가치관" 혹은 '패거리문화'의 한 부분인 것으로 폄하되었던 경우가 있었던 것은 옥석을 가리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인류집단 가운데 가족을 중시하지 않는 문화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족중시의 내용이 다르고 그 전통이 다르고 그 의미부여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가족을 중심한 안정되고 행복한 삶이 인간의 기초적 행복의 조건임에도 특히 한국을 가족주의의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그 가족주의의 외연에 공적심성(公的心性)이라는 수양(修養)된 인격공간을 거느린다는 점에서 일반적 주의('ism')라든가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그치지 않는 강인한 지성적 전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족주의는 한국사상사(intellectual history of korea)의 일환이며 한국문화사(the civilization of korea)의 귀결이다. 동아시아적 문명(文明) 원어(原語)의 본질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역사상 형성된 것이며 한국지성사의 미래가 또한 그래야할 것이므로 일종의 역사주의(historicism)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이를 넘어서야 할 중요한 역사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부 근대화 지표를 추구하는 개혁 운동가들이 가족의 해체현상을 '근대적'인 것으로 수용하려는 중대한 오류가 일반적으로 확산되는 비역사적 추세가 일부 있으며, 또한 핵가족화 현상이라든가 이혼의 격증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인권평등이라는 일반적이고 비주체적인 잣대로 해석하여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호주제 페지운동이라든가 정치 경제 사회의 제부분에서 이른바 여성할당제라는 방식까지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여성참여를 증대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이 그 예가된다.

여성은 존중되어야 하나 한국 가족주의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역시 역사적으로 변화 발전해야 하며 그 어떤 움직임도 역사적 성찰을 회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지금 약화되어가는 가족주의 모습은 옳은 것인가를, 또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여 가족주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은 없는가를 생각할 때인것 같다.


한국 가족주의가 역사적이라고 보는 까닭은 역사상 그리고 지성의 전통에서 가족주의가 항시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성적 전통의 중심'으로 특징지워지는 한국 가족주의는 '탈이기주의(脫利己主義)'를 본질로하며 인(仁)의(義)라는 공의의 중심으로 인식돼왔었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는 열린 공간으로 가족주의가 자리매김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가족주의의 근본이념은 유교경전과 이념에 의해 지극히 정당화되었으므로 유교적 전통의 핵심이지만 우리는 과연 유교적 전통이 수립된 후에야 그와같은 가족주의 전통이 이차적으로 생겨났다고 볼 수는 없다. 가족주의는 유교적 전통 이전부터 강인하게 존속되어온 것이며 오히려 그 역사적 전통이 유교적 전범으로 수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유교이전부터 전승된 오랜 역사적 지성전통이라는 사실은 <<맹자>>에 나오는 순(舜)이라는 유교의 선구적 인격이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은 동아시아 역사상 의 이념을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전설상의 인물이다.그 인격이 동이족의 전통 위에 있다는 것을 맹자가 언급하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소개하는 순임금의 역사는 문왕(文王) 무왕(武王)주(周) 왕조의 건국 주체세력이 역시 동서이족(東西夷族) 출신이라는 언급과 함께 나온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기들 역사의 영역 가운데 있는 동이족이며 서이족이라고 주정하고 있으나 중국의 역사는 시종일관 이민족의 참여에 의해 발전해온 것이 사실이므로 중국민족과 이민족 사이의 문화접변(acculturation)문제는 별도의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 동아시아 문명의 한 중심적 특질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이족의 모태는 구이(九夷)였으며 그 일부가 중국영역 안으로 들어가 위대한 왕조를 건설하였던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직접적인 선조들은 만주지방에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며 한국 국가형성사를 지탱해왔다. 여러 민족이 각축하고 있었고 중국이라는 거대제국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으므로 만주시대의 민족적 삶은 위기로 연속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위험과 곤란을 극복할 수 있는 무엇보다 강한 힘을 주었던 것이 바로 가족주의 정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 해명태자호동왕자의 의연한 자결은 그런 가족주의 공의정신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이 국가적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하려는 것이듯이 가족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그이상의 의미가 있다. 개인과 가족의 안정 없이는 그 국가적 삶이 확고하고 편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중심주의는 어느정도 개인의 삶을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경우에는 고통을 줄 수도 있다.그러나 반대로 탈가족주의가 고통을 제거해주고 개인의 성취의욕과 가능성을 무한히 높여주는 것도 아니다.

개인과 가족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순임금의 시대에 이미 극명하게 노정되었었다. 그가 '들에 나아가 하늘을 보고 외쳐울었다'는 유명한 설화는 효이념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생활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대가족제가 이미 해체되었고 핵가족화하는 현상이 자리를 잡았지만 그 내면에 기족주의는 아직 큰 흐름으로서 강인하게 유지되고 있다. 역사적 전통이란 쉽게 변경될 수도 없고 변경되어도 안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 것이다.

지성적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균형된 사고와 행동을 필요로할 것이며 그 경우에 '개인의 행복과 자유로운 일상'을 위해 가족주의를 탈피하는 것이 그 정당한 방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역사상 그래왔지만 먼 미래에 까지도 가족주의는 우리의 중요한 힘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의 형성기에 화합된 가족주의의 힘으로 국가적 난관을 돌파하며 한국민족사를 건설해왔듯이 현재도 개인과 가족의 조화 균형의 힘으로 국가적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광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진 이웃나라라든가 강력한 무력으로 대륙을 종횡하는 침략세력에 비하여 한국은 좁은 국토 평화로운 국민성 높지 못한 경제력 등 제반 투쟁여건과 상황이 불리한 가운데 오로지 인격적 유대의 힘으로 그리고 정신과 이념의 굳건함으로 역동하는 역사무대를 극복해왔었고 가족주의는 그 원천이 되어왔었다.

지금 그 어떤 여건에서도 가족주의를 해체할 만한 대안이 성숙된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가족주의는 아직도 우리의 소중한 전통이며 힘이다.

동시에 가족주의는 한국지성사의 요핵으로서 그 외연에 공의정신을 거느리고 있는것이므로 이미 민족의 영원한 가치로서도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한국민의 영원한 정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가족주의정신을 현재에 다시 굳건하게 하고 적극화 하되 동시에 많은 근대적 문제를 풀어가는 열린 자세로 개인 화합의 중심이 되도록 발전되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 Haianja -

 
 
 
 
 

 
 
 
 
 
' 문 물 '


 

 

 

 

문물과 문명의 어의

 

 

歸去來辭(귀거래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자! 벼슬에서 물러나 내 집의 논밭으로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하고 있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을 것이냐? 이미 내가 잘못하여 스스로 벼슬살이를 했고 따라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괴롭혔거늘 어찌 혼자 한탄하고 슬퍼만 해야 하겠는가? 지난 일은 공연히 탓해야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또한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노라. 사실 내가 길을 잃고 헤매기는 했으나 아직은 그리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각성하여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 날의 벼슬살이가 잘못이었음도 깊이 깨달았노라.

 집으로 돌아가는 배는 출렁출렁 가볍게 옷자락을 타고 떠 가며, 표표히 부는 바람은 옷자락을 불어 날리고 있다. 어서 집으로 가고 싶은 심정으로 길가는 행인에게 앞으로 길이 얼마나 남았는가 묻기도 하고, 또 새벽 일찍 길에 나서며 아직도 새벽빛이 희끄무리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마침내 저 멀리 나의 집 대문과 지붕이 보이자, 나는 기뻐서 뛰었다. 머슴 아이가 길에 나와 나를 맞고, 어린 자식은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은 온통 잡초에 덮이어 황폐했으나,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는 시들지 않고 남아 있다.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술단지에는 아내가 정성드려 담근 술이가득차 있다.

 술단지와 술잔을 끌어 당기어 혼자서 자작하여 술을 마시며, 뜰의 나무 가지들을 보며 즐거운 낯으로 미소를 짓는다. 또 남쪽 창가에 몸을 실리고 남쪽들을 내다보며 마냥 활개를 펴고 의기양양한 기분이 되고, 참으로 사람은 무릎을 드리울 만한 좁은 내 집에서도 충분히 안빈낙도할 수 있음을 실감한다.

 전원을 매일 거닐며 손질을 하자 제법 운치있게 되었다. 또 대문 있기는 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노상 닫혀져 있다. 지팡이를 집고 이리저리 소요하다가 아무 곳이나 내키는 대로 앉아 쉬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높이 추켜 올리고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한다. 야심 없는 구름은 산 골짜기로부터 유연하게 높이 떠 오르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저녁에 제집으로 돌아올 줄 안다. 마침 해도 어둑어둑 저물어 들어가려 할 무렵,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대고 맴돌고 있노라.

 돌아왔노라! 이제부터는 세속적인 교제를 그만두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리!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리! 속세와 나는 서로가 어긋나고 맞지를 않거늘, 내 다시 수레를 타고 무엇을 찾아다닐까 보냐! 일가 친척들과 정이 넘치는 이야기를 기쁜 마음으로 주고 받으며, 한편 혼자 있을 때는 거문고나 책을 가지고 우울함을 해소한다.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으니, 앞으로는 서쪽 밭에서 농사를 지어야 할 거라고 말한다.

 포장친 수레를 타고 육로를 가기도 하고, 또 혹은 혼자서 조각배를 짓고 물길을 따라 멀리까지 농사를 지으러 간다.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구불구불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다시 이번에는 우툴두툴 높고 험한 산을 넘기도 한다. 나무들이 싱싱하니 즐거운 듯 뻗어나 자라고, 샘물들은 졸졸 솟아나 흐르기 시작한다.

 만물이 때를 만나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 좋다. 그러나 내 자신은 이렇게 새봄을 맞는 사이에 차츰 인생의 종점으로 다가가서 죽을 것이니 감개무량하게 느껴진다. 아! 이제는 나의 인생도 그만인가 보다! 내 몸을 이 세상에 맡기고 살 날도 앞으로 얼마나 될지? 그러나 어찌 나의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고 죽으나 사나 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러운 마음으로 욕심내고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현실적으로 나는 부귀도 바라지 않고 또 죽은 후에 천제가 사는 천국에 가서 살 것이라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때가 좋다 행각되면 혼자 나서서 거닐고, 또 때로는 지팡이를 세워 놓고 김매기도 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가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모름지기 천지조화의 원칙을 따라 죽음의 나라로 돌아가자! 또 천명을 감수해 즐기다면 그 무엇을 망설일 것이냐?

장기근 편역 도연명에서

돌아가리라!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니 어떻게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미 마음을 형체의 사역(使役)으로 삼았으니 어찌 실심하여 홀로 슬퍼하고만 있으리요? 지난 일은 바로잡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오는 일은 따를 수 있음을 알겠도다. 참으로 길을 잃었으나 그래도 멀지 않아서 오늘이 옳고 어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도다.

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떠오르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옷깃을 흩날리도다. 나그네에게 앞길을 물으니 새벽빛이 희미함을 한스러워하도다. 이윽고 내 집이 눈에 들어와 기뻐서 뛰어가노니, 심부름하는 아이는 반갑게 맞이하고 어린 것은 문 앞에서 기다리는도다. 세 가닥 뜰안 길은 황폐해져 가나 소나무와 국화는 오히려 예와 같구나.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가니 술이 있어 항아리에 가득하여 술병과 잔을 가져와 혼자서 잔질하다가 뜨락의 나뭇가지를 보고 웃음을 머금는다. 남쪽 창에 기대어 오만함을 부치니 무릎이나 펼 만한 방이 오히려 편안함을 알겠도다.

매일같이 정원을 거니는 것으로 취미를 삼고, 문이야 달았으되 언제나 잠겨 있다. 지팡이를 짚고서 거닐다가 쉬다가 가끔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 구름은 무심히 산등성이에서 피어 오르고,새는 날기에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아는구나. 햇빛은 가물가물 막 어두워지려 하는데 외로이 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대도다.

돌아가리라! 사귐을 그만두고 교유(交游)를 끊어야지.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으니 다시금 수레를 타고 무엇을 구하리요? 친척 간의 정담을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시름을 녹이노라. 농부가 내게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이제부터 서쪽 밭에서 일을 하게 되었구나. 혹은 휘장을 친 수레를 타고, 때로는 홀로 떠 있는 배의 노를 저어서, 깊은 산 골짜기의 시내를 찾고 험한 산길의 언덕을 넘으니, 나무는 즐거운 듯 꽃이 피려 하고 샘물은 졸졸졸 비로소 흘러 내린다. 만물이 제철 맞음을 부러워하면서 나의 삶이 끝나감을 느끼는도다.

그만두어라. 몸뚱이를 우주 안에 붙여 둠이 다시 몇 때나 되겠는가. 어찌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 두고 머무는 대로 맡기지 않고 어찌하여 서둘러 어디로 가고자 한단 말인가.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 아니며 황제 계신 서울이야 기약할 수 없도다. 좋은 시절 생각하며 외로이 걷기도 하고, 혹은 지팡이를 세우고서 김매고 북돋기도 하노라.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물에 다다라서 시도 짓노라. 애오라지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가니 무릇 천명을 즐기되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dia_bluve.gif 요점정리

circle01_blue.gif 지은이 : 도연명(陶淵明)
circle01_blue.gif 갈래 : 한시, 사부(辭賦)
circle01_blue.gif 연대 : 진나라 말기 ∼ 송나라 초기
circle01_blue.gif 성격 : 전원적(田園的), 낭만적
circle01_blue.gif 표현 : 운문·산문이 합쳐진 낭송체
circle01_blue.gif 구성 : 시간적, 순차적 구성
전원으로 돌아가려는 결심
고향에 돌아와 편안함을 느낌
전원 생활의 즐거움
세속의 삶과 전원 생활의 대조
전원으로 귀환한 생활과 작자의 인생관 제시
circle01_blue.gif 제재 : 자연과 고향의 정취
circle01_blue.gif 주제 : 자연으로 돌아가 전원 생활에서 만족을 느낌
circle01_blue.gif 출전 : <고문진보(古文眞寶)>
circle01_blue.gif 의의 : 전원시(田園詩)의 대표작이며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노장사상에 영향을 받아 자연 복귀의 인생관을 나타내고 있는데, 관직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자연을 즐기는 정취가 잘 드러난, 유교와 노장 사상(老莊思想)을 바탕에 깔고 있는 전원시이다.

 

dia_bluve.gif 내용 연구

형체(形體): 몸뚱이를 뜻함. 
교유(交游): 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함.
애오라지: 좀 부족하나마 겨우. 다만. 오직 
마음을 형체의 사역으로 삼았으니 :
마음을 몸뚱이가 부리게 했으니. 즉,먹고 살기 위해서 정신을 쓰게 했으니.도연명이 얼마 되지 않는 녹봉(祿俸)을 받기 위해서 억지로 벼슬을 한 심정을 밝히고 있다.
남쪽 창에 기대어∼편안함을 알겠도다. : 집에 오니 마음이 풍성해지고 좁은 방도 편안하다. 
세상이 나와 서로 맞지 않으니 ∼ 무엇을 구하리요? :
세상의 돌아가는 형세가 마땅치 않으니 벼슬을 해서 무엇하리오.
몸뚱이를 우주 안에 붙여 둠이 ∼ 몇 때나 되겠는가? : 목숨이 살아 있을 날이 몇 해나 남아 있겠는가.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가니 ∼ 의심하랴. :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니 삶을 즐기고, 안타깝게 여길 것이 없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奚  而獨悲    해추창이독비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知來者之可追    지내자지가추
實迷塗其未遠    실미도미기원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舟搖搖以輕     주요요이경향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정로
恨晨光之憙微    한신광지희미
乃膽衡宇載欣載奔 내첨형우재흔재분    
 僕歡迎         동복환영
稚子候門 三徑就荒 (치자후문 삼경취황
松菊猶存 携幼入室  송국유존 휴유입실
有酒盈樽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
(유주영준 인호상이자작 면정가이이안
倚南 以寄傲 審容膝之易安
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이안
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常關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遐觀
원일섭이성취 문수설이상관 책부로이류게 시교수이하관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景  以將入 撫孤松而盤桓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영예예이장입 무고송이반환
歸去來兮 請息交以絶游 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
귀거래혜 청식교이절유 세여아이상위 복가언혜언구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于西疇
열친척지정화 낙금서이소우 농인고여이춘급 장유사우서주
或命巾車 惑棹孤酒 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혹명건거 혹도고주 기요조이심학 역기구이경구
木欣欣以向榮 泉涓涓而始流 善萬物之得時 感吾生之行休
목흔흔이향영 천연연이시류 선만물지득시 감오생지행휴
已矣乎 寓形宇內復幾時 曷不委心任去留 胡爲乎遑遑欲何之
이의호 우형우내부기시 갈불위심임거류 호위호황황욕하지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征 或植杖而耘 
부귀비오원 제향불가기 회양신이고정 혹치장이운자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요승화이귀진 낙부천명복해의

 

dia_bluve.gif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도연명이 진나라 심양도 팽택 현령으로 재직하던 41세 때 지은 작품이다. 다섯 말 쌀의 봉급을 위해 상급 기관의 관리들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벼슬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결의를 술회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고향의 전원이 황폐해졌음을 걱정하여 거기에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집에 돌아간 그는 한적한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마음 속으로 즐거워 한다. 앞으로의 생활에서도 자연의 추이에 몸을 맡기고 유유자적하면서 살겠다는 뜻을 말한다. 안심 입명의 경지에 도달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또 어떤 분을 이 글을 진나라가 망한 다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지조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글의 마지막에서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가니 무릇 천명을 즐기되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한 대목에서는 도연명의 인생관이 나타나 있다.

 

dia_bluve.gif 심화 자료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辭는 중국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운문(韻文). 405년(진나라 의회 1) 그가 41살 때 마지막 관직이었던 팽택현(彭澤縣)의 영(令)자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의 심경을 노래한 것으로 초사체(楚辭體)를 따른 전문(全文) 240여 자(字)는 각운(脚韻)이 다른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로 시작되는 제l장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었고, 제2장은 집에 도착한 기쁨을 노래했다. 제3장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얻은 철학을 담았으며, 제4장은 자유를 누리면서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모습을 노래했다. 이 작품을 쓴 동기를 밝힌 서문에는 원래 성격에 맞지 않는 관직을 누이동생의 죽음을 구실로 그만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簫統)의 《도연명전(陶淵明傳)》에는, 감독관의 순시를 의관속대(衣冠束帶)하고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오두미(五斗米;적은 봉급)를 위해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 날로 사직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도연명의 기개를 나타내는 이러한 일화와 함께, 은둔(隱遁)을 선언한 일생의 한 절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도연명의 대표작이며 전원생활에의 지향을 노래한 문학으로서 소명태자의 《문선(文選)》에도 실려 있다. 후한(後漢) 장충(張衝)의 《귀전부(歸田賦;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삿일을 한다는 내용)》 등 그보다 앞선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후세 문학에 끼친 영향면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며 또한 많은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circle01_blue.gif 도연명 陶淵明 (365~427)

자(字)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 잠(潛).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江西省] 주장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晋)의 명장 도간(陶侃)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孟嘉)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鎭軍參軍) ·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펑쩌현[彭澤縣]의 현령(縣令)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퇴관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사전(史傳)에는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出迎)을 거절하고, “나는 5두미(五斗米)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4언체(四言體)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五言體)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민간인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스며나온 마음의 부르짖음이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귀족적 생활에서 풍겨나온 여유 있는 유희문학(遊戱文學)이 아니라 민간생활 그 자체를 노래한 문학이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가 있으며, 고담(枯淡)의 풍이 서려 있다. 형식면으로는 대구적 기교(對句的技巧)나 전거(典據) 있는 표현은 별로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謝靈運)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양(梁)나라의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서는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종(宗)”이라 평가하였으며,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풍은 당대(唐代)의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저광희(儲光羲)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그리고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는 《문선(文選)》에다 9 편을 수록하여 전집을 편집하였다. 이후 판본(版本) 및 주석서가 나왔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도화원기(桃花源記)》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 《수신후기(搜神後記)》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circle01_blue.gif 도화원기(桃花源記)

동진(東晋)의 태원연간(太元年間:376∼396)에 무릉(武陵)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도화림(桃花林) 속에서 길을 잃었다. 어부는 배에서 내려 산 속의 동굴을 따라 나아갔는데, 마침내 어떤 평화경(平和境)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논밭과 연못이 모두 아름답고, 닭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한가로우며, 남녀가 모두 외계인(外界人)과 같은 옷을 입고 즐겁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진(秦)나라의 전란을 피하여 그곳까지 온 사람들이었는데, 수백 년 동안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산다고 하였다.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곳의 이야기는 입밖에 내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당부를 어기고 돌아오는 도중에 표를 해 두었으나,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글의 배경에는 진인동(秦人洞)을 비롯한 실향민 부락의 전설이 담겨 있으며, 도연명이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을 유려하고 격조 높은 문장으로 그린 것이다. 이 글은 선경(仙境)의 전승(傳承)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 유토피아 사상은 후세의 문학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으로 가자

한국의 가족주의
오픈백과 디렉토리 : 인문, 사회과학 > 사회학
사회, 문화 > 민족문화

한국을 가족주의 사회라고 정의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소위 근대화, 선진화,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가족주의가 "낡은 가치관" 혹은 '패거리문화'의 한 부분인 것으로 폄하되었던 경우가 있었던 것은 옥석을 가리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인류집단 가운데 가족을 중시하지 않는 {문화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족중시의 내용이 다르고 그 전통이 다르고 그 의미부여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가족을 중심한 안정되고 행복한 삶이 인간의 기초적 행복의 조건임에도 특히 한국을 가족주의의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그 가족주의의 외연에 공적심성(公的心性)이라는 {수양(修養)}된 인격공간을 거느린다는 점에서 일반적 {주의('ism')}라든가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그치지 않는 강인한 지성적 전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족주의는 {한국사상사}(intellectual history of korea)의 일환이며 {한국문화사}(the civilization of korea)의 귀결이다. 동아시아적 {문명(文明)} 원어(原語)의 본질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역사상 형성된 것이며 한국지성사의 미래가 또한 그래야할 것이므로 일종의 {역사주의(historicism)}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이를 넘어서야 할 중요한 역사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부 {근대화} 지표를 추구하는 {개혁 운동}가들이 {가족의 해체현상}을 '{근대적}'인 것으로 수용하려는 중대한 오류가 일반적으로 확산되는 비역사적 추세가 일부 있으며, 또한 {핵가족화} 현상이라든가 이혼의 격증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인권평등}이라는 일반적이고 비주체적인 잣대로 해석하여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호주제 페지운동}이라든가 정치 경제 사회의 제부분에서 이른바 {여성할당제}라는 방식까지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여성참여}를 증대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이 그 예가된다.

여성은 존중되어야 하나 한국 가족주의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역시 역사적으로 변화 발전해야 하며 그 어떤 움직임도 역사적 성찰을 회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지금 약화되어가는 가족주의 모습은 옳은 것인가를, 또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여 가족주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은 없는가를 생각할 때인것 같다.


한국 가족주의가 역사적이라고 보는 까닭은 역사상 그리고 지성의 전통에서 가족주의가 항시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성적 전통의 중심'으로 특징지워지는 한국 가족주의는 '탈이기주의(脫利己主義)'를 본질로하며 {인(仁)}과 {의(義)}라는 {공의}의 중심으로 인식돼왔었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는 열린 공간으로 가족주의가 자리매김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가족주의의 근본이념은 {유교경전}과 이념에 의해 지극히 정당화되었으므로 유교적 전통의 핵심이지만 우리는 과연 유교적 전통이 수립된 후에야 그와같은 가족주의 전통이 이차적으로 생겨났다고 볼 수는 없다. 가족주의는 {유교}적 전통 이전부터 강인하게 존속되어온 것이며 오히려 그 역사적 전통이 유교적 전범으로 수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유교이전부터 전승된 오랜 역사적 지성전통이라는 사실은 <<맹자>>에 나오는 {순(舜)}이라는 유교의 선구적 인격이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은 동아시아 역사상 {효}의 이념을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전설상의 인물이다.그 인격이 동이족의 전통 위에 있다는 것을 {맹자}가 언급하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소개하는 순임금의 역사는 {문왕(文王)} {무왕(武王)} 등 {주(周) 왕조}의 건국 주체세력이 역시 동서이족(東西夷族) 출신이라는 언급과 함께 나온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기들 역사의 영역 가운데 있는 동이족이며 서이족이라고 주정하고 있으나 중국의 역사는 시종일관 이민족의 참여에 의해 발전해온 것이 사실이므로 중국민족과 이민족 사이의 {문화접변(acculturation)}문제는 별도의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 동아시아 문명의 한 중심적 특질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이족의 모태는 구이(九夷)였으며 그 일부가 중국영역 안으로 들어가 위대한 왕조를 건설하였던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직접적인 선조들은 만주지방에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며 한국 국가형성사를 지탱해왔다. 여러 민족이 각축하고 있었고 중국이라는 거대제국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으므로 만주시대의 민족적 삶은 위기로 연속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위험과 곤란을 극복할 수 있는 무엇보다 강한 힘을 주었던 것이 바로 가족주의 정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 {해명태자}나 {호동왕자}의 의연한 자결은 그런 가족주의 공의정신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이 국가적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하려는 것이듯이 가족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그이상의 의미가 있다. 개인과 가족의 안정 없이는 그 국가적 삶이 확고하고 편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중심주의는 어느정도 개인의 삶을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경우에는 고통을 줄 수도 있다.그러나 반대로 탈가족주의가 고통을 제거해주고 개인의 성취의욕과 가능성을 무한히 높여주는 것도 아니다.

개인과 가족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순임금의 시대에 이미 극명하게 노정되었었다. 그가 '들에 나아가 하늘을 보고 외쳐울었다'는 유명한 설화는 효이념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생활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대가족제}가 이미 해체되었고 {핵가족}화하는 현상이 자리를 잡았지만 그 내면에 기족주의는 아직 큰 흐름으로서 강인하게 유지되고 있다. 역사적 전통이란 쉽게 변경될 수도 없고 변경되어도 안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 것이다.

지성적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균형된 사고와 행동을 필요로할 것이며 그 경우에 '개인의 행복과 자유로운 일상'을 위해 가족주의를 탈피하는 것이 그 정당한 방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역사상 그래왔지만 먼 미래에 까지도 가족주의는 우리의 중요한 힘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의 형성기}에 화합된 가족주의의 힘으로 국가적 난관을 돌파하며 한국민족사를 건설해왔듯이 현재도 개인과 가족의 조화 균형의 힘으로 국가적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광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진 이웃나라라든가 강력한 무력으로 대륙을 종횡하는 침략세력에 비하여 한국은 좁은 국토 평화로운 국민성 높지 못한 경제력 등 제반 투쟁여건과 상황이 불리한 가운데 오로지 {인격적 유대}의 힘으로 그리고 정신과 이념의 굳건함으로 역동하는 역사무대를 극복해왔었고 가족주의는 그 원천이 되어왔었다.

지금 그 어떤 여건에서도 가족주의를 {해체}할 만한 대안이 성숙된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가족주의는 아직도 우리의 소중한 전통이며 힘이다.

동시에 가족주의는 한국지성사의 요핵으로서 그 외연에 공의정신을 거느리고 있는것이므로 이미 민족의 영원한 가치로서도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한국민의 영원한 정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가족주의정신을 현재에 다시 굳건하게 하고 적극화 하되 동시에 많은 근대적 문제를 풀어가는 열린 자세로 개인 화합의 중심이 되도록 발전되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이안자-

The 1st. Haianist

Haianja D.J yu

 

 

 

 

 

 

 

하이안자의 원문참조

 

 

 

http://blog.naver.com/haianist/120002204974
오픈백과 디렉토리 : 사회, 문화 > 민족문화

한국을 가족주의 사회라고 정의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소위 근대화, 선진화,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가족주의가 "낡은 가치관" 혹은 '패거리문화'의 한 부분인 것으로 폄하되었던 경우가 있었던 것은 옥석을 가리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인류집단 가운데 가족을 중시하지 않는 문화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족중시의 내용이 다르고 그 전통이 다르고 그 의미부여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가족을 중심한 안정되고 행복한 삶이 인간의 기초적 행복의 조건임에도 특히 한국을 가족주의의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그 가족주의의 외연에 공적심성(公的心性)이라는 수양(修養)된 인격공간을 거느린다는 점에서 일반적 주의('ism')라든가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그치지 않는 강인한 지성적 전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가족주의는 한국사상사(intellectual history of korea)의 일환이며 한국문화사(the civilization of korea)의 귀결이다. 동아시아적 문명(文明) 원어(原語)의 본질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역사상 형성된 것이며 한국지성사의 미래가 또한 그래야할 것이므로 일종의 역사주의(historicism)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이를 넘어서야 할 중요한 역사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부 근대화 지표를 추구하는 개혁 운동가들이 가족의 해체현상을 '근대적'인 것으로 수용하려는 중대한 오류가 일반적으로 확산되는 비역사적 추세가 일부 있으며, 또한 핵가족화 현상이라든가 이혼의 격증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인권평등이라는 일반적이고 비주체적인 잣대로 해석하여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호주제 페지운동이라든가 정치 경제 사회의 제부분에서 이른바 여성할당제라는 방식까지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여성참여를 증대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이 그 예가된다.

여성은 존중되어야 하나 한국 가족주의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역시 역사적으로 변화 발전해야 하며 그 어떤 움직임도 역사적 성찰을 회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지금 약화되어가는 가족주의 모습은 옳은 것인가를, 또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여 가족주의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방식은 없는가를 생각할 때인것 같다.


한국 가족주의가 역사적이라고 보는 까닭은 역사상 그리고 지성의 전통에서 가족주의가 항시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성적 전통의 중심'으로 특징지워지는 한국 가족주의는 '탈이기주의(脫利己主義)'를 본질로하며 인(仁)의(義)라는 공의의 중심으로 인식돼왔었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는 열린 공간으로 가족주의가 자리매김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가족주의의 근본이념은 유교경전과 이념에 의해 지극히 정당화되었으므로 유교적 전통의 핵심이지만 우리는 과연 유교적 전통이 수립된 후에야 그와같은 가족주의 전통이 이차적으로 생겨났다고 볼 수는 없다. 가족주의는 유교적 전통 이전부터 강인하게 존속되어온 것이며 오히려 그 역사적 전통이 유교적 전범으로 수용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유교이전부터 전승된 오랜 역사적 지성전통이라는 사실은 <<맹자>>에 나오는 순(舜)이라는 유교의 선구적 인격이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은 동아시아 역사상 의 이념을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전설상의 인물이다.그 인격이 동이족의 전통 위에 있다는 것을 맹자가 언급하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소개하는 순임금의 역사는 문왕(文王) 무왕(武王)주(周) 왕조의 건국 주체세력이 역시 동서이족(東西夷族) 출신이라는 언급과 함께 나온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기들 역사의 영역 가운데 있는 동이족이며 서이족이라고 주정하고 있으나 중국의 역사는 시종일관 이민족의 참여에 의해 발전해온 것이 사실이므로 중국민족과 이민족 사이의 문화접변(acculturation)문제는 별도의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 동아시아 문명의 한 중심적 특질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이족의 모태는 구이(九夷)였으며 그 일부가 중국영역 안으로 들어가 위대한 왕조를 건설하였던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직접적인 선조들은 만주지방에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며 한국 국가형성사를 지탱해왔다. 여러 민족이 각축하고 있었고 중국이라는 거대제국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으므로 만주시대의 민족적 삶은 위기로 연속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위험과 곤란을 극복할 수 있는 무엇보다 강한 힘을 주었던 것이 바로 가족주의 정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 해명태자호동왕자의 의연한 자결은 그런 가족주의 공의정신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


국민이 국가적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하려는 것이듯이 가족적 삶을 영위하는 것은 그이상의 의미가 있다. 개인과 가족의 안정 없이는 그 국가적 삶이 확고하고 편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중심주의는 어느정도 개인의 삶을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경우에는 고통을 줄 수도 있다.그러나 반대로 탈가족주의가 고통을 제거해주고 개인의 성취의욕과 가능성을 무한히 높여주는 것도 아니다.

개인과 가족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순임금의 시대에 이미 극명하게 노정되었었다. 그가 '들에 나아가 하늘을 보고 외쳐울었다'는 유명한 설화는 효이념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생활환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대가족제가 이미 해체되었고 핵가족화하는 현상이 자리를 잡았지만 그 내면에 기족주의는 아직 큰 흐름으로서 강인하게 유지되고 있다. 역사적 전통이란 쉽게 변경될 수도 없고 변경되어도 안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 것이다.

지성적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균형된 사고와 행동을 필요로할 것이며 그 경우에 '개인의 행복과 자유로운 일상'을 위해 가족주의를 탈피하는 것이 그 정당한 방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역사상 그래왔지만 먼 미래에 까지도 가족주의는 우리의 중요한 힘의 중심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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